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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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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네상스 연극은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연극 부흥 운동을 말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코메디아 델 아르테, 목가극 등이 발달했으며, 스페인에서는 종교적 색채와 민족적 열정을 특징으로 하는 코메디아가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등에 의해 발전했다. 영국에서는 중세 종교극 전통과 고전극 영향을 받아 희극, 비극, 사극, 희비극 등 다양한 장르가 나타났으며, 셰익스피어를 통해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에서는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고대극을 모방한 비극이 등장했으며, 희비극과 목가극도 발전했다.

2. 이탈리아

이탈리아르네상스 연극이 시작된 중요한 발상지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즉흥 희극인 코메디아 델 아르테와 전원적인 분위기의 목가극과 같은 독특한 연극 장르들이 탄생하고 발전하였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연극 형식들은 이후 유럽 연극사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2. 1. 코메디아 델 아르테

코메디아 델 아르테는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즉흥 희극의 한 형태로,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정형화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본 없이 개략적인 줄거리만을 바탕으로 배우들이 즉흥적인 대사와 연기를 펼쳤으며, 아를레키노, 판탈로네, 도토레 등과 같은 정형화된 인물 유형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형식은 유럽 연극 전반, 특히 프랑스몰리에르영국의 셰익스피어 희극 등에 영향을 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코메디아 델 아르테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2. 2. 목가극

목가극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창조된 연극 장르이다.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를 대화 형식으로 만든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15세기 후반부터 나타나 16세기 말에 크게 유행했다. 주로 전원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 양치기들의 사랑과 시련을 다루었다. 줄거리는 황당무계한 면이 있으나, 심리적 상징주의, 꿈의 세계, 연애 심리 분석 등을 통해 추상적이면서도 우아한 인간성을 묘사하는 특징을 지닌다. 목가극은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목가 소설과 더불어 연극사와 문학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3. 스페인

스페인의 르네상스 연극은 사라센과의 오랜 투쟁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가톨릭교와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중세적 특징을 유지하며 발전했다. 초기에는 환 델 엔시나나 바르톨로메 데 토르레스 나아로 등이 활동하며 종교극과 '외투와 칼의 희곡'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환 데 라 쿠에바 등이 아리스토텔레스3일치 규칙을 거부하고 자국의 역사에서 소재를 찾는 등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며 코메디아라는 독특한 장르를 발전시켰다. 코메디아는 종교적 색채와 민족주의적 열정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스페인 연극의 황금기는 로페 데 베가에 의해 열렸다. 그는 방대한 양의 코메디아와 아우토스 사크라멘토스(성찬 신비극)를 썼으며, '외투와 칼의 희곡' 장르를 완성하고 그라시오소라는 익살꾼 캐릭터를 도입하는 등 스페인 연극 형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페 데 베가 이후에도 티르소 데 몰리나(돈 환 창조), 귈렌 데 카스트로, 환 루이스 데 알라르콘 등 뛰어난 작가들이 활동했다.

황금세기의 마지막은 칼데론이 장식했다. 그는 로페 데 베가와 함께 스페인 코미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며, 특히 아우토 사크라멘탈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작품은 국왕에 대한 충성, 가톨릭 신앙, 명예 감정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코메디아는 주로 도시 건물의 안뜰에 마련된 상설극장에서 상연되었으며, 무대 장치는 간단했지만 의상은 매우 화려했다. 배우들은 정형화된 역할을 맡았고, 16세기 말부터는 여배우도 무대에 등장했다.

3. 1. 코메디아 이전

7세기부터 15세기까지 에스파냐는 사라센 세력과의 오랜 투쟁을 겪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가톨릭교와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중세적 관념을 유지하게 했고, 이는 당시 연극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봉건적인 색채가 남아 있었지만, 에스파냐는 점차 절대왕정의 번영기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이러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에스파냐인들의 국민적 자각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연극은 종교적 색채가 강하고 야외에서 주로 상연되어 중세적 특징을 짙게 드러냈으며, 에스파냐 특유의 열정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에스파냐 연극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환 델 엔시나(1469?~1529?)의 작품 <에글로가스(牧歌)>는 드라마 형식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치기와 천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는 중세 시대 성탄절 연극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후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발레 형식의 미모스(momos)나 목가극(파스토라레스) 등이 공연되었지만, 배우들은 변변찮은 장비를 가지고 도시나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수준이었다.

