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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연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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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의 연합주의는 아일랜드가 영국과의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이념이다. 1800년 연합법 이후 개신교 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발전했으며, 가톨릭 해방과 자치법안 시도를 거치며 얼스터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1912년 자치 위기 이후 얼스터 서약을 통해 연합주의자들의 결속을 다졌고, 아일랜드 분단 이후 북아일랜드에서 지배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인구 구성의 변화, 브렉시트, 북아일랜드 의정서 등으로 인해 연합주의는 도전을 받고 있으며, 1998년 성금요일 협정 이후 권력 공유를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현재는 소수 블록으로 입지가 좁아지고 있으며,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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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연합주의
지도
개요
유형정치 이념
정치적 위치우익
반대아일랜드 민족주의
역사적 맥락
기원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관련 사건1798년 아일랜드 반란
아일랜드 합병법 (1800년)
아일랜드 자치 운동
부활절 봉기
북아일랜드 분쟁
굿 프라이데이 협정
핵심 신념
핵심 원칙영국과의 연합 유지
영국 문화 보존
아일랜드 민족주의 반대
헌법주의
법과 질서
목표영국과의 정치적, 헌법적 연대 유지
지역별 연합주의
북아일랜드북아일랜드 연합주의
아일랜드 공화국소수 민족주의
관련 단체
정당민주연합당
얼스터 연합당
전통 연합주의자 음성
진실된 얼스터인 희생자 당
준군사 조직얼스터 의용군
얼스터 방위 협회
관련 이념
관련 이념영국 보수주의
로열리즘 (아일랜드)
오렌지주의
얼스터 브리티시
기타
관련 항목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인의 관점
영국령 아일랜드
아일랜드 분할
북아일랜드의 미래
민족주의

2. 아일랜드 연합주의의 기원과 발전 (1800년-1920년)

2. 1. 1800년 연합법과 그 영향

아일랜드 왕국 (1542–1800)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개신교도 공직자들은 아일랜드 애국자를 자처하며 더블린 의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1][2] 이들은 기득권 성공회 교인 (앵글로-아일랜드 "개신교 지배층") 토지 소유주로 제한되어, 비국교도가톨릭 다수에게는 동등한 권리와 공직을 거부했다. 이러한 의회 애국주의는 미국 독립 전쟁 중 아일랜드 의용군 결성과 함께 절정에 달했고, 1782년 런던으로부터 의회의 입법 독립을 확보했다.[1][2]

북동부에서는 장로교 상인, 상인, 소작농들이 더블린 성 행정부와 대표성이 없는 의회에 항의했다.[3] 프랑스 혁명의 지원을 기대하며, 이들은 아일랜드 연합인을 결성하여 "가톨릭, 개신교, 비국교도"의 혁명적 연합을 추구했다.[4] 그러나 1798년 봉기가 실패하고, 남부에서 개신교 왕당파에 대한 반군의 만행이 보고되면서 이들의 결의는 꺾였다.[5]
토머스 로빈슨의 1798년 밸리내힌치 전투 세부 묘사. 정부 요먼리가 식료품점 주인인 연합 아일랜드인 반군 휴 맥컬로치를 교수형에 처하려 한다.


아일랜드 반란 진압과 프랑스 개입 저지에 어려움을 겪은 영국 정부는 그레이트브리튼과의 연합을 결정했다. 가톨릭 해방[6] 조항이 삭제된 연합법이 더블린 의회를 통해 추진되었다.[7] 아일랜드 행정부는 더블린에 유지되었지만, 대표는 웨스트민스터로 이전되었다.

장로교 북동부에서는 아일랜드 의회의 폐지를 크게 애도하지 않았다. 대표성 확대와 부패 억제 요구를 거부한 의회의 몰락을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5]

2. 2. 가톨릭 해방과 개신교 통합

1829년 가톨릭 해방은 가톨릭 신자를 의회에 받아들여, 개신교가 독점하던 지위와 영향력에 침식을 허용하였다.[8][9] 가톨릭 신자들이 재산 및 전문직 계층으로 재등장하면서 영국 내 소수 집단으로 통합할 기회가 사라졌을 수 있다. 1830년 가톨릭 협회의 지도자인 다니엘 O'코넬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연합을 폐지하고 1782년 헌법에 따라 아일랜드 왕국을 재건하는 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해방의 안전 보장은 재산 선거권의 기준을 다섯 배로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O'코넬의 북부 개신교 동맹인 조지 엔서는 이것이 가톨릭 포용과 민주적 개혁 사이의 연결을 끊는다고 지적했다.[10][11]

얼스터에서는 O'코넬의 호소에 대한 저항이 종교 부흥으로 강화되었다. "개인적 증언"을 강조하는 신 개혁은 다양한 개신교 교파 간의 교회 차이를 초월하는 것처럼 보였다.[12] 동시에 자체적인 신앙 부흥을 겪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훨씬 더 의식적인 분리 의식"을 시작했다.[13][14] 주요 장로교 복음주의자인 헨리 쿡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개신교 통일을 설교했다. 1834년, 다운셔 제3대 후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개최한 대규모 시위에서 쿡은 두 주요 개신교 교파(성공회와 장로교) 간의 "기독교 결혼"을 제안했다. 나머지 차이점을 제쳐두고, 그들은 모든 "공통 안전 문제"에 대해 협력할 것이다.[15]

1899년 헨리 쿡의 1841년 연설 "다니엘 O'코넬에게 답하다"의 1페니 인쇄본


장로교 투표자들은 개혁 성향의 휘그당 또는 나중에 등장한 소작인 권리 및 자유 무역 자유주의자를 보수당과 오렌지 결사 후보, 그리고 토지를 소유한 지배층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16][17] 그러나 O'코넬의 폐지 운동의 아일랜드 정당 정치적 후계자들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대표성과 영향력을 얻게 되면서, 쿡의 통일 호소는 범개신교 연합주의의 점진적인 등장에서 경청되었다.[12]

2. 3. 아일랜드 의회당의 도전과 토지 전쟁

184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까지, 휘그당과 토리당을 포함한 여러 정부들은 아일랜드의 농업 조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거부했다. 낮은 수준의 소작농-지주 전쟁 문제는 1852년 웨스트민스터로 불거졌는데, 전 아일랜드 소작농 권리 연맹이 48명의 국회의원을 웨스트민스터로 보내 무소속 아일랜드당으로 활동하도록 도왔다.[25] 청년 아일랜드 출신 게번 더피가 북부와 남부 연맹이라고 부른[18] 단체는 곧 해체되었다. 남부에서는 교회가 가톨릭 의원들이 무소속 야당이라는 약속을 깨고 정부 직책을 수락하는 것을 승인했고,[19][20] 북부에서는 개신교 소작농 권리 옹호자인 윌리엄 샤먼 크로퍼드와 제임스 매크나이트의 선거 운동이 오렌지 결사에 의해 방해받았다.[21]

1867년 개혁법 이후 연합주의자들에게 더 중요한 도전이 나타났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제시한 "자치" 타협안에 더 열린 유권자들이 나타났다.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 내에 머물되, 더블린에 있는 의회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22][23] 1872년 비밀 투표법과 도시의 대표성 증가로 토지 소유주와 그들의 대리인의 선거 영향력이 줄었고, 1874년 영국 총선에서 자치 연맹의 승리에 기여했다.[24] 59명의 의원이 웨스트민스터로 돌아와 아일랜드 의회당(IPP)으로 활동했다.[25]

자유당 총리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은 첫 번째 내각(1868-1874)에서 1869년 아일랜드 교회 분리와 1870년 토지 소유주 및 소작인(아일랜드)법 1870을 도입하며 화해를 시도했다. 보수적인 법학자들은 두 조치 모두에서 연합의 통합성에 대한 위협을 감지했다. 교회 분리는 연합법 제5조에 따라 영국과 아일랜드 모두에 "하나의 성공회 교회"를 약속했지만 (얼스터 개신교 방어 협회는 계약 위반을 주장),[26] 소작농 보상 및 구매에 대한 조항은 미약했지만, 당시 잉글랜드의 재산권 개념과 상반되는 아일랜드만의 별도 농업 체제를 만들었다.[27]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토지 연맹의 압력을 받아 법안을 작성하고 있다. 1881년 풍자화


