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큰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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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큰아기는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로, 동생 박희순 루치아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귀의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지켰으며, 박희순이 먼저 순교한 후 약 4개월 뒤 5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되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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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큰아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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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큰아기 마리아 |
출생일 | 1786년 |
사망일 | 1839년 9월 3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자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박큰아기는 조선 한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동생 박희순 루치아가 있었는데, 동생 박희순은 미모가 뛰어나 일찍이 궁녀로 선발되어 순원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박희순은 궁중 생활 중 30세가 넘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깊은 신앙심을 느껴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박큰아기 또한 동생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자매는 조카의 집에서 함께 신앙 생활을 하였다. 박큰아기의 정확한 개종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동생과 함께 검소하고 신실한 삶을 살며 주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발발하자, 박큰아기와 박희순 자매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박희순은 침착하게 대응하며 함께 있던 이들을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자매는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특히 전직 궁녀였던 박희순은 더욱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두 자매 모두 배교를 거부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조선의 형법은 한 가족 구성원 두 명을 같은 날 처형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동생 박희순이 1839년 5월 24일 먼저 순교하였다. 박큰아기는 그로부터 약 4개월 뒤인 1839년 9월 3일, 54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며 신앙을 증거했다.
2. 1. 출생과 궁중 생활
박큰아기는 한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동생 박희순 루치아가 있었다. 동생 박희순은 외모가 뛰어나 일찍 궁궐에 들어가 순원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그녀는 영리하고 유능하여 빠르게 승진했으며, 조선어와 청국어를 읽고 쓰는 데 능숙했다.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때때로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박희순이 15세 되던 해, 당시 17세였던 순조 임금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러 차례 유혹을 시도했다. 당시 궁녀들은 왕의 관심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박희순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을 아끼는 순원왕후의 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큰 용기를 내어 순조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쳤다.
이 일은 궁궐 안에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훗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앵베르 주교는 "그것은 용감하고 올곧은 행동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 전까지 조선에서 본 적이 없었다."라고 평가하며 그녀의 강직함을 높이 샀다.
2. 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박큰아기의 동생 박희순 루치아는 궁녀로 있다가 30세가 넘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천주교 신앙을 통해 삶의 더 숭고한 의미를 찾고자 했고, 교리를 깊이 공부하기 원했다. 그러나 궁궐 환경은 신앙 실천에 적합하지 않았고, 당시 궁녀는 특별한 이유 없이 궁을 나설 수 없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한 박희순은 병을 핑계로 마침내 궁궐을 나올 수 있었다.천주교를 반대하는 부친 때문에 박희순은 조카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허례허식을 버리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조카와 그 가족들에게 모범을 보여 그들을 천주교로 이끌었다. 이 무렵 언니 박큰아기도 동생이 있는 조카의 집으로 와 함께 살게 되었다. 박큰아기가 어떻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동생 박희순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1839년 박해가 시작되자, 박큰아기와 박희순 자매를 포함한 가족들은 조정의 탄압을 피해 숨어 지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이 집을 급습하여 그들을 체포했다. 박희순은 침착하게 포졸들을 맞이하며 당황한 가족과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입시다."라고 말했다.
박큰아기와 박희순을 포함한 신자들은 의연하게 감옥으로 향했다. 전직 궁녀였던 박희순은 특히 더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포장이 배교를 강요하며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했지만, 박희순은 "하느님은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저는 교우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지켰다.
결국 박희순과 박큰아기는 형조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박희순은 세 차례의 곤장형을 포함한 고문으로 살이 찢기고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신앙을 잃지 않고 오히려 "이제야 저는 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판서는 박희순과 동료 신자들이 배교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하며 사형을 주장했다.
박큰아기 역시 극심한 고문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형법은 한 가족 두 명을 같은 날 처형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박희순이 먼저 1839년 5월 24일에 순교하였고, 박큰아기는 약 4개월 뒤인 9월 3일에 54세의 나이로 처형당하며 신앙을 증거했다.
2. 3. 체포와 투옥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박큰아기와 박희순 자매는 조용히 지내며 조정의 탄압을 피하려 했으나,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이 집을 급습했다. 동생 박희순은 침착하게 포졸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대접하며 당황한 가족과 교우들을 안심시켰다. "하나님|하느님한국어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하느님한국어의 뜻이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입시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박큰아기와 동생 박희순을 포함한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예상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직 궁녀였던 박희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이로 인해 그는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포장은 박희순에게 배교하고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댈 것을 강요했으나, 그는 "하나님|하느님한국어은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교우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 라며 거부했다.
포장은 자백을 얻지 못하자 박큰아기와 박희순 자매를 형조로 이송했다. 형조 감옥에서 박희순은 세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다리뼈가 부러지는 등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나, 신앙을 지켰다. 박큰아기 역시 동생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문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형법은 한 가족 두 명을 같은 날 처형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자매는 서로 다른 날 처형되게 되었다.
동생 박희순은 1839년 5월 24일에 먼저 순교하였고, 박큰아기는 약 4개월 뒤인 9월 3일에 54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2. 4. 고문과 순교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박큰아기와 그녀의 동생 박희순은 다른 교우들과 함께 몸을 피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1839년 4월 15일, 피신 계획을 세우던 중 포졸들이 집을 급습했다. 박희순은 침착하게 포졸들을 맞이하고 집 안으로 들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당황한 가족과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입시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다.[1]박큰아기와 박희순을 포함하여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은 의연하게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고난을 예상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1]
박희순이 과거 궁녀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더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궁궐에서는 "현직 또는 전직 궁녀에 대해 불리한 증거가 있다면, 궐에 신고 후 체포한다"는 교지까지 내려진 상태였다. 포장은 박희순에게 궁녀로서 더 많이 배웠을 터인데 어째서 "그릇되고 비열한 종교"를 믿느냐고 추궁했다. 이에 박희순은 "저희는 이것을 그릇된 종교라 여기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분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숭경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1]
포장이 배교하고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지만, 박희순은 "하느님은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저는 교우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라며 단호히 거부했다.[1]
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포장은 박희순과 박큰아기를 형조로 이송시켰다. 형조 감옥에서 박희순은 각각 30대의 곤장을 맞는 고문을 세 차례나 더 당했다. 이 고문으로 살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다리뼈가 드러났으며, 결국 한쪽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상처를 닦아내며 "이제야 저는 주님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했다. 박희순의 상처가 며칠 만에 빠르게 치유되는 모습을 본 판서와 형졸들은 놀라며 이를 요술로 여겼다. 결국 판서는 박희순과 동료들이 뉘우치기를 거부한다며 사형을 청하는 보고를 올렸다.[1]
감옥에서도 박희순은 다른 죄수들을 가르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했으며, 근심과 의심에 빠진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주님의 사도'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순교할 준비를 마쳤다. 극심한 수감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어서 주님의 곁으로 가기를 열망하며, 형리에게 자신의 목을 벨 때 망설이지 말고 단칼에 베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1]
박큰아기 역시 동생과 마찬가지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형법은 한 가족에서 두 명 이상을 같은 날 처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자매는 서로 다른 날 처형되었다. 박희순은 1839년 5월 24일에 먼저 순교했고, 박큰아기는 약 4개월 뒤인 9월 3일에 5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1]
3. 시복 · 시성
박희순 루치아와 박큰아기 마리아는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1]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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