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 혁명의 독일인
1. 개요
미국 독립 혁명 기간 동안 영국은 독일어권 국가로부터 용병을 고용했고, 이에 맞서 미국은 독일계 미국인과 유럽 출신 지원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 왕 조지 3세는 하노버 선제후를 겸하고 있었고, 독일 용병의 사용은 미국 독립 선언의 주요 불만 사항 중 하나가 되었다. 헤센, 브라운슈바이크, 안스바흐 등 여러 독일 국가에서 군대를 파견했으며, 이들은 북미에서 영국군과 함께 싸웠다. 한편,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 독립을 지지하며 대륙군과 민병대에 참여했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의 독립을 암묵적으로 지원하며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러한 독일인들의 역할은 미국 독립 혁명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주제 | 미국 독립 전쟁에서 독일인의 역할 |
|---|---|
| 관련 민족 | 헤센인 브라운슈바이크인 발데크인 안할트-제르브스트인 하나우인 독일계 미국인 |
| 영국군 용병 | 약 30,000명 (전쟁 기간 동안) 대부분 헤센-카셀 출신 |
|---|---|
| 미국 독립군 | 펜실베이니아 독일인 연대 다양한 독일계 미국인 지원 |
| 용병 고용 | 영국이 용병을 고용하게 된 배경 독일 영방 국가들의 재정적 이익 |
|---|---|
| 독일계 미국인 | 전쟁 전부터 미국에 거주 독립군에 대한 지지 |
| 영국군 | 브랜디와인 전투 사라토가 전투 요크타운 전투 |
|---|---|
| 미국 독립군 | 저먼타운 전투 트렌턴 전투 |
| 전쟁 결과 | 독일 용병의 기여와 논란 독일계 미국인의 정체성 강화 |
|---|---|
| 문화적 영향 | 미국 내 독일 문화의 확산 독일어 사용 지역의 형성 |
| 관련 인물 | 프리드리히 아돌프 리델 |
|---|---|
| 기타 | 헤센인 병사들은 미국인들에게 "헤센인"이라고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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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영국 관계 -
사모아 위기
사모아 위기는 1880년대 후반 미국, 독일, 영국이 사모아 제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놓고 경쟁하며 발생한 국제적 긴장 상태로, 1899년 삼국 협약으로 사모아 제도가 분할되었다. -
독일-영국 관계 -
로카르노 조약
로카르노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유럽 평화 유지를 위해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등이 체결한 조약으로, 독일의 라인란트 침공 금지와 서부 국경 보장을 담고 있었으나 동부 국경에 대한 보장이 없어 동유럽의 불안을 야기했고 나치 정권에 의해 사실상 파기되었다. -
독일-미국 관계 -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위해 1919년 독일과 연합국이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독일에게 가혹한 조항들을 부과하여 반발을 일으켰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으며 국제 연맹 설립을 규정했다. -
독일-미국 관계 -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963년 서베를린에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구절을 사용하여 서베를린 시민들과 연대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 연설은 냉전 시대 베를린의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기념되고 있다. -
미국 독립 전쟁 -
차법
차법은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구제하기 위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차를 무관세로 수출하도록 허용한 법률로,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사 보스턴 차 사건과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
미국 독립 전쟁 -
보스턴 차 사건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차 수입에 반대하여 보스턴 시민들이 차 상자를 바다에 버린 사건으로,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2. 영국의 동맹국 (독일 용병)
미국 독립 혁명 기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내 여러 독일어권 국가들이 영국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파견했다. 이들 국가는 대부분 개신교 국가였으며, 영국과 종교적, 정치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조지 3세는 하노버 왕가 출신으로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를 겸하고 있었으며,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독일계 혈통이었다.
영국은 18세기 동안 7년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독일 용병 부대를 활용했으며, 미국 독립 혁명에서도 이러한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영국 시민을 상대로 용병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도 존재했다.
미국인들은 독일 군대의 도착을 조지 3세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이를 선전에 활용했다. 미국 독립선언에서도 "외국 용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들을 "죽음과 적막함, 그리고 폭거의 작업을 마치기 위해" 온 군대로 묘사했다.
