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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연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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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손연의 난은 238년 요동 지역의 공손연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자립을 시도한 사건이다. 배경으로 요동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고, 공손씨는 후한 말부터 이 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공손연은 오나라와 연합하려다 배신하고, 스스로 연왕을 칭하며 위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위나라는 사마의를 보내 토벌했고, 공손연은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위나라의 요동 지배를 강화하고, 고구려, 왜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마씨의 권력 강화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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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연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사마의의 요동 원정
시기238년 6월 ~ 238년 9월 29일
장소랴오허 유역, 랴오닝성, 중국
결과조위의 결정적인 승리, 연나라 멸망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위
모용 선비
고구려
교전국 2연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조위사마의
관구검
호준
류흔
선우사
모용 모호바
고구려 관리
연나라공손연
비연
양좌
병력 규모
조위40,000명
고구려: 수천 명
연나라수만 명 (조위보다 많음)

2. 배경

요동의 공손탁의 손자이자 공손강의 아들인 공손연은 숙부 공손공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228년 위나라 황제 조예는 공손연을 양렬장군 요동 태수로 봉했다.[6]

공손씨는 후한 시대부터 요동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역대 왕조는 요동을 변방으로 여겨 주변 이민족과의 교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손씨는 이 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후한 말기의 전란을 거쳐 삼국이 정립된 후, 각국은 국익과 인접국 견제를 위해 변방 부족과의 교류를 시도하게 된다.

당시 중국은 조위, 촉한, 동오 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중 요동과 가장 가까운 위나라가 공손연의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위나라는 공손연의 쿠데타에 대응하여 요동 침략을 고려하기도 했다.[6] 동오의 군주 손권은 공손연의 충성을 얻어 조위를 양면 공격하려 했고, 여러 차례 사신단을 황해를 건너 요동으로 보냈다. 위나라는 사신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산둥반도 끝에 위치한 성산에서 요격하기도 했지만, 공손연은 이미 손권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7]

그러나 공손연은 먼 나라와 동맹을 맺고 강력한 이웃을 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마음을 바꾸었다. 오나라 사신단이 도착했을 때, 공손연은 보물을 빼앗고 주요 사신들을 살해한 후 그들의 머리와 일부 물품을 조위 조정에 보내 호의를 다시 사려고 했다.[8] 는 요동에 주하를 파견하려 했으나, 위의 전예에게 패배했다. 공손연은 이를 이용하여, 손권에게 사절을 보내 오에 공순하는 척하면서도, 오의 사자를 습격하고, 그 수급을 위로 보냄으로써, 조예로부터 낙랑공과 전단권을 얻었다. 공손연의 배신에 격노한 손권은 토벌군을 파견하려 했으나, 신하 설종의 반대로 단념했다.

237년, 손권은 고구려와 연합하여 요동으로 직접 출정하려 했다. 위는 관구검을 파견하여 이에 대응했고, 관구검이 선비의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에 주둔시키자, 손권은 신하들의 반대로 출정을 포기했다. 위는 공손연에게 상경하여 조정에 나올것을 명했지만, 공손연은 이를 거부하고 군사를 일으켜 요수에서 관구검을 격퇴했다.

2. 1. 지정학적 위치와 주변국과의 관계

요동은 현재의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유주에 속했으며, 동한 제국의 북동쪽 변두리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오환선비 등 유목민족이, 동쪽으로는 고구려부여가 접경해 있었다.[4]

공손씨 정권은 이러한 주변국들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하며 세력을 유지했다. 특히 고구려는 공손씨 정권의 주요 경쟁 세력이었다. 공손강고국천왕 사후 계승 문제에 개입한 이후 고구려는 공손씨의 적이 되었으며, 수도를 지안시의 환도산성으로 옮겨야 했다.[9]

동오의 손권공손연의 충성을 얻어 조위를 양면 공격하려 했으나, 공손연은 오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조위에 보내는 등 배신했다.[8]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들을 돕고, 담비 가죽 공물을 보내 관계 발전을 꾀했다. 그러나 조위는 유주자사 왕웅을 통해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고, 동천왕은 오나라에서 위나라로 노선을 변경, 오나라 사신들을 처형하고 그 머리를 관구검에게 보냈다.[10][11]

