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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르 다키텐 여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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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레오노르 다키텐 여공작은 12세기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강력한 인물로,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결혼했다. 루이 7세와의 결혼을 통해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나, 제2차 십자군 원정 실패 후 이혼했다. 이후 헨리 2세와 재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으며,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낳았다. 헨리 2세 사후에는 아들 리처드 1세의 섭정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했고,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가 묻힌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문화 예술 후원, 궁정 연애의 발달 등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왕실의 혈통을 잇는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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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오노르 다키텐 여공작
기본 정보
엘레오노르의 무덤 조각상
퐁트브로 수도원의 무덤 조각상
이름엘레오노르
프랑스어 이름Aliénor d'Aquitaine
오크어 이름Alienòr d'Aquitània
오크어 발음aljeˈnɔɾ dakiˈtanjɔ
라틴어 이름Helienordis, Alienorde 또는 Alianor
출생일1124년경
사망일1204년 4월 1일 (약 80세)
사망 장소퐁트브로 수도원
매장 장소퐁트브로 수도원, 퐁트브로
작위
재위1137년 4월 9일 – 1204년 4월 1일
전임자기욤 10세
공동 통치자루이 (1137–1152)
헨리 (1152–1189)
리처드 (1189–1199)
(1199–1204)
후임자
프랑스 왕비
재위 시작1137년 8월 1일
재위 종료1152년 3월 21일
대관식1137년 12월 25일
배우자루이 7세
잉글랜드 왕비
재위 시작1154년 12월 19일
재위 종료1189년 7월 6일
대관식1154년 12월 19일
배우자헨리 2세
가문
가문라뉼피드 가
아버지기욤 10세 다키텐 공작
어머니아에노르 드 샤텔로
결혼
배우자루이 7세 (1137년 결혼, 1152년 무효)
헨리 2세 (1152년 결혼, 1189년 사망)
자녀
자녀마리, 샹파뉴 백작부인
알릭스, 블루아 백작부인
기욤 9세, 푸아티에 백작
헨리
마틸다, 작센 공작부인
리처드 1세
제프리 2세, 브르타뉴 공작
엘레오노르, 카스티야 왕비
조안, 시칠리아 왕비

2. 생애 초반

엘레오노르의 삶은 소년기에서 사춘기까지(1124~1137년), 루이 7세와의 결혼과 프랑스 왕비 시절(1137~1152년), 헨리 2세와의 결혼과 잉글랜드 왕비 시절(1152~1173년), 헨리 2세 사망까지의 감금 생활(1173~1189년), 그리고 사망까지의 과부 생활(1189~1204년)로 나눌 수 있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국의 공작 기욤 10세와 그의 아내 에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와 출생연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122년 푸아티에궁, 보르도의 옹브리에르궁, 또는 블랭 성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7]

엘레오노르는 어머니의 이름 '에노르'에서 유래되었는데, 어머니와 구별하기 위해 '다른'을 뜻하는 라틴어 'alia-'를 붙여 'alia-Aenor'가 되었고, 이것이 오일어로는 'Eléanor', 영어로는 'Eleanor'가 되었다.[5]

아버지 기욤 10세는 딸에게 당대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다. 엘레오노르는 모국어[8] 외에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었고, 음악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승마와 흰바다매를 이용한 사냥 등을 즐겼다.

1130년, 어머니와 남동생이 사망하면서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국추정상속인이 되었다.[9] 아키텐 공국은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영지 중 하나였다.

2. 1. 가문과 교육

엘레오노르의 이름은 어머니 에노르에서 유래되었으며, '다른'을 뜻하는 라틴어 'alia-'를 붙여 'alia-Aenor'가 되었고, 북부 프랑스의 오일어로는 'Eléanor', 영어로는 'Eleanor'가 되었다.[5] 엘레오노르라는 이름은 정복왕 윌리엄의 이모인 노르망디의 엘레아노르가 이미 사용한 기록이 있다.

엘레오노르의 출생지와 출생연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에 편찬된 가계도에 따르면 1137년 봄에 13살이었다는 기록이 있다.[6] 몇몇 연대기에는 아키텐 영주들에게 14살 생일에 충성서약을 받았던 것이 1136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또한 1204년에 사망했을 때 향년 82세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122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7] 1120년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지만, 부모의 결혼이 1121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7] 출생지는 푸아티에궁, 보르도의 옹브리에르궁, 블랭 성 등이 거론된다.[7]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와 어머니 에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에노르는 샤틀르로 자작 에므리 드 로슈푸코와 당제로사 드 릴 부샤르의 딸이었는데, 외할머니 당제로사는 할아버지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오랜 정부였다. 기욤 10세와 에노르 사이에는 엘레오노르, 페트로닐라, 기욤 에그레가 태어났다.

아버지 기욤 10세는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다. 엘레오노르는 모국어[8] 외에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었고, 음악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승마와 흰바다매를 이용한 사냥 등을 즐겼다. 활기차고 외향적인 성격에 명민하고 세련된 인물이었다.

1130년 3월,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4살 남동생 기욤 에그레가 라 로셸 북쪽 탈몽(Talmont)의 사냥 별장에서 사망하자, 엘레오노르는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할 추정상속인이 되었다.[9] 아키텐 공국은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영지였으며, 푸아티에와 아키텐을 합치면 현대 프랑스의 거의 1/3 크기에 해당했다. 동생 페트로닐라는 상속 순위에서 밀렸고, 기욤 10세의 서출 아들 기욤과 조슬린은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2. 2. 상속



1137년, 아버지 기욤 10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 도중 사망하면서 15세의 엘레오노르는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이 되었다.[10] 당시 여성 상속인의 작위를 노리고 납치하는 일이 흔했기에, 기욤 10세는 유언으로 프랑스 왕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하고 엘레오노르의 영토가 루이 왕에게 넘어가지 않고 독립적으로 상속자에게만 상속되도록 조건을 붙였다.[10]

이질로 위중했던 루이 6세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아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를 결혼시켜 아키텐을 프랑스 왕가에 흡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쉬제의 대수도원장을 결혼 책임자로 임명하고, 500명의 기사를 보내 아들 루이 7세를 호위하게 했다.

