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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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855년 영국에서 태어난 작가로, 말년에는 나치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제네바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식물학 연구를 통해 생기론적 관점을 제시했다. 이후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독일 숭배자가 되었으며, 인종주의적 사상을 발전시켜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했다. 그의 저서 《19세기의 기초》는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나치 이데올로기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체임벌린은 아돌프 히틀러와 교류하며 나치당에 기여했으며, 그의 사상은 현재 보편적 인권과 평등에 어긋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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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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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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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
원어 이름 | Houston Stewart Chamberlain |
출생일 | 1855년 9월 9일 |
출생지 | 잉글랜드 햄프셔주 사우스시 |
사망일 | 1927년 1월 9일 |
사망지 | 독일 바이에른주 바이로이트 |
국적 | 영국, 독일 |
아버지 | 윌리엄 찰스 체임벌린 (1818년–1878년) |
배우자 | 안나 호르스트 (1878년 – 1905년) 에바 폰 뷜로우-바그너 (1908년 – 1927년) |
형제자매 | 바실 홀 체임벌린 (형제) |
주요 저서 | |
대표 저서 | 《19세기의 기초》 |
사상과 영향 | |
주요 사상 |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
영향 | 나치즘 |
2. 유년 시절과 교육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855년 잉글랜드 햄프셔주 사우스시에서 영국 해군 소장 윌리엄 찰스 체임벌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 제인은 그가 1살이 되기 전에 사망하여, 프랑스에서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의 형은 일본학자이자 도쿄 제국 대학 교수인 배질 홀 체임벌린이었다. 체임벌린은 건강이 좋지 않아 겨울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따뜻한 기후로 자주 보내졌다.
베르사유의 ''리세''에서 교육을 시작하여 대부분 유럽 대륙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11살 때 아버지의 명령으로 영국의 기숙학교인 Cheltenham College에 보내졌다.[8] 체임벌린은 Cheltenham College를 싫어했고, 그곳에서 외로움과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유당을 지지하며 성장했고, 진보에 대한 믿음, 더 나아질 수밖에 없는 세상, 자유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로서의 영국의 위대함과 같은 19세기 영국 자유주의의 일반적인 가치를 공유했다. 그러나 그는 산업 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보수주의 비판의 영향을 받아 "유쾌한 옛 잉글랜드"의 상실을 한탄하며, 자애롭고 교양 있는 엘리트가 감독하는 토지에서 자연과 조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역사의 신화적이고 목가적인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했다.[5]
2. 1. Cheltenham College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1살 때 아버지의 명령으로 육·해군 장교를 많이 배출했던 영국의 기숙학교 Cheltenham College에 보내졌다.[8] 체임벌린은 낙관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 속의 19세기에 자기자신감이 풍부한 자였다. 그는 Cheltenham College를 마음 속 깊숙히 싫어했으며 거거서 외로움을 많이 탔다.[138] 체임벌린은 군사보다는 예술에 더 관심이 많았고, 자연에 대한 애정과 거의 신비주의적인 자아 의식을 발전시켰다.[5] 체임벌린이 Cheltenham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천문학을 비롯한 자연 과학이었다.[6]2. 2. University of Geneva and racial theory
체임벌린은 프랑스어 사용 지역인 로망디에 있는 제네바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그는 인류학적 유형론을 지지했던 카를 포크트[7], 화학자 카를 그레베, 식물학자 요하네스 뮐러 아르 고비엔시스, 물리학자이자 심령학자 마르크 튀리, 천문학자 에밀 플랑타무르 등에게서 배웠다. 학생 시절 체임벌린의 주요 관심사는 체계적인 식물학, 지질학, 천문학이었으며, 이후에는 인체의 해부학과 생리학이었다.[8] 1881년 그는 물리 및 자연 과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2. 2. 1. Botany dissertation: theory of vital force
제네바에서 체임벌린은 식물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계속 공부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나중에 그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체임벌린의 박사 학위 논문이 될 텍스트는 1897년 ''Recherches sur la sève ascendante''("상승하는 수액에 관한 연구")로 출판되었지만, 이 출판물은 더 이상의 학위 취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9] 체임벌린은 서문에서 빈 대학교의 율리우스 비스너 교수가 체임벌린의 연구를 칭찬하는 편지를 인용했다.체임벌린의 저서는 다양한 관다발 식물의 물 수송에 대한 자신의 실험적 관찰을 바탕으로 했다. 에두아르트 스트라스부르거, 율리우스 폰 작스 및 기타 주요 식물학자들의 결론에 반하여 그는 자신의 관찰 결과가 당시의 유체역학 이론을 식물의 물관부 도관 내 물의 움직임에 적용하여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결과가 살아있는 물질의 작용과 관련된 다른 과정을 입증했으며, 이를 ''force vitale''("생기")라는 제목으로 분류했다.