몇몇 작은 독일어권 국가들은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정규군을 외국에 빌려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들 국가는 병사 임대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고, 군사력을 유지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의회는 독일 병사들이 미국에 남을 수 있도록 토지 제공 등의 혜택을 제시했고, 영국 역시 노바스코샤주에 정착하려는 독일 군인들에게 토지 및 세금 혜택을 제공했다.
다음은 미국 독립 혁명에 참전한 주요 독일 국가들이다.
| 국가 | 파견 병력 | 비고 |
|---|---|---|
| 헤센카셀 방백국 | 16,000명 이상 | 헤센병으로 불림, 뉴욕 뉴저지 전역, 저먼타운 전투, 찰스턴 공방전, 요크타운 전투 등 참전 |
| 헤센하나우 방백국 | 2,422명 | 벙커힐 전투 이후 조지 3세에게 연대 제공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 5,723명 | 새러토가 전역에서 존 버고인 휘하 독일 정규군 다수 차지, 허바튼 전투 참전 |
|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후국,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후국 | 2,353명 | 필라델피아 전역 참전, 요크타운 전투 참전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 5개 대대 | 지브롤터, 미노르카, 영국령 인도 파견 |
|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 | 1,160명 | 퀘벡 시 방어, 뉴욕 주둔 |
| 발데크 | 1,225명 | 뉴욕 전역 참전, 서플로리다 전역 배치 |
2.1. 헤센카셀
미국 독립 혁명 당시 헤센카셀 방백국은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는 영국 왕 조지 3세의 삼촌이었다. 헤센카셀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16,000명 이상의 군대를 파병했는데, 이들은 주로 헤센병이라고 불렸다.
헤센군은 뉴욕 뉴저지 전역, 저먼타운 전투, 찰스턴 공방전, 요크타운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초기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롱아일랜드 전투 참전이 지연되기도 했다.
헤센군은 15개 보병 연대, 4개 척탄병 대대, 2개 엽병 중대, 3개 포병 중대로 구성되었다. 특히 엽병 부대는 신중하게 모집되었고, 좋은 대우를 받았다. 헤센군은 대서양을 건너 병력을 보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징집하여 군악대 등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전쟁 결과, 6,500명의 헤센군이 귀환하지 못했으며, 일부는 미국에 남아 정착하기도 했다.
2.1.1.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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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폰 크니파우젠: 여러 주요 전투에서 헤센 군대를 지휘한 장군이다.
* 카를 폰 도노프: 1777년 레드뱅크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대령이다.
* 요한 랄: 1776년 트렌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대령이다. 랄의 부대는 포로로 잡혔고, 포로 대부분은 펜실베이니아로 보내져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2.2. 헤센하나우
헤센하나우 방백국은 헤센카셀의 준독립 지역으로, 개신교도인 빌헬름 1세가 다스렸다. 1775년 벙커힐 전투 소식을 들은 빌헬름은 조지 3세에게 무조건적으로 연대를 제공했다. 전쟁 기간 동안, 헤센하나우는 2,422명의 병사를 파견했고, 이 중 1,441명만이 1783년 귀환했다. 헤센병 상당수는 하나우에서 왔으며, 이들 중 몇몇은 전쟁 이후 미국 대륙에 남기를 원했다.
북아메리카에 파견된 부대는 보병 1개 대대, 예거 대대 1개, 자유군단이라 불린 비정규직 보병대대 1개, 포병 연대 1개로 구성되었다.
2.2.1. 주요 인물
빌헬름 폰 갈 대령은 헤센-하나우 출신의 유명한 장교이다. 그는 존 버고인 장군 휘하에서 하나우 연대를 지휘했다. 북아메리카로 파견된 부대에는 보병 대대 1개, 예거 대대 1개, 자유군단으로 알려진 비정규 보병 대대 1개, 포병 중대 1개가 있었다.
2.3.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미국 독립 혁명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브라운슈바이크)은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가문의 카를 1세가 통치했다. 그의 아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조지 3세의 누이 오거스타와 결혼했다.
