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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적 아나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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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란적 아나키즘은 국가와 자본주의의 유지를 중단하기 위한 지속적인 실천으로,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한 이념적 해결책이 아니다. 19세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기원하여, 혁명보다는 개인의 반역을 강조하며, 영속적인 조직 대신 일시적인 친화 집단을 통해 직접 행동을 수행한다. 반란적 아나키즘은 공격의 개념, 반역과 혁명의 구분, 투쟁의 자기 관리,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 초월 등을 핵심 원칙으로 한다. 20세기 초 루이지 갈레아니의 갈레아니스트 운동을 거쳐, 20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재등장하여 비공식 아나키스트 연맹(FAI)과 같은 조직을 통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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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적 아나키즘
반란적 아나키즘
개요
정치 이념아나키즘
주요 목표국가 폐지
자본주의 폐지
계급 사회 폐지
핵심 전략비합법적 투쟁
반란
폭력적 저항
주요 특징즉각적인 혁명 추구
대중 봉기 강조
조직과 제도에 대한 불신
주요 비판비현실적 목표
폭력적 성향
대중 참여 부족
이론적 배경
주요 영향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막스 슈티르너
조르주 소렐
관련 이론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생태 아나키즘
관련 개념직접 행동
자발적 조직
반권위주의
자기 해방
실천
활동 사례스페인 내전 중 아나키스트 운동
1960년대 ~ 70년대 유럽의 급진 운동
현대의 자율주의 운동
조직 형태비공식적 그룹
자율적인 연대
전략 및 전술파괴 행위
점거
시위
직접 행동
반란봉기
사회적 불안정
계급 갈등 심화
비판 및 논쟁
실현 가능성비현실적인 유토피아라는 비판
폭력적 방법론에 대한 논쟁
사회적 영향사회 불안과 혼란 야기 우려
기존 사회 질서 파괴에 대한 비판
내부 논쟁조직과 리더십에 대한 입장 차이
폭력과 비폭력 저항에 대한 의견 불일치
장기적인 전략 부재에 대한 지적
관련 주제
관련 주제아나키즘
자율주의
좌익 공산주의
반권위주의
급진주의
사회 운동

2. 역사

반란적 아나키즘은 19세기 후반 미하일 바쿠닌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쿠닌은 반역의 힘에 집중하여 남부 유럽에서 자율적인 반란을 기반으로 통합된 행동을 지지했고, 이는 이후 반란적 아나키즘이 남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6] 1876년,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혁명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행동은 가장 효과적인 형태의 프로파간다이다."라고 주장하며, 행동을 통해 사회주의 원칙을 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선언했다.[7]

1880년과 1890년 사이, 혁명적 관점을 가진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반대하며, 노동조합 조직과 임금 인상 등을 목표로 하는 파업에 반대했다.[8] 이들은 수용적 파업을 위해 실업자들 사이에서 식료품 등을 수용할 것을 선동했고, 개인의 수복이나 테러를 동반하기도 했다.[8] 1870년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은 "행동의 선전"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폭동을 일으키도록 고무하는 작은 직접 행동을 의미했다. 1890년대 이탈리아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은 프랑스 대통령, 스페인 총리, 오스트리아 황후, 이탈리아 국왕을 암살했다.

20세기 초, 루이지 갈레아니는 신문 ''Cronaca Sovversiva''를 통해 반란적 아나키즘을 전파했다.[30] 갈레아니는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화된 운동 참여를 부패와 개혁주의에 물들기 쉽다며 강하게 반대했다.[31] 그는 행동을 통한 프로파간다를 주장했고, 이는 북미 전역의 갈레아니스트 세포 조직에 의해 실천되었다.[34]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뒤이은 정치적 탄압 이후, 갈레아니스트들은 미국 정부에 대항하는 폭력 투쟁을 시작했다.[35]

월스트리트 폭탄 테러(1920)의 여파


팔머 레이드로 인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사코와 반제티가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갈레아니스트들은 월스트리트 폭탄 테러를 일으켜 38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며 이들의 석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40]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반란적 아나키즘 운동은 대부분 지하로 숨어들었다.

비공식 무정부주의 연맹(FAI)의 로고


납의 시대 동안 이탈리아는 좌익과 우익 테러리즘 사건으로 혼란스러웠는데, 이 시기에 이탈리아 무정부주의 운동 내에서 반란적 아나키즘이 다시 등장했다.[1] 1977년, 알프레도 보나노는 『무장된 기쁨(Armed Joy)』을 출판하여 노동 비판을 주장하고 기쁨의 감정을 강조하며 혁명적 폭력 사용을 옹호했다.[1] 1980년대, 이탈리아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은 통신 및 전력 시설과 같은 "소프트 타겟"에 대한 소규모 파괴 행위를 시작했다.[2] 1999년부터 2003년 사이에 4개의 폭동주의 그룹이 20건 이상의 폭탄 테러를 자행했고, 2003년 12월 비공식 무정부주의 연맹(FAI)로 합병되었다.[4]

2008년 그리스 폭동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라피티


붉은 여단 해체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을 이탈리아 내 가장 위험한 국내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왔으며, 이슬람 테러리스트 다음으로 위험하다고 여겼다.[6]

"시애틀 전투"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시위대


미국에서는 벽에 맞서 싸우는 놈들(Up Against the Wall Motherfucker) 설립 이전까지 폭동적 무정부주의는 대부분 소외되어 있었다.[8] 2000년대 중반, 유럽에서 폭동주의의 부상에서 영감을 받은 허무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 무장된 욕망의 저널(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AJODA)을 설립했는데, 이 저널은 폭력에 대한 폭동주의자들의 촉구를 받아들였고, 그 구성원들은 점거 시위에 참여했다.[9]

A. G. Schwarz는 《signals of disorder》에서 공격과 무질서의 신호가 사회적 혼란기에 투쟁의 장을 형성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행동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아야 하며, 연대와 공동체를 갈망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34]

불의 세포의 음모는 《The Sun Still Rises》에서 국가는 단순한 억압 기구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시스템이며, 혁명은 각자가 현재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지배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유를 위한 범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5]

《At Daggers Drawn with the Existent, its Defenders and its False Critics》에서는 삶은 집착할 것이 아니며,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반란과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쁨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동의 가장 아름다운 이유가 되며, '아니'라는 말에서부터 명령에 대한 무장 투쟁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36]

peter gelderloos는 《the failure of nonviolence》에서 새로운 감옥의 탄생을 막기 위해 모든 전술이 필요하며, 맞서 싸움으로써 지배의 사회관계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폭력은 세계와의 투쟁에서 무능하다고 비판했다.[37]

Alfredo M. Bonanno는 《Why Insurrection?》에서 대중의 준비는 혁명의 전제 조건이 아니며, 혁명적 아나키스트 소수자는 역사적 과업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스탈린주의자들이 이끄는 반란에도 참여하여 권위주의와 대치하며 총체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38]

