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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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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예다는 대한민국 국군 징병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난민으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는 1990년대 서울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생명 존중 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2010년대 대학 재학 중 징병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프랑스 망명을 결심했다. 2012년 프랑스로 건너가 난민 신청 후 2013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한국 군대의 문제점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했다. 그의 결정은 한국 사회의 반응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병역 거부로 인한 망명 인정의 선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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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예다
출생일1991년
출생지서울특별시
거주지프랑스
국적무국적
성별남성
학력전문대학 졸업
직업인권운동가
시민운동가
반전 평화 운동가
기타 정보
종교알려진 정보 없음
배우자알려진 정보 없음
자녀알려진 정보 없음
부모알려진 정보 없음
별명알려진 정보 없음
서명알려진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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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예다는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군 장교였다. 할아버지는 육사 출신 직업 군인이었다.[1] 중학교 1학년 때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고 전생윤회 개념을 알게 되면서 생명존중사상과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4] 20세 무렵 병역의 의무에 대해 고민했고, 대체복무제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 실망했다.[1][3]

고등학교 시절 한미FTA 반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이주노동자, 용산참사 집회 등에 참여하며 정치의식을 키웠다.[5] 의경, 전경이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고 군대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5]

2010년 3월 2일 서울 교외의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전공했다.[1][5] 대학 재학 중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에 경악했다.[1] 일본 망명을 시도했으나, 한국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임을 알고 포기했다.[5]

2012년 2월 전문대학 졸업 후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1] 병역 미필자에 대한 취업 차별도 망명의 한 원인이었다.[1] 모병제 국가이면서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고, 난민 신청을 받아줄 만큼 정치적으로 열려 있는 나라를 찾다가 프랑스를 선택했다.[5]

2012년 7월 초, 인천국제공항에서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행 비행기에 탑승하여 난민 신청을 했다.[1] 2012년 11월 프랑스 난민 무국적자 보호국(OFPRA) 서류 심사, 2013년 5월 면접을 거쳐 2013년 9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1]

2013년 7월부터 프랑스 정부가 난민 신청자에게 제공하는 주거지에서 거주하며 생계비 지원을 받았다.[3] 이후 언론을 통해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2014년 9월 17일부터 9월 20일까지 일본을 방문, 징병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7] 9월 18일 일본 데모쿠라 방송에 출연하여 망명 생활, 자유, 평화에 대해 이야기했다.[7] 2016년 초국가적 시민단체인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JPD 프랑스지부에 가입했다.[9]

2. 1. 학창 시절과 시민운동 참여 (1990년대~2010년)

이예다는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군 장교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육사를 나온 직업 군인으로 퇴역하였다.[1]

중학교 1학년 때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고 전생윤회라는 개념을 알게 되면서, 생명존중사상과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4] 그는 "먹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죽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파리모기를 죽이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20세가 가까워지면서 "총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직업에 종사하는 의무를 다해야 하나?"라고 고민했고, 선배나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야", "병역의 의무라니까" 등의 납득하기 어려운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1]

그는 만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면서 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을 이유 없이 죽일까에 대한 긴 고뇌를 시작했다.[5] 학살에 반대했던 그는 군대 입대 통보가 오기 전 전투병이 아닌 의료 분야에서 복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 대체복무제가 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3] 그는 대체복무제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나도 피해봤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식의 한국인들의 심리에 실망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 선생님을 통해 정치의식에 눈을 뜨면서 여러 집회에 참가했다. 그때 의경, 전경을 목격했는데, 이예다는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 군대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5]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한미FTA 반대 집회,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집회, 이주노동자, 용산참사 집회 등에 참여했다.[5] 이주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차별대우를 반대하는 집회와 병역 반대 집회 등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시위를 해도 사람들이 죽어도 바뀔 가능성은 적어 보이고, 한국은 슬픔을 주는 사회라는 결론을 내렸다.[5]

2. 2. 대학 시절과 망명 결심 (2010년~2012년)

2010년 3월 2일 서울 교외의 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 병역 거부자들의 체험기를 담은 책을 읽고, 한국군의 역사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다.[1] 그는 군대에 가지 않은 채 전문대를 졸업했다.[1]

