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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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십자군은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럽 기독교 세력이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일으킨 원정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등이 참여했으나, 프리드리히 1세의 사망, 필리프 2세의 귀국 등으로 인해 십자군은 분열되었다. 리처드 1세는 아크레를 탈환하고 아르수프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활약했으나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했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원정으로 십자군 국가는 해안 지역을 유지하며 존속했지만,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십자군에 대한 교황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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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십자군은 1147년부터 1149년까지 에데사 백국의 함락에 대응하여 결성되었으나, 군사적으로 실패하고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초래하여 십자군 국가의 세력 약화를 가져왔다. - 12세기 십자군 - 1101년 십자군
1101년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 이후 교황 파스카리스 2세의 주도로 조직되었으나 룸 셀주크 왕조 연합군에게 참패하며 십자군 운동의 한계를 드러낸 원정이다.
제3차 십자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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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 제3차 십자군 전쟁 |
일부 | 십자군 |
날짜 | 1189년 5월 11일 – 1192년 9월 2일 |
장소 | 레반트, 시칠리아 섬, 이베리아 반도, 아나톨리아 |
결과 | 야파 조약 |
결과 상세 | 십자군이 군사적으로 승리하여 3년간 평화 조약 체결 원정 이전의 상황 유지 무슬림의 예루살렘 지배 인정 및 십자군의 레반트 지역 지배 인정 레반트의 비무장 순례자의 안전 보장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앙주 제국 잉글랜드 왕국 노르망디 공국 아키텐 공국 앙주 백국 푸아투 백국 브르타뉴 공국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 공국 블루아 백국 샹파뉴 백국 플랑드르 백국 신성 로마 제국 슈바벤 공국 오스트리아 공국 보헤미아 공국 튀링겐 방백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몬페라토 후국 바덴 변경백국 홀란트 백국 홀슈타인 백국 헝가리 왕국 제노바 공화국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피사 공화국 덴마크 왕국 레반트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군사 수도회 성전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독일 기사단 성묘 기사단 성 라자로 기사단 동방 기독교 동맹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
교전 세력 2 | 아이유브 왕조 이집트 술탄국 다마스쿠스 토후국 하마 토후국 메소포타미아 토후국 룸 술탄국 니자리 이스마일리 국가 (암살단) 비잔티움 제국 키프로스 |
지휘관 | |
지휘관 1 | 십자군: 리처드 1세 필리프 2세 위그 3세 티보 5세 앙리 2세 필리프 1세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6세 레오폴트 5세 제폴트 2세 루트비히 3세 플로리스 3세 헤르만 4세 아돌프 3세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 게자 로드리고 알바레스 마르가리투스 브린디시 레반트 십자군 국가: 기 드 뤼지냥 시빌라 콘라트 옹프루아 4세 발리앙 디블랭 보에몽 3세 보에몽 조슬랭 3세 군사 수도회: 로베르 드 사블레 아르멩골 데 아스파 가르니에 드 나블루스 시브란트 동방 기독교 동맹: 레오 1세 |
지휘관 2 | 수니파 무슬림 군대: 살라딘 알무자파르 우마르 알아딜 1세 알아프달 쾨크뵈리 클르치 아르슬란 2세 케이크바드 1세 이삭 2세 앙겔로스 이삭 콤네노스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 | 리처드 1세 휘하의 8,000~9,000명의 앙주 군대 (잉글랜드, 노르만, 아키텐, 웨일스, 나바라 등) 및 일부 자료에서는 비전투원 및 선원을 포함하여 최대 17,000명 또는 50,000명으로 추정 필리프 2세 휘하의 7,000명 이상의 프랑스군 (기사 650명, 종자 1,300명 포함) 프리드리히 1세 휘하의 12,000~20,000명의 독일군 (기사 3,000~4,000명 포함) 게자 휘하의 2,000명의 헝가리군 비잔티움 제국을 통과하는 동안 프리드리히 군에 합류한 1,000명 정도의 추가 파견대 유럽 및 해외에서 온 7,000명에서 40,000명의 추가 병력 및 일부 투르코폴 |
병력 규모 2 | 아이유브 왕조: 40,000명 (살라딘 야전군, 1189년 추정) 5,000~20,000명 (아크레 수비대, 1189년) 셀주크 왕조: 22,000명 이상 (쿠트브 알딘 야전군, 1190년)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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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169년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한 살라딘은 1171년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174년 시리아를 다스리기 시작해 십자군 국가들을 포위하였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에 대승을 거두고, 10월 2일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정복 시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기독교 세력의 거점은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레, 마르가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1185년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가 서거하였다. 예루살렘 왕국은 그의 조카 보두앵 5세에게 계승되었으나, 보두앵 5세는 1년 만에 사망하였다. 시빌이 여왕으로 즉위하고, 남편인 기 드 루지냥을 왕으로 추대했다. 기의 지지자인 르노 드 샤티용이 이슬람 상인들을 공격하여, 많은 무슬림들을 투옥했다. 이로 인해 살라딘과 예루살렘 왕국 간의 평화 조약은 파기되었다. 살라딘은 포로 석방과 약탈 물품 반환을 요구했으나, 르노는 왕의 요구조차 거부했다.
