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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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1707-1788)은 프랑스의 박물학자, 수학자, 우주론자, 백작이다. 그는 1730년대부터 파리로 이주하여 과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파리 왕립식물원 원장을 41년간 역임하며 자연사 발전에 기여했다. 뷔퐁은 진화론의 아버지로 불리며, 뷔퐁의 바늘 문제로 알려진 확률론 연구, 지구의 나이를 측정한 지질학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뛰어난 글쓰기 능력을 바탕으로 《박물지》를 저술하여 대중에게 과학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찰스 다윈, 에른스트 마이어 등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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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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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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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
출생 | 1707년 9월 7일 |
출생지 | 몽바르, 부르고뉴, 프랑스 왕국 |
사망 | 1788년 4월 16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분야 | 박물학 |
직장 | 프랑스 학술원 |
알려진 업적 | 《박물지》 (1749–1804) 뷔퐁의 바늘 문제 기각 샘플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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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배경 | |
지도 학생 |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
2. 생애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은 1707년 부르고뉴의 몽바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금세를 걷는 하위직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학식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1714년 어머니의 삼촌이 사망하면서 뷔퐁 가문은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고, 아버지는 뷔퐁 마을을 구입하고 디종의 참사원 의원이 되었다.
뷔퐁은 어린 시절 수학, 물리학, 박물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을 공부했다. 1726년 법학 자격증을 땄지만, 수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728년 앙제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앙제에서 그는 당대 수학자들과 교류하고, 뉴턴의 책을 읽으며, 식물 채집과 의학 강의도 들었다.
뷔퐁은 수학적 재능뿐 아니라 사교성도 뛰어났다. 그러나 앙제에서 격투 사건에 휘말려 고향으로 피신해야 했다. 1730년, 그는 영국 귀족 킹스턴 공작과 그의 가정교사를 만나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 여행 중 뷔퐁은 자신의 이름에 '드 뷔퐁'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1732년, 어머니의 사망과 아버지의 재혼 문제로 뷔퐁은 상속 분쟁을 겪었다. 그는 투쟁 끝에 유산을 상속받고 뷔퐁 마을을 되찾았다. 이후 연 8만 리브르에 달하는 수입을 바탕으로 재산을 불려나갔고, 묘목밭 개발과 철 주물공장 운영에도 손을 댔다.
1732년 파리로 이주한 뷔퐁은 볼테르 등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과학적 경력을 쌓았다. 그는 미적분학을 확률론에 도입한 뷔퐁의 바늘 문제로 이름을 알렸고, 1734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39년에는 왕립 식물원 책임자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맡으며 식물원을 연구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752년, 뷔퐁은 20세의 마리 프랑수아즈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두었다. 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뷔퐁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1769년 아내가 사망하고, 1772년 뷔퐁이 병에 걸리자, 그는 어린 아들에게 식물원 감독관 자리를 물려주려 했다. 뷔퐁은 1788년 파리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은 프랑스 혁명 시기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37]
