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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슈트반 왕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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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 이슈트반 왕관령은 다양한 언어로 불린 명칭으로,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피우메 자유시로 구성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헝가리는 국내 문제에 대한 자치권을 확보했으나, 외교, 국방, 재정 등은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관리했다. 1868년에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간의 협정을 통해 크로아티아에 자치가 부여되었지만, 실제 자치권은 제한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해체되면서 성 이슈트반 왕관령도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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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슈트반 왕관령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헝가리 국기
헝가리 국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국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국기
헝가리 왕관령 문장
헝가리 왕관령 문장 (1915년–1918년)
표어Regnum Mariae Patrona Hungariae
표어 (번역)마리아의 왕국, 헝가리의 보호자
국가힘누스
공용어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이탈리아어 (피우메)
기타 사용 언어보스니아어
카르파티아 로마어
독일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
루신어
세르비아어
슬로바키아어
슬로베니아어
이디시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칼뱅주의
루터교
동방 정교회
동방 가톨릭교회
유니테리언주의
유대교
통화포린트 (1867년–1892년)
코로나 (1892년–1918년)
정치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국왕프란츠 요제프 1세 (1867년–1916년)
카를 4세 (1916년–1918년)
총리안드라시 줄러 (1867년–1871년, 첫 번째)
카로이 미하이 (1918년, 마지막)
의회의회
상원귀족원
하원대표자원
역사
시대신제국주의
성립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성립일1867년 3월 30일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1868년 11월 17일
보스니아 위기1908년 10월 6일 – 1909년 3월 31일
사라예보 사건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해체1918년 10월 31일
에카르차우 선언1918년 11월 13일
소멸군주제 폐지
소멸일1918년 11월 16일
이후트리아논 조약
이후일1920년 6월 4일
면적
면적 (1918년)328,660 km²
인구
인구 (1918년)15,642,102명

2. 용어

성 이슈트반 왕관령은 여러 언어로 불렸다. 헝가리어로는 "Szent István Koronájának Országai" (성 이슈트반 왕관령), "Szent Korona Országai" (성스러운 왕관령), "Magyar Korona Országai" (헝가리 왕관령),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 (헝가리 성스러운 왕관령) 등으로 불렸다. 다른 언어로는 다음과 같이 불렸다.

언어명칭
크로아티아어Zemlje Krune svetog Stjepana (성 이슈트반 왕관령)
독일어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 (성 헝가리 왕관령)
체코어Země Koruny svatoštěpánské (성 이슈트반 왕관령)
슬로바키아어Krajiny Svätoštefanskej koruny (성 이슈트반 왕관령), Krajiny uhorskej koruny (헝가리 왕관령)
세르비아어Земље круне Светог Стефана (Zemlje krune Svetog Stefana) (성 이슈트반 왕관령)
루마니아어Țările Coroanei Sfântului Ștefan (성 이슈트반 왕관령)
우크라이나어Землі корони Святого Стефана (Zemli korony Sviatoho Stefana) (성 이슈트반 왕관령)
루신어Землї короны Сятого Іштвана (Zemlji korony Siatoho Ištvana) (성 이슈트반 왕관령)
러시아어Земли кoроны Святого Иштвана (Ziemli korony Sviatova Ištvana) (성 이슈트반 왕관령)



"트란스라이타니아"(Lajtántúl|라이탄툴hu, Transleithanien|트란스라이타니엔de, Translajtanija|트란슬라이타니야hr, Zalitawia|잘리타비아pl, Zalitavsko|잘리타브스코cs, Zalitavsko|잘리타브스코sk)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비공식적인 명칭이었다. 라틴어 이름인 ''트란스라이타니아''는 라이타 강 "너머"(''transla'')에 있다는 의미로,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붙여진 이름이다.[2]

3. 구성국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성 이슈트반 왕관령(트란스라이타니아)은 헝가리 왕국(헝가리 본토와 이전 트란실바니아 공국 및 이전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및 테메슈바르 바나트 영토 포함), 내부 자치적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피우메 자유항으로 구성되었다.[3] 1873년에서 1882년까지 군사 변경 지역은 별도의 행정부 관할 하에 있다가 폐지되어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편입되었다.[3]

1867년에 헝가리 왕국이 트란실바니아를 병합하면서, 헝가리 왕관령은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피우메 자유 도시로 구성되었다.

