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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립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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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립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신민회와 서북학회에서 활동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에 참여하고 광성학교, 길성학교 등을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펼쳤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기관지 《자유종》을 발행하며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1921년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고 비서부장으로 활동했으나, 레닌의 자금 유용 의혹과 임정과의 갈등으로 1922년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사후, 김구에 의해 횡령 혐의로 비판받았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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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립 (사회주의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입
정당무소속
출생일1880년(?)
본명김익용(金翼容 → 金益庸) → 김입(金立, 김립)
직업군인 겸 언론인 및 독립운동가 겸 사회주의자 및 정치인
출생지조선 함경도 명천군
사망지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사망일1922년 2월 11일 (향년 43세 남짓?)
국가대한민국 임시정부
거주지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군복무임정 군무부 육군 유격대 영관 장교 전역
국적대한민국
국가2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 경력
직책
임시 국무총리 권한대행
국무원 비서실 실장 서리
임기1919년 8월 1일~1919년 8월 6일
대통령이승만
수상안창호 임시 총리 대행
경력신민회 사무집행위원
직책2
임시 국무총리 권한대행
국무원 비서실 서무국 비서장
임기21921년 5월 23일~1922년 2월 6일
대통령2이승만
수상2신규식 임시 총리 대행
학력
학력대한제국 한성부 사립 보성전문학교 전문학사
가족 관계
친인척오영선(사위)
외부 링크

2. 생애

김립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익용이다. 김립의 가계나 젊은 시절에 대한 자료는 레닌이 지원한 자금 문제로 인해 대부분 멸실되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처음 이름은 익용이었으나 후에 립으로 개명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전, 일본에 갔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신민회서북학회에서 활동했던 김립은 김규면에 의하면 '신민회서북학회의 유력한 청년지도자로 교육문화활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1]'고 한다.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10년 3월 보성학교를 졸업한[2] 김립은 허헌 등과 함께 일본영국의 입헌제도에 관심을 갖고 입헌군주국을 세우려 했으나, 한일 합방으로 무산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김립은 망명길에 올라,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Shinhanchon|신한촌영어에서 조직된 권업회에 참여하였다. 1912년 시베리아에서 이상설, 이동휘와 함께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청소년들을 교육했고, 이동휘와 함께 길성학교를 설립한 뒤 만주로 갔다. 1913년 만주 왕칭현 뤄쯔거우(羅子溝) 다뎬쯔(大甸子)에 있는 동림무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17년 1월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제정 러시아 경찰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2월 러시아 임시정부에 의해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러시아 혁명에 고무된 그는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갔고, 이동휘를 보좌하며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할 사람과 물자를 확보하였다.

이르쿠츠크파인 장건상은 김립이 이동휘의 측근이자 책사였다고 했다. 장건상은 '이동휘 신세를 망친 사람이 김립[2]'이라며 '순전히 김립 때문에 신세를 망쳤지요. 조화를 가장 많이 부린 사람이 김립입니다.[2]'라고 증언하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김립은 군사 조직을 창설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혔으나 탈출하였다.[3]

1918년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기관지 《한인시보》 발행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2월 신민회 망명간부회의에서 공산주의 수용을 주장하였다.[5]

볼셰비키에 우호적이었던 김립은 1918년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 한형권, 박애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5][6] 한인사회당 선전부장 겸 기관지 《자유종》 주필을 맡았고,[5] 이동휘 위원장 체제에서 당 교통부장 연락책으로 활동하며[7]공산주의 계열 청년들을 포섭하려 하였다.