2. 2. 공손연의 배신과 독립 선언

228년 요동 공손탁의 손자이자 공손강의 아들인 공손연은 숙부 공손공이 뒤를 잇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그 자리를 빼앗았고 위나라의 황제 조예에 의해 양렬장군 요동 태수로 봉해졌다.[12]

이후 대사마에 봉해졌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237년 반대하던 가범윤직을 처형하고 스스로를 연왕이라 칭하고 연호를 고쳐 소한이라 했으며 궁전을 세우고 관직을 두며 북방을 어지럽혔다.[14]

공손연은 명목상으로는 조위의 신하였지만, 오나라와 잠깐 밀회를 나누고 위나라에 대한 노골적인 비방을 하여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가비능의 선비 반란이 최근 진압되기는 했지만, 야만족의 침략에 대한 완충 지대인 요동의 위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12] 따라서 그 수장인 공손연의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분명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실 군대에 굴욕을 안긴 공손연은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 상반되는 일련의 행동에서, 공손연은 한편으로는 사면을 받기 위해 위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연왕(燕王)의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통치에 연호인 소한(紹漢)을 정했는데, 이는 "한나라를 잇는다"는 의미였다. 이는 그의 평화 노력을 두 가지 이유로 문제시했다. 첫째, 연호를 선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황제에게만 해당되는 관행이므로, 황제의 지위를 주장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둘째, 연호 자체는 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한 것이 어떤 식으로든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다.[14]

3. 전투 과정

유주 자사 관구검의 보고를 받은 위나라 조정은 공손연 토벌을 결정했다. 공손연은 비연을 대장군, 양조를 선봉장으로 삼아 15만 대군을 일으켜 중원으로 진격했다. 이에 사마의조예에게 요청하여 기병과 보병 4만을 이끌고 호준을 선봉으로 삼아 요동에 영채를 세웠다.

비연과 양조는 영채를 공격했으나, 사마의는 하후패하후위에게 군사를 주어 요수 가에 매복시켰고, 결국 비연과 양조는 크게 패했다. 이후 비연은 하후패에게 죽임을 당했고, 공손연은 양평성으로 후퇴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가을비가 한 달 내내 내렸고, 좌도독 배경이 사마의에게 영채를 앞산 위로 옮길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우도독 구련이 같은 제안을 했지만, 사마의는 그를 처형했다.

사마의는 조정에 사자를 보내 군량을 요청했고, 공손연은 식량이 떨어지자 국상 왕건과 어사대부 유보를 보내 항복할 뜻을 전했으나, 사마의는 이들을 처형했다. 공손연은 시중 위연을 다시 보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

결국 공손연은 아들 공손수와 함께 성을 탈출하려 했으나, 호준, 장호, 악침, 하후패, 하후위에게 포위되어 사마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호준이 먼저 양평성에 입성하여 공손연의 가족과 그와 공모한 관리 70명을 색출하여 처형했다. 사마의는 민심을 수습하고 그 지역 일대를 정비한 후 낙양으로 회군하여 공손연의 난을 완전히 평정했다.

한편, 239년 손권은 양두, 정주, 손이를 보내 요동의 목양성(여순구)에서 위나라 장지, 고려 등을 격파하고, 그 남녀를 포로로 잡아 귀국했다.

3. 1. 요수 전투

238년, 위나라 황제 조예사마의에게 4만여 명의 병사를 주어 공손연을 정벌하라고 명했다. 공손연은 비연, 양조 등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주어 요수에 파견했다. 사마의가 요동에 도착하자 비연이 공격했지만, 사마의는 호준 등을 보내 비연을 격파했다.[23][24]

공손연은 요수에 수십 리(『삼국지』에는 20리, 『진서』에는 6~70리 정도로 기록)의 참호를 파고 사마의의 군대를 맞이했다.[23][24] 요수의 공손연 방어 진지가 견고하다고 판단한 사마의는 동남쪽으로 퇴각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공손연의 수도인 양평을 공격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에 속은 팽연과 그의 군대는 서둘러 남쪽으로 향했고, 호준은 적을 유인하여 강을 건너 팽연의 진영을 돌파했다.[1] 한편, 사마의는 비밀리에 위나라 주력을 요하 북쪽으로 이끌었다. 그는 강을 건너자 다리와 배를 불태우고 강을 따라 긴 방어선을 만들고 양평으로 향했다.[26]