루이지 갈레아니는 《The end of anarchism?》에서 공산주의와 개인주의는 모순되지 않으며, 서로를 보완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버리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며, 동시에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독립과 자율성을 실현하는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39]

2. 1. 19세기: 기원과 발전

정강주의적 아나키스트 조 블랙(Joe Black)은 "전술로부터 이데올로기가 구성되는 것은 아나키즘 내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3] 막스 슈티르너는 그의 저서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혁명과 반역을 구분했다. 그는 혁명은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의 단순한 위치 전복이며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위이지만, 반역은 개인의 불만에서 시작하여, 우리를 더 이상 지배받지 않게 하고, 제도에 의존하지 않도록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는 확립된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에고이스트적 행위이자 목적이라고 강조했다.[5]

미하일 바쿠닌은 반역의 힘에 집중하는 아나키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남부 유럽에서 자율적인 반란을 기반으로 통합된 행동에 대한 지지를 구축했고, 이후 반란적 아나키즘은 남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6] 1876년,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혁명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행동은 가장 효과적인 형태의 프로파간다이다."라고 주장하며, 행위에 의해 사회주의 원칙을 단언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프로파간다 수단이라고 선언했다.[7]

아나코 코뮤니즘은 19세기 중엽 미하일 바쿠닌의 집산주의, 생디칼리즘에 참여를 통한 아나키즘 운동, 그리고 노동 운동과 여러 다른 이슈들에 대한 논쟁을 통해 등장했다.[8] 표트르 크로폿킨과 같은 이들에 의해 정교화된 아나코 코뮤니즘의 혁명 이론은 기업에서 조직된 노동 계급(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세포)과 고용주보다 더 합리적인 산업의 신체 또는 사회적 두뇌(관리자)로서 노동력 자체를 주장하는 것에서 진정한 행위자인 인민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8]

1880년과 1890년 사이, 혁명적 관점을 가진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정치적(국가주의적인) 투쟁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의한 조직화와 임금 같은 것들을 목표로 한 파업 등에 반대했다.[8] 다만 그들이 파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과 8시간 노동 같은 사안에 투쟁이 맞춰지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러한 반개혁주의적 경향은 반조직 경향을 수반했으며, 이 게릴라들은 수용적 파업 행위를 위해 실업자들 사이에서 식료품을 비롯한 여러 물품을 수용할 것을 선동했고,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수복이나 테러리즘을 동반했다.[8]

1870년대에는 "행위의 선전"이라는 개념이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되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폭동 행위를 하도록 고무할 작은 직접 행동을 의미했다. 폭동주의자들은 모든 폭동이나 반란을 일반적인 사회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종의 "혁명적 체조"로 보았다. 이 이론에 따라 이탈리아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은 1890년대에 일련의 주목할 만한 암살을 자행하여 프랑스 대통령, 스페인 총리, 오스트리아 황후, 이탈리아 국왕을 살해했다.

한편, 조직 문제는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운동을 노동 운동 내에서의 조직을 옹호하는 신디칼리스트들과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형태의 자치적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폭동주의자들로 분열시켰다. 폭동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 연맹과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공식 조직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운동의 개혁주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했다. 두 경향 모두 아나르코-공산주의를 옹호했지만, 조직 옹호론자들은 폭동주의자들이 개인 주권과 자연법에 대한 믿음 때문에 실제로 개인주의 아나키즘의 경향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2. 2. 20세기 초: 갈레아니스트 운동

루이지 갈레아니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아나키스트로, 그의 신문 ''Cronaca Sovversiva''를 통해 반란적 아나키즘을 전파했다.[30] 갈레아니는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화된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부패와 개혁주의에 물들기 쉽다며 강하게 반대했다.[31] 이러한 입장은 산별노조(IWW)과의 갈등을 일으켰고, 1912년 로렌스 섬유 파업 이후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32] 하지만, 외부에서는 아나키스트 세력 간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이들을 모두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다.[33]

갈레아니는 행동을 통한 프로파간다를 주장했고, 이는 북미 전역의 갈레아니스트 세포 조직에 의해 실천되었다. 이들은 주로 친밀한 관계의 개인들로 구성되었다.[34]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뒤이은 정치적 탄압 이후, 갈레아니스트들은 미국 정부에 대항하는 폭력 투쟁을 시작했다.[35]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이 미국 국기를 찢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살해되자, 갈레아니스트들은 보복 공격을 감행했고, 이는 반란주의자들에 대한 연쇄 체포로 이어졌다.[36]

추방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 반란주의자 동료를 돕기 위해, 갈레아니스트들은 1919년 미국 아나키스트 폭탄 테러를 일으켜 기업가, 정치인, 변호사들에게 우편 폭탄을 보냈다.[37] 폭탄은 목표물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가정부에게 부상을 입히고, 공모자 중 한 명이 실수로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38] 공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갈레아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란주의자들은 추방되었고, 폭탄 테러는 1919년 파업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이용되었다.[39]

팔머 레이드로 인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사코와 반제티가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갈레아니스트들은 월스트리트 폭탄 테러를 일으켜 38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며 이들의 석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레아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조작당했다고 믿는 사코와 반제티를 돕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1922년, 그들은 ''L'Adunata dei refrattari''를 발간하여 독자들에게 이들을 탈옥시키고 관련자들에게 보복할 것을 촉구했다. 이로 인해 신디칼리스트와 반란주의자 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고, 양측은 서로를 배척하게 되었다.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반란적 아나키즘 운동은 대부분 지하로 숨어들었고, 마커스 그레이엄은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은밀하게 활동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20년대 후반, 그레이엄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갈레아니스트 신문 ''L'Emancipazione''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반란적 아나키스트들과 관계를 맺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활동이 위축되자, 신문은 영어로 발행을 전환하고 그레이엄을 편집자로 초빙했다. 1933년 1월, 이들은 지난 10년간의 갈레아니즘을 부활시키기 위해 ''Man!''이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그레이엄과 동료들은 사회 혁명이 개인이 "현재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법, 관습, 거짓 신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계몽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초기 반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Man!''은 신디칼리즘과 노동 운동을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했고, 노조 간부들의 부패를 자주 폭로했다. 그레이엄은 또한 기술 비판 이론을 제시하며, 아나코-원시주의의 초기 형태와 유사한 주장을 통해 문명의 파괴를 촉구했다.

''Man!''과 ''L'Adunata dei refrattari''는 1930년대 내내 반란적 아나키즘의 주요 매체로 활동했지만, 대중적인 흐름으로 부활하는 데는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Man!''은 경찰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1939년 그레이엄이 체포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 1940년대에 이르러 반란적 아나키즘 운동은 뉴욕의 ''L'Adunata dei refrattari''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이 정기 간행물은 1970년대 초까지 점차 쇠퇴하다가, 결국 반권위주의 간행물인 ''다섯번째 유산''으로 대체되었다.