1919년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사회당 상하이 지부를 결성하였다. 1919년 5월 임시정부 수립 소식과 이동휘국무총리 선임 정보를 접하고 임정 참여 여부를 논의하였다. 1919년 6월 26일 대한신민단한인사회당에 흡수 통합했다.[8][9]

1919년 6월 말 또는 7월 초, 한인사회당 주요 간부들은 상해 임정 승인 및 간부들의 임정 참여를 결정하였다. 이동휘와 김립은 상하이로, 박진순, 박애 등은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10]

1919년 7월 김립은 이동휘를 따라 상하이로 가서 임정 국무원비서실장으로 취임하여 충실히 보좌했다.[3] 그러나 1920년 이동휘가 임정을 떠나면서 김립도 비서장직을 사퇴했다. 1920년 7월 임정 국무원 서무국장 이원익이 김립의 이동휘 밀서를 안창호, 이광수 등에게 전달하여 밀서 파문이 일어났다.[12]

1921년 1월 이동휘 등과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으로 개편,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고 비서부장이 되었다.[5]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대표회의 이름으로 창당선언, 강령 및 규약을 발표하고, 사회주의, 평등사상 홍보물을 국내로 반입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한인사회당 시절부터 이동휘 중심의 상하이 한인 사회주의자 그룹과 소련 레닌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을 받아 사용하였다.[13] 그는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는 알리지 않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비와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사용하였다.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보관 중이던 금액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면서 이들은 임정의 표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파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김립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박진순 등 심복들을 보내 자금을 인수해 몽골 고륜(庫倫)을 경유해서 가져왔다고 한다.[14] 한형권 등이 1920년 11월 치타에 도착하여 김립에게 자금을 넘겨 주었고, 김립은 상하이로 가져왔으며, 이동휘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임정이 아니라 자신의 공산당 조직을 위해 썼다.[15]

임정에서는 레닌의 자금을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해 임시 정부에는 내주지 않자, 그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16]

1921년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한 그는 창조파, 개조파, 임정고수파로 나뉘자 창조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김립은 혼자서 상해 본부를 지키고 있었다.[19]

1922년 1월에 열린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이동휘와 김립 등은 성토문을 발표했다.[20] 두 계열은 이 자리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결국 의정원 의원이 대거 사퇴했고 "반동의 괴수는 모화주의자 신규식이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20]

1921년임시정부에서 보낸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이 김립을 찾아 상하이를 탐색하던 중 1922년 2월 11일 상하이의 자베이(閘北)[22] 거리에서 암살당했다.[16] 김립은 다른 한국인 사회주의자인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와 함께 있다가 이들의 은신처를 알아내 잠입한 오면직노종균, 양여주 등의 총격을 받고 죽었다. 곧 상하이 불조계 근처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1922년 1월 26일 신규식, 이동녕, 노백린, 김인전, 이시영, 손정도 등은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상해임정은 이 포고문에서 "한형권을 이웃나라에 몰래 파견하여 이웃나라의 후의에 의하여 거금을 정부에 증여케 하고 김립으로 하여금 이를 중도횡령케 하고 도리어 죄를 전각원에게 돌리여 정부를 파괴하려고 꾀한 그 죄는 하늘과 백성이 함께 할 수 없다"[21]이동휘를 성토했다. 또,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금(國金)을 횡령하여 사양을 살찌우고 같은 무리들을 숙취하여 공산주의운동의 미명하에 숨어서 간모(奸謀)를 하고 있어 그 죄는 극형에 처할 만하다"[21]고 했다.

2. 1. 생애 초반

김립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익용이었다. 김립의 가계나 젊은 시절에 대한 자료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레닌이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지원한 금액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납부하지 않았다는 누명과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멸실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름은 익용(翼容)이었으나 후에 립(立)으로 개명하였다. 한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그 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신민회서북학회에서 활동한 김립은 김규면에 의하면 '신민회서북학회의 유력한 청년지도자로 교육문화활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1]'고 한다.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10년 3월 보성학교를 졸업한[2] 김립은 같은 고향 출신 후배인 허헌 등과 함께 일본영국의 입헌제도에 관심을 갖고 입헌군주국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으나, 한일 합방으로 무산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김립은 망명길에 올라,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의 Shinhanchon|신한촌영어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에 동참하였다. 1912년 시베리아에서 이상설, 이동휘와 함께 한인 교포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청소년들을 가르쳤고, 이동휘와 함께 길성학교를 설립한 뒤 만주로 건너갔다. 1913년 만주 왕칭현 뤄쯔거우(羅子溝) 다뎬쯔(大甸子)에 있는 동림무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17년 1월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제정 러시아 경찰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2월 러시아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러시아 혁명에 고무된 그는 극동 러시아의 새로운 혁명 중심지인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갔고, 여기에서 이동휘를 보좌하며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할 사람과 물자를 확보하였다.

