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 서쪽 출구 버스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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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주쿠 서쪽 출구 버스 방화 사건은 1980년 8월 19일 신주쿠역 서쪽 출구 버스 터미널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으로, 버스에 불이 붙어 6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가해자는 체포되어 살인 및 방화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심신 미약 상태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가해자는 수감 중 자살했으며, 이 사건은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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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서쪽 출구 버스 방화 사건 | |
---|---|
사건 개요 | |
명칭 | 신주쿠 서쪽 출구 버스 방화 사건 |
발생 장소 | 도쿄도신주쿠구니시신주쿠 1초메 (신주쿠역 서쪽 출구 버스 터미널・게이오 데이토 전철 버스 승강장. 게이오 백화점 앞) |
표적 | 버스 승객 |
발생일 | 1980년 8월 19일 (화요일) |
시간 | 21시경 |
시간대 | JST |
수단 | 방화 |
사용 무기 | 휘발유 |
인명 피해 | |
사망자 | 6명 |
부상자 | 14명 |
피해 규모 | |
손해 | 차량 전소 |
범인 정보 | |
범인 | 건설 작업자 남성 (당시 38세) |
동기 | 사회에 대한 불만의 폭발 |
공격 측 인원 | 1명 |
사법 처리 | |
대응 | 경시청이 체포・도쿄 지검이 기소 |
형사 소송 결과 | 무기징역 확정 (복역 중 자살)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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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의 개요
1980년 8월 19일 화요일 21시경, 신주쿠역 서쪽 출구 버스 터미널 20번 승강장(게이오 백화점 신주쿠점 앞)에서 출발 대기 중이던 게이오 제도전철(현 게이오 전철, 해당 사업은 분사화하여 게이오 버스가 상속)의 주쿠41 계통 / 6호 거리를 경유하는 나카노 차고 행 버스(히노 RE100 · A2158호차 등록 번호: 練馬22か ・771)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2][3][5] 한 남성이 뒷문에서 불이 붙은 신문지와 가솔린 4L가 든 양동이를 차량 후부를 향해 던졌고, 불은 순식간에 번져 6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2][3][5]
해당 차량은 히노·RE100 (등록 번호: 네리마22か・771)이었다.[2] 화재로 인한 차내 온도는 추정 1,800℃에 육박했으며, 고온으로 창문 유리는 깨져 산산이 부서졌고, 알루미늄제 손잡이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부러져 있었다.[3]
사건 현장이 된 신주쿠역 서쪽 출구 버스 터미널 20번 승강장은 현재도 게이오 버스의 숙41계통・나카노 차고행, 숙45계통・나카노역행이 사용하고 있다.
2. 1. 사건 발생
2. 2. 피해 상황
2. 3. 현장 상황
3. 피해자
사망자 6명 중 맨 뒷좌석에 있던 3명은 즉사했다.[3] 2명은 당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경기를 관람하고 돌아오던 아버지(40세)와 아들(8세)[3], 다른 1명은 퇴근 중이던 OL (21세)이었다.[3] 3구의 시신은 진화된 차량 내 좌석에 앉은 채로 탄화되었다.[3] 다음 날 신문 각 지의 1면 톱에는 그 사진이 크게 게재되었다(당시 매스 미디어에서는 이러한 참혹한 사건 피해자의 시신을 게재하지 않는 배려는 없었다).
다른 승객들은 버스 밖으로 탈출했지만, 이후 3명이 사망하여 사망자는 6명이 되었다.[3] 14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 피해자도 있었다.[3] 또한 이 사건으로 남편이 사망하고 아내가 중상을 입은 부부도 있었다.[3]
이 사건을 듣고, 고라쿠엔 구장을 관리하는 주식회사 고라쿠엔 스타디움과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희생된 부자의 고별식에 헌화함과 동시에, 제단에는 오 사다하루가 구단 관계자를 통해 사인볼을 보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한 사망한 피해자 중에는 아이의 운동화를 사기 위해 직장에서 퇴근하던 중 우연히 신주쿠에 들렀다가 사건을 겪은 모자 가정의 어머니가 있었다. 귀가 경로에서 벗어난 장소에서 사고 등에 조우한 경우에는 통근 재해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 통례였지만, 이 사건에서는 당시 노동 대신 후지오 마사유키의 발언도 있어 재해가 인정되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며,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역행하는 결정이었다.)