1870년대 장기 불황 동안 토지 전쟁이 격화되었다. 1879년부터는 남부 개신교도인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이끄는 아일랜드 국민 토지 연맹에 의해 조직되었다.[28] 1881년, 토지법 (아일랜드) 1881에서 글래드스턴은 세 가지 F—공정한 임대료, 자유로운 판매, 영구적인 토지 보유—를 양보했다. 아일랜드 보수당은 이 조치에 반대하지 않았는데, "토지 불만이 얼스터와 아일랜드 나머지 지역 간의 불화의 끈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연합에 위험이 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29] 동부 카운티의 개신교도들은 소작농 권리 운동의 지도부에 발리머니의 제임스 아머 목사처럼 연합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을 받아들였고,[30], 한편 주의 서부(아르마 군, 케이번 군, 페르마나 군, 타이론 군)에서는 오렌지 결사 회원들조차 토지 연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31][32]

1884년 인민 대표법 이후 남성 가구주에게 거의 보편적인 투표권 부여로 아일랜드의 유권자 수는 세 배로 늘렸다. 1885년 영국 총선에서는 파넬이 이끄는 IPP가 85명의 의원을 배출했다(얼스터에서 보수당과 자유당이 연합주의 표를 분열하여 17명 포함).[33] 자유당이 아일랜드 의석 15석을 모두 잃은 글래드스턴은 하원에서 그들의 지지를 통해서만 두 번째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2. 4. 글래드스턴의 자치 법안과 연합주의자들의 반발

1886년 6월,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자신이 주로 초안을 작성한 1886년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제출했다.[34] 그러나 연합주의자들은 더블린 입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대중 투표의 비중을 줄이려는 시도에도 설득되지 않았다.[35] 그들은 헌법 구성과 관계없이 아일랜드 의회가 ("미국계 아일랜드인"의 지원을 받아) 런던의 "제국 의회"와 갈등을 일으킬 것이며, 이는 "완전한 분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36][37][38]

''God Save the Queen'', ''Erin Go Bragh'', 얼스터 연합주의자 협약, 벨파스트, 1892


상류층과 중산층은 영국과 제국에서 "군대, 공공 서비스, 상업 등에서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연결이 약해지거나 끊어질 경우 배제될 수 있는 광범위한 수익성 있는 직업"을 잃을 것을 우려했다.[25] 북부의 주요 수출 산업(섬유, 엔지니어링, 조선) 종사자들에게도 영국과의 연결은 매우 중요했다.[39][40] 그러나 아일랜드 자치 반대의 가장 대중적인 이유는 오렌지 기사단[41]의 "대부흥"에서 나온 "자치 통치는 곧 로마 통치를 의미한다"는 메시지였다.[42]

북부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공장과 작업장에 유입되면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한때 주로 시골(그리고 성공회의) 오렌지 기사단은 개신교 노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8][43] 글래스고, 맨체스터, 리버풀 등 아일랜드 이민을 경험한 다른 영국 중심지들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고, 애국주의자 반 복귀 연합에서 조직된 연합주의자들이 이를 연결하려 했다.[44][45][46] 글래드스턴이 자치 통치로 전환하면서 오렌지 기사단과 거리를 두었던 정치인들은 이제 그들의 호전성을 받아들였다. 에드워드 손더슨 대령은 오렌지색 띠를 착용하고 "오렌지 협회가 아일랜드에 만연한 무정부 상태와 반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했다.[47]

1886년 2월, 랜돌프 처칠 경은 벨파스트에서 열린 반복귀 연합의 "거대한 회합"에서 영국의 보수당원들이 자치 통치에 저항하는 데 충성주의자들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확신시켰고, "얼스터는 싸울 것이고, 얼스터는 옳을 것이다"라는 문구를 만들었다.[46]

글래드스턴의 정당은 자치 통치 문제로 분열되었고, 하원은 법안에 반대했다. 1891년, 얼스터의 자유주의 연합당은 아일랜드 연합 동맹에 참여했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보수당 원내총무를 받았다.[48]

1892년,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분열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자들은 글래드스턴의 세 번째 내각 구성을 도왔다. 그 결과 두 번째 자치법안이 제출되었으나, 더 발전되고 잘 조직된 얼스터의 반대에 부딪혔다. 자유주의 연합당의 토마스 싱클레어가 조직한 벨파스트에서 대규모 얼스터 연합주의자 협약이 열렸는데, 언론은 그가 과거 오렌지주의를 비판했던 인물이라고 언급했다.[49] ''노던 휘그''는 "60년대의 오래된 소작인 권리 옹호자들... 앤트림의 튼튼한 개혁가들... 항상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다운의 유니테리언,... 카운티의 구식 토리지... 현대 보수당원... 오렌지주의자들... 이 모든 다양한 요소들—휘그, 자유주의자, 급진주의자, 장로교인, 성공회, 유니테리언 및 감리교... 한 사람처럼 뭉쳤다."라고 보도했다.[50]

가톨릭 신자에 대한 언급은 화해적이었지만, 협약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우리는 현재의 위치를 영국의 통합 부분으로 변함없이 유지하고... 제국 의회에서 우리를 빼앗아갈 어떠한 조항의 통과에도... 반대한다... 토지 동맹의 범죄와 폭력에 책임이 있는 자들... 그들 중 많은 수가 성직자 지배의 준비된 도구임을 보여준 의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기록한다."[51]

아일랜드 국회의원을 허용하는 두 번째 자치 법안은 하원에서 근소한 다수로 통과되었지만, 보수적인 귀족원에서 부결되었다. 이후 보수당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2. 5. 건설적 연합주의

1886년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토리 후계자인 솔즈베리 경은 자신의 정부가 "불공정한 잠에 빠진 자치 통치를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믿었다.[52] 1887년 더블린 성은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할 수 있는 상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아일랜드 담당 국무 장관으로서 솔즈베리의 조카 아서 발푸어는 건설적인 방침을 결정했다. 그는 일부 사람들이 보기에 친절함으로 자치 통치를 없애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53]

빈곤을 완화하고 이민을 줄이려는 명확한 목적으로 발푸어는 서부의 혼잡 지구에서 공공 사업뿐만 아니라 지역 수공예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아일랜드 혼잡 지구 위원회(Congested Districts Board for Ireland)의 깃발, 1893–1907
전 사우스 더블린의 연합주의 국회의원 호레이스 플런켓이 이끄는 새로운 농업 및 기술 교육부는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계층의 여론과 소통하고, 그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에 크게 의존하는 것"을 목표로 발표함으로써 아일랜드 위원회의 전통에서 벗어났다.[55] 이는 새로운 독립 소규모 토지 소유주 계급의 출현에 중요한 기관이 될 낙농 협동 조합인 크리머리를 지원하고 장려했다.[52]

자유 연합당의 지원을 받아 솔즈베리가 1895년 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더 큰 개혁이 이어졌다. 1896년 토지법은 파산한 부동산에만 적용되지만, 처음으로 임차인에게 강제 매각의 원칙을 도입했다. 아일랜드 보수주의자들의 선두 대변인이자 더블린 변호사인 에드워드 카슨 경은 "정부가 사회주의에 가까운 혁명가인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55] 1898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로 일거에 이전되면서 지방 정부에 대한 지배권을 먼저 포기해야 했던 옛 지주 계급은 1903년 윈덤 토지법에 의해 은퇴 조건이 결정되었다.[38]

이것은 심지어 북부에서도 농업적 긴장을 줄였지만, 그 자체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1906년, 쫓겨난 스코틀랜드 소작농의 아들인 토마스 러셀 경은 아일랜드 연합주의 동맹에서 사우스 타이론에서 얼스터 농부 및 노동자 연합의 챔피언으로 웨스트민스터로 복귀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과 결별했다.[56][57] 코크 시 국회의원인 윌리엄 오브라이언과 함께 러셀은 약 40,000개의 1에이커 노동자 소유 코티지를 건설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58]

건설적인 1890년대 동안, 그리고 자유주의 정부가 자치 통치에 대한 전망을 되살리기 전에, 연합주의자들은 아일랜드 문화에 대한 관심에 더 편안해 보였다. 게일어 연맹의 첫 번째 얼스터 지부는 1895년 동 벨파스트에서 목사 존 밥티스트 크로지어와 박사 존 세인트 클레어 보이드를 후원하여 결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연합주의를 옹호했고, 오렌지 교단의 수장인 리처드 러틀리지 케인 목사도 참여했다.[59][60]

