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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지 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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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너지 임레는 1896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후 공산주의에 입문했다. 2차 대전 이후 헝가리에서 농림수산부 장관을 거쳐 1953년 수상에 올랐으나, 스탈린주의 정책 완화 시도로 실각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다시 수상으로 복귀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소련의 침공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장례식은 헝가리 공산주의 정부 종식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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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지 임레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Nagy Imre igazolványkép
나지 임레 (1945년경 촬영)
본명너지 임레
출생일1896년 6월 7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솜ogy 주 커포슈바르
사망일1958년 6월 16일
사망지헝가리 인민 공화국 부다페스트
사망 원인교수형
국적헝가리
배우자머리아 에게퇴 (1925년 11월 28일 결혼)
자녀에르제베트
정치 경력
소속 정당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헝가리 사회민주당
헝가리 공산당
헝가리 노동인민당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관직
각료 평의회 의장 (총리)재임 기간: 1956년 10월 24일 – 1956년 11월 4일
전임: 언드라시 헤게뒤시
후임: 야노시 카다르
각료 평의회 의장 대리안탈 어프로
페렌츠 에르데이
요제프 보그나르 (1956년 10월 27일~)
언드라시 헤게뒤시 (~1956년 10월 27일)
이슈트반 히더시 (~1956년 10월 27일)
죄르지 머로샨 (~1956년 10월 27일)
요제프 메키시 (~1956년 10월 27일)
제1 서기에르뇌 게뢰
야노시 카다르
외무부 장관재임 기간: 1956년 11월 2일 – 1956년 11월 4일
전임: 임레 호르바트
후임: 임레 호르바트
국회 의장재임 기간: 1947년 9월 16일 – 1949년 6월 8일
전임: 어르파드 서보
후임: 카로이 올트
내무부 장관재임 기간: 1945년 11월 15일 – 1946년 3월 20일
전임: 페렌츠 에르데이
후임: 러슬로 라이크
농업부 장관재임 기간: 1944년 12월 22일 – 1945년 11월 15일
전임: 피델 팔피
후임: 벨러 코바치
각료 평의회 의장 (총리)재임 기간: 1953년 7월 4일 – 1955년 4월 18일
전임: 마티아시 라코시
후임: 언드라시 헤게뒤시
각료 평의회 의장 대리언드라시 헤게뒤시
에르뇌 게뢰
안탈 어프로 (~1953년 11월 18일)
이슈트반 히더시 (1954년 10월 30일~)
대통령이슈트반 도비
제1 서기마티아시 라코시
의회 활동
국회 의원재임 기간: 1944년 12월 21일 – 1955년 4월 29일
소속 정당:
MKP (1948년까지)
MDP (1948년부터)
좌파 블록 (1946–47)
MKP/MDP/MSZMP 정치국 위원재임 기간:
1945년 5월 21일 – 1949년 9월 3일
1951년 3월 1일 – 1955년 4월 14일
1956년 10월 24일 – 1956년 11월 7일
군사 경력
소속오스트리아-헝가리군 (헝가리 왕립 호네드) (1914–1916)
붉은 군대 (1918)
복무 기간1914–1916, 1918
계급상병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참전 전투 상세 정보
제1차 세계 대전이탈리아 전선
제3차 이손초 전투
동부 전선
브루실로프 공세
러시아 내전동부 전선

2. 경력

너지 임레는 헝가리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두 차례 총리를 역임했으며,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포로 생활 중 마르크스주의를 접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체카에서도 잠시 활동했다. 1921년 헝가리로 돌아와 지하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체포와 석방을 반복했고, 결국 1929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코민테른 활동과 농업 연구에 종사하며 NKVD 정보원으로도 활동했다.[2][3][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군 점령 하의 헝가리로 돌아와 헝가리 공산당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임시 정부에서 농업부 장관을 맡아 토지 개혁을 추진했고, 이후 내무부 장관, 헝가리 국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6]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라코시 마차시가 실각하자 그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했다. 너지는 국민 생활 개선을 목표로 '새로운 노선'을 내걸고 농업 집단화 완화, 종교 탄압 완화, 강제 수용소 폐지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30] 당내 스탈린주의자들의 반발과 소련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5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당에서도 제명되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자 국민적 요구에 힘입어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는 연립 정권을 구성하고 일당 독재 해체,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 헝가리 중립 선언 등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주 노선은 소련의 무력 개입을 초래했다.[31]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안전 보장 약속을 어기고 소련군에 체포되었다.[32]

