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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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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위치한 로마-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으로, 13세기에 작은 예배당으로 시작하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6세기에는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프랑스 혁명 기간에는 폐쇄되었다가 재개되었다. 19세기 중반에 현재의 대성당이 건설되었고,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대대적인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다. 성당은 마르세유 시민들에게 '본 메르'로 불리며 도시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다양한 엑스보토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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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마르세유 -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
시내 중심가에서 바라본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위치프랑스 마르세유
종교로마 가톨릭
관구마르세유 대교구
축성1864년
지위미성년 바실리카
건축 양식비잔틴 리바이벌 건축
착공1853년
완공1897년
크기
높이약 149 m
최대 높이41 m
상세 정보
프랑스어 명칭Basilique Notre-Dame de la Garde
문자 그대로 번역수호 성모 마리아 대성당
재료

2. 역사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이 위치한 언덕은 해발 162m 높이의 석회암 언덕으로,[1] 높은 지형과 해안과의 근접성 때문에 예로부터 마르세유의 중요한 전망대이자 요새, 그리고 항해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다. 1302년 안주의 샤를 2세는 이곳에 봉수대를 설치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성당의 역사는 1214년, 사제 피에르가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작은 예배당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이 예배당은 생 빅토르 수도원 소속이었으며, 이후 선원들의 봉헌 장소로 점차 중요해졌다. 15세기 초에는 더 큰 건물로 증축되었다.

16세기에는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카를 5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예배당을 포함한 언덕 전체가 요새화되었다. 이로 인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는 성지와 군사 시설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 되었다. 이후 종교 전쟁과 프롱드의 난 등 여러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성당이 폐쇄되고 성모상이 녹여지는 등 수난을 겪었으며, 잠시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혁명 이후 1807년에 다시 문을 열었으며, 19세기에는 방문객 증가로 예배당이 확장되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고 성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19세기 중반,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대성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앙리자크 에스페랑디외의 설계로 로마-비잔틴 양식의 현재 건물이 1853년부터 1897년까지 약 40여 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마리 조제핀' 종과 거대한 도금 성모상이 제작되어 설치되었다.

1892년에는 언덕을 오르는 불편을 덜기 위해 푸니쿨라가 설치되어 1967년까지 운영되었다. 이 푸니쿨라는 '엘리베이터'(ascenseur|아상쇠르fra)로 불리며 많은 방문객을 실어 날랐다. 84m의 수직 거리를 이동했으며, 75년간 약 2천만 명의 승객을 수송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8월, 마르세유 해방 전투 당시 성당은 독일군이 점령한 최후의 거점 중 하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이 탈환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손상을 입기도 했다.

20세기 후반, 성당 내외부는 노후화와 이전의 잘못된 복원으로 인해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에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모자이크와 석조 구조물 등이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2. 1. 초기 예배당 (13세기)

바실리카 앞의 그리스도의 수난


1214년, 마르세유의 사제인 마스터 피에르는 생-빅토르 수도원에 속한 라 가르드 언덕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는 예배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수도원장은 그에게 포도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며 예배당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4년 뒤 완공된 이 예배당은 1218년 6월 18일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수도원의 소유물을 열거한 교황 칙서에도 언급된다. 마스터 피에르가 1256년에 사망한 후,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는 수도원이 되었으며, 이곳의 수도원장은 생-빅토르의 네 명의 수도원장 중 한 명이기도 했다.[2]

예배당 설립 이후, 여러 유언장을 통해 유산이 기증되었다.[2] 또한, 과거에는 난파 사고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이 감사의 표시로 노트르담-뒤-몽 교회의 바다의 노트르담에 봉헌물을 바쳤으나, 16세기 말부터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에 봉헌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예배당은 15세기 초에 성 가브리엘에게 헌정된 예배당을 포함하여 더 큰 규모의 건물로 대체되었다.

2. 2. 요새와 성당 (16-18세기)

오래된 오노레 채석장


성당 본당 내부


성당이 세워진 바위는 바레미안 시기에 형성된 우르곤 석회암으로, 높이는 해발 162m이다.[1] 이 언덕은 높은 위치와 해안과의 근접성 덕분에 예로부터 중요한 요새이자 전망대, 그리고 항해의 지표 역할을 해왔다. 1302년, 안주의 샤를 2세는 프로방스지중해 해안을 따라 봉화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는데,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언덕도 그중 하나였다. 15세기에도 나폴리의 샤를 2세가 이곳의 경비 초소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다.[3]

옛 요새의 첨탑


현재의 성당 건물은 프랑수아 1세가 1536년에 건설한 16세기 요새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이 요새는 1536년 마르세유 포위 공격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프랑수아 1세는 1516년 마리냐노 전투 승리 직후 마르세유를 방문했을 때 도시 방어의 취약점을 인지했다. 그의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와 아내 클로드 드 프랑스는 1516년 1월 7일에, 프랑수아 1세 본인은 1월 22일에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의 성지를 참배했다. 1524년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와 카를 5세 황제가 마르세유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간 사건 이후, 방어 시설 강화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두 개의 요새 건설을 명했는데, 하나는 이프성이 된 이프 섬에, 다른 하나는 예배당을 포함하여 라 가르드 언덕 꼭대기에 지어졌다. 이로 인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는 대중에게 개방된 성지와 군사 시설이 공존하는 독특한 장소가 되었다.

프랑수아 1세의 문장


이프성은 1531년에 완공되었으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요새는 1536년에야 완공되어 카를 5세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사용되었다. 요새 건설에는 카프 쿠론의 돌과 함께, 적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할 수 있는 도시 성벽 밖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얻은 자재가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현재의 쿠르 벨쑨스(Cours Belsunce)와 쿠르 생 루이 근처에 있던, 투르의 루이가 묻힌 미노르 수도원도 포함되었다.[4]

요새는 세 변의 길이가 각각 약 75m와 35m인 삼각형 모양이었다. 이 비교적 작은 군사 시설의 흔적은 현재 성당 서쪽에 있는 첨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첨탑은 1930년에 감시탑으로 개조되었다가 1993년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요새 정문 위에는 프랑스의 상징인 세 개의 백합 문양과 그 아래 도롱뇽이 새겨진 프랑수아 1세의 문장이 심하게 손상된 채 남아있다. 그 옆 오른쪽에는 사도 요한의 깃발을 든 어린 양을 묘사한 둥근 돌 조각이 풍화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1575년 마르세유 지도. 전경에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요새가 보인다. 브라운과 호겐베르크, Civitates Orbis Terrarum, II-12


1585년, 프로방스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 위베르 드 가르드 드 방은 마르세유를 점령하기 위해 제2 집정관 루이 드 라 모트 다리에스와 블랑케리 구역 대장 클로드 보니파스와 손을 잡으려 했다. 1585년 4월 9일 밤, 다리에스가 라 가르드 요새를 점령하여 도시를 향해 대포를 겨눌 수 있게 되었으나, 마르세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다리에스와 공범 보니파스는 처형되었다.