그러나 많은 아일랜드 연합주의자들에게 조지 와이덤의 수석 비서 직은 "마지막 지푸라기"였다.[61] 1905년 2월, 그들은 그의 차관인 가톨릭교도인 앤서니 맥도넬 경이 선출된 회원과 지명된 회원을 모두 포함하는 아일랜드 평의회와 관련된 행정 권한 이양 계획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총리인 발푸어는 그 계획을 부인해야 했고, 공모를 부인하라는 압박을 받은 와이덤은 사임했다.[62] 이 소란은 12월에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에 복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5]

2. 6. 가톨릭 연합주의자

가톨릭교가 헌법적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동일시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연합을 지지하는 가톨릭 전통도 존재했다.[63][64] 그러나 이들은 영국 내 자치권 부여가 분리로 이어질 것이라는 대다수 연합주의자의 확신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자치 통치 및 분리주의 정치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개신교도와 같은 인물을 연합주의에 제공하지는 못했다.[65]

1884년 개혁법 이전에 가톨릭 젠트리 출신의 소수 아일랜드 보수당원이 하원에 진출했다. 데니스 헨리 경(1864-1925)은 1916년 보궐 선거에서 사우스 런던데리 의석을 얻어 얼스터에서 연합주의 선거구를 대표하는 최초의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1918년에도 그 의석을 유지하여 미래의 북아일랜드 대법원장이 되었다.[66]

3. 얼스터 연합주의의 부상과 분단 (1905년-1920년)

3. 1. 얼스터 연합 평의회와 노동자 계급

얼스터 연합 평의회(Ulster Unionist Council, UUC)는 1905년에 설립되어 북부의 연합주의자들을 결집시켰으며, 오렌지 결사(Orange Order)도 포함되었다.[67][55] 그 전까지 연합주의는 주로 영국-아일랜드 귀족들을 지지했으나, UUC는 제임스 크레이그, 초대 비스카운트 크레이가본(James Craig) 대위가 이끌면서 북부의 고용주들이 실제 정치 및 조직 업무를 맡았다.[67][55]

1867년 개혁법(Reform Act 1867)에 따른 새로운 노동자 투표(workingman's vote) 행사로, 1868년 벨파스트의 왕당파는 자체 "보수당"을 선택하고 복음주의 오렌지당원인 윌리엄 존스턴 (아일랜드 정치인)(William Johnston)을 웨스트민스터로 보냈다. 존스턴은 1874년 공장법(labour protection), 세입자 권리(tenant right), 1872년 비밀투표법(the secret ballot), 여성 참정권을 제안하고 찬성했다.[69][70] 1902년, 사우스 벨파스트 (영국 의회 선거구)의 국회의원이었던 토마스 슬론은 벨파스트 개신교 협회(Belfast Protestant Association) 후보로, 연합주의 지도부의 "모피 코트 여단"을 비판한 노동 조합원이었다.[68][71] 로버트 린제이 크로포드(R. Lindsay Crawford)와 독립 오렌지 결사(Independent Orange Order)와 함께 슬론은 신디컬리즘(syndicalist) 제임스 라킨이 이끄는 1907년 벨파스트 파업(1907 Belfast Dock strike)을 지원했다.[68][71]

1914년 봄, 2천 명의 노동자들이 서명한 선언문은 얼스터가 "귀족의 음모"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에드워드 카슨 경이 연합을 위한 전투를 이끌었다면 "그것은 우리, 즉 노동자, 얼스터의 국민, 민주주의자들이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73] 서명자 대다수는 영국 기반의 노동 조합에 조직되었을 것이며, 1906년 노동 분쟁법(Trade Disputes Act 1906), 인민 예산(People's Budget 1910), 1911년 국민 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 1911)과 같은 개혁 조치에서 영국 노동의 증가하는 정치적 무게를 지적할 수 있었다.[74]

3. 2. 연합주의와 여성 참정권 운동

얼스터 자치법 반대 서약 선언 서명, "얼스터 데이" 1912


1912년 9월, 홈룰에 반대하는 얼스터의 동원령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연합주의 지도부는 남성만으로는 연합주의자들의 결의를 대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성들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 대신, 동의 선언문에 서명하도록 요청받았다. 총 234,046명의 여성이 얼스터 여성 선언문에 서명했고, 237,368명의 남성이 엄숙한 동맹과 서약에 서명했다.[78]

연합주의 여성들은 1886년 최초의 홈룰 법안이 발의된 시점부터 정치적 캠페인에 참여했다.[79] 일부 여성들은 서프러제트로 활동했다. 반 홈룰 자유주의자이자 여자 교육 운동가였던 이사벨라 토드는 초기 선구자였다. 그녀가 이끄는 북아일랜드 여성 참정권 협회의 끈질긴 로비 활동으로 1887년 벨파스트에 새로운 도시 지위의 지방 선거권을 부여하는 법안(하원에서 윌리엄 존스턴이 주도)이 통과되었고,[70] 남성이 아닌 개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이는 아일랜드의 다른 지역에서 여성들이 지방 선거에서 투표권을 얻기 11년 전의 일이었다.[80]

1913년 9월, 엘리자베스 맥크라켄은 "연합주의와 여성 참정권의 결합"을 축하했다.[83] 무장 단체인 여성 사회 정치 연합 (WPSU)이 얼스터에서 조직을 시작할 것이라는 보고가 있은 후, 얼스터 연합주의 위원회 비서는 UWUC에 얼스터 임시 정부의 초안 조항에 여성 투표권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렸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더블린 의회에 관해서는 그러한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이다.[84][85]

그러나 1914년 3월, 카슨은 여성 참정권 문제를 연합주의자들에게 너무 분열적인 문제로 판단했다. 그 후 릴리안 메트게가 리스번 대성당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을 포함하여 연합주의 소유 및 관련 재산에 대한 일련의 방화 공격이 발생했다.[86][87] 이후 재판에서 WPSU 조직자인 도로시 에반스는 당시 얼스터 자원군에게 독일제 소총을 무장시키고 있던 제임스 크레이그가 동일한 무기 및 폭발물 혐의로 출두하지 않은 이유를 밝히라고 요구하여 소란을 일으켰다.[85]

1914년 8월, 얼스터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유럽 전쟁 기간 동안 선동을 중단했다. 그 보상으로 1918년 여성 참정권과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부여된 지 6년 후) 1928년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졌다.

3. 3. 1912년 자치 위기와 얼스터 서약

1911년 자유당 행정부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국회의원들에게 다시 의존하게 되면서, 1912년 총리 H. H. 애스퀴스는 제3차 자치법안을 제출했다. 이전 법안들보다 더 관대한 이 법안은 처음으로 아일랜드 의회에 책임을 지는 행정부를 부여할 예정이었다.[88] 이 법안은 하원에서 10표 차이로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는 부결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인민 예산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로 촉발된 위기의 결과로 상원은 이제 지연 권한만 갖게 되었고, 자치법은 1914년에 법으로 제정될 예정이었다.

"얼스터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있어왔다. 1843년 ''노던 위그''는 인종("인종")과 이해관계의 차이가 아일랜드의 대영 제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다면, 벨파스트를 자체 "독자적인 왕국"의 수도로 하여 북부와 남부의 분리를 쉽게 주장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89] 1886년 제1차 자치법안에 대한 대응으로, 급진적인 연합주의자들도 "얼스터의 개신교 지역은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 자치 통치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과 동일한 근거에서"라고 주장했다.[90] L. S. 아메리는 ''자치 통치에 반대하는 주장''(1912년)을 요약하면서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국가를 구성한다면, 얼스터도 또한 국가이다"라고 주장했다.[92]

자치 통치의 최종 제정을 앞두고, 에드워드 카슨은 이 주장을 압박했다. 1912년 9월 28일, 얼스터 데이에 그는 얼스터의 엄숙한 동맹과 서약에 벨파스트 시청에서 서명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 서약은 서명자들을 "영국 연합 왕국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의 동등한 시민권을 수호하고, 아일랜드에 자치 의회를 세우려는 현재의 음모를 격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에 묶었다.[93][94]

1913년 1월, 카슨은 얼스터의 배제를 선언하고 최대 10만 명의 서약자들을 훈련시키고 무장한 얼스터 의용군으로 모집할 것을 요구했다.[95] 9월 23일, 두 번째 얼스터 데이에 그는 크레이그가 조직한 임시 정부의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자치 통치가 강요된다면 "우리는 정복된 공동체로 통치될 것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92] 1914년 7월까지 얼스터 서약은 연합 방위 연맹을 통해 알프레드 밀너가 조직한 영국 서약에 의해 보완되었다. 거의 2백만 명의 서명자들이 얼스터 주민들이 "영국 연합 왕국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효과적일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지지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다.[3][96]

오렌지 오더 깃발에 1912년 얼스터 서약 서명자인 카슨이 묘사되어 있다.

