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국전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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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도권 국전 폭동은 1973년 4월, 국철 노조의 준법투쟁으로 인한 열차 지연에 승객들이 불만을 품고, 4월 27일 예정된 교통 총파업을 앞두고 수도권 주요 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동 사건이다. 오미야역, 아카바네역, 우에노역, 신주쿠역 등 38개 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동이 발생하여 약 3만 2천 명이 참여하고, 9억 6천만 엔의 재산 피해와 2,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노조의 과도한 투쟁, 국철의 혼잡 대책 미흡, 정보 전달 부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일본 정부는 불법 노동 쟁의 행위를 비판하고, 국철은 통신 운용 체계 현대화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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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국전 폭동 | |
---|---|
지도 | |
사건 개요 | |
발생 일시 | 1973년 4월 24일 |
발생 장소 | 일본 수도권 |
주요 원인 | 국철의 파업으로 인한 통근 열차 운행 중단 |
결과 | 다수의 부상자 발생 열차 파괴 및 방화 사회 혼란 야기 |
배경 | |
사회적 배경 | 1970년대 초반 일본 사회의 불안정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심화 노동 운동의 활성화 |
철도 파업 | 일본국유철도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인한 열차 운행 차질 |
국철의 파업 원인 | 임금 인상 요구 노동 조건 개선 요구 정부의 철도 정책에 대한 반발 |
사건 경과 | |
시위 시작 | 국철 파업으로 통근길이 막힌 시민들이 항의 시작 |
폭동 확산 | 시민들의 불만이 격화되면서 폭동으로 번짐 |
폭력 사태 | 열차 파괴 역 시설 파손 방화 경찰과의 충돌 |
정부 대응 | 경찰력 투입 및 시위 진압 |
사건 종료 | 경찰 진압과 파업 종료로 사건 마무리 |
피해 | |
인명 피해 | 다수의 부상자 발생 (정확한 수치는 자료마다 상이) |
재산 피해 | 열차 파괴 및 방화로 인한 막대한 재산 손실 역 시설 및 주변 상가 파손 |
영향 | |
사회적 영향 | 사회 불안 심화 정부의 권위 실추 노동 운동의 위축 |
정치적 영향 |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 확산 국철 운영 체제 개편 논의 촉발 |
철도 운영에 미친 영향 | 철도 안전 문제에 대한 경각심 고취 |
평가 | |
폭동 원인 분석 | 경제적 불평등 심화 정부와 국철의 미흡한 대응 노동 운동의 과격화 |
폭동의 의미 | 1970년대 일본 사회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 노동 운동의 한계점을 드러낸 사건 시민들의 불만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사건 |
2. 사건 배경
1973년 춘계 임금협상을 이유로, 국철노동조합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은 준법투쟁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는 승객들의 비난과 반발을 불렀고, 3월 13일 아침 다카사키선 아게오역에서 승객들이 차량과 역 시설을 파괴하는 아게오 사건이 일어났다. 본래 이 시점에서 협상을 수습해야 했지만, 노사 모두 양보하지 않았다. 특히 국철노동조합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은 '아게오 사건은 권력층의 선동'이라고 근거없이 책임을 돌려, 사회에 사죄를 거부하고 바로 준법투쟁을 재개했다. 준법투쟁 자체는 합법이지만, 이러한 조합의 태도를 언론매체는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노동조합에 대한 국민의 분노도 한계에 이르렀다.
