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실베스테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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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베스테르 2세는 10세기 후반과 11세기 초에 활동한 프랑스 출신의 학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다. 본명은 제르베르(Gerbert)로, 999년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랭스 대성당 학교의 교사, 라벤나 대주교 등을 역임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으로, 힌두-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도입하고, 주판과 천문학 연구에 기여했다. 교황 재위 기간 동안에는 성직 매매 방지, 동유럽 선교 등 종교 개혁을 추진했으며,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1세에게 왕관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마법사라는 전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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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실베스테르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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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함 | 로마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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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실베스테르 2세 |
본명 | 제르베르 (Gerbert) |
다른 이름 | 랭스 또는 라벤나 또는 오베르뉴의 제르베르 지베르 |
출생 | 년경 |
출생지 | 벨리아크(?), 아키텐 공국, 프랑스 |
사망 | 1003년 5월 12일 ( 57세)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직위 | |
교황 재임 시작 | 999년 4월 2일 |
교황 재임 종료 | 1003년 5월 12일 |
이전 교황 | 그레고리오 5세 |
다음 교황 | 요한 17세 |
성직 수임 | 991년 |
소속 교회 | |
교회 | 가톨릭 교회 |
2. 생애
제르베르는 946년경 프랑스 캉탈주 생시몽 코뮌 인근 베리악 마을에서 태어났다.[4] 963년경 오리악의 성 제랄도 수도원에 들어갔다.[42] 967년 바르셀로나의 보렐 2세 백작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원장은 백작에게 제르베르를 스페인에서 수학과 아라비아 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이후 제르베르는 비크의 주교 아토의 지도 아래 산타 마리아 데 리폴 수도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정된다.[42]
보렐 2세는 알안달루스와의 전쟁에서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코르도바에 사절단을 보냈고, 아토 주교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제르베르는 아토에게서 아랍 군주들이 과학과 문학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969년 제르베르는 보렐 2세와 함께 로마로 순례를 떠나 교황 요한 13세와 오토 1세를 만났다. 요한 13세의 추천으로 오토 1세는 제르베르를 오토 2세의 개인 교사로 채용했고, 몇 년 후 랭스 대성당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제르베르는 아달베론 대주교에 의해 랭스 대성당 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 973년 오토 2세는 제르베르를 보비오 수도원 아빠스 겸 백작으로 임명했지만, 수도원은 폐허가 되어 랭스로 돌아가야 했다.
983년 오토 2세 사후, 제르베르는 위그 카페를 지지하며 로테르의 로렌 지방 탈환 시도에 반대했다. 987년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카롤링거 왕조는 막을 내렸다.
989년 아달베론 사후, 위그 카페는 로테르의 사생아 아르눌프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했다. 991년 아르눌프는 반역 혐의로 파면되고 제르베르가 새 주교로 선출되었으나, 교구 내 반발로 교황 요한 15세는 제르베르의 성무 집행을 일시 중단시켰다. 995년 시노드에서 아르눌프의 파면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제르베르는 오토 3세의 교사로 활동했고, 998년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 의해 라벤나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999년 오토 3세의 지지로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실베스테르 1세를 따라 실베스테르 2세로 명명했다. 교황이 된 후,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직을 재확인해주고, 성직매매와 축첩 등 교회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1001년 로마 시민들의 반발로 오토 3세와 실베스테르 2세는 라벤나로 피신했다. 