르노의 무례한 답변은 살라딘에게 예루살렘 왕국 공격을 정당화할 기회를 주었고, 1187년 살라딘은 티베리아스를 포위 공격했다. 레몽 3세는 기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했지만, 기는 르노의 조언에 따라 티베리아스 교외의 하틴 뿔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하틴 전투에서 물 부족과 사기 저하로 십자군은 패배했다.
기 왕과 르노는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혔다. 기는 살라딘에게 물을 권유받았으나, 르노에게 건넸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주인이 직접 물을 권유받은 손님은 신변 안전이 보장되었다. 기로부터 간접적으로 물을 받은 르노는 살라딘이 신변을 보장할 필요가 없었다. 살라딘은 통역을 통해 “그에게 물을 건넨 것은 당신”이라고 말했다.[55] 그 후, 살라딘은 르노를 처형하고, 기는 다마스쿠스로 압송했다가 몸값을 받고 석방했다.
1187년 말, 살라딘은 아크레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십자군은 1229년까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다.[56] 우르바누스 3세는 하틴 전투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57] 새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교황령 『Audita tremendila』를 발표하고(1187년 10월 29일), 예루살렘 함락을 유럽 기독교도들의 죄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성지로의 십자군 원정 참가를 호소했다.
2. 1. 살라딘의 예루살렘 정복
1169년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한 살라흐 앗 딘은 1171년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174년 시리아를 다스리기 시작해 십자군 국가들을 포위하였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에 대승을 거두고, 10월 2일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정복 시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기독교 세력의 거점은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레, 마르가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9]1185년 예루살렘의 발두인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발두인 5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1년 만에 사망하였다. 발두인 4세의 누이인 시빌라가 여왕으로 즉위하고, 남편인 기 드 루지냥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시빌라의 지지자였던 레날드 드 샤티용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향하는 대상을 습격하여 여행자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이로써 예루살렘 왕국과 살라딘 사이의 휴전이 깨졌다. 살라딘은 포로와 화물 석방을 요구했으나, 레날드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
레날드의 행동은 살라딘에게 예루살렘 왕국 공격의 기회를 제공했고, 1187년 그는 티베리아스를 포위 공격하였다. 기 왕은 레날드의 조언에 따라 군대를 하틴으로 진격시켰다. 갈증과 낙담에 빠진 십자군은 하틴 전투에서 패배했다.
기 왕과 레날드는 살라딘의 천막으로 끌려갔고, 기 왕은 물 한 잔을 제공받았다. 기 왕은 잔을 레날드에게 건넸고, 레날드가 살라딘이 아닌 기 왕으로부터 잔을 받았다는 것은 살라딘이 레날드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살라딘은 통역사에게 "왕에게 말해라. '그를 마시게 한 것은 너다'"라고 말했다.[55] 그 후 살라딘은 레날드의 목을 베었고, 기 왕은 다마스쿠스로 보낸 후 몸값을 치르고 풀어주었다.
1187년 말까지 살라딘은 아크레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기독교인들은 1229년까지 예루살렘을 다시 장악하지 못했다.[56] 우르바누스 3세 교황은 하틴 전투 소식을 듣고 쓰러져 죽었다고 전해진다.[57] 그레고리우스 8세는 교황령 ''Audita tremendi''에서 예루살렘 함락을 기독교인들의 죄에 대한 징벌로 해석하고,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12]
2. 2. 십자군 국가들의 상황
1169년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한 살라흐 앗 딘은 1171년 재상을 맡아 일해오던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하였다. 그 후 팔레스타인 땅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낸다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174년 시리아를 다스리기 시작해 십자군 국가들을 포위하였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10월 2일 예루살렘이 항복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예루살렘 정복 당시 십자군의 잔악한 행위와는 반대로,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정복 시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기독교 세력의 거점은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레, 마르가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1]3. 경과
1189년 봄부터 가을까지 북유럽 해역에서 주요 군대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해상 원정대가 여럿 있었다. 이 중 규모가 큰 국제 해상 원정대는 두 개였으며, 그보다 작은 규모의 항해도 수없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1188년 초에 이미 항해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1]
첫 번째 함대는 사순절에 잉글랜드를 출발했다. 이 함대는 잉글랜드, 덴마크, 프리지아, 플랑드르, 홀란드 및 라인란트 등에서 온 약 1만 명의 병사와 50~60척의 배로 구성된 대규모 국제 함대였다.[2][3] 리스본에 잠시 들른 후, 함대는 알보르를 약탈하고 알모하드 수비대를 학살했다.[1][4] 이 함대는 1189년 9월 1일에 아크레에 도착했다.[5]
두 번째 함대는 그 여정을 기록한 ''항해기''라는 짧은 목격담이 남아있어 기록이 더 자세하다. 이 함대는 주로 평민들로 구성되었다.[6] 1189년 4월에 11척의 배로 독일을 출발했지만, 5월에 출발한 잉글랜드 함대가 7월 초 리스본에 도착하면서 병력이 증강되었다.[7][8] 포르투갈의 산초 1세는 실베스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이 함대를 모집했다. 이어진 실베스 공성전에서 이 함대는 브르타뉴와 갈리시아에서 온 두 척을 포함하여 총 38척의 배를 보유하게 되었다.[9][10] 45일 후 도시는 항복했다.[11] 두 번째 함대는 1190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아크레에 도착했다.[12] ''바얀''에 따르면, 이 함대의 코그선에서 나온 나무와 돛을 이용하여 야전병원을 건설했는데, 이는 훗날 튜턴 기사단이 되었다.[13]