1973년 4월 24일, 이날도 준법투쟁으로 인해 국철의 다이야가 혼란스러웠다. 특히 이날부터 4월 27일의 교통 제네스트을 앞두고 준법투쟁이 강화되었다.[1]
같은 해 춘투에서 국철노조(国労)와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動労)은 운전 안전 규범 등 각종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 오히려 열차 운행 지연으로 이어지는 점을 이용하여, 규칙을 필요 이상으로 ‘준수’함으로써 열차 운행에 혼란을 야기하는 '''순법투쟁'''을 쟁의 전술로 경영진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법투쟁은 이용객들로부터 비판과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3월 13일 아침, 다카사키선 아게오역 등 여러 역에서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의 순법투쟁으로 인한 열차 운행 지연에 분노한 승객들이 폭동을 일으켜 철도차량과 역 시설을 파괴하고 역 주변을 점거하는 아게오 사건이 발생했다.[1]
아게오 사건을 계기로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 측도 순법투쟁을 중단했지만, 이후 노사 양측 모두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노사 협상이 결렬되자,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은 4월부터 순법투쟁을 재개했다.[1]
3. 사건 개요
3. 1. 오미야역에서의 소동
1973년 4월 24일 16시 30분경, 오미야역에서는 준법투쟁으로 도호쿠선·다카사키 선 열차가 60~90분가량 지연되었다. 퇴근 시간과 겹쳐 홈에 승객이 넘쳐났고, 일부 승객이 역장실을 점거하는 소동을 벌였다.[1] 사이타마현 경찰의 경비 출동과 도부 노다선, 버스 등의 대체 수송으로 소요는 진정되었다.[1]
3. 2. 아카바네역의 열차 지연 및 폭동
아카바네역에서는 도호쿠 본선과 다카사키 선 하행 승강장에 열차가 도착하지 않아 승객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20시경, 아오모리행 급행열차 '쓰가루 1호'가 우쓰노미야역까지 보통 열차로 운행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쓰가루 1호'는 원래 우에노역에서 19시 35분에 출발해야 했지만, 준법투쟁과 적재량 초과 등으로 20시 15분에 늦게 출발했고, 이미 만원 상태였다.
20시 20분쯤, '쓰가루 1호'가 아카바네역에 도착했지만, 이미 만원이었기 때문에 승객들은 탈 수 없었다. 이에 화가 난 승객들은 기관차를 둘러쌌고, 기관사는 승객들의 위협에 도망쳤다. 이후 승객들은 움직이지 않는 열차의 유리창을 깨는 등 파괴 행위를 시작했다. 국철 측은 게이힌 도호쿠선으로 환승하라는 안내 방송을 했다.
그러나 게이힌 도호쿠선 상행 전철도 아카바네역 바로 앞에서 신호기 고장으로 운행이 중지되어, 승객들이 선로 위를 걸어서 역으로 향하는 상황이었다.
21시경, 아카바네역 각 승강장은 6,000여 명의 승객들로 가득 찼고, 역장실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는 등 폭동으로 발전했다. 21시 30분경에는 1번선에 정차 중이던 게이힌 도호쿠선 이소고행 전철 차내에서 승무원실에서 가져온 발연통이 불에 탔고, 차내도 파괴되었다. 22시 30분경에는 한 남자가 운전대에 방화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1]
아카바네역에서의 열차 운행 중지는 야마노테 선 등 다른 노선에도 영향을 미쳐 국철 열차 운행이 잇따라 중지되었고, 이는 다른 역으로 폭동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3. 3. 우에노역 승객들의 폭동
20시 30분 무렵, 우에노역에서는 출발하지 않는 전철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한 이용객이 다카사키 선 가고하라행 열차에 돌을 던진 것을 시작으로 소란이 확산되었다. 역 기능은 마비되고 역 직원과 이용객 사이의 소규모 마찰과 역 시설 파괴 행위가 잇따랐다.[1] 0시 20분 무렵에는 우에노역의 중앙홀에서 방화가 일어났으며, 운행을 멈춘 열차의 안내판을 모아 불에 던지는 행위도 볼 수 있었다.[1]