바르톨로메 데 토르레스 나아로(?~1521)는 1517년에 희곡집 <프로팔라디아>를 출간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이론을 따라 5막 형식을 주장하는 등 연극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실제 그의 작품에서는 희극과 비극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하인의 식당>, <세라피나>, <라 이메네아> 등이 있으며, 특히 <라 이메네아>는 이후 에스파냐 연극의 중요한 장르가 되는 '외투와 칼의 희곡'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러한 초기 연극들은 주로 대도시 건물의 안뜰 같은 곳에서 상연되었으며, 공연이 열릴 때는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전해진다.

3. 2. 코메디아의 탄생과 로페 데 베가

로페 데 루에다(1510?-1565)는 당시 교회의 간섭과 귀족의 보호로부터 연극을 해방시키려 노력했다. 이후 환 데 라 쿠에바(?-1610?)는 에스파냐 코미디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그는 4막 구성을 제시하고, 문체의 운율은 다양해도 된다고 보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3일치(三一致)의 규칙은 당대의 기호에 맞지 않는다며 무시하고, 자국의 연대기나 역사시에서 소재를 찾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대표적인 민족사극으로는 <사모라의 포위>, <베르나르도 엘카르피오> 등이 있다.

에스파냐의 르네상스 연극은 로페 데 베가(Lope Felix de Vega Carpio, 1562-1635)에 이르러 진정한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그의 삶 자체가 사랑과 모험으로 가득했으며, 남긴 작품의 양도 방대하다. 소설, 산문, 시를 제외하고도 코메디아는 1,800편, '아우토스 사크라멘토스(성찬 신비극)'는 400편에 달한다. 아우토스 사크라멘토스는 극적인 요소가 강한 1막짜리 음악극으로, 성서나 성인들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온 종교극의 일종이다.

로페 데 베가는 만년에 성직자가 되어 사람들의 고해를 들으며 인간 심리의 미묘한 움직임에 통달했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 또한 뛰어났다. 특히 환 데 라 쿠에바가 시작한 민족사극 장르와, 변화무쌍하고 경쾌한 연애극인 '외투와 칼의 희극'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작극술 면에서도 많은 독창성을 보였는데, 격렬한 정조 관념이나 명예, 체면 같은 관념을 극에 도입하고, '그라시오소'라고 불리는 재치 있는 말을 하는 단역을 배치했으며, 극의 중심에 여성을 두는 등의 특징을 보였다.

그가 쓴 연극 이론서인 <현대 희극 신작법>(1609)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서 그는 극에 변화를 주기 위해 비극희극의 혼합을 주장했다. 또한 3일치의 법칙 중에서는 줄거리의 일치만이 중요하며, 인물 묘사는 자연스러워야 하고 실제적인 말투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막 구성을 기본으로 하고, 3막 중간쯤에 클라이맥스를 두며, 장면에 따라 운율을 바꾸는 방식 역시 코메디아의 특징을 이루었다. 내용적으로는 명예와 체면에 대한 감정을 중요한 동기로 삼으라고 권했다.

3. 3. 몰리나와 동시대의 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es, 1571?~1648)는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를 통해 문학사에서 불후의 인물로 남은 돈 환을 창조했다. 그는 로페 데 베가처럼 성직자였으며, <여자의 지혜>, <불신지옥(不信地獄)> 등 약 400편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몰리나 외에도 이 시기에는 뛰어난 작가들이 활동했다. 귈렌 데 카스트로(Guillén de Castroes, 1569~1631)는 <젊은날의 엘 시드>와 그 속편인 <엘 시드의 무훈(武勳)>을 썼는데, 이는 훗날 프랑스 극작가 코르네유가 <르 시드>를 쓰는 데 영향을 주었다. 환 루이스 데 알라르콘(Juan Ruiz de Alarcónes, 1580?~1639)의 희곡 <의심스런 진실> 역시 코르네유의 <거짓말쟁이 사내>의 원작이 되었다.

이들 외에도 프란시스코 데 로하스 소리아(Francisco de Rojas Zorrillaes, 1607~1648)나 아구스틴 모레토 이 카바냐(Agustín Moreto y Cavanaes, 1618~1669)와 같이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 있었다.

3. 4. 칼데론

스페인 황금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극작가는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 1600-1681)이다. 그는 베가와 함께 스페인 코미디의 쌍벽으로 평가받지만, 작품의 다양성이나 자유로운 창의성 면에서는 베가나 티르소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 칼데론 작품의 주된 특징은 깊이 있는 무대 효과와 서정적인 운문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요 주제는 국왕에 대한 충성, 가톨릭교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극단적인 명예 감정, 정조 관념의 강조 등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때로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살라메아의 시장'과 '인생은 꿈' 등이 있다. 특히 아우토 사크라멘탈(성찬 신비극) 분야에서는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았다. 칼데론의 명성은 당시 상류 계급 사회에 널리 퍼졌으며, 그의 영향력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에까지 미쳤다.

