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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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릉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조조, 조비, 조예 시대를 거치며 활약했다. 그는 어린 시절 왕윤의 조카로서 난을 피해 살아남았고,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현령, 태수를 역임하며 치적을 쌓아 조조에게 발탁되었다. 조비, 조예 시대에는 연주 자사, 청주 자사, 양주 자사, 예주 자사를 거치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했다. 말년에는 조방을 폐하고 조표를 옹립하려는 반란을 계획했으나 사마의에게 발각되어 자결했다. 사후에는 반역자로 처벌받았으나, 서진 시대에 사마염에 의해 복권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태원 왕씨 - 왕윤
왕윤은 후한 말 관료로서 동탁 암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황건적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웠으나, 동탁 제거 후 잔당의 반란으로 헌제를 지키다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한, 뛰어난 능력과 충절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 172년 출생 - 서막 (조위)
조위의 서막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농서태수, 남안태수를 거쳐 량주자사 등을 역임하며 제갈량의 북벌을 방어하고 서역과의 통교를 추진하는 등 공을 세워 무후의 시호를 받은 위나라의 관료이다. - 172년 출생 - 노숙
노숙은 후한 말 오나라의 모신으로, 손권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제시하고 손-유 동맹을 성사시켜 적벽대전에서 조조에 맞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략가이자 외교가이며, 사후 손권과 제갈량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다소 어리석은 인물로 묘사된다. - 조위의 태위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조위의 태위 - 화흠
후한 말 혼란기에 여러 세력을 거쳐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 삼공의 지위에 오른 화흠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와 폭거를 저질렀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왕릉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왕릉 |
한자 표기 | 王淩 |
로마자 표기 | Wang Ling |
자 | 언운 (彥雲) |
출생 | 172년 |
출생지 | 병주태원군기현 |
사망 | 251년 6월 15일 |
사인 | 자살 |
친척 | 왕윤 (숙부), 곽회의 아내 (자매) |
관직 | |
작위 | 남향후 (南鄉侯) |
역임 | 정동장군 (征東將軍) 거기장군 (車騎將軍) 사공 (司空) 태위 (太尉) |
섬긴 군주 | |
군주 | 조조 조비 조예 조방 |
2. 초기 생애와 경력
왕릉의 가족은 그의 숙부 왕윤이 192년 군벌 여포의 동탁 암살에 가담하여 처형된 후 시골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효렴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관직 임명을 고려하는 중요한 추천이었고, 중산군 태수가 되었다. 그의 훌륭한 공무는 승상 조조의 눈에 띄어 그의 관청으로 옮겨졌다.[2],[3]
2. 1. 후한 시기
초평 3년, 이각 등이 장안으로 입성하여 사도 왕윤을 비롯한 일족이 모두 살해되었다. 당시 어린 나이였던 왕윤의 조카 왕신·왕릉 형제만이 성벽을 넘어 탈출에 성공하여 향리로 도망쳐 돌아갔다.[2]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발간 현장을 역임했고, 이어서 중산태수로 치적을 올려 조조에게 초빙되어 승상연속이 되었다.[3]
3. 위나라에서의 활약
왕릉은 조조의 군대에서 동오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연주 자사로서 장료의 지휘 아래 손권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승진했다. 동오와의 또 다른 전투에서는 포위된 장군 조휴를 구출했다. 241년에는 오나라 장군 전종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어 거기장군으로 승진했다.[14]
정시 초년(240년)에 왕릉은 정동장군, 가절·도독양주제군사가 되었다.[14][20] 이듬해(241년) 오나라 대장 전종이 작피를 점령하자, 왕릉은 군사를 이끌고 오군과 제방을 두고 다투었다. 여러 날 동안 치열한 전투 끝에 오나라 군대가 패퇴했으나, 왕릉은 오나라 장수 장휴, 고승 등의 저항을 받아 물러났다. 이후 남향후로 봉해지고 식읍 1350호를 받았으며, 거기장군, 의동삼사로 승진했다.[14]
3. 1. 조조 시기
초평 3년, 이각 등이 장안으로 입성하여 사도 왕윤을 비롯한 일족이 모두 살해되었다. 왕윤의 조카이자 당시 어린 나이였던 왕신·왕릉 형제만이 성벽을 넘어 탈출에 성공하여 향리로 도망쳐 돌아갔다.[2]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발간 현장을 지냈고, 이어서 중산태수로 치적을 올려 조조에게 초빙되어 승상연속이 되었다.[3]
조조의 군대에서 왕릉은 동오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연주 자사로서 장료의 지휘 아래 손권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승진했다. 또 다른 동오와의 전투에서는 포위된 장군 조휴를 구출했다.