위치령방수도민족종교비고
--헝가리 왕국포조니,
부다 (1784년 이후)
마자르족,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독일인, 루테니아인, 루마니아인로마 가톨릭, 칼뱅파1526년부터 1541년까지 페르디난트 1세서포여이 야노시 사이에 왕위가 다투어졌다. 1541년부터 1699년까지 영토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아그램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로마 가톨릭, 정교1849년에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합병으로 성립.
--피우메와 그 속령
(리에카)
피우메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마자르인1465년에 합스부르크가가 구입, 1526년에 헝가리 왕국령이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그라츠시에 의해 관리되었다. 1779년에 Corpus separatum|코르푸스 세파라툼영어 지구로 설정되었다. 1809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 제국 속령 이탈리아 영토에 편입되었다. 1815년에 오스트리아 제국령으로 복귀하여 1867년부터 헝가리 왕관령에 속하는 자유 도시가 되었다. 그 후, 현(Komitat)으로 승격했다.--


4. 역사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으로 이중 군주국이 창설되면서, 헝가리는 모하치 전투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국내 문제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2] 그러나 새 정부는 심각한 경제 문제와 소수 민족의 증가하는 불안에 직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전쟁 이후 일련의 정부들—공산주의 정권을 포함하여—이 부다페스트에서 권력을 잡았다.[2]

성 이슈트반 왕관부다페스트에 보관되어 있던, 헝가리 왕권의 상징이 되는 보관을 가리킨다. 이 보관의 기원은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된 헝가리의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보관은 현재에도 헝가리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2]

헝가리 대평원 영역은 서기 900년경 마자르족에 의해 정복되었다. 마자르족의 대추장 아르파드아르파드 왕조를 열었다. 아르파드의 후손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고, 왕국에 기독교를 수용했다. 헝가리에서는 13세기 후반에 다수의 귀족이 참여하는 의회 제도가 성립되었고, 의회는 국왕을 선출할 권리를 가졌다. 남쪽 이웃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연방 의회도 마찬가지 권리를 가졌으며, 그 권리는 헝가리 의회의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었다.[3]

대 터키 전쟁 중인 1687년, 포조니에서 열린 왕령 헝가리의 의회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의향에 따라 성 이슈트반 왕관 제국의 왕위 계승을 세습제로 변경한다고 선언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 대가로 헝가리 귀족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했다. 의회를 정기적으로 소집하고, 헝가리는 일정한 자치권을 가지며, 헝가리 귀족은 납세 의무를 면제받는 것 등이 동시에 정해졌다. 이 협정에 따라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에서 특권적인 지위에 놓이게 되었고, 그 지위는 1867년까지 유지되었다. 라코치 반란을 비롯한 반 합스부르크 봉기들은 1711년까지 궤멸되었다.

1739년 베오그라드 조약으로 대 터키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역사적인 헝가리 왕국의 거의 전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1745년에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삼국이 헝가리 왕관령에 복귀했다. 그러나 1777년에는 헝가리 왕관령에서 일리리아가 분리되었다.

1772년부터 1795년까지 폴란드 분할 결과, 갈리치아가 합스부르크 가문령의 북동단을 구성하게 되었지만, 헝가리 왕관령 일부에는 편입되지 않았다. 1774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할양된 부코비나도 헝가리 왕관령에 더해지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부터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 건국 포고,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이르기까지 헝가리 왕관령은 더 큰 통일 단위인 오스트리아 제관령 일부에 매몰되어 단일 영방 집합체로서 존재감을 거의 잃었다.