2. 3. 20세기 중반: 쇠퇴와 재등장

납의 시대 동안 이탈리아는 좌익과 우익 테러리즘 사건으로 혼란스러웠는데, 이 시기에 이탈리아 무정부주의 운동 내에서 반란적 아나키즘이 다시 등장했다.[1] 1977년, 알프레도 보나노는 『무장된 기쁨(Armed Joy)』을 출판하여 노동 비판을 주장하고 기쁨의 감정을 강조하며 혁명적 폭력 사용을 옹호했다.[1] 보나노는 이 책의 출판으로 투옥되었고 이탈리아 정부는 모든 책을 폐기하도록 명령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폭동주의 선언문을 썼다.[1] 냉전이 끝나갈 무렵, 그는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이 비공식적인 "반 권위주의 폭동주의 국제연합"으로 조직화하여 연락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1]

1980년대, 이탈리아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은 통신 및 전력 시설과 같은 "소프트 타겟"에 대한 소규모 파괴 행위를 시작했다.[2] 이러한 행위는 주로 북부이탈리아 중부에 널리 분포된 소규모 비공식 그룹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지역 사회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2] 1990년대 후반, 폭동주의자들은 폭탄 테러와 폭행을 시작하면서 폭력이 확대되었는데, 이전까지의 공격은 인명 피해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탈리아 당국을 당황하게 했다.[3]

1999년부터 2003년 사이에 4개의 폭동주의 그룹이 20건 이상의 폭탄 테러를 자행했고, 이후 2003년 12월 비공식 무정부주의 연맹(FAI)로 합병되었다.[4] FAI는 결성을 알리기 위해 유럽 연합의 여러 고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일련의 폭탄 테러를 감행했는데, 로마노 프로디 유럽 의회 의장도 포함되었지만, 발송된 편지 폭탄으로 인한 부상자는 없었다.[4] 2010년과 2011년에 FAI는 또 다른 일련의 편지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4] 2012년 FAI의 한 세포가 안살도 누클레아레의 간부를 무릎을 꿇게 하자, 이탈리아 전역에 무정부주의 테러에 대한 공포가 급속히 확산되었다.[5] 이는 공격자 중 한 명인 알프레도 코스피토를 포함한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일련의 체포로 이어졌고, FAI는 잠시 "작전 휴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음 해 소포 폭탄 공격을 재개했다.[5] FAI는 10년 이상의 활동 기간 동안 50건의 폭력 공격을 자행하여 10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5]

붉은 여단 해체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을 이탈리아 내 가장 위험한 국내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왔으며, 이슬람 테러리스트 다음으로 위험하다고 여겼다.[6] FAI의 사례는 그리스의 세포의 음모(CCF)와 같이 다른 여러 폭동적 무정부주의 단체들에 의해 국제적으로 따랐으며, 이들은 FAI와 함께 "블랙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것을 시작했다.[7] 보나노의 폭동주의 프로그램의 일부는 반세계화 운동의 무정부주의 부분과 사르데냐 민족주의자 코스탄티노 카발레리, 그리고 미국의 개인주의 무정부주의자 볼피 란드슈트라이허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7]

미국에서는 벽에 맞서 싸우는 놈들(Up Against the Wall Motherfucker)의 설립 이전까지 폭동적 무정부주의는 대부분 소외되어 있었다.[8] 이 단체는 킹 암살 폭동과의 연대를 위해 폭력적인 직접 행동을 촉구했다.[8] 2000년대 중반, 유럽에서 폭동주의의 부상에서 영감을 받은 허무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 무장된 욕망의 저널(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AJODA)을 설립했는데, 이 저널은 폭력에 대한 폭동주의자들의 촉구를 받아들였고, 그 구성원들은 점거 시위에 참여했다.[9]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점거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민 불복종과 예시 정치를 촉구하는 활동가들과 종종 충돌했고, 궁극적으로 운동을 위한 장기적인 전략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다.[9]

2. 4. 20세기 후반 ~ 21세기 초: 확산과 발전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 반란적 아나키즘은 전 세계로 확산되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표트르 크로폿킨 등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노동조합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지만, 세바스티앙 포르를 중심으로 한 많은 '반생디칼리즘적 아나코 코뮤니스트'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유지했다.[8] 이들은 러시아에서 경제적 테러와 불법적인 수용을 통해 저항을 이어갔다.[8]

일리걸리즘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실천 방식이었다. 아나키스트 폭탄마와 암살자들, 강도들은 행위의 프로파간다와 개인의 수복을 통해 절망과 분노를 표출하며 반란을 촉구했다.[9] 이러한 개인적 반란 행위는 장기적으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졌다. 요한 모스트, 루이지 갈레아니, 빅토르 세르주, 세베리노 디 조반니 등이 이러한 전술을 지지하고 실천했다.[10] 아르헨티나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까지 이러한 경향이 억압 속에서도 노동 운동과 함께 번성했다.[10]

주세페 찬카빌라는 "Against organization"에서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방식대로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정된 프로그램이나 당을 형성하는 것에 반대했다.[11] 그는 조직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11]

에코 아나키스트 매거진 《Do or Die》에서는 렌조 노바토레의 개인적 반란과 에리코 말라테스타의 사회적 투쟁이 상충되지 않는다는 루이지 갈레아니의 견해를 소개하며, 반란적 아나키스트 서클 내의 논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6][12]

A. G. Schwarz는 《signals of disorder》에서 공격과 무질서의 신호가 사회적 혼란기에 투쟁의 장을 형성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행동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아야 하며, 연대와 공동체를 갈망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34]

불의 세포의 음모는 《The Sun Still Rises》에서 국가는 단순한 억압 기구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시스템이며, 혁명은 각자가 현재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지배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유를 위한 범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5]

《At Daggers Drawn with the Existent, its Defenders and its False Critics》에서는 삶은 집착할 것이 아니며,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반란과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쁨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동의 가장 아름다운 이유가 되며, '아니'라는 말에서부터 명령에 대한 무장 투쟁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36]

peter gelderloos는 《the failure of nonviolence》에서 새로운 감옥의 탄생을 막기 위해 모든 전술이 필요하며, 맞서 싸움으로써 지배의 사회관계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폭력은 세계와의 투쟁에서 무능하다고 비판했다.[37]

Alfredo M. Bonanno는 《Why Insurrection?》에서 대중의 준비는 혁명의 전제조건이 아니며, 혁명적 아나키스트 소수자는 역사적 과업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스탈린주의자들이 이끄는 반란에도 참여하여 권위주의와 대치하며 총체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38]

루이지 갈레아니는 《The end of anarchism?》에서 공산주의와 개인주의는 모순되지 않으며, 서로를 보완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버리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며, 동시에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독립과 자율성을 실현하는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39]