2. 1. 유년 및 청년기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백작은 1707년 부르고뉴 몽바르에서 벤자민 프랑수아 르클레르와 앤 크리스틴 멀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5][36] 그의 아버지 벤자민 프랑수아 르클레르는 소금세를 담당하는 하급 지방 관리였고, 어머니는 공무원 집안 출신이었다.[36] 조르주루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삼촌이자 대부였던 조지 블레이소트에게서 따왔다.[35]1714년 조르주루이의 삼촌 블레이소트가 사망하면서 어머니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1717년, 조르주루이의 아버지는 이 돈으로 몽바르 북쪽에 위치한 뷔퐁 마을을 샀다. 벤자민 프랑수아는 부르고뉴 의회 의원이 되었고, 가족은 몽바르를 떠나 디종으로 이주했다.[35]
1717년부터 1723년까지 조르주루이는 디종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뉴턴의 이항정리를 재발견하기도 했다.[35] 1723년부터 1726년까지 디종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수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35][36]
1728년, 뷔퐁은 디종을 떠나 앙제 대학교에서 수학과 식물학을 공부했지만, 결투 사건으로 그곳을 떠나야 했다. 디종으로 돌아온 뷔퐁은 킹스턴 공작(뷔퐁보다 4살 어림)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35]
1729년, 벤자민 프랑수아는 뷔퐁 마을을 팔았다. 이때부터 뷔퐁은 자신을 르클레르 드 뷔퐁이라 서명했다.[35]
1730년 12월, 뷔퐁은 킹스턴 공작과 그의 가정 교사인 의사 내이선 힉맨과 함께 디종을 떠나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여행했다.[5] 1731년 3월, 리옹에서 뷔퐁은 일행과 헤어져 디종으로 돌아갔다.[35]
1731년 8월, 뷔퐁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1732년 3월, 킹스턴 공작과 힉맨은 파도바 대학교에 들어갔고, 뷔퐁은 디종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7월, 뷔퐁은 과학 연구를 위해 파리로 옮겼다.[35]
1732년 8월에서 10월 사이, 홀아비가 된 뷔퐁의 아버지 벤자민 프랑수아 르클레르는 22세 여성과 재혼을 계획했다. 뷔퐁은 재산 상속 문제로 이 결혼을 반대했다. 1732년 12월, 벤자민 프랑수아 르클레르는 재혼했고, 뷔퐁은 어머니로부터 받을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 상속받았다.[35] 1733년 봄, 뷔퐁은 토지와 삼촌 블레이소트의 유산을 얻는 데 성공, 재산을 잘 관리하여 연 8만 리브르(당시 약 27킬로그램의 금)의 수입을 얻었다.[6]
2. 2. 과학적 활동
뷔퐁은 1732년 파리로 이주하여 볼테르 등 여러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기하학을 확률에 적용해 '뷔퐁의 바늘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고, 이와 관련된 논문으로 과학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수학 분야에서 입지를 다졌다.[36] 1734년, 뷔퐁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스위스 수학자 가브리엘 크라메르와 친분을 쌓았다. 이후 뷔퐁은 목재의 인장강도에 관한 장기간의 실험을 수행하였다. 자연 관찰을 중요시했던 그는 실험을 했던 사유지에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하였다.1739년, 뷔퐁은 박물학에 대한 흥미로 과학원의 기술부에서 식물부로 옮겼고, 같은 해 모르파의 도움으로 파리 왕립식물원 원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41년간 이 자리를 지키며, 왕립식물원을 연구 중심지이자 박물관으로 발전시켰다. 전 세계의 식물들을 심고, 동식물 그림을 그리고, 관리자와 토지 소유자, 변호사 등을 고용했다.[36] 1771년에는 세느강 서쪽 땅까지 식물원을 확장했다. 1753년, 뛰어난 글쓰기 능력으로 프랑스 아카데미에 들어갔다.[36]
뷔퐁은 목재의 인장강도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며, 작은 목재와 큰 목재의 성질을 비교하는 실험 등을 수행했다. 수천 개의 결함 없는 작은 목재의 성질을 탐구하여 작은 목재의 성질을 추론하고, 건축구조물을 이루는 목재에 관한 실험들을 진행했다.
뷔퐁은 확률론에 미분과 적분 미적분학을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제시하고 푼 '뷔퐁의 바늘 문제'는 몬테카를로 방법으로 응용되어 π값을 예측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뷔퐁의 바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바닥에 간격이 일정한 평행선들이 있고, 바늘을 떨어뜨렸을 때 평행선 위에 겹칠 확률은?
이 문제는 기하학적 확률 문제로, 적분을 이용해 답을 얻을 수 있다. 바늘의 길이를 , 평행선 사이의 간격을 라 하고, 라 할 때, 바늘이 평행선과 겹칠 확률 는 다음과 같다.
- 일 때:
- 일 때:
- 일 때:
뷔퐁의 바늘 문제는 자연 현상에서도 응용 사례를 찾을 수 있다. Bath University의 Centre for Mathematical Biology 연구에 따르면, 개미들은 둑의 크기를 알아볼 때 뷔퐁의 바늘 문제와 유사한 원리를 사용한다. 개미들은 둑을 두 번 오르내리면서 두 번째 경로가 첫 번째 경로와 얼마나 겹치는지를 세어 둑의 크기를 추정한다.