1815년 달마티아가 헝가리 왕관령에서 분리되었다. 1818년에는 일리리아 왕국이 해체되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일부가 되어 헝가리 왕관령에 복귀했다. 1849년에는 세르비아 보이보디나가 헝가리에서 분리되어 영방으로 성립했으나, 1860년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탈리아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오스트리아 황제 권위와 권력이 약해진 것이 분명해졌을 때, 헝가리인은 권세 회복을 위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1867년 아우스글라이히를 통해 중요하고 전반적인 정치적 양보를 획득했다. 단일 국가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중 군주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1867년부터 1918년까지 헝가리 왕관령은 이중 제국 내부에서 완전한 독립 국가 지위를 유지했다.

1867년 헝가리 왕국이 트란실바니아를 병합(1848년 혁명 중 병합 선언)한 결과, 헝가리 왕관령을 구성하는 것은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자유 도시 피우메 세 부분뿐이었다.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건국이 선언되었을 때, 동 정부는 슬로바키아인이 거주하는 상부 헝가리를 동 공화국 판도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1918년 10월 29일, 크로아티아 의회는 헝가리와 연합 관계를 해소하고 신 국가 슬로베니아인·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국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트란실바니아도 루마니아에 병합되었다. 10월 31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연결하던 마지막 국가적 끈이 사라졌고, 동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소멸했다.

4. 1. 초기 역사 및 동군 연합

1102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인적 동군 연합을 맺었다.[3] 양국은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략을 시작으로, 앙주 가문 및 야기에우워 가문 아래에서의 폴란드와의 동군 연합,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 야기에우워 가문 아래에서의 보헤미아와의 동군 연합,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함께 겪었다.[3]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왕으로 즉위했지만, 헝가리 귀족 대부분은 동족인 서포여이 야노시를 국왕으로 선출했다.[3] 이후 150년에 걸친 내전에서 헝가리 왕관 제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황제가 지배하는 왕령 헝가리 (서부), 오스만 제국이 직접 통치하는 터키인 점령 지역 (중부·남부), 오스만 제국의 속령 지위에 놓인 트란실바니아 공국 (동부)의 3지역으로 분열되었다.[3]

4. 2.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와 오스트리아 제국 시기

1687년, 포조니에서 열린 왕령 헝가리의 의회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의향에 따라 성 이슈트반 왕관 제국의 왕위 계승을 세습제로 변경한다고 선언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 대가로 헝가리 귀족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했는데, 의회를 정기적으로 소집하고, 헝가리는 일정한 자치권을 가지며, 헝가리 귀족은 납세 의무를 면제받는 것 등이 동시에 정해졌다. 이 협정에 따라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에서 특권적인 지위에 놓이게 되었고, 그 지위는 1867년까지 유지되었다. 라코치 독립 전쟁을 비롯한 반(反) 합스부르크 봉기들은 1711년까지 궤멸되었다.

1848년 혁명 당시, 상당수의 헝가리 귀족층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체제로부터 헝가리를 독립시키려 했으나, 합스부르크 측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이를 진압했다.

4.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과 발전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으로 이중 군주국이 창설되면서, 헝가리는 모하치 전투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국내 문제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2] 새 헝가리 정부는 황제가 임명했지만 헝가리 의회에 책임을 지는 총리와 내각으로 구성되어 헝가리의 국내 문제에 대한 통제권을 가졌다.[2] 그러나 새 정부는 심각한 경제 문제와 소수 민족의 증가하는 불안에 직면해야 했다.