오토 3세는 로마를 다시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002년 사망했다. 실베스테르 2세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하여 라테라노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제르베르는 946년경 프랑스 캉탈주 생시몽 코뮌 인근 베리악 마을에서 태어났다.[4] 963년경 오리악의 성 제랄도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라이문드 수도사의 제자가 되었다.[6] 967년 바르셀로나 백작 보렐 2세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원장은 백작에게 제르베르를 스페인으로 데려가 수학과 아랍 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42]이후 제르베르는 비크의 주교 아토의 지도 아래 바르셀로나와 코르도바 등지에서 공부하며 아랍 학문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6] 특히 코르도바는 당시 유럽의 지적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알 하캄 2세의 도서관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8] 제르베르는 이곳에서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8]
2. 2. 랭스 대성당 학교 교사
969년 제르베르는 보렐 2세와 함께 로마로 순례를 떠나 교황 요한 13세와 오토 1세 황제를 만났다.[42] 요한 13세의 추천으로 오토 1세는 제르베르를 자신의 아들(훗날의 오토 2세)의 개인 교사로 채용했다.[42] 몇 년 후, 제르베르는 랭스 대성당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랭스 대주교 아달베론에 의해 대성당 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다. 983년 오토 2세에 의해 보비오 수도원의 아빠스 겸 백작으로 임명되었으나, 수도원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곧 랭스로 돌아왔다.2. 3. 랭스 대주교 시절과 교황 선출
983년 오토 2세가 사망한 후, 제르베르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985년, 위그 카페를 지지하며 로테르의 로렌 지방 탈환 시도에 반대했다.[24] 987년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카롤링거 왕조는 막을 내렸다.[24]989년 1월 23일 아달베론 대주교가 사망하자,[25] 위그 카페는 로테르의 사생아인 아르눌프를 랭스 대주교로 임명했으나,[11] 아르눌프는 991년 왕에 대한 반역 혐의로 파면당하고 제르베르가 새 주교로 선출되었다.[24] 제르베르의 랭스 대주교 착좌에 대한 반발이 거세자 교황 요한 15세는 특사를 파견해 그의 성무 집행을 일시 중단시켰다.[24] 995년 시노드에서 아르눌프의 파면이 무효라고 선언되었다.[24]
이후 제르베르는 오토 3세의 교사로 활동했으며,[24] 998년, 오토 3세의 사촌인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 의해 라벤나 대주교로 서임되었다.[24] 999년, 오토 3세의 지지로 교황 그레고리오 5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24] 제르베르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조언자였던 교황 실베스테르 1세를 본받아, 자신의 새 이름으로 실베스테르 2세를 선택하였다.[24] 교황이 된 직후, 실베스테르 2세는 과거 자신과 대립했던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직을 재확인해 주었다.
교황 요한 15세는 프랑스 지방 교회주의의 독주에 대항하여 제르베르를 파문했다. 이 파문은 로베르 2세가 개최한 쉘 교회 회의에서 무효로 처리되었다(994년). 요한 15세에 의한 무종 교회 회의(995년)에 제르베르는 단독으로 출석하여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제르베르는 교황에게 직접 주장하려고 했지만, 요한 15세가 로마 유력 귀족 크레센티우스 2세에 의해 추방당하자, 황제 오토 3세의 거성 마그데부르크로 향해 황제의 로마 진군에 수행했다. 이때부터 제르베르는 오토 3세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 입성 전에 요한 15세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황제는 조부 오토 1세의 증손자 브루노를 교황 그레고리오 5세로 즉위시키고(996년 5월 3일), 로마 입성 후 그레고리오 5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았다(같은 해 5월 21일). 대관식 며칠 후에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좌 복귀가 의결되었고, 제르베르는 대주교좌 찬탈자로 비난받았다.
위그 카페가 사망(996년 10월 23일)한 후 프랑스 왕이 된 로베르 2세는 블루아 백작 티보 2세의 미망인 베르트와 결혼했지만, 로베르와 베르트는 사촌 관계였기 때문에 그레고리오 5세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파문했다. 이에 로베르 2세는 997년 아르눌프를 랭스 대주교로 복위시키고 아르눌프로부터 결혼 인가를 받으려 했다. 998년 제르베르는 오토 3세로부터 라벤나 대주교 자리를 받았고 황제의 문서국장으로서 황제의 조언자가 되었다. 라벤나 대주교로서 시모니아 금지 등 교회 개혁을 추진했으며, 로베르 2세를 비난하는 칙서에 교황명의 다음으로 서명했다.
999년 그레고리오 5세가 사망하자, 오토 3세는 제르베르를 후임으로 추대했고, 제르베르는 999년 4월 2일 실베스테르 2세로 교황에 즉위한다. 실베스테르라는 이름은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세례를 베푼 교황 실베스테르 1세를 본뜬 것이다.