이븐 이드하리의 ''바얀''에 따르면, 북부 함대는 1190년 봄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서 알모하드 해군과 해전을 벌여 패배했고, 함대원들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함대는 포르투갈에서 겨울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측 자료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1] 1190년 여름, 함대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배 한 척이 알모하드에 의해 포위된 실베스로 항해했다. 니콜라스 주교(1189년 원정대의 전 회원)의 요청에 따라, 잉글랜드 십자군은 도시 방어에 성공적으로 참여했다.[14]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집결을 완료한 후, 성지로 가는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 국가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마인츠 대주교 콘라트를 헝가리 왕국에, 고드프리 폰 비젠바흐를 셀주크 투르크 제국에,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사절을 비잔티움 제국에 보냈다. 또한 아르메니아 왕 레오 1세에게도 대리인을 파견했다.[15]
프리드리히 1세는 1175년에 살라딘과 우호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16], 살라딘에게 조약 파기를 통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7] 1188년 5월 26일, 프리드리히는 디츠 백작 하인리히 2세를 살라딘에게 보내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최후통첩은 살라딘에게 십자군에게서 빼앗은 영토에서 철수하고, 성십자가를 성묘교회에 반환하며, 이전 전투에서 살라딘 군대에 의해 살해된 기독교인들에 대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호 조약이 파기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18]
1188년 크리스마스 며칠 후, 프리드리히 1세는 뉘른베르크에서 헝가리 왕국, 비잔티움 제국, 셀주크 제국, 아이유브 왕조의 답신 사절과 회동했다. 세르비아 대공 슈테판 네마냐의 사절은 니슈에서 프리드리히 황제를 맞이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비잔티움 제국 사절 요하네스 카마테로스와의 협의 끝에 양국 간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고드프리 폰 뷔르츠부르크,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가 비잔티움 황제에게 십자군 원정 중 선행을 맹세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합의 체결 후, 뮌체르 주교 헤르만, 나사우 백작 루퍼트 3세, 황제 시종 마르크바르트, 디츠 백작 하인리히 3세, 그리고 많은 수행원들이 원정 준비를 위해 비잔티움 제국에 파견되었다.[19]
살라딘에게 포위되었던 아크레는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도착하면서 1191년 7월 12일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내부 갈등으로 필리프 2세와 레오폴트 5세는 성지를 떠났다.
3. 1. 3차 십자군의 발흥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유럽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교황 우르바노 3세는 그 충격으로 사망했고,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성지 탈환을 위한 새로운 십자군 파견을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호소했다.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영토 분쟁을 종결하고 십자군 편성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살라딘 십일조를 부과했다.[17] 그러나 양국 간의 전쟁은 곧 재개되었고, 잉글랜드에서는 리처드 1세가 헨리 2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1185년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보두앵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섭정을 맡았으나, 이듬해 보두앵 5세가 사망하면서 시빌이 여왕으로 즉위하고 남편 기 드 루지냥을 왕으로 옹립했다. 시빌의 지지자였던 르노 드 샤티용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향하는 상단을 습격하여 살라딘과의 휴전을 파기했다. 살라딘은 포로와 화물 석방을 요구했으나 르노는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할 기회를 얻었고, 1187년 티베리아스를 포위 공격했다. 기 왕은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 군대에 대패했다. 기 왕과 르노는 포로로 잡혔고, 살라딘은 르노를 처형하고 기 왕은 다마스쿠스로 보냈다.[9] 1187년 말, 살라딘은 아크레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10] 우르바누스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11]
새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1187년 10월 29일 교황령 ''Audita tremendi''를 발표하여 예루살렘 함락을 유럽 기독교인들의 죄에 대한 징벌로 해석하고,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12]
3. 2. 각국의 호응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롯사는 교황의 호소에 응하여 1189년에 십자군 선봉으로 출발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적대 행위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급히 통과해야 했다.[47] 이후 1189년 5월 18일 룸 셀주크 제국의 수도 이코니움을 점령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1세는 킬리키아의 살레프강에서 익사하고 말았다.[47] 프리드리히 1세 사후 십자군은 와해되었고, 일부는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이다 패배했다.[47]1191년 잉글랜드 왕 사자심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해로를 통해 함께 출발했으나, 관계 악화로 각자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47] 리처드 1세는 도중에 키프로스섬에 잠시 정박했다가, 당시 비잔티움 제국 측 총독 이사키우스 콤네누스에게 무례를 당하자 분노하여 5월 말까지 섬 전체를 점령했다.[47] 이후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낭에게 섬을 넘겼다.[47] 필리프 2세는 티레에 도착하여 코라도 1세와 동맹을 맺었다.[47]
3. 3. 아크레 공방전

1189년, 살라딘은 기 드 루시를 석방했다. 기는 티르에서 십자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콘라드가 티르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실패했다. 기는 부유한 항구 도시 아크레로 눈을 돌려 군대를 소집했고, 마침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지원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연합군은 살라딘의 군대에 맞설 만큼 충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살라딘 군대에 포위되었다. 1190년 여름, 십자군 진영에서 전염병이 발생하여 시빌라 여왕과 그녀의 어린 딸들이 사망했다. 기는 시빌라와의 결혼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왕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정당한 상속자인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가 움프리 4세와 이혼하고 콘라드와 결혼하면서 콘라드가 이사벨라의 이름으로 왕위를 주장했다.