13세의 엘레오노르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매력적인 상속녀 중 한 명이었다. 기욤 10세는 엘레오노르가 고아가 될 것을 우려하여 루이 6세에게 후견을 맡기고, 적절한 남편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남편이 나타날 때까지 엘레오노르의 토지에 대한 법적 권리는 왕에게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루이 6세는 아키텐 획득을 통해 영토 확장의 기회를 얻었다. 그의 장남 루이는 원래 수도원 생활을 할 예정이었으나, 형 필립의 사망으로 왕세자가 되었다.

3. 프랑스 왕비 시절

엘레오노르의 수정병. 루이 7세에게 결혼 선물로 준 것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왼쪽) 14세기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식 묘사, (오른쪽) 십자군 참전으로 떠나는 루이 7세


엘레오노르는 1137년 7월 25일 보르도의 생 앙드레 대성당에서 루이 7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11] 루이 6세가 사망하자 루이 7세는 프랑스 국왕이 되었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엘레오노르는 활발하고 화려한 남부 프랑스 출신으로, 왕궁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어머니를 비롯한 북부 프랑스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13] 고위 성직자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매우 사랑하여 시테 팔라스를 수리하는 등 그녀를 배려했다.[14]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비였던 시절, 카페 왕조의 왕권은 아직 굳건하지 않았던 반면, 엘레오노르의 친정인 아키텐 공작가는 광대한 영토와 많은 유력 귀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남편 루이 7세를 내심 얕잡아 보기도 했다.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 사이에는 마리, 알리스 두 공주가 태어났지만, 아들은 없었다.

3. 1. 루이 7세와의 결혼

1137년 7월 25일, 엘레오노르보르도의 생 앙드레 대성당에서 보르도 대주교의 주례로 루이 7세와 결혼했다.[11] 결혼식 후 두 사람은 아키텐 공국의 중심 도시인 푸아티에로 이동했다.[11] 그러나 기욤 10세의 유언에 따라, 그들의 아들이 프랑스 왕이 되어야만 프랑스 왕국과 아키텐 공국이 합쳐질 수 있었고, 그전까지 아키텐은 독립적인 공국으로 유지되었다. 엘레오노르는 결혼 선물로 루브르 박물관에 현재까지 전시되어 있는 크리스탈 꽃병을 루이에게 선물했고, 루이는 관례대로 이 선물을 교회에 다시 봉헌했다. 이 꽃병은 엘레오노르와 관련된 유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다.[12]

루이가 푸아티에 백작과 아키텐 및 가스코뉴 공작으로 재임한 기간은 짧았다. 8월 7일, 그는 아버지 루이 6세가 8월 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은 기름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활발하며, 화려한 남부 프랑스 궁정에서 자란 엘레오노르는 당시 여성관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 프랑스 왕궁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어머니 모리엔느의 아들레드를 비롯한 북부 프랑스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13] 사람들은 분별없는 옷차림과 상스러운 말투로 악명 높았던 경건왕 로베르 2세의 왕비 콩스탕스를 떠올리며 엘레오노르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되었다.[13] 그녀의 행동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와 쉬제 대수도원장 같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보기 흉하고 상스럽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루이 7세는 아름다운 신부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의 변덕스럽고 때로는 황당하거나 짜증스러운 행동을 모두 받아주었다. 그녀가 머물게 될 시테 팔라스는 수수하고 차분했지만, 남부의 호화로운 궁에 익숙한 그녀를 위해 이듬해 겨울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했다. 궁을 확장하고 세련되게 만들었으며, 프랑스 왕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벽난로와 굴뚝까지 설치되었다.[14]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비였던 시절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비교적 적다. 당시 프랑스 왕실인 카페 왕조는 왕권이 아직 굳건하지 않았고, 직접적인 지배는 왕령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반면, 아키텐 공작가는 광대한 영토와 많은 유력 귀족들을 가신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엘레오노르의 후견인이 된 루이 6세는 자신의 아들 루이를 엘레오노르와 결혼시켜, 혼인을 통해 아키텐을 손에 넣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루이는 차남으로 태어나 성직자가 되도록 교육받았으나, 형 필리프가 1131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37년 6월 18일, 루이는 십자군 원정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행렬을 이끌고 보르도로 향했다. 베르망두아 백작 라울 1세, 블루아 백작 겸 샹파뉴 백작 티보 4세, 생드니 대성당 수도원장 수제르가 그를 따랐다. 루이 6세는 젊은 왕자에게 왕세자로서의 처신에 대해 세세히 주의를 주었고, 수제르를 통해 엘레오노르와의 관계를 맺는 법을 가르치려 했다.

7월 11일, 보르도에 도착한 루이를 마주한 엘레오노르는 그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했지만, 정략결혼으로 인생이 급변한 점에서는 그에게 공감했다. 하지만 아키텐 공작가(푸아티에 가문 또는 라누프 가문)에 비해 카페 왕조의 역사는 짧았고, 아키텐 공국이 훨씬 부유하고 광대했기 때문에, 엘레오노르는 루이를 내심 얕잡아 보았다.

7월 25일 보르도의 생탕드레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이어진 대연회에는 1000명이나 되는 손님이 초대되어 수일간 성대하게 열렸다. 엘레오노르와 루이가 푸아티에에 도착한 8월 1일, 루이 6세가 위독해졌기 때문에, 부부는 파리로 급히 가서 루이 6세의 장례를 치르고 즉위식도 거행했다. 이렇게 부부는 결혼과 거의 동시에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엘레오노르가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엘레오노르는 15세에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남프랑스 아키텐의 여공으로 자란 명랑한 엘레오노르와, 수도원에서 자라 생활이 엄격하고 독실한 루이 7세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 훗날 이혼했을 때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에 대해 "왕과 결혼했다 생각했더니 승려였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루이 7세의 온화한 성격 때문에 불화는 표면화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마리, 알리스 공주 두 명이 태어났지만, 남자아이를 낳지는 못했다.

3. 2. 분쟁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와 결혼할 때 샹파뉴 백작 테오발도 2세와 베르망두아 백작 라울 1세가 고문 역할을 맡았는데, 이들은 처남매부지간이었다. 1141년경 라울 1세가 엘레오노르의 여동생 페트로닐라와 불륜 관계에 빠지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라울은 페트로닐라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원했지만, 테오발도는 반대했고,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를 부추겨 여동생을 지원했다.