게이오 전철은 사건에 대해 아무런 과실이 없고 회사 또한 피해자였지만, 전 사원에 대한 헌혈 호소 및 의료비 일시 선지급 등, 전사적으로 사건 피해자 구제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으로 전신의 80%에 달하는 큰 화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져 회복한 '''스기하라 미츠코'''는 1983년에 수기 『살고 싶어, 다시 한번』을 출판했다. 이 수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85년에 『살고 싶어 다시 한번 신주쿠 버스 방화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또한, 스기하라의 오빠인 이시이 요시하루는 보도 사진의 카메라맨이었다. 그는 버스에 방화가 일어났을 때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본능적으로 불타는 버스를 촬영했고, 그 사진은 다음 날 요미우리 신문의 1면에 스쿠프로서 대대적으로 게재되었다[2][6] 영화 본편에서는 요시하루가 촬영한 사건 직후의 사진이 제공되었다.[2][6] 하지만 여동생이 그 사건으로 중상을 입은 가운데, 여동생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충격으로 보도 카메라맨을 은퇴하고, 그 후 펜 네임을 "이시이 요시하루"로 개명하여 풍경 사진 분야로 전향했다.[7]
나이/성별 | 사망일 |
---|---|
8세 남자 | 1980년 8월 19일 |
21세 여성 | 1980년 8월 19일 |
26세 여성 | 1980년 8월 23일 |
29세 남성 | 1980년 10월 16일 |
36세 여성 | 1980년 10월 16일 |
40세 남성 | 1980년 8월 19일 |
3. 1. 사망자
wikitable나이/성별 | 사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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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남자 | 1980년 8월 19일 |
21세 여성 | 1980년 8월 19일 |
26세 여성 | 1980년 8월 23일 |
29세 남성 | 1980년 10월 16일 |
36세 여성 | 1980년 10월 16일 |
40세 남성 | 1980년 8월 19일 |
3. 1. 1. 사망자 목록
wikitable나이/성별 | 사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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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남자 | 1980년 8월 19일 |
21세 여성 | 1980년 8월 19일 |
26세 여성 | 1980년 8월 23일 |
29세 남성 | 1980년 10월 16일 |
36세 여성 | 1980년 10월 16일 |
40세 남성 | 1980년 8월 19일 |
3. 2. 부상자
3. 3. 사회적 지원
4. 가해자
가해자는 경시청에 살인 및 방화의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16] 당초 심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고[1], 사건에 대해 처음 질문하는 "변명 녹취"에 대해서는 "머리카락이 탄 것은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땠기 때문이다. 사건은 모른다"고 진술했다.[8] 그러나 사건 이틀 뒤인 1980년 8월 21일에 "큰 일을 저질렀다. 죄송하다"며 혐의를 인정했고[1], 변호사와 접견했을 때는 상당히 동요한 모습으로 "빨리 죽여줬으면 좋겠다. 사형시켜달라"고 부탁했다.[8][9]
경찰 조사에서 가해자는 사건 당일 밤 신주쿠역 서쪽 출구 광장으로 통하는 계단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여기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욱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6] 노숙자가 되어 신주쿠에서 노숙했지만[3], 사건 당일 누군가(통행인[2] 또는 인근 빌딩 직원[3]이라는 기사도 있다)로부터 "방해된다, 저리가"라는 주의를 받고 격분하여, 휘발유를 가지고 버스에 접근하여 "바보 녀석, 우습게 여기는군!"이라고 외치며 휘발유와 불이 붙은 신문지를 버스에 던져 방화했다.[10][3]