2. 4. 교황 재위와 죽음
실베스테르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과거 자신과 껄끄러운 상대였던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직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25] 교황으로서 그는 성직매매와 성직자 축첩 등 교회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사생활에 흠이 없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만이 주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1001년 로마 시민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오토 3세 황제와 실베스테르 2세는 라벤나로 급히 몸을 피신하였다.[24] 오토 3세는 로마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두 차례나 원정길에 올랐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리고 1002년 제3차 원정대를 이끌다가 사망하였다.[24] 오토 3세가 사망하자 실베스테르 2세는 바로 로마로 돌아왔지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은 여전히 로마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24] 실베스테르 2세는 로마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안장되었다.[24]
3. 학문적 업적
제르베르는 당대에 가장 저명한 과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그는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 네 가지 학문 분야(사과)에 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삼학(문법, 논리, 수사)을 활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왈리드 아미네 살합은 제르베르가 유럽에 이러한 교육 방식을 다시 도입한 것은 이슬람교 치하 스페인(알안달루스)의 코르도바 마드라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43]
랭스에 있을 당시 그는 공기를 수동으로 펌프질해야 했던 이전의 모든 악기를 뛰어넘는 놋쇠 파이프를 갖춘 수력식 오르간을 만들었다. 984년 제르베르는 바르셀로나의 루피투스에게 서신을 보내 점성술과 천문학에 관한 책 한 권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역사학자 S. 짐 테스터는 제르베르가 점성술과 천문학이라는 두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44] 그로부터 50년 뒤에 헤르마누스 콘트락투스에 의해 편집된 천문관측기구 아스트롤라베에 대한 설명서의 유력한 저자 가운데 한 명으로 제르베르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제르베르는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된 이후에도 교리에 관한 논문인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De corpore et sanguine Domini)''를 집필했다. 그의 저술은 ''라틴어 총서''(Patrologia Latina) 제139권에 인쇄되었다.
실베스테르 2세는 보에티우스를 숭배하여, 이성으로 감정과 외부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그의 사상을 실천했다. 보에티우스의 저작과 번역·주석서를 이용하여 자유 7과의 주로 삼학을 가르쳤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키케로 번역의 『토피카』도 보에티우스의 주석이 들어간 것이었다. 실베스테르 2세가 산술에 중점을 둔 것도 산술을 사과의 첫 번째로 삼는 보에티우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교육자로서 실베스테르 2세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여 산술 또는 기하학에서는 주판을, 천문학에서는 천구의를 사용했다. 음악에서는 일현금을 이용하여 음계와 화음의 수학적 관찰을 행했다. 수사학에서는 토론을 벌였으며, 도식을 사용하여 해설했다.
그의 저술 목록은 다음과 같다.
분야 |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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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 |
교회 | |
서신 | |
기타 |
3. 1. 힌두-아라비아 숫자와 주판의 재도입
제르베르는 힌두-아라비아 숫자를 배워 그 지식을 주판에 적용했지만, 찰스 자이페에 의하면 숫자 0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45] 12세기 역사학자 맘스베리의 윌리엄에 의하면, 제르베르는 스페인 아랍에서 주판으로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을 얻었다고 한다. 제르베르가 유럽에 재도입한 주판은 랭스의 방패 제조업자가 동물의 뿔로 만든 27선 주판으로, 1부터 9까지의 숫자(0은 비어있는 세로단으로 대체)와 천여 개의 부호로 구성되어 있었다.[46] 제르베르의 제자에 의하면, 그는 당시 사람들이 로마 숫자만 사용해서 하기 어려웠던 계산을 주판으로 신속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46] 제르베르의 재도입으로 주판은 11세기에 다시 한 번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3. 2. 천문학
제르베르는 당대에 가장 저명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문명을 통해 혼천의를 라틴 유럽에 재도입했다.[47] 제르베르가 들여온 혼천의에 대한 정보는 그의 옛 제자이자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랭스에서 함께 수도 생활을 한 리셰의 증언과 제르베르가 자신의 옛 제자들과 동료인 콘스탄티누스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48]