3. 5. 코메디아의 상연 형태

16세기 말 마드리드, 발렌시아, 세비야 등지에 상설극장이 세워지면서 코메디아의 주요 상연 장소가 마련되었다. 이 극장들은 주로 건물의 안뜰 한쪽에 무대를 설치하는 형태였으며, 무대를 둘러싼 3면의 집 창문을 통해 귀족들이 관람했고, 무대 정면에는 일반 민중을 위한 벤치가 놓였다.

무대 장치는 비교적 간단하고 소박했으며, 막(幕)은 사용되지 않았다. 극 중간의 막간(幕間)에는 무대를 잠시 비워두거나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시간이 흘렀음을 알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반면, 의상은 매우 화려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여배우의 옷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의상이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이나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코메디아 극단의 배우들은 정형화된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주요 배역은 다음과 같다.

배역 명칭설명
Galanes젊은 남자 주인공
Damaes귀부인 역할
Barbaes수염이라는 뜻으로, 노인 역할
Dueñaes주로 감시자 역할을 하는 나이 든 여성
Graciosoes익살꾼, 주로 미남 설정
기타하인, 하녀, 농부 등



여배우가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소년 배우가 여자 역할을 대신했다.

4. 영국

16세기 영국 연극은 중세 종교극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이탈리아프랑스 등 대륙에서 유입된 르네상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점차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1580년대 말로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희극, 비극, 사극, 희비극 등 다양한 장르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흐름은 셰익스피어를 정점으로 하는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다.

영국 르네상스 연극은 중세적 요소와 새로운 요소, 자국의 전통과 외래 문화, 귀족적 취향과 시민적 감성이 혼합된 복합적인 특징을 지녔다. 초기에는 주로 학교, 대학, 법학원, 궁정 등에서 상류층이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공연되었으나, 점차 전문 극장이 등장하면서 귀족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계층이 즐기는 대중적인 예술로 발전하였다. 각 장르의 구체적인 발전 과정과 대표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어지는 문단에서 다룬다.

4. 1. 영국의 르네상스 연극

16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영국 연극은 중세 종교극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이탈리아프랑스 등 대륙에서 유입된 르네상스 문화의 다양한 요소를 흡수하며 점차 순수한 형태의 연극으로 발전해 나갔다. 1580년경 말로가 활동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희극, 비극, 사극(史劇), 희비극 등 여러 장르가 독자적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셰익스피어를 정점으로 하는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 연극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다.

4. 2. 영국의 르네상스 희극

16세기 초중반 영국 연극은 중세 종교극의 전통을 이어받는 동시에 이탈리아, 프랑스 등 대륙의 르네상스 문화를 흡수하며 점차 순수 연극으로 발전해 나갔다. 말로가 활동하기 시작한 1580년까지 희극, 비극, 사극, 희비극 등 다양한 장르가 독자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셰익스피어를 정점으로 하는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희극은 도덕극에서 파생된 인터루드(막간 희극)라는 자국 전통과 플라우투스나 테렌티우스의 고대 로마 연극, 아리오스토의 이탈리아 희극 등 외래 연극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순조롭게 발전했다. 그 초기 형태는 1530년대 존 헤이웃의 ''4명의 P''와 같이 도덕극보다 세속적이고 오락성이 강한 막간 희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최초의 본격적인 희극으로는 다음 작품들이 꼽힌다.

  • ''레이프 로이스타 도이스타''(Ralph Roister Doistereng): 니콜라스 유달 작. 1553년경 상연, 1566년 출판.
  • ''거튼 할머니의 바늘''(Gammer Gurton's Needleeng): 작자 미상. 1566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상연, 1575년 출판.