1775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조지 3세에게 미국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병력이 있다고 말했다. 1776년 1월 9일, 브라운슈바이크는 독일어권 국가 중 처음으로 영국을 지지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4,000명의 병사(4개의 보병 연대, 1개의 척탄병 대대, 1개의 용기병 연대, 1개의 경보병 대대)를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조약에는 병사들의 급여를 2개월 선불로 탈러로 지급하고, 모든 병사가 조지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카를 1세는 프리드리히 바움 중령 휘하의 보병 4,000명과 중(重) 용기병 350명(말이 없는)을 제공했으며, 전군 지휘는 프리드리히 아돌프 리데젤 장군이 맡았다.
브라운슈바이크는 총 5,723명의 병사를 북아메리카로 보냈으며, 그 중 3,015명은 1783년 가을에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사 및 탈영으로 인한 손실도 있었지만, 많은 브라운슈바이크 병사들은 협약군으로 체류하는 동안 미국에 익숙해졌고, 전쟁이 끝나자 미국 의회와 상관의 허가를 받아 미국에 남았다. 카를 1세는 미국에서 전사한 병사 전원에 대해 영국으로부터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탈영병을 사망자로 보고하는 것이 유리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은 미국에 남거나 돌아간 병사에게도 6개월 치 급여를 지급했다.
2.3.1.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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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당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을 통치한 카를 1세는 프리드리히 아돌프 리데젤 장군에게 군대 지휘를 맡겼다. 그의 아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영국 왕 조지 3세의 누이 오거스타와 결혼하여 조지 3세에게 미국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를 지원하겠다고 알렸다.
리데젤 장군은 프리드리히 바움 중령 휘하의 보병 4,000명과 중(重) 용기병 350명(말이 없는)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들은 사라토가 전역에서 존 버고인 장군 휘하 독일 정규군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브런즈위커"(Brunswickers)라고 불렸다. 브라운슈바이크와 헤세-하나우 연합군은 버고인 군대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고, 브런즈위커는 훈련이 잘 된 것으로 알려졌다.
리데젤의 아내 프리데리케 리데젤은 남편을 따라 종군하며 사라토가 전역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버고인의 항복 이후, 2,431명의 브런즈위커는 종전까지 협약군으로 구금되었다.
2.4. 안스바흐 및 바이로이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카를 알렉산더가 다스리던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후국과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후국은 미국 독립 혁명 당시 영국에 2개 보병대대와 1개 예거 중대, 그리고 포병대 1개를 포함해 총 1,644명의 병력을 보냈다. 이 중 461명은 귀환하지 못했다.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에서 파견된 총 병력은 2,353명이며, 여기에는 예거 연대 전체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가장 키가 크고 미국에 온 연대 중 가장 멋있어 보였으며", "헤센인보다 더 잘 싸운다"고 평가받았다.
안스바흐군과 바이로이트군은 뉴욕에 있던 하우의 군대에 편입되어 필라델피아 전역에서 싸웠으며, 요크타운 전투 당시 찰스 콘월리스와 함께 있었다.
초기 동원 이후, 안스바흐군과 바이로이트군은 새로운 징집병을 추가로 파견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총 2,361명의 병사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파견되었지만, 1783년 말 귀국한 인원은 절반도 안 되는 1,041명이었다.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의 후작이었던 카를은 전쟁 발발 당시 빚이 많았으며, 병력 파견 대가로 100000GBP 이상을 받았다. 1791년, 카를은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를 프로이센 왕국에 매각하고 프로이센으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영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안스바흐-바이로이트 연대는 옥센푸르트에서 발생한 반란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 병사들은 마인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 중이었으나, 뷔르츠부르크 주교가 다리 개방을 거부하여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777년 3월 8일 아침, 몇몇 안스바흐 병사들이 강가에 도착하여 다른 배를 육지로 끌어당겼다. 장교들이 불안감을 전하려 했지만, 일부 병사들이 탈영했다. 탈영을 막기 위해 추격병이 배치되었고, 위협 사격을 가하자 반란병들이 반격했다. 변경백은 폭동 소식을 듣고 즉시 말을 타고 밤새 옥센푸르트로 달려갔다. 그는 병사들을 설득하여 재승선시켰고, 마인츠까지 동행하여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의 동의 없이 다리를 개방하는 데 성공했다.