1190년 말부터 1191년 초까지 십자군 진영에서는 이질과 열병이 더욱 퍼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6세,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 블루아의 테오발드 5세가 사망했다. 1191년 봄, 항해 시즌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가 황제군의 잔존 부대를 지휘하여 도착했고, 필리프 2세도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레오 2세의 지휘하에 있는 이웃 군대도 도착했다.[28]

1191년 6월 8일,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아크레에 도착하여 즉시 공성 병기 건설을 지휘, 도시를 공격하여 7월 12일에 함락시켰다. 리처드, 필리프, 레오폴트는 전리품을 놓고 다투었고, 리처드는 독일 깃발을 던져 레오폴트를 무시했다. 예루살렘 왕위 다툼에서 리처드는 기를, 필리프와 레오폴트는 콘라드를 지지했다. 결국 기가 계속 통치하고 콘라드가 그의 사후 왕관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리처드에게 실망한 필리프와 레오폴트는 8월에 군대를 이끌고 성지를 떠났다. 필리프는 7,000명의 프랑스 십자군과 5,000실링을 남겼다.[1]

1191년 6월 18일, 리처드는 아크레 도착 직후 살라딘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으나, 살라딘은 평화 조약 체결 후에야 왕들이 만나는 것이 관례라며 거절했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선물을 교환했고 리처드는 살라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29] 살라딘은 포로로 잡힌 무슬림 병사들의 석방을 위해 리처드와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8월 20일, 리처드는 살라딘이 지체한다고 생각하여 무슬림 포로 2,700명의 목을 베는 학살을 자행했고, 살라딘은 그가 사로잡은 모든 기독교 포로들을 죽임으로써 보복했다.[30] 아크레 함락 후, 십자군은 미일야와 비이나를 포함한 갈릴리의 일부 내륙 지역을 탈환했다.[31]
3. 4. 아르수프 전투와 야파 점령
아크레 함락 후,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 공격을 위한 거점으로 야파를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191년 9월 7일, 야파 북쪽 지점에 있는 아르수프에서 살라딘이 리처드의 군대를 공격했다. 살라딘은 리처드 군의 전열을 무너뜨려 각개격파하려 했으나, 리처드는 방어 진형을 유지했다. 요한 기사단이 살라딘 군대의 우익을 공격하자, 리처드는 총반격을 명령하여 승리했다. (\[\[아르수프 전투]])[32]
아르수프 전투는 십자군에게 중요한 승리였다. 무슬림 군은 7,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으며, 이는 무슬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십자군의 사기를 높였다.[33] 이 전투로 살라딘의 무적이라는 명성은 훼손되었고, 리처드의 용기와 지휘 능력이 입증되었다. 리처드는 전략적 요충지인 야파를 점령하고 방어함으로써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살라딘으로부터 해안 지역을 빼앗음으로써, 리처드는 예루살렘에 대한 살라딘의 지배력을 크게 위협했다.[33]
3. 5. 휴전과 철수
리처드의 군대는 피로가 쌓였고, 군대 내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없다는 불만과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불만이 퍼져 있었다. 1192년 9월 2일, 리처드와 살라흐 앗 딘은 1년 이상 교섭을 나눈 결과, 아크레를 포함한 티레부터 야파에 이르는 해안부의 모든 항구를 예루살렘 왕국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의 통치하에 둔다는 최종적인 휴전협정을 맺었다.[38]또한 체결된 문서에는 비무장한 기독교도의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다는 조건도 더해졌다. 9월 말 리처드는 잉글랜드를 향해 출발하고, 제3차 십자군 원정은 이로써 종료되었다.[38]
4. 주요 인물
제3차 십자군은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함락하자, 이에 맞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 원정이다.
-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으나, 1190년 살레프 강에서 익사했다.
- '''리처드 1세''': 잉글랜드의 왕으로, 아크레 공방전 등에서 활약했으나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는 못하고 살라딘과 야파 조약을 맺었다.