리셰는 제르베르가 별들이 밤하늘을 사선으로 가로지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진술하였다. 리셰는 제르베르가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칠 때 혼천의를 시각 자료로 사용했으며, 또 혼천의에 어떻게 동그라미와 표시를 남겼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먼저 [제르베르는] 목재로 만든 평범한 구체를 보여주었다. … 그는 눈에 보이는 별들을 보이지 않는 별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그리스인들은 수평선, 라틴인들은 지평선이라고 부르는 일직선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수평선 위에 별들이 뜨고 진다는 사실을 실습을 통해 타당하게 입증한 그는 별자리들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기 위해 자연 그대로 표시하였다. … 그는 혼천의를 이등분하여 튜브는 지름을, 한쪽 끝은 북극을, 다른 한쪽 끝은 남극을 나타내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한쪽 극에서 반대쪽 극까지 반원을 30등분하였다. 한쪽 극에서부터 6줄을 그은 다음 크게 원을 그려 북극권을 표시하였다. 그 아래는 5등분해 복회귀선을 나타내는 다른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밑을 4등분하여 적도를 나타내는 선을 그었다. 남극까지의 거리는 같은 치수로 나누었다.[49]
역사학자 오스카 G. 달링턴은 제르베르가 자신의 혼천의 측면을 6도 단위로 같은 위도선을 그어 360도가 아니라 60도로 나누었다고 주장했다.[50] 이에 따르면 제르베르의 혼천의는 54도에 두었을 것으로, 실제인 66° 33'에서 조금 밖에 벗어나지 않았다.[50] 그가 가리킨 북회귀선 24도는 거의 정확했고, 적도의 위치는 완벽히 들어맞았다.[50] 리셰는 제르베르가 어떻게 혼천의를 가지고 보다 쉽게 별들을 관측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혔다.
> 그는 행성들이 지구로부터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때 나타난 동일한 행성진로(궤도)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그는 최초로 혼천의를 고안해낸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어로는 코루리(coluri), 라틴어로는 인치덴테스(incidentes)라 불리는 두 개의 원을 겹치게 하였다. … 그는 사계선들에 걸쳐 5개의 다른 원들을 매우 정확하게 그렸고, 이들 사계선들이 잇는 반구의 양쪽 두 극 사이를 30등분하였다. 이들 원들은 병행원이라 하였다. 그는 반구를 30등분한 다음 한쪽의 극과 첫번째 원 사이에 6등분을, … (중략) … 그는 그 중 다섯 개의 원을 비스듬하게 배치했는데, 이 원들은 동물의 이름을 따서 그리스어로는 loxos 또는 zoe, 그리고 라틴어로는 obliques 또는 vitalis(황도십이궁)라 부른다. 그는 이 원들로 행성들의 궤도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계산했을 뿐만 아니라 행성들의 궤적과 높이, 상대적 거리 등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완벽하게 측정해 보였다.
리셰는 제르베르가 사용한 또다른 혼천의에 대해서도 진술하였다. 철선과 구리선에 매달린 형태인 이 혼천의는 속이 빈 구체의 축에 관이 고정되어 있어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었다.[51] 제르베르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만일 지금 보고 있는 별이 북극성이 맞는지 의심스러우면 혼천의의 조준관을 그 별에 고정시키고,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 별이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 북극성이 맞다고 설명해주었다.[53] 뿐만 아니라 제르베르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위아래로 설치된 관들을 통해 북극을 측정하는 방법은 물론 북극권, 북회귀선, 적도, 남회귀선을 측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53]
3. 3. 저술과 가르침
제르베르는 당대에 가장 저명한 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 네 가지 학문 분야(사과)를 다룬 일련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이들 학문을 삼학(문법, 논리, 수사)을 활용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왈리드 아미네 살합은 제르베르가 유럽에 이러한 교육 방식을 다시 도입한 것은 이슬람교 치하 스페인(알안달루스)에 있는 코르도바 마드라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43]랭스에 있을 당시 그는 공기를 수동으로 펌프질해야 했던 이전의 모든 악기를 뛰어넘는 놋쇠 파이프를 갖춘 수력식 오르간을 만들었다. 984년 제르베르는 바르셀로나의 루피투스에게 서신을 보내 점성술과 천문학에 관한 책 한 권을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역사학자 S. 짐 테스터는 제르베르가 점성술과 천문학이라는 두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44] 그로부터 50년 뒤에 헤르마누스 콘트락투스에 의해 편집된 천문관측기구 아스트롤라베에 대한 설명서의 유력한 저자 가운데 한 명으로 제르베르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제르베르는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된 이후에도 교리에 관한 논문인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De corpore et sanguine Domini)''를 집필했다.