3. 이론 및 실천

표트르 크로폿킨을 비롯한 여러 아나키스트들이 노동조합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지만,[8] 프랑스의 세바스티앙 포르가 발행한 Le Libertaire프랑스어를 중심으로 많은 '반생디칼리즘적 아나코 코뮤니스트'들이 남았다. 1905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이들이 경제적 테러리스트이자 위법적 수용자가 되었다.[8] 일리걸리즘은 아나키스트 폭탄마와 암살자들(행위의 프로간다), 그리고 아나키스트 강도들(개인의 수복)이 절망감과 사회에 대한 반감을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실천되었다.[9]

루이지 갈레아니
이러한 개인의 반란 행위는 장기적으로 대규모 봉기를 자극하여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졌다. 요한 모스트, 루이지 갈레아니, 빅토르 세르주, 세베리노 디 조반니 등이 이러한 전술을 지지했다.[10] 아르헨티나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까지 이러한 경향이 번성했다.[10]

주세페 찬카빌라(Giuseppe Ciancabilla, 1872–1904)는 "Against organization"에서 고정된 프로그램 없이 순간적 친화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함께하는 그룹을 옹호했지만, 조직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11] 그는 조직이 큰 사건이나 파괴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1]

에코 아나키스트 매거진 Do or Die영어렌조 노바토레는 개인의 반란을,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사회적 투쟁을 지지했지만, 루이지 갈레아니는 둘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6][12]

조 블랙은 전후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특이한 조건에서 반란주의가 탄생했다고 설명한다.[3] 이탈리아에서는 지역 그룹들이 직접행동과 비공식적인 어피너티 그룹, 수용을 강조하며 등장했고, 알프레도 M. 보나노가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13]

반란적 아나키즘은 1980년대 영어권에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진 위어(Jean Weir)의 번역과 매거진 Insurrection영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3] 캐나다 벤쿠버에서는 아나키스트 블랙 크로스 관련 동지, 지역 아나키스트 사회 센터, No Picnic영어, Endless Struggle영어 등의 매거진이 나타났다.[3]

1993년 소련 붕괴 이후, 알프레도 보나노는 반란적 아나키스트들과의 조율을 위해 For An Anti-authoritarian Insurrectionalist International영어을 썼다.[14]

조 블랙은 WTO 저항 운동(시애틀 전투)에서 아나키스트들이 블랙 블록을 형성하며 아나키즘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언급한다.[3] 미국에서는 페럴 폰(Wolfi Landstreicher)이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영어에 글을 쓰며 반란주의적 경향을 보였다.[15] 그는 렌조 노바토레[16]브루노 필리피[17]의 글을 비롯한 여러 반란주의적 글들을 번역했다.[18]

2008년 그리스 폭동 당시 조직주의자와 반란주의자들 간의 오랜 논쟁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21]

비공식 아나키스트 연맹(FAI)은 이탈리아의 반란적 아나키즘 조직으로,[22] 2003년 EU 기관을 대상으로 한 폭탄 캠페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3][24] 2010년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협박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25] 같은 해 12월에는 로마 주재 스위스와 칠레 대사관에 폭탄 소포를 배달하기도 했다.[26] FAI는 국제 지하 아나키스트 혁명세포 네트워크로 발전했다.[27]

3. 1. 핵심 원칙

반란적 아나키즘은 국가와 자본주의의 종식을 위한 지속적인 실천이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스스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반란을 통해 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30] 현대 반란적 아나키즘은 과거의 일리걸리즘과 행위의 프로파간다에서 여러 핵심 원칙을 차용했다.

1. '''공격의 개념''':[3] 행동을 통해 반란의 길을 배울 수 있으며, 사회적 격변에 대한 열정을 가진 개인은 즉시 행동해야 한다.[30] At Daggers Drawn영어에서는 "전복적인 행동은 정상성을 마비시키는 방향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언급한다.[32] 반란의 힘은 무력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며, 정상성과 경제적 마비의 진폭이 중요하다.[30] 공격은 투쟁에서의 중재, 평화, 희생,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다.[3]

2. '''반역과 혁명''': 혁명은 매일 건설해야 하는 사회 혁명의 모든 특성을 지니지 않은 "구체적인 사건"이다. 반역은 착취당하고 배제된 소수의 봉기로 시작하여 더 많은 계층이 참여하도록 길을 열어준다.[30]

3. '''투쟁의 자기관리''':[30] 투쟁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통합적 조직은 투쟁을 제어하려 하며, 이는 현 사회의 권력 구조에 쉽게 통합될 수 있다. 자기 조직화된 투쟁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갈 때 통제될 수 없다.[30] 제도와 기관은 스스로 확장하는 반란 행위를 두려워하며, 쉽게 재현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그 단순성과 자발성으로 인해 통제하기 어렵다.[30]

4. '''영속적인 조직 대신 일시적인 어피너티 그룹''':[30] 조직은 구체적 과제를 위한 수단이며, 당, 신디케이트, 영속적인 조직 등은 국가나 자본의 일부로 발전할 수 있다. 비공식 아나키스트 조직은 공통된 친밀성을 중심으로 모여지는 특정한 형태의 조직이다.[30]

5. '''개인과 사회라는 이분법의 초월''':[30] 개인의 삶을 재전유하려는 욕망은 제약과 통제를 부수려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존재 조건에 대한 평등한 접근, 즉 진정한 공산주의에서만 개성이 융성할 수 있다.[30]

A. G. Schwarz는 무질서의 신호가 전염성이 있으며, 공공 장소를 되찾고 자본주의를 불완전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34] 불의 세포의 음모는 국가는 시스템이며, 적은 지배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곳에 있다고 말한다.[35] At Daggers Drawn영어에서는 삶은 집착할 것이 아니며, 반란은 자유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주장한다.[36]

peter gelderloos는 비폭력은 세계와의 투쟁에서 무능하다고 말한다.[37] Alfredo M. Bonanno는 혁명적 아나키스트 소수자는 역사적 과업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8] 루이지 갈레아니는 공산주의와 개인주의는 서로를 보완한다고 말한다.[39]

폭동 아나키즘은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반교권주의, 반제국주의, 반군국주의, 반국가주의 등의 핵심 아나키스트 원칙을 옹호한다.