체임벌린은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논문을 요약했다.
"이러한 생명 기능의 참여 없이는 물이 150피트, 200피트 이상으로 상승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물리학에서 가져온 혼란스러운 개념에 의존하여 문제의 어려움을 숨기려는 모든 노력은 현자의 돌을 찾는 것만큼 타당성이 떨어진다."
스트라스부르거가 수액 상승에 대한 생명론적 설명이 "어려움을 회피하고, 우리의 걱정을 진정시키며, 따라서 우리를 유혹한다"라고 불평하자 체임벌린은 "생명은 설명도, 이론도 아닌 사실이다"라고 반박했다. 현재 대부분의 식물 생리학자들은 수액 상승이 증산력과 뿌리압의 수동적 메커니즘으로 적절히 설명된다고 간주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일부 살아있는 식물 내에서 물의 수송에 어떤 형태의 능동적 펌핑이 관여한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일반적으로 체임벌린의 관련 연구는 언급하지 않았다.[11][12][13]
3. 사상
체임벌린은 청년 시절 열렬한 프랑스 숭배자였으나, 1878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처음 들은 후 바그너주의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열렬한 독일 숭배자이자 프랑스 혐오자가 되었다.[18] 그는 바그너를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천재 중 한 명으로 여겼다.[18] 체임벌린은 독일을 낭만적인 "사랑의 땅"으로 여겼고, 그곳의 사람들은 사랑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문화는 인류의 가장 좋은 점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영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19]
===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 ===
체임벌린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랑스의 인종차별 작가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작품에서 구현되었다고 믿었던 게르만족 우월주의 개념의 영향을 받아 인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32] 그는 1884년 이후 반유대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일삼았다.[83] 1888년, 체임벌린은 반유대주의에 강력히 반대했던 프리드리히 3세 독일 황제의 죽음에 기뻐하며 그의 반유대주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이제 왕위에 올랐다는 것에 기뻐하는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90]
체임벌린은 드레스덴에서 바그너 연구를 통해 ''푈키쉬'' 사상을 받아들였다.[83] 1889년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후, 다민족, 다종교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경멸하며 독일 민족에 의한 합병을 주장했다.[114] 비엔나에서 체임벌린의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114] 그는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간주하여, 개종한 유대인도 여전히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고대 아리아인 영웅들이 인도 아대륙을 정복하는 힌두 신화와 전설에 매료되었고, 고대 인도 서사시인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원본 형태로 읽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31] 그는 아리아인이 게르만 민족이며, 현대 독일인들이 힌두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31]
=== ''Die Grundlagen'' (''The Foundations'') ===
1899년 10월, 체임벌린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Die Grundlagen des neunzehnten Jahrhundertsde(''19세기의 기초'')를 출판했다.[45] 이 책은 고대 근동의 최초 문명의 출현부터 1800년까지의 인류에 대한 유사 과학적 "인종 역사"이다. 이 책은 서구에서 거대한 경제적,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보인 위대한 19세기의 모든 "기초"가 "아리아인"의 업적이라고 주장한다.[45]
이 책은 서구 문명이 튜턴족의 영향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10년 안에 8판 6만 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10만 부, 1938년까지 24판 25만 부 이상』이 팔리는 등 『기초』는 성공적인 판매고를 올렸다.[55] 1899년 10월 출판된 『기초』의 성공은 체임벌린을 유명 지식인으로 만들었다.[56] 『기초』의 인기는 너무나 높아 독일 개신교 지역의 많은 김나지움(고등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기초』를 필독서로 지정했다.[57] 한 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 자신도 뉘른베르크의 젊은 김나지움 교사였을 때 이 책을 한 번에 다 읽었습니다. 흥분된 얼굴로 책을 덮었습니다. 오늘날[1927년]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고, 그 옛날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58]