1868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나고드바 협정을 체결하여 크로아티아에게 헝가리 성관령 내에서 특별 지위를 부여했다.[4] 이 협정은 크로아티아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전 크로아티아 왕국의 사보르 (의회)에 의해 행사되는 국내 문제에 대한 자치를 크로아티아에 부여했다. 사보르는 사법, 교육 및 종교 문제, 그리고 내무 분야에서 입법 권한의 일부를 얻었다.[4] 그러나 실제로 이 자치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1868년에 제정된 국적법은 헝가리를 언어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다양한 국적의 구성원으로 구성된 ''단일 헝가리 국가''로 정의했다. 헝가리어 이외의 언어가 지방 정부, 교회 및 학교에서 사용될 수 있었지만, 헝가리어는 중앙 정부와 대학교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많은 헝가리인들은 이 법안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고, 소수 민족 지도자들은 부적절하다고 거부했다. 헝가리 북부의 슬로바키아인,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모두 더 많은 자치를 원했고, 이 법안 통과 후 불안이 따랐다. 정부는 국적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이 심화되었다.

1875년, 칼만 티서의 자유당이 집권하여 관료적인 정치 기구를 구성하고, 부패와 비뚤어진 선거 제도의 조작을 통해 통제를 유지했다. 티서 정부는 세금을 인상하고, 집권 후 몇 년 안에 예산을 균형 있게 만들었으며, 대규모 도로, 철도 및 수로 사업을 완료했다. 상업과 산업은 빠르게 확장되었다.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산업에 종사하는 헝가리인의 비율은 두 배로 증가하여 24.2%가 되었고, 농업에 의존하는 비율은 82%에서 62%로 감소했다.

자유당은 통일된 마자르화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민족 법을 무시하고, 지방 정부에서 헝가리어 사용을 의무화하고, 그 언어로 가르치는 학교 과목 수를 늘리는 법률을 제정했다. 1890년 이후 정부는 교육받은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을 마자르화하고 관료 체제로 편입시켜 소수 민족의 교육받은 엘리트를 앗아가는 데 성공했다. 대부분의 소수 민족은 헝가리어를 배우지 못했지만 교육 시스템은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식하게 했고,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4. 4. 제1차 세계 대전과 해체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하였고, 1918년 제국이 해체되면서 성 이슈트반 왕관령도 소멸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이 독립하거나 다른 국가에 합병되었다.

1918년 10월 31일, 헝가리 의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종료시켰다. 절망에 빠진 카를 1세는 미하이 카로이를 총리로 임명했고, 카로이의 주도로 헝가리 의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종료했다. 11월 13일, 카를 1세는 헝가리가 국가 형태를 결정할 권리를 받아들여 헝가리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한 군주국의 헝가리 측 관리들에게 그에 대한 충성 서약을 면제했다. 카를 1세는 헝가리 국민이 그를 소환할 경우를 대비하여 의도적으로 퇴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로이와 그의 정부는 11월 16일에 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

헝가리 측의 거부로 여러 차례 시도가 좌절된 후, 1918년 10월 29일 자그레브크로아티아 의회는 크로아티아 영토를 통합하고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의 연합 및 모든 관계(특히 1868년 나고드바 제1조)를 종결하고,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의 국가의 국민 의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1918년 12월 1일에 세르비아 왕국과 통합하여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을 형성했다).[9] 피우메 시는 1924년까지 단명한 피우메 자유국이 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 할양되었다.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 (테메시 주, 토론탈 주, 바치-보드로그 주, 바라냐 주)의 헝가리 남부 지역은 바나트, 바치카 및 바라냐 지역의 일부가 되어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에 편입되었다.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을 때, 동 정부는 슬로바키아인이 거주하는 상부 헝가리를 동 공화국의 판도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트란실바니아도 루마니아에 병합되었다.

카를 4세는 퇴위하지 않았고, 1920년부터 1944년까지 명목상 복원된 헝가리 왕국은 호르티 미클로시섭정으로 통치했다.