이르쿠츠크파인 장건상은 김립이 이동휘의 측근이자 책사였다고 하였다. 장건상에 의하면 '이동휘 신세를 망친 사람이 김립[2]'이라며 '순전히 김립 때문에 신세를 망쳤지요. 조화를 가장 많이 부린 사람이 김립입니다.[2]'라고 증언하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김립은 한인들을 움직여 군사 조직을 창설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혔으나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3]

2. 1. 1. 출생과 젊은 시절

김립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익용이었다. 그의 가계나 젊은 시절에 대한 자료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레닌이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지원한 금액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납부하지 않았다는 누명과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멸실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름은 익용(翼容)이었으나 후에 립(立)으로 개명하였다. 한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그 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2. 1. 2. 청년기

그는 신민회서북학회에서 활동하였다. 김규면에 의하면 그는 '신민회서북학회의 유력한 청년지도자로 교육문화활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1]'고 한다.

그는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10년 3월 보성학교를 졸업했다.[2] 그는 같은 고향 출신 후배인 허헌 등과 함께 일본영국의 입헌제도에 관심을 갖고 입헌군주국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으나 한일 합방으로 무산되었다.

2. 1. 3. 망명과 교육 활동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망명,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의 Shinhanchon|신한촌영어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에 동참하였다. 1912년 시베리아에서 이상설, 이동휘와 함께 한인 교포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청소년들을 가르쳤고, 이동휘와 함께 길성학교를 설립한 뒤 만주로 건너갔다. 1913년 만주 왕칭현 뤄쯔거우(羅子溝) 다뎬쯔(大甸子)에 있는 동림무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17년 1월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제정 러시아 경찰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2월 러시아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러시아 임시정부에 의해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러시아 혁명에 고무된 그는 극동 러시아의 새로운 혁명 중심지인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갔고 여기에서 이동휘를 보좌하며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할 사람과 물자를 확보하였다.

이르쿠츠크파인 장건상은 그가 이동휘의 측근이자 책사였다고 하였다. 장건상에 의하면 '이동휘 신세를 망친 사람이 김립[2]'이라며 '순전히 김립 때문에 신세를 망쳤지요. 조화를 가장 많이 부린 사람이 김립입니다.[2]'라고 증언하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그는 한인들을 움직여 군사 조직을 창설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혔으나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3]

2. 2.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1918년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기관지 《한인시보》 발행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2월 신민회 망명간부회의에서 공산주의 수용을 주장하였다.[5]

볼셰비키에 우호적이었던 김립은 1918년 5월 11일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 한형권, 박애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5][6] 한인사회당 선전부장 겸 기관지 《자유종》 주필을 맡았고,[5] 이동휘 위원장 체제에서 당 교통부장 연락책으로 활동하며[7]공산주의 계열 청년들을 포섭하려 노력하였다.

1919년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사회당 상하이 지부를 결성하였다. 1919년 5월 임시정부 수립 소식과 이동휘국무총리 선임 정보를 접하고 임정 참여 여부를 논의하였다. 1919년 6월 26일 대한신민단한인사회당에 흡수 통합했다.[8][9]

1919년 6월 말 또는 7월 초, 한인사회당 주요 간부들은 상해 임정 문제를 논의, 상해 임정 승인 및 간부들의 임정 참여를 결정하였다. 이동휘와 김립은 상하이로, 박진순, 박애 등은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10]

1919년 7월 김립은 이동휘를 따라 상하이로 가서 임정 국무원비서실장으로 취임하여 충실히 보좌했다.[3] 그러나 1920년 이동휘가 임정을 떠나면서 김립도 비서장직을 사퇴했다.