1141년 부르쥬 대주교 자리가 비자, 루이 7세는 자신의 대법관 카르뒤크를 임명하려 했으나, 성당참사회는 보르도 대교구의 클뤼니파 성직자 피에르 들 라 샤트르를 선출했다. 루이 7세는 분노하여 부르쥬의 출입문을 봉쇄했고, 교황은 프랑스 왕령에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라울 1세와 페트로닐라를 파문했다. 테오발도는 피에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1]

이 사건으로 루이 7세는 테오발도를 응징하기로 결심, 1142년부터 1144년까지 전쟁을 벌였다. 비트리 쉬르 마른에서 루이 7세가 직접 공격을 지휘했는데, 마을에 지른 불이 교회로 번져 수천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루이 7세는 죄책감에 전쟁을 중단하고 테오발도에게 파문 철회를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제안했고, 교황도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테오발도의 백작령이 회복되자 교황은 다시 라울에게 페트로닐라와 헤어지기를 종용했고, 라울이 거부하자 다시 파문했다. 분노한 루이 7세는 다시 샹파뉴를 유린했다.[2]

1144년 6월,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는 생드니 대성당을 방문했고, 엘레오노르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파문 철회를 요청하며 샹파뉴 철군, 테오발도 백작령 반환, 피에르의 부르쥬 대주교 승인을 약속했다. 베르나르는 엘레오노르를 꾸짖으며 국사 간섭을 중단하라고 했다. 엘레오노르는 울면서 용서를 구하고, 자식이 없음을 한탄했다. 베르나르는 평화를 위해 노력하면 아이를 갖도록 축원하겠다고 했다.[3]

몇 주 후 테오발도의 영지는 회복되었고, 피에르는 부르쥬 대주교로 인정되었다. 1145년 4월 엘레오노르는 첫 아이 마리를 낳았다.[4]

하지만 루이 7세는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렸고, 1145년 가을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요청으로 제2차 십자군 지휘를 맡아 그해 크리스마스에 참전을 결심했다.[5]

툴루즈 백작령은 복잡한 계승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할머니를 통해 툴루즈 백작 가문의 후손이었다. 1141년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의 툴루즈에 대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툴루즈로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했지만 정복하지 못하고 알폰소 백작의 충성 맹세를 받은 후 철수했다.[6]

파리에서 왕비가 된 후, 엘레오노르는 궁정에서 빈번히 문제를 일으켰다. 루이 7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주변의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시어머니인 아델 드 사보이 왕태후와 갈등을 빚었다. 엘레오노르가 남프랑스 문화를 북프랑스의 영향이 강한 궁정에 무리하게 도입한 것도 양자의 대립을 심화시켰다.[7]

궁정에서 지루함을 느낀 엘레오노르는 피에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연애에 강하게 매료되었다. 한편, 답답한 궁정 생활이 싫증났고, 정숙한 성격의 남편에게서도 만족감을 얻지 못한 채 고독에 시달렸다.[8]

루이 7세는 즉위 직후 푸아티에에 원정을 갔다. 엘레오노르의 개입이 의심되는 가혹한 조치에 슈제르가 중재하여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엘레오노르는 슈제르의 개입에 분노했고, 루이 7세는 슈제르를 정치에서 멀리했다.[9]

이 무렵부터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를 무모한 행동으로 몰아넣었다. 1141년에 툴루즈 원정을 하게 했고, 여동생 페트로닐과 베르망두아 백작라울 1세를 결혼시키기 위해 남편을 강압적으로 움직여 성직자들을 동원하고, 라울 1세를 이혼시켰다. 이것이 상파뉴 백작 티보 4세의 분노를 사 라울 1세와의 대립으로 발전했다.[10]

같은 해, 라울 1세의 재혼 소동에 더하여 교회와 왕의 서임권 투쟁도 발생했다. 루이 7세는 부르주대주교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려고 해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142년에는 베르나르두스가 교황에게 가서 호소했고, 교황이 라울 1세 부부와 루이 7세를 파문했지만 왕은 반항적인 태도를 고치지 않았고, 엘레오노르는 왕의 측근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11]

마침내 루이 7세는 상파뉴에도 개입하여 1143년 마을을 공격했다. 이때 붙은 불이 교회에 번져 피난 중이던 시민 1000명 이상이 화재로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고, 충격을 받은 루이 7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왕과 교회의 중재에 나선 베르나르두스로부터 질책을 받은 왕은 파문이 해제되었고, 이듬해 1144년 6월 11일 생드니 대성당 준공식에 참석하여 슈제르의 중재로 라울 1세와 함께 티보 4세와 화해하고 부르주 대주교를 샤틀로 인정하는 것에도 동의했다. 엘레오노르는 왕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베르나르두스에게 임신 기도를 해달라고 간청하여 이듬해 1145년 장녀 마리를 출산했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는 루이 7세를 부추겨 악행을 저지르게 한 존재로 경계했고, 여동생 부부의 파문 해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12]

3. 3. 제2차 십자군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 생활은 여러 갈등으로 점철되었는데, 특히 1141년 부르쥬 대주교 선출을 둘러싼 분쟁이 큰 영향을 미쳤다. 루이 7세는 자신의 측근인 카르뒤크를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성당 참사회는 클뤼니파 성직자 피에르 들 라 샤트르를 선출했다. 피에르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승인을 받아 정식 대주교가 되었지만, 루이 7세는 이에 분노하여 부르쥬의 출입문을 봉쇄했다. 교황은 엘레오노르가 이 사태를 부추겼다고 의심하며 루이 7세를 질책했고, 결국 프랑스 왕령에 성무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루이 7세는 샹파뉴 백작 테오발도 2세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테오발도 2세는 루이 7세의 뜻을 어기고 피에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1142년부터 1144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루이 7세는 비트리 쉬르 마른을 공격하여 수천 명의 백성을 학살하는 참극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큰 죄책감을 느낀 루이 7세는 테오발도 2세와 화해하고, 1145년에는 엘레오노르가 첫째 딸 마리를 낳으면서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루이 7세는 여전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속죄를 위해 성지 순례를 결심했다. 1145년 가을,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요청으로 루이 7세는 제2차 십자군 참전을 결정했다. 1146년 부활절, 베젤레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열린 회의에서 엘레오노르도 십자군 참가를 선언했다. 그녀는 친척인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과 연락하며 십자군 참여를 준비했고, 자신의 궁정 시녀들과 300명의 봉신들을 소집했다.