가해자 남성은 1942년 후쿠오카현 고쿠라시(현: 기타큐슈시 고쿠라미나미구)에서 태어났다.[13]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에게 길러졌지만, 초등학교 4학년 이후 등교하지 않고 농업 일을 돕거나 공원으로 일했다.[1] 아버지가 병사한 후[6], 1972년에 결혼했지만[3][6], 아내가 장남을 출산한 다음 해에 이혼했다.[6] 아내가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에[3][6], 아이를 아동 시설에 맡겼다.[3][6]
이혼 후 전국 각지를 전전하며 건설 현장 작업자로 일했지만[3][6], 아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과 아이를 시설에 맡긴 것 등으로 자책감에 시달렸다.[3] 처음에는 아이의 양육비도 매달 빠짐없이 송금했지만[3][6], 그중 주소 불명이 되어 송금도 끊겼다.[3] 음주량이 늘어 알코올 의존이 되었고, 자신도 정신 질환으로 입원한 적도 있었다.[3] 이윽고 남성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책감을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바꾸어갔다.[3] 가해자의 자백에 따르면, 범행 동기는 "평소의 울분을 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5]
1997년 10월 7일 오후, 남성은 치바 형무소 내 공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향년 55세)[4][15][16]。유서는 남겨지지 않았고, 사전에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언행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16]。
그 사실이 보도된 것은 자살 후 반년 뒤인 1998년 4월이었다[15][17]。수형자의 변호인을 맡았던 변호사 야스다 요시히로는 "수형자는 '자신의 아이와 동갑인 아이를 죽여 버렸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라고 자책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고심한 끝에 계획적인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추측했다[18]。
4. 1. 체포 및 초기 진술
4. 2. 범행 동기
4. 2. 1. 성장 배경
요약(summary)과 원본 소스(source)의 내용이 일치 하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에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장 배경에 대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4. 3. 재판
형사 재판을 앞두고 도쿄 지방 검찰청 담당 검사 우에바야시 히로는 "가해자에게 정신 장애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약간 피해 망상적인 것을 진술하고 있다"라며 피의자를 감정 유치하고, 이츠미 타케미츠(도쿄 대학교수, 당시)에게 정신 감정을 의뢰했지만, 그 정신 감정 결과도 "피해 망상·강박 관념과 비슷한 우울 증상은 있지만, 정신 장애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정신 분열증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1]。도쿄 지검은 남자를 건조물 등 이외 방화죄·살인죄로 도쿄 지방 재판소에 기소했다. 방화에 관해서는 형법 108조의 현주 건조물 등 방화죄에서는 "방화로 인해, 현존하는 사람이 주거로 사용하거나 사람이 있는 건조물, 열차, 전차, 선박, 광갱을 소훼하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 조항에 "버스"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노선 버스는 다수의 사람이 승차하는 것이 상정되기 때문에, 버스를 열차나 전차에 준하는 것으로 하여 형법 108조의 현주 건조물 등 방화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판례가 없고 학설도 갈렸기 때문에, 형법 110조의 건조물 등 이외 방화죄로 기소되었다.