1920년 7월 임정 국무원 서무국장 이원익이 김립의 이동휘 밀서를 안창호, 이광수 등에게 전달하여 밀서 파문이 일어났다.[12]

1921년 1월 이동휘 등과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으로 개편,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고 비서부장이 되었다.[5]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대표회의 이름으로 창당선언, 강령 및 규약을 발표하고, 사회주의, 평등사상 홍보물을 국내로 반입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한인사회당 시절부터 이동휘 중심의 상하이 한인 사회주의자 그룹과 소련 레닌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2. 2. 1. 한인사회당 결성

1918년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그 기관지인 《한인시보 韓人時報》 발행에 참여하였다. 1918년 2월에 열린 신민회에 참가, 신민회 망명간부회의에서 공산주의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5]

친볼셰비키적이었으며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1918년 5월 11일 이동휘, 한형권, 박애, 이한영, 장기영, 박진순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5][6] 김립은 한인사회당의 선전부장이 되고, 기관지 《자유종》을 발행하고 주필이 됐다.[5] 1918년 한인사회당 창당에 참가한 주요 임원으로서 이동휘 위원장 체제의 당 교통부장 연락책에 선출[7]되었다. 이후 비공산주의 계열의 청년인사들을 사회당으로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중국 상하이로 건너와 한인사회당의 상해 조직인 한인사회당 상하이 지부를 결성하였다.

2. 2. 2. 임시정부 수립 전후

1918년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그 기관지인 《한인시보》를 발행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8년 2월에 열린 신민회에 참가, 신민회 망명간부회의에서 공산주의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5]

볼셰비키에 우호적이었으며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1918년 5월 11일 이동휘, 한형권, 박애, 이한영, 장기영, 박진순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5][6] 김립은 한인사회당의 선전부장이 되고, 기관지 《자유종》을 발행하고 주필이 되었다.[5] 1918년 한인사회당 창당에 참가한 주요 임원으로서 이동휘 위원장 체제의 당 교통부장 연락책에 선출[7]되었으며, 비공산주의 계열의 청년인사들을 사회당으로 포섭하려 노력하였다.

1919년중국 상하이로 건너와 한인사회당상하이 지부를 결성하였다. 1919년 5월 상하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과 이동휘국무총리로 선임한 파벌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동휘와 함께 임정에 참여하는 여부를 계속 논의하였다.

1919년 6월 26일 대한신민단한인사회당에 흡수시켰다. 일제의 1919년 6월 26일자 첩보문서[8]에 의하면 "신민단 단장인 김규면을 설득하여 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의 통합을 성사시킨 인물은 이동휘의 최측근 참모이자 한인사회당의 최고 책략가인 김립이었다."[9]

1919년 6월 말 또는 7월 초, 이동휘를 포함한 김규면, 김립, 박진순, 박애, 이한영, 최태열, 장기영, 김하구, 김아파니시, 김진 등의 주요 간부들이 참여한 가운데 상해 임정 문제를 논의하였다.[10] 이 간부 회의에서 한인사회당은 상해 임정을 승인하고, 당 간부들의 상해 임정 참여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합에서는 또한 이동휘와 김립을 상하이로, 박진순, 박애, 이한영을 모스크바로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10]

2. 2. 3. 임시정부 입각과 탈퇴

1919년 5월 상하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과 이동휘국무총리로 선임한 파벌이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는 이동휘와 함께 임정에 참여하는 여부를 계속 논의하였다.

1919년 6월 말 또는 7월 초, 이동휘를 포함한 김규면, 김립, 박진순, 박애, 이한영, 최태열, 장기영, 김하구, 김아파니시, 김진 등의 주요 간부들이 참여한 가운데 상해 임정 문제를 논의하였다.[10] 이 간부 회의에서 한인사회당상해 임정을 승인하고, 당 간부들의 상해 임정 참여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합에서는 또한 이동휘와 김립을 상하이로, 박진순, 박애, 이한영을 모스크바로 파견할 것을 결의하였다.[10]

1919년 7월 김립은 이동휘임정의 국무총리로 부임할 때 그를 따라 상하이로 가서 국무원비서실장으로 취임했으며, 그의 충실한 보좌관이 되었다.[3] 이 사실은 김립을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질시 또는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3]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919년 8월 김립은 이동휘와 함께 상하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어 잠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무총리에 임명된 이동휘가 사회주의 활동과 소련과의 관계 등으로 갈등을 빚다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1920년 그도 임정 비서장직을 사퇴하고 떠났다.