샤를 드 카소


1591년, 사보이 공작 샤를 에마뉘엘 1세는 항구 근처의 생 빅토르 수도원을 점령하려 했다. 그는 당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의 지사였던 피에르 봉, 메올롱 남작에게 수도원 점령을 지시했다. 1591년 11월 16일 메올롱이 수도원을 점령했지만, 마르세유의 제1 집정관 샤를 드 카소에 의해 즉시 탈환되었다. 1594년, 샤를 드 카소는 두 명의 사제, 트라뷔크와 카보를 보내 예배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게 했다. 트라뷔크는 사제복 아래 갑옷을 입고 있었고, 의식이 끝난 후 요새의 대장을 살해했다. 샤를 드 카소는 요새를 점령하고 아들 파비오를 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1596년 2월 17일, 피에르 드 리베르타에 의해 샤를 드 카소가 암살되자 파비오는 부하들에 의해 요새에서 쫓겨났다.

1622년 11월 9일, 루이 13세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을 방문하여 당시 지사였던 방돌 영주 앙투안 드 부아예의 영접을 받았다. 앙투안이 1642년 6월 29일에 사망하자, 소설가로 유명한 조르주 드 스퀴데리가 후임 지사로 임명되었으나 실제 부임은 1644년 12월에 이루어졌다. 그는 누이동생 마들렌 드 스퀴데리와 함께 이곳에 머물렀는데, 마들렌은 편지를 통해 당시의 풍경과 여러 축제 및 의식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지난 금요일... 머리부터 발끝까지 10개 이상의 깃발로 뒤덮인 성채와 우리 탑의 종이 흔들리고, 성으로 돌아가는 놀라운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왼팔에 알몸의 아이를 안고 오른손에 꽃다발을 든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조각상은 맨발의 참회자 여덟 명이 유령처럼 가린 채 운반했다."라고 묘사했다. 조르주 드 스퀴데리는 요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당시 귀족 지구였던 랑슈 광장(Place de Lenche)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요새 관리는 니콜라라는 하사관에게 맡겨졌다.[5]

1650년 카즈 사건 당시, 프로방스 지사 알레 백작은 프롱드 난 중 프로방스 의회에 반기를 든 마르세유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는 전략적 요충지인 라 가르드 요새를 확보하기 위해 하사관 니콜라를 매수하고, 1650년 8월 1일 자신의 부하 다비드 카즈를 요새에 배치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도시 툴롱에서 온 갤리선의 공격을 지원하려 했으나,[5] 마르세유 영사들이 이에 대응하여 다비드 카즈를 요새에서 몰아냈다.

1701년,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베리 공작 샤를이 성소를 방문했다. 같은 해, 세바스티앵 보방은 생니콜라 요새 건설자인 루이 니콜라 드 클레르빌의 뒤를 이어 마르세유 방어 시설 개선 방안을 연구했다. 1701년 4월 11일, 보방은 생니콜라 요새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를 연결하여 현재의 장 조레스 광장과 아랭크(Arenc) 부두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방벽을 건설하는 계획을 제안했지만,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1720년 마르세유 대역병으로 약 10만 명이 사망했을 때, 앙리 드 벨선스 주교는 1720년 9월 28일, 1720년 12월 8일, 1721년 8월 13일 세 차례에 걸쳐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예배당까지 걸어 올라가 도시 주민들을 위해 축복 기도를 올렸다.

2. 3. 프랑스 혁명 시기 (18세기 말-19세기 초)

1790년 4월 30일, 요새는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한다는 구실로 도개교를 건너온 반성직자 혁명가들의 침략을 받았다. 이는 1594년 가톨릭 동맹(리그)이 사용했던 책략과 같았다.[6] 1792년 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에는 전통적으로 열리던 큰 행렬이 시위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성소로 돌아가는 동안 성모상은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 스카프로 감싸였고, 아기 예수의 머리에는 프리자 모자가 씌워졌다.

1793년 4월, 국왕 루이 16세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는 그의 두 아들인 몽팡시에 공작과 보졸레 백작, 그의 여동생 부르봉 공작 부인 및 콩티 공과 함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에 몇 주 동안 수감되었다. 총독의 오래된 아파트는 편의 시설이 부족했지만, 죄수들은 탁 트인 경치를 즐겼다. 매일 부르봉 공작 부인은 미사에 참석한 후 요새의 테라스에서 종종 2시간 정도 명상에 잠겼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부르봉 공작 부인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에서 본 마르세유의 연필 그림을 남겼다. 이후 죄수들은 생 장 요새로 이송되었다.

1793년 11월 23일, 교회 건물은 폐쇄되고 예배가 중단되었다. 1794년 3월 13일, 1661년에 은으로 만들어진 성모상은 마르세유 조폐창에서 녹여졌다. 이 조폐창은 메르세데르 수녀회의 옛 수도원이 있던 22 타피-베르 거리에 위치했다.[6]

꽃다발을 든 성모


1795년 4월 10일, 성소의 마지막 남은 물품들이 경매에 부쳐졌다. 예배당은 국유화되어 조제프 에스카라마뉴에게 임대되었다. 현재 콜로넬-에동 광장에 살았던 전직 선장 에스카라마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다. 일부 교구에서 예배가 재개되자, 그는 1800년 9월 전쟁부 장관 라자르 카르노에게 성소를 다시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장관이 의견을 묻자 샤를 프랑수아 들라크루아 행정관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마침내 예배당은 1807년 4월 4일에 다시 문을 열고 예배가 재개되었다.

에스카라마뉴는 혁명 기간 동안 철거된 피쿠스 신부회의 수도원에서 18세기에 만들어진 성모와 아기 예수 조각상을 경매에서 구입했다. 그는 이 조각상을 라 가르드 교회에 기증했다. 성모가 들고 있던 홀은 꽃다발로 대체되었고, 이 조각상은 Vierge au bouquet|비에르주 오 부케프랑스어(꽃다발의 성모)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조각상은 1837년에 새로운 은제 조각상이 만들어지면서 Chartreuse de Montrieux|샤르트뢰즈 드 몽트리외프랑스어로 옮겨졌다가, 1979년에 다시 성소로 돌아왔다. 현재 꽃다발의 성모 조각상은 지하 예배당의 제단에 전시되어 있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 예배당이 다시 문을 연 날, 마르세유 대성당에서 행렬이 시작되어 에스카라마뉴가 구입한 조각상이 성소로 운반되었다. 전통적인 성체 축일(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행렬은 1814년에 재개되었다. 줄리 펠리조네는 일기에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14년 6월 12일 일요일, 성체 축일에 시 방위대의 포병들이 맨발의 참회자들과 함께 '수호의 성모'를 모시고 고대 관습에 따라 그녀를 마을로 모셔왔다. 그녀는 여러 차례의 대포 발사로 환영받았다. 미사가 거행된 후, 그녀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참회자들이 얼굴을 가린 채 행렬을 이루며 성소로 다시 운반되었다."[8]

2. 4. 대성당 건축 (19세기 중반)

이 시기 동안 요새 자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예배당을 찾는 방문객 수는 크게 늘어났다. 방문객이 너무 많아지자, 1833년에는 기존 150m2 규모의 예배당에 두 번째 본당을 추가하여 면적을 약 250m2로 확장했다. 마르세유의 주교인 Fortuné de Mazenod|포르튀네 드 마제노드프랑스어는 1834년에 이 확장된 예배당을 축성했다.