그의 저술은 ''라틴어 총서''(Patrologia Latina) 제139권에 인쇄되었다.
; 수학 저술
- ''수 분할론'' (Libellus de numerorum divisione)[35]
- ''기하학에 관하여'' (De geometria)[35]
- ''주판 계산 규칙'' (Regula de abaco computi)[35]
- ''주판서'' (Liber abaci)[35]
- ''합리성과 사용법에 관하여'' (Libellus de rationali et ratione uti)[35]
; 교회 저술
- ''주교들의 지시에 관한 설교'' (Sermo de informatione episcoporum)
- ''주의 몸과 피에 관하여'' (De corpore et sanguine Domini)
- ''바솔, 랭스, 마솜 등의 공의회에서 발췌한 것'' (Selecta e concil. Basol., Remens., Masom., etc.)
; 서신
- ''교황 즉위 전에 쓴 서신'' (Epistolae ante summum pontificatum scriptae) (황제, 교황, 여러 주교에게 보낸 218통의 서신 포함)
- ''교황 서신 및 법령'' (Epistolae et decreta pontificia) (아르눌프를 포함하여 여러 수도원장과 주교에게 보낸 15통의 서신)
- * 오토 3세에게 보낸 의심스러운 서신
- * 5편의 짧은 시
; 기타 저술
- ''생 바솔 랭스 공의회 기록'' (Acta concilii Remensis ad S. Basolum)
- ''레오의 사절이 왕 휴고와 로베르에게 보낸 서신'' (Leonis legati epistola ad Hugonem et Robertum reges)
실베스테르 2세는 보에티우스를 숭배하여, 이성으로 감정과 외부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보에티우스의 사상을 실천했다. 보에티우스의 저작과 번역·주석서를 이용하여 자유 7과의 주로 삼학을 가르쳤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키케로 번역의 『토피카』도 보에티우스의 주석이 들어간 것이었다. 실베스테르 2세가 산술에 중점을 둔 것도 산술을 사과의 첫 번째로 삼는 보에티우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교육자로서도 실베스테르 2세는 뛰어났다. 교육 방법은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여 산술 또는 기하학에서는 주판을, 천문학에서는 천구의를 사용했다. 음악에서는 일현금을 이용하여 음계와 화음의 수학적 관찰을 행했다. 수사학에서는 토론을 벌였으며, 또한 도식을 사용하여 해설했다.
4. 종교적 업적
실베스테르 2세는 교황이 된 직후, 그의 전 라이벌이었던 아르눌프의 랭스 대주교 지위를 확인했다.[11] 그는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이 첩을 두는 관행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했으며, 오직 흠 없이 살아가며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주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1] 1001년, 로마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토 3세와 실베스테르 2세는 라벤나로 피신해야 했다. 오토 3세는 로마를 다시 통제하기 위해 두 번이나 원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002년 세 번째 원정 중에 사망했다. 실베스테르 2세는 황제가 사망한 직후 로마로 돌아왔지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에 묻혔다.
실베스테르 2세는 성직 매매를 금지하고,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장려했으며, 가까운 친척을 등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슬라브족과 발트해 방면으로의 포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헝가리의 수장이었던 이슈트반 1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헝가리 왕관을 수여했으며(1000년), 헝가리 내에 에스테르곰과 칼로차에 대주교구를 설치했다. 폴란드를 관할하는 그니에즈노 대주교구를 설치하여 동유럽의 가톨릭 교회를 조직했으며, 멀리 키예프의 성직자와도 연락을 취했다. 로베르 2세가 사촌과 근친혼을 한 것에 반대하여 혼인 무효를 선언하기도 했다.