- '''필리프 2세''': 프랑스의 왕으로,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아크레 공방전 이후 프랑스로 귀국했다.
- '''레오폴트 5세''': 아크레 공방전 승리 후 리처드 1세와 갈등을 빚었다.[47]
- '''기 드 루지냥''':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아크레를 포위했다.
- '''몬페라토의 코라도''': 티르를 방어하고,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왕위를 주장했다.
- '''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살라흐 앗딘 알 아이유비|살라딘ar''':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으로,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리처드 1세와 대립했으나, 야파 조약을 통해 예루살렘을 지켰다.
- '''알 아딜''': 살라딘의 동생으로, 리처드 1세와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1. 십자군 측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 측 주요 인물과 그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육로를 통해 아나톨리아로 진입했다. 룸 셀주크 술탄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필로멜리온 전투와 이코니움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살레프 강에서 익사했다.
- 리처드 1세: 잉글랜드 왕으로, 해로를 통해 시칠리아를 거쳐 키프로스를 정복하고, 아크레 공성전에 참여했다.
- 필리프 2세: 프랑스 왕으로, 리처드 1세와 함께 시칠리아를 거쳐 티레에 도착한 후 아크레 공성전에 합류했다.
-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 1191년 봄 성지에 도착하여 남은 황제군 지휘권을 장악했다.[28] 아크레 공방전 승리 후 리처드 1세와 갈등을 빚었다.[47]
- 기 드 루지냥: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아크레를 포위했다.
- 몬페라토의 코라도: 티르를 방어하고,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왕위를 주장했다.
이 외에도 잉글랜드, 덴마크, 플랑드르, 프리지아 등에서 온 다양한 병사들이 해로를 통해 십자군에 합류하여 레콩키스타에도 기여했다.
4. 1. 1.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원정은 "가장 세심하게 계획되고 조직된" 것이었다고 평가받는다.[13] 프리드리히 1세는 1189년 5월 11일, 12,000명에서 26,000명(기사 2,000~4,000명 포함)의 군대를 이끌고 레겐스부르크를 출발했다.[1] 당시 연대기 작가들은 프리드리히의 군대 규모에 대해 10,000명에서 600,000명까지 다양한 추정치를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4,000~20,000명의 기사가 포함되었다.[14]프리드리히 1세의 원정에 관한 기록으로는 『프리드리히 황제 원정기』, 『순례자들의 역사』, 그리고 『프리드리히 황제의 죽음에 관한 서한』이 남아있다.[13]
1187년 10월,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함락하자 그레고리우스 8세는 독일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 11월에는 마르시의 헨리 추기경이 독일에서 십자군 설교를 담당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도 사절을 보내 십자군 참여를 촉구했으나,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13]
1188년 3월, 프리드리히 1세는 마인츠에서 크리스티아 법정을 열고 십자군 원정을 결의했다. 그의 아들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6세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참여했다. 십자군 원정 준비를 위해 참가자들은 최소 3마르크를 소지해야 했다.[13]
프리드리히 1세는 1189년 5월 11일, 12,000명에서 2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헝가리 왕자 게자가 이끄는 2,000명의 병력이 합류했고, 부르고뉴와 로렌에서 온 부대도 합류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끈 군대는 그가 독일을 떠날 때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13]
아나톨리아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1세는 룸 셀주크 술탄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으나, 튀르크군의 게릴라 공격을 받았다. 필로멜리온 전투에서 십자군은 튀르크군을 격파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이코니움을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이코니움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시를 약탈했다.[13]
1190년 6월 10일, 살레프 강을 건너던 중 프리드리히 1세는 말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그의 군대 대부분은 독일로 돌아갔고, 아들 슈바벤의 프리드리히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황제의 시신은 성 베드로 교회에 매장되었고, 유골은 십자군 원정을 계속했다. 그러나 안티오크에서 독일군은 열병으로 인해 더욱 감소했다. 젊은 프리드리히는 몽페라의 콘라드의 도움을 받아 아크레로 이동했고, 아버지의 유골을 매장했다.[13]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는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셀주크 술탄국의 수도를 함락하고 튀르크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13]
4. 1. 2. 리처드 1세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1189년 7월 6일에 사망했다. 리처드 1세는 그를 계승하여 즉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그의 신하들 중 일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바다를 통해 출발했다.[18] 1190년 4월, 리처드의 함대는 닷머스에서 리처드 드 캄빌과 로베르 드 사블레의 지휘 아래 출발하여 마르세유에서 왕을 만나러 갔다. 이 함대의 일부는 포르투갈 군주가 알모하드의 반격에 맞서 산타렝과 토르레스 노바스를 방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다른 그룹은 포르투갈 군주가 지도자들을 체포할 때까지 기독교 도시인 리스본을 약탈했다.[19] 리처드와 필리프 2세는 프랑스의 베젤레에서 만나 1190년 7월 4일에 함께 리옹까지 진군했고, 시칠리아에서 만나기로 합의한 후 헤어졌다. 리처드는 800명으로 추정되는 수행원들과 함께 마르세유로, 필리프는 제노바로 향했다.[20] 리처드는 마르세유에 도착했지만 자신의 함대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기다리고 배를 고용하는 것에 빨리 지쳐 8월 7일에 시칠리아로 떠났으며, 도중에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방문하여 9월 23일에 메시나에 도착했다. 한편, 영국 함대는 8월 22일에 마르세유에 도착했고, 리처드가 떠났다는 것을 알고 메시나로 직접 항해하여 9월 14일에 그보다 먼저 도착했다.[21] 필리프는 시칠리아를 경유하여 성지로 650명의 기사, 1,300마리의 말, 1,300명의 무관을 수송할 제노바 함대를 고용했다.[22]시칠리아의 윌리엄 2세는 전년에 사망했고, 탕크레드가 그를 대신하여 조안(윌리엄의 아내이자 리처드의 여동생)을 투옥했다. 리처드는 1190년 10월 4일에 메시나를 점령했고 조안은 석방되었다. 리처드와 필리프는 리처드의 결혼 문제로 불화를 겪었는데, 리처드가 필리프의 이복 여동생인 알리스와의 오랜 약혼을 깨고 나바라의 베렌가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필리프는 1191년 3월 30일에 시칠리아를 떠나 직접 중동으로 향했고, 4월에 티레에 도착하여 4월 20일에 아크레 공성전에 합류했다.[23] 리처드는 4월 10일까지 시칠리아를 떠나지 않았다.