상부 성당의 은제 성모상


다양한 봉헌물 덕분에 새로운 성모상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823년 5월 마르세유를 여행하던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3,000프랑을 기증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동안 녹아 없어진 기존 성모상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1829년, Rue des Dominicaines프랑스어에 작업장을 둔 마르세유의 금세공 장인 장-밥티스트 샤누엘(Jean-Baptiste Chanuel)은 조각가 장피에르 코르토의 모델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모상 제작을 시작했다. 매우 섬세한 망치질 기법으로 제작된 이 은제 성모상은 5년 후인 1834년에 완성되었다. 1837년 7월 2일, Fortuné de Mazenod프랑스어 주교는 Cours Belsunce프랑스어에서 이 조각상을 축복했고, 이후 언덕 위 성당으로 옮겨졌다. 이 은제 성모상은 기존에 있던 '부케의 성모상'을 대체했으며, 부케의 성모상은 Chartreuse de Montrieux프랑스어 수도원에 기증되었다가 1979년에 다시 지하 묘소로 돌아왔다. 이 두 성모상(부케의 성모상과 은제 성모상)은 현재의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부터 존재했다.

1850년 6월 22일, 예배당 책임자였던 장-앙투안 베르나르(Jean-Antoine Bernard) 신부는 국방부에 기존 건물의 확장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그가 사임한 날인 1850년 10월 22일, 알퐁스 앙리 도풀 국방 장관에 의해 내용이 너무 모호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장관은 이론적으로 확장에 동의했지만, 더 구체적인 계획안을 요구했다. 1851년 4월 8일, 기존 건물의 면적을 두 배로 늘리는 더 크고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겠다는 구체적인 요청이 다시 제출되었다. 이 설계안은 요새 내에 더 이상 군사 건물을 위한 공간이 남지 않음을 의미했다. 아돌프 니엘 장군의 지원 덕분에 요새화 위원회는 1852년 1월 7일에 이 제안을 지지했고, 마침내 1852년 2월 5일 국방 장관으로부터 새로운 예배당 건설 허가를 받았다.

1852년 11월 1일, 외젠 드 마제노드(Eugène de Mazenod) 몬시뇰은 교구 신자들에게 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를 요청했다. 여러 건축가에게 설계 연구를 의뢰했으며, 예배당 관리 위원회는 약 두 달 후인 12월 30일에 마제노드 몬시뇰과 회의를 가졌다. 마르세유 대성당 건축에도 참여했던 레옹 보두아예가 제시한 로마-비잔틴 양식의 설계안이 유일하게 채택되었는데, 다른 제안들은 모두 네오 고딕 양식이었다. 각 프로젝트가 5표씩 동률을 이루었지만, 부제(vicar general)가 결정권을 행사하여 보두아예의 안을 선택했다. 하지만 실제 계획 도면은 당시 23세에 불과했던 보두아예의 제자 앙리자크 에스페랑디외가 작성했다.

1853년 6월 23일, 에스페랑디외는 정식 건축가로 임명되어 프로젝트 개발을 맡게 되었다. 그가 개신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가 공사 책임 위원회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 주요 원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는 에스페랑디외와 상의 없이, 생-미셸 교회의 계약자이자 건축가였던 피에르 베렝제(Pierre Bérenger)에게 직접 공사를 맡기기로 결정했다(1853년 8월 9일). 베렝제는 네오 고딕 양식의 계획안 중 하나를 제출했던 인물이며, 마제노드 몬시뇰의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12] 위원회는 또한 조각가 조제프마리우스 라뮈와 뒤셀도르프 출신 화가 카를 뮐러 같은 예술가들을 그들의 작품이 성당 구조와 어울리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선정했다. 카를 뮐러에 대한 위탁은 나중에 취소되었고, 이로 인해 건축가는 내부 장식을 모자이크로 변경할 수 있었다.[13]

2. 5. 종탑과 성모상 (19세기 후반)

1843년 종탑 재건과 함께 새로운 종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특별 모금으로 부르동도 구매하게 되었는데, 이는 제데옹 모렐의 리옹 주조소에서 주문 제작되었다. 1845년 2월 11일에 주조되었고 1845년 9월 19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장 조레스 광장에 설치되었으며 1845년 10월 5일 일요일에 외젠 드 마제노에 의해 축성되었고 "마리 조제핀"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종의 대부는 당시 마르세유 시장이었던 앙드레-엘리제 레이나르였고, 대모는 해운 거물 뷜프랑 퓌제(본명 카나플)의 아내였다. 그들의 이름은 종에 새겨져 있다. 10월 7일, 8234kg 무게의 종은 16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티에르 거리, 레옹 갬베타 골목, 타피-베르 거리, 쿠르 벨쑨스, 카네비에르, 뤼 파라디 및 쿠르 피에르-퓌제를 지나갔다. 10마리의 말이 더 동원되어 총 26마리가 되었다. 1845년 10월 8일, 종을 언덕 위로 올리는 작업은 케이프의 도움을 받아 시작되었고, 종이 정상에 도착한 10월 10일 금요일까지 계속되었다. 종은 10월 15일 수요일에 설치되었다. 무염시태 축일인 12월 8일에 첫 소리를 냈다.

1845년의 종, 석판화


이 기회에 시인 조제프 오트랑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 "노래하라, 거대한 종아! 노래하라, 복된 종아

: 너의 강력한 조화를 널리 퍼뜨려라;

: 바다 위로, 들판 위로, 산 위로 쏟아져 내려라;

: 그리고 특히 네 찬송가가 시작되는 이 순간부터

: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를 위해 거대한 기쁨의 노래를 하늘에 울려 퍼져라!"[11]

이 종은 현재 바실리카 건물이 건설되기 전에 설치되었으나, 이후 새로운 종탑이 완공되면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1853년 9월 11일, 마르세유의 주교 드 마제노가 새 바실리카의 첫 번째 돌을 놓았다. 공사는 단단한 암반 위에 기초를 놓아야 했기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에 빠르게 부딪혔다. 1855년 정부가 복권을 허가했지만 수입은 예상보다 적었다. 성소 위원회가 합창단 아래뿐만 아니라 전체 상부 아치 아래까지 지하 묘소를 확장하기로 결정하면서 재정 부족은 더욱 심화되었다. 주교의 개인 자산으로 대출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1859년부터 마제노 주교가 사망한 1861년까지 공사가 중단되었다. 새로운 주교 파트리스 크뤼스는 1861년 8월 말에 도착하여 공사를 재개했다. 1860년 9월 9일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를 방문했던 나폴레옹 3세 황제와 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부터 가장 가난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와 사회 계층의 시민들이 기부하여 공사를 완수할 수 있었다. 성소는 1864년 6월 4일 토요일, 로마 교황청의 일원인 빌쿠르 추기경과 다른 43명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다.