5. 유산 및 평가
게르베르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사서(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에 관한 저서를 썼고, 이를 삼서(문법, 논리학, 수사학)의 기초를 사용하여 가르쳤다. 랭스에서는 놋쇠 파이프를 가진 수력식 오르간을 제작했는데, 이는 기존에 알려진 모든 악기를 능가하는 것이었다.[26] 984년의 편지에서 게르베르는 바르셀로나의 루피투스에게 점성술과 천문학에 관한 책을 요청했는데, 역사학자 S. 짐 테스터는 이 두 용어를 게르베르가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게르베르는 기계식 시계를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아마도 정교한 물시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탈진기-단진자는 13세기가 되어서야 발명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7] 게르베르는 약 50년 후에 헤르만누스 콘트락투스에 의해 편집된 천문관측기의 설명 저자였을 수도 있다.
5. 1. 전설

게르베르트(실베스테르 2세)에 관한 전설은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가 쓴 《영국 왕들의 행적》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반대하여 서임권 투쟁에서 싸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지지자인 베노의 논쟁적인 팸플릿에서 비롯되었다.[28] 전설에 따르면, 게르베르트는 4가지 학문(수학, 천문학, 점성술 등)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스페인으로 여행했고, 그곳에서 어둠의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28]
게르베르트는 스페인에서 사라센 철학자와 함께 살면서 그의 지식을 전수받았는데, 처음에는 돈과 약속으로 철학자의 책을 얻어 번역하고 공부했다.[28] 그러나 철학자가 가진 모든 지식이 담긴 책 한 권은 얻을 수 없었다.[28] 게르베르트는 술을 사용하고 철학자의 딸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후, 잠든 철학자의 베개 밑에서 그 책을 훔쳐 달아났다.[28] 별을 통해 도둑을 추적할 수 있었던 철학자가 그를 쫓았지만, 게르베르트는 나무 다리에 매달려 하늘과 땅 사이에 몸을 숨겨 마법사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29]
게르베르트는 청동 머리를 만들었는데, 이 "로봇" 머리는 그의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지상에서 사랑을 거부당한 후 나타나 교황 자리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준 메리디아나라는 여성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악마와 주사위 게임을 하여 교황직을 얻었다고 한다).[30]
메리디아나(또는 청동 머리)는 게르베르트에게 예루살렘에서 미사를 읽으면 악마가 그를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게르베르트는 예루살렘 순례를 취소했지만, 로마의 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교회에서 미사를 읽었을 때 병이 들었다. 죽어가면서 그는 추기경들에게 자신의 몸을 자르고 도시 전체에 흩뿌리라고 요청했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미사 중 악마에게 공격받아 불구로 만들어지고 눈이 뽑혀 교회에서 악마들에게 놀잇감이 되었다고 한다. 뉘우친 실베스테르 2세는 손과 혀를 잘라냈다고도 한다.
게르베르트의 무덤 비문은 부분적으로 Iste locus Silvestris membra sepulti venturo Domino conferet ad sonitumla ("이 곳은 [마지막 나팔] 소리에 맞춰 묻힌 실베스테르 2세의 사지를 주님 오심에 바칠 것이다", "소리를 낼 것이다"로 잘못 읽음)이며, 교황이 죽기 직전에 그의 뼈가 그 무덤에서 흔들릴 것이라는 기이한 전설을 낳았다.[31]
실베스테르가 1000년에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에게 왕관과 교황 사절 권한을 주었다는 이야기('사도왕' 칭호)는 17세기의 위조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원과 승인 없이 로마가 이슈트반의 왕관 요청을 충족시키는 데 행동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의 증언은 게르베르트를 불신하고 비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지만, 허용된 지식과 금지된 지식 사이의 경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2] 게르베르트가 음악 이론, 수학, 기하학 등 4가지 학문에서 수행한 작업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새의 노래와 비행 패턴에서 배운 것, 강령술 등 허용된 자유 학문 밖에서 이루어진 작업은 비난을 받았다.[32]

실베스테르 2세는 후세에 "서기 천년의 마법사 교황"으로 불리게 된다.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뛰어난 인물로 여겨졌던 듯하며, 그의 사후 15년(1018년)에 "이교도의 땅(후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코르도바까지 가서 천문학을 배웠다"는 일화가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권에서 후 우마이야 왕조에 가는 사람은 대부분 신임장을 받은 국사였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또한, 실베스테르 2세가 아랍어 음역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라틴어로 번역된 사본을 요구했기 때문에 아랍어를 습득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며, 코르도바에서 천문학을 배웠다는 것은 부정된다.