공손연은 요수의 군대를 철수시켜 수도를 방어하게 했지만, 수산에서 사마의에게 대패하고 양평성에 포위되었다.[27]

3. 2. 양평성 함락

사마의는 양평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채광, 갈고리 사다리, 공성퇴, 공성탑, 투석기 등 다양한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밤낮으로 공격을 이어갔다.[21][33][34]

7월에 시작된 여름 몬순으로 인해 한 달 넘게 비가 쏟아졌고, 요하가 범람하여 한때 포위가 느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포위를 풀라는 부하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하여 공손연을 안심시키고 성 안의 식량을 고갈시키는 전략을 택했다.[28]

비가 그치자 사마의는 다시 맹공을 가했고, 장기간의 포위와 기근으로 인해 양평성 내에서는 인육을 먹는 참혹한 상황까지 벌어졌다.[38] 양조를 비롯한 많은 요동 장군들이 사마의에게 항복했다.

9월 3일, 혜성이 관측되자 요동 진영은 멸망의 징조로 여기고 크게 동요했다. 공손연은 국상 왕건과 어사 유보를 보내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마의는 이들을 처형하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35] 다시 시중 위연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만, 사마의는 "이제 묶여서 올 생각이 없으니 죽음을 택하려는 것이다. 인질을 보낼 필요가 없다."라며 거절했다.[36][37]

결국 9월 29일, 굶주림에 지친 양평성은 함락되었다. 공손연은 아들 공손수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으나, 량수(梁水, 현재의 태자하)에서 사마의의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39]

3. 3. 위나라의 강경 진압

사마의는 양평성을 점령한 후, 공손연 정권에 협력한 자들을 대규모로 숙청했다.[41][42] 공손연의 반란 정권에서 관직을 맡았던 1,0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처형되었고, 15세 이상의 남성 7,000명 또한 처형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거대한 언덕처럼 쌓여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41][42] 학살 이후, 사마의는 생존자들을 사면하고, 위나라와의 전쟁을 반대했던 공손연의 부하인 윤직(倫直)과 가범(賈範)을 사후에 복권시켰으며, 전복된 공손공을 감옥에서 석방했다.[43][44]

4. 영향

공손연의 멸망으로 위나라는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동방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사마의의 강경 진압은 현지 주민들의 반발을 샀고, 장기적으로는 요동 지역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공손연 세력의 멸망은 위나라와 고구려의 직접적인 충돌을 야기했고, 왜국이 위나라에 조공을 하게 되는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4. 1. 고구려-위 전쟁

공손연 세력의 멸망은 위나라와 고구려의 직접적인 충돌을 야기했다.[53] 242년, 고구려는 요동과 현도 군의 중국 정착지를 약탈하여 위나라의 분노를 샀다.[53] 244년, 위나라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다.[53]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큰 타격을 입고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53]

4. 2. 왜의 조공

239년 이른 시기에, 왜국 여왕 히미코가 위나라 조정에 사절단을 처음으로 파견했다.[52] 공손연의 멸망으로 중국과 동쪽 민족들 사이의 장벽이 사라졌다.

4. 3. 사마씨의 권력 강화

사마의는 요동 정벌에서 승리한 후, 공손연 정권 가담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공손연의 반란 정권에서 관직을 맡았던 1,000~2,000명과 14세 이상 요동 군인 7,000명을 처형하고 그 시신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다.[41][42] 반면, 위나라와 전쟁을 반대했던 공손연의 부하 윤직(倫直)과 가범(賈範)은 사후 복권시키고 공손공을 석방했다.[43][44] 또한 59세 이상 위나라 군인들을 제대시켜 군대를 이끌고 귀환했다.[45][46]