이 작품들은 고전극의 5막 형식을 따르면서도 영국의 일상적인 서민 생활과 농촌 풍경에 기반한 토착적인 희극성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아리오스토의 희극을 번안한 조지 갸스코인의 ''어림짐작''(Supposeseng, 1566년 법학원에서 상연)은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 최초의 영어 산문 희극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초기 희극들은 릴리를 비롯한 엘리자베스 왕조 희극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며 영국 희극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

4. 3. 영국의 르네상스 비극

영국의 르네상스 비극은 자체적인 전통이 부족하여 고전극, 특히 로마의 극작가 세네카의 비극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세네카의 영향은 매우 커서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이 융성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영국 고대사를 소재로 한 <고보더크>(Gorboduceng)는 토머스 노튼과 토머스 새크빌이 함께 쓴 작품으로, 1561년 법학원에서 처음 공연되고 이듬해에는 궁중에서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1560년대에 유행한 세네카풍 유혈 비극의 대표작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무운시(blank verse)를 사용하여 쓰인 최초의 본격적인 영국 비극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고보더크>는 훗날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1581년에 영역된 <세네카 비극집>이 간행되면서 세네카풍 비극의 유행은 158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경향은 토머스 키드의 <스페인 비극>(The Spanish Tragedyeng)이나 말로, 셰익스피어 초기의 비극 작품들, 그리고 이후 세대의 작가들인 마스턴, 존 웹스터, 타아너 등의 작품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다.

4. 4. 영국의 르네상스 사극

비극과 병행하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한 것이 각종의 영국 편년사에서 취재한 연대사극이다. 일찍이 1540년대에 존 베일의 '존 왕'에서 그 싹을 볼 수 있으며, 홀의 사서 '랭카스터, 요크 양가의 통합'(1548)이나 호린셰드의 '연대기'(1586)에 자극을 받은 국민의식의 자각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나아가 스페인 무적함대의 격파(1588)로 인한 국위 선양과 애국심의 고취와 함께 이 장르의 인기는 1590년대에 급속히 높아져 피일의 '에드워드 1세', 말로의 '에드워드 2세'를 비롯하여 셰익스피어의 독자적인 역사극이 속출했다.

4. 5. 영국의 르네상스 희비극과 기타

사극과 함께 영국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장르인 희비극은 영국의 토착 전통과 고전극의 영향을 받아 1560년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셰익스피어의 만년과 보먼트, 플레처 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희비극 외에도 중세 시대의 종교극이나 궁정에서 열리던 가면극 역시 비록 주류는 아니었지만 17세기 초엽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영국의 르네상스 연극은 중세 연극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와 오래된 요소, 자국의 전통과 외래 문화, 귀족적인 취향과 시민적인 감성이 뒤섞인 복잡하고 다면적인 특징을 지녔다. 이는 당시 르네상스 문화 전반의 특징과도 유사하다.

전문적인 극장이 세워지기 전, 라틴어 교육이 필수였고 고전극 연구가 활발했던 학교, 대학, 법학원, 궁정 등에서 상연된 초기 희극비극은 주로 상류 계급이나 지식인들의 취향에 맞추어져 있었다. 반면, 일반 대중 앞에서 공연되었던 연대기적 사극이나 후기 비극은 보다 폭넓은 대중의 기호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였다.

귀족부터 견습공까지 사회 모든 계층이 연극을 즐겼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 특히 그 대표격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서 이러한 종합적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5. 프랑스

15세기 말 프랑스에 인문주의가 도입되면서, 궁정과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극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이들은 점차 대중화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던 중세 연극을 비판적으로 보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연극을 모범으로 삼아 프랑스어 고유의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전주의 규칙을 탐구하는 움직임과 함께 비극희극이 새롭게 시도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와 스페인 연극의 영향을 받아 희비극이나 목가극과 같은 혼합 장르도 등장하여 프랑스 르네상스 연극의 다양성을 더했다.

5. 1. 프랑스의 르네상스 연극

15세기 말 프랑스에 인문주의가 도입되면서, 궁전과 귀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식인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점차 비속화되었지만 여전히 민간에 남아 있던 중세 연극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고대 연극을 모방한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548년 고등법원이 성사극 상연을 금지했을 때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여졌다.

5. 2. 프랑스의 르네상스 비극

15세기 말 프랑스에 인문주의가 도입되면서 궁정과 귀족 중심의 새로운 지식인들은 중세 연극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고대 연극을 모범으로 삼는 새로운 연극을 추구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548년 고등법원의 성사극 상연 금지 조치는 별다른 반대 없이 이루어졌다.