시칠리아를 출발한 직후, 리처드의 180척의 배와 39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는 격렬한 폭풍을 만났다.[24] 그의 약혼녀 베렌가리아, 여동생 조안과 십자군 원정을 위해 모아둔 많은 보물을 싣고 있던 배를 포함하여 여러 척의 배가 좌초되었다. 곧 키프로스의 이사악 2세 콤네누스가 보물을 탈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두 여인은 무사했다. 리처드는 5월 6일에 리마솔에 상륙하여 이사악을 만났고, 이사악은 리처드의 소지품을 돌려주고 그의 병사 500명을 성지로 보내기로 합의했다. 리처드는 리마솔에 진영을 치고, 예루살렘 왕인 기 드 루지냥의 방문을 받았고 베렌가리아와 결혼하여 그녀를 왕비로 책봉했다. 파마구스타의 요새로 돌아온 이사악은 그의 환대의 맹세를 어기고 리처드에게 섬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사악의 오만함은 리처드가 며칠 만에 섬을 정복하도록 만들었고, 6월 전에 섬을 떠났다.[25] 그러나 베튀네의 익명의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가 아크레의 라틴 군대에서 식량 공급을 돌리고 있다는 이유로 키프로스를 공격했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26]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리처드의 키프로스 정복이 우연적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27]
4. 1. 3. 필리프 2세 (프랑스 왕)
시칠리아의 윌리엄 2세가 사망하고 탕크레드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조안을 투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 1세는 1190년 10월 4일에 메시나를 점령하고 조안을 석방시켰다. 이후 리처드와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결혼 문제로 불화를 겪었는데, 리처드가 필리프의 이복 여동생인 알리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나바라의 베렌가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23]
이러한 갈등 속에서 필리프 2세는 1191년 3월 30일에 시칠리아를 떠나 중동으로 향했고, 4월에 티레에 도착, 4월 20일에 아크레 공성전에 합류했다.[23] 그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레오 2세의 지원군과 함께 5월에 시칠리아에서 온 군대를 이끌고 성지에 도착했다.[28]
아크레 공성전에서 승리한 후, 리처드 1세, 필리프 2세, 레오폴트 5세는 전리품 분배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또한 예루살렘 왕위를 둘러싸고 리처드는 기를, 필리프 2세와 레오폴트 5세는 몽페라의 콘라드를 지지하는 등 대립이 심화되었다. 결국 기가 계속 통치하고 콘라드가 그의 사후 왕관을 받는 것으로 합의되었으나, 리처드 1세에게 실망한 필리프 2세와 레오폴트 5세는 8월에 군대를 이끌고 성지를 떠났다. 필리프 2세는 7,000명의 프랑스 십자군과 그들에게 지불할 5,000실링을 남겼다.[1]
4. 1. 4. 기타 인물
-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 1191년 봄, 항해 시즌이 시작되자 성지에 도착하여 남은 황제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28] 아크레 공방전 승리 후 전리품 분배를 놓고 리처드 1세와 다투었으며, 리처드가 독일 깃발을 던져 레오폴트를 무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7] 예루살렘 왕국 왕위 계승 문제에서 리처드 1세는 기를 지지했지만, 필리프 2세와 레오폴트는 콘라드를 지지했다.[47] 결국 기가 계속 통치하고 콘라드가 그의 사후 왕관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나, 리처드에게 실망한 레오폴트는 군대를 이끌고 성지를 떠났다.[47]
- '''기 드 루지냥''': 1189년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다.[70] 티르에서 기독교 세력의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아크레로 눈을 돌려 도시를 포위했다.[70] 시빌라 왕비와 그녀의 어린 딸들이 사망한 후, 결혼으로 왕위에 오른 기는 왕관을 유지하려 했지만, 합법적인 상속자인 이사벨라의 권리를 무시했다.[70] 예루살렘 왕국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투쟁에서 리처드 1세의 지지를 받았다.[47]
- '''몬페라토의 코라도''': 티르를 무슬림의 공격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한 후 권력을 쥐고 있었다.[70]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그녀의 이름으로 왕위를 주장했다.[70] 예루살렘 왕국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리처드 1세와 대립했고, 필리프 2세와 레오폴트 5세의 지지를 받았다.[47]