2. 2. 1. 뷔퐁의 산업
뷔퐁은 과학적인 활동 외에도 부르고뉴 운하 근처 몽바르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768년부터 1772년까지 자신의 토지에 제철소를 건설했는데, 이는 건물과 시스템을 제조 단계에 최적화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주거 시설까지 갖춘 초기 통합 공장의 형태였다.[35]
뷔퐁의 제철소는 철제품, 계단 난간 등을 생산했으며, 뷔퐁 자신의 연구 실험실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냉각 현상을 연구하며 지구 생성에 관한 과학적 작업을 진행했다. 1777년, 뷔퐁은 개인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제철소 관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나, 관리자의 비리로 인해 1791년에 제철소를 매각하게 되었다.[35]
2. 3. 말년
1752년, 뷔퐁은 부르군디주의 가난한 귀족 가문의 딸, 20세의 마리 프랑수아즈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딸과 아들이 있었으나, 딸은 유년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1764년에 태어난 아들(별명 뷔퐁넷)은 승마를 즐기고 낭비벽이 심했으며, 지적 능력은 형편없었지만 뷔퐁은 아들을 위해 장교 직책을 돈으로 샀다. 뷔퐁의 아내는 1769년 아들을 낳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37] 1772년 뷔퐁은 심하게 아팠고, 8살밖에 안 된 아들이 식물원 감독관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37] 1788년 뷔퐁은 파리에서 사망했고, 뷔퐁넷은 프랑스 혁명 후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37]뷔퐁은 시간을 귀중한 재산이라 생각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하인 조제프와 약속하고 노력한 결과 늦잠 자는 습관을 고칠 수 있었다. 그 후 40년 동안 뷔퐁은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저녁에 다시 5시부터 9시까지 연구하는 생활을 계속했다.[40]
3. 과학적 업적
뷔퐁은 1748년 존 니덤의 현미경 관찰을 통해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근거를 찾고 종 이론을 확립했다. 그는 식량 공급보다 생물 증가 속도가 빨라 동물들이 생존 경쟁을 한다고 보았다. 단일 종 내 변종, 일부 동물의 멸종 또는 진화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서로 다른 동물 간 구조적 유사성을 통해 화석 간 관련성을 발견하고 진화 문제에 대한 실험적 접근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뷔퐁은 다윈의 진화론에 포함된 주요 요소를 거의 다 제시했지만,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기술했다. 다윈이 제시한 구체적인 증거, 메커니즘, 경로 등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진화의 핵심 증거인 고생물학, 발생학, 지리학적 분포, 비교 해부학 등을 간과하여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특히 화석과 발생학적 증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지구가 태양과 혜성의 충돌로 태양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한 뷔퐁은 지구는 태초에 용융 상태였고 냉각되어 생명이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냉각 시간을 근거로 지구의 나이가 최소 7만 5천 년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신학자들이 추론했던 6000년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지구 크기의 쇳덩이가 식는 데 5만 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뷔퐁은 이를 바탕으로 크기가 다른 철구슬을 가열하여 식는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을 고안, 지구의 나이를 추정했다. 비록 부정확했지만, 성경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측정치를 외삽하여 지구의 나이를 측정했다는 점에서 과학적인 시도였다.
뷔퐁은 동물 세계를 조사하면서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른 지역에 뚜렷한 동식물이 분포한다는 사실(뷔퐁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는 생물지리학의 첫 번째 원칙으로 간주된다. 그는 종이 창조 중심에서 분산된 후 "개선"되거나 "퇴화"되었을 수 있다고 제안했고, 사지 동물이 38마리의 원본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변환론자이자 다윈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기후 변화가 종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뷔퐁은 "구세계와 신세계 모두에 공통적인 동물은 후자에서 더 작다"고[14] 주장하며 환경 조건을 그 원인으로 보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무스 표본을 통해 뷔퐁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했고, 뷔퐁은 이를 인정하고 다음 권에서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17]
''Les époques de la nature''(1778)에서 뷔퐁은 태양계의 기원을 혜성과 태양의 충돌로 추측했다.[18] 그는 철의 냉각 속도를 기준으로 지구의 나이가 최소 75,000년이라고 계산했는데, 이는 제임스 어셔 대주교가 결정한 지구의 기원(4004 BC)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소르본에 의해 비난받았고, 그는 다시 철회를 발표했다.[19]
뷔퐁은 맘모스나 유럽의 코뿔소와 같은 멸종된 종의 존재를 알았고, 그의 추정은 대륙 이동과 같은 현대 모델에 영감을 주었다.