3. 2. 직접 행동

직접 행동은 반란적 아나키즘의 핵심 요소이다. 정강주의적 아나키스트 조 블랙(Joe Black)은 "전술로부터 이데올로기가 구성되는 것은 아나키즘 내에서 오랜 전통"이라고 말했다.[3] 이는 막스 슈티르너가 선언한 것처럼, 혁명과 반역은 동의어가 아니며, 반역은 개인의 불만에서 시작하여 스스로를 지배하지 않고 약속하게 만드는 길로 이끈다는 개념에 기반한다.[5]

미하일 바쿠닌은 반역의 힘에 집중하는 아나키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자율적인 반란을 기반으로 한 통합된 행동에 대한 지지를 구축했으며, 이는 남부 유럽에서 반란적 아나키즘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6]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혁명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구성된 것"이며 "행동은 가장 효과적인 형태의 프로파간다"라고 주장했다.[7]

아나코 코뮤니즘은 바쿠닌의 집산주의, 생디칼리즘 참여 등에 대한 논쟁을 통해 등장했다.[8] 표트르 크로폿킨은 기업에서 조직된 노동 계급이 아닌, 인민을 진정한 행위자로 부활시키는 혁명 이론을 정교화했다.[8]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노동조합에 의한 조직화와 임금 등을 목표로 한 파업에 반대했다.[8] 이들은 수용적 파업 행위를 선동하고, 개인의 수복이나 테러리즘을 동반하기도 했다.[8]

가장 유명한 일리걸리스트 그룹인 보노 갱단의 캐리컬쳐


이후, 표트르 크로폿킨 등이 노동조합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지만, 많은 '반생디칼리즘적 아나코 코뮤니스트'들이 남았다. 이들은 경제적 테러리스트이자 위법적 수용자가 되었다.[8] 일리걸리즘은 절망감과 사회에 대한 반감을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실천되었다.[9]

이러한 반란 행위들은 장기적으로 대규모 봉기를 자극하여 혁명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루이지 갈레아니 등의 활동가들은 이러한 전술을 지지했다.[10] 주세페 찬카빌라(Giuseppe Ciancabilla)는 고정된 프로그램 없이 순간적 친화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함께하는 그룹을 옹호했지만, 조직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11]

에코 아나키스트 매거진 Do or Die는 렌조 노바토레는 개인의 반란,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사회적 투쟁을 지지했지만, 루이지 갈레아니는 둘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6][12]

조 블랙은 전후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특이한 조건에서 반란주의가 탄생했다고 설명한다.[3] 이탈리아에서는 지역 그룹들이 직접행동과 비공식적인 어피너티 그룹, 수용을 강조하며 등장했다.[13] 알프레도 M. 보나노는 이러한 그룹들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13]

반란적 아나키즘은 1980년대 영어권에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진 위어(Jean Weir)의 번역과 매거진 Insurrection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3] 캐나다 벤쿠버에서는 아나키스트 블랙 크로스 관련 동지, 지역 아나키스트 사회 센터, No Picnic, Endless Struggle 등의 매거진이 나타났다.[3]

1993년 소련 붕괴 이후, 알프레도 보나노는 반란적 아나키스트들과의 조율을 위해 For An Anti-authoritarian Insurrectionalist International을 썼다.[14]

조 블랙은 WTO 저항 운동(시애틀 전투)에서 아나키스트들이 블랙 블록(Black Bloc)을 형성하며 아나키즘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언급한다.[3] 미국에서는 페럴 폰(Wolfi Landstreicher)이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 매거진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에 글을 쓰며 반란주의적 경향을 보였다.[15] 그는 렌조 노바토레[16] 브루노 필리피[17] 글을 비롯한 여러 반란주의적 글들을 번역했다.[18]

2008년 그리스 폭동 당시 조직주의자와 반란주의자들 간의 오랜 논쟁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21]

비공식 아나키스트 연맹(FAI)은 이탈리아의 반란적 아나키즘 조직으로,[22] 2003년 EU 기관을 대상으로 한 폭탄 캠페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3][24] 2010년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협박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25] 2010년 12월에는 로마 주재 스위스와 칠레 대사관에 폭탄 소포를 배달하기도 했다.[26] FAI는 국제 지하 아나키스트 혁명세포 네트워크로 발전했다.[27]

현대 반역 아나키즘은 일리걸리즘과 행위의 프로파간다에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차용했다.

1. '''공격의 개념''':[3] 행동을 통해 배우며, 사회적 격변에 대한 열정을 가진 개인은 즉시 행동해야 한다.[30]

2. '''반역과 혁명''': 혁명은 구체적인 사건이며, 반역은 매일 건설해 나가야 하는 사회 혁명의 해방적 특성을 지닌다.[30]

3. '''투쟁의 자기관리''':[30] 투쟁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율적이어야 하며, 통합적 조직은 권력 구조에 쉽게 통합될 수 있다.[30]

4. '''영속적인 조직 대신 일시적인 어피너티 그룹''':[30] 특정 과제를 위한 조직은 필요하지만, 영속적인 조직은 반대한다.[30]

5. '''개인과 사회라는 이분법의 초월''':[30] 개인의 삶을 재전유하려는 욕망은 제약과 통제를 부수려는 욕망으로 이어지며, 진정한 공산주의는 평등한 접근을 의미한다.[30]

A. G. Schwarz는 공격과 무질서의 신호가 사회적 혼란기에 투쟁의 장을 형성하며, 전염성이 있다고 주장한다.[34]

불의 세포의 음모는 국가는 요새가 아니며, 시스템으로서 사회 내부에 퍼져 있다고 말한다.[35]

At Daggers Drawn with the Existent, its Defenders and its False Critics는 삶은 단순히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며, 반란은 자유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주장한다.[36]

peter gelderloos는 비폭력은 세계와의 투쟁에서 무능하다고 주장한다.[37]

Alfredo M. Bonanno는 혁명적 아나키스트 소수자는 역사적 과업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8]

루이지 갈레아니는 공산주의와 개인주의는 서로를 보완한다고 주장한다.[39]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저서 『나와 나의 것(The Ego and Its Own)』은 초기 폭동 아나키즘 영감 중 하나였다. 슈티르너는 "혁명"과 "폭동"을 구분하여 "폭동"의 목표를 개인의 자유로운 자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1870년대에는 "행위의 선전"이라는 개념이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되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폭동 행위를 하도록 고무할 작은 직접 행동을 의미했다. 폭동주의자들은 모든 폭동이나 반란을 일반적인 사회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종의 "혁명적 체조"로 보았다. 이 이론에 따라 이탈리아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은 1890년대에 일련의 주목할 만한 암살을 자행했다.

한편, 조직 문제는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운동을 신디칼리스트들과 폭동주의자들로 분열시켰다. 폭동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형태의 공식 조직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운동의 개혁주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했다.

루이지 갈레아니(Luigi Galleani)는 강경한 반조직주의자였으며, 노동 운동에 대한 아나키스트 참여에 반대했다.