3. 4. 아일랜드 분단

1914년 8월 4일, 영국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몇 주 후 자치법안이 왕실 재가를 받았지만 유럽에서의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시행은 보류되었다.[97] 제1차 세계 대전 중, 민족주의 급진파들은 영국이 1916년 부활절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한 파업을 진압하는 것을 비판했다.[97] 봉기 이후와 징병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캠페인 과정에서 아일랜드 의회당(IPP)의 신뢰도는 소진되었다.[97]

1918년 12월 쿠폰 선거에서 신 페인은 민족주의 선거구에서 IPP를 거의 완전히 대체했다.[98] 1919년 1월, 신 페인 국회의원들은 더블린에서 데일 에이렌으로 모여 "영국 수비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북동부 6개 카운티에서는 연합주의자들이 29석 중 22석을 차지했다.

벨파스트에서 가톨릭 신자에 대한 폭력과 직장에서의 추방, 상품 보이콧은 헌법적 분단에 앞서 "진정한 분단"을 강화했다.[92] 에이먼 데 발레라는 1920년 8월 "각 카운티가 원한다면 공화국에서 투표로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99]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벨파스트북아일랜드 의회를, 섬의 나머지 26개 카운티에는 더블린에 의회를 규정하여 두 개의 하위 의회를 설치했다. 제임스 크레이그는 3개 카운티에서 신 페인이 정부를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인정했다.[100]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의 조건에 따라, 26개 카운티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대영 제국 내에서 캐나다와 동일한 헌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101]

제임스 크레이그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북부가 평화를 위해 자치 정부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지만,[104] 벨파스트 조선소 노동자들에게는 "지상의 어떤 권력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105] 크레이그는 별도의 의회를 원하지 않지만, 6개 카운티에 "정부의 모든 부대 장비"를 갖추면 미래의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를 대다수의 의지에 반하여 범 아일랜드 조치로 밀어붙이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인정했다.[106] 1936년 얼스터 연합 협의회는 "자체 의회가 없는 북아일랜드는 특정 영국 정치인들이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최종 합의를 위한 또 다른 입찰을 할 수 있는 끊임없는 유혹이 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107]

4. 북아일랜드 연합주의 정권 (1921년-1972년)

4. 1. 웨스트민스터 정치로부터의 배제

북아일랜드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구성되었지만, 북아일랜드 정부는 남부에 부여된 캐나다식 자치령 지위의 몇 가지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110] 오타와처럼, 벨파스트에는 양원제 의회, 내각, 총리 (제임스 크레이그 경)가 있었고, 영국 군주는 총독에 의해 대표되고 추밀원의 자문을 받았다.[110] 이는 영국 내 자치 행정부가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직접적인 관할권 밖에 있는 왕관 아래에 구성된 국가를 시사했다.[110]

북아일랜드 정부의 문장 (1924–1974). 스코틀랜드 사자와 아일랜드 고라니가 방패를 양쪽에 배치.


연합주의자들은 홈룰 투쟁에서의 승리가 부분적인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32개 아일랜드 카운티 중 26개가 연합에서 이탈했을 뿐만 아니라, 남은 6개 카운티 내에서 연합주의자들은 "영국 정부가 런던에서 완전하고 명백하게 연합 왕국의 일원임을 인정하도록 할 수 없었다".[109][103]

아일랜드 전체가 웨스트민스터 정치에서 제거되고 있다는 인상은 정부와 야당이 6개 카운티에서 조직하거나 표를 얻기 위해 선거 운동을 거부함으로써 강화되었다.[111] 보수당은 얼스터 연합당 의원들이 벨파스트 의회의 관할권 내 문제는 제기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합의에 따라 하원에서 당의 원내총무를 맡는 것에 만족했다.[111] 노동당은 1924년, 1905년에 북벨파스트에서 노동조합원 윌리엄 워커의 선거 대리인이었던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첫 번째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112] 1907년 맥도널드의 당은 벨파스트에서 첫 번째 당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1913년 홈룰 위기의 절정기에, 영국 노동당은 아일랜드 노동당에 맞서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1921년 이후에도 아일랜드 정당에 복종하는 정책이 유지되었다.[113]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정치의 역학 관계를 재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분열할 유인은 거의 없었다. 벨파스트 의회는 광범위한 입법 권한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당 경쟁을 유발할 수 있는 종류의 세금 및 지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부 수입의 주요 원천인 소득세 및 법인세, 관세 및 소비세는 벨파스트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114]

4. 2. 스토몬트 정부

스토몬트 의사당(Parliament Buildings, Stormont) 앞의 에드워드 카슨 경 동상


1960년대 후반의 위기 이전까지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는 사실상 단일 정당 정치였다.[115] 28년(1925-1953) 동안 토미 헨더슨은 북 벨파스트의 무소속으로 스토몬트에서 활동하며 연합주의 야당의 역할을 했다.[115] 1953년에는 북아일랜드 노동당(Northern Ireland Labour Party)이 연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후 세 개의 의석을 얻었다.[115]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부 후보들은 경쟁 없이 연합주의 유권자들에 의해 당선되었다.[116] 국민당 (북아일랜드)(Nationalist Party (Northern Ireland))은 첫 스토몬트 의회 (1921–25) 동안 의석을 차지하지 않았고, 이후 40년 동안 공식 야당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16]

제임스 크레이그에 의해 "개신교 의회"라고 선언되었고,[92] "실질적이고 확실한" 연합당 다수당을 가진[117] 스토몬트 입법부는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실제 권력은 "지역 정부 자체와 그 행정에 있었다": "극소수의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 구조였다.[120] 1921년에서 1939년 사이에 내각에서 활동한 사람은 12명뿐이었고, 일부는 지속적으로 활동했다.[120]

분권화된 의회를 위한 정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연합주의 정권은 초기에 개혁을 시도했다.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종교를 설립하거나 지원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에 따라, 1923년 교육법은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방과 후와 학부모의 동의하에만 허용하도록 규정했다. 찰스 스튜어트 헨리 베인-템페스트-스튜어트(Lord Londonderry), 교육부 장관은 자신의 야망이 개신교-가톨릭 교육의 혼합이라고 인정했다. 개신교 성직자, 학교 교장 및 오렌지 교도들의 연합은 성경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크레이그는 굴복하여 1925년 법을 개정했다. 한편, 가톨릭 지도부는 학교 이전 거부, 가톨릭 남학생 교사의 공통 훈련 기관에서 개신교인이나 여성과 함께 등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118]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바실 브룩(Basil Brooke) (브룩보로 경(Lord Brookeborough)) 치하의 연합 정부는 두 가지 개혁 약속을 했다. 첫째, "빈민가 정리" 및 공공 주택 건설 프로그램을 약속했다 (벨파스트 폭격 이후 당국은 많은 주택 재고가 전쟁 전부터 "거주 불가능"했음을 인정했다). 둘째, 북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조세 평형을 제공하는 제안을 수락했는데, 이는 북아일랜드의 전시 서비스를 위한 보상으로 이해되었으며, 제공되는 서비스의 평형을 맞추었다.[119]

1960년대에 연합주의는 영국의 전후 노동 정부의 추진력과 영국 재무부의 관대함 덕분에 북아일랜드는 발전된 복지 국가를 갖게 되었다. 1947년 교육법 (북아일랜드)은 중등 및 고등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혁신"했다. 의료 서비스 제공은 영국 국민 보건 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의 모델을 기반으로 확장 및 재구성되어 보편적인 접근을 보장했다. 1921년 이후 유지된 빅토리아 시대의 빈민법은 포괄적인 사회 보장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 1945년 주택법 (북아일랜드)에 따라 신규 주택 건설에 대한 공공 보조금은 잉글랜드와 웨일스보다 비례적으로 더 컸다.[120]