밤 9시 전, 출발하지 않는 열차에 지친 승객들이 다카사키선 가마가야행 열차에 투석을 시작했고, 다카사키선과 도호쿠선 열차의 기관사를 열차에서 끌어내 감금했다. 7번선 승강장에서는 3,000명의 승객들이 승무원실에서 가져온 발염통을 켜서 차량 내에 방화하거나 창문을 깨는 등의 파괴 행위를 시작했다. 이 소동을 계기로 우에노역은 폭동 상태가 되어 역 기능이 마비되었고, 밤 9시에 경찰이 도착했지만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폭도들은 서점, 개찰 사무실과 매표소도 파괴하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위험을 느껴 직무를 포기했으며, 역은 무인 상태가 되었다. 이후에도 파괴 행위는 계속되어, 밤 12시 20분경에는 콘코스에서 방화 소동이 일어나는 사태가 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열차의 안내판을 모아 불에 던지는 행위도 있었다.[1] 분노에 휩싸여 제정신을 잃은 승객들이 던진 돌이나 안내판이 다른 승객에게 맞아 승객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또 방화된 불 쪽으로 폭도들이 서로 밀치면서 전신 화상을 입는 승객도 나오는 등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1]
3. 4. 신주쿠역 승객들의 폭동
우에노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신주쿠역에서도 밤 9시 10분경부터 소동이 시작되었다. 밤 9시 30분경 야마노테 선 운행이 중단되고 지하철과 사철 각 노선으로 환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이용객들이 역장 사무실로 몰려드는 소동이 벌어졌다.[1] 밤 10시경에는 서쪽 출구의 요금 정산소와 매점 등이 공격받았고, 동쪽 출구에서는 철도경찰대에 방화하는 사건으로까지 번졌다. 이튿날 4월 25일 아침 7시경까지 폭동은 계속되었다. 신주쿠역 폭동 참가자는 최대 2만 명에 달했으며,[1] 이 폭동으로 승객들도 많은 부상을 입어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84년에 발행된 『신주쿠역 90년의 역사』에는 신주쿠역의 이러한 소란과 결과가 서술되어 있는데, 역 직원들은 직장을 떠나지 않고 수습에 힘써 나중에 감사장을 받았다고 한다.
3. 5. 폭동 동시 발생
시부야역, 아키하바라역, 유라쿠초역 등 총 38개 역에서 파괴와 방화 등의 폭동이 동시에 발생했다.[1] 폭동 참가자 수는 32,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일부 폭도들은 표, 현금, 매점 상품 등을 약탈하여 현금 피해액만 1000만엔을 넘었다.[1] 이케부쿠로역에서는 폭도 간의 난투극,[1] 간다 역에서는 택시 투석,[1] 신바시역에서는 가스 누출 등의 사건도 발생했다.[1]
3. 6. 일본 경시청의 폭동 진압
일본 경시청은 22시쯤 경찰 기동대를 최대한 동원해 군중들의 파괴 행위를 막고 역무원과 열차를 보호하라는 지령을 내렸다.[1] 또한 각 역장에게 역무원이 현장에 대기할 것을 요청했다. 23시 30분경에는 사건 확대를 막고 열차 운행을 확보하며, 악질적인 폭동 가담자는 체포·검거할 방침임을 모든 경찰관에게 통지했다. 아울러 각 교통회사에 전철, 버스 등의 임시 운행과 막차 시간 연장을 요청했다.[1]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폭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군중의 위협을 느낀 역무원들이 모두 달아나는 일도 많았다.[1]
4. 결과
국철노동조합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이 22시 30분경 준법투쟁 중지를 통지했지만, 이미 21시 45분경 아카바네선, 게이힌 도호쿠선, 야마노테선, 도호쿠 본선, 다카사키선, 조반선 등 여러 노선이 운행을 중지한 상태였다.[1] 수많은 차량과 시설이 파괴되어 수도권에서는 다음 날인 4월 25일 오전 10시까지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후에도 대폭적인 감편 운행이 불가피했다.[1]
이 폭동으로 철도 시설 안팎, 군중을 불문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25일 새벽까지 200대 이상의 구급차가 출동했다. 병원에서는 여러 대의 구급차가 긴 줄을 이었고, 주변 도로에서는 정체도 발생했다. 또한 부상자가 너무 많아 치료를 받지 못한 폭도들이 의료 종사자에게 항의하거나, 부상자 간의 난투극으로 병원 창문이 깨지는 등 폭동은 철도 시설 외부로까지 확산되었다.[1]
경시청은 밤 10시경 기동대의 최대 동원을 지시하고, 각 역장에게 역 직원의 현장 대기 요청을 했다. 밤 11시 30분경에는 사건 확대 방지와 열차 운행 확보, 악질범에 대한 체포·검거 방침을 모든 경찰관에게 지시했다. 또한 사철 각 회사에 전철·버스의 임시 운행과 종착역 연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폭동에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었고, 군중과 보행자 등의 부상자는 수천 명을 넘었다. 또한 군중에게 두려움을 느낀 역 직원이 도망치는 사례가 잇따라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다.[1]