이후 루마니아로 이송되어 비밀 재판을 통해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8년 6월 16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16][17]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으며,[20] 그의 죽음은 냉전 시대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던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었다.[18]

카다르 야노시 정권 하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너지는 1989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고,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재매장되었다. 그는 오늘날 헝가리 국민 저항과 자유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너지는 1896년 6월 7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헝가리 왕국커포슈바르에서 농민 출신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제프 너지(József Nagy, 1869–1929)는 루터교 신자로 마차 운전사였고, 어머니 로잘리아 사보(Rozália Szabó, 1877–1969)는 하녀로 일했다. 너지는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커포슈바르의 김나지움에 다녔으나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고, 자금 부족 문제도 겹쳐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자물쇠 제조공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1914년 금속 기술자 자격증을 땄지만, 곧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원으로 일하며 상업 고등학교에 다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12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징집되어 1915년 5월 입대했다. 기초 훈련 후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어 이손초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회복 후 기관총 사수로 훈련받고 1916년 여름 동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1916년 7월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브루실로프 공세 중 다시 부상을 입고 제정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너지는 시베리아의 베레조프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 공산당의 외국인 그룹에 가입했으며,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적군에 합류하여 싸웠다. 일부 자료에서는 너지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황실 가족 경비 임무를 맡았으며, 처형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2] 하지만 역사가 이반 플로트니코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처형자 명단에 너지의 이름은 없으며, 처형대는 주로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밝혀졌다.[3][4] 너지의 처형 가담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1918년 9월 체코 군단에 포로로 잡혔으나 탈출하여 백군 통제 지역에서 지내다가 1920년 2월 적군이 이르쿠츠크를 점령하면서 내전 참여를 마쳤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에 정식 가입하고, 공산주의 비밀경찰인 체카에서 잠시 활동했다.

1921년 4월, 헝가리 공산당(KMP)의 지령으로 다른 헝가리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헝가리로 돌아와 지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헝가리 사회 민주당(MSZDP)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혁명적 견해 때문에 제명당했다. 1925년 마리아 에제토와 결혼했으며, 1926년에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MSZMP)의 카포스바르 지부를 공동 설립했다. 그러나 정치 활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체포와 석방을 반복했고, 결국 1928년 비엔나를 거쳐 1929년 12월 소련으로 망명했다.

1929년 너지는 아내 마리아와 딸 에르제베트와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한 너지는 코민테른 활동에 참여하고 소련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국제 농업 연구소에서 농업 연구에 종사하는 한편, 코민테른 헝가리 지부에서도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볼로디아"(Volodya)라는 암호명으로 소련 비밀경찰 NKVD의 정보원으로 활동했으며, NKVD는 그를 유능한 요원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소련과의 관계는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헝가리 혁명까지

부다페스트에 있는 너지 임레의 동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너지는 소련군 점령 하의 헝가리로 돌아왔다. 그는 헝가리 공산당 소속으로 헝가리 임시 국민 정부에 참여하여 들레크 벨러 정부에서 농업부 장관을 지내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틸디 졸탄 정부에서는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헝가리 내 독일인 추방에 관여했다.[6] 공산당이 헝가리 민주당을 흡수하여 헝가리 근로자당으로 개편되고 헝가리 인민 공화국의 지도 정당이 된 후에도, 너지는 당 간부로서 활동하며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주로 의례적인 직책인 헝가리 국회 의장을 지냈다. 1951년에는 다른 정치국원들과 함께 카다르 야노시의 체포를 명령하는 각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1953년 6월,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라코시 마차시가 실각하자 너지는 그의 후임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당시 헝가리 민중은 스탈린 사후 다소 느슨해진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도 여전히 저임금과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에 항의하는 조직적인 파업부다페스트의 중공업 및 경공업 지대를 중심으로 잇따랐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너지는 이른바 "새로운 노선"을 내세우며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국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상징 중 하나였던 농업 집단화를 완화하고, 종교에 대한 탄압을 줄였으며 강제 수용소를 폐지하는 등의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30]

1953년 6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너지 임레


그러나 너지의 이러한 개혁적인 방식은 스탈린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소비에트 연방 정치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는 1955년 4월 18일 총리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등 모든 당 직책을 박탈당하고 당에서도 제명되었다.

하지만 헝가리 사회 내부에서는 점차 민주화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너지를 다시 정권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너지는 1956년 당에 복귀하였고, 같은 해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자 다시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반공 민족주의자들을 아우르는 연립 정권을 구성하고, 일당 독재 체제 해체,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 코메콘 탈퇴, 헝가리 중립 선언 등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연이어 추진했다.