개신교를 지지하는 이들은 중세극의 가톨릭적 요소에 반발하여 성경에 기반한 비극을 쓰려는 시도를 보였다. 하지만 테오도르 드 베이즈( Théodore de Bèzefra, 1519-1605)가 1550년에 쓴 ''희생을 바치는 아브라함'' 외에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지 않았다. 시인 롱사르( Pierre de Ronsardfra)는 고대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Ἀριστοφάνης|아리스토파네스grc)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1549년에 상연했으며, 고대 극을 모범으로 삼아 프랑스어로 된 비극을 창작하도록 독려했다. 바이프( Jean-Antoine de Baïffra)나 레미 벨로( Rémy Belleaufra)와 같은 인물들은 로마 연극 및 이를 모방한 이탈리아 연극을 프랑스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에티엔 조델( Étienne Jodellefra, 1532-1573)은 1552년 프랑수아 1세 앞에서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비극으로 알려진 ''Cléopâtre captive|사로잡힌 클레오파트라fra''를 상연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는 있지만, 서정적인 독백이나 탄식이 많고 극적인 사건 전개가 부족하여 연극 자체로서의 가치는 다소 낮게 평가받는다.

같은 시기, 연극 창작의 규칙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로마 극작가 세네카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귀화한 스칼리제( Julius Caesar Scaligerlat)는 비극의 정의, 합창 사용법, 삼일치의 법칙 등 연극 이론의 기초를 다루었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장 드라 타이유( Jean de la Taillefra, 1540?-1608?)는 자신이 쓴 성서 비극 ''Saül le furieux|분노하는 사울왕fra''의 서문에서 지나치게 격렬한 사건 묘사를 피하고 장소의 통일을 지킬 것을 권장했다.

당시 활동했던 비극 작가 중에서는 가르니에( Robert Garnierfra, 1544?-1590)가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법조계 출신이었던 그는 1568년부터 1583년까지 7편의 비극과 1편의 희비극을 발표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세네카의 영향을 받아 교훈적인 내용이나 긴 대사가 많다는 특징이 있었으나, 점차 내용적으로 깊이를 더해갔다. 특히 1583년에 발표된 ''Les Juives|유대 여자들fra''은 성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비극으로, 서정적이면서도 슬픔의 아름다움(비창미, 悲愴美)이 풍부하게 표현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가르니에의 극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외에도 경제학자였던 몬크레티안( Antoine de Montchrestienfra, 1575?-1621)이 ''L'Écossaise|스코틀랜드 여자fra''(1601)와 같은 서정적인 비극을 시도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 시기 비극들에서 합창이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다는 점은 16세기 프랑스 비극이 지닌 강한 서정성을 보여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5. 3. 프랑스의 르네상스 희비극, 기타

프랑스에서는 15세기 말부터 인문주의가 도입되어 궁정과 귀족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퍼져나갔다. 이들은 점차 대중화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던 중세 연극을 비판하고 고대 연극을 본받은 새로운 연극을 원했다. 1548년 고등법원이 성경 이야기를 다룬 연극(성사극)의 상연을 금지했을 때 별다른 반대가 없었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희극 분야에서는 조델이 1553년에 <유제이드>를 발표했고, 그레방(1538-70)의 <재무관의 아내>(1558) 등이 상연되었다. 이런 비극과 희극은 주로 지식인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중 장 드 라 타이유의 <연적>은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플로렌스 출신의 피에르 라리베이(1540?-1611?)는 로마 희극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희극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그의 작품은 소재 면에서는 이후 희극에 영향을 주었지만, 문체는 다소 거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 연극의 기교와 스페인풍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희비극(Tragicomédie|트라지코메디fra)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나타났는데, 라리베이의 희극도 이러한 경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가르니에의 <부라다망트>(1582)는 희비극의 걸작으로 꼽히며, 1612년부터 약 20년간 여러 희극을 쓴 트로트레르 역시 희비극 작품을 남겼다. 또한 목가극도 활발하게 창작되어 몬크레티안도 1602년에 한 편을 발표했다.

희비극이나 목가극은 일반 관객들도 즐겨 찾았지만, 고전 규칙에 따른 비극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약 50편이 만들어졌음에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당시 민중들은 여전히 이탈리아풍의 즉흥 희극을 선호했으며, 투퓨르팡, 그로=기욤, 타바랑 같은 희극 배우들이 명성을 얻었다. 파리에는 중세극 상연을 위해 지어진 부르고뉴 극장 외에는 상설 극장이 없었는데, 여러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극장의 병렬 무대는 엄격한 규칙의 고전 비극보다는 자유롭고 환상적인 희비극이나 목가극에 더 잘 어울렸다. 플레야드파가 추구했던 고전주의는 이처럼 다양한 시도를 거친 후, 1630년경 다시 고전극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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