2.5.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미국 독립 혁명 당시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하노버가 출신으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하노버)의 선제후였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와 영국은 동군연합 관계였으나, 각자의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1775년 초,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5개 대대는 지브롤터와 미노르카에 파견되어 영국군을 지원했다. 이들은 영국-하노버 조약에 따라 영국이 군대 비용을 지불하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군대가 해외에 파병되는 동안 브란덴부르크뤼네부르크 본토를 보호하기로 합의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군대는 지브롤터 대공방전에서 활약했으며, 미노르카 침공 때도 섬을 방어했다. 이후 이들은 영국령 인도로 파견되어 쿠달로르 전투에서 프랑스-마이소르 연합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2.6. 안할트첼프스트
안할트체르프스트의 공작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77년 영국과 1,160명의 병력을 제공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연대는 5개월 만에 창설되었으며, 900명의 신병으로 구성된 두 개의 대대로 편성되었다. 1778년 5월, 600~700명 규모의 첫 번째 대대가 캐나다 퀘벡 시 방어를 위해 파견되었다. 1780년에는 약 500명의 판두르(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족 영토에서 모집된 비정규군)로 구성된 두 번째 대대가 영국 점령하의 뉴욕시에 주둔했다. 당시 기록에는 이들을 판두르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들이 실제로 비정규 경보병으로 기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7. 기타 독일 지역 국가
미국 독립 혁명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는 여러 소규모 독일계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들 중 일부는 7년 전쟁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영국을 지원하기도 했다.
외국에 병사를 임대하는 것은 일부 유럽인들에게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이들 국가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병사들이 전쟁에 복무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프로이센은 병사 파견 요청을 거부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용병 부대에 입대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영국 부대에 입대했다. 제60(왕립 미국) 연대는 미국과 독일에서 징집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고용된 사람들에게 전투를 중단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1778년 4월, 의회는 "대영 제국 왕의 신민이 아닌 대영 제국 왕의 군대에 복무하는 장교와 병사에게"라는 편지를 발송하여, 탈영하는 독일 부대에 토지와 가축을 제공하고, 계급을 높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전쟁이 끝날 때, 의회는 이러한 민족 독일인들이 미국에 남아 있도록 특히 무상 농지를 제공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대영 제국은 또한 노바스코샤에 정착하려는 자국의 왕당파 군인들에게 토지 및 세금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발데크(Waldeck)
발데크는 1776년 4월 20일에 영국에 군대를 임대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발데크의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트 공은 유료 해외 복무를 위해 3개 연대를 준비시켰다. 이 연대 중 첫 번째 연대는 장교와 병사 684명으로 구성되어 1776년 7월 포츠머스에서 출항하여 뉴욕 전역에 참여했다. 전역 중에 발데크 연대는 미국인 리 장군의 와인과 술을 압수했는데, 영국군 호위 장군이 그들에게 길가에서 병을 비우도록 하자 분개했다.
발데크 군대는 헤센의 빌헬름 폰 크니파우젠 장군 휘하의 독일 지원군에 통합되었다.
1778년, 제3 발데크 연대는 펜서콜라를 방어하기 위해 존 캠벨 장군 휘하의 영국군으로 파견되었다. 이 연대는 포트 뷰트, 모빌, 배턴 루지를 포함한 서플로리다 전역에 배치되었다. 연대장 요한 루드비히 빌헬름 폰 한스레덴 대령은 자신의 병사들이 기후 때문에 병들고 심지어 죽어가고 있다고 불평했다. 외딴 지역에는 보급선이 거의 도착하지 않았고, 병사들의 급여는 현지 물품을 구매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트 공은 로드 저메인에게 발데크는 서플로리다에서 사망하는 병사들을 대체할 신병을 충분히 빨리 모집할 수 없다고 알렸다. 느린 보급품 외에도 영국군과 발데크군은 제때 소식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스페인이 스페인 총독 베르나르도 데 갈베스 휘하의 군대에 공격받을 때까지 스페인이 대영 제국에 선전포고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전역이 펜서콜라 포위전에서 끝났을 때, 스페인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보급도 받지 못한 발데크 병사들을 많이 징집했다. 영국 전쟁 포로들은 나중에 교환되었지만, 발데크 전쟁 포로들은 스페인에 의해 뉴올리언스, 베라크루스, 그리고 1782년에 최종 교환되기 전까지 1년 이상 아바나에 억류되었다.