4. 3. 1960년대: 개혁과 저항

1960년대 테렌스 오닐 수상 아래 스토몬트 행정부는 외부 자본 유치 노력을 강화했다.[120] 새로운 인프라 투자, 노조와 협력한 훈련 계획,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을 통해 미국, 영국, 유럽 대륙 기업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주요 산업은 계속 쇠퇴했지만, 제조업 고용 수준은 미미하게 증가했다.[120] 그러나 개신교 노동자와 지역 연합주의 지도부는 불안감을 느꼈는데, 이는 새로운 기업들이 가톨릭 신자와 여성을 기꺼이 고용했기 때문이다.[120]

존 흄은 얼스터 신대학교 부지 선정에서 콜레인데리에 밀리고, 러건과 포타다운이 새로운 도시-산업 개발에서 탈락한것은 "강력한 연합주의-벨파스트-콜레인-포타다운 삼각지대를 개발하고 서부에서 동부 얼스터로 이주를 유발하여 소수자를 재분배하고 분산시켜 연합주의 정당이 그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21]

흄은, 불인정과 기권이라는 민족주의 정책에 좌절감을 느낀 "북부의 젊은 가톨릭 신세대"인 "제3의 세력"으로 자처했다. 미국의 시민권 운동을 활용하여, 그들은 영국 및 국제 여론에 널리 호소력을 가진 보편적 권리의 언어를 사용했다.[125] 1964년부터 사회 정의를 위한 캠페인은 고용 및 주택 차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공개해 왔다. 1967년 4월부터 이 문제는 벨파스트에 본부를 둔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NICRA)가 맡게 되었다. NICRA는 "의회 질문과 신문 논쟁보다 더 강력한 행동으로 도전"하기 위해 행진 프로그램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126]

1965년 1월, 오닐의 개인적인 초청으로 타오이섹 숀 레마스가 스토몬트를 예고 없이 방문했다. 오닐이 더블린을 방문하여 답방한 후, 민족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스토몬트에서 국왕 폐하의 야당의 역할을 맡도록 설득되었다. 그러나 이안 페이즐리 목사는 "에큐메니스트들이 우리를 팔아넘기고 있다"고 발표하고 얼스터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배신의 정책"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130][131]

1968년 10월 데리 주택 행동 위원회는 데리에서 행진을 제안했다. 종파 간의 대결이 위협받자—데리 견습 소년회는 같은 경로로 행진할 의사를 발표했다—NICRA 집행부는 이를 취소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DHAC는 활동가 이먼 맥캔과 함께 밀고 나갔고, 그는 "의식적이지만 말하지 않은 전략은 경찰을 과잉 반응으로 유도하여 당국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촉발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127] 이후의 공식 조사에서는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곤봉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해산하라는 최초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뿐이라고 시사했다.[128] 이날 데리의 가톨릭 보그사이드 지역에서 거리 전투로 끝났다. 이로써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북아일랜드는 "분쟁"으로 불리는 사건이 시작되면서 영국 및 국제 헤드라인과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했다.

1971년 뉴스릴 북아일랜드 문제의 배경에 대한 내용


1968년 12월 오닐이 강경파 내무부 장관인 윌리엄 크레이그를 해고하고 NICRA의 많은 요구 사항을 해결하는 개혁 패키지를 진행했을 때 많은 당내 사람들이 경악했다.[132] 11월 4일 다우닝 가 정상 회담에서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는 스토몬트가 개혁을 철회할 경우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에 대한 재정 지원을 재고할 것이라고 오닐에게 경고했다.[126]

내각 위원들이 윌슨의 "허세"에 맞서고 의원의 불신임 투표에 직면하자, 1969년 1월 오닐은 총선을 실시했다. 얼스터 연합당이 분열되었다. 친오닐 후보들은 자유당과 북아일랜드 노동당의 표를 얻었지만 다수 의석만 차지했다. 1969년 4월 28일, 오닐은 사임했다.

오닐의 입장은 양보되지 않은 요구에 초점을 맞춘 공화주의자들과 좌익 학생들이 NICRA와 흄의 데리 시민 행동 위원회 내에서 시위를 중단하라는 호소를 무시하면서 약화되었다.[126] 1969년 1월 4일 아일랜드 인민 민주주의 행진자들이 벨파스트에서 데리로 가는 도중 번톨렛 다리에서 특별 경찰을 포함한 왕당파에게 매복 공격을 받아 구타당했다.[135] 그날 밤, 보그사이드에서 거리 싸움이 재개되었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주민들은 "자유 데리"를 선언하며 잠시 북아일랜드 최초의 치안 부대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다.[136]

오닐의 사임 며칠 전, 전기 및 수도 시설에서 여러 차례 폭발이 발생하여 IRA의 소행으로 추정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후 스카먼 재판소는 이 "만행"이 오닐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려는 프로테스탄트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임을 밝혀냈다.[137]

4. 4. 직접 통치 부과

1969년 북아일랜드 분쟁이 발발하면서, 연합주의자들은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의 영국 내 위치에 대해 분열된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 불안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109] 이들은 1969-69년 정부의 대응이 "근본적으로 달랐을 것"이라며, 영국의 모호성이 재앙을 초래했다고 믿었다.[103]

자유 데리 사례는 데리와 벨파스트의 다른 민족주의 지역에서 재현되었고, 바리케이드로 봉쇄된 이 지역은 IRA에 의해 공개적으로 감시되었다.[141][142] 1972년 7월 31일, 모터맨 작전으로 영국군이 통제를 재확립했다.[144][145] 그 전 몇 주 동안 IRA 참모총장 숀 맥스티오판을 포함한 임시 IRA 지도자들은 런던에서 윌리엄 화이트로와 협상했지만 실패했다.[146]

일반적인 연합주의자들의 비난은 웨스트민스터와 화이트홀이 북아일랜드를 "국내 문제보다는 식민지 문제와 더 유사한 것"으로 계속 분류했다는 것이다.[103] 1969년 군대가 처음 배치되면서 "영국령 라지, 위임통치 팔레스타인 또는 키프로스 비상사태에서처럼 두 분파를 저지하는 평화 유지 작전"이라는 인상을 주었다.[92]

브라이언 포크너 정부의 주장에 따라 도입된 수용으로 인해 런던과의 관계에서 연합주의자들의 안보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150] 1971년 8월 10일 새벽, 데메트리우스 작전으로 342명이 체포되었다. 연합주의자들은 런던이 통행 금지 구역을 용인한 결정에 대한 정보 부족을 비난했다.[152]

영국 정부에게 수용은 홍보 재앙으로 판명되었고, 5가지 기술 사용으로 인해 악화되었으며, 이는 유럽 인권 재판소에 의해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으로 판결되었다.[153][154] 피의 일요일 (1972년 1월 20일) 사건으로 인해 국가적 및 국제적 분노가 일어났다.[155][156]

3월, 히스는 포크너에게 내부 안보 통제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고, 포크너가 사임하자 보수당 정부는 스토몬트를 해산하고 직접 통치를 부과했다.[103]

5. 아일랜드 문제 협상 (1973년-2006년)

5. 1. 서닝데일 협정과 얼스터 노동자 파업

1972년 10월 영국 정부는 그린 페이퍼, '북아일랜드의 미래'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북아일랜드 소수 민족이 자신을 더 넓은 아일랜드 공동체의 일부로 여겨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북아일랜드에 대한 새로운 약정이 영국 본토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명시했다.[157] 북아일랜드는 국민 다수의 의지가 있는 한 영국 연방의 일부로 남아야 하지만, '아일랜드 차원'을 고려할 필요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북아일랜드 의회는 모든 구성원을 건설적으로 참여시켜 전체 공동체가 지방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실질적인 참여의 목표는 소수 민족의 이익에 행정 권한을 공유함으로써 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57] 포크너의 후임 당 대표인 제임스 몰리노는 대부분의 연합주의자에게 어려운 점은 개신교와 가톨릭교도가 동의해야 하는 약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주된' 목표가 통일 아일랜드인 정당과 권력을 공유하지 않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포크너는 그들을 "공화당 가톨릭교도"와의 합의에 참여시켰다.[157][158]

공화당 노동당과 북아일랜드 노동당을 모두 활용하면서, SDLP는 "진보적인 개신교도"를 수용하려 했다.[159] 그러나 PIRA가 억류와 피의 일요일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계속 활용함에 따라, SDLP는 서닝데일 협정을 아일랜드 통일의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127] 새로운 보건 사회 서비스 장관인 패디 데블린은 "다른 모든 문제는" 결국 "합의된 통일 아일랜드로 이어질 역학을 만들어낼" "범아일랜드 기구 설립"을 위한 추진에 의해 좌우된다고 인정했다.[159]

서닝데일 협정은 더블린과 벨파스트에서 동등한 대표단으로 구성된 아일랜드 평의회를 구상했다. 이 평의회는 "행정 및 조화 기능"을 갖춘 장관 평의회와 자문 및 검토 기능을 갖춘 자문 의회로 구성되었다. 연합주의자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소수 위치로 밀어 넣을 가능성을 만들었다고 우려했다. 데블린은 회고하면서, SDLP가 "스톰몬트에서 권력 분담이 자리 잡도록 허용함으로써 2단계 접근 방식을 채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아일랜드 차원을 우선시함으로써 포크너의 입장에 가한 피해를 인식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159]

포크너는 수석 장관으로 취임한 지 일주일 만에 UUP 지도자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1974년 2월의 1974년 2월 영국 북아일랜드 총선은 얼스터 연합주의 연합의 승리로 이어졌으며, 그의 옛 당의 대부분은 윌리엄 크레이그의 얼스터 뱅가드와 페이즐리의 새로운 민주 연합당과 함께 공식 연합주의자로 나섰다. 포크너의 의회 친화적 그룹은 연합주의자 투표의 13%만을 얻었다. 승자들은 포크너에게 어떤 종류의 위임도 박탈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의회 선거를 요구했다.