종탑, 종탑과 아이를 안고 있는 성모상


바실리카. 엽서, c. 1910


1866년, 상부 교회에 모자이크 바닥이 깔리고 사각형 종탑이 완성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앞서 언급된 '마리 조제핀' 종이 설치되었다. 1867년에는 기념비적인 성모상을 세우기 위해 사각 종탑 위에 원통형 받침대, 즉 종탑(campanile)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이 성모상 제작 비용은 마르세유 시에서 지원했다. 외젠 루이 르퀘스네, 에메 밀레, 샤를 쥐메리 세 명의 파리 예술가가 제출한 조각상 스케치를 건축가 에스페랑디외, 마르세유 시장 테오도르 베르넥스, 미술학교장 필리프 오귀스트 장롱, 조각가 앙투안 봉투, 그리고 성소 관리자 루스가 심사하여 르퀘스네의 안을 최종 선택했다.[14]

정상에 있는 조각상, 1869년경 촬영된 사진


비용과 무게를 고려하여 조각상 재료로는 구리가 선택되었다. 당시 매우 새로운 기술이었던 전기도금 방식이 전통적인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구리 세공 대신 채택되었다. 1866년 11월 19일의 과학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 도금 구리는 "흠 잡을 데 없는 복제"가 가능하며 필요한 견고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이 기술이 마르세유의 대기 오염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건축가 에스페랑디외는 조각상을 언덕 위 종탑 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어려움을 고려하여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하도록 했다. 그는 조각 중심부에 철제 기둥을 삽입하여 나선형 계단의 중심축 역할을 하도록 설계했는데, 이는 유지보수 및 관람 목적으로 성모상 머리까지 이어지도록 계획되었다. 이 금속 구조는 조각상을 지지하며 타워 본체와 연결되어 전체 구조물을 안정적으로 고정하는 역할도 했다. 샤를 크리스토플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조각상은 1869년 8월에 완성되었다.

첫 번째 부분이 1870년 5월 17일에 조립되기 시작하여, 조각상은 1870년 9월 24일에 봉헌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세당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프랑스 전체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어 성대한 축하 분위기는 아니었다. 조각상 표면에는 금박을 입혔는데, 이때 500g의 금이 사용되었다. 이후 1897년, 1936년, 1963년, 1989년에 다시 금박 작업이 이루어졌다.[15]

1871년 3월 가스통 크레미외는 혁명적인 마르세유 코뮌을 선포했다. 주세페 가리발디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은 코뮌 지지자들은 론 삼각주 행정청을 점령하고 지사를 포로로 잡았다. 1871년 3월 26일, 앙리 에스피방 드 빌르부아네 장군은 오바뉴로 후퇴했으나 4월 3일부터 도시 탈환 작전을 시작했다.[16] 행정청에 있던 코뮌 지지자들은 생 니콜라 요새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에 설치된 포대에서 발사된 포격을 받았다. 그들은 4월 4일에 항복했으며, 이때 성모상의 이름을 바꾸어 "폭격의 노트르담"으로 불러야 한다는 빈정거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874년 9월 11일 건축가 에스페랑디외가 사망한 후, 앙리 레부아가 바실리카 내부 작업, 특히 모자이크 완성을 이어받았다. 주요 지하 묘실 건설과 합창단 모자이크 설치는 1882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884년 6월 5일 화재가 발생하여 제단과 합창단 모자이크가 파괴되었고 성모상 일부도 손상되었다. 조각상과 모자이크는 복원되었으며, 제단은 레부아의 설계에 따라 재건되었다. 1886년 4월 26일, 샤를 라비제리 추기경이 새로운 지하 묘실을 축성했다. 1886년에는 호두나무로 만든 칸막이가 합창단에 설치되었고, 측면 금고의 마지막 모자이크는 1887년에서 1892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1897년에는 상부 교회의 청동 문 2개와 그 위의 모자이크가 설치되었으며, 성모상에 처음으로 다시 금박을 입히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바실리카는 첫 돌을 놓은 지 40년 이상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완공되었다.

2. 6. 프랑스 해방 (20세기 중반)

1944년 8월 24일, 마르세유 해방 작전 중 조제프 드 므사베르 장군은 아이메 쉬드르 장군에게 독일 국방군이 점령하고 있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는 "공습 금지, 대규모 포병 사용 금지. 이 상징적인 언덕은 장갑 전차의 지원을 받는 보병에 의해 공격받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이 포함되어 있었다.[18] 주요 공격 임무는 알제리 제7 연대(7e régiment de tirailleurs algériensfra) 제1 중대를 지휘하는 피샤방 중위에게 맡겨졌다.[19]

1944년 8월 25일 오전 6시, 프랑스군은 언덕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지만, 독일군 저격수들의 공격으로 인해 이동 속도는 매우 더뎠다. 이때 프랑스 국내군(FFI) 소속으로 이 지역 지리에 밝았던 피에르 셰-브라이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셰르셸 거리 26번지(현재의 쥘-물레 거리 Rue Jules-Mouletfra)에 있는 건물 내부 통로를 통해 독일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계단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알고 있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이를 기념하는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로제 오디베르의 지휘 아래 알제리 병사들은 이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셰르셸 고원에 도달했다. 다른 부대들은 같은 이름의 대로에서 노트르담 언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공격을 시도했다. 북쪽에서 공격하던 병사들은 독일군 벙커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생 니콜라스 요새( Fort Saint-Nicolasfra)에서 발사된 포탄에 후방을 공격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차의 지원은 필수적이었다.[20]

마르세유 해방 전투 중 피격된 '잔 다르크' 전차


오후가 되자, 프랑스 제1기갑사단 제2 기갑 연대의 전차들이 현재의 앙드레-오네 대로(Boulevard André-Aunefra)인 가지노 대로와 성당 경사로를 통해 공격에 가담했다. 이 과정에서 '잔 다르크'(Jeanne d'Arcfra) 전차는 정면 공격을 받아 콜로넬 에동 광장에서 멈춰 섰고, 탑승했던 병사 3명이 전사했다. 이 전차는 오늘날에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있다. 또 다른 전차인 '조르당'(Jourdanfra)은 지뢰를 밟았지만, 바위 돌출부 덕분에 파괴되지 않고 계속해서 독일군 진지를 향해 사격할 수 있었다. 이 사격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조르당'의 포격으로 독일군 화염방사기 담당 하사관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독일 병사가 너무 일찍 화염방사기를 발사했고, 프랑스군은 이를 통해 화염방사기의 위치를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20]

오후 3시 30분경, 로제 오디베르가 이끄는 알제리 제7 연대 제1 중대 일부 병력이 리폴과 합류하여 마침내 언덕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성당 지하 묘지에 피신해 있던 보렐 몬시뇰이 그들을 맞이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종탑 꼭대기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지만, 이후에도 안젤루스와 생 니콜라스 요새에서 날아오는 포격을 견뎌야 했다. 저녁 무렵,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의 독일군 지휘관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마르세유는 1944년 8월 28일 오전에 완전히 해방되었다.[21]

2. 7. 복원 (21세기 초)

