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치 다다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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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구치 다다히토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96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유격수로 활약하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후,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에 진출, 2005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9년 지바 롯데 마린스로 복귀하여 2017년 은퇴했으며, 이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통산 2회의 도루왕, 3회의 베스트 나인, 3회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일본 프로 야구와 메이저 리그에서 다양한 기록을 세웠다. 2017년 은퇴 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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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치 다다히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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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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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구치 다다히토 |
출생일 | 1974년 12월 4일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니시토쿄시 |
포지션 | 2루수 / 1루수 / 감독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6년 |
선수 경력 | |
NPB 데뷔 | 1997년 5월 3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MLB 데뷔 | 2005년 4월 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 |
NPB 최종 | 2017년 9월 24일, 지바 롯데 마린스 |
MLB 최종 | 2008년 9월 28일, 필라델피아 필리스 |
선수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7–2004)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5–2007)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7)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8) 지바 롯데 마린스 (2009–2017) |
감독 경력 | |
감독 | 지바 롯데 마린스 (2018–2022) |
국가대표 | |
대표팀 | 일본 |
올림픽 | 1996년 하계 올림픽 |
기록 (NPB) | |
타율 | .270 |
홈런 | 251 |
타점 | 1,017 |
기록 (MLB) | |
타율 | .268 |
홈런 | 44 |
타점 | 205 |
수상 내역 | |
NPB | 3× 일본 시리즈 우승 (1999, 2003, 2010) |
MLB | 월드 시리즈 우승 (2005년) |
메달 | |
올림픽 | 1996 애틀랜타 야구 은메달 |
2. 프로 입단 전
일본 도쿄도 다나시시 (현: 니시토쿄시)에서 忠仁|이구치 다다히토일본어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1993년 졸업 후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뛰어난 활약을 펼쳐 도토 대학 야구 연맹에서 한 시즌 8개의 홈런으로 리그 기록을 세우고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1996년 애틀랜타 하계 올림픽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2. 1. 유년 시절
도쿄도 다나시시 (현: 니시토쿄시)에서 태어났다. 연식 야구팀 "빅토리"에서 포수로 야구를 시작했으며, 초등학교 6학년 때 경식 야구팀 "호야 리틀 리그"로 옮겨 내야수로 전향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최고 학년 때 주장을 맡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중학교 시절 PL학원 고등학교의 고시엔 춘하 연패를 보며 중심 선수였던 다치나미 가즈요시를 동경하게 되었다.[18]
고쿠가쿠인 구가야마 고등학교에서도 유격수로 활약했다. 1991년, 2학년 여름에는 3번 타자 겸 유격수로서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2학년 가을부터 주장을 맡았으나, 이듬해 봄과 여름의 고시엔 전국 대회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
1993년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 진학하여 야구부에서 유격수로 활약했다. 1학년 봄 리그전부터 출전하여, 우승이 걸린 5월 19일 고마자와 대학과의 경기에서 8회에 역전 결승 2점 적시타를 쳐내며 팀의 7시즌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당시 주자 중 한 명은 훗날 프로에서도 팀 동료가 되는 고쿠보 히로키였다. 1996년,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되어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올림픽에서 쿠바 대표팀의 플레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후 메이저 리그 도전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17]
대학 시절에는 동기인 사와자키 도시카즈, 시미즈 마사우미, 구라노 신지 등과 함께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비롯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개인적으로는 1번 타자 겸 유격수로서 '푸른 핵탄두'라 불리며 활약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94년 가을에는 도토 대학 리그 사상 두 번째로 삼관왕을 달성했고, 같은 해 가을 리그에서는 한 시즌 8홈런이라는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이듬해인 1995년에 기록한 연간 최다 홈런 12개(봄 7개, 가을 5개)와 통산 최다 홈런 24개는 2023년 현재까지 리그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학 통산 성적은 101경기 출전, 366타수 103안타, 타율 .281, 24홈런, 61타점, 32도루이다. 최고 수훈 선수(MVP) 2회, 베스트 나인 4회를 수상했다.