갈레아니는 행위의 선전을 주장했으며, 이는 북미 전역의 갈레아니스트 세포 네트워크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그에 따른 정치적 탄압 이후, 갈레아니스트들은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폭력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그 후의 정치적 탄압 동안,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사코와 반제티는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갈레아니스트들은 38명을 살해한 월가 폭탄 테러(1920)을 가함으로써 그들을 무죄로 석방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정치적 탄압은 폭동 아나키즘 운동을 주로 지하로 몰아넣었다. 1920년대 후반, 그레이엄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갈레아니스트 신문 ''L'Emancipazione'' 주변의 폭동 아나키스트들과 연루되었다. 1933년 1월, 이 그룹은 이전 10년의 갈레아니즘을 되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Man!''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그레이엄과 그의 동료들에게 있어 사회 혁명은 개인이 "현재 자신이 갇혀 있는 모든 법, 관습, 허위 신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계몽을 달성하는 데 달려 있었다. 초기 폭동 주의자들처럼, ''Man!''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신디칼리즘과 노동 운동을 거부했고, 부패에 대한 노조 간부들을 자주 비판했다. 그레이엄은 또한 기술 비판을 공식화했고 아나코-프리미티비즘의 초기 전조가 된 주장에서 문명의 파괴를 촉구했다.

''Man!''과 ''L'Adunata dei refrattari''는 1930년대 내내 폭동 아나키즘의 주요 표현으로 계속 활동했지만, 대중적인 경향으로 부활하는 데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Man!''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경찰의 탄압을 받았고, 그레이엄의 체포와 1939년 이후 출판 중단으로 절정에 달했다. 1940년대까지 폭동 아나키즘 운동은 뉴욕의 ''L'Adunata dei refrattari'' 주변에 집중된 미미한 세력에 불과했다. 이 정기 간행물은 1970년대 초까지 서서히 쇠퇴했고, 마침내 반권위주의 간행물 ''피프스 에스테이트''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탈리아 무정부주의 운동 내에서 폭동적 무정부주의는 납의 시대 동안 재등장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좌익과 우익 테러리즘 사건으로 흔들렸다. 1977년, 알프레도 보나노는 그의 저서 『무장된 기쁨(Armed Joy)』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노동 비판을 주장하고 기쁨의 감정을 강조하며 혁명적 폭력 사용을 옹호했다. 보나노는 책 출판으로 투옥되었고 이탈리아 정부는 모든 책을 폐기하도록 명령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폭동주의 선언문을 썼다. 냉전이 끝나갈 무렵, 그는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이 비공식적인 "반 권위주의 폭동주의 국제연합"으로 조직화하여 연락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980년대, 이탈리아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은 통신 및 전력 시설과 같은 "소프트 타겟"에 대한 소규모 파괴 행위를 시작했다. 이러한 행위는 주로 북부이탈리아 중부에 널리 분포된 소규모 비공식 그룹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지역 사회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공격은 1990년대 후반 폭동주의자들이 폭탄 테러와 폭행을 시작하면서 폭력으로 확대되었다.

1999년부터 2003년 사이에 4개의 폭동주의 그룹이 20건 이상의 폭탄 테러를 자행했고, 이후 2003년 12월 FAI로 합병되었다. FAI는 결성을 알리기 위해 유럽 연합의 여러 고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일련의 폭탄 테러를 감행했는데, 유럽 의회 의장 로마노 프로디도 포함되었지만, 발송된 편지 폭탄으로 인한 부상자는 없었다. 2010년과 2011년에 FAI는 또 다른 일련의 편지 폭탄 테러를 자행했고, 이로 인해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2012년 FAI의 한 세포가 안살도 누클레아레의 간부를 무릎을 꿇게 했다 후, 이탈리아 전역에 무정부주의 테러에 대한 공포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는 공격자 중 한 명인 알프레도 코스피토를 포함한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일련의 체포로 이어졌고, FAI는 잠시 "작전 휴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음 해 소포 폭탄 공격을 재개했다.

붉은 여단 해체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을 이탈리아 내 가장 위험한 국내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왔으며, 이슬람 테러리스트 다음으로 위험하다고 여겼다. FAI의 사례는 그리스의 CCF와 같이 다른 여러 폭동적 무정부주의 단체들에 의해 국제적으로 따랐으며, 이들은 FAI와 함께 "블랙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것을 시작했다. 보나노의 폭동주의 프로그램의 일부는 반세계화 운동의 무정부주의 부분과 사르데냐 민족주의자 코스탄티노 카발레리, 그리고 미국의 개인주의 무정부주의자 볼피 란드슈트라이허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

미국에서는 Up Against the Wall Motherfucker의 설립 이전까지 폭동적 무정부주의는 대부분 소외되어 있었다. 이 단체는 킹 암살 폭동과의 연대를 위해 폭력적인 직접 행동을 촉구했다. 2000년대 중반, 유럽에서 폭동주의의 부상에서 영감을 받은 허무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 무장된 욕망의 저널』(AJODA)을 설립했는데, 이 저널은 폭력에 대한 폭동주의자들의 촉구를 받아들였고, 그 구성원들은 점거 시위에 참여했다. 폭동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점거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시민 불복종과 예시 정치를 촉구하는 활동가들과 종종 충돌했고, 궁극적으로 운동을 위한 장기적인 전략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다.

폭동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기본 유형의 직접 행동을 수행한다. 하나는 인프라나 건물과 같은 저명하지 않은 목표물에 대한 파손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 목표물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종종 우편 폭탄을 사용)이다.

폭동 아나키스트들은 종종 직접 행동을 감정적 해소의 한 형태로 보고,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의 원천으로 여긴다. FAI의 알프레도 코스피토와 같은 무장 세력들은 이탈리아 경영진에 대한 공격을 "삶을 온전히 즐긴" 순간으로 묘사했다. 폭동주의자들은 폭력을 자기자기 강화의 방법으로, 심지어 실존적 의미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으로 볼 수도 있다.

3. 3. 비공식 조직

표트르 크로폿킨을 비롯한 여러 아나키스트들이 노동조합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지만,[8] 프랑스의 세바스티앙 포르의 Le Libertaire프랑스어라는 신문을 중심으로 많은 '반생디칼리즘적 아나코 코뮤니스트'들이 남았다. 1905년 이후 러시아에서 그러한 '반생디칼리즘적 아나코 코뮤니스트'들은 경제적 테러리스트이자 위법적 수용자가 된다.[8] 일리걸리즘은 다음과 같은 특징 안에서 실천되었다고 분석된다. "아나키스트 폭탄마와 아나키스트 암살자들(행위의 프로간다) 그리고 아나키스트 강도들은(개인의 수복) 그들의 절망감과 견딜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반감을 폭력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분명히 반란으로 초대받을 운명이었다.[9]

개인에 의한 그러한 반란 행위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대규모 봉기를 자극하여 혁명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전술의 활동가와 지지자들은 대표적으로 요한 모스트, 루이지 갈레아니, 빅토르 세르주, 세베리노 디 조반니 같은 이들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러한 경향은 극심한 억압이 있었으면서도 한번 강력한 노동 운동이 움찔거렸던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동안 번성했다. 비록 절망적이었지만, 쇠락하는 운동의 영웅적인 몸부림이었다."[10]