2001년까지 성당 내부 외관은 심하게 노후되었으며, 특히 전쟁 이후 잘못 복원된 모자이크의 상태가 심각했다. 이에 따라 4년간의 예비 연구를 거쳐 2001년 건축가 자비에 다비드(Xavier Davidfra)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2008년까지 이어졌으며, 필요한 자금은 지방 정부 기관과 개인 및 기업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복원 과정에서 외부 석재의 상태가 문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석재는 비교적 튼튼했지만, 녹색의 골폴리나(Gonfolinaita) 석재는 산업 및 가정 오염, 특히 석탄 연기에 취약하여 3cm에서 5cm 깊이까지 부식된 상태였다. 피렌체 근처의 원래 채석장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키안티 근처 포도밭에 있는 새로운 채석장에서 150m3의 골폴리나를 공급받아 교체 작업을 진행했다. 교체된 석재는 오염에 강하도록 특수 처리되었다.[25] 또한, 녹슨 금속 보강재가 석재를 갈라지게 하는 문제도 발견되었다. 특히 종의 흔들림을 대비한 종탑 상단 보강재와 기념 조각상을 지지하는 보강재에서 문제가 심각했다. 일부 보강재는 음극 보호 처리되었고, 다른 일부는 스테인리스강으로 교체되었다.

내부 복원은 더욱 중요한 작업이었다. 높은 곳의 물기로 손상된 석고를 다시 칠하고, 총알이나 포탄 자국이 남은 모자이크 패널을 복원해야 했다. 이전의 모자이크 수리는 조악하게 이루어져 깨진 타일 자리를 페인트칠한 석고로 메운 상태였고, 모든 모자이크는 촛불 연기로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떨어질 위험이 있는 모자이크는 수지를 주입하여 보강했으며, 특히 손상이 심했던 본당 중앙 돔의 금색 모자이크는 전부 교체되었다.

모자이크 복원은 마르세유 출신 예술가 미셸 파트리지오(Michel Patriziofra)가 맡았다. 그의 작업자들은 베네치아 북부 프리울리의 스필림베르고 학교에서 전통적인 모자이크 제작 기술을 훈련받았다. 복원에 사용된 모자이크 타일은 원래 성당 건축 당시 타일을 제작했던 베네치아의 [https://www.orsoni.com/ Orsoni Venezia 1888] 공방에서 다시 공급받았다.

3. 건축

성당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중 계단과 도개교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의 건축은 신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반으로 하며, 외관은 대조적인 색상의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 흰색 칼리산 석회암과 피렌체 근처에서 가져온 녹색 사암(골폴리나 석재)을 번갈아 사용하여 줄무늬 효과를 냈다. 성당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35m 높이의 이중 계단을 올라 도개교를 건너야 한다. 이 도개교는 아래층의 지하 예배당으로 이어지며, 다른 계단을 통해 상부 교회의 정문으로 접근할 수 있다.

성당은 크게 지하 예배당과 상부 교회, 그리고 높은 종탑으로 구성된다. 지하 예배당은 낮은 아치형 천장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상부 교회는 화려한 다색 대리석과 정교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내부는 약 1200m2에 달하는 모자이크로 덮여 있으며, 바닥 역시 기하학적 문양의 로마 모자이크로 마감되었다. 41m 높이의 정방형 종탑 위에는 원통형 구조물이 더해져 총 11.2m 높이의 거대한 성모 마리아 상을 받치고 있다.

3. 1. 지하 예배당

지하 묘소


종탑 아래의 입구 홀에는 조제프-마리 라뮈스가 조각한 외젠 드 마제노 주교와 교황 비오 9세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입구 양쪽에 있는 계단은 위층의 교회로 이어진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 묘소는 낮은 아치 천장이 있는 중앙 홀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층 교회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6개의 측면 예배당이 있다. 위층 교회와 달리 지하 묘소는 어둡고 침침하다. 측면 예배당에는 다양한 기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있다. 측면 제단은 필로메나, 안드레아, 로즈, 하인리히, 루이, 베네딕토 라브르 성인에게 헌정되었다.[22]

주 제단은 골폴리나 석재와 스페인 대리석 기둥으로 지어졌다. 제단 뒤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마돈나 조각상, 즉 '꽃다발의 성모상'이 있다. 조제프-엘리 에스카라망은 1804년 원래 예배당을 위해 이 조각상을 입수했다. 처음에는 마돈나가 홀을 들고 있었지만, 홀의 상태가 좋지 않아 꽃으로 대체되었다.[23] 주 제단 옆의 두 계단은 위층의 성물실 건물과 성가대로 이어지지만,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3. 2. 종탑과 성모상



1843년 종탑 재건과 함께 새로운 종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특별 모금으로 부르동도 구매하게 되었는데, 이는 리옹에 있는 제데옹 모렐의 주조소에서 주문 제작되었다. 1845년 2월 11일에 주조되었고 1845년 9월 19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장 조레스 광장에 설치되었으며 1845년 10월 5일 일요일에 외젠 드 마제노 주교에 의해 축성되었고 "마리 조제핀"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종의 대부는 당시 마르세유 시장이었던 앙드레-엘리제 레이나르였고, 대모는 해운업자 윌프랑 퓌제 (본명 카나플)의 아내였다. 그들의 이름은 종에 새겨져 있다. 10월 7일, 8234kg 무게의 종은 16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티에르 거리, 레옹 갬베타 골목, 타피-베르 거리, 쿠르 벨쉔스, 카네비에르, 파라디 거리 및 쿠르 피에르-퓌제를 지나갔다. 운반을 위해 10마리의 말이 더 동원되어 총 26마리가 되었다. 1845년 10월 8일, 케이프(선박용 밧줄 감는 장치)의 도움을 받아 종을 언덕 위로 올리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종이 정상에 도착한 10월 10일 금요일까지 계속되었다. 종은 10월 15일 수요일에 설치되었다. 무염시태 축일인 12월 8일에 첫 소리를 냈다.

이 종의 설치를 기념하여 시인 조제프 오트랑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노래하라, 거대한 종아! 노래하라, 복된 종아

너의 강력한 조화를 널리 퍼뜨려라;

바다 위로, 들판 위로, 산 위로 쏟아져 내려라;

그리고 특히 네 찬송가가 시작되는 이 순간부터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를 위해 거대한 기쁨의 노래를 하늘에 울려 퍼져라!"[11]

이 종은 현재의 바실리카 건물이 건설되기 이전에 설치되었다.