『The Foundations』의 성공은 체임벌린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06년, 브라질의 지식인 실비오 로메로(Sílvio Romero)는 체임벌린을 오토 암몬(Otto Ammon), 조르주 바셰르 드 라푸주(Georges Vacher de Lapouge), 아르튀르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와 함께 금발의 "장두형" 북유럽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위대한 인종임을 증명했다고 언급하며, 브라질이 독일 이민자들의 대규모 유입을 통해 브라질의 ''embranquecimento'' (백화)를 달성함으로써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74]
체임벌린은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와 존스 홉킨스 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자신의 인종 이론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미국을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락한 국가로 간주하여 방문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85]
체임벌린은 주저 『'''The Foundations of the Nineteenth Century영어'''』(19세기의 기초)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서양 문명은 튜턴족(게르만 계통 민족)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체임벌린은 유럽의 모든 민족(켈트, 게르만, 슬라브, 그리스, 라틴 등)을 아리아인종이라고 불렀다. 즉, 원 인도유럽 문화의 담당자였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아리아 인종의 지도자는 튜턴족과 노르드인이었다. 체임벌린의 목적은 독일 인종의 부흥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튜턴족뿐만 아니라 북유럽 기원의 전부족을 독일 인종으로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켈트족도 게르만족도 슬라브족도 독일인의 혈통이었다.
체임벌린에 따르면, 독일인은 비잔틴 제국이나 로마 제국의 후계자였다. 유대인을 비롯한 비유럽 민족에게 지배당했던 로마 제국을 붕괴시킨 것이 독일의 여러 부족이었으며, 따라서 독일인이야말로 서양 문명을 유대인의 손에서 구원했다고 그는 설파했다. 이러한 사상에는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설파하고, 셈어 계통의 유대인을 비백인으로 간주하여 폄하한 고비노의 영향을 엿볼 수 있지만, 체임벌린에게 아리아인은 단순히 민족이나 언어에 의해 정의된 개념이 아니라, 인종적 엘리트를 나타내는 추상 이념이기도 했다.(인종 차별 항목 참조). 아리아인(어원은 본래 '고귀한 자'의 뜻)은 진화에서의 적자생존 과정에서 열등한 자(유대인)를 밀어내고, 문명의 창조를 담당하는 우월 인종이라고 그는 말했다.
체임벌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으로 유대교 신자였을지 모르지만,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이 설은 오늘날에는 부정되고 있다). 나치 시대에는 친나치적인 신학자들이 체임벌린의 주장을 발전시켜, 예수는 아리아인이었다는 설을 선전하기도 했다.
=== Peoples defined as Aryans ===
체임벌린은 모든 유럽 민족, 즉 게르만족, 켈트족, 슬라브족, 그리스인, 라틴족뿐만 아니라 고대 원시인도유럽인 문화에 기반한 "아리아인"으로 분류했다. 사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조차 아리아인에 포함시켰다. "스페인의 고귀한 무어인은 순수한 사막 아랍인이 결코 아니며, 그는 절반은 베르베르인(아리아 가문 출신)이고, 그의 혈관은 고트족의 피로 가득 차 있어서 오늘날에도 모로코의 고귀한 주민들은 그들의 계보를 게르만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46]
체임벌린에 따르면 아리아 인종의 선두에는, 사실 모든 인종의 선두에는, 아리아 혈통을 가장 잘 보존한 게르만 또는 테오토닉 민족이 있었다.[47] 체임벌린은 아리아인, 인도유럽인, 인도게르만족이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지만, 그는 가장 순수한 아리아인이 중부 유럽에서 발견될 것이며, 프랑스와 러시아 모두에서 혼혈이 아리아 혈통을 약화시켰다고 강조했다.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체임벌린 이론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 귀족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저술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고비노는 아리아 인종 이론을 아리아 귀족과 인종적으로 열등한 평민 사이의 사회를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사용한 반면, 체임벌린은 아리아 인종 이론을 사회를 그 supposed 공통 인종적 기원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 Aryan race virtues ===
체임벌린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여긴 모든 것은 아리아인에게 기인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체임벌린은 『기초』에서 예수가 유대인일 수 없으며, 예수가 아리아인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며 자세히 설명했다.