5. 정치와 사회

1867년 타협 이후 헝가리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여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국왕을 겸임했지만, 국내 문제에 대한 자치권을 가졌다. 헝가리 의회는 양원제였으며, 총리와 내각은 제한적인 선거권을 가진 의회에 책임을 졌다.[2] 외교, 국방, 재정 등은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관리되었고, 독일어가 군대 내 지휘 언어로 사용되었다.[2]

1868년 국적법 제정으로 헝가리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단일 국가로 정의되었지만, 헝가리어가 중앙 정부와 대학교의 공식 언어로 지정되면서 소수 민족의 불만을 샀다.[2]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은 더 많은 자치를 요구하며 마자르화에 반발했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졌다.[2]

헝가리 왕국의 주민들의 의상: 루마니아인, 헝가리인 (마자르인),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농민


사회 구조는 귀족, 하위 귀족, 중산층, 노동자 계급, 농민 등으로 복잡하게 변화했다. 거물 귀족들은 보수 정당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근대화에 반대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들의 주요 동맹 세력이었다. 하위 귀족들은 농업 불황 속에서 관료나 전문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소수였던 중산층은 20세기유대인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현대 경제를 창출하고 칼만 티서 행정 체제를 지원했다. 산업 발전에 따라 노동자 계급도 성장했으며, 사회 민주당이 창당되어 노동조합과 연대했다. 농업 불황으로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졌고, 농촌 지역의 불안이 커지자 정부는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19세기 말 자유당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마자르화 정책을 추진하여 소수 민족의 불만을 야기했고, 교육받은 소수 민족을 관료 체제로 편입시키려 했다. 소수 민족들은 교육을 통해 정치적 권리를 인식하게 되었고,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은 커졌다. 헝가리 정부는 "국가적 선동"을 불법화하고 선거를 조작하여 소수 민족의 대표성을 박탈하려 했지만,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민족 정당들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회에 진출했다.

5. 1. 정치 체제

헝가리는 입헌 군주제 국가였으며,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국왕을 겸임했다. 헝가리 정부는 국내 문제에 대한 자치권을 가졌지만, 외교, 국방, 재정 등은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관리되었다.[2]

헝가리 의회는 양원제로 구성되었으며, 좁은 선거권을 가진 의회에 총리와 내각이 책임을 지는 구조였다. 헝가리 의회는 1867년 2월 18일 안드라시 죄르지 백작 수상에 의해 소집되었다.[2]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동 업무는 외무부, 국방부 및 재무부의 "공동" 부처를 통해 관리되었다. 각 부처 장관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의회를 대표하는 대표단에 책임을 졌다. "공동" 국방부가 제국 및 왕립 군대를 관리했지만, 황제는 최고 사령관 역할을 했고, 독일어가 군대 전체에서 지휘 언어로 사용되었다.[2]

1868년에 제정된 국적법은 헝가리를 언어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다양한 국적의 구성원으로 구성된 ''단일 헝가리 국가''로 정의했다. 헝가리어 이외의 언어가 지방 정부, 교회 및 학교에서 사용될 수 있었지만, 헝가리어는 중앙 정부와 대학교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많은 헝가리인들은 이 법안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고, 소수 민족 지도자들은 부적절하다고 거부했다. 헝가리 북부의 슬로바키아인,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모두 더 많은 자치를 원했고, 이 법안 통과 후 불안이 따랐다. 정부는 국적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이 심화되었다.[2]

5. 2. 사회 변화

1867년 이후 헝가리의 봉건 사회는 귀족, 하위 귀족, 중산층, 노동자 계급, 농민 등으로 구성된 복잡한 사회로 변화하였다. 거물 귀족들은 막대한 부와 상원에서의 지배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보수 정당을 통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근대화에 반대하며 빈과의 긴밀한 관계, 헝가리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 복원을 추구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거물 귀족의 주요 동맹 세력이었다.

일부 하위 귀족 지주들은 농업 불황 속에서도 농업을 계속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관료나 전문직으로 전환하였다.