1866년, 사각 종탑이 완성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종이 설치되었다. 1867년에는 기념비적인 성모상을 받치기 위해 사각 종탑 위에 원통형 받침대 또는 종탑이 세워졌다. 이 조각상의 제작 비용은 마르세유 시에서 지원했다. 외젠 루이 르퀘스네, 에메 밀레, 샤를 쥐메리 세 명의 파리 예술가가 만든 조각상 스케치를 건축가 에스페랑디외, 마르세유 시장 테오도르 베르넥스, 미술학교장 필리프 오귀스트 장롱, 조각가이자 교수인 앙투안 봉투, 그리고 성소 관리자인 루스가 심사했다. 위원회는 르퀘스네의 디자인을 선택했다.[14]

비용과 무게 때문에 조각상 재료로 구리가 선택되었다. 당시 매우 새로운 방식이었던 전기도금, 즉 "불의 도움 없이 조형하는 기술"이 전통적인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구리 공예 대신 채택되었다. 1866년 11월 19일의 과학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 도금된 구리는 "흠 잡을 데 없는 복제"가 가능하며 필요한 견고성을 제공한다고 평가되었다. 다만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이 기술이 마르세유의 대기 오염에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에스페랑디외는 언덕 위 종탑 꼭대기까지 조각상을 올리는 어려움을 고려하여 조각상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하도록 설계했다. 그는 조각의 중앙에 철 구조물을 삽입했는데, 이는 성모의 머리까지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의 중심축 역할을 하며 유지 보수 및 관광 목적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이 금속 구조는 조각상을 지지하며 타워 본체와 연결되어 전체를 조립할 수 있게 했다. 샤를 크리스토플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조각상은 1869년 8월에 완성되었다.

첫 번째 요소는 1870년 5월 17일에 조립되었고, 조각상은 1870년 9월 24일에 봉헌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여서 국가적인 침체 분위기 속에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조각상에는 금박을 입혔는데, 500g의 금이 사용되었으며, 이후 1897년, 1936년, 1963년, 1989년에 다시 금박 작업이 이루어졌다.[15]

종탑 근접 촬영


입구 현관 위에 세워진 사각형 종탑의 높이는 41m이다. 종탑은 다섯 개의 맹아치로 이루어진 동일한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 중앙 아치에는 창문과 작은 발코니가 있다. 그 위에는 종루가 있는데, 각 면은 붉은색 화강암 분할대로 나뉜 세 개의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뒤에는 차음판이 설치되어 있다. 종루 꼭대기는 사각형 테라스로 덮여 있으며, 각 면에는 마르세유 시의 문장이 새겨진 돌 난간이 있고 각 모퉁이에는 나팔을 든 천사 조각상이 있다. 이 네 개의 천사 조각상은 외젠 루이 르켕이 조각했다.

사각형 테라스 위에는 높이 12.5m의 원통형 종탑(받침대)이 솟아 있다. 이 원통형 종탑은 16개의 붉은 화강암 기둥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높이 11.2m의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지지하고 있다. 종탑 내부에는 테라스와 조각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지만, 일반인의 접근은 제한되어 있다.

탑의 기저부에는 앙리 레볼이 디자인한 청동 문이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를 형성한다. 중앙 문 패널에는 묵주를 연상시키는 진주 원 안에 성모 마리아의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 주요 입구 위의 팀파눔은 루이 스타니슬라스 페브르-뒤페르의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된 성모 승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3. 3. 상부 교회

모자이크 바닥


내부 본당은 길이가 32.7m이고 너비가 14m이다. 각 측면 예배당은 3.8m x 5.4m 크기이다. 내부는 1200m2모자이크와 빨간색과 흰색 대리석 기둥과 벽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Espérandieu는 모자이크와 조화를 이루고 Carrara 대리석의 흰색과 너무 충돌하지 않는 미묘한 붉은색을 원했다. 대리석 작업자 쥘 캉티니는 브리뇰 근처 라 셀(La Celle)의 코뮌에서 노란색과 흰색 정맥이 있는 그런 붉은색 대리석을 발견했다. 더 높은 부분에는 석고, 즉 재구성된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모자이크는 1886년에서 1892년 사이에 의 모라(Mora)사에서 제작되었다. 테세라베네치아에서 가져왔으며 장인들이 최고의 기술로 제작했다. 각 패널은 제곱미터당 거의 만 개의 테세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바실리카에 약 1200만 개의 1cm2 ~ 2cm2의 작은 사각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닥은 약 380m2의 기하학적 패턴의 로마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본당의 측랑은 세 부분으로 균등하게 나뉘며, 각 부분에는 측면 예배당을 비추는 중앙 창문이 있다. 외부의 벽기둥과 아치는 녹색과 흰색 돌과 아치 돌이 번갈아 가며 구성되어 있다. 지면의 지하 창문은 지하 묘소 예배당에 약간의 햇빛을 비춘다. 본당이 측면 예배당보다 높기 때문에, 채광창과 2분 창이 본당의 을 비추지만, 이 창문은 테라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본당 상단에는 내부가 유사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세 개의 쿠폴라가 있다. 꽃밭 위에 비둘기들이 중앙 꽃을 중심으로 원을 이루고 있다. 꽃의 색상은 각 쿠폴라마다 다르다. 동남쪽 쿠폴라는 흰색, 중간 쿠폴라는 파란색, 북서쪽 쿠폴라는 빨간색이다. 펜던티브의 메달에는 구약성서의 장면이 성모 마리아의 전조로 묘사되어 있다.[24]

'''동남쪽 쿠폴라 모자이크'''

동남쪽 쿠폴라 전경


'''중앙 쿠폴라 모자이크'''

중앙 쿠폴라 전경


메노라


향로


북서쪽 쿠폴라의 모자이크는 포도 덩굴, 가시나무 속의 백합, 은빛 잎이 달린 올리브 가지, 대추 야자를 묘사한다.

3. 4. 트란셉트와 후진

트란셉트는 동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기 위에 장미 창이 있는 두 개의 쌍을 이룬 창문으로 빛을 받는다. 트란셉트의 교차부 위에는 지름 9m의 돔을 지지하는 팔각형 톨로베이트가 있으며, 32개의 리브로 구성되고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다. 팔각형의 각 바깥쪽 면에는 두 개의 붉은 화강암 기둥으로 둘러싸인 창문과 삼각형 페디먼트로 덮인 창문이 있다. 반원형 후진은 외부에 다섯 개의 맹아치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 맹아치는 두 개의 붉은 화강암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중에 추가된 성구실 건물은 후진의 일부를 가리고 있다.

돔 내부에는 금색 배경에 네 명의 천사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천사들은 장미 화환을 들고 있는데, 이 화환을 구성 중앙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노그램에 바친다. 돔 기저부의 펜덴티브에는 4대 복음사가: 사자 상징의 마르코, 황소 상징의 루카, 독수리 상징의 요한, 사람 상징의 마태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후진 위의 팀파눔은 성모 영보를 묘사하는데, 오른쪽에 있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왼쪽에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성모 영보


후진의 개요


하얀 대리석 제단은 앙리 레보일(Henri Révoil)이 설계하고, 1882년에서 1886년 사이에 쥘 캉티니(Jules Cantini)가 건설했다. 제단의 받침대는 청금석의 소기둥 위에 놓인 5개의 금박 청동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은도금된 감실은 두 개의 기둥과 성배에서 물을 마시는 두 마리의 비둘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 뒤에는 금도금된 주두가 있는 붉은색 대리석 기둥이 마르세유의 금세공업자 샤누엘이 망치질한 은으로 만든 성모 마리아 상을 받치고 있다.