4월 26일 일본국유철도(国鉄)가 집계한 피해액은 다음과 같다.[6][7]
항목 | 피해액 및 내용 |
---|---|
총 손해액 | 9.6억엔 |
차량 | 1억엔 (피해 S: 폐차 후 보충 제작, 피해 A: 공장 수리 23편성, 피해 B: 약 1주일 수리 36편성, 피해 C: 하루 만에 수리 32편성) |
건물 | 1.2억엔 |
전기 기계 설비 | 4.1억엔 (컴퓨터 등) |
자동매표기 | 1.3억엔 (도쿄도 배치 약 3000대 중 208대 사용 불능) |
승차권 환불 | 2억엔 |
철도홍제회 손해 | 수천만 엔 (매점 파괴 등) |
화물 감소량 | 47만 톤 (생활필수품 10만 톤 포함) |
부상자 | 2,000명 이상 (국철 직원, 폭동 참가 군중, 통행인, 주변 주민 등) |
우에노, 간다, 유라쿠초역 3개 역의 미도리노마도구치는 당분간 영업 불능 상태였으며, 지정석 승차권 판매는 아키하바라역, 도쿄역, 신바시역으로 안내되었다. 차량 피해도 전례 없이 대규모였기 때문에 당분간 배차 간격 운행을 강행했다.[6][7]
전국적으로 파업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운수성은 도로운송법 제34조에 따라 일반 운송업체에 생활 필수품 대행 수송을 명령했다. 이는 1951년 법 제정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국철의 신선식품 급송 열차를 화물자동차로 대행하려면 하루 500대가 필요하며, 운임은 국철의 약 10배가 되어 1일당 경비는 1억엔이 된다. 그 차액은 국가가 보상하게 되었다.[8]
폭동과 사보타주 투쟁의 여파로 1973년 골든위크 수송에도 영향을 미쳐, 연휴 전반은 열차 운휴가 이어지고 여행 취소가 잇따랐다. 이 때문에 전반의 수송 실적은 전년에 비해 대폭 감소했으며, 여행 거리가 짧아지는 경향이 있었다.[9]
니카이도 스스무 내각관방장관은 이 사건에 대해 “국민의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는 불법적인 노동쟁의 행위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이제 명확하다”, “민주주의 체제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며, 정부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소자키 에이 국철 총재는 국철노동조합(国労), 동일본철도노동조합(動労)에 불법적인 노동쟁의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요구서를 전달했다.[10]
25일, 국철노동조합(国労)은 성명을 발표하여 “승객의 혼란은 국철노동조합(国労), 춘투 공투의 춘투를 파괴하려 하고, 투쟁 방해를 노린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철노는 “이 혼란은 국철노동조합(国労), 동일본철도노동조합(動労)의 불법 행위에 대한 국민 대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며, 이 폭주를 방치하고, 직장의 질서를 붕괴시킨 국철 당국의 책임은 극히 중대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12]
5. 사건의 원인
1973년 춘계 임금협상에서 국철노동조합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은 준법투쟁을 벌였다. 이는 승객들의 비난을 받았고, 3월 13일 다카사키선 아게오역에서 승객들이 차량과 역 시설을 파괴하는 아게오 사건이 일어났다. 노사는 협상에 실패했고, 특히 국철노동조합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은 아게오 사건을 권력층의 선동이라고 주장하며 사죄를 거부하고 준법투쟁을 재개했다. 언론은 이러한 노조의 태도를 비판했고, 국민의 분노도 커졌다.[1]
1973년 춘투에서 국철노조와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은 운전 안전 규범 등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 열차 운행 지연으로 이어지는 점을 이용, 규칙을 필요 이상으로 ‘준수’하여 열차 운행에 혼란을 야기하는 순법투쟁을 쟁의 전술로 사용했다. 그러나 순법투쟁은 이용객들의 비판을 받았고, 3월 13일 아게오 사건이 발생했다. 아게오 사건 이후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은 순법투쟁을 중단했지만, 노사 협상이 결렬되자 4월부터 순법투쟁을 재개했다.