1981년 (쇼와 56년) 1월에 도쿄 지재(칸가키 히데오 재판장)에서 첫 공판이 열렸을 때, 죄상 인정에서 피고인 남자는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진술했다[1]。그 후에 증인으로 출두한 이츠미가 "정신 감정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재차 정신 감정을 실시하고 싶다"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도쿄 지재가 이츠미와 후쿠시마 아키라(조치 대학 교수, 당시)에게 위촉하여, 직권으로 재차 정신 감정을 실시했다[1]。그 결과, 이츠미는 "복잡 취기에 의한 심신 쇠약 상태"·후쿠시마는 "단순 취기·경도 지적 장애와 심인성 망상의 3가지 요인에 의한 심신 쇠약 상태"라고 결론을 내렸다[1]。
1983년 (쇼와 58년) 12월에 도쿄 지재(칸다 타다하루 재판장)에서 열린 논고구형 공판에서, 도쿄 지검의 검사는 피고인 남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2개월 후인 1984년 (쇼와 59년) 2월에 열린 최종 변론에서, 변호단은 "가해자는 범행 당시, 장남을 맡긴 복지 시설에서 '성실하게 일해라'라고 강요받아 쫓기고 있다는 망상을 품고 있었고, 범행 당시에는 심신 상실 상태였다"라고 무죄를 주장했다[11]。
1984년 (쇼와 59년) 4월 24일에 제1심 판결 공판이 열렸고[12], 도쿄 지재(칸다 타다하루 재판장)는 "본 건은 본래라면 사형을 적용해야 할 사건이지만, 사건 당시의 피고인은 심신 쇠약 상태에 있었다"라고 사실 인정하여, 검찰의 사형 구형에서 양형을 감경하여 무기 징역의 판결을 선고했다[4]。
변호인 및 도쿄 지검 쌍방이 이 무기 징역 판결에 불복하여 도쿄 고등 재판소에 항소했다[4]。1985년 (쇼와 60년) 2월 14일 오전 도쿄 고법 형사 제4부(야마모토 시게루 재판장)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피고인 남자는 개정 직후 갑자기 재판관석·방청석을 각각 향해 토사구팽하며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한 외에, 폐정 후에도 방청석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숙였다[13]。
1986년 (쇼와 61년) 8월 26일에 항소심 판결 공판이 열렸고, 도쿄 고법 형사 제4부(야마모토 시게루 재판장)는 제1심·무기 징역 판결을 지지하고, 쌍방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했다[14]。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피고인은 야마모토 재판장에게 "징역인가요?"라고 질문했지만, 재판장이 "무기 징역"이라고 대답하자 "자신은 죄가 없는 것이군요"라고 진술하며, 방청석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하며 토사구팽했다[14]。
이 판결로 인해 무기 징역형이 확정되었다[4]。남자는 판결 확정 후인 1986년 (쇼와 61년) 10월 7일부터 지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5]。
4. 3. 1. 정신 감정
도쿄 지방 검찰청 검사 우에바야시 히로는 "가해자에게 정신 장애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약간 피해 망상적인 것을 진술하고 있다"라며 피의자를 감정 유치하고, 이츠미 타케미츠(도쿄 대학교수, 당시)에게 정신 감정을 의뢰했지만, 그 정신 감정 결과도 "피해 망상·강박 관념과 비슷한 우울 증상은 있지만, 정신 장애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정신 분열증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1]。1981년 (쇼와 56년) 1월, 도쿄 지방 재판소 (칸가키 히데오 재판장)에서 열린 첫 공판의 죄상 인정에서 피고인 남자는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진술했다[1]。그 후에 증인으로 출두한 이츠미가 "정신 감정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재차 정신 감정을 실시하고 싶다"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도쿄 지재가 이츠미와 후쿠시마 아키라(조치 대학 교수, 당시)에게 위촉하여, 직권으로 재차 정신 감정을 실시했다[1]。그 결과, 이츠미는 "복잡 취기에 의한 심신 쇠약 상태"·후쿠시마는 "단순 취기·경도 지적 장애와 심인성 망상의 3가지 요인에 의한 심신 쇠약 상태"라고 결론을 내렸다[1]。
4. 3. 2. 1심 판결