3. 2. 조비, 조예 시기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왕릉은 산기상시가 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연주자사가 되었다.[14] 여범과 싸워 이긴 후에 임지를 청주로 옮겼다.[14] 당시, 바닷가 지방은 동란이 있은 후 법도가 정비되지 않았다.[14] 왕릉은 정령을 반포하고 교화를 베풀었으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해 기강을 확립해 나갔다.[14] 왕기를 천거하여 별가로 삼아, 그의 협력과 보좌를 받아 통치했으며, 백성들은 왕릉을 칭송했다.[14][15] 양주자사, 예주자사를 지냈다.[14]황초 원년(220년)[4],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왕릉은 산기상시, 이어서 연주자사가 되었다. 황초 3년(222년), 장료 등과 함께 오를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 바람에 휩쓸려 온 여범 등의 배가 착안하자 이를 요격했고, 그 전공으로 건무장군·청주 자사·의성정후로 승진했다. 청주는 동란의 영향을 받아 법률 정비가 불충분했지만, 왕릉이 자사가 되자 행정을 펼쳐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며 강기를 다잡았다. 또한 이때 왕기를 별가로 중용했다. 청주에서는 왕릉에 대한 칭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왕기가 보좌한 것도 그 한 원인이었다고 한다.[5]
황초 6년(225년), 이성군의 병사 채방 등의 반란에 즈음하여, 둔기교위 임복 등과 함께 이를 평정했다.[4]
태화 2년(228년)[6], 석정의 전투에서는 조휴를 수행했다. 위군은 패배했지만 왕릉이 역전하여 포위를 뚫었기에 조휴는 난을 피했다. 같은 해, 양주 자사로 전임되었다.[7] 태화 5년(231년), 오의 손포가 항복을 요청하며 맞이하라고 요구하자 이에 응하려 했지만, 도독 양주 제군사인 만총에 의해 간언받는다. 만총이 소환되자 왕릉은 독장, 병사 700명을 이끌고 맞이하러 가지만, 과연 항복은 거짓이었고, 손포에게 습격당하여 병사의 과반수가 사상했다. 이 이전부터 왕릉과 만총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만총이 소환된 것도 왕릉의 참언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씩씩한 모습을 본 황제 조예는 곧바로 임지로 돌려보냈다.[8]
경초 원년(237년), 예주 자사로 전임되었다.[7]
3. 3. 대오(對吳) 전쟁
문제가 황제가 되자, 장료 등과 함께 광릉에서 손권을 공격했다.[14] 마침 오나라의 장군 여범 등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북쪽 강가에 이르렀는데, 왕릉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맞아 싸워 많은 적을 사로잡고 베었으며 그 배를 획득하여 공을 세웠다.[14] 이 공으로 의성정후에 봉해졌고, 건무장군을 겸하고, 청주자사로 옮겼다.[14]228년, 오나라 파양태수 주방의 계책에 속은 조휴를 따라 오나라를 정벌했는데, 조휴 군은 협석에서 오나라와 싸워 불리했다.[14][17] 왕릉은 힘을 다해 싸워 포위를 뚫었으므로, 조휴는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14]
231년, 오나라 장수 손포가 거짓 항복하여 왕릉을 유인했다. 왕릉이 직접 영접하러 나올 것을 요청하자, 정동장군 만총은 거짓 항복인 것을 간파하고 왕릉이 가지 못하게 말리고 군사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왕릉은 독장 한 명과 보기 7백을 이끌고 손포를 영접하려고 했다.[14] 손포가 밤에 매복하여 습격하였으므로 독장은 도주하였고,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14] 왕릉은 손권이 대군을 부릉 등에 잠복시킨 것을 알고는 달아났다.[14]
정시 초년(240년)에 왕릉은 정동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가절·도독양주제군사가 되었다.[14][20]
이듬해(241년)에 오나라 대장 전종이 쳐들어와 작피를 점령하자, 왕릉은 군사를 이끌고 치러 나와 오군과 제방을 두고 다투었다.[14][21] 위나라 군대와 오나라 군대는 여러 날 동안 치열하게 싸웠으며, 전종이 이끄는 오나라 군대가 불리해져 결국 패퇴했다.[14] 왕릉은 오나라 장수 장휴, 고승, 전서(全緖), 전단(全端)의 저항을 받아 물러났다.[14] 왕릉은 승진하여 남향후로 봉해지고, 식읍 1350호를 받았다.[14] 이 해 거기장군, 의동삼사로 승진했다.[14]
4. 왕릉의 반란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왕릉은 조카 영호우와 함께 황제 조방을 폐위시키고 조표를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4] 그러나 이 계획은 가평 3년(251년)에 발각되었다.[14]