1996년 NPB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건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스 등 여러 구단이 관심을 보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동경했던 다치나미 가즈요시가 소속되어 있고, 유격수 자리를 비워두고 1년차부터 주전 기용을 약속한 주니치가 유력하다는 평가가 있었다.[19] 간토 출신인 이구치가 규슈 연고의 다이에에 대해 난색을 표해 요미우리가 유리하다는 시각도 있었다.[18] 그러나 다이에는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선배인 고쿠보 히로키의 뒤를 이을 후쿠오카 돔의 핵심 선수로 이구치를 영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19], 결국 이구치는 드래프트 회의 직전인 11월에 다이에를 역지명했다.[20]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 당일, 다이에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계약금 1억엔, 성과급 5000만엔, 연봉 1300만엔 (추정 금액)의 조건으로 입단했으며[21], 등번호는 '''7'''번으로 결정되었다.
대학 동기인 사와자키 도시카즈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시미즈 마사우미는 지바 롯데 마린스에 각각 1순위(역지명)로 입단하여, 같은 대학에서 동시에 3명의 역지명 및 드래프트 1순위 선수가 배출되었다.
2. 2. 고교 시절
야구를 고등학교에서 시작했으며, 1993년에 졸업했다.2. 3. 대학 시절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 진학한 이구치는 1학년 때부터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당시 팀 주장은 고쿠보 히로키였으며, 동기인 사와자키 도시카즈, 시미즈 마사우미, 구라노 신지, 1년 후배인 다카스 요스케 등과 함께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비롯한 여러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1번 타자 겸 유격수로서 '푸른 핵탄두'(青い核弾頭일본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맹활약했으며, 도토 대학 리그에서 타격 3관왕을 차지하고 리그 신기록인 한 시즌 8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대학 통산 성적은 101경기에 출전하여 103안타, 타율 0.281, 24홈런, 61타점이다. 특히 24개의 홈런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리그 기록이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최고 수훈선수에 2차례, 베스트 나인에 4차례 선정되었다.
1996년에는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종목에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하여 팀의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이때 쿠바 대표팀의 플레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훗날 메이저 리그 도전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여러 프로 야구 구단의 영입 경쟁 끝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역지명했다.[115] 이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에 호크스가 1순위로 지명하여 교섭권을 획득했고, 계약금 1억엔, 성과급 5000만엔, 연봉 1300만엔의 조건으로 입단했다.[116] 등번호는 '''7'''번을 받았다.
3. 프로 선수 시절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졸업 후, 프로 야구 여러 구단의 영입 경쟁 끝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역지명했다.[115] 이후 드래프트 회의에서 다이에가 1순위 지명으로 교섭권을 얻어 계약금 1억엔, 성과급 지급 5000만엔, 연봉 1300만엔(금액은 지정)으로 입단했다.[116] 등번호는 '''7'''번을 받았다.
프로 선수로서 NPB와 MLB에서 활약했다.