도쿄 지방 검찰청은 남자를 건조물 등 이외 방화죄·살인죄로 도쿄 지방 재판소에 기소했다.[1] 1981년(쇼와 56년) 1월, 도쿄 지방 재판소(칸가키 히데오 재판장)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피고인 남자는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진술했다.[1] 증인으로 출두한 이츠미 타케미츠(도쿄 대학 교수)는 정신 감정 기간이 짧았다는 이유로 재감정을 요청했고, 도쿄 지방 재판소는 이츠미와 후쿠시마 아키라(조치 대학 교수)에게 재차 정신 감정을 위촉했다.[1] 이츠미는 "복잡 취기에 의한 심신 쇠약 상태", 후쿠시마는 "단순 취기·경도 지적 장애와 심인성 망상의 3가지 요인에 의한 심신 쇠약 상태"라고 결론 내렸다.[1]1983년(쇼와 58년) 12월, 도쿄 지방 재판소(칸다 타다하루 재판장)에서 열린 논고구형 공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1984년(쇼와 59년) 2월, 변호단은 최종 변론에서 "가해자는 범행 당시 심신 상실 상태였다"며 무죄를 주장했다.[11]
1984년 4월 24일, 도쿄 지방 재판소(칸다 타다하루 재판장)는 "본 건은 본래라면 사형을 적용해야 할 사건이지만, 사건 당시 피고인은 심신 쇠약 상태에 있었다"라고 사실 인정하여, 검찰의 사형 구형을 감경해 무기 징역 판결을 선고했다.[4][12]
4. 3. 3. 항소심
변호인 및 도쿄 지검 쌍방이 무기 징역 판결에 불복하여 도쿄 고법에 항소했다.[4] 1985년 (쇼와 60년) 2월 14일 오전 도쿄 고법 형사 제4부(야마모토 시게루 재판장)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피고인 남자는 개정 직후 갑자기 재판관석·방청석을 각각 향해 토사구팽하며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한 외에, 폐정 후에도 방청석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숙였다.[13]1986년 (쇼와 61년) 8월 26일에 항소심 판결 공판이 열렸고, 도쿄 고법 형사 제4부(야마모토 시게루 재판장)는 제1심·무기 징역 판결을 지지하고, 쌍방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했다.[14]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피고인은 야마모토 재판장에게 "징역인가요?"라고 질문했지만, 재판장이 "무기 징역"이라고 대답하자 "자신은 죄가 없는 것이군요"라고 진술하며, 방청석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하며 토사구팽했다.[14]
4. 4. 수감 생활과 자살
가해 남성은 1997년 10월 7일 오후, 지바 형무소 내 공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향년 55세).[4][15][16] 유서는 남겨지지 않았고, 사전에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언행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16]이 사실은 자살 후 반년 뒤인 1998년 4월에 보도되었다.[15][17] 수형자의 변호인을 맡았던 야스다 요시히로 변호사는 "수형자는 '자신의 아이와 동갑인 아이를 죽여 버렸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라고 자책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고심한 끝에 계획적인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추측했다.[18]
5. 사회적 영향
이 사건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매스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ABC)의 『놀라운 모모노키 20세기』 1995년1월 27일 방송분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다.[19]
작가 미사와 지렌은 지바 형무소 내에서 복역 중 이 사건의 범인과 대면했다.
본 사건 직전에는 '''후지'''산 대규모 낙석 사고 (8월 14일), 시즈오카역 앞 '''지하'''상가 폭발 사고 (8월 16일)와 '이 해의 3대 재해'로 불리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는데, 이시즈 겐스케는 이 3가지 사건을 가리켜[19], 이치후지니타카산나스비에서 따온 조어 "'''이치후지, 니지카, 산바스비'''"를 만들어냈다.[21]
5. 1. 언론 보도
이 사건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매스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ABC)의 『놀라운 모모노키 20세기』 1995년1월 27일 방송분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다.작가 미사와 지렌은 지바 형무소 내에서 복역 중 이 사건의 범인과 대면했다.
본 사건 직전에는 '''후지'''산 대규모 낙석 사고 (8월 14일), 시즈오카역 앞 '''지하'''상가 폭발 사고 (8월 16일)와 '이 해의 3대 재해'로 불리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는데, 이시즈 겐스케는 이 3가지 사건을 가리켜, 이치후지니타카산나스비에서 따온 조어 "'''이치후지, 니지카, 산바스비'''"를 만들어냈다.