3. 1. 확률론 및 뷔퐁의 바늘 문제
1732년, 뷔퐁은 확률론에 미분과 적분 미적분학을 도입한 ''Sur le jeu de franc-carreau프랑스어''(정방형 게임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뷔퐁의 바늘 문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8]뷔퐁의 바늘 문제는 1733년(18세기)에 뷔퐁이 처음 제안한 것으로, 바닥에 간격이 일정한 평행한 선들이 있을 때, 길이가 주어진 바늘을 떨어뜨렸을 때 평행선 위에 바늘이 겹칠 확률을 묻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기하학적인 확률문제로 적분을 이용해 답을 얻을 수 있으며, 1777년에 뷔퐁 자신이 직접 풀었다. 뷔퐁의 바늘 문제는 바늘이 선들 간의 간격보다 크지 않을 경우 π값을 예측하는 몬테카를로 방법으로 응용될 수 있다.
뷔퐁의 바늘 문제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바닥의 평행선 사이의 간격을 , 바늘의 길이를 이라 하고(단, 바늘은 균일), 를 바닥에 평행한 선들과 바늘 사이에 이루어진 각도, 바늘의 중심과 평행선 사이의 최소 길이를 t라고 하자. 일반성을 잃지 않고 평행선을 두 개만 놓고 생각할 수 있다. 평행선과 겹치기 위해서는 여야 한다.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해 이라 놓고, P(x)는 x에 대한 평행선 위에 바늘을 발견할 확률이라 정의하고 경우를 나누어 생각한다.
- x < 1 일 때:
:,
:
:가 달라짐에 따라 평행선과 겹칠 t의 조건은
:이다.
: 그래프 위에 나타내 보면, 전체 면적은
:
:
:
- x = 1 일 때:
:
- x > 1 일 때:
:
뷔퐁의 바늘 문제의 원래 목적은 값을 예측하는 데에 있다. 바늘을 무수히 많이 던져서 평행선에 놓는 횟수를 구한다면 이론적인 값에 근사할 수 있다. 바늘의 길이와 평행선 사이의 길이가 똑같을 때, x=1이므로 이론적으로 바늘이 평행선에 닿을 확률은 이다. n을 바늘이 평행선 중 하나에 겹치는 횟수, N을 바늘을 던진 총 횟수, 를 이론적인 확률이라고 하면,
:
:이 된다.
뷔퐁의 바늘 문제는 자연에서도 응용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배스 대학교의 수리 생물학 센터에서 개미 집단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뷔퐁의 바늘 문제가 사용되었다. 연구원들은 개미들이 개미둑의 크기를 알아보려 할 때, 둑을 두 번 오르내리면서 두 번째 경로가 첫 번째 경로와 얼마나 겹치는지를 세어 그 크기를 추정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개미들은 둑의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 뷔퐁의 바늘 문제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한다. 개미들이 측정한 넓이는 무작위로 평면 위에 흩어진 선들이 서로 교차된 횟수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이는 뷔퐁 문제에서 두 선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교차할 확률이 적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3. 2. 진화론
뷔퐁은 생명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찾다가 1748년 존 니덤의 현미경을 이용한 동식물의 자연생식을 관찰하면서 종 이론을 확립했다. 뷔퐁은 식량 공급보다 생물 증가 속도가 빨라 동물들이 생존 경쟁을 한다고 보았다.[28] 그는 단일 종 내에 다양한 변종이 존재하며, 일부 동물은 멸종했거나 진화적 변화를 겪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서로 다른 동물 간의 구조적 유사성을 관찰하여 진화 생물학에서 화석 간의 관련성을 발견하고, 진화 문제 해결에 실험적 접근이 중요함을 인식했다.뷔퐁은 다윈의 진화론에 포함된 거의 모든 주요 요소를 제시했지만, 이를 확고하고 엄밀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기술했다. 다윈이 제시한 진화의 증거, 메커니즘, 경로와 같은 구체성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뷔퐁은 진화론을 제시하면서 많은 오류를 범했는데, 진화의 핵심 증거인 고생물학, 발생학, 지리학적 분포, 비교 해부학 등을 간과했다. 특히 화석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발생학적 증거도 고려하지 않았다.
뷔퐁은 동물 세계를 조사하면서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른 지역에 뚜렷한 동식물이 분포한다는 사실(뷔퐁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는 생물지리학의 첫 번째 원칙으로 간주된다. 그는 종이 창조 중심에서 분산된 후 "개선"되거나 "퇴화"되었을 수 있다고 제안했고, 세계의 모든 사지 동물이 38마리의 원본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13] 그는 변환론자이자 다윈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기후 변화가 종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뷔퐁은 이 주제에 대해 여러 번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명확히 해석하기는 어렵다.