5월에 의회가 서닝데일 협정을 확정했을 때, 왕당파 연합인 얼스터 노동자 위원회(UWC)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2주 이내에 UWC는 얼스터 방위 협회와 UVF 준군사 단체의 지원을 받아 에너지 공급에 대한 효과적인 족쇄를 쥐게 되었다.[160] 포크너가 요구한 양보는 SDLP에 의해 차단되었다. 당시 상무부 장관이었던 존 흄은 영국군의 연료유 계획 강행과 "파시스트 점령"에 대한 저항을 촉구했다.[161][162] 멀린 리스 북아일랜드 장관이 협상에 대한 마지막 호소를 거부한 후 포크너는 사임했다. 리스는 행정부에 대한 헌법적 근거가 더 이상 없음을 인정하고 의회를 해산했다.[159]

5. 2. 연합주의와 충성파 준군사조직

직접 통치가 장기화되면서, UWC 파업은 연합주의 정당들의 대표성을 약화시켰다. 이후 수년간 여러 협의회와 포럼이 있었지만, 행정적 책임을 가진 유일한 선출직은 규모가 축소된 구의회에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연합주의 국회의원들은 1972년 녹서의 원칙에 전념하는 정부들과 경쟁했다. 연합주의자들이 공화주의 폭력에 대한 부적절한 정치적, 안보적 대응으로 자주 인식했던 것에 대한 항의의 주도권은 충성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163][164]

충성주의자들의 주요 작전 방식은 암살이었다. 분쟁 과정에서 충성주의자들은 1027명의 개인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공화주의 준군사 조직에 의한 살해의 절반 정도이며, 전체 사망자의 30%에 해당한다.[165]

레드 핸드 코만도(UVF)의 벽화. 독특하게도 아일랜드어 모토인 ''Lamh Dearg Abu''(붉은 손에게 승리)가 새겨져 있다.


한때 주로 시골 지역의 오렌지 결사단이 전형적인 표현이었던 충성주의는 일반적으로 연합주의의 한 갈래로 이해된다. 충성주의는 당파적이지만 반드시 정당 정치는 아니며, 그들의 관점은 의식적으로 영국적이라기보다는 민족적이라고 특징지어진다. 즉, 얼스터 개신교도가 먼저고 영국인이 다음인 사람들의 관점이다.[166] 충성주의는 복음주의자들을 포용할 수 있지만, 그 용어는 일관되게 준군사 조직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기반 위에서, 종종 노동자 계급 연합주의와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준군사 조직은 "철저히 노동자 계급"이다.[167] 그들의 지배는 전형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개신교 지역과 주택 단지에 미쳤으며, 그들은 분쟁 초기에 지역 방어자로서 누렸던 신뢰의 상실을 갈취와 협박으로 보상했다.[168]

페이즐리는 그의 경력 초기에 급진적인 반가톨릭 복음주의를 얼스터 개신교 행동 (UPA)의 1956년 결성과 같은 물리적 폭력 충성주의에 대한 시도와 결합했다.[130][131] 얼스터 개신교 자원군은 1969년 초 "오닐을 몰아내기" 위한 폭탄 테러에 페이즐리를 연루시켰지만, 이는 중개자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UVF 지도자들은 페이즐리가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의 수사는 영감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은밀하게 유지된 음모였다.[169] 살해 동기는 주로 충성주의 공동체 내의 세속적인 세력에서 비롯되었다.[170] DUP를 통해 페이즐리는 궁극적으로 그의 추종자들의 대부분을 정당 정치로 이끌었고, 새로운 세기에 연합주의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당시 충성주의 준군사 조직에 대한 다른 주류 연합주의 정치인들의 관계 또한 논쟁의 대상이다. 준군사 조직은 정치적 조종의 암시를 부인하고 불쾌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정당 지도자들은 충성주의의 만행을 비난할 수 있지만, 그들이 이를 연합주의자들의 상처와 좌절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하려 할 때, 그들은 정부로부터 양보를 얻기 위해 종종 무작위적인 분파적 살인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아시다시피, '우리와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 무장한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169] 이런 의미에서 연합주의자들과 충성주의 폭력의 관계는 "모호"하게 남아 있었다.[171]

5. 3. 1985년 앵글로-아일랜드 협정에 대한 반대

1985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다운주 힐스보로에서 개릿 피츠제럴드 아일랜드 총리와 협정을 체결했다.[172] 이 협정으로 영국-아일랜드 정부 간 회의가 설치되어,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와 관련된 주요 법안에 대한 "제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172] 그러나 제안은 "북아일랜드의 자치 정부의 책임이 아닌" 사항에 대해서만 가능했다.[172] 대처는 회고록에서 연합주의자들의 반응이 "어느 누구도 예측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고 회상했다.[173]

앵글로-아일랜드 협정에 반대하는 캠페인


얼스터 연합당(UUP)과 민주연합당(DUP)은 앵글로-아일랜드 협정(힐스보로 협정)에 반대하는 "얼스터는 안된다" 캠페인을 주도했다.[174] 파업, 시민 불복종, 웨스트민스터에서 연합주의 국회의원들의 대규모 사퇴, 지방 의회 회의 중단 등이 벌어졌다.[174] 1985년 11월 23일, 10만 명 이상이 벨파스트 시청 밖에 모여 1912년 얼스터 데이 이후 최대 규모의 연합주의 시위를 벌였다.[175][52] "테러리스트들은 어디로 피신하러 돌아가는가?" 페이즐리는 군중에게 물었다.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돌아가는데, 대처 여사는 우리에게 공화국이 우리 지역에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라고 말합니다!"[175][52]

그러나 연합주의자들은 보수당 정부에 반대하고 아일랜드 통일에 동조하는 노동당과의 웨스트민스터 야당에 맞서 고립되었다.[176] 1986년 11월, 페이즐리는 얼스터 저항 운동(URM)을 발표하며 "필요에 따라 직접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176]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모집 집회가 열렸고 수천 명이 가입했다고 한다.[177] URM은 무기를 수입하여 일부를 UVF와 UDA에 넘겼지만, 행동에 대한 요구는 없었다.[177][178] 협정 4주년이 되면서 앵글로-아일랜드 협정에 대한 연합주의자들의 시위는 형식적인 지지만을 얻었다.[174]

1991년 3월, 두 연합주의 정당은 북아일랜드의 미래에 대한 정치 회담을 위해 SDLP 및 동맹과 합의했다.[174] 1992년 정당 간 회담에서 얼스터 연합당은 이러한 기구가 북아일랜드 의회의 통제를 받고, 전반적인 범 아일랜드 의회가 포함되지 않으며, 공동 권한의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설계되지 않는 한, 일련의 국경 간 기구를 구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179]

5. 4. 영국 정당 연합주의

일부 연합주의자들은 북아일랜드가 영국 내에서 특별 지위를 거부하고 완전한 입법적, 정치적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분할에 대한 영국-아일랜드 공산주의 기구(B&ICO)의 두 국가 이론과 관련이 있었다.[180] B&ICO는 영국 노동당이 아일랜드 단결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노동당이 북아일랜드에서 직접 유권자들을 설득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181][182]

1993년, B&ICO는 노동당 대표를 위한 캠페인을 해산했다. 평등 시민권 캠페인은 웨스트민스터 정당들을 북아일랜드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180] 로버트 맥카트니는 1998년 의회에서 반 자치 분권 영국 연합주의당 의원 5명을 잠시 결집시켰다.