1920년 7월말 임정 국무원 서무국장 이원익(李元益)이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내려던 밀서를 빼돌려, 안창호, 이광수 등에게 전달함으로써 밀서 파문이 발생하였다.[12]

2. 2. 4. 고려공산당 창당

1921년 1월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고 김립은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비서부장이 되었다.[5] 그해 5월 그는 고려공산당 창당선언, 강령 및 규약을 고려공산당 대표회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평등사상에 대한 홍보물을 간행하여 국내로 반입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한인사회당 시절부터 줄곧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 한인 사회주의자 그룹과 소련 레닌과의 연락책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2. 3.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1921년 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을 받아 사용하였다.[13] 그는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는 알리지 않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비와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사용하였다.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보관 중이던 금액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면서 이동휘, 김립, 한형권과 상하이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임정의 표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파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김립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박진순 등 심복들을 보내 자금을 인수해 몽골 고륜(庫倫)을 경유해서 가져왔다고 한다.[14] 한형권 등이 1920년 11월 치타에 도착하여 김립에게 자금을 넘겨 주었고, 김립은 상하이로 가져왔으며, 이동휘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임정이 아니라 자신의 공산당 조직을 위해 썼다.[15]

임정에서는 레닌의 자금을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해 임시 정부에는 내주지 않자, 그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16]

2. 4. 임정과의 갈등

1919년 5월 상하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과 이동휘국무총리로 선임한 파벌이 있다는 정보를 접한 김립은 이동휘와 함께 임정에 참여하는 여부를 계속 논의하였다.

1919년 6월 말 또는 7월 초, 이동휘를 포함한 한인사회당의 주요 간부들은 상해 임정 문제를 논의하였다.[10] 이 회의에서 한인사회당은 상해 임정을 승인하고, 당 간부들의 상해 임정 참여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이동휘와 김립을 상하이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10] 1919년 7월에는 해삼위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신한민회(新韓民會)를 조직하고 국내 진공을 논의하였다.[11] 김립은 이동휘임정의 국무총리로 부임할 때 그를 따라 상하이로 가서 국무원비서실장으로 취임했으며, 그의 충실한 보좌관이 되었다.[3]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나뉘게 되자 그는 이동휘를 따라 상해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김립은 이동휘와 함께 상하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어 잠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무총리에 임명된 이동휘가 사회주의 활동과 소련과의 관계 등으로 갈등을 빚다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1920년 그도 임정 비서장직을 사퇴하고 떠났다.

1920년 7월 말 임정 국무원 서무국장 이원익이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내려던 밀서를 빼돌려, 안창호, 이광수 등에게 전달함으로써 밀서 파문이 발생하였다.[12]

1921년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한 그는 창조파, 개조파, 임정고수파로 나뉘자 창조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김립은 혼자서 상해 본부를 지키고 있었다.[19]

1922년 1월에 열린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이동휘와 김립 등은 성토문을 발표했다.[20] 두 계열은 이 자리에서 피 튀기는 난투극을 벌였다. 결국 의정원 의원이 대거 사퇴했고 "반동의 괴수는 모화주의자 신규식이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20]

2. 5. 피살과 최후

1921년임시정부에서 보낸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이 김립을 찾아 상하이를 탐색하던 중 1922년 2월 11일 상하이의 자베이(閘北)[22] 거리에서 암살당했다.[16] 김립은 다른 한국인 사회주의자인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와 함께 있다가 이들의 은신처를 알아내 잠입한 오면직노종균, 양여주 등의 총격을 받고 죽었다. 곧 상하이 불조계 근처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1922년 1월 26일 신규식, 이동녕, 노백린, 김인전, 이시영, 손정도 등은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상해임정은 이 포고문에서 "한형권을 이웃나라에 몰래 파견하여 이웃나라의 후의에 의하여 거금을 정부에 증여케 하고 김립으로 하여금 이를 중도횡령케 하고 도리어 죄를 전각원에게 돌리여 정부를 파괴하려고 꾀한 그 죄는 하늘과 백성이 함께 할 수 없다"[21]이동휘를 성토했다. 또,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금(國金)을 횡령하여 사양을 살찌우고 같은 무리들을 숙취하여 공산주의운동의 미명하에 숨어서 간모(奸謀)를 하고 있어 그 죄는 극형에 처할 만하다"[21]고 했다.