겨울 추위에 군사들이 따뜻한 옷을 요구했으나, 사마의는 '루'(襦)가 위나라 정부 재산이므로 허가 없이 배포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47]

이 원정으로 위나라는 4만 가구, 약 30만 명의 인구를 얻었지만,[48][49] 사마의는 이들을 중국 중부로 이주시키도록 명령했다. 239년 오나라 함대가 요동 남부를 공격하자, 위나라 조정은 해안 지역 주민들을 산둥으로 대피시켜 요동 인구 감소를 가속화했다. 비슷한 시기, 선비족 추장 모후바가 공손연에 대항한 공로를 인정받아 요동 북부에 정착하면서, 서진 초에는 중국인 가구 수가 5,400호로 줄어들었다.[50] 서진 멸망 후, 요동은 전연을 거쳐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사마의와 위나라 조정의 정책으로 인해 중국인 존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51]

한편, 공손연 정권 멸망은 왜국 여왕 히미코가 위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다.[52] 고구려는 위나라와 동맹이 끝나고 242년 요동과 현도 군을 약탈하면서 244년 고구려-위 전쟁이 발발했다. 위나라는 고구려를 초토화시키고 부여와 우호적 관계를 재확립했다.[53][54]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마의의 요동 정복이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요수 전투에서 사마씨는 위나라 군권을 장악했고, 이는 훗날 서진 성립의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5. 대중문화

코에이의 게임 진 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이 사건은 중요한 전투로 다뤄진다. 특히 7번째 작품에서 진나라 스토리 라인에 새롭게 추가된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Gardiner (1972B)
[2] 서적 Gardiner (1972B)
[3] 논문 Fang
[4] 서적 Gardiner (1972A)
[5] 서적 Gardiner (1972A)
[6] 서적 Gardiner (1972B)
[7] 서적 Gardiner (1972B)
[8] 서적 Gardiner (1972B)
[9] 서적 Introduction to Asian civilizations: Sources of Korean Tradition: Volume One: From Early Times Through the Sixteenth Centur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
[10] 서적 Gardiner (1972B)
[11] 서적 Korea and Japan in East Asian History: A Tripolar Approach to East Asian History Kudara International 2006
[12] 서적 Gardiner (1972B)
[13] 서적 Gardiner (1972B)
[14] 서적 Gardiner (1972B)
[15] 논문 Fang
[16] 논문 Fang
[17] 간행물 Jin Shu vol. 1
[18] 논문 Fang
[19] 간행물 Jin Shu vol. 1
[20] 논문 Chen
[21] 서적 Gardiner (1972B)
[22] 논문 Fang
[23] 논문 Fang
[24] 간행물 Jin Shu vol. 1
[25] 논문 Fang
[26] 논문 Fang
[27] 간행물 Jin Shu vol. 1
[28] 간행물 Jin Shu vol. 1
[29] 논문 Fang
[30] 간행물 Jin Shu vol. 1
[31] 간행물 Jin Shu vol. 1
[32] 서적 Gardiner (1972B)
[33] 논문 Fang
[34] 간행물 Jin Shu vol. 1
[35] 서적 Gardiner (1972B)
[36] 서적 Fang, p. 577
[37] 서적 Jin Shu vol. 1
[38] 서적 Gardiner (1972B), pp. 172, 195 note 94
[39] 서적 Jin Shu vol. 1
[40] 서적 Ikeuchi, pp. 87-88
[41] 서적 Gardiner (1972B), pp. 172, 195-196 note 97
[42] 서적 Jin Shu vol. 1
[43] 서적 Fang, p. 575
[44] 서적 Jin Shu vol. 1
[45] 서적 Fang, p. 598 note 22
[46] 서적 Jin Shu vol. 1
[47] 서적 Jin Shu vol. 1
[48] 서적 Fang, p. 597
[49] 서적 Jin Shu vol. 1
[50] 서적 Gardiner (1972B), p. 173
[51] 서적 Gardiner (1972B), p. 174
[52] 서적 Gardiner (1972B), p. 175-176
[53] 간행물 Control or Conquer? Koguryǒ's Relations with States and Peoples in Manchuria 2007
[54] 서적 Gardiner (1972B),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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