1973년 당시 국철은 잦은 파업과 더불어 승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카바네역을 비롯한 여러 역에서 발생한 수도권 국전 폭동은 노조의 준법투쟁으로 인한 열차 지연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통 장애 발생 시 정보 제공 체계의 미흡이 승객들의 불만을 증폭시킨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5. 1. 노동조합의 과도한 투쟁
1973년 춘계 임금협상에서 국철노동조합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은 준법투쟁을 벌였다. 이는 승객들의 비난을 받았고, 3월 13일 다카사키선 아게오역에서 승객들이 차량과 역 시설을 파괴하는 아게오 사건이 일어났다. 노사는 협상에 실패했고, 특히 국철노동조합과 국철동력차노동조합은 아게오 사건을 권력층의 선동이라고 주장하며 사죄를 거부하고 준법투쟁을 재개했다. 언론은 이러한 노조의 태도를 비판했고, 국민의 분노도 커졌다.[13]1973년 춘투에서 국철노조와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은 운전 안전 규범 등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 열차 운행 지연으로 이어지는 점을 이용, 규칙을 필요 이상으로 ‘준수’하여 열차 운행에 혼란을 야기하는 순법투쟁을 쟁의 전술로 사용했다. 그러나 순법투쟁은 이용객들의 비판을 받았고, 3월 13일 다카사키선 아게오역 등 여러 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철도차량과 역 시설이 파괴되는 아게오 사건이 발생했다.
아게오 사건 이후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은 순법투쟁을 중단했지만, 노사 협상이 결렬되자 4월부터 순법투쟁을 재개했다. 우메하라 준(梅原淳)은 1971년 마르크스주의 생산운동 실패 이후 국철노련과 동일본철도노련의 폭주를 비판했다.[13]
5. 2. 부적절한 혼잡 대책
1973년 당시 국철은 잦은 파업과 더불어 승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쿄 북철도관리국 영업부장 호시노 슈지(星野修二)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14]- 장거리 통근은 도시권 확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측면이 있었다.
- 제3차 장기 계획(통근 5방면 작전 초기)까지는 러시아워 혼잡 상한선 200% 기준에 타당성이 있었지만,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은 혼잡도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15]
- 당시 일본의 고용 관행상 열차가 조금이라도 운행되면 출근해야 했고, 결근은 어려웠다.
- 기존의 파업 대책은 불법 행위를 하는 직원에 대한 대책에만 집중되었고, 승객의 입장에서 필요한 수송 상황 개선은 고려되지 않았다.
5. 3. 정보 전달의 미비
아카바네역을 비롯한 여러 역에서 발생한 수도권 국전 폭동은 노조의 준법투쟁으로 인한 열차 지연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통 장애 발생 시 정보 제공 체계의 미흡이 승객들의 불만을 증폭시킨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당시 수도권 본부 차장은 통근 5방면 작전의 성과와 수송력 증강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이러한 사건은 단순한 수송력 증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사회 상황이 불안정할 때 위험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으며, 특히 초기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6]
사건 이후 1975년 3월, 수도권 본부장 교체 인사 발령 시, 본사 전기국장인 오오세키 마사노리(尾関雅則)가 국철 본사 상무이사급으로 이동했다. 오오세키는 전 본부장 이시카와 다츠지로(石川達二郎)로부터 "정보 문제를 꼭 당신 시대에 해결해 주었으면 합니다. 뿌리를 내려 주었으면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17]
1976년 당시 수도권 본부 공사 관리실장이었던 사토 킨지(佐藤金司)는 두 사건을 정보 측면에서 분석했다. 그는 수도권 국전 폭동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견해를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 열차 감속 등 사보타주 중에는 승객들의 불만이 높아져 사고 발생 위험이 커진다.
- 혼란이 커지지 않도록 하려면 사건 발생 초기 20~30분의 대처가 매우 중요하다.