3. 사후

오면직과 노종균은 김구의 부하였으며 김립을 암살한 것은 김구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23] 김철수는 문서처치와 김립의 시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바로 은행으로 가서 남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겨두었다. 한편 상하이의 한인 사회주의자 최동욱, 이호반, 한광우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김립에 대한 복수를 기도하기도 했다. 시신은 상하이 쑹칭링링위안(원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24]

그가 암살당하자 상하이로 급하게 건너온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분개했다. 한편 그의 동지들은 김립을 죽이고 지운 김철수마저 죽이려는 김구를 죽이고자 했으나 지운은 독립운동 동지들끼리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말렸다.[25] 이 보고를 접한 소련 공산당에서는 상하이에 있는 한인 공산당 조직을 해소하고 조직을 이동할 것을 지시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거두게 된다.

사후 김구백범일지에 기록한 대로, 그가 군자금 400000루블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사적으로 유용, 낭비한 것으로 알려져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구 소련 비밀문서 등이 공개되면서 그가 상하이 임정의 자금을 횡령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에 대한 연구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 논란

국제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돕고자 한인 독립운동에 200만 루블(현 한국 화폐 가치로 약 2000억)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22년 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만 받아 사용하였고,[13] 이 자금을 상해 임시 정부에는 알리지 않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비와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사용하였다.[13]

임정에서는 레닌의 자금을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해 임시 정부에는 내주지 않자 그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16]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 김립이 횡령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반병률 교수(한국외대)는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고 평가했다.[26] 그는 임정에 반하는 인물로 낙인찍혀 사후에도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립은 군자금 40만 루블을 도용, 낭비하고 광둥 여자를 첩으로 들여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중국 여자와 사치, 향락을 누렸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장건상은 김립이 이동휘를 유혹했다고 비판하였다. 장건상은 훗날 '김립이야말로 세상이 다 아는 더러운 놈입니다. 이동휘는 원래 착한 사람입니다. 이 이동휘의 신세를 망친 사람이 김립입니다.'라고 하였다.[28]

4. 1. 레닌의 자금 문제

국제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돕고자 하였고, 한인 독립운동에 200만 루블(현 한국화폐 가치로 약 2000억)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22년 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만을 받아가지고 와서 사용하였으며,[13] 그는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는 알리지 않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비와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하였다.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보관중이던 금액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면서 이동휘, 김립, 한형권과 상하이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임정의 표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파 사람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다시 사람을 소련으로 보내서 자금을 가져왔다 한다. '김립이 러시아말을 잘하는 박진순 등 심복들을 보내서 그것을 인수해 가지고 왔다. 인수를 해서 몽고 고륜(庫倫)을 경유해서 가지고 오게 되었다.[14]'고 하였다. 한형권 등이 1920년 11월 치타에 도착하여 김립에게 자금을 넘겨 주었고, 김립은 상하이로 가져왔으며 이동휘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임정이 아니라 자신의 공산당 조직을 위해 썼다.[15]

임정에서는 레닌의 자금을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해 임시 정부에는 내주지 않자 임시정부는 그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16]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 그가 횡령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라고 하였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26]"고 평가했다. 그는 임정에 반하는 인물로 낙인찍힌 탓에 사후에도 오래도록 조명받지 못했다.