1147년 제2차 십자군에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귀족들을 설득하여 참가자를 늘리고, 지원과 교환으로 퐁트브로 수도원 등 교회에 대한 기증이나 특권 갱신을 활발히 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아키텐 군을 이끌고 남편과 함께 참가했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데다 1143년의 비극에 대한 속죄를 십자군에서 찾고 있던 루이 7세에 대해, 엘레오노르는 관광 목적이었으며, 왕비의 수행원과 의류 등의 짐만으로 부대가 형성된 데다, 그 호위 부대도 필요하게 되어, 진군의 큰 방해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제2차 십자군은 루이 7세의 부족한 지도력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프랑스군을 경계했지만,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를 환대했다. 엘레오노르는 그리스 역사학자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게 아마조네스의 여왕 펜테실레이아에 비견될 정도로 칭송받았다.

소아시아에 진입하면서 십자군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니케아 근처에서 독일군이 셀주크 투르크 군에게 대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카드무스 산을 넘던 중에는 투르크 군의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참사의 책임은 엘레오노르에게 돌아갔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후, 엘레오노르는 숙부인 레몽과 군사 전략을 논의했지만, 루이 7세는 예루살렘 순례를 우선시하며 엘레오노르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강제로 예루살렘으로 데려갔고, 다마스커스 공격마저 실패로 끝나면서 십자군은 해산되었다.

지중해 동쪽에 머무는 동안 엘레오노르는 해사법의 발전에 기여할 관례들을 배웠고, 이를 자신의 영지와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3. 4. 이혼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의 사이는 십자군 이전부터 이미 나빠지고 있었고, 십자군 기간 동안 의견 충돌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는 엘레오노르를 억류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지만, 전력은 약화되었고 다마스커스 공격도 실패했다. 귀환 도중 엘레오노르 부부는 다른 배를 탔는데, 엘레오노르의 배는 바버리 해안으로 밀려나 남편과 헤어졌다가 시칠리아팔레르모에서 자신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텐차에서 숙부 레몽의 사망 소식을 들은 엘레오노르는 이혼을 결심하고 교황을 만났지만, 교황은 혼인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둘 사이를 중재하여 둘째 딸 알릭스를 임신하게 했다.

그러나 커지는 불화와 아들 없는 것에 대한 위기감 등으로 1152년 3월 11일 보씨에서 이혼에 합의했다. 3월 21일 대주교들은 교황의 동의 하에 두 사람이 로베르 2세의 후손으로 근친이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 판결을 내렸다. 실제로는 루이 7세가 9촌 아저씨뻘로 당시 유럽 기독교 교리상 결혼에 문제가 없었으나 형식적인 이유였다. 두 딸은 적녀로 인정되어 루이 7세가 양육권을 가졌고,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영지를 돌려받았다.

십자군 원정 실패는 엘레오노르가 비난을 받고 국정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 1150년 둘째 딸 알리스가 태어났지만, 루이 7세는 1151년 1월 13일 슈제르가 사망하자 이혼을 결심했다.[1]

1151년 8월, 헨리 2세가 파리 궁정에 나타나 루이 7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 1152년 헨리 2세가 다시 프랑스 궁정을 방문했을 때 엘레오노르는 11세 연하인 헨리에게 관심을 보이며 지지했고, 루이 7세는 3월 21일 근친혼을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언했다.[3]

4. 잉글랜드 왕비 시절

루이 7세와 이혼한 후, 엘레오노르는 푸아티에로 돌아갔으나, 블루아 백작 테오발드 5세와 낭뜨 백작 조프루아에게 납치될 위험에 처했다. 이들은 엘레오노르와 강제로 결혼하여 그녀의 영지를 빼앗으려 했다. 엘레오노르는 자신을 보호해 줄 강력한 남편이 필요했고, 앙리를 선택하여 푸아티에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결혼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1152년 5월 18일(성령 강림절) 이혼 8주 만에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루이 7세와의 이혼 사유였던 근친 관계와 유사한 혈연적 문제, 그리고 앙리의 아버지 조프루아 5세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문제상세 내용
혈연 관계앙리와 엘레오노르는 3대조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아내 앙주의 에르망가르드에 연결되며, 둘 다 로베르 2세의 후예로 근친 관계였다. 엘레오노르는 로베르 2세의 5대손이고, 헨리 2세는 외증조 할머니를 통해 로베르 2세의 5대손이다.
이전 결혼 논의엘레오노르와 루이의 딸 마리와 앙리 간의 결혼이 근친 관계로 불가능하다고 판결난 적이 있었다.
부적절한 관계 소문앙리의 아버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1154년 10월 25일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엘레오노르는 1154년 12월 19일 잉글랜드 왕비로 대관식을 치렀다. 다만, 1137년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던 엘레오노르는 이 대관식에서 다시 기름부음을 받지는 않았다.[16][17]

이후 13년 동안 엘레오노르는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다.

자녀 이름출생-사망비고
기욤1153년 8월 17일 - 1156년
헨리1155년 2월 28일 - 1183년 6월 11일
마틸다1156년 6월 - 1189년 6월 28일
리처드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
조프리1158년 9월 23일 - 1186년 8월 19일
필립1158년 - 1162년존 스피드의 대 영국사에 언급되나, 근거는 불분명.[18]
엘레아노르1162년 10월 13일 - 1214년 10월 31일
조앤1165년 10월 - 1199년 9월 4일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8/19일



결혼 생활은 다툼과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헨리 2세는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바람둥이였다. 엘레오노르는 헨리의 외도에 복잡한 감정을 보였는데, 일례로 헨리의 사생아 요크의 조프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자라게 했다.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아키텐 지역의 반란, 툴루즈 영지에 대한 권리 주장 실패, 토머스 베켓과의 불화 등 많은 사건이 있었다. 1166년 헨리 2세와 로사문드 클리포드의 염문이 불거지면서,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1167년 딸 마틸다의 결혼을 위해 잉글랜드에 머물렀던 엘레오노르는, 그해 12월 아르장탕으로 재산을 옮기고 헨리 2세와의 별거에 합의한 듯 푸아티에로 떠났다. 헨리 2세는 그녀를 막지 않고 호위병을 붙여주었으며, 이후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영지를 계속 통치했다.