그러나 너지의 이러한 자주적인 개혁 움직임은 소비에트 연방의 심기를 건드렸고, 소련은 이를 자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간주했다. 결국 소련군은 헝가리를 침공하여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는 무력 개입을 단행했다.[31] 급박한 상황 속에서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후 신변 안전을 보장받고 대사관을 나섰으나, 약속과 달리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32] 너지는 루마니아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KGB에 의한 비밀 재판을 통해 1958년 6월 16일 교수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너지의 시신은 부다페스트 교외의 시립묘원에 매장되었다.

2. 3. 1956년 헝가리 혁명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 2월 25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과오를 비판하는 "비밀 연설"을 한 이후, 동구권에서는 스탈린주의 시대 지도자들에 대한 반발이 커지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는 스스로 "스탈린의 가장 위대한 제자"라 칭했던 라코시 마차시에 대한 비판이 당 내부와 대중 사이에서 거세졌고,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비판 여론은 공산주의 정책 토론을 위해 DISZ 학생 청년 연합이 만든 토론 클럽인 '페퇴피 서클'을 통해 표출되었으며, 이는 곧 정권에 대한 반대의 주요 창구가 되었다. 너지 임레 본인은 페퇴피 서클 모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측근인 바사르헤이 미클로시와 로손치 게자를 통해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지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와 그의 지도력 복귀를 바라는 열망을 전했다.[7]

라코시에 대한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소련은 1956년 7월 18일 그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소련으로 보냈다. 그러나 후임으로 임명된 인물은 라코시와 마찬가지로 강경파인 에르뇌 게뢰였기에 대중의 반발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지는 10월 6일, 라코시 정권에 의해 숙청되었다가 복권된 전 비밀경찰 총수 라즐로 라이크의 재장례식에 주요 인사로 참석했다.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던 10월 13일, 그는 다시 당에 복귀했다. 10월 22일에는 부다페스트 공과대학교 학생들이 16개 항의 국가 정책 요구 목록을 발표했는데, 그중 세 번째 항목이 너지의 총리 복귀였다.

10월 23일 오후, 부다페스트에서는 공과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고, 참가자들은 너지 임레에 대한 지지를 외쳤다. 너지는 개혁 요구에 공감했지만, 요구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여겨 선뜻 지지하기를 망설였다. 그는 체제 변화를 원했지만, 혁명적 격변보다는 1953년에서 1955년 사이 자신이 추진했던 '신노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또한 이 시위가 게뢰와 당시 총리 안드라스 헤게뒤스가 자신에게 반란 선동 혐의를 씌워 반대파를 탄압하려는 도발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측근들의 설득으로 너지는 국회의사당 앞으로 나가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한 연설을 했다. 연설의 정확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본질적으로 시위대에게 집으로 돌아가 당의 처리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고, 이는 의도했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위는 곧 ÁVH(비밀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전면적인 봉기로 확산되었다.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헝가리 군인들은 오히려 시위대에 합류했고, 게뢰는 소련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

10월 24일 이른 아침, 너지는 대중을 달래기 위해 다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정부 내에서 영향력이 미미했고, 그날 소련군이 수도 부다페스트를 침공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소련군 개입 요청 결정은 전날 밤 게뢰와 헤게뒤스 총리가 내렸지만, 많은 사람들은 너지가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의심했다.[8] 같은 날 너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기를 내려놓는 모든 반군에게 '사면'을 제안한 것도 이러한 의심을 부추겼다. 다음 날인 10월 25일, 그는 질서가 회복되면 소련군 철수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10월 26일부터는 작가 연합, 학생 단체, 미슈콜츠의 보르쇼드 노동자 평의회 대표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10월 27일, 너지는 전 대통령 졸탄 틸디를 국무장관으로 포함하는 대대적인 정부 개편을 발표했다. 소련 대표 아나스타스 미코얀, 미하일 수슬로프와의 협상에서 너지와 헝가리 정부 대표단은 휴전과 정치적 해결을 촉구했다.

10월 28일 아침, 너지는 코르빈 시네마와 킬리안 병영에서 소련군과 친정부 헝가리 부대의 대규모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는 소련과 휴전을 협상하여 12시 15분에 발효시켰고, 도시와 전국에서 전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같은 날 오후, 그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봉기를 "국가 민주주의 운동"으로 규정하고 혁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하며 대중의 요구 일부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9] 그는 ÁVH 해산과 소련군의 완전 철수를 협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혁명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인과 무장 시민으로 구성된 국방군 창설을 지지했다.