5. 2. 대중 매체의 조명
이 사건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매스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졌다.[19][21] 아사히 방송(ABC)의 『놀라운 모모노키 20세기』 1995년1월 27일 방송분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다. 작가 미사와 지렌은 지바 형무소 내에서 복역 중 이 사건의 범인과 대면했다. 본 사건 직전에는 후지산 대규모 낙석 사고 (8월 14일), 시즈오카역 앞 지하상가 폭발 사고 (8월 16일)와 '이 해의 3대 재해'로 불리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는데, 이시즈 겐스케는 이 3가지 사건을 가리켜 이치후지니타카산나스비에서 따온 조어 "'''이치후지, 니지카, 산바스비'''"를 만들어냈다.[20]5. 3. 유사 사건과의 비교
이 사건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매스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졌다.[19] 아사히 방송(ABC)의 『놀라운 모모노키 20세기』 1995년 1월 27일 방송분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다. 작가 미사와 지렌은 지바 형무소 내에서 복역 중 이 사건의 범인과 대면했다.본 사건 직전에는 후지산 대규모 낙석 사고(8월 14일), 시즈오카역 앞 지하상가 폭발 사고(8월 16일)가 발생했다. 이시즈 겐스케는 3가지 사건을 가리켜[19], 이치후지니타카산나스비에서 따온 조어 "'''이치후지, 니지카, 산바스비'''"를 만들어냈다.[21]
참조
[1]
뉴스
[裁く]第6部・心の闇事件(4) 新宿バス放火、2医師に鑑定委嘱(連載)
読売新聞
2002-03-20
[2]
웹사이트
杉原美津子×入江杏「喪失から甦生へ『新宿西口バス放火事件』と『世田谷一家殺害事件を語る」
https://gendai.media[...]
講談社
2014-08-19
[3]
뉴스
死者6人の「バス放火事件」は現代の格差社会でも起こりうる無差別犯罪【大量殺人事件の系譜】
https://nikkan-spa.j[...]
扶桑社
2016-10-14
[4]
뉴스
[裁く]第6部・心の闇事件(5)『無期懲役』確定から11年
読売新聞
2002-03-21
[5]
뉴스
<あのころ>新宿バス放火事件 6人死亡、重軽傷14人
http://www.47news.jp[...]
47NEWS
2009-08-19
[6]
서적
昭和55年 写真生活
다이아프레스
2017
[7]
방송
フジテレビ開局50周年記念特別番組『ひもとく「日本の50年」』
2009-03-01
[8]
뉴스
罪に…新宿バス放火事件・被害者と服役囚:2(それから)
朝日新聞
1991-11-20
[9]
뉴스
もう一度 新宿バス放火事件・被害者と服役囚:3(それから)
朝日新聞
1991-11-22
[10]
웹사이트
新宿西口バス放火事件と犯人/****の現在!被害者の親子・カメラマンのスクープ写真も総まとめ
https://newsee-media[...]
2021-10-25
[11]
뉴스
[裁く]第6部・心の闇事件(5)『無期懲役』確定から11年
読売新聞
2002-03-21
[12]
뉴스
84年・主なできごと(社会)
朝日新聞
1984-12-31
[13]
뉴스
新宿バス放火控訴審、××(加害者の実名)が土下座し『ごめんなさい』
朝日新聞
1985-02-14
[14]
뉴스
新宿バス放火事件、2審も無期懲役 東京高裁、心神耗弱を認める
朝日新聞
1986-08-27
[15]
뉴스
新宿バス放火事件 ××(加害者の実名)受刑者が自殺/千葉刑務所
読売新聞
1998-04-16
[16]
뉴스
刑務所で昨秋自殺 新宿バス放火事件の××服役囚
朝日新聞
1998-04-16
[17]
뉴스
刑務所で昨秋自殺 新宿バス放火事件の××服役囚
朝日新聞
1998-04-16
[18]
뉴스
'『生きてこそ』事件の被害者ら衝撃 新宿バス放火・××服役囚自殺'
朝日新聞
1998-04-16
[19]
서적
百科年鑑[1981]
平凡社
1981-04-10
[20]
간행물
山藤章二のブラック=アングル 悪夢三題 一富士二地下三バス火
朝日新聞社
1980-09-05
[21]
간행물
ことばのことば TPO
대수관서점
198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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