체임벌린은 모든 좋은 것을 아리아인의 업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가 아리아인으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아리아인으로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1899년 독일에서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의 매력의 일부였다. 체임벌린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영광과 업적을 전적으로 아리아인의 혈통 덕분이라고 주장했다.[45] 체임벌린은 고대 그리스를 아름다운 사상과 예술의 "잃어버린 이상"이라고 썼는데, 현대 독일인들은 독일 국민이 바그너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를 가장 잘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체임벌린은 로마의 군국주의, 시민적 가치, 애국심, 법에 대한 존중, 가족에 대한 숭배를 최고의 아리아 정부 형태라고 칭찬했다.[48]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를 반영하여, 체임벌린은 현대 여성들이 남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가장 행복하게 여겼다고 주장하는 고대 로마의 순종적인 여성들과 같지 않다고 한탄했다.[48] 체임벌린은 아리아인만이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고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호메로스, 단테, 조토, 도나텔로, 알브레히트 뒤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르틴 루터, 윌리엄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임마누엘 칸트 및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같은 서양의 위대한 예술가, 작가 및 사상가 모두를 체임벌린이 19세기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삶을 변화시키고 인종을 재생시키는 음악으로 절정에 달하게 하려고 계획했던 아름다운 아리아 예술과 사상의 길고 영광스러운 전통의 일부로 주장했다. 영국의 역사가 조지 피보디 고치가 썼듯이, "유럽이 결코 본 적이 없는, 마음과 근육의 눈부신 비전, 대규모 조직, 도취적인 자신감, 금속성의 화려함"이 있었다.
생명력을 주고 창의적인 삶을 개선하는 자질을 가진 영웅적인 아리아인의 반대편은 "유대인"으로, 체임벌린은 아리아인의 반대 개념으로 제시했다. 아리아인이 가진 모든 긍정적인 자질은 유대인이 정확히 반대되는 부정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역사가 제프리 필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각 부정적인 "셈족" 특성에 대해 체임벌린은 게르만 미덕을 대치했다. 칸트의 도덕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주의를 대신했다. 무책임한 유대 자본주의는 모호한 게르만 산업주의의 이상, 즉 중세 길드의 협력과 계층 구조를 어떻게든 유지해온 진보된 기술 사회에 대한 낭만적인 비전과 날카롭게 구분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안은 "윤리적 사회주의"였으며, 이는 토머스 모어가 설명한 것과 같은 것으로, "게르만 민족이 낳은 가장 절묘한 학자 중 한 명으로, 절대적으로 귀족적이고 세련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유토피아』의 엄격한 엘리트주의적이고 훈련된 사회에서, 강한 기독교 인본주의적 분위기를 풍기는 체임벌린은 자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동체적 이상에 대한 근사치를 발견했다. 그는 "모어와 마르크스를 분리하는 것은 시간의 진보가 아니라 게르만과 유대인 사이의 대조"라고 썼다.