후진의 반원형 돔의 모자이크는 중앙 메달리온에 배를 묘사하고 있다. 배의 돛에는 성모 마리아의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으며, 하늘의 별은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의미하는 얽힌 A와 M을 보여준다. 이 메달리온은 린소와 공작, 앵무새, 후투티, 유럽의 붉은가슴, 왜가리, 금화조를 포함한 32마리의 새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원형 돔 아래 밴드는 로레토의 호칭 기도의 여러 성모 마리아의 호칭을 나타내는 9개의 메달리온으로 장식되어 있다: ''Foederis Arca, Speculum Iustitiae, Sedes Sapientiae, Turris Davidica, Rosa Mystica, Turris Eburnea, Domus Aurea, Vas Spirituale, Ianua Coeli''.

3. 5. 측면 예배당

본당 양쪽 통로에는 총 6개의 측면 예배당이 있다. 앙리 레보일이 제단을 설계했고, 쥘 캉티니가 제단을 건설했다. 캉티니는 또한 베드로 상을 만들어 성역에 기증했다. 각 제단 묘소에는 해당 성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각 예배당의 천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한쪽에는 후원자의 이름과 문장이, 다른 한쪽에는 성인의 상징이 묘사되어 있다.

측면 예배당 개략도
카를로 보로메오 예배당베다니의 라자로 예배당성 요셉 예배당
입구 ← 중앙 본당 → 성가대
성 로크 예배당마리아 막달레나 예배당성 베드로 예배당



라자로 예배당 천장

4. 문화적 의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방문 기록을 통해 그 문화적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19세기 초, 나폴리에서 돌아오던 중 난파를 겪은 베리 공작부인은 1816년 서원으로 은제 조각상을 봉헌했으며, 루이 16세의 딸인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앙굴렘 공작부인은 1823년에 이곳을 방문하여 경치에 감탄했다. 작가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역시 1838년에 이곳을 찾았다.

현대에 들어서는 1947년 당시 신부였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9]과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여 종교적 의미를 더했다.[10]

또한 성당은 여러 작가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지중해 특유의 신앙심을 보여주는 엑스보토(Ex-voto) 봉헌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성당을 마르세유의 중요한 문화적 상징으로 만들었다.

4. 1. 마르세유의 상징

마르세유 시민들은 노트르담 성당을 도시의 수호자이자 보호자로 여기며, 성당의 별명은 "선한 어머니"라는 뜻의 ''Bonne Mère''이다. 이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별명이기도 하다.

마르세유의 고속도로와 기차역, 생 샤를 역에서 보이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은 도시의 가장 잘 알려진 상징이다. 마르세유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이며, 매일 수백 명의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는 성인, 환상, 기적과 관련이 없고 유명인과도 관련이 없는 장소로서는 주목할 만한 방문객 수이다. 마르세유의 전 주교인 로제 에체가라이 추기경은 가르드 성모를 "이프 성이나 마르세유 구 항구처럼 단순한 풍경의 일부가 아니라, 마르세유의 살아있는 심장이며, 카네비에르보다 더 중심적인 동맥이다. 가톨릭교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마르세유에 넘쳐나는 인류 가족의 것이다"라고 표현했다.[33]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는 대성당보다 더 마르세유 교구의 심장부로 남아있다. 1944년 8월 30일 장 들레이 주교는 이곳에서 심오한 개혁을 통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인간적이고 더 정의로운 생활 및 노동 조건을 가져다주기를 희망했으며, 1978년 5월 에체가라이는 이곳에서 실업의 폐해를 1720년 마르세유의 역병 폐해에 비유하기도 했다.

성층권(고도 )에 있는 La Bonne Mère 모형


2013년 6월 18일, 8세기에 걸친 건물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박물관이 부지에 문을 열었다. 2013년 7월 11일에는 민간 및 군 당국이 참여한 가운데 공식 개관식을 가졌다. 이전의 개조 공사처럼 기금 모금 호소는 공공 기관의 기증 외에도 대중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하는 인기 프랑스 연속극 ''플뤼 벨 라 비''의 로고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를 묘사한다. 마르세유에 본사를 둔 해양 전문 회사는 2017년 해양 시험 발사를 위해 교회의 모형을 사용했으며, 이 상징은 고도 20km의 준우주로 보내졌다.[34]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은 매년 약 150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며, 많은 사람들이 단지 경치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 순례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방문하며, 일부는 방명록에 그 이유를 적는다. 한 방문객은 이러한 이유들을 "저는 이곳에 먼저 성모 마리아의 발치에서 얻는 평화와 위안을 위해 왔고, 그 다음에는 대성당이 제공하는 눈의 향연, 파노라마, 맑은 공기, 그리고 공간, 자유의 느낌을 위해 왔습니다"라고 요약했다.[35]

4. 2. 예술 작품

"바다의 길을 다스리는 그녀,
파도와 태양 위에서 빛나는 그녀,
푸른 시간 뒤에 서 있는 거인,
길고 하얀 나라의 높은 금빛 거주자,
갈리아의 크리스타 파라스."[26]

  • 폴 아렌: "이곳은 진정한 좋은 어머니, 유일한 어머니,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의 돔 아래, 진주와 루비로 뻣뻣하게 장식된 금색 코트를 입고, 별을 위해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단단한 청금석 돔에서 나에게 화를 내주셨다."[27]
  • 샤토브리앙: "나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에 올라, 고대 유명 국가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해안과 폐허로 둘러싸인 바다를 감탄하기 위해 서둘러 갔다."[28]
  • 마리 모론: "바다에서 보이는 것은 그녀, 빛의 정상에서 푸른색으로 둘러싸여, 자신이 그것인지, 그것이 아닌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그리스 프로방스를 지배하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착한 어머니에게 올라가는 것을 놓칠 사람이 있을까?"[29]
  • 미셸 모르: "그리고 산꼭대기에, 착한 성모, 착한 어머니는 이 군중을 바라보며, 증권 거래소 뒤의 야외 암시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공격, 모든 고발, 모든 강간, 육지에 있는 선원들을 돌보는 가르드의 착한 어머니의 가짜 신분증 거래를 주재했다. – 바다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서 하라고!"[30]
  • 앙드레 수아레스: "가르드의 노트르담은 돛대와 같다: 그것은 핀 위에 흔들린다. 바실리카는 깃털 역할을 하는 성모와 함께 날아갈 것이다. 따라서 가르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바실리카와 그 위에 세워진 금빛 구리 조각상. 거기, 다시 한 번, 로마와 비잔틴이 되기를 원하지만, 결코 스타일이 될 수 없는 이 스타일: 로마의 힘도, 비잔틴의 과학도."


폴 시냐크의 그림


많은 화가들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을 배경으로 마르세유 항구를 묘사했다. 점묘주의 발전에 기여한 폴 시냐크는 1905년에 그림을 그렸으며, 현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알베르 마르케는 세 작품을 제작했다. 첫 번째는 1916년에 잉크로 그린 드로잉으로,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두 번째는 1916년에 그린 캔버스 유화 "마르세유의 말"이다. 현재 보르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언덕을 배경으로 항구 부두에 있는 말을 묘사하고 있다. 세 번째 작품은 생트로페의 앙농시아드 미술관에 전시된 "안개 속의 마르세유 항구"로, 형태의 정화가 거리를 나타내는 안개 낀 풍경에서 대성당이 나타난다. 이 그림은 이 화가가 항상 마르세유 항구를 정면에서 묘사하지 않고 때로는 시청 근처 강둑 쪽으로 이젤을 옮겨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언덕을 묘사했음을 보여준다.