2010년 4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사고로 사망한 병사들을 영웅으로 추켜세우고,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을 조장하는 것과 그것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에 경악하였다.[1]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웠다.[5] 대학 재학 중 일본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일본한국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임을 인식하고 포기했다.[5] 이후 모병제 국가,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고, 난민 신청을 받아줄 만큼 정치적으로 열려 있는 나라, 그리고 여름이 있는 나라를 찾다가 프랑스를 선택했다.[5]

2012년 2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집 근처 PC방에서 시간당 4300KRW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1] 그는 병역을 마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취업 차별도 망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유럽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중에서 프랑스를 선택했다. 병역이 없는 민주주의 국가 중 난민 신청 시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를 찾다가 결국 프랑스 망명을 선택했다.[1] 망명을 결심하자 그의 가족과 지인들은 찬성과 만류로 의견이 나뉘었다. 그의 아버지는 찬성했지만, 어머니는 강력 반대하였다.[1] 프랑스독일이 서로 이예다의 망명을 받아주려고 경쟁을 했는데 이예다가 프랑스를 선택하자 독일이 매우 애석해했다. 2012년 7월 초,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 프랑스에 입국해 다음날 난민 신청을 지원하는 NGO "FTDA"에 도착하였다.[1]

2. 3. 프랑스 망명과 난민 인정 (2012년~2013년)

그는 병역을 마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취업 차별도 망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문대 졸업이면 아예 일자리도 별로 없는 데다가 많은 기업이나 정부기관은 '병역'을 취업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잖아요. 병역을 거부하면 거의 같은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고 출소 후에는 '전과자'가 됩니다. 전망이 없는 한국 사회가 원망스러웠고, 그런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죠[1]"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럽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중에서 프랑스를 선택했다. 병역이 없는 민주주의 국가 중 난민 신청 시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를 찾다가 결국 프랑스 망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1] 한편 그가 망명을 결심하자 그의 가족과 지인들은 찬성과 만류 등 다양한 의견으로 나뉘었다. 그의 아버지는 "네가 결정한 것이라면"이라고 하며 별로 말씀을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강력 반대하였다.[1] 이 과정에서 프랑스독일이 서로 이예다의 망명을 받아주려고 경쟁을 했는데 이예다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독일이 매우 애석해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무조건 참아! 군대 가!" "감옥에 2년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잖아"라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항공권과 생활비를 어머니가 마련해주었다. 2012년 7월 초에 관광 명목으로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 편으로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 프랑스에 입국해 다음날 난민 신청을 지원하는 NGO "FTDA"에 도착하였다.[1]

2012년 7월, 그는 비행기 편으로 출국, 프랑스파리에 도착, 난민 신청을 했다. 인천국제공항을 떠난 그는 비행기 편으로 처음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입대를 두 달 앞둔 때였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군대만큼은 절대로 갈 수 없다는 결심을 굳혔다.[3] 그는 700000KRW을 들여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샀고, 편도였다.[3] 사회보장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는 프랑스를 택했다.[3] 출국 당시 그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3]"고 결심했다.

공항을 나와 파리시로 향했다. 숙소를 잡은 뒤, 곧바로 난민 신청 절차를 알아보았다. 파리에선 난민 신청을 도와주는 단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3] 수중엔 어머니가 쥐어준 500000KRW뿐이었다.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밤엔 노숙을 하기도 했다.[3] 난민 신청을 위한 임시 주소 등록, 의료 보험 신청 등을 거쳐 2012년 11월 프랑스 난민 무국적자 보호국(OFPRA)의 서류 심사가 있었고, 2013년 5월에 면접을 봤다.[1] 이후 그의 망명 신청 심사는 무난히 통과되었다.

2013년 7월 프랑스 정부에서 난민 신청자에게 주는 주거지에서 머물 수 있게 됐다. 프랑스에서도 난민 신청자들의 구직 활동은 금지된다. 그러나 생계비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3] 당시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호소했다. 눈 딱 감고 군대에 다녀온 뒤, 잘못된 점을 조금씩 고쳐나가면 안 되느냐고. 때론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가지 않겠다며 나라와 가족마저 떠나느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3]

그는 프랑스 정부에 난민 신청서를 제출했고, 2013년 9월 통과되었다. 그는 난민 신청서에서 사회 구성원으로부터의 박해와 수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심사관들은 북한과 남한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고 놀라기도 했다.