발데크는 전쟁에 1,225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며, 사상자나 탈영병으로 720명을 잃었다. 전쟁 중 358명의 발데크 병사가 질병으로 사망했고, 37명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하노버(Hanover)
하노버 선제후는 다름 아닌 영국 국왕 조지 3세였으며, 그의 4개 대대가 먼저 지브롤터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포위된 영국군을 해방한 후, 미국에서 싸우기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다. 이는 조지 3세의 명령은 아니었지만, 영국 의회와 하노버 간에 승인된 조약의 일부였으며, 영국은 전시 비용을 지불하고 독일 동맹국을 보호하는 데 동의했다.
3. 미국의 동맹
조지 워싱턴은 그의 군대에 유럽 대륙 출신 장교들을 환영했다. 바이에른 출신 요한 데 칼브는 대륙군에서 장군으로 임명되기 전에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했다. 프로이센 출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베트케 남작은 전쟁 초기에 의회 임명을 받았으나 1776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발트 독일인 구스타프 로젠탈은 대륙군 장교가 되었다. 그는 전쟁 후 에스토니아로 돌아갔지만, 데이비드 지글러와 같은 다른 독일 군인들은 남아 그들이 건설하는 데 기여한 국가의 시민이 되기로 했다.
프랑스는 2,500명 이상의 군인으로 구성된 8개의 독일어 사용 연대를 보유했다. 유명한 로종의 군단에는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독일어로 지휘되었다. 프랑스 로열 되퐁 연대에도 독일 군인과 장교가 있었다.
프로이센 출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은 프랑스를 통해 미국으로 와서 워싱턴의 감찰관으로 복무한 것으로 유명하다. 슈토이벤 장군은 밸리 포지에서 대륙군을 훈련시킨 것으로 인정받았으며, 나중에 미국 육군을 위한 최초의 도수 훈련 교본을 저술했다. 1780년 6월 그는 뉴저지주 모리스타운 방어의 선봉 부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받았다. 폰 슈토이벤은 시민권을 받았고 1794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에 머물렀다.
폰 슈토이벤의 고향인 프로이센은 무장 중립 동맹에 참여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 초기에 보여준 지원으로 미국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 동안 영국 군주가 군사 보조금을 철회한 이후 조지 3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미국과의 통상을 개시하고 영국 항구를 우회하는 데 관심을 표명했으며, 미국 요원이 프로이센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것을 허용했다. 프리드리히는 미국의 성공을 예측했고, 프랑스가 그렇게 하면 미국과 미국 외교관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로이센은 또한 러시아와 인접한 독일 국가들이 아메리카로 보낼 군대를 모집하는 데 간섭했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내에서 미국 전쟁에 징병되는 것을 금지했다. 안할트-체르프스트 출신의 병사들에게는 모든 프로이센 도로가 금지되어, 1777-1778년 겨울에 하우가 받기를 희망했던 증원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과 영국의 관계에 대해 훨씬 더 신중해졌다. 미국 선박은 프로이센 항구에 접근하는 것이 거부되었고, 프리드리히는 파리 조약에 서명할 때까지 미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전쟁 후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이 너무 커서 공화국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곧 영국 의회에 대표를 포함하여 대영 제국에 재가입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다.