샤를 카모앵은 1904년에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를 특징으로 하는 두 개의 캔버스, 겔젠키르헨 미술관의 "통이 있는 옛 항구"와 르아브르 미술관의 "옛 항구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를 그렸다. 이 미술관은 또한 1908년에 라울 뒤피가 그린 "마르세유 항구"라는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1920년에는 마르셀 르프랭(Marcel Leprin)이 "시청에서 본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라는 파스텔 드로잉을 그렸고, 이 작품은 제네바의 프티 팔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루이-마티외 베르딜란은 1920년경 "생장 요새에서 본 운하"를 그렸으며,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의 실루엣이 그림 뒤편에, 배가 전경에 있다. 이 그림은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M.C. 에셔는 1936년에 "마르세유"라는 제목의 도시 목판화를 제작했다.

4. 3. 엑스보토(Ex-votos)

생 피에르 예배당의 엑스보토


지중해 스타일의 종교성은 수많은 봉헌 촛불과 엑스보토를 통해 표현된다. 이는 영적 또는 현세적인 은혜에 대해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표하고, 받은 은총을 선포하고 기억하기 위해 바쳐지는 봉헌물이다.

이러한 관행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는 1425년 8월 11일자 증서인데, 장 엠마르라는 사람이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의 표시로 바친 밀랍 이미지에 대해 5 길더를 지불했다는 내용이다. 19세기 초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던 오뱅-루이 밀랭 드 그랑메종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에 있는 수많은 엑스보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기도실로 이어지는 길은 험하고 어렵다. 예배당은 작고 좁지만, 경건한 선원들의 공물로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천장에는 장비와 함께 작은 배들이 매달려 있으며, 선미에 이름이 적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잔혹한 난파나 해적과 사략선의 분노로부터 구한 것들을 나타낸다."라고 기록했다.[31] 위쪽 교회 천장에는 최근 복원 작업을 거친 보트와 비행기의 축소 모형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32]

두 성소, 즉 지하 묘소와 위쪽 교회의 측면 아치 벽은 대리석 판으로 덮여 있다. 이 측면 아치의 윗벽에는 여러 줄로 그림 형태의 엑스보토가 걸려 있으며, 가장 최근의 것들은 바실리카의 테라스 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엑스보토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들이며, 그 이전의 것들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사라졌다. 엑스보토는 주로 난파와 폭풍 장면을 묘사하지만, 화재, 자동차 및 철도 사고, 병상에 누운 환자, 정치 및 사회적 사건 등 매우 다양한 장면을 담고 있다. 68 혁명 역시 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으며,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깃발은 이 축구 클럽 선수들이 승리 후 바실리카로 순례를 왔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참조

[1] 서적 Guides géologiques régionaux, Marseille Masson
[2] 서적 Petite monographie d'une grande église, Notre-Dame de la Garde à Marseille Moulot
[3] 웹사이트 Notre Dame de La Garde http://www.marseille[...] 2013
[4] 문서 Louis Méry et F. Guindon, Histoire analytique et chronologique des actes et des délibérations du corps et du conseil de la municipalité de Marseille, éd. Barlatier Feissat, Marseille, 1845–1873, 7 vol., t. 3, note 1, p.335
[5] 문서 Adolphe Crémieux, ..Marseille et la royauté pendant la minorité de Louis XIV (1643–1660)'', Librairie Hachette, Paris 1917, 2 volumes, p.319
[6] 문서 Adrien Corns, ' '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streets of Marseille' ', ED. Jeanne Laffitte, Marseilles, 1989, p.360
[7] 간행물 La détention des princes d'Orléans à Marseille (1793–1796) Comité du Vieux Marseille (Committee of Old Marseilles)
[8] 문서 " Julie Pellizzone, ''Memories,'' Indigo & Side-women editions, Publications of the University of Provence, Paris, 1995, T. 1 (1787–1815), p.398"
[9] 웹사이트 Pope Francis entrusts to Mary 'Mediterranean Encounter' with youth and bishops https://www.catholic[...]
[10] 웹사이트 À Notre-Dame de la Garde, le Pape invite à la compassion et au pardon - Vatican News https://www.vaticann[...] 2023-09-23
[11] 서적 Notre-Dame de Garde Editions Héliogravure M. Lescuyer & Fils 1950
[12] 서적 Henri Espérandieu, la truelle et la lyre Actes-Sud/Maupetit
[13] 문서 Revue Marseilles, January 1997, N° 179, p.84
[14] 문서 Archives of Marseille, ' 'Henry Espérandieu, architect of Notre-Dame of Garde' ', ED. Édisud, Aix-en-Provence, 1997, p.32
[15] 서적 Le guide de Marseille La manufacture
[16] 문서 Guiral and Paul Amargier, ''History of Marseille'', Mazarine, 1983, p.276.
[17] 서적 Marseille, Zigzags dans le passé Tacussel
[18] 문서 Jean Contrucci, ''And Marseilles was released August 23–28, 1944, '' ED. Other Times, Marseilles, 1994, p.65
[19] 웹사이트 1953 : Marseille a rendu hommage au 7éme R.T.A qui la libera http://amicaledu7eme[...] 2016-09-01
[20] 문서 [[Roger Duchêne]] and [[Jean Contrucci]], ''Marseille'', ED. Beech, 1998
[21] 서적 Libération de Marseille
[22] 서적 Notre-Dame de la Garde Giletta
[23] 웹사이트 La Crypte de Notre Dame de la Garde http://viergedelagar[...]
[24] 웹사이트 Coupoles de Notre-Dame de la Garde — Programme Iconographique https://www.academia[...]
[25] 문서 Revue Marseille, N° 219, p. 94
[26] 문서 "Valery Larbaud, ' 'Oeuvres' ', collection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ED. Gallimard, Paris, 1957, p.1111"
[27] 문서 Paul Arène, ''Contes et nouvelles de Provence'', éd. Presses de la Renaissance, Paris, 1979, p. 325
[28] 문서 Chateaubriand, ''Mémoires d’outre-tombe'', livre quatorzième, chapitre 2, 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éd. Gallimard, Paris, 1951, p. 482
[29] 서적 En parcourant la Provence Les flots bleus
[30] 문서 Michel Mohrt, ''Mon royaume pour un cheval'', éd. Albin Michel, Paris, 1949, p. 39
[31] 문서 Aubin-Louis Millin, ''Travel in the south of France'', imperial press, Paris, 1807–1811, four volumes and an atlas, volume 3, p.261.
[32] 웹사이트 Models of boats donated for answered prayers hang in basilica in Marseille, Olympic sailing host https://apnews.com/a[...] 2024-08-17
[33] 웹사이트 http://marseille.cat[...]
[34] 뉴스 Marseille dans la stratosphere https://www.laproven[...] La Provence
[35] 서적 Notre-Dame de la Garde, le cœur de Marseille Autres tem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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