=== The Jewish wars claim ===
체임벌린은 《기초》에서 역사상 "모든 전쟁"이 "유대 금융 활동과 매우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했다.[49] 체임벌린은 유대인의 목표가 "전 세계 모든 민족의 목을 짓누르고 온 세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50]
=== Theories of Jewish conspiracy ===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에 따르면 유대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럽에는 순수한 인종, 즉 유대인 단일 민족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 히브리 혼혈 무리,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의심할 여지 없이 타락한 사람들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50]
아리안족을 파괴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체임벌린은 유대인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세웠으며, 이 교회는 아리안 그리스도가 창조한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대화된" 기독교만을 설교했다고 주장했다.[51]
체임벌린은 아리아인에게 자연스럽고 최고의 정부 형태는 독재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유대인이 아리아인을 파괴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민주주의를 발명했다고 비난했다.[49]
3. 1.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
체임벌린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랑스의 인종차별 작가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작품에서 구현되었다고 믿었던 게르만족 우월주의 개념의 영향을 받아 인종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32] 그는 1884년 이후 반유대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일삼았다.[83] 1888년, 체임벌린은 반유대주의에 강력히 반대했던 프리드리히 3세 독일 황제의 죽음에 기뻐하며 그의 반유대주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이제 왕위에 올랐다는 것에 기뻐하는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90]체임벌린은 드레스덴에서 바그너 연구를 통해 ''푈키쉬'' 사상을 받아들였다.[83] 1889년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후, 다민족, 다종교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경멸하며 독일 민족에 의한 합병을 주장했다.[114] 비엔나에서 체임벌린의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114] 그는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간주하여, 개종한 유대인도 여전히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고대 아리아인 영웅들이 인도 아대륙을 정복하는 힌두 신화와 전설에 매료되었고, 고대 인도 서사시인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원본 형태로 읽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31] 그는 아리아인이 게르만 민족이며, 현대 독일인들이 힌두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31]
3. 2. ''Die Grundlagen'' (''The Foundations'')
1899년 10월, 체임벌린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Die Grundlagen des neunzehnten Jahrhundertsde''(''19세기의 기초'')를 출판했다.[45] 이 책은 고대 근동의 최초 문명의 출현부터 1800년까지의 인류에 대한 유사 과학적 "인종 역사"이다. 이 책은 서구에서 거대한 경제적,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보인 위대한 19세기의 모든 "기초"가 "아리아인"의 업적이라고 주장한다.[45]이 책은 서구 문명이 튜턴족의 영향으로 깊이 새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10년 안에 8판 6만 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10만 부, 1938년까지 24판 25만 부 이상』이 팔리는 등 『기초』는 성공적인 판매고를 올렸다.[55] 1899년 10월 출판된 『기초』의 성공은 체임벌린을 유명 지식인으로 만들었다.[56] 『기초』의 인기는 너무나 높아 독일 개신교 지역의 많은 김나지움(고등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기초』를 필독서로 지정했다.[57] 한 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 자신도 뉘른베르크의 젊은 김나지움 교사였을 때 이 책을 한 번에 다 읽었습니다. 흥분된 얼굴로 책을 덮었습니다. 오늘날[1927년]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고, 그 옛날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58]
『The Foundations』의 성공은 체임벌린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06년, 브라질의 지식인 실비오 로메로(Sílvio Romero)는 체임벌린을 오토 암몬(Otto Ammon), 조르주 바셰르 드 라푸주(Georges Vacher de Lapouge), 아르튀르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와 함께 금발의 "장두형" 북유럽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위대한 인종임을 증명했다고 언급하며, 브라질이 독일 이민자들의 대규모 유입을 통해 브라질의 ''embranquecimento'' (백화)를 달성함으로써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74]
체임벌린은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와 존스 홉킨스 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자신의 인종 이론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미국을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락한 국가로 간주하여 방문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85]
체임벌린은 주저 『'''The Foundations of the Nineteenth Century영어'''』(19세기의 기초)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서양 문명은 튜턴족(게르만 계통 민족)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체임벌린은 유럽의 모든 민족(켈트, 게르만, 슬라브, 그리스, 라틴 등)을 아리아인종이라고 불렀다. 즉, 원 인도유럽 문화의 담당자였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아리아 인종의 지도자는 튜턴족과 노르드인이었다. 체임벌린의 목적은 독일 인종의 부흥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튜턴족뿐만 아니라 북유럽 기원의 전부족을 독일 인종으로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켈트족도 게르만족도 슬라브족도 독일인의 혈통이었다.