;NPB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7년 ~ 2004년)
- 지바 롯데 마린스 (2009년 ~ 2017년)
;MLB
-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5년 ~ 2007년)
-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7년 ~ 2008년)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8년)
;국가 대표 경력
- 1996년 하계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하여 팀의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3. 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1996년 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소속으로 활약하며 팀의 주축 내야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빠른 발을 이용한 도루 능력과 유격수, 2루수로서의 안정적인 수비가 돋보였으며,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3. 1. 1. 1997년 - 2004년
1997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3월 시범 경기에서 오른쪽 발목 부상을 당했지만 시즌 개막에는 큰 영향 없이, 5월 3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4차전)에 2번 유격수로 처음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 1회 첫 타석에서 첫 안타를 기록하고, 4회에는 만루 홈런을 치는 등 성공적인 데뷔를 장식했다. 외국인 선수를 제외하고 신인 선수가 데뷔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기록한 것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타격 부진으로 타율이 2할 대로 떨어지며 주로 하위 타선에 기용되었다.1998년에는 시즌 2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장타력이 향상되었고, ‘恐怖の9番打者|공포의 9번 타자일본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9년에는 개막 초 3번 타자로 나섰으나 타격 부진으로 다시 하위 타선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팀이 우승 경쟁을 벌이는 중요한 순간에 끝내기 홈런을 세 차례나 기록하며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특히 9월 8일, 선두 경쟁 중이던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26차전)에서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상대로 끝내기 만루 홈런을 쳤고, 9월 25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26차전)에서는 가네무라 사토루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어 일본 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건스를 상대로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00년 시즌 중에는 왼쪽 어깨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장기간 전력에서 이탈했다. 일본 시리즈에는 복귀했지만, 부상과 수비 위치 변경의 영향으로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이름의 한자를 '忠仁'에서 '資仁'으로 변경했다.[2]
2001년에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여 시마다 마코토 코치의 조언에 따라 도루왕 타이틀을 목표로 삼았다. 3번 타자로 출전하여 개인 최고 성적인 타율 2할 6푼 1리, 30홈런, 44도루를 기록하며 시즌 최다 도루로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빠른 발을 활용한 유격수 수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유격수 부문)을 동시에 수상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만에서 열린 제34회 IBAF 월드컵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다카하시 요시노부, 이바타 히로카즈 등과 함께 3번·2루수로 활약했다.
2003년에는 타율 3할 이상, 100타점 이상을 기록했으며, 도루 부문에서 다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3. 2. MLB 시절
2004년 시즌 종료 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떠나 MLB로 진출하여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했다.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에서 활동하며 MLB 경력을 이어갔다. MLB에서 활동하는 동안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2008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으로 총 두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3][9]3. 2. 1.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2005년 - 2007년)
그는 2004 시즌 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떠나 메이저 리그의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하며 미국 무대에 진출했다.2005년 시즌 동안 그는 타율 .278, 15개의 홈런, 15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첫 해를 보냈다. 특히 2005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2차전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역전 3점 홈런을 쳐내며 팀의 시리즈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활약에 힘입어 화이트삭스는 보스턴을 3경기 만에 스윕하고, 3주 후 2005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3]
2006년에는 두 차례 멀티 홈런 경기를 펼쳤는데, 두 번 모두 만루 홈런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중 한 번은 시카고 컵스와의 라이벌전인 5월 20일 경기에서 나왔으며, 이 경기에서는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그 해 4월 15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경기에서는 벤지 몰리나의 느린 땅볼 타구를 잡기 위해 몸을 날린 후 넘어진 상태에서도 1루로 송구하여 아웃시키는 인상적인 수비를 보여주었다.[4][5]
2007년 시즌 중반까지 화이트삭스에서 활약하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3. 2. 2. 필라델피아 필리스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2007년 - 2008년)
2007년 7월 27일, 그는 투수 마이클 두비를 상대로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로써 그는 필리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출신 선수가 되었다.[6]2007년 시즌 종료 후인 12월 18일, 이구치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7]

2008년 시즌 중이던 9월 1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방출되었다.[8]
방출된 지 4일 후인 2008년 9월 5일, 전년도에 소속되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다시 계약하며 14개월 만에 팀에 복귀했다.[9] 그러나 이구치의 입단 시점은 포스트시즌 출전 선수 등록 마감일(9월 1일) 이후였기 때문에 포스트시즌 로스터에는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그해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탬파베이 레이스를 꺾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구치는 경기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팀의 일원으로서 월드 시리즈 링을 받았다. 이는 다구치 소와 함께 받은 그의 두 번째 챔피언 링이었다.
3. 3.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2009년 - 2017년)
2009년 1월 19일, MLB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NPB로 복귀하여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했다.[10][11]
이후 2017년 시즌까지 지바 롯데 마린스 소속 선수로 활동했으며,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12]
4. 지도자 경력
지바 롯데 마린스의 감독을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역임했다.
4. 1. 지바 롯데 마린스 감독 시절 (2018년 - 2022년)
(※1) (※2)퍼스트 스테이지
파이널 스테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