2. 4. 프랑스 정착과 한국 군대 문제 폭로 (2013년~현재)

2012년 7월, 이예다는 입대를 두 달 앞두고 프랑스 파리로 출국하여 난민 신청을 했다.[3]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한 그는 70만원을 들여 구입한 편도 비행기 티켓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사회보장 제도가 잘 갖춰진 프랑스를 택했다.[3] 그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3]"고 결심했다.

파리에서 난민 신청 절차를 밟은 그는, 2012년 11월 프랑스 난민 무국적자 보호국(OFPRA)의 서류 심사와 2013년 5월 면접을 거쳐 망명 신청이 무난히 통과되었다.[1] 2013년 7월부터는 프랑스 정부에서 난민신청자에게 제공하는 주거지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고, 생계비 지원도 받았다.[3]

2013년 9월, 프랑스 정부는 그의 난민 신청을 수락했다. 그는 난민 신청서에서 사회 구성원으로부터의 박해와 수감에 대한 두려움을 이유로 들었다. 심사관들은 북한남한을 혼동한 것이 아닌지 놀라기도 했다.[3]

이후 그는 언론을 통해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2014년 9월 17일부터 9월 20일까지 일본을 방문하여 징병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7] 그는 한국군 내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관행과 열악한 병사 처우를 폭로했다.[7]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병역 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알렸다.[7]

9월 18일 일본 데모쿠라 방송에 출연하여 아마미야 카린 등과 함께 망명 생활, 자유,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7]

2016년에는 초국가적 시민단체인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JPD 프랑스지부에 가입했다.[9]

프랑스 난민 무국적자 보호국(OFPRA) 면접에서 그는 병역 미필자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 한국 군대 내 인권침해와 가혹행위 등을 폭로했다.[1] 면접관들은 남한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1] 2013년 6월, 그의 망명 신청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승인되었다.[1]

그는 군 당국의 불상사 은폐 시도와 미봉책을 비판하며, 징병 대상인 젊은 세대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1]

3. 신념과 논란

이예다는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고 생명 존중 사상과 전쟁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4] 그는 다른 생명을 쉽게 죽여도 되는지에 대한 회의를 품었고,[4] "총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직업에 종사하는 의무를 다해야 하나?"라고 고민했다.[1]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민간인 탄압, 베트남과 이라크에서의 외국인 학살 등을 언급하며 "진정 국민을 위한 군대라고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제기했다.[1] 천안함 사건 당시에는 언론과 민간 단체가 전사자들을 영웅시하고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전쟁은 쉽게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고, 군대가 신성하고 멋있다는 사회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밝혔다.[1]

대학 재학 중 일본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어를 공부했으나, 일본한국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임을 알고 포기했다.[5] 이후 모병제를 오랫동안 유지한 프랑스를 선택했다.[5]

병역을 마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취업 차별 또한 망명의 한 원인이었다. 전문대 졸업 후 일자리가 부족하고, 많은 기업과 정부 기관이 병역을 취업 조건으로 내거는 현실에서, 병역 거부는 전과자가 되는 길이라며, 전망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한 원망과 충격으로 국외 탈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1]

3. 1. 양심적 병역 거부와 망명 이유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고 생명존중사상과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4] 그는 다른 생명을 쉽게 죽여도 되는가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면서,[4] "총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직업에 종사하는 의무를 다해야 하나?"라고 고민하게 되었다.[1]

학살에 반대했던 그는 군대 입대 통보가 오기 전 전투병이 아닌 의료 분야에서 복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 대체복무제가 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3] 그는 대체복무제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 나도 피해봤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한국인들의 심리에 대해 실망했다.

5.18 때 민간인을 탄압했고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외국인을 학살했다며 "진정 국민을 위한 군대라고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제기했다.[1] 천안함 사건 당시 언론과 민간 단체가 사고로 죽은 병사들을 영웅시하고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전쟁은 쉽게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고, 군대가 신성하고 멋있다는 사회의 분위기가 무서워졌다고 밝혔다.[1]

대학 재학 중 일본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어를 수강했다. 그러나 일본한국과 같은 전체주의 사회임을 인식하고 일본 망명을 포기했다.[5] 이후 모병제를 오랫동안 유지한 프랑스를 선택했다.[5] 2012년 2월 서울 모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2012년 7월프랑스로 출국하여 난민 신청을 했다.