왕릉은 장군 양홍을 보내 연주자사 황화에게 이 계획을 알렸으나, 황화와 양홍은 이를 사마의에게 밀고했다.[14] 사마의는 대군을 이끌고 왕릉을 압박했고, 결국 왕릉은 항복한 후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14]
사마의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했다.[14] 조표는 사형을 당했고, 연루된 자들은 삼족이 멸족되었다.[14] 왕릉과 영호우의 시신은 3일 동안 시장에 전시되는 형벌을 받았다.[14]
4. 1. 배경
정시 9년(248년) 9월, 왕릉은 사공에 임명되었다.[14] 당시 그의 외조카 영호우는 연주자사로 있었다.[14] 정시 10년(249년) 정월, 사마의가 고평릉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연호를 가평 원년으로 바꾸었다.[14] 왕릉은 영호우와 비밀리에 상의하여, 현 황제 조방은 어려서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여기고, 초왕 조표를 새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14]왕릉은 사인 노정을 낙양으로 보내 아들 왕광(王廣)에게 이를 말하게 했는데, 왕광은 “천자를 폐하고 세우는 일은 중대한 일이니, 재난의 징조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답했다.[14] 이 해, 영호우는 먼저 죽었다.[14] 12월, 사마의 정권은 왕릉을 태위로 임명했다.[14]
가평 2년(250년), 형혹성이 남두의 위치로 진입했는데, 왕릉은 이를 보고 갑작스럽게 귀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4]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왕릉은 동평의 백성 호상(浩詳)이 천문을 안다고 들었으므로, 불러서 물었다. 호상은 왕릉이 뜻하는 바가 있다고 의심하여, 왕릉의 뜻을 맞춰주었다. 오나라에 상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하지 않고, 회남은 초의 분야인데, 오늘날 오와 초를 함께 점하고 있으니 마땅히 왕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왕릉은 이로써 뜻을 정했다.
가평 3년(251년) 봄, 오나라에서 도수를 막았다.[14] 왕릉은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더 청했으나 중앙에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14]
4. 2. 모의와 발각
정시 9년(248년) 9월, 왕릉은 사공에 임명되었다.[14] 이때 왕릉의 외조카 영호우는 연주자사였다. 정시 10년(249년) 정월, 사마의가 고평릉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왕릉은 영호우와 비밀리에 상의하여, 황제 조방은 어려서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여기고, 초왕 조표를 새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왕릉은 사인 노정을 낙양으로 보내 아들 왕광(王廣)에게 이를 말하게 했는데, 왕광은 “천자를 폐하고 세우는 일은 중대한 일이니, 재난의 징조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답했다. 이 해, 영호우는 먼저 죽었다. 12월, 사마의 정권은 왕릉을 태위로 임명했다.가평 2년(250년), 형혹성이 남두의 위치로 진입했는데, 왕릉은 이를 보고 갑작스럽게 귀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릉은 동평의 백성 호상(浩詳)이 천문을 안다고 들었으므로, 불러서 물었다. 호상은 왕릉이 뜻하는 바가 있다고 의심하여, 왕릉의 뜻을 맞춰주었다. 오나라에 상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하지 않고, 회남은 초의 분야인데, 오늘날 오와 초를 함께 점하고 있으니 마땅히 왕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왕릉은 이로써 뜻을 정했다.
가평 3년(251년) 봄, 오나라에서 도수를 막았다. 왕릉은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더 청했으나 중앙에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왕릉은 장군 양홍을 보내 연주자사 황화에게 폐립할 일을 알렸는데, 황화와 양홍이 이를 태부 사마의에게 알렸다. 사마의는 왕릉을 사면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대군을 이끌고 왕릉이 있는 곳으로 나아왔다. 왕릉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사마의를 맞이하고 사죄하고 인수와 절월을 보냈으며, 스스로 결박하고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 사마의는 조서를 내려 왕릉의 결박을 풀고, 인수와 절월을 돌려주고 보기 6백을 보내 왕릉을 수도로 돌려보냈다. 왕릉은 항 땅에 이르러서, 약을 먹고 죽었다.