- 혼잡한 차량이나 역에서는 "정보의 기아" 상태가 비정상적인 상황을 악화시킨다.
- 정보 수집 및 전달 수단이 취약하여 적절한 판단과 정보 제공이 어려웠다.
- 중요한 차량이나 역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어 승객들에게 효과적인 안내나 설득을 할 수 없었다.[16]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사토 킨지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제시했다.
구체적인 대책으로는 당시 게이오테이토 전철 등 일부 사철에서 도입하고 있던 TTC가 언급되었다.[19]
그 외 해결책으로, 비상시 정보 수집·제공 능력 강화, 대체 수송력 확보, 비상시 군중 심리 연구 등이 제시되었다.[16]
『철도 통신(鉄道通信)』에서는 외부와의 소통에서 불만 처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우리 회사의 체질로서 외부를 향한 일반 정보 제공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대책으로는 전화를 통한 정보 안내 강화와, 현장 직원을 위한 전국 일제 전달, 일제 방송 설비 부족을 지적했다. 또한, 기기 파손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소동이 일어나면 항상 통신 설비가 파손된다"라고 언급하며, 승객과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 방호 체계가 미흡한 점을 지적했다. 대책으로는 기기 방호 강화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비품과 이동 기기 확보 필요성을 제시했다.[22]
사건 후 실시된 철도 치안관 좌담회에서는, 도쿄역에서 수습에 참여했던 치안관이 "훌륭한 신사들이 제법 구경꾼이 되어 눈빛을 바꾸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직원들이 끝까지 직장을 지킨 곳은 피해가 매우 적었고, 위험을 느껴 무인이 된 곳일수록 큰 피해를 입었다", "화풀이 대상이 될 직원이 있다면 난폭하게 굴러 기분도 풀릴 테지만, 대상이 되는 사람이 없으면 마구잡이로 물건에 화풀이를 한다"는 등의 관찰 결과가 제시되었다.[20]
6. 사건에 대한 대응
일본 경시청은 밤 10시쯤 경찰 기동대를 최대한 동원하여 군중들의 파괴 행위를 막고 역무원과 열차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각 역장에게는 역무원들이 현장에 대기하도록 요청했다. 밤 11시 30분경에는 사건 확대를 막고 열차 운행을 확보하며, 악질적인 폭동 가담자는 체포 및 검거할 방침임을 모든 경찰관에게 알렸다. 또한, 각 교통 회사에 전철과 버스 등의 임시 운행과 막차 시간 연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하여 큰 대응을 할 수 없었고, 군중에 겁을 먹은 역무원들이 도망치는 일도 많았다.[22]
6. 1. 소프트웨어 측면
별노는 혼잡으로 인한 위험이 예상되는 경우, 운행 자체를 중단할 것을 제안하며, 아래와 같은 장단점을 제시하고 있다.[14]장점 | 단점 |
---|---|
별노는 상기 제안의 채택 여부에 대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의 선택 문제”라고 결론짓고 있다.
6. 2. 하드웨어 측면
국철은 수도권 국전 폭동 사건 전부터 "통신 운용 체계 현대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당시 철도 전화망은 주요 교환소는 자동화되었지만, 그 외에는 여전히 수동 작업이 많아 정보 전달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22] 1972년 3월, 국철은 각 노조에 계획안을 제시했고, 1년간의 협상을 거쳐 사건 직후인 1973년 4월 17일에 타결되었다. 이 계획은 본 사건과 관련하여 주목받았다.[21]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21]
항목 | 내용 |
---|---|
전신 중계 업무 자동화 | 1973년 9월 1일을 목표로 추진. |
데이터 교환 장치 도입 | 여객, 화물, 운전, 경리 등의 일일 보고 전송에 사용. 전신 업무 대체 포함. (예산 제약으로 대부분의 관리국은 데이터 단말기만 설치, 지방 한정 데이터 처리를 위한 컴퓨터 설치 요구는 기각) |
전화 자동 교환화 추진 | 1973년 3월 말 기준 73% 완료. 최근 5년간 자동화 속도 저하로 투자 강화. |
전화 정보 안내 강화 | 안내 내용을 여러 종류로 분류하고, 안내 요원에게 친절한 안내 교육 실시. |
PBX 강화 | 모든 관리국에 설치. 전화 정보 안내 강화와 연동. |
『철도 통신』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우려를 표명했다.[22]
7. 사건에 대한 다양한 반응
수도권 국전 폭동에 대한 반응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특히 관부연락선 관련 지역에서는 수도권과 다른 반응이 나타났다.