병역을 마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취업 차별도 망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는 전문대 졸업이면 일자리가 별로 없는 데다가 많은 기업이나 정부기관은 "병역"을 취업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고, 병역을 거부하면 거의 같은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고 출소 후에는 '전과자'가 된다며, 전망이 없는 한국 사회가 원망스러웠고, 그런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1]

2013년 9월, 프랑스 정부에 제출한 난민 신청서가 통과되었다. 그는 난민 신청서에서 사회 구성원으로부터의 박해와 수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강제적 징병제도는 사람을 죽이도록 훈련하는 일이며, 이는 자신의 신념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했다.[3][6]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조국의 배신자’와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차별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다.[3][6]

3. 2. 한국 사회의 반응과 논란

이예다는 고등학교 재학 중 한미FTA 반대 집회,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이주노동자 차별 반대 집회, 용산참사 집회 등에 참여하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5] 그는 집회에서 의경, 전경이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 군대가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5]

2010년 4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자, 언론과 사회가 희생된 병사들을 영웅시하고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는 분위기에 대해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1]

그는 병역을 마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취업 차별 문제도 지적하며, 한국 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전문대 졸업 후 일자리가 부족하고, 많은 기업과 정부 기관이 병역을 취업 조건으로 내거는 현실에서, 병역 거부는 전과자가 되는 길이며, 한국 사회는 전망이 없다고 느꼈다고 한다.[1]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개인적인 신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예다는 결국 프랑스로의 망명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바뀌기 어렵다는 절망감과 함께, 군 복무 대신 감옥을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5][10]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사무소장 니콜라 베클란은 한국이 대체 복무제를 인정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2]

3. 3. 생명 살상 반대와 전쟁 회의론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던 중, 생명존중사상과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4] 책 붓다를 읽고 그는 다른 생명을 쉽게 죽여도 되는가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때부터 만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면서 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을 이유 없이 죽일까에 대한 긴 고뇌가 시작되었다 한다.[5] 학살에 대해 반대했던 그는 군대 입대 통보가 오기 전 전투병이 아닌 의료 분야에서 복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대체복무제가 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3] 그는 대체복무제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나도 피해봤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한국인들의 심리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다.

그는 동성애자도 아니고, 어떤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고, 운동권의 영향이나 압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나의 양심은 총을 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5]

그는 무조건 살생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즉 먹고 살기 위해 혹은 방어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주변에 있는 작은 벌레들을 습관처럼 죽인다.[5]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무 이유가 없다'였고, 그래서 죽이지 말자고 결정했다. 그는 생명이기에 자신에게 그 생명을 단절 시킬 권한이 없다고 보았다.[5]

그는 일단 육식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다만 필요 이상의 학살, 재미로 생명을 죽이는 것을 비판하였다. 생존과 관계 없이 생명을 죽이는 것도 반대하였다.

모기에 물리면 가렵고 따갑지만, 인간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5] 그런데도 모기를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정 귀찮아지면 손으로 모기를 살짝 포위해서 창밖에 놔주는 방법을 택했다 한다.[5]

2012년 난민들을 위한 시설에서 지낼 때 빈대를 만났다. 처음에는 견뎠다. 그런데 그것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빈대와 함께 지내다 보니 남들과의 신체 접촉도 꺼려졌다. 내가 그들에게 빈대를 옮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건 나에게 정말 큰 피해를 주는 경우니까 어쩔 수 없다, 하고 빈대를 죽였다.[5] 살충제를 사다가 철저하게. 그에 의하면 10년 만에 처음으로 살생했다 한다.[5]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데즈카 오사무의 책을 읽은 이후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는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의경들, 군대 내 폭력, 해외 파병되어 미국을 위해 싸우는 한국 군대를 보며 그는 계속 질문했다.[4] 그는 군대 내부에서도 폭력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국민을 지킨다는 이름하에 다른 사람을 학살, 폭력을 가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감도 품게 되었다. 권력자를 위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서의 군대, 거기서 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 폭력에 동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 예다를 이끌었다.[4] 결국 그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따라 난민의 삶을 선택했다.[4]