4. 2. 이슬람 측

아르수프 전투에서 승리한 리처드 1세는 야파를 점령하고 그곳에 본부를 설치했다.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협상을 제안했고, 살라딘은 그의 형제인 알-아딜(프랑크인들에게는 '사파딘'으로 알려짐)을 보내 협상에 응했다. 리처드의 누이 조앤이나 조카 엘레오노르를 알-아딜과 결혼시키려는 시도를 포함한 협상은 결렬되었고, 리처드는 살라딘에 의해 최근에 파괴된 아스칼론으로 진군했다.[34][35]
1191년 11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향해 내륙으로 진군했다. 12월 12일, 살라딘은 아미르(이슬람 군사령관)들의 압력으로 군대의 대부분을 해산해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리처드는 군대를 전진시켜 라트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예루살렘에서 불과 19km 떨어진 베이트 누바로 진군했다. 예루살렘의 무슬림 사기는 매우 저하되어 십자군이 도시를 빠르게 함락시킬 수도 있었지만, 혹독한 추위와 폭우, 우박 폭풍이 겹친 악천후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구원군에 의해 포위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해안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36]
리처드는 티레의 콘라드에게 원정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지만, 콘라드는 리처드와 기 왕의 동맹을 이유로 거부했다. 콘라드는 살라딘과 협상을 벌여 리처드가 티레를 공격할 때를 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4월, 리처드는 귀족들의 선거 후 콘라드를 예루살렘 왕으로 받아들였고, 기는 단 한 표도 받지 못했다. 리처드는 그에게 키프로스를 보상으로 팔았다. 콘라드는 왕관을 쓰기도 전에 암살단에 의해 암살당했고, 8일 후 리처드의 조카 앙리 2세는 콘라드의 아이를 임신한 이사벨라 여왕과 결혼했다. 콘라드 암살에 리처드가 연루되었다는 의심이 있었다.
겨울 동안 리처드의 군대는 살라딘에 의해 파괴되었던 아스칼론을 점령하고 재건했다. 1192년 봄, 협상과 소규모 충돌이 계속 발생했다. 5월 22일, 이집트 국경의 요새 도시 다룸이 5일간의 전투 끝에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37]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진군했고, 6월에는 도시가 보이는 곳까지 왔지만, 지도자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다시 후퇴해야 했다. 리처드와 군사회의 대다수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살라딘의 권력 기반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려 했으나, 부르고뉴 공작은 예루살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주장했다. 십자군은 두 파벌로 분열되었고, 통일된 지휘가 없었던 군대는 해안으로 후퇴했다.[38]
4. 2. 1. 살라딘
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살라흐 앗딘 알 아이유비ar는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이슬람 세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47]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켰다.[70]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야파 조약을 통해 예루살렘을 지켜냈다.[81] 그는 뛰어난 군사적 지도자이자 관용적인 정치가였다. 특히 예루살렘 점령 당시 기독교도들에게 보인 관용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117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우호 조약을 체결했으나,[16] 1188년 5월 26일, 하인리히 2세 폰 디츠 백작을 보내 살라딘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술탄은 정복한 땅에서 철수하고, 참십자가를 성묘 교회로 돌려주고, 그의 정복 과정에서 살해된 기독교인들에 대한 보상을 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프리드리히는 조약을 파기할 것이라고 명령했다.[17]
1189년, 살라딘은 기 드 뤼시냥을 감옥에서 석방했다.[47] 이후 기는 티르에서 기독교 세력의 지휘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아크레로 눈을 돌려 도시를 포위했다.[70] 그러나 이 연합군은 살라딘의 군대에 맞설 만큼 충분하지 않았고, 살라딘의 군대는 포위군을 포위했다.