사마의는 수춘에 이르러 이 일을 철저히 조사했다. 영호우의 장수로 조표와 왕래한 장식은 자수했다. 조표는 사형을 당했고, 이 일에 연좌된 자는 삼족을 멸하게 되었다. 춘추 시대, 제나라에서는 최저가 죽은 후 그 죄상이 밝혀지자 형벌을 내려 시신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이고 관을 부수었으며, 정나라에서도 공자 귀생이 죽은 후 그 죄상이 밝혀지자 이와 마찬가지로 형벌을 내렸다. 조정은 이 고사에 따라,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서 관을 자르고, 시신을 부근 시장에서 3일간 말리고, 인수와 조복을 불태우고, 시신을 그대로 흙에 묻었다.[14]
4. 3. 최후
정시 9년(248년) 9월, 왕릉은 사공으로 임명되었다.[14] 이때 왕릉의 외조카 영호우는 연주자사였다.[14] 정시 10년(249년) 정월, 사마의가 고평릉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자,[14] 연호를 가평 원년으로 바꾸었다.[14] 왕릉은 영호우와 비밀리에 상의하여, 현 황제 조방이 어려서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여기고, 초왕 조표를 새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14]이 해 12월, 영호우가 죽자[14] 사마의 정권은 왕릉을 태위로 임명했다.[14]
가평 2년(250년), 형혹성이 남두의 위치로 진입했는데, 왕릉은 이를 보고 갑작스럽게 귀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4]
가평 3년(251년) 봄, 오나라에서 도수를 막았다.[14] 왕릉은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더 청했으나 중앙에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14] 왕릉은 장군 양홍을 보내 연주자사 황화에게 폐립할 일을 알렸는데, 황화와 양홍이 이를 태부 사마의에게 알렸다.[14] 사마의는 왕릉을 사면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대군을 이끌고 왕릉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14] 왕릉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사마의를 맞이하고 사죄하고 인수와 절월을 보냈으며, 스스로 결박하고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14] 사마의는 조서를 내려 왕릉의 결박을 풀고, 인수와 절월을 돌려주고 보기 6백을 보내 왕릉을 수도로 돌려보냈다.[14] 왕릉은 항 땅에 이르러서 약을 먹고 죽었다.[14]
사마의는 수춘에 이르러 이 일을 철저히 조사했다.[14] 영호우의 장수로 조표와 왕래한 장식은 자수했다.[14] 조표는 사형을 당했고, 이 일에 연좌된 자는 삼족을 멸하게 되었다.[14] 조정은 제나라와 정나라의 고사에 따라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서 관을 자르고, 시신을 부근 시장에서 3일간 말리고, 인수와 조복을 불태우고, 시신을 그대로 흙에 묻었다.[14]
5. 평가
왕릉은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된 인물로, 뛰어난 행정 능력과 군사적 재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청주 자사 시절에는 법률을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5] 석정의 전투에서는 조휴를 구출하고, 작피의 역에서는 오나라 전종의 침공을 격퇴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공을 세웠다.[7]
그러나 만총과의 불화, 조표 옹립 시도 등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다. 특히 조표 옹립 시도는 사마의에게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왕릉은 자결하고 만다.[2] 사후에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시신이 3일 동안 시장에 내걸리는 수모를 겪었지만, 서진 시대에 이르러 사면되었다.[9]
종합적으로 왕릉은 능력 있는 관료이자 장수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무리한 정변을 시도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6. 가족 관계
자식으로는 왕광, 왕비효, 왕금호, 왕명산 등이 있었다.[10] 왕광은 왕릉에게서 조표 옹립 계획을 들었으나, 이를 간했다. 비효와 금호는 남다른 재능과 무용을 자랑했고, 막내인 명산은 형제들 중에서 가장 유명했으며, 궁술과 서예 등 다채로운 기예를 지니고 있었다. 장제는 사마의에게 "왕릉은 문무를 겸비한 고금무쌍의 존재이지만, 아들들의 뜻과 힘은 아버지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왕릉에게 연좌되어 주살되었다.
여동생은 곽회의 아내였지만, 왕릉에게 연좌되어 체포되었다. 곽회는 부하들의 탄원에도 아내를 구출하려 하지 않았지만, 곽통 등 아들 5명이 조두하며 구출을 간청하자, 차마 견딜 수 없어 부하를 파견하여 그녀를 되찾았다. 그 후, 곽회는 사마의에게 "5명의 아들이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만약 어머니에게 죽음을 내린다면 그들은 뒤따를 것입니다. 또한 5명의 아들을 잃는다면, 저 또한 곧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라는 문서를 보내 석방되었다.[11]
남북조 시대 송의 왕현모는 왕릉의 일족으로,[12] 어린 시절부터 우수함으로 칭찬받았으며, "태위의 언운(왕릉)의 풍모가 있다"고 평가받았다.[13]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後漢書
[3]
서적
삼국지
[4]
서적
삼국지
[5]
서적
삼국지
[6]
서적
삼국지
[7]
서적
魏方鎮年表
[8]
서적
삼국지
[9]
서적
삼국지
[10]
문서
[11]
서적
삼국지
[12]
문서
[13]
서적
宋書
[14]
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15]
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16]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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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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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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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20]
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21]
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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