관부연락선은 엄격한 정원 관리로 인해 철도 환승 시 수송력 차이가 발생했고, 성수기에는 잔여 승객이 생기는 일이 잦았다. 하코다테 수습에 참여한 공안 직원에 따르면, 하코다테와 센다이 승객들은 현장 직원에게는 강경했지만, 공안 직원에게는 동정적이었다고 한다.[20]
7. 1. 지역별 반응 차이
관부연락선은 당시 선박 정원 관리를 엄격하게 시행했고, 서비스 정원의 개념 때문에 철도에서 환승하면서 정원 이상 승차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수송력에 차이가 생겼다. 특히 성수기에는 잔여 승객이 발생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고 하코다테에서 수습에 나섰던 공안 직원이 증언하고 있다.[20] 하코다테의 경우, 현장 직원들에게는 강경한 승객들도 수도권과는 달리 공안 직원들에게는 "이 사람들은 경비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매달아 혼내도 소용없다"와 같이 동정적이었다고 한다.[20] 센다이에서도 "상오(上尾)처럼 해주겠다", "책임자를 내놓아라"고 몰려드는 사람들도 공안관에게는 동정적이었다.[20]8. 피해 상황
1973년 4월 26일, 일본국유철도(국철)는 이소자키 에이(磯崎叡) 총재를 통해 중의원 운수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6][7]
항목 | 피해 내용 |
---|---|
총 손해액 | 9.6억엔 |
차량 | 1억엔 |
건물 | 1.2억엔 |
전기 기계 설비 | 4.1억엔 (컴퓨터 등) |
자동매표기 | 1.3억엔 (도쿄도 배치 약 3000대 중 208대 사용 불능) |
승차권 환불 | 2억엔 |
철도홍제회 손해 | 수천만 엔 (매점 파괴 등) |
화물 감송량 | 47만 톤 (생활필수품 10만 톤 포함) |
부상자 | 2,000명 이상 (국철 직원, 폭동 참가 군중, 통행인, 주변 주민 등) |
- 차량 피해 현황
- * S급: 운행 불능으로 폐차 후 보충 제작 (여러 편성)
- * A급: 공장 수리가 필요한 차량 23편성
- * B급: 전차구(電車区)에서 약 1주일 내 수리 가능한 차량 36편성
- * C급: 유리 파손 등 하루 내 수리 가능한 차량 32편성
우에노, 칸다, 유라쿠초역 등 3개 역의 미도리노마도구치는 한동안 영업이 중단되었고, 지정석 승차권은 아키하바라역, 도쿄역, 신바시역에서 판매되었다. 칸다 역은 5월 초에 영업을 재개했으나, 다른 두 역은 재개 시점이 불확실했다. 대규모 차량 피해로 인해 당분간 배차 간격 조정이 불가피했다.