10월 29일, 부다페스트에서 전투가 잦아들고 소련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너지는 집무실을 당 본부에서 국회의사당으로 옮겼다. 그는 또한 지난주 동안 결성된 노동자 평의회 대표들과 여러 무장 단체 대표들을 만나 협상했다.

10월 30일, 너지의 개혁파는 헝가리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에르뇌 게뢰와 다른 스탈린주의 강경파들은 소련으로 도피했고, 너지 정부는 1945년 연립 정당들을 기반으로 한 다당제 복원을 선언했다. 이 시기 너지는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정체될 수 없는 과학"이었으며, "스탈린주의 독점"의 "경직된 독단주의"를 비판했다.[10] 그는 완전한 자유 민주주의로의 복귀가 아닌, 사회주의 틀 내에서 1948년 이전의 연립 정당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한적인 다당제를 의도했다.[11]

10월 31일, 너지는 해체된 헝가리 노동자당을 대체하여 새로 창당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임시 지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정당은 본래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는 "국가 공산주의" 정당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같은 날 소련 정치국 회의에서 크렘린 지도부는 혁명이 너무 과격해졌다고 판단하고 진압을 결정했다. 10월 31일 밤부터 11월 1일 사이, 소련군은 10월 30일 헝가리에서 완전히 철수하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뒤집고 다시 헝가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너지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대사에게 항의했지만, 안드로포프는 새로운 병력이 완전한 철수를 보장하고 헝가리 내 소련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이는 너지가 가장 논란이 많은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혁명가들의 핵심 요구에 부응하여, 그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를 선언하고 유엔을 통해 미국, 영국 등 강대국들에게 헝가리의 중립국 지위를 인정해 줄 것을 호소했다.[12] 같은 날 늦게 야노시 카다르 당 서기장은 소련 대사관으로 갔고, 다음 날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11월 1일부터 3일까지 니키타 흐루쇼프는 여러 바르샤바 조약 가입국과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여 헝가리 침공 계획을 알렸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그는 11월 2일 당시 당 서기장이었던 야노시 카다르를 헝가리의 새로운 지도자로 선택했으며, 너지가 협력한다면 정부에 남겨둘 생각도 있었다. 11월 3일, 너지는 공산주의자가 소수인 새로운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이 정부에는 공산주의자, 독립 소지주당, 농민당, 사회 민주당 인사들이 포함되었으나, 하루도 채 운영되지 못했다.

11월 4일 이른 아침, 소련은 부다페스트와 전국의 반군 거점에 대한 대규모 군사 공격인 '와류 작전'을 개시했다. 너지는 라디오를 통해 이 사실을 국민과 전 세계에 알리는 극적인 연설을 했다.[13] 그러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헝가리 군대에 침략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14] 곧 그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하여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망명 자격을 얻었다.

야노시 카다르가 안전한 통행을 서면으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22일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을 나오던 중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루마니아의 스나고프로 이송되었다. 이후 KGB에 의한 비밀 재판을 거쳐 1958년 6월 16일,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32]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 교외의 시립묘지에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2. 4. 체포 및 처형

헝가리 봉기가 소련군의 침공으로 진압된 후, 너지 임레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는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고 협상을 위해 대사관을 나왔으나, 약속과 달리 소련군에게 구속되었다. 이후 루마니아로 이송된 너지는 KGB에 의해 비밀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 전복을 조직하고 반역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비밀리에 기소되었고,[15]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58년 6월 16일, 너지는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16]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너지의 재판과 처형 사실은 형이 집행된 후에야 외부에 공개되었다.[17]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너지를 처형했다고 크렘린 내부 관계자 표도르 부르라츠키는 전했다.[18] 미국의 언론인 존 건터는 너지의 죽음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유례없는 오명의 에피소드"라고 평가했다.[19]

너지의 유해는 처형이 이루어진 감옥 뜰에 처음 묻혔다가, 몇 년 후 부다페스트 신공동묘지의 외딴 구역(301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때 그의 시신은 얼굴이 땅을 향하도록 묻혔으며, 손과 발은 철조망으로 묶여 있었다고 전해진다.[20] 그의 무덤 옆에는 기념 종이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라틴어, 헝가리어, 독일어, 영어로 문구가 새겨져 있다. 라틴어 문구는 "Vivos voco / Mortuos plango / Fulgura frango"로, "나는 산 자를 부르고, 죽은 자를 애도하며, 벼락을 부순다"는 의미이다.[21]

너지를 대신해 집권한 카다르 야노시 정권은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탄압했으며, 너지를 공산주의를 배반한 반당 분자로 규정했다. 너지의 명예는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헝가리 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이후에야 회복될 수 있었다.