11세기,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 측의 추기경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정당성을 비난하며, 그의 스승의 스승이었던 실베스테르 2세에 대해 "악마에게 자신의 죽음을 묻고, 악마는 예루살렘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전이라고 대답했다. 실베스테르 2세는 안심했지만, 로마의 예루살렘 성 십자가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죽었다"고 묘사했다.
12세기, 말름즈베리의 윌리엄에 의해 전설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아랍인 교사는 제르베르에게 마법을 가르쳤지만, 사람이 알 수 있는 모든 사항을 적은 서적을 넘겨주는 것만은 거부했다. 제르베르는 스승의 딸을 유혹하고, 스승을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서적을 빼앗았다. 아랍인은 곧 쫓아왔지만, 제르베르는 악마와 계약하여 바다를 뛰어넘어 추격자를 따돌렸다", "로마 근교의 동상의 암호를 풀고, 지하에 숨겨져 있던 황금 궁전과 재보의 산을 발견했다", "질문에 모두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하는 청동 머리를 만들어, 자신이 교황이 될 수 있는지 묻자 그 청동 머리가 '예'라고 대답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실베스테르 2세를 악마의 사도로 묘사하는 전설에 대해, 16세기 말 로마를 방문한 몽테뉴도 분개했다.
이 외에 "출생 시 닭이 세 번 울어 로마까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대 로마의 귀족 카에시우스의 후손"과 같은 전설적인 일화가 남아 있다. 또한, 실베스테르 2세가 망원경, 기계식 시계, 수압식 오르간 등을 소지 또는 제작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닌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6. 저서
《교부문헌》 139권에는 제르베르의 글이 실려있다.[50] 달링턴은 제르베르가 자신이 쓴 편지들을 보존한 이유는 그 편지들을 편집해서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올바른 편지 쓰기를 가르치는 교재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언급하였다.[50]
- '''수학'''
- * ''Libellus de numerorum divisione'' (수의 나눗셈에 관한 책)[54]
- * ''De geometria'' (기하학)[54]
- * ''Regula de abaco computi'' (주판 계산 규칙)[54]
- * ''Liber abaci'' (주판서)[54]
- * ''Libellus de rationali et ratione uti'' (합리성과 사용법에 관하여)[54]
- '''종교'''
- * ''Sermo de informatione episcoporum'' (주교들의 지시에 관한 설교)
- * ''De corpore et sanguine Domini''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 * ''Selecta e concil. Basol., Remens., Masom.'' (바젤, 랭스, 마송 공의회 등에서 발췌)
- '''편지'''
- * ''Epistolae ante summum pontificatum scriptae'' (교황 즉위 전 서한)
- ** 황제, 교황,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 218통
- * ''Epistolae et decreta pontificia'' (교황 서한 및 법령)
- ** 아르눌프를 비롯한 주교들과 아빠스에게 보낸 편지 15통
- ** 오토 3세에게 보낸 편지 (불확실)
- ** 짧은 시 5편
- '''기타'''
- * ''Acta concilii Remensis ad S. Basolum'' (성 바솔 랭스 공의회 기록)
- * ''Leonis legati epistola ad Hugonem et Robertum reges'' (레오 사절이 위그와 로베르 왕에게 보낸 서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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