1191년 6월 18일, 리처드 1세는 살라딘에게 직접 만남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으나, 살라딘은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에야 왕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 관례라며 거절했다.[71]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선물을 교환했고 리처드는 살라딘의 형제인 알-아딜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 1191년 9월 7일, 살라딘은 아르수프에서 리처드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74] 아르수프 전투는 살라딘의 무적 전사라는 명성에 금이 가게 했고, 리처드의 용기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아르수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리처드는 야파를 점령하고 그곳에 새로운 본부를 설치했다. 그는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고, 살라딘은 그의 형제인 알-아딜을 리처드와 만나도록 보냈다.[76]
1192년 7월, 살라딘의 군대가 야파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아이야디에 학살에 대한 군대의 분노로 인해 살라딘은 군대의 통제력을 상실했다.[72] 리처드는 살라딘과 그의 군대가 야파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벌였으나 살라딘에게 완패했고, 그는 후퇴했다.[81]
1192년 9월 2일, 야파에서 패배한 후 살라딘은 리처드와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은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남는다는 내용이었지만, 무장하지 않은 기독교 순례자와 상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73]
4. 2. 2. 알아딜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은 1191년 아르수프 전투에서 십자군이 대승을 거둔 후, 야파에 본영을 설치한 리처드 1세와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76][77]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이 야파로 파견한 알 아딜과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 협상에서 리처드의 여동생(혹은 조카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과의 결혼 합의 등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협상은 결렬되었다.5. 제3차 십자군의 영향
제3차 십자군은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하틴 전투 이후 살라딘의 파죽지세는 멈췄고, 십자군은 아콘을 탈환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하여 해안 지역 도시들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레반트 교역이 유지되었고, 라틴 기독교 세력은 이후 약 100년 동안 해안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하여 양측 모두 전쟁 결과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십자군에 비협조적이었고, 십자군이 키프로스를 점령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로마 교황은 국왕 중심의 십자군에 실망하여 제1차 십자군과 같은 제후 십자군을 원하게 되었다. 십자군 종료 후 아콘에 남은 독일인들은 튜튼 기사단의 기초가 되는 야전병원을 창설했다.
살라딘은 제3차 십자군 원정 1년 후인 1193년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고,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알아딜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제3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은 노르만인 시인 앙브로제 및 웨일즈의 역사가 지랄두스 칸브렌시즈의 저작, 『리처드 왕의 여정』(Itinerarium Regis Ricardi), 앙브루아즈(Ambroise), 랄프 드 디세토(Ralph de Diceto), 제럴드 오브 웨일스(Giraldus Cambrensis) 등이 편찬한 연대기 등에 남아 있다.
5. 1. 십자군 국가의 존속
하틴 전투 이후 살라흐 앗 딘의 파죽지세가 멈추었고, 해안 지역의 도시들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아콘을 탈환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한 덕분에 레반트 교역이 유지되어, 이후 약 100년 넘게 라틴 기독교 세력은 해안선을 유지하게 되었다.[40][41][42][43]양측은 전쟁 결과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리처드의 승리는 무슬림들로부터 중요한 해안 영토를 빼앗고 팔레스타인에 실행 가능한 프랑크 왕국을 재건했지만, 라틴 서방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탈환을 추구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44]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살라딘이 기독교인들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지 못한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무역은 중동 전역과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에서 번성했다.[45]
샐러딘의 학자이자 전기 작가인 바하 알-딘은 십자군의 성공에 대한 샐러딘의 고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평화를 맺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의 적은 이 땅을 유지했으니 강해질 것이다. 그들은 나머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나아올 것이며, 너는 그들 각자가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즉, 그의 성에서 "나는 그대로 있겠다"고 선포하고, 무슬림들은 망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말이었고, 그가 말한 대로 되었다.[46]
현대 역사가 토마스 F. 매든(Thomas F. Madden)은 제3차 십자군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제3차 십자군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인 원정이었다. 하틴 이후 샐러딘의 대부분의 승리는 사라졌다. 십자군 왕국은 분열에서 치유되었고, 해안 도시로 복원되었으며, 가장 큰 적과의 평화를 유지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는 못했지만, 리처드는 레반트의 기독교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85]
5. 2.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악화
비잔티움 제국의 십자군에 대한 비협조와 십자군 측의 키프로스 점령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 측의 균열이 한층 더 심해졌다.[44]5. 3. 교황의 권위 변화
로마 교황은 각 국왕이 주체가 된 십자군에 실망하여 다시 제1차 십자군처럼 제후 십자군을 원하게 되었다.[44]5. 4. 튜튼 기사단의 기원
십자군 종료 후에도 아콘에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후에 튜튼 기사단의 기초가 되는 야전병원을 창설하였다.[44]5. 5. 이슬람 세계의 변화
살라흐 앗 딘(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제3차 십자군 원정 1년 후인 1193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다.[46] 그의 사후, 아들들 간의 후계자 쟁탈전이 9년간 계속되었다. 결국 살라딘의 동생 알아딜이 권력을 장악하여 아이유브 왕조를 다시 통일하였다.[46]6. 한국사와의 연관성 (별도 항목)
제3차 십자군은 한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고려가 서방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혀갔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6. 1. 고려 시대의 대외 인식
고려는 몽골 제국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서방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혀갔다. 비록 고려가 직접적으로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서방과 이슬람 세계의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고려의 외교 정책과 세계관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6. 2. 종교적 관용과 갈등의 역사
킹덤 오브 헤븐은 제3차 십자군 전야의 핫틴 전투와 그 후의 엘사렘 포위전을 배경으로 하여 종교적 관용과 갈등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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