앙주 제국의 영역

4. 1. 헨리 2세와의 재혼

루이 7세와 이혼 후, 엘레오노르는 푸아티에로 돌아갔으나, 블루아 백작 테오발드 5세와 낭뜨 백작 조프루아에게 납치될 위험에 처했다. 이들은 엘레오노르와 강제로 결혼하여 그녀의 영지를 빼앗으려 했다. 엘레오노르는 자신을 보호해 줄 강력한 남편이 필요했고, 앙리를 선택하여 푸아티에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결혼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1152년 5월 18일 (성령 강림절), 이혼 8주 만에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루이 7세와의 이혼 사유였던 근친 관계와 유사한 혈연적 문제, 그리고 앙리의 아버지 조프루아 5세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제상세 내용
혈연 관계앙리와 엘레오노르는 3대조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아내 앙주의 에르망가르드에 연결되며, 둘 다 로베르 2세의 후예로 근친 관계였다. 엘레오노르는 로베르 2세의 5대손이고, 헨리 2세는 외증조 할머니를 통해 로베르 2세의 5대손이다.
이전 결혼 논의엘레오노르와 루이의 딸 마리와 앙리 간의 결혼이 근친 관계로 불가능하다고 판결난 적이 있었다.
부적절한 관계 소문앙리의 아버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1154년 10월 25일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엘레오노르는 1154년 12월 19일 잉글랜드 왕비로 대관식을 치렀다. 다만, 1137년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던 엘레오노르는 이 대관식에서 다시 기름부음을 받지는 않았다.[16][17]

이후 13년 동안 엘레오노르는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다.

자녀 이름출생-사망비고
기욤1153년 8월 17일 - 1156년
헨리1155년 2월 28일 - 1183년 6월 11일
마틸다1156년 6월 - 1189년 6월 28일
리처드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
조프리1158년 9월 23일 - 1186년 8월 19일
필립1158년 - 1162년존 스피드의 대 영국사에 언급되나, 근거는 불분명.[18]
엘레아노르1162년 10월 13일 - 1214년 10월 31일
조앤1165년 10월 - 1199년 9월 4일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8/19일



결혼 생활은 다툼과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헨리 2세는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엘레오노르는 헨리의 외도에 복잡한 감정을 보였는데, 일례로 헨리의 사생아 요크의 조프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자라게 했다.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아키텐 지역의 반란, 툴루즈 영지에 대한 권리 주장 실패, 토머스 베켓과의 불화 등 많은 사건이 있었다. 1166년 헨리 2세와 로사문드 클리포드의 염문이 불거지면서,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1167년 딸 마틸다의 결혼을 위해 잉글랜드에 머물렀던 엘레오노르는, 그해 12월 아르장탕으로 재산을 옮기고 헨리 2세와의 별거에 합의한 듯 푸아티에로 떠났다. 헨리 2세는 그녀를 막지 않고 호위병을 붙여주었으며, 이후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영지를 계속 통치했다.

4. 2. 푸아티에 사랑의 법정

엘레오노르가 남긴 문화적 영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아직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들은 아마도 푸아티에에서 머물던 1168년 - 1173년 시기의 것들이다.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를 푸아티에까지 전송해준 후에 자신의 업무를 보러 다른 곳을 돌아다녔는데, 최근까지도 역사학자들은 엘레오노르가 딸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와 함께 푸아티에에서 전설적인 '사랑의 법정'을 주재했다고 믿었다.[19]

'사랑의 법정'은 마리의 트루아 궁에서 사제로 있던 안드레아 카펠라누스가 1174년 ~ 1196년 사이에 궁정예절에 대해 집필한 책에 나타나는 것으로, 서른 한 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법전'을 기초로 해서 엘레오노르와 마리, 나르본 백작 부인 에르망가르드 등이 주재한 법정으로 젊은 사내들이 궁정연애에 관한 문제를 들고 올 때 시시비비 판정을 내려주었다고 한다.[19]

앨리슨 위어는 이 얘기는 카펠라누스가 만들어낸 문학적 허구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트루바두르들이 그 무렵에도 여전히 엘레오노르를 칭송하는 노래와 시를 짓고, 그녀도 여전히 그들을 궁으로 초대하여 후원한 건 사실이었지만, 카펠라누스가 얘기한 내용들의 전복성 혹은 급진성을 봤을 때 충분히 대중들에게 회자되었을 법하지만, 카펠라누스의 저서 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19]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의 상속자인 리처드를 매우 사랑했고, 1169년 리처드와 루이 7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콘스탕스의 딸인 9세의 아델(영명: 아레이 또는 앨리스)을 약혼시켰다.

푸아티에에 있는 엘레오노르의 성에는 트루바두르기사들이 모여들었고,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약혼자들, 어린 딸들, 그리고 전 남편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난 맏딸 마리도 방문하게 되었다. 아라곤 왕 알폰소 2세와 나바라 왕 산초 6세 등 외국의 군주와 귀족들의 방문도 받아 화려한 궁정 문화가 꽃을 피웠다.

엘레오노르는 푸아티에에서 화려한 행사를 개최하여 기마 경기, 행렬, 축제, 시 낭송회 등을 열고 남프랑스의 많은 귀족과 기사들을 초청했다. 그곳에서 자녀들과 함께 통치하며, 남편과 대립하면서까지 자녀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한편, 푸아티에 궁정을 기사도 정신과 당시 궁정 취미의 중심지로 만들고, 가신들과 시인들 위에 군림했다.