4. 2. 공금 횡령 문제

국제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돕고자 하였고, 한인 독립운동에 200만 루블(현재 한국 화폐 가치로 약 2,000억 원)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22년 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만 받아 사용하였으며, 김립은 이 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알리지 않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비와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사용하였다.[13]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보관 중이던 금액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면서 이들은 임시정부의 표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파인 장건상의 증언에 따르면, 김립은 러시아말을 잘하는 박진순(朴鎭淳) 등 심복들을 보내 자금을 인수해 몽골 고륜(庫倫)을 경유해 가져왔다고 한다.[14] 한형권 등은 1920년 11월 치타에서 김립에게 자금을 넘겨주었고, 김립은 상하이로 가져왔다. 이동휘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임시정부가 아닌 자신의 공산당 조직을 위해 썼다.[15]

임정에서는 레닌의 자금을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해 임시 정부에는 주지 않자, 김립이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16]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횡령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훗날 박노자는 "1922년 초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고 언급했다.

반병률 교수(한국외대)는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고 평가했다.[26] 김립은 임정에 반하는 인물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했다. 김립의 ‘횡령 행위’는 한인사회당 등 공산주의 정당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26]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전달된 200만 루블의 자금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등에 어렵게 운반되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사업비로 활용되었지만, 김구임정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16] 김립 암살 등으로 나머지 140만 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13] 레닌은 임정이 아니라 이동휘 등에게 이 돈을 지원한 것이었다.

김립이 모스크바로부터 받은 돈을 사적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은 주로 이동휘의 적대 세력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제기하였다.[3] 김학준과의 인터뷰에서 김립에 대해 험하게 말한 장건상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부였으며 평소 김립에게 적대적이었다.[3]

김철수에 따르면,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추가 자금 20만 원을 확보하기 위해 김상옥을 시켜 윤해에게 총을 쏘았으나 폐를 상하게 하고 죽이지는 못하였고, 김구 일파는 다시 김립을 백주대로에서 난사해 살해하였다고 한다.[27] 그때 김하구, 윤진희, 김철수가 함께 당했다고 한다.[27]

4. 3. 향락 논란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립은 군자금 40만 루블을 도용, 낭비하고 광둥 여자를 첩으로 들여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중국 여자와 사치, 향락을 누렸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4. 4. 장건상의 비판

장건상은 김립이 이동휘를 유혹했다고 비판하였다. 장건상은 훗날 '김립이야말로 세상이 다 아는 더러운 놈입니다. 이동휘는 원래 착한 사람입니다. 이 이동휘의 신세를 망친 사람이 김립입니다. 이동휘가 김립만 아니었더라면 독립운동가들 가운데서도 굉장히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순전히 김립 때문에 신세를 망쳤지요. 조화를 가장 많이 부린 사람이 김립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옳게 못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28]

참조

[1] 서적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2]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 서적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5] 웹사이트 김립 http://100.naver.com[...]
[6] 뉴스 "[고려인 강제이주 70년] 上. 연해주지역의 개척자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7-02-27
[7]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eople.aks.ac[...] 2010-11-02
[8] 서적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9] 서적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10] 서적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11] 웹사이트 독립운동가 세부검색:황병길 (黃炳吉) http://www.i815.or.k[...]
[12] 서적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13] 간행물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14]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15]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16] 뉴스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한겨레 21)2007년04월12일 제655호 http://www.hani.co.k[...]
[17] 서적 한인 사회주의운동연구:한국사연구총서 21 국학자료원 1999
[18] 서적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19]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eople.aks.ac[...] 2010-11-02
[20] 서적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 한길사 2004
[21] 서적 조선통치사료 7 한국사료연구소 1970
[22]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eople.aks.ac[...] 2010-11-02
[23] 서적 백범일지 돌베개 2006
[24] 웹인용 불멸의 발자취(47)—상해에서의 공산주의운동 / 중앙인민방송국 http://www.krcnr.cn/[...] 2012-11-26
[25] 웹사이트 상해,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에 온힘을 쏟다 http://www.ibuan.com[...]
[26] 웹인용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칼럼 : 한겨레21 http://www.hani.co.k[...] 2008-07-23
[27] 서적 한인 사회주의운동연구:한국사연구총서 21 국학자료원 1999
[28]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29]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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