1989년, 너지의 시신은 공식적으로 재매장되었고, 당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현재 부다페스트의 머르티르시 광장에는 너지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프랑스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그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부다페스트의 야사이 마리 광장에 있는 임레 너지 동상

3. 사후

너지를 대신하여 집권한 카다르 야노시 정권은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봉기가 진압된 후 카다르 정권은 자주 관리 도입 등 일부 유화 정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너지는 공산주의를 배반한 반당 분자로 취급하며 그의 명예를 깎아내렸다. 너지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추진되고 그 영향으로 헝가리 내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진 이후였다.

헝가리의 스탈린주의 지도부가 너지 임레의 죽음을 기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고 그의 묘소 접근을 막았던 시기인 1988년 6월 16일, 프랑스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위령비가 먼저 세워졌다.

1989년 6월 16일, 너지 임레가 처형된 지 31년 만에 그의 유해는 명예 회복과 함께 다시 매장되었다. 이 재매장식은 당시 스탈린주의 정권에 반대하던 민주 야당이 일부 주도하여 열렸으며, 국가적인 장례식으로 치러졌다.[22]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너지 임레의 재장례식에 참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사건은 헝가리 공산주의 정부의 종식을 앞당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너지 임레는 헝가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국가 구제를 위해 싸우고 스탈린주의를 억제했으며, 부정을 용납하지 않고 반혁명과 싸웠다. 그의 길은 잘못되었을지 모르나, 민주적 복수 정당제를 인정하는 사회주의의 길과 일치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사실상 너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29]

1989년 6월 16일 너지 임레의 재장례식. 장례식 연설자 중 한 명은 젊은 오르반 빅토르였으며, 그는 민주적인 선거와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부다페스트의 마르티루스 광장에는 1996년 너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2018년 12월 28일 오르반 빅토르의 우익 정부는 이 동상을 부다페스트 중심부에서 덜 중심적인 야르사이 마리 광장으로 이전했다. 정부는 동상이 있던 자리에 호르티 미클로시의 친나치 정권 시절(1934-1945)에 있었던 1919년 적색 공포 정치 희생자 기념물을 복원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또한 정부 지지자들은 이 계획이 도시 경관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형태로 복원하고 "공산주의 시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시도라고 주장했다.[23][24][25][26] 그러나 주로 자유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남은 공산주의 정당들은 오르반 정부의 이러한 행위를 역사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다.

현재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너지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4. 유산



헝가리의 스탈린주의 지도부는 너지 임레 사후 그의 죽음을 기리거나 묘소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의 명예를 기리는 위령비가 1988년 6월 16일 프랑스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 세워졌다.

1989년, 너지 임레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그의 유해는 처형 31주년이 되는 해에, 당시 민주 야당이 일부 주최한 장례식을 치른 후 부다페스트의 공동묘지에 다시 안장되었다.[22] 이 재장례식에는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부의 종식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재장례식의 연설자 중에는 젊은 시절의 오르반 빅토르도 있었는데, 그는 민주적인 선거 실시와 소련군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너지를 대신해 집권한 커다르 야노시는 시위대와 자유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 동란이 수습된 후 커다르 정권은 일부 유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지만, 너지 임레는 여전히 공산주의를 배반한 '반당 분자'로 취급되었다. 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 영향으로 촉발된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기다려야 했다.

1989년 6월 16일, 너지의 유해 재매장식이 거행되자[29]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너지를 "헝가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국가 구제를 위해 싸우고 스탈린주의를 억제했으며, 부정을 용납하지 않고 반혁명과 싸웠다"고 평가하며, "그는 길은 잘못했지만, 민주적 복수 정당제를 인정하는 사회주의의 길과 일체화되었다"고 덧붙여 사실상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부다페스트의 마르티루스 광장에는 너지 임레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2018년 12월 28일, 오르반 빅토르가 이끄는 우익 정부는 이 동상을 부다페스트 중심부에서 덜 중심적인 야르사이 마리 광장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이전은 2019년 5월에 이루어졌다.)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호르티 미클로시의 친나치 정권 시기인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1919년 적색 공포 정치 희생자 기념비를 복원하여 세웠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 사회주의 정당 등 야권은 오르반 정부가 역사 수정주의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정부 지지자들은 이 조치가 도시 경관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고 "공산주의 시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23][24][25][26]