4. 영향과 평가

2014년 9월 17일부터 9월 20일까지 4일간 이예다는 안악희 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징병 반대 운동을 하였다.[7] 그는 반대 시위에서 2014년 내내 벌어진 한국군 내의 사고들을 언급하며, 한국군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구습을 유지하고 있는지, 병사들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 폭로하였다.[7] 또한 민주화 이후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병역 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렸다.[7]

9월 18일에는 오챠노미즈 역 근처 데모쿠라 방송 본사를 방문하여 유료 인터넷 방송인 데모쿠라(데모크라시)TV에 출연, 일본 시민운동가 아마미야 카린 등과 함께 한국 군대의 인권 실태와 불합리함을 고발했다.[7] 달라이 라마일본 수상들이 회견한 도쿄의 모 장소에서 망명객으로서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7]

아마미야 카린이 한국 군대 병사들의 월급과 일상 통제에 대해 이야기하자, 한 경제학자는 "한국은 이제 돈이 많으니 모병해도 될 텐데? 오히려 (이런 식의) 징병제는 마이너스가 될 텐데"라고 심드렁하게 반응하기도 했다.[7]

방송 후 이예다는 양성택 등과 데츠카 오사무 작품이 그려진 벽화를 방문하고, 다카노바바에서는 북한 전문 취재 일본인 기자를 만났다. 그는 "탈북자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탈남자'는 처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7] 9월 20일에는 아마미야 카린이 필진으로 있는 시사 웹진 '매거진9' 편집부 주최 토크쇼("마가 큐 학교(マガ9 学校)")에 참석, 이란 출신 망명 신청자를 만나기도 했다.[7]

일본 자위대가 정규 군대로 편성되는 것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은 이예다의 망명과 난민 신청에 주목했다. 아마미야 카린집단적 자위권 문제로 "군대"라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다가왔지만,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 괴리가 크다고 지적했다.[1] 2014년 당시 일본은 "이슬람 국가" 인질 사건으로 자위대 해외 파견 논의가 진행되었고, 테러 위협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자위대 문제에 비판적인 시민운동가들은 병역과 군대 폭력성을 알리기 위해 이예다를 일본 사회에 소개했다. 아마미야 카린은 미국의 경제적 징병제(실업, 저임금 등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군대를 지원하는 것)를 언급하며, "한국에서는 병역 거부 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양심적 병역 거부도 못하다니, 얼마나 비인간적인 시스템인가"라고 비판했다.[1]

2014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예다는 "군 인권, 군대에 아들을 보낸 어머니들, 열악한 여건에서 최저임금도 못 받으며 2년을 보내야 하는 청년들을 위해 써달라"고 요청했다.[4] 그는 난민이 되지 못하면 다른 나라로 가거나 숲 속에서 살 생각이었다고 한다.[3]

이예다의 프랑스 망명은 국방부가 그의 아버지의 준장 진급 심사를 제외시키는 초강수를 두게 만들었고, 결국 그의 아버지는 대령으로 제대했다.

일부는 이예다를 조국 배신자라고 비판[11]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처럼 도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이예다는 병역 거부 사유만으로 망명이 받아들여진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참조

[1] 뉴스 병역을 거부하고 망명한 이예다씨, 그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 http://www.huffingto[...] 허핑턴포스트 2015-04-08
[2] 뉴스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선고…다시 불붙은 논란 http://news.sbs.co.k[...] SBS 뉴스 2017-01-27
[3] 뉴스 한국인 예다씨, 왜 무국적 난민을 택했나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13-11-22
[4] 칼럼 "[김선우의 빨강] 양심의 목소리 따라 살기" http://www.hani.co.k[...] 한겨레 2014-10-06
[5] 뉴스 유병언 망명 거부한 프랑스, 이 남자는 왜 받아들였나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4-06-06
[6] 문서 신청서는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7] 뉴스 고생시키고 돈도 주지 않는 이상한 군대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4-11-19
[8] 웹인용 유병언 망명문의는 장난전화…"검찰 뭐했나" https://news.naver.c[...] 2020-06-04
[9] 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망명이 가능할까?: 박근혜 사례로 알아보는 망명 가이드 http://www.huffingto[...] 허핑턴포스트 2016-12-27
[10] 뉴스 21세기에 좌파로 산다는 것은? http://www.redian.or[...] 레디앙 2015-08-08
[11] 뉴스 평범한 한국 청년, 프랑스서 난민 인정된 이유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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