주세페 찬카빌라(Giuseppe Ciancabilla, 1872–1904)는 "Against organization"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목표를 겨냥하고,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목적지에 붙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자유롭게 그의 감각, 그의 교육, 그의 기질, 그의 투혼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택하길 원한다. 우리는 고정된 프로그램을 원하지 않으며 크든 작든 당을 형성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영구적인 기준 없이 순간적 친화도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함께할 것이며, 관련된 목표를 진행하거나 중단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그룹을 바꿀 것이고, 그리고 목표에서 우리가 새로운 협력자가 필요하다면 특정한 상황에서 우리처럼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할 것이다."[11]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조직자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러한 전술이 마음에 든다면, 계속하길 바란다. 다만 내 생각에는 그것은 어떠한 커다란 사건이나 파괴력을 가질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온몸에서 쥐어짜낸 큰소리로 경보를 울리며 우리를 야만인이나 이론적 몽상가로 낙인 찍는것처럼 보인다."[11]

에코 아나키스트 매거진 Do or Die영어에선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었다. “이것은 오랬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논쟁이며 반란적 아나키스트 서클 내에선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다. 렌조 노바토레는 개인의 반란으로써 싸웠고,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사회적 투쟁에서 싸웠다. 하지만 루이지 갈레아니는 그 둘이 전혀 상충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6][12]

이러한 아이디어의 부활에 대해 조 블랙은 전후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특이한 조건에 있다고 말한다.[3]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두 나라에서는 정말 혁명의 가능성이 있었다.”[3] "그리스는 수십년간의 군사 독재에 고통받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공산당이 투쟁을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반란주의는 그런 특정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탄생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였다."[3] 이탈리아에서 이들은 좀더 전통적인 형태의 Italian Anarchist Federationit이나 정강주의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 지역 그룹들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그룹들은 직접행동과 비공식적인 어피너티 그룹, 활동자금의 조달을 위한 수용을 강조했다.[13] 그러한 그룹들 내에서 스페인 망명 아나키스트인 Josep Lluís i Faceriases의 실천에 영향을 받은 영향력있는 이탈리아 반란적 아나키스트인 알프레도 M. 보나노가 등장했다.[13]

한 반란주의자는 어떻게 이탈리아로부터 이러한 아이디어가 퍼져 나갔는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반란적 아나키즘은 영어권에선 1980년대부터 아나키스트 운동으로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이론에 대한 번역을 한 진 위어(Jean Weir)와 그녀의 Elephant Editions영어와 그녀의 매거진 Insurrection영어에 감사를 전한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아나키스트 블랙 크로스에 관련된 동지, 지역 아나키스트 사회 센터, 그리고 No Picnic영어과 Endless Struggle영어 같은 매거진이 진 위어의 프로젝트에 영향을 받아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은 이 지역에서 오늘날까지 반란적 아나키즘 실천의 개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몬트리올의 Demolition Derby영어 또한 반란적 아나키스트에 대해 다룬적이 있었다."[3]

매거진 Do or Die영어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많은 이탈리아 반란적 아나키스트들은 70년대 투쟁의 힘에 초점을 맞춘 조직화를 비판했고, 그러한 움직임 밖에서는 많은 비공식적 조직에 대한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70년대의 권위주의적 조직에 대한 비판은 80년대 초기 시칠리아 코미소 군사기지의 반핵 투쟁에서 좀더 세련된 형태로서 나타났다. 자주관리적 연맹으로 구성된 아나키스트들은 그 투쟁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6] 1993년 소련의 붕괴 이후 반란적 아나키스트 알프레도 보나노는 반란적 아나키스트들과의 조율을 위해 For An Anti-authoritarian Insurrectionalist International영어을 썼다.[14]

조 블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점에서 반란주의가 영어권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더욱 뚜렸한 경향으로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WTO 저항 운동(시애틀 전투)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블랙 블록을 형성하며 높은 존재감을 나타냈고, 이는 이후 아나키즘 운동의 기폭제가 된다.[3] 미국에선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 매거진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영어에 여러 글들을 써서 악명을 얻은 페럴 폰(이후 Wolfi Landstreicher영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게 된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반란의 게임에서 정체성과 역할을 이용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의 맥락은 이러한 역할과 정체성을 사용하려는 개인을 정의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 페럴 폰은 아나키스트... 작가... 슈티르너주의자, 포스트 상황주의자, 반문명 이론가가 되었다… 내 자신의 눈일 수 없다면, 적어도 내글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이되기 위하여."[15] 또한 울피 랜드스트라이커는 알프레도 마리아 보나노를 번역했고, 비슷한 경향의 작가인 이탈리아 일리걸리즘적 아나키스트 렌조 노바토레[16] 브루노 필리피[17] 글들을 비롯한 여러 반란주의적 글들을 번역했다.[18] 이것은 최근의 반란적 아나키즘 이론이 막스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에서 어떻게 관련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칠레같은 곳에서도 나타났다. Frente Anarquista Revolucionarioes (Anarchist Revolutionary Front)는 그들의 입장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팜플릿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그들이 알프레도 보나노와 울피 랜드스트라이커 그리고 익명의 반란주의자들의 글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묘사한다.[19]

수감되어 있는 반란적 아나키즘 철학자인 Michele Fabianiit는 명시적인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관점의 에세이 "Critica individualista anarchica alla modernitàit" (Individualist anarchist critique of modernity)을 쓰기도 했다.[20]

앞서 언급했듯이 반란적 아나키즘 담론은 그리스에서도 관련된 것이다. 2008년 그리스 폭동 당시 조직주의자와 반란주의자들간의 오랜 논쟁이 다시 등장했으며 물리적인 충돌이 벌어진 경우도 있었다.[21]

비공식 아나키스트 연맹(:en:Informal Anarchist Federation, FAI)은 이탈리아의 반란적 아나키즘 조직이다.[22] 2003년 이 그룹은 몇몇의 EU 기관을 대상으로한 폭탄 캠페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23][24] 2010년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협박의 메시지와 함께 총알이 발견되어 우체국 서비스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25] 편지에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Libateit의 교외에 있는 우체국에서 금요일에 발견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너는 쥐처럼 죽게 될것이다." 2010년 12월 23일에는 로마에 있는 스위스와 칠레 대사관에 폭탄소포가 배달된 적이 있는데 FAI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6] FAI는 본래 이탈리아 지하 아나키스트 조직의 연맹으로 시작했지만, 2011년 경부터는 FAI/IRF(Informal Anarchist Federation-International Revolutionary Front영어)라는 이름으로 국제조직(보다 정확히는 국제 지하 아나키스트 혁명세포의 네트워크)[27]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조직은 오늘날의 지하 아나키스트 운동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이들이 되었다.[28][29]