체임벌린에 따르면, 독일인은 비잔틴 제국이나 로마 제국의 후계자였다. 유대인을 비롯한 비유럽 민족에게 지배당했던 로마 제국을 붕괴시킨 것이 독일의 여러 부족이었으며, 따라서 독일인이야말로 서양 문명을 유대인의 손에서 구원했다고 그는 설파했다. 이러한 사상에는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설파하고, 셈어 계통의 유대인을 비백인으로 간주하여 폄하한 고비노의 영향을 엿볼 수 있지만, 체임벌린에게 아리아인은 단순히 민족이나 언어에 의해 정의된 개념이 아니라, 인종적 엘리트를 나타내는 추상 이념이기도 했다.(인종 차별 항목 참조). 아리아인(어원은 본래 '고귀한 자'의 뜻)은 진화에서의 적자생존 과정에서 열등한 자(유대인)를 밀어내고, 문명의 창조를 담당하는 우월 인종이라고 그는 말했다.
체임벌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으로 유대교 신자였을지 모르지만,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이 설은 오늘날에는 부정되고 있다). 나치 시대에는 친나치적인 신학자들이 체임벌린의 주장을 발전시켜, 예수는 아리아인이었다는 설을 선전하기도 했다.
3. 2. 1. Peoples defined as Aryans
체임벌린은 모든 유럽 민족, 즉 게르만족, 켈트족, 슬라브족, 그리스인, 라틴족뿐만 아니라 고대 원시인도유럽인 문화에 기반한 "아리아인"으로 분류했다. 사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조차 아리아인에 포함시켰다. "스페인의 고귀한 무어인은 순수한 사막 아랍인이 결코 아니며, 그는 절반은 베르베르인(아리아 가문 출신)이고, 그의 혈관은 고트족의 피로 가득 차 있어서 오늘날에도 모로코의 고귀한 주민들은 그들의 계보를 게르만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46]체임벌린에 따르면 아리아 인종의 선두에는, 사실 모든 인종의 선두에는, 아리아 혈통을 가장 잘 보존한 게르만 또는 테오토닉 민족이 있었다.[47] 체임벌린은 아리아인, 인도유럽인, 인도게르만족이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지만, 그는 가장 순수한 아리아인이 중부 유럽에서 발견될 것이며, 프랑스와 러시아 모두에서 혼혈이 아리아 혈통을 약화시켰다고 강조했다.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체임벌린 이론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 귀족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저술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고비노는 아리아 인종 이론을 아리아 귀족과 인종적으로 열등한 평민 사이의 사회를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사용한 반면, 체임벌린은 아리아 인종 이론을 사회를 그 supposed 공통 인종적 기원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3. 2. 2. Aryan race virtues
체임벌린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여긴 모든 것은 아리아인에게 기인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체임벌린은 『기초』에서 예수가 유대인일 수 없으며, 예수가 아리아인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며 자세히 설명했다.체임벌린은 모든 좋은 것을 아리아인의 업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가 아리아인으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아리아인으로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1899년 독일에서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의 매력의 일부였다. 체임벌린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영광과 업적을 전적으로 아리아인의 혈통 덕분이라고 주장했다.[45] 체임벌린은 고대 그리스를 아름다운 사상과 예술의 "잃어버린 이상"이라고 썼는데, 현대 독일인들은 독일 국민이 바그너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를 가장 잘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체임벌린은 로마의 군국주의, 시민적 가치, 애국심, 법에 대한 존중, 가족에 대한 숭배를 최고의 아리아 정부 형태라고 칭찬했다.[48]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를 반영하여, 체임벌린은 현대 여성들이 남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가장 행복하게 여겼다고 주장하는 고대 로마의 순종적인 여성들과 같지 않다고 한탄했다.[48] 체임벌린은 아리아인만이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고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호메로스, 단테, 조토, 도나텔로, 알브레히트 뒤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르틴 루터, 윌리엄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임마누엘 칸트 및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같은 서양의 위대한 예술가, 작가 및 사상가 모두를 체임벌린이 19세기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삶을 변화시키고 인종을 재생시키는 음악으로 절정에 달하게 하려고 계획했던 아름다운 아리아 예술과 사상의 길고 영광스러운 전통의 일부로 주장했다. 영국의 역사가 조지 피보디 고치가 썼듯이, "유럽이 결코 본 적이 없는, 마음과 근육의 눈부신 비전, 대규모 조직, 도취적인 자신감, 금속성의 화려함"이 있었다.