19세기 중반 헝가리의 중산층은 소수의 독일 및 유대인 상인과 수공업자 소유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0세기 초, 중산층은 규모와 복잡성이 커졌으며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칼만 티서 행정 체제를 지원하는 현대 경제를 창출했고, 티서는 반유대주의를 억제했다. 1896년 유대인 해방법이 통과되었고, 1910년에는 약 90만 명의 유대인이 헝가리 시민의 약 23%를 차지했다. 이들은 상업,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산업 발전에 따라 노동자 계급도 성장했다. 1900년까지 헝가리의 광산과 산업은 약 120만 명을 고용했다. 정부는 낮은 임금을 선호했지만, 노동자들은 파업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1890년 사회 민주당이 창당되어 노동조합과 연대하며 성장했다. 의회는 산업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지만, 선거권 확대는 거부했다.

19세기 말 농업 불황으로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농촌 인구 증가와 토지 분할로 인해 경작지는 줄어들었다. 많은 농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이민을 선택했고, 농민 비율은 감소했다. 농촌 지역의 불안은 커졌고,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고 농업 노동 조직을 금지하는 등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19세기 말 자유당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의회는 성직자 임명 거부권, 교육 기관에 대한 교회의 지배력 축소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민간 결혼 및 이혼 절차를 도입했다.

자유당은 마자르화 정책을 추진하여 소수 민족의 불만을 야기했다. 민족 법을 무시하고 헝가리어 사용을 의무화하며, 교육받은 소수 민족을 관료 체제로 편입시켰다. 소수 민족들은 교육을 통해 정치적 권리를 인식하게 되었고,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은 커졌다. 헝가리는 영토 주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국가적 선동"을 불법화하고 선거를 조작하여 소수 민족의 대표성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민족 정당들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등장했다.

5. 3. 민족 문제

헝가리 정부는 1868년에 제정된 국적법을 통해 헝가리어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민족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헝가리어를 중앙 정부와 대학교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면서, 헝가리 북부의 슬로바키아인,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인,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더 많은 자치를 요구했다.[4] 이러한 요구는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고, 각 민족들은 민족 운동을 전개하며 불안이 고조되었다.[4]

정부는 이러한 민족 문제에 대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졌다. 1890년 이후 헝가리 정부는 교육받은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을 마자르화하여 관료 체제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수 민족은 헝가리어를 배우지 못했고, 교육 시스템은 오히려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식하게 하여 마자르화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19세기 말, 티사는 "국가적 선동"을 불법화하고 선거 속임수를 통해 소수 민족의 대표성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1901년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 민족 정당은 선거 폭력과 경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회에 진출했다.

6. 지도

참조

[1] 서적 World Dictionary of Foreign Expressions Bolchazy-Carducci Publishers, Inc. 1999
[2] 웹사이트 Encyclopædia Britannica https://www.britanni[...]
[3] 웹사이트 Hungary
[4] 웹사이트 History of Croatia https://www.britanni[...] Encyclopedia Britannica 2009
[5] 서적 Hrvatska politika https://books.google[...] Prva hrvatska radnička tiskara 1906
[6] 웹사이트 Izabrani politički eseji, Priredio Dubravko Jelčić http://www.matica.hr[...] MH, SHK, Zagreb 2003
[7] 서적 Stvaranje Države SHS, (Creation of the state of SHS) Zagreb 1958
[8] 기사 Povodom njegove pedesetgodišnjice rodjenja Hrvatsko pravo, Zagreb 1925
[9] 뉴스 Public proclamation of the Sabor 29 October 1918 Hrvatska Država, newspaper 1918-10-29
[10] 서적 World Dictionary of Foreign Expressions Bolchazy-Carducci Publishers, Inc. 1999
[11] 웹사이트 Serbische Wojewodschaft u. Temeser Banat (Wojewodschaft S. u. Temeser Banat) http://www.zeno.org/[...] Heinrich August Pierer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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