2003년 노동당 회의는 북아일랜드 거주자의 당원 자격을 계속 제외할 수 없다는 법률 자문을 수용했다.[183] 그러나 전국 집행 위원회는 북아일랜드 노동당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금지하고 SDLP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184]

2008년, 레그 엠피는 보수당과의 역사적 연결을 복원하려고 시도했다. 데이비드 캐머런은 "북아일랜드 정치의 반분리된 지위는 끝나야 한다"고 선언했다.[185] 엠피는 얼스터 보수당 및 연합주의자 – 뉴 포스로 후보를 출마시켰으나, 2010년 선거에서 실비아 허몬 의원을 잃었다.[186] 이는 민주 연합당(DUP)에 의해 UUP가 쇠퇴했음을 확인했다.[187]

북아일랜드 보수당은 이후 자체적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2024년 웨스트민스터 선거에서 유일한 후보는 553표를 얻었다.

2024년 총선에 앞서, 짐 앨리스터의 전통 연합주의자 목소리(TUV)는 선거 협약을 개혁 영국과 체결했다.[188] 양당 지도자들은 공동 플랫폼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양해 각서"에 서명했다.[189] 개혁 영국은 5개의 영국 의석을 얻었고,[190] 북아일랜드에서는 앨리스터가 유일한 TUV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191] 앨리스터는 개혁 영국 의원단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공동 플랫폼에 대한 헌신을 유지했다.[192]

5. 5. 1998년 성금요일 협정

1998년 벨파스트 협정(성금요일 협정)(GFA)은 서닝데일 협정과 유사한 점이 있었으나, 연합주의자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193][194][195] SDLP 대표 세이머스 맬런은 이를 "느린 학습자를 위한 서닝데일"이라고 표현했지만, 데이비드 트림블은 연합주의가 25년 전에는 얻지 못했던 많은 것을 확보했다고 믿었다.[193][194][195]

아일랜드 평의회는 북-남 장관 회의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초국가적 기구"가 아닌 의회에 책임을 지는 형태였다.[196] 이 회의는 절차 규칙(우려 청원)에 따라 교차 공동체 동의를 허용하여 "연합주의자 거부권"을 가능하게 했다.[197][198]

아일랜드 공화국은 헌법을 수정하여 아일랜드 전역에 대한 영토 주장을 삭제하고, 아일랜드 통합은 "섬의 ''양쪽 관할 구역''에서 민주적으로 표현된" 다수 동의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음을 인정했다.[199] 연합주의자가 국가 영토 내에서 소수라는 민족주의 원칙은 제쳐두었다.[198][200]

그러나 연합주의자들은 권력 공유의 새로운 틀 내에서 공화주의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새로운 행정부는 의회 정당에 비례하여 장관직을 배분하는 dHondt 방법을 통해 구성되어, 신 페인과 같이 지속적으로 IRA와 연관된 정당도 행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201]

연합주의자들은 이 직무 공유가 "영국 정부의 연합에 대한 입장을 위험하게 일관성 없게 만든"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고 우려했다.[201] 협정은 두 가지 "지정"을 "다른 것"보다 우선시하지 않고, 양측 모두 (우려 청원을 통해) 병렬 동의에 의한 결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존중의 동등성"은 국가를 지지하려는 열망과 전복하려는 열망 모두에 부여되었다.[202]

영국의 아일랜드 통합 동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203] 연합주의자들은 제리 아담스의 말처럼 1998년 협정이 "연합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는 공화주의자들의 주장에 불편함을 느꼈다.[204]

1998년 5월 국민투표에서 71.1%가 협정에 찬성했지만, 프로테스탄트/연합주의자의 거의 절반(47~49%)이 민주연합당(DUP)과 함께 반대했다.[205] DUP는 권력 공유 원칙 자체보다는 IRA가 무장하고 활동적인 조직으로 지속되는 것을 문제 삼았다.[206] 협정에는 정당들이 무장 해제를 위해 준군사 단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요구했지만, 효과적인 제재는 없었다.[207]

2002년 10월, 신 페인 사무실 급습 사건은 IRA가 여전히 활동 중임을 시사했고, 트림블은 UUP를 이끌고 행정부에서 탈퇴, 의회는 정지되었다.[208]

5. 6. 민주 연합당의 집권

2006년 10월, 민주연합당(DUP)과 신 페인은 세인트앤드루스 협정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이를 통해 이언 페이즐리와 마틴 맥기니스가 복원된 의회에서 각각 제1차관과 부총리로 지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209] 얼스터 연합당(UUP)의 레그 엠피는 이 사건을 벨파스트 협정(GFA)을 "느린 학습자를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타협을 인정하면서도 북아일랜드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은 무장 해제되었고, 신페인으로부터 "모든 치안 기관에 대한" 지지를 얻었으며, 북아일랜드는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209]

13개월의 임기를 마친 페이즐리는 피터 로빈슨에게 북아일랜드 제1차관 자리를 물려주었다.[210][211] 로빈슨과 2016년 1월 그를 이어 취임한 알린 포스터는 페이즐리가 맥기니스 및 그의 당 동료들과 가졌던 관계보다 더 냉랭해졌고, 결국 이 관계는 무너졌다. 재정 스캔들 관리를 포함한 여러 문제에 대한 "DUP의 오만함"을 언급하며, 2017년 1월 맥기니스는 사임했다. 신페인은 후임자 지명을 거부했고, 후임자 없이는 자치 기관이 작동할 수 없었다. 2017년 북아일랜드 의회 선거가 2017년 3월 2일에 치러졌고, 북아일랜드가 정치적 실체로 존재한 이래 처음으로 연합주의자들이 지역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2020년 1월, 협상 (새로운 10년,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의회가 복원되었고, 신페인은 맥기니스의 후임으로 북쪽의 새로운 지도자 미셸 오닐을 지명했다.[212]

페이즐리의 화해적인 리더십에 대한 DUP 내 지지 철회는 DUP가 신페인과 함께 행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에 대한 분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의회에서 페이즐리의 전 부관 짐 앨리스터는 "정부의 핵심에" 국가를 전복하려는 자들을 둔 "강제 연립"에 항의하며 유일한 전통 연합주의자 목소리 의회 의원이 되었다.[213] 2024년 영국 총선에서 앨리스터는 현직 이언 페이즐리 주니어를 물리치고 북 안트림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구는 1970년 영국 총선 이후 페이즐리 가문 구성원이 계속 보유해 왔다.

6. 소수 블록으로서의 연합주의

6. 1. 연합주의 인구 통계

북아일랜드 내 인구 구성 변화는 연합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214] 1960년대 이후 개신교 신자 비율은 감소하고 가톨릭 신자 비율은 증가하는 추세가 나타난다.[216][217] 2015년 신 페인 선거 전단에서는 선거구 내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의 비율 변화(46.94% 대 45.67%)를 홍보하며 가톨릭 유권자들에게 변화를 만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215]

2015년 신 페인 북 벨파스트 선거 전단 상세


2019년 북 벨파스트 선거에서 존 피뉴케인이 패배하자, 아를린 포스터는 인구 통계가 연합주의에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언급했다.[214] 통합주의 대표성은 감소하여, 2019년과 2024년 웨스트민스터 투표에서 통합주의 투표는 43%를 조금 넘는 새로운 최저치를 기록했다.[218]

그러나 통합주의의 감소가 민족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19년 웨스트민스터 의원 선거와 2022년 스토몬트에서 신 페인이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민족주의 투표율은 40%로 2005년의 42%보다 낮았다.[218]

설문 조사에 따르면 북아일랜드에서 자신을 통합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니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50%).[220] 북아일랜드 연합당(Alliance Party of Northern Ireland)과 같은 주요 정당은 헌법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과거 통합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유권자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고 있다.[222]

마지막 스토몬트 의회 선거 이후, 통합주의 내에서는 개신교 기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224] 피터 로빈슨은 "인구의 40% 이상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225] 설문 조사는 국경 투표에서 가톨릭 신자의 상당수가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남는 데 투표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226] 그러나 DUP와 UUP 구성원 중 가톨릭 신자는 0.5%에 불과하다.[229][230]