뷔퐁은 맘모스나 유럽의 코뿔소와 같은 멸종된 종의 존재를 알았고, 그의 추정 중 일부는 대륙 이동과 같은 현대 모델에 영감을 주었다. 그는 모든 인류가 단일 기원을 가지며, 신체적 차이는 기후와 식단 등 환경 요인에 대한 적응 결과라는 단일 기원론을 믿었다. 최초의 인류가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지만,[20] 인류 기원 지역은 "가장 온화한 기후 [가] 위도 40도와 50도 사이"라고만 언급했다.[21] 이 지역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몽골, 중국 일부를 포함한다.
뷔퐁은 유럽이 인류 문명의 요람이라고 믿지 않았고, 일본과 중국 문화가 "매우 오래"되었으며 유럽은 "동쪽에서 빛을 받았다"고 주장했다.[22] 그는 피부색이 기후와 식단에 따라 한 세대 안에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3]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 초판에서 뷔퐁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후 수정판에서 "현대에 과학적 정신으로 진화를 다룬 최초의 저자는 뷔퐁"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뷔퐁의 의견이 자주 바뀌었고 종 변형의 원인이나 수단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26] 뷔퐁의 퇴화 연구는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강한 도덕적 뉘앙스 때문에 비판받기도 했다.[27]
뷔퐁은 다윈의 범생설 가설과 유사한 유전 체계를 개발했다.[29] 다윈은 "만약 뷔퐁이 그의 유기 분자가 신체의 각 단위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가정했다면, 그의 견해와 내 견해는 매우 유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30]
3. 3. 지질학
뷔퐁은 지구가 태양과 혜성의 충돌로 태양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추론을 통해 지구는 태초에 용융 상태였으며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을 때까지 냉각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가설을 통해 냉각에 걸리는 시간이 기존 신학자들이 추론했던 창조로부터의 시간인 6000년보다 훨씬 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아이작 뉴턴은 1687년에 출판한 《프린키피아》에서 지구와 같은 크기의 쇳덩이를 뜨겁게 달구면 5만 년 이상이 지나도 식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뷔퐁은 여기서 힌트를 얻어 크기가 다른 철구슬을 가열한 후 식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을 고안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지구의 나이가 최소 7만 5천 년은 되어야 한다는 계산 결과를 얻었다. 비록 그 과정은 부정확했지만, 성경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측정치를 외삽하여 지구의 나이를 측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과학적인 시도였다. 당시 성경학자들이 추정한 나이보다 열 배는 더 많은 결과를 얻었으며, 이는 현재 최고 측정치인 45억 년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결과였다.[2]
뷔퐁의 지구 나이 측정 실험은 비록 전제가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했지만(태양과 혜성의 충돌로부터 지구가 탄생했다는 근거는 없다), 성경 구절과는 상관없이 실제 측정치를 가정하여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매우 과학적인 시도였다. 이는 이후 18세기 후반 신학과 과학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2]
뷔퐁은 ''일반 및 특별 자연사''(1749–1788)에서 동물 세계를 조사하면서, 비슷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 뚜렷한 식물과 동물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는데, 이는 나중에 뷔퐁의 법칙으로 알려진 개념이자 생물지리학의 첫 번째 원칙이다.[2] 그는 종이 창조의 중심에서 분산된 후 "개선"되기도 하고 "퇴화"되기도 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사지 동물이 단 38마리의 사지 동물 원본 세트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13] 이를 바탕으로 그는 "변환론자"이자 다윈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기후 변화가 종의 확산을 촉진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2]
뷔퐁은 "구세계와 신세계 모두에 공통적인 동물은 후자에서 더 작다"고[14] 주장하며 이를 환경 조건에 기인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뷔퐁에게 무스 표본을 보여주며 그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했다.[16] 뷔퐁은 제퍼슨이 보낸 무스 표본을 보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다음 권에서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17]
''Les époques de la nature''(1778)에서 뷔퐁은 태양계의 기원을 논의하면서, 행성은 혜성이 태양과 충돌하여 생성되었다고 추측했다.[18] 그는 몽바르의 프티 퐁트네에서 테스트한 철의 냉각 속도를 기준으로 지구의 나이가 최소 75,000년이라고 계산했다. 이는 제임스 어셔 대주교가 결정한 지구의 기원(4004 BC)보다 훨씬 이전 시점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소르본에 의해 비난받았고, 그는 다시 철회를 발표했다.[19]
뷔퐁은 맘모스나 유럽의 코뿔소와 같은 멸종된 종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그의 몇몇 추정은 대륙 이동과 같은 현재 모델에 영감을 주었다.