또한 푸아티에에서도 험악한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며, 연애의 규칙을 만들어 그것을 통해 귀족들의 행동을 세련되게 만들고자 했다. 이 계획을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마리에게 맡겼고, 그녀는 궁정 사제 Andreas Capellanus영어오비디우스의 'Ars Amatoriala'(사랑의 기술)을 인용하면서도 내용을 바꿔 쓴 『연애론』(정당한 연애 기술론이라고도 함)을 참고하여 ‘사랑의 궁정’을 열고, 남녀 간의 연애를 모의 재판에 회부하여 귀부인이 판결을 내리는 특이한 행사를 진행했다.

사랑의 궁정 자체는 단순한 상상의 놀이에 불과했지만, 모의 재판을 통해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바치는 기사도 정신을 궁정 연애의 이상으로 삼은 『연애론』의 사상은 유럽 궁정에 널리 퍼져, 기사의 사랑하는 귀부인에 대한 복종은 주종 관계에 비유되었고, 귀족 계급의 유행이 되었다.

4. 3. 반란과 유폐

1173년 아들 젊은 헨리가 아버지 헨리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엘레오노르는 이를 묵인하고 지원했다.[20] 다른 기록에는 엘레오노르가 직접 두 아들을 부추겨 반란에 가담하게 했다고도 한다.[21] 아들들이 파리로 떠난 후, 엘레오노르는 남부 영주들에게 봉기를 촉구했다.[22]

1173년 3월에서 5월 사이, 엘레오노르는 푸아티에를 떠나 이동하던 중 공격을 받아 루앙에 있는 헨리 2세에게 압송되었다. 1174년 7월 8일 헨리 2세와 함께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가 윈체스터 성과 새럼 성 등에 유폐되었다.

이후 16년 동안 엘레오노르는 영국 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유폐 생활을 했다. 유폐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들들, 특히 가장 아꼈던 리처드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가끔은 유폐에서 풀려나기도 했지만, 아들들과 만날 기회는 드물었다. 슈루즈버리 근처 "엘레오노르 왕비의 유폐지"라고 불리는 삼각형 모양의 성 유적은 그녀가 감금되었던 곳 중 하나로 여겨진다.

1183년 젊은 헨리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질로 사망하면서, 헨리 2세에게 엘레오노르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하게 했다.[23] 엘레오노르는 꿈을 통해 아들의 죽음을 예감했다고 전해진다.

1183년 늦여름,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를 노르망디로 소환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6개월간 머물렀다.[24] 이때부터 엘레오노르는 더 많은 자유를 얻었고, 다른 기록에 따르면 헨리 2세 사후 이전에 이미 자유의 몸이었다고도 한다.[24] 1184년 초,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25] 이후 몇 년간 남편과 함께 여행하며 왕국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감시를 받으며 완전한 자유는 누리지 못했다.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의 감시 아래 솔즈베리, 노팅엄셔 , 버크셔 등지를 전전하며 감금 생활을 했다. 1179년 루이 7세가 아들 필립의 병 치유를 위해 베케트의 무덤을 참배했을 때 엘레오노르는 일시적으로 석방되었다. 1183년 젊은 헨리가 사망했을 때, 엘레오노르는 며칠 전 꿈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젊은 헨리의 유언에 따라 엘레오노르에 대한 감시는 느슨해졌다. 1184년에는 행동 범위가 넓어져 웨스트민스터, 버크햄스테드, 웨스트민스터 궁전, 윈저 성 등을 방문하고 가족 회의에도 참석했다.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에게 선물을 주며 태도 변화를 보였는데, 이는 정치적 고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1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엘레오노르는 15년간의 감금 생활에서 벗어났다.

5. 과부 시절

엘레오노르는 1189년 남편 헨리 2세가 사망하고 아들 리처드가 즉위하자 섭정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전역을 순회하며 새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받았고, 도량형 통일과 화폐 개혁을 통해 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여 왕의 권위를 높였다.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난 동안 섭정을 맡아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1190년에는 리처드 1세와 베렝가리아의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직접 이베리아 반도로 가기도 했다. 리처드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포로로 잡히자, 엘레오노르는 몸값 협상을 주도하고 잉글랜드 내 반란 세력을 진압하며 왕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한 후, 막내 아들 이 왕위에 올랐다. 엘레오노르는 존과 프랑스 필리프 2세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와 존의 조카딸 블랑셰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뤼지냥의 휴 9세에게 억류되기도 했지만,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1201년 존과 필리프 2세가 다시 전쟁을 벌일 때, 엘레오노르는 존을 지지하며 아더 1세의 침입을 막았다. 미르보 전투에서 아더 1세가 존에게 생포된 후, 엘레오노르는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1204년 사망 후, 퐁트브로에 있는 남편과 아들 곁에 안장되었다.

프랑스 중부 퐁트브로 수도원에 있는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의 묘상

5. 1. 리처드 1세 섭정

1189년 7월 6일 헨리 2세가 사망하자, 리처드가 왕위를 이었다. 리처드 1세는 즉위 후 윌리엄 마셜을 잉글랜드로 보내 엘레오노르를 석방하고,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잉글랜드 통치를 맡기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했다. 잉글랜드의 감시인은 이미 엘레오노르를 석방한 뒤였다.[27]

엘레오노르는 웨스터민스터에서 아들을 대신하여 영주와 성직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그녀는 "신의 은총과 함께 잉글랜드의 여왕, 엘레오노르"라고 서명하며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1189년 8월 13일 리처드 1세는 포츠머스에 도착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제3차 십자군 참전으로 리처드 1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엘레오노르가 섭정을 맡았고, 리처드 1세가 구금되었을 때는 직접 신성로마제국으로 건너가 몸값 협상을 진행했다.[26]

리처드 1세가 폭풍우로 난파되어 행방불명되자,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를 지키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12월, 루앙 대주교의 편지를 통해 리처드 1세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포로로 잡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즉시 신성 로마 제국 각지에 사자를 보내 감금 장소를 찾고, 사위 하인리히 사자 공의 도움을 받아 석방에 힘썼다. 필리프 2세와 존의 왕위 위협을 견제하고, 교황 첼레스티누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193년 4월, 리처드 1세의 편지로 무사함을 확인하고, 6월에 황제가 요구한 몸값(은화 15만 마르크)이 발표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 등과 함께 잉글랜드 전역에 중과세를 부과하여 은화 10만 마르크를 모금했다. 1194년 1월, 몸값을 가지고 쾰른에 도착했으나, 석방 연기와 장소 변경(마인츠)에 좌절하고 존에 대한 불안한 소식에 심적 고통을 겪었다.[2]