전국적인 파업 지속으로 인해, 운수성은 도로운송법 제34조에 의거, 4월 27일부터 일반 운송업체에 생활 필수품 대행 수송을 명령했다. 이는 1951년 법 제정 이후 최초의 사례였다. 평상시 국철의 신선식품 급송 열차(하루 19편)를 화물자동차(트럭)로 대체하려면 하루 500대가 필요하며, 트럭 운임은 국철의 약 10배인 하루 1억엔에 달했다. 이 차액은 국가가 보상했다.[8]
폭동과 사보타주(4월 27일에도 파업 실시)는 1973년 골든위크 수송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연휴 초반에는 열차 운휴와 여행 취소가 잇따라 전년 대비 여객 수가 크게 감소했고, 여행 거리도 짧아지는 경향을 보였다.[9]
9. 사건 이후의 평가
니카이도 스스무 내각관방장관은 이 사건에 대해 담화를 발표하여, "국민의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는 불법적인 노동쟁의 행위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이제 명확하다", "민주주의 체제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며, 정부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10]
이소자키는 이 사건에 따라 4월 25일 정오, 국철노동조합(国労), 동일본철도노동조합(動労)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전달했다.[10]
귀 조합은, 거듭되는 당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보타주를 실행하고 있으나, 이 때문에, 수송이 전국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워지고,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도쿄의 국철 구간에서는, 수송의 혼란이 승객들의 분노를 사, 어젯밤의 대혼란 이후 열차의 전면적인 운행 중지라는 이상 사태를 낳았고,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운행을 재개할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일본어
이러한 것은, 국철이 시작된 이래 전례 없는 불상사이며, 이제 국철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완전히 상실되어, 이대로라면 국철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일본어
이제 노사가 대립을 넘어서, 이 사태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귀 조합의 잇따른 노동쟁의 행위가 이러한 최악의 사태를 초래한 것에 대해, 이번 기회에 귀 조합이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고 솔직하게 반성하고, 불법적인 노동쟁의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일본어
이러한 상황에서, 이 이상 사보타주를 계속하고, 26일 이후 파업에 돌입하는 일이 된다면, 그 결과 어떤 사태에 이를지 예측할 수 없는 곳입니다.일본어
당시 중의원 운수위원회에서는 국철 운임 인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4월 25일에는 지역 공청회가 개최되어, 찬성, 반대 양측 모두 파업과 준법 투쟁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11]
4월 25일, 국철노동조합(国労)은 성명을 발표하여 "승객의 혼란은 국철노동조합(国労), 춘투 공투의 춘투를 파괴하려 하고, 투쟁 방해를 노린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철노는 "이 혼란은 국철노동조합(国労), 동일본철도노동조합(動労)의 불법 행위에 대한 국민 대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며, 이 폭주를 방치하고, 직장의 질서를 붕괴시킨 국철 당국의 책임은 극히 중대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12]
참조
[1]
뉴스
乗客、各駅で暴れる 窓ガラス割り、運転士にも乱暴 無残な電車や駅事務室 24日の首都圏管内
交通新聞
1973-04-26
[2]
뉴스
国労は"順法"を回避 24日夜首都圏国電各駅 旅客の怒りが爆発
交通新聞
1973-04-26
[3]
뉴스
24日 二社は終夜運転
交通新聞
1973-04-26
[4]
뉴스
国電ストップで乗客私鉄に殺到 入場制限や階段止め 首都圏各駅の暴動 ふくれ上がるターミナル駅
交通新聞
1973-04-26
[5]
뉴스
首都圏 国電ほぼ全休/逮捕は百三十八人
朝日新聞
1973-04-25
[6]
웹사이트
衆議院会議録 第71回国会 運輸委員会 第21号 発言番号4 日本国有鉄道総裁 磯崎叡
https://kokkai.ndl.g[...]
[7]
뉴스
国鉄損害は約10億円 首都圏各駅の"4・24騒動"
交通新聞
1973-04-27
[8]
뉴스
運輸省が代行輸送を 生鮮食料品の緊急対策決定
交通新聞
1973-04-26
[9]
간행물
旅客局営業課「大型連休輸送の残したもの」
国鉄線
1973-07
[10]
뉴스
磯崎国鉄総裁 再び中止を申入れ
交通新聞
1973-04-26
[11]
뉴스
国鉄関係法案 仙台、高松で地方公聴会 順法、ストに強い不満
交通新聞
1973-04-27
[12]
뉴스
国労、鉄労の見解は「国労が声明」
交通新聞
1973-04-27
[13]
서적
鉄道歴史読本
朝日文庫
2009-03
[14]
간행물
4.24事件の反省
国鉄線
1973-08
[15]
텍스트
[16]
간행물
首都圏における当面の課題
鉄道経営
1973-09
[17]
텍스트
[18]
텍스트
[19]
텍스트
[20]
간행물
お客さまの安全をまもって
国鉄線
1973-07
[21]
간행물
通信運用体系近代化
1973-06
[22]
간행물
今日の話題
197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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