생명력을 주고 창의적인 삶을 개선하는 자질을 가진 영웅적인 아리아인의 반대편은 "유대인"으로, 체임벌린은 아리아인의 반대 개념으로 제시했다. 아리아인이 가진 모든 긍정적인 자질은 유대인이 정확히 반대되는 부정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역사가 제프리 필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각 부정적인 "셈족" 특성에 대해 체임벌린은 게르만 미덕을 대치했다. 칸트의 도덕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주의를 대신했다. 무책임한 유대 자본주의는 모호한 게르만 산업주의의 이상, 즉 중세 길드의 협력과 계층 구조를 어떻게든 유지해온 진보된 기술 사회에 대한 낭만적인 비전과 날카롭게 구분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안은 "윤리적 사회주의"였으며, 이는 토머스 모어가 설명한 것과 같은 것으로, "게르만 민족이 낳은 가장 절묘한 학자 중 한 명으로, 절대적으로 귀족적이고 세련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유토피아』의 엄격한 엘리트주의적이고 훈련된 사회에서, 강한 기독교 인본주의적 분위기를 풍기는 체임벌린은 자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동체적 이상에 대한 근사치를 발견했다. 그는 "모어와 마르크스를 분리하는 것은 시간의 진보가 아니라 게르만과 유대인 사이의 대조"라고 썼다.
3. 2. 3. The Jewish wars claim
체임벌린은 《기초》에서 역사상 "모든 전쟁"이 "유대 금융 활동과 매우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했다.[49] 체임벌린은 유대인의 목표가 "전 세계 모든 민족의 목을 짓누르고 온 세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50]3. 2. 4. Theories of Jewish conspiracy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에 따르면 유대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럽에는 순수한 인종, 즉 유대인 단일 민족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 히브리 혼혈 무리,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의심할 여지 없이 타락한 사람들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50]아리안족을 파괴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체임벌린은 유대인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세웠으며, 이 교회는 아리안 그리스도가 창조한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대화된" 기독교만을 설교했다고 주장했다.[51]
체임벌린은 아리아인에게 자연스럽고 최고의 정부 형태는 독재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유대인이 아리아인을 파괴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민주주의를 발명했다고 비난했다.[49]
4. 만년과 나치즘과의 관계
체임벌린은 점진적인 사지 마비 증세를 보이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신체의 상당 부분이 마비되었다.[86][87] 그는 독일의 패배와 1918년 11월 혁명에 큰 충격을 받았다.[88] 체임벌린은 1918년의 패배와 혁명 모두 유대인의 소행으로 보았으며, 1919년에는 독일이 이제 "유대인의 지배"하에 있다고 썼다.[88]
4. 1. 아돌프 히틀러와의 만남
1921년 1월, 슈톨칭 체르니는 체임벌린에게 아돌프 히틀러를 "놀라운 웅변술과 놀랍도록 풍부한 정치적 지식을 갖춘 인물"이라고 소개했다.[119] 체임벌린은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리 싸움에서 직접 싸운 "코부르크 전투" 이후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독일의 구원자"로 여기며 면밀히 따르고 숭배했다.[119] 히틀러는 체임벌린의 저작, 특히 바그너에 대한 평전인 ''기초''와 전쟁 중 에세이들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119][120] 요제프 괴벨스 또한 체임벌린의 책과 에세이를 읽고 völkischde 이데올로기로 개종했으며, 그의 글을 바탕으로 서방 세계는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서 제거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121]체임벌린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 테오도르 프리치 등 다양한 인물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122] 1922년, 망명 중이던 전 황제 빌헬름 2세는 체임벌린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에세이 덕분에 마르키온주의자가 되었고 구약을 거부한다고 밝혔다.[122] 빌헬름 2세는 체임벌린의 연구를 바탕으로 구약성서가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텍스트이며, 따라서 "아리아인"의 것이라고 주장했다.[122]
1923년, 체임벌린은 바이로이트에서 히틀러를 직접 만났고, völkischde "독일의 날" 준군사 퍼레이드 동안 휠체어에 앉아 히틀러 옆에 있었다. 같은 해 9월,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감사와 칭송을 담은 공개 서한을 썼다.[87] 이 편지에서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독일 정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준 인물로 묘사하며, "신께서 당신을 보호하시기를!"이라고 썼다.[128] 이 편지는 독일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히틀러는 "아이처럼" 기뻐했다.[128]