3. 3. 1. 푸리에의 해석

'열 흐름'을 서술할 수 있는 수식을 개발한 푸리에는 뷔퐁보다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푸리에는 이 수식들을 사용해 지구가 식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냈고, 뷔퐁이 간과했던 요소를 지적했다. 뷔퐁은 지구의 단단한 껍질이 그 속의 융해된 물질들을 둘러싸고 있어 단열 작용을 하는 담요처럼 열의 흐름을 가로막아 지구 표면은 식었지만 그 속은 녹아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푸리에는 1820년 지구의 나이를 계산할 수 있는 수식을 적어두었지만 그 종이를 없앴다. 푸리에의 수식에 따라 계산하면 지구의 나이는 1억 년이 된다. 뷔퐁의 측정치보다 1천 배나 길지만, 현대의 측정치보다 50배 짧다.
4. 《박물지(Histoire naturelle, générale et particulière)》
뷔퐁은 1739년 왕립식물원과 박물관의 관장이 된 후, 과학 세계를 지질학, 자연사, 인류학으로 나누고 이를 자연 전체에 대한 설명으로 확장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박물지(Histoire naturelle, générale et particulière)》라는 방대한 저술로 이어졌다.
《박물지》는 총 50권으로 계획되었으나, 뷔퐁 생전에는 44권만 출판되었다. 1749년에 처음 3권이 출판되었는데, 지구의 역사부터 인간과 동물의 자연사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뷔퐁은 뉴턴의 이론을 지지하면서도, 행성 운동이 신의 간섭 결과라는 생각에는 반대했다. 그는 태양과 혜성의 충돌로 행성이 생성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18]
뷔퐁은 생명체가 지구에서 수용성 물질들의 가열로 생긴 유기물질로부터 탄생했다고 보았다. 그는 종(種) 개념은 인정했지만, 과(科)의 존재는 부정했다가 나중에 다시 인정하기도 했다. 뷔퐁은 인간도 동물의 한 종으로 보았는데, 이는 카를 린네의 분류 방식과 달라 갈등을 빚기도 했다.[13]
《박물지》에서 뷔퐁은 서로 다른 지역이 비슷한 환경을 지니고 있더라도, 서로 다른 종들이 분포한다는 '뷔퐁의 법칙'을 제시하였다. 이는 생물지리학의 첫 번째 원리로 여겨진다. 그는 종들이 창조 중심에서 분산되면서 퇴화하거나 진화한다고 보았다. 14권에서는 모든 네발짐승이 38쌍의 원형에서 발달했다는 주장을 펼쳤다.[13] 이러한 점에서 뷔퐁은 진화론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유인원의 공통 조상설은 부정했다.[13]
《박물지》는 과학원 동료가 아닌, 자연철학에 관심 있는 대중을 대상으로 했다. 삽화가 많고 문체가 화려하여 출판 6주 만에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8세기에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였으며, 박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뷔퐁의 《박물지》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그는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와 같은 당대의 유명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12]
4. 1. 《자연의 신기원(Les Époques de la nature)》
뷔퐁의 《박물지》 제5권으로 출판된 《자연의 신기원》(Les Époques de la nature프랑스어)은 뷔퐁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하다. 이 책에서 뷔퐁은 태양계의 기원에 대해 논하며, 행성들이 혜성과 태양의 충돌로 인해 생성되었다고 추측했다.[18] 이는 제임스 애셔 대주교가 주장한 지구의 기원(기원전 4004년)보다 훨씬 이전 시기를 상정하는 것이었다.[19]뷔퐁은 《자연의 신기원》에서 지질학적 역사를 시기별로 재구성하고, 멸종된 종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여 고생물학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몽바르 퐁테넷에서 실험한 철의 냉각 속도를 바탕으로 지구의 나이를 75,000년으로 계산했다.[19] 뷔퐁의 이러한 주장은 소르본 대학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19]
뷔퐁은 맘모스나 유럽의 코뿔소와 같은 멸종된 종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몇몇 추정은 대륙 이동과 같은 현대의 모델에 영감을 주었다.