결국 리처드 1세의 황제에 대한 신하 서약 및 매년 5,000 파운드 지불 조건으로, 1194년 2월 4일 마인츠에서 리처드 1세가 석방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아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와 3월 23일 런던에 입성,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4월 17일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리처드 1세의 두 번째 대관식을 거행하여 황제에 대한 신하 서약이 형식적임을 알렸다. 5월 12일, 엘레오노르의 중재로 리처드 1세와 존은 화해했다. 이 기간 동안 리처드 1세는 셔우드 숲에서 며칠간 머물렀고, 엘레오노르는 나무꾼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었는데, 이것이 로빈 후드 전설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리처드 1세의 행적을 지켜보았다. 리처드 1세는 7월 3일 프레테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필리프 2세로부터 앙주 제국을 방어했다. 또한, 아델을 프랑스로 돌려보내고 조안을 툴루즈 백작 레이몽 6세와 재혼시키는 등 미해결 문제도 처리했다.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9세 등과 동맹을 맺어 필리프 2세 포위망을 구축하고, 레오폴트 5세와 하인리히 6세의 사망으로 차기 신성 로마 황제 후보로도 추대되었다 (리처드 1세는 사퇴했고, 조카 오토 4세가 선출됨).

1199년, 리처드 1세가 샬뤼에서 사망하자 엘레오노르는 큰 슬픔에 빠졌다. 엘레오노르는 4월 6일 아들의 임종을 지켰다.

5. 2. 존 왕 통치 시기

1189년 7월 6일 헨리 2세가 사망하고 리처드가 왕위를 계승한 후, 엘레오노르는 아들 리처드 1세와 의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리처드 1세는 즉시 윌리엄 마셜을 잉글랜드로 보내 엘레오노르를 석방하고, 리처드가 도착할 때까지 잉글랜드 통치를 맡겼다. 엘레오노르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아들을 대신하여 영주와 성직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으며, "신의 은총과 함께 잉글랜드의 여왕, 엘레오노르"라고 서명하며 자신의 지위를 명확히 했다. 1189년 8월 13일 리처드 1세가 귀환했고, 제3차 십자군 참전 기간 동안 엘레오노르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리처드가 신성로마제국에 구금되었을 때에는 직접 몸값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27]

1199년 필리프 2세와 존 왕 사이에 휴전 기간 동안, 필리프 2세의 후계자 루이와 존의 조카딸 중 한 명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존은 조카딸 선택을 엘레오노르에게 위임했고, 엘레오노르는 77세의 나이로 카스티야로 가서 우라카와 블랑셰 중 블랑셰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뤼지냥의 휴 9세에게 습격당해 억류되기도 했으나,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풀려났다.[2]

1200년 르 구레 조약이 체결되면서 존 왕과 필리프 2세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존 왕은 아내 이사벨라와 이혼하고, 이사벨라를 빼앗아 재혼했다. 이 행위는 푸아티에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켰고, 1202년 4월 28일 존 왕은 결석 재판에서 대륙 영토 몰수를 선고받고, 노르망디 침공이 시작되었다.

1201년 초, 존 왕과 필리프 2세가 다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엘레오노르는 존을 돕기로 하고 아더 1세를 막기 위해 퐁트브로를 출발했다. 아더 1세는 엘레오노르의 손자이자 존의 조카였지만, 존의 적이었다. 아더 1세는 미라보 성에서 엘레오노르를 포위했지만, 존이 달려와 포위망을 뚫고 아더 1세를 생포했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퐁트브로로 돌아가 수녀원에 들어갔다.

미르보 전투에서 존 왕은 아서를 포로로 잡았지만,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면서 앙주 제국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5. 3. 죽음

1189년 7월 6일 헨리 2세가 사망하고 리처드가 왕위를 계승한 뒤, 엘레오노르는 아들을 대신하여 영주들과 성직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그녀는 "신의 은총과 함께 잉글랜드의 여왕, 엘레오노르"라고 서명하며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27] 1189년 8월 13일 리처드가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제3차 십자군 참전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엘레오노르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리처드가 구금되었을 때는 직접 신성로마제국으로 건너가 몸값 협상을 진행했다.[27]

이후 의 치세까지 살아남아 아들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1199년 필리프 2세와의 휴전 기간 동안, 필리프의 후계자 루이와 존의 조카딸 중 한 명의 결혼 협정이 맺어졌다. 엘레오노르는 77세의 나이로 카스티야로 가서 신붓감을 선택했다. 뤼지냥의 휴 9세에게 습격당해 억류되기도 했으나,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풀려나 1200년 1월 카스티야에 도착했다.[26]

알폰소 8세와 딸 카스티야의 엘레아노르 사이의 딸 중 블랑셰를 신붓감으로 선택하고, 카스티야 궁전에서 2개월간 휴식을 취한 뒤 3월 말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귀환했다. 보르도에서 부활절을 기념하는 동안 메르카디에르가 호위로 왔으나, 4월 10일 존의 라이벌 용병 대장에게 살해되었다.[2] 이 사건으로 엘레오노르는 큰 충격을 받아 퐁트브로에서 안정을 취했으나, 초여름에 병을 얻어 존이 문병을 오기도 했다.

1201년 초반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다. 존 왕과 필리프 2세의 전쟁 중 엘레오노르는 존을 돕기로 하고, 아더 1세를 막기 위해 퐁트브로를 출발했다. 아더 1세에게 포위당하기도 했으나, 존이 포위망을 뚫고 아더를 생포하면서 풀려났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퐁트브로로 돌아가 수녀가 되었다.