스페인의 :en:Iberian Federation of Libertarian Youth에서 2000년대 이후 반란적 아나키즘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반란적 아나키즘은 모든 사회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결책이 아니며, 국가와 자본주의의 지속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지속적인 실천이다. 역사를 통틀어 사회가 국가를 떠나게 할 정도로 진화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반란적 아나키스트들이였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것은 국가가 그저 시들어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기다림은 패배이며, 아나키스트들은 공격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반란을 개시하고 착취되고 배제되는 이들 사이에 전복을 확산 시키는 것이다. 여러 반란적 아나키스트들은 공통된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국가가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것을 끝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기에 이것은 주로 실천이며, 공격의 구성에 관한 것이다.[30]

현대 반역 아나키즘에서 중요한 몇가지 요소는 과거의 일리걸리즘과 행위의 프로파간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영속적인 조직 대신 일시적인 어피너티 그룹''': "조직은 구체적 과제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 신디케이트, 영속적인 조직등 국가나 자본의 일부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투쟁을 통합하려는 행동에 반대한다. 그러한 조직은 그것의 존재가 곧 목적이 된다. 최악의 경우에 그들은 먼저 조직을 만들고 나서 투쟁을 찾거나 만들어내려고 할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행동하는 것이며, 조직은 하나의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이나 실천을 조직에 위임하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관리되는 투쟁이 아니라, 반란으로 향해가는 일반화된 행동이 필요하다. 조직은 특정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이해관계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비공식 아나키스트 조직은 공통된 친밀성을 중심으로 모여지는 특정한 형태의 조직이다.[30]

반란주의적 조직 모델은 상위 중앙 집중식 계층 없이 소규모 집단과 늑대형 독행자의 독립적인 행동을 장려하는 "리더 없는 저항" 모델과 비교되어 왔다. 이 모델은 간첩 및 내부 토론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직접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 한 이념적 다원주의의 정도를 촉진한다. 이 모델은 침투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립 경향[37]과 비공식적인 지도층의 발전[37] 또한 지적받고 있다. 비공식적인 조직은 어느 정도의 유연성과 적응성을 허용할 수 있지만, 정보 공유는 구획화된 구조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으며, 대인 신뢰에 대한 의존은 모집에 장벽을 제시할 수 있다.

3. 4. 한국의 반란적 아나키즘

반란적 아나키즘은 사회 평화에 대한 서사를 거부하고 현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낸다.[34] 이러한 공격은 사회적 혼란기에 투쟁의 장을 형성하며, 무질서의 신호가 사회적 관행과 연결되어야 효력을 발휘한다.[34] 예를 들어 그래피티나 깨진 창문 등을 통해 사람들이 아나키스트의 소행임을 인식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기행으로 치부될 수 있다.[34]

무질서의 신호는 전염성이 강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복제하기 쉬우며 예측을 벗어나 널리 퍼져나간다.[34] 이는 공공 장소를 되찾고 상업화를 역전시키며, 사회 재탄생의 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34] 아나키스트들은 사소한 법을 어겨 국가의 약함을 보여주고, 광고 훼손과 공적 공간 해방을 통해 자본주의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34] 그러나 공격이나 무질서 신호의 중요성을 과장하면 전면적인 억압에 취약해질 수 있다.[34]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빼앗아간 연대와 공동체를 갈망하며,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찾고 함께할 공모자를 찾는다.[34] 아나키스트는 외설 행위, 극단주의, 무료 음식 나눔, 거리 파티, 해적 영화 상영, 도서관 및 자전거 수리점 운영, 시위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34] 이로써 아나키스트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동시에 유발하여 억압과 회유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34]

국가는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사회 깊숙이 퍼져 개인의 감정까지 조작하는 시스템이다.[35] 적은 지배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곳, 즉 권력을 옹호하는 모든 사고방식과 양심에 존재한다.[35] 아나키스트는 국가를 유일한 비난 대상으로 삼는 피해자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대제국은 억압뿐 아니라 대중의 동의로 세워졌음을 강조한다.[35] 혁명은 각자가 현재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지배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유를 위한 범죄 탐구에 참여하는 것이다.[35]

삶은 집착할 대상이 아니며, 우리는 신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36] 죽음조차 삶을 강요하지 않으므로, 삶은 어떤 단어라도 쓰일 수 있는 백지와 같다.[36] 이러한 자유 때문에 노예로 살 수 없으며, 노예제는 삶에 얽매인 자들을 위한 것이다.[36] 우리에게는 모험, 미지의 사상, 이방인이 기다리는 세계가 있으며, 이는 자기 사랑을 떨치게 한다.[36] 물론 위험이 따르지만,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36]

현대인들은 일을 구걸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살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으며, 이는 인생을 기쁨으로 여는 이유가 된다.[36]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행동의 이유가 되며, '아니'라는 말과 함께 명령에 대한 무장 투쟁을 벌일 이유가 된다.[36] 한편으로는 습관과 확실성이 존재하며, 사회의 독은 우리를 죽일 수 있다.[36] 다른 한편으로는 삶을 향한 미지의 폭발인 반란이 있으며, 이는 자유 실천의 가능성을 연다.[36]

새 세계 건설을 위한 공간 점거, 살해 구조 파괴, 분리 울타리 돌파를 위해 모든 전술이 필요하다.[37] 맞서 싸움으로써 지배의 사회관계를 전복하며, 비폭력은 세계와의 투쟁에서 무능하다.[37] 대중 준비는 혁명의 전제 조건이 아니며, 모두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38] 대중 준비는 혁명의 결과이며, 혁명적 아나키스트 소수자는 역사적 과업에 대비해야 한다.[38] '순수함'을 버리고 모든 반란에 참여하여, 권위주의와 대치하며 총체적 해방 프로그램을 지켜야 한다.[38]

공산주의개인주의는 모순되지 않으며, 공산주의는 각 개인의 삶 제어와 개성 발휘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다.[39]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교환 특권을 버리고, 모든 생산수단이 만인의 것이 되길 열망하는 아나키스트는 공산주의자이다.[39]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독립과 자율성을 지지하면 개인주의자이다.[39]

3. 4. 1. 관련 단체 및 사건

다음은 반란적 아나키즘과 관련된 단체 및 출판물 목록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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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Say you want an insurrection http://www.crimethin[...] Crimethinc
[3] 웹사이트 A-Infos (en) Ireland, Red & Black Revolution #11 - Anarchism, insurrections and insurrectionalism by Joe Black - WSM http://www.ainfos.ca[...] 20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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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Max Stirner http://flag.blackene[...] 20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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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웹사이트 Anarchists and action https://archive.elep[...]
[34] 웹사이트 signals of disorder https://theanarchist[...]
[35] 웹사이트 The Sun Still Rises https://theanarchist[...]
[36] 웹사이트 At Daggers Drawn with the Existent, its Defenders and its False Critics https://theanarchist[...]
[37] 텍스트
[38] 웹사이트 Why Insurrection? http://theanarchistl[...]
[39] 웹사이트 The end of anarchism? https://libcom.org/l[...]
[40] 웹사이트 http://book.nave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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