5. 평가 및 영향
뷔퐁은 과학원 동료가 아닌, 자연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을 위해 『박물지』를 저술했다. 삽화가 풍부하고 문체가 화려했던 이 책은 출간 6주 만에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8세기에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가 되었다.[2] 뷔퐁의 책은 대중에게 박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전문 전시관과 진열실이 생겨나게 했다. 또한, 박물학을 새로운 전문 직업으로 만들었으며, '박물학의 대중화'를 이끌었다.[2]
뷔퐁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동물로 분류하고, 인간과 유인원의 유사점을 기술했다.[2] 또한 '생명체의 소립자'를 통해 생명체의 변화 방식을 설명했다.[2] 그러나 그의 책은 성경을 부정하고 인류의 가치관과 윤리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신학 교수단으로부터 내용 수정을 요구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2]
1749년에 출간된 『박물지』는 뷔퐁이 매일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804년에야 50권 전체가 완성되었다.[2] 뷔퐁과 같은 과학자들의 분류학 연구는 다른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종들의 구조적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하는 연구를 촉진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척추동물이 왜 많은 해부학적 특징을 공유하는지, 개구리의 심장이 인간의 심장과 같은 기능을 하는 이유, 새의 날개뼈가 도마뱀의 발과 유사한 이유, 원숭이가 인간과 닮은 이유 등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2] 뷔퐁은 유기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며, 서식지와 시간이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2] 즉, 뷔퐁의 『박물지』는 과학자들에게 분류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분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뷔퐁은 뛰어난 글쓰기 능력으로 1753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박물지』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다.[2] 그의 글은 문학적으로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러한 글쓰기 능력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수학자 장 르 롱 달랑베르는 그를 "뛰어난 아첨꾼"이라고 불렀다.[2]
뷔퐁은 생식기관을 기준으로 한 린네의 분류 체계를 거부하고, 하나의 특징만을 잣대로 삼는 것은 인위적인 방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자연철학자의 역할은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지 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2] 또한, 새로운 과학 기술 역시 거부했다. 뷔퐁의 권위와 오만함은 신진 과학자들의 앞길을 막았고, 그가 죽은 후 박물학을 문학적이고 사적인 취미 활동으로 격하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 18세기 말은 전통에서 벗어나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뷔퐁은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세대로 여겨진다.[2]
뷔퐁은 생존 경쟁 개념에 대해 저술했으며,[28] 다윈의 범생설 가설과 유사한 유전 체계를 개발했다.[29] 다윈은 뷔퐁의 견해에 대해 "만약 뷔퐁이 그의 유기 분자가 신체의 각 개별 단위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가정했다면, 그의 견해와 내 견해는 매우 유사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30]
에른스트 마이어에 따르면, 뷔퐁은 진화생물학자는 아니었지만, 진화론의 아버지였다. 그는 뷔퐁 이전에는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던 많은 진화적 문제들을 논의했고, 그 문제들을 과학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2] 아리스토텔레스와 다윈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유기체 연구자도 뷔퐁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
뷔퐁은 진화 개념을 과학의 영역으로 가져왔고, 비교 해부학의 선구자인 "유형의 통일성" 개념을 개발했다.[2] 그는 지구 역사의 장기적인 시간 척도를 수용하는 데 기여했으며, 코끼리와 매머드의 유사성에 근거한 설명에서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는다는 점을 시사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2] 그러나 그는 종의 불변성을 옹호함으로써 진화를 방해하기도 했다. 그는 종 구성원 간의 생식 능력이라는 종의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2]
동물 세계를 연구하면서 뷔퐁은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른 지역에 뚜렷한 동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나중에 뷔퐁의 법칙으로 알려진 생물지리학의 첫 번째 원칙이 되었다.[2] 그는 종이 창조의 중심에서 분산된 후 "개선"되거나 "퇴화"되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2] 그는 세계의 모든 사지 동물이 단 38마리의 원본 세트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13] 이를 바탕으로 그는 "변환론자"이자 찰스 다윈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기후 변화가 종의 확산을 촉진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2]
뷔퐁은 맘모스나 유럽의 코뿔소와 같이 멸종된 종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2] 그의 몇몇 추정은 대륙 이동과 같은 현재 모델에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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