1204년 엘레오노르가 사망할 당시, 자녀 중 존과 카스티야의 엘레아노르만이 생존해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남편 헨리 2세와 아들 리처드 1세가 묻힌 퐁트브로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소의 조상은 성경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며,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6. 유산

엘레오노르는 열 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중 여덟 명보다 오래 살았다. 엘레오노르의 후손들은 잉글랜드, 프랑스, 시칠리아, 카스티야, 예루살렘,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리처드 3세의 사망(1485년)까지 그녀의 혈통이 이어졌다.[19]

이름출생사망결혼
프랑스의 루이 7세 (1137년 7월 12일 결혼, 1152년 3월 21일 파혼)
샹파뉴 백작부인 마리11451198년 3월 11일샹파뉴 백작 앙리 1세와 결혼; 자녀 출산, 라틴 제국의 마리 포함
블루아 백작부인 알리스11501198블루아 백작 테오발드 5세와 결혼; 자녀 출산
잉글랜드의 헨리 2세 (1152년 5월 18일 결혼, 1189년 7월 6일 사망)
푸아티에 백작 윌리엄 9세1153년 8월 17일1156년 4월유아 사망
젊은 왕 헨리1155년 2월 28일1183년 6월 11일프랑스의 마르가레트와 결혼; 생존 자녀 없음.
작센과 바이에른 공작 부인 마틸다1156년 6월1189년 7월 13일사자왕 헨리, 작센과 바이에른 공작과 결혼; 자녀 출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포함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1157년 9월 8일1199년 4월 6일나바라의 베렌가리아와 결혼; 자녀 없음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1158년 9월 23일1186년 8월 19일브르타뉴 공작 부인 콘스탄스와 결혼; 자녀 출산
카스티야 왕비 엘레오노르1162년 10월 13일1214년 10월 31일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결혼; 자녀 출산, 카스티야의 헨리 1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 베렌가리아, 포르투갈 왕비 우라카, 프랑스 왕비 블랑슈, 아라곤 왕비 엘레오노르 포함
시칠리아 왕비 조앤1165년 10월1199년 9월 4일1) 시칠리아의 윌리엄 2세 2) 툴루즈의 레이몽 6세와 결혼; 자녀 출산
잉글랜드의 존1166년 12월 24일1216년 10월 19일1) 글로스터 백작 부인 이자벨라 2) 앵굴렘 백작 부인 이자벨라와 결혼; 자녀 출산, 잉글랜드의 헨리 3세, 로마 왕 리처드, 스코틀랜드 왕비 조앤,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이자벨라 포함



엘레오노르는 사망할 때까지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 여왕(1216년 사망)과 잉글랜드의 존 왕(1216년 사망)을 제외한 모든 자녀보다 오래 살았다.[19]

교양과 미모를 겸비하고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엘레오노르는 당시 여성은 남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윤리관에 저항하여,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독립적으로 통치하기로 선택했다. 이 때문에 그녀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엇갈린다.[21]

퐁트브로 수도원의 무명 조각가가 만든 석관상은 볼에 미소를 띠고 양손에 책을 든 자세로 만들어졌다. 이는 학식이 풍부했던 엘레오노르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지며, 퐁트브로 수도원 수녀들이 남긴 기록에는 엘레오노르에 대한 칭찬이 가득하다. 그러나 연대기 작가들은 엘레오노르의 죽음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했을 뿐이며, 그 평가 또한 엇갈린다.[21]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매력, 애교, 명랑한 성격은 연대기 작가들도 인정했으며, 수수한 루이 7세와 비교하며 엘레오노르를 칭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를 불안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22]

헨리 2세와의 두 번째 결혼 생활에서 엘레오노르는 남편과 함께 앙주 제국을 통치했고, 헨리 2세를 이상적인 남편이자 공동 통치자로 여기며 영토 확장을 위해 서로 협력했다.[23] 이 무렵 젊은 시절의 경솔함은 사라지고 아키텐 등 영내 통치에 힘썼지만, 헨리 2세가 베케트를 중용하면서 국정에서 멀어졌다. 또한 헨리 2세에게 로자문드라는 애인이 생기면서 두 번째 결혼 생활도 별거로 끝났다.[24] 이후 엘레오노르는 독립과 자신의 영토를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아 남편에게 반항했다. 감금과 일시적인 석방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결심은 변함없었으며, 감금 기간 동안 정신을 연마하여 폭넓은 시야와 사려 깊음, 친절함을 갖추게 되었다. 젊은 시절 엘레오노르에게 냉담했던 연대기 작가들조차 10년이 넘는 감금 생활에도 쇠하지 않고 행동하는 노년의 엘레오노르를 "비할 데 없는 여성. 아름답지만 겸손하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겸손하며, 조용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여성은 매우 드물다"라고 칭찬했다.[25]

7. 가계도

첫 번째 남편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마리알릭스이들 자매는 모두 아버지 루이 7세의 세 번째 왕비인 샹파뉴의 아델의 형제와 결혼함.
두 번째 남편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5남 3녀)
윌리엄헨리마틸다
리처드제프리엘레오노르
조앤
기타
엘레오노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딸 엘레오노르는 카스티야 왕국에 시집을 갔다. 이러한 정략결혼을 통해 엘레오노르의 혈통은 유럽 여러 국가에 퍼졌고, 후세에 "유럽의 할머니"로 불리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アリエノール・ダキテーヌとは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9-12-05
[2]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3] 서적 Eleanor of Aquitaine: A Biography Penguin Books 1977
[4] 서적 Eleanor of Aquitaine: A Biography Penguin Books 1977
[5] 서적 Eleanor of Aquitaine: A Biography Penguin Books 1977
[6] 서적 Eleanor of Aquitaine : Queen of France, Queen of England Yale University Press 2009-06-02
[7]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8] 문서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푸아티에 지방의 언어
[9]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0]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1]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2]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3]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4]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5] 서적 로마 제국 쇠망사
[16] 서적 Eleanor of Aquitaine: Lord and Lady Palgrave Macmillan 2003
[17] 서적 The Plantagenet empire, 1154 ~ 1224 https://archive.org/[...] Pearson Education 2007
[18]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19]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20] 서적 Book II, Chapter 7
[21] 서적
[22]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23] 서적 Power of a Woman
[24]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25]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26] 서적 Eleanor of Aquitaine: Lord and Lady Palgrave Macmillan 2003
[27]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28] 서적 Eleanor of Aquitaine and the High Middle Ages Marshall Cavendish 2005
[29] 서적 Gospel Chivalry: Franciscan Romanticism Marshall Cavendish 2005
[30] 서적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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