3.1. 독일계 미국인
영국 식민지로의 독일 이민은 17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1690년, 독일인 정착민들은 북아메리카에 최초의 제지 공장을 건설했고, 영국보다 먼저 미국에서 성경이 인쇄되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식민지 아메리카 인구의 약 10%가 독일어를 사용했다. 독일인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비영국계 유럽 소수 민족이었지만, 그들의 동화와 영어화는 매우 다양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중인 1756년에, 영국은 주로 독일 식민지 이주민으로 구성된 왕립 미국 연대를 결성하여 그들을 활용했다. 당시 바론 데 바이센펠스를 포함한 다른 독일인들이 이민을 왔으며, 그는 영국 장교로 뉴욕에 정착했다.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바이센펠스는 영국군을 탈영하고 1775년부터 애국자들과 함께 복무했으며, 중령까지 진급했다.
독립 전쟁 이전에는 남부 식민지의 상당수의 독일인 정착민들이 왕당파였으며, 미국 식민지의 대부분의 독일계 식민지 주민들은 가혹 법안과 같은 영국 정책에 대해 동일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많은 독일계 식민지 주민들이 미국 독립 전쟁 동안 중립을 유지하기로 선택했지만, 상당수는 애국자 또는 왕당파의 대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지역 민병대와 정규 군대에서 모두 싸웠으며, 소수는 전쟁 후 망명하여 독일로 돌아갔다.
펜실베이니아 더치는 바르톨로뮤 폰 헤어 대위 휘하의 미국 헌병대에 모집되었는데, 그는 전쟁 전에 유럽에서 유사한 부대에서 복무한 프로이센 출신으로, 펜실베이니아주 리딩으로 이주했다.
독립 전쟁 동안, 헌병 군단은 정보 수집, 경로 보안, 적 포로 작전, 심지어 스프링필드 전투에서의 전투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헌병대는 또한 요크타운 전투 동안 워싱턴의 사령부를 경비했고, 그의 경호원 역할을 했으며, 독립 전쟁 이후 해체된 마지막 부대 중 하나였다. 헌병대는 그들의 명확한 임무와 더불어 일부 대원들이 영어를 거의 또는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륙군으로부터 종종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6명의 헌병은 징집되기 전 헤센 포로이기도 했다. 헌병대는 현대 미국 군사 경찰대와 동일한 기능을 많이 수행했기 때문에 현재의 미국 군사 경찰 연대의 전신으로 간주된다.
1776년 5월 25일, 제2차 대륙 회의는 대륙군의 일부로 식민지 독일계 출신으로 구성된 제8 메릴랜드 연대, 일명 독일 대대 또는 독일 연대의 창설을 승인했다. 대부분의 대륙군 부대와 달리, 이 연대는 여러 주에서 병력을 충원했으며, 초기에는 8개 중대(메릴랜드 4개, 펜실베이니아 4개(나중에는 5개))로 구성되었다. 앤서니 웨인 장군 휘하의 소령 니콜라스 하우세거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연대는 트렌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설리번 원정에 참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에 맞서 싸웠다. 이 연대는 1781년 1월 1일에 해산되었다.
3.1.1. 주요 인물
프랑스-인디언 전쟁 중인 1756년에, 영국은 주로 독일 식민지 이주민으로 구성된 왕립 미국 연대를 결성하여 그들을 활용했다. 당시 바론 데 바이센펠스를 포함한 다른 독일인들이 이민을 왔으며, 그는 영국 장교로 뉴욕에 정착했다.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바이센펠스는 영국군을 탈영하고 1775년부터 애국자들과 함께 복무했으며, 중령까지 진급했다.
몇몇 새로운 주들은 독일 연대를 창설하거나, 독일계 미국인으로 지역 민병대의 병력을 채웠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독일계 식민지 주민들은 1775년에 총병 부대를 결성했고, 조지아주의 일부 독일인들은 앤서니 웨인 장군 휘하에 입대했다.
독일 애국자들은 대규모의 평화주의적 퀘이커 인구와 대조를 이루는 곳에서 가장 많았다. 예를 들어, 피터 뮬렌버그와 프레데릭 뮬렌버그 형제는 의회에 선출되었고, 피터는 워싱턴의 참모로 복무했다. 독일의 반 레어 가문은 모두 장교로 입대했으며, 일부는 앤서니 웨인 장군 휘하에 있었다.