6. 2. 연합주의 문화 수호

1994년 다운닝 가 선언은 "북아일랜드 내에 불충성은 있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민족주의와 연합주의의 상반된 야망은 "동등한 타당성"을 갖는다고 명시했다.[232] 그러나 연합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존중의 동등성"을 "끊임없는 괴롭힘" 정책의 허가로 간주한다고 비난했다.[8]

데이비드 트림블은 "얼스터의 영국인"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잠식하는 "교활한 침식"을 "임시 IRA와 그 동조자들"이 체계적으로 추구해 왔다고 주장했고,[233] 피터 로빈슨은 "아일랜드 문화를 장려하고 영국 구조와 상징을 목표로 하는 끊임없는 신페인 캠페인"에 대한 "반격"을 언급했다.[234]

연합주의자들은 SDLP-신페인 연합이 공공 질서 권한을 조작하여 오렌지 행진을 금지하거나 경로를 변경한다고 주장했다. 드럼크리 분쟁(1995-2001)과[235] 아르도인 상가 대치(2013-2016)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2012년 벨파스트 시청의 유니언 플래그 게양일 축소 결정은[236] "영국성"에 대한 "문화 전쟁"의 일환으로 해석되어 항의를 일으켰다.[237]

세인트 패트릭 십자가와 스코틀랜드 국기에 6개 카운티의 별, 얼스터의 붉은 손이 겹쳐져 있고 왕관이 없는 "얼스터 국기".


언어 문제 또한 주요 갈등 요인이었다. 1998년 성금요일, 토니 블레어 총리는 연합주의자들이 아일랜드어에 상응하는 얼스터 스코트어(울란스) 인정을 요구하여 놀라움을 안겼다.[238] 연합주의자들은 아일랜드어 문제를 "개신교도들을 공격하는" 도구로 "무기화"했다고 주장했다.[239]

넬슨 맥커슬랜드 민주연합당 문화부 장관은 아일랜드어 우선 언어법이 "민족 영토 표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40] 신페인의 독립 아일랜드어 법 요구에 대한 저항은 2020년 권력 공유 행정부 복원을 위한 3년간의 협상에서 주요 걸림돌이 되었다.[241]

일부 연합주의자들은 연합주의 문화가 "하위 문화로 정의되어 '소중한' 소수 전통으로 아일랜드 문화에 흡수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8]

2020년 ''새로운 10년, 새로운 접근 방식'' 협정은 아일랜드어와 얼스터 스코트어 모두에게 새로운 위원을 약속했지만,[242] 동등한 법적 지위는 부여하지 않았다.[243] 영국 정부는 스코트어와 얼스터 스코트를 유럽 지역 또는 소수 언어 헌장의 제2부에 따라 지역 또는 소수 언어로 인정했지만,[244] 아일랜드어는 제3부 의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얼스터 스코트를 국민 소수 민족 보호를 위한 기본 협약에 따라 국가 소수 민족으로 인정"할 것을 약속했다.[242]

2022년, 북아일랜드 의정서에 반대하는 연합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10년, 새로운 접근 방식''에 따른 법률이 영국 의회에서 제정되었다. 정체성 및 언어 (북아일랜드) 법은[246] 12월 6일에 국왕 재가를 받았다.[247][248]

6. 3. 브렉시트와 북아일랜드 의정서

브렉시트북아일랜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연합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얼스터 연합당(UUP)은 북아일랜드가 EU에 남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지만,[249] 민주연합당(DUP)은 브렉시트 탈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250] 2016년 영국의 유럽 연합 회원국 국민투표에서 북아일랜드는 12% 차이로 잔류를 선택했지만,[255] 민주연합당은 영국 전체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55]

테레사 메이 총리는 북아일랜드만 아일랜드 공화국과 함께 EU의 무역 체제를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258] EU 27개국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를 우선시하여 아일랜드 국경의 "경계 강화"를 피하고자 했다.[259] 이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유럽 단일 시장 및 관세 동맹의 경계선에 규제적 정렬을 유지하게 되었다.[259]

알린 포스터는 이러한 "북아일랜드의 나머지 영국으로부터의 합병"보다 노딜 브렉시트가 낫다고 주장했으며,[260] 보리스 존슨은 EU가 북아일랜드를 "흥정 카드"로 이용한다고 비판했다.[261] 그러나 존슨은 결국 북아일랜드 의정서를 통해 북아일랜드를 EU의 관세 입국 지점으로 남기는 방안을 채택했다.[263]

연합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으며,[264][265] 연합법의 자유 무역 조항을 근거로 사법 심사를 요구했다.[267] 벨파스트 고등 법원은 의정서가 연합법과 충돌하지만 의회의 주권을 인정하여 의정서를 승인했다.[267]

민주연합당은 벨파스트 협정의 국제적, 헌법적 지위를 내세우며, 북아일랜드 의회의 동의 없는 변경은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269] 2022년 2월, 민주연합당은 폴 기번을 제1장관직에서 사퇴시켜 의회와 행정부를 붕괴시켰다.[270]

2024년 2월, 영국 정부의 보장을 바탕으로 민주연합당은 의회 복원에 동의했고, 미셸 오닐 (신페인)과 엠마 리틀-펭겔리 (민주연합당)가 제1장관 및 부제1장관으로 선서하면서 북아일랜드 행정부는 처음으로 연합주의자가 소수가 되었다.[272]

7. 연합주의 정당

북아일랜드의 역사와 그 형성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정당을 도표로 나타낸 그림 (1889년 이후). 연합주의 정당은 주황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아일랜드 보수당(Irish Conservative Party)'''(1835–1891)
  • 아일랜드 충성 애국 연합 (Irish Loyal and Patriotic Union)(1885–1891)
  • 자유 연합당 (Liberal Unionist Party)(1886–1912)
  • '''아일랜드 연합주의 연합(Irish Unionist Alliance)'''(1891–1922)
  • '''얼스터 연합당(Ulster Unionist Party)'''(1905/1921–현재)
  • 보수 연합당 (Conservative and Unionist Party)(1912–현재)
  • 영연방 노동당 (Commonwealth Labour Party)(1942–1947)
  • 개신교 연합당 (Protestant Unionist Party)(1966–1971)
  • '''민주 연합당(Democratic Unionist Party)'''(1971–현재)
  • 전위 연합 진보당 (Vanguard Unionist Progressive Party)(1973–1978)
  • 북아일랜드 연합당 (Unionist Party of Northern Ireland)(1974–1981)
  • 자원봉사 정치당 (Volunteer Political Party)(1974–1975)
  • 연합 얼스터 연합당 (United Ulster Unionist Party)(1975–1984)
  • 진보 연합당 (Progressive Unionist Party)(1978–현재)
  • 얼스터 민중 연합당 (Ulster Popular Unionist Party)(1980–1995)
  • 얼스터(왕당파) 민주당 (Ulster (Loyalist) Democratic Party)(1982–2001)
  • 영국 독립당 (UK Independence Party, UKIP)(1993–현재)
  • 영국 연합당 (UK Unionist Party, UKUP)(1995–2007)
  • 연합 연합 연합 (United Unionist Coalition)(1998–2012)
  • 북아일랜드 연합당 (Northern Ireland Unionist Party)(1999–2008)
  • 전통 연합주의 목소리 (Traditional Unionist Voice)(2007–현재)
  • NI21 (2013–2016)

참조

[1] 서적 Irish Politics and Social Conflict in the Age of the American Revolutio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 서적 Irish Freedom: The History of Nationalism in Ireland https://books.google[...] Pan Books 2007
[3] 서적 The Narrow Ground: Aspects of Ulster 1609–1969 Faber & Faber
[4] 서적 A Short History of Ire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Belfast 400: People, Place and History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12
[6] 서적 Castlereagh, From Enlightenment to Tyranny Quercus Publishing Plc
[7] 논문 George III, Pitt, and the Irish Catholics, 1801 – 1805 https://www.jstor.or[...]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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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논문 The Catholics and the Union https://www.jstor.or[...] 2000
[10] 논문 'Brunswick Bloodhounds and Itinerant Demagogues': The Campaign for Catholic Emancipation in County Armagh 1824–29 https://www.jstor.or[...] 2007
[11] 서적 The Dissenting Voice: Protestant Democracy in Ulster from Plantation to Partition Blackstaff Press
[12] 웹사이트 The development of Unionism before 1912 https://www.qub.ac.u[...] qub.ac.uk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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