너지 임레가 1955년 4월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해임된 이후 작성한 글들은 헝가리에서 비밀리에 반출되어, 1957년 서방 세계에서 ''공산주의에 관하여: 새로운 노선을 옹호하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5. 가족

너지 임레는 Mária Égető|에게퇴 마리아hun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너지 에르제베트( Erzsébet Nagyhun, 1927년–2008년)를 두었다.[27] 너지 에르제베트는 헝가리의 작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했다.

너지 에르제베트는 Ferenc Jánosi|페렌츠 야노시hun와 결혼했다. 너지 임레는 딸이 개신교 목사인 페렌츠 야노시와 결혼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1946년에는 정치국의 허가 없이 딸의 종교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5] 1982년 너지 에르제베트는 János Vészi|야노시 베지hun와 재혼했다.[5]

참조

[1] 서적 Oxford BBC Guide to Pronunci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Yurovsky Document https://upload.wikim[...] 2018-12-19
[3] 서적 Chapter XV: Surrounding the royal family by security officers // Murder of the royal family
[4] 간행물 About the team of the executioners of the royal family and its ethnic composition http://magazines.rus[...] 2003
[5] 서적 Failed Illusions: Moscow, Washington, Budapest and the 1956 Hungarian Revolt Stanford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Imre Nagy's unknown life, in Magyar Narancs http://www.mancs.hu/[...]
[7] 서적 '1956: The World in Revolt.' Pegasus Books
[8] 서적 Imre Nagy. Political biography 1953–1958. (Volume II) 1956 Institute, Budapest
[9] 서적 Chronicle 1956 Kossuth Publisher – Tekintet Alapítvány
[10] 서적 From Stalinism to Pluralism
[11] 서적 Communists in the Revolution, Gábor Gyáni – Rainer M. János (ed.): Thousand Ninety-Seventy in the New Historical Literature, Symbol and Idea History of the Revolution 1956 Institute, Budapest
[12] 서적 'The Hungarian Revolution of 1956' Longman House
[13] 간행물 Imre Nagy, Radio News of 4 November 1956 and the Geneva Conventions 2007/1
[14] 서적 '1956: The World in Revolt.' Pegasus Books
[15] 웹사이트 Imre Nagy: A Biography' https://reviews.hist[...]
[16] 뉴스 "Hungary: U.S. President To Honour 1956 Uprising" http://www.rferl.org[...] 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 2006-06-20
[17] 문서 The Counter-revolutionary Conspiracy of Imre Nagy and his Accomplices Information Bureau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the Hungarian People's Republic
[18] 뉴스 "What the Hungarians wrought: the meaning of October 1956" http://www.encyclope[...] National Review 2006-10-23
[19] 서적 Inside Europe Today https://books.google[...] Harper & Brothers
[20] 뉴스 Budapest Journal; The Lasting Pain of '56: Can the Past Be Reburied? https://query.nytime[...] 1989-02-08
[21] 문서 1798 Friedrich Schiller "Song of the Bell"
[22] 뉴스 Hungarian Who Led '56 Revolt Is Buried as a Hero https://query.nytime[...] 1989-06-17
[23] 웹사이트 Hungary removes uprising hero's statue https://www.bbc.com/[...] BBC 2019-01-26
[24] 웹사이트 The Relocation of Imre Nagy's Statue Draws Controversy https://hungarytoday[...] HungaryToday 2021-04-24
[25] 웹사이트 Hungary removes statue of anti-Soviet icon Imre Nagy – DW – 29.12.2018 https://www.dw.com/e[...] 2019-01-26
[26] 웹사이트 Hungary's Orban under fire for removing statue https://www.thesunda[...] 2019-01-26
[27] 뉴스 Erzssebet Nagy, only child of Hungary's 1956 revolution prime minister Imre Nagy, dies http://www.pr-inside[...] PR-inside.com 2008-02-14
[28] 웹사이트 ハンガリー動乱1956 写真特集:時事ドットコム https://www.jiji.com[...] 2022-05-29
[29] 웹사이트 ナジ・イムレ改葬式とは https://kotobank.jp/[...] 2021-06-15
[30] 문서 《유럽인물열전 2》
[31] 문서 《빌리 브란트》
[32] 문서 《유럽인물열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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