체임벌린은 나치당에 입당하여 당 기관지에 기고했다. 당의 주요 기관지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그의 70세 생일에 그를 칭송하는 5개의 칼럼을 할애했으며, 그의 저서 ''기초''를 "국가 사회주의 운동의 복음"으로 묘사했다.[124] 1924년 1월,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드문 아름다운 존재... 매혹적인 시선을 가진 진정한 단순함의 소유자"라고 칭찬하는 에세이를 발표했다.[124] 그는 히틀러가 독일의 모든 적에 대한 "멸망 전쟁de" ("파괴 전쟁")을 시작한 것을 칭찬하며, 그를 자신의 모든 영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보았다.[124]
1924년 바이로이트 축제는 체임벌린의 노력으로 민족주의de 정치와 동일시되는 결과를 낳았다.[125]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과 그 앞길은 스와스티카와 같은 민족주의de 상징으로 장식되었고, 민족주의 단체de의 퍼레이드가 열렸으며,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과 같은 저명한 민족주의de 지도자들이 연설을 했다.[125] 1926년 5월,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괴벨스를 바이로이트에서 만났다.[27]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유대인을 분쇄할 "선택된 자"라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시켰다.[27]
체임벌린은 1927년 1월 9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참석했다.[27] 그의 묘비에는 루카 복음서의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27]
5. 유산과 평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저작, 특히 ''19세기의 기초''는 생전에 유럽 전역,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에서 널리 읽혔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나치 이데올로기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30] 20세기 초 독일 대학과 군사 학교는 민족주의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19세기의 기초''는 대학생과 사관생도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59] 빌헬름 2세는 체임벌린을 후원하며 서신을 주고받고, 독일 육군에 그의 저서를 배포하고 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되도록 하는 등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32][128]
체임벌린은 아리아인 우월주의와 유대인의 영향력에 맞선 투쟁을 강조하였고, 이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130]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세계 지배를 위한 인종 투쟁 강조, 독일의 "세계 강국 지위" 옹호, "계획 경제" 요구, 민족 공동체("인민 공동체") 건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 추구,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 농경 생활에 대한 향수 등 그의 사상 대부분은 나치즘의 핵심 요소였다.[131]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체임벌린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1930년 ''20세기의 신화''를 출판하기도 했다.[133] 아돌프 히틀러는 1923년과 1926년에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바이로이트에 있는 바그너 가문의 저택을 방문했고, 1927년 1월에는 체임벌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32]
하지만 체임벌린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자유주의 및 사회 민주주의 신문들은 그의 저서에서 비합리적인 추론, 문맥을 벗어난 인용, 강박적인 반유대주의 등을 지적하며 비판적인 서평을 냈다.[59] 중앙 독일 유대교 시민 협회(Centralverein deutscher Staatsbürger jüdischen Glaubens)와 반유대주의 방어 협회(Verein zur Abwehr des Antisemitismus)와 같은 독일계 유대인 단체들은 ''19세기의 기초''의 인기가 반유대주의를 증가시키고, 많은 독일계 유대인들이 괴롭힘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59] 독일계 유대인 저널리스트 모리츠 골드스타인은 체임벌린의 사례가 "유대인에 대해 말하기만 하면 맹목적이고 거의 광적인 증오에 빠지는 최고의 정신, 현명하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견해를 보여준다고 비판했다.[61]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지적 반유대주의는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특별한 특권"이라고 비판하며, 그의 사상이 살인을 위한 도덕적 무기를 만든다고 경고했다.[129] 프랑스의 게르만학자 에드몽 베르메이는 체임벌린의 사상을 "본질적으로 조잡하다"고 평가했다.[135] 마르틴 하이데거는 1939년 저서에서 체임벌린의 저작이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고 비판했다.[136]
프란츠 폰 렌바흐(Franz von Lenbach)의 초상화, ]]
결론적으로, 체임벌린의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보편적 인권과 평등의 가치에 어긋나며,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국제 협력과 평화를 저해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특히,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사상을 철저히 경계하고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5. 1. 한국의 관점에서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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