1776년 6월 27일, 제2차 대륙 회의는 대륙군의 일부로 "독일인 연대"를 결성하는 것을 승인했다. 처음에는 메릴랜드 출신 4개 중대와 펜실베이니아 출신 4개(후에는 5개) 중대, 총 8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앤서니 웨인 장군 휘하의 니콜라스 호이세거 소령이 대령(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연대는 트렌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에 참전했고, 존 설리번의 인디언에 대한 원정에도 참여했다. 이 연대는 1781년 1월 1일에 해산되었다.
3.2. 유럽 출신 지원자
조지 워싱턴은 그의 군대에 유럽 대륙 출신 장교들을 환영했다. 요한 데 칼브는 대륙군에서 장군으로 임명되기 전에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한 바이에른 출신이었다. 다른 독일인들도 그들의 군사 훈련을 활용하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베트케 남작은 전쟁 초기에 의회 임명을 받은 프로이센 장교였으며, 1776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구스타프 로젠탈은 에스토니아 출신의 발트 독일인으로 대륙군 장교가 되었다. 그는 전쟁 후 에스토니아로 돌아갔지만, 데이비드 지글러와 같은 다른 독일 군인들은 남아 그들이 건설하는 데 기여한 국가의 시민이 되기로 했다.
프랑스는 2,500명 이상의 군인으로 구성된 8개의 독일어 사용 연대를 보유했다. 프랑스 로열 되퐁 연대에도 독일인 병사와 장교가 있었다.
애국주의 대의를 지원한 가장 유명한 독일인은 프랑스를 통해 미국으로 독립적으로 와서 워싱턴의 [[감찰관]으로 복무한 프로이센 출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었다. 슈토이벤 장군은 밸리 포지에서 대륙군을 훈련시킨 것으로 인정받았으며, 나중에 미국 육군을 위한 최초의 도수 훈련 교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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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이벤의 고향인 프로이센은 무장 중립 동맹에 참여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 초기에 보여준 지원으로 미국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과의 통상을 개시하고 영국 항구를 우회하는 데 관심을 표명했으며, 미국 요원이 프로이센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것을 허용했다. 프리드리히는 미국의 성공을 예측했고, 프랑스가 그렇게 하면 미국과 미국 외교관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로이센은 또한 러시아와 인접한 독일 국가들이 아메리카로 보낼 군대를 모집하는 데 간섭했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내에서 미국 전쟁에 징병되는 것을 금지했다. 안할트-체르프스트 출신의 병사들에게는 모든 프로이센 도로가 금지되어, 1777-1778년 겨울에 하우가 받기를 희망했던 증원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과 영국의 관계에 대해 훨씬 더 신중해졌다. 미국 선박은 프로이센 항구에 접근하는 것이 거부되었고, 프리드리히는 파리 조약에 서명할 때까지 미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전쟁 후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이 너무 커서 공화국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곧 영국 의회에 대표를 포함하여 대영 제국에 재가입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다.
3.3. 프로이센의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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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이벤의 모국인 프로이센은 무장 중립 동맹에 참여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 초기에 지원한 것으로 미국에서 환영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 동안 영국 군주가 군사 보조금을 철회한 이후 조지 3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영국 항구를 거치지 않고 미국과 무역을 시작하는 데 관심을 보였고, 프로이센에서 미국의 대리인이 무기를 구매하는 것을 허가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의 성공을 예언했고, 미국을 정식으로 인정할 것을 약속했으며,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외교관을 받아들였다. 프로이센은 러시아 등 인접국이 미국에 파견하는 군대를 일으킬 때 간섭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국내에서 미국을 위해 징병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프로이센 국내 도로를 안할트-체르프스트 군대가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 부대는 1777년부터 1778년 겨울에 워싱턴 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하우 장군이 필요로 했지만 도착이 늦어졌다.
그러나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과 영국의 관계에 매우 신경을 썼다. 미국의 선박은 프로이센 항구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1783년의 파리 조약에 서명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미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후에도 미국은 공화국으로 운영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곧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 대영 제국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