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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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라비 제국은 1925년 레자 칸이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이란의 왕조이다. 레자 샤는 개혁과 서구화를 추진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침공으로 퇴위하고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즉위했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친미 정책과 백색 혁명을 추진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반발로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망명하며 팔라비 왕조는 붕괴되었다. 팔라비 제국은 입헌 군주제였으나 샤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인권 탄압과 부패 문제로 비판받았다. 팔라비 왕조는 이란의 민족성을 강조하고 페르시아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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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비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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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کشور شاهنشاهی ایران (케슈바르에 샤한샤히예 이란) |
일반 명칭 | 이란 |
존속 기간 | 1925년–1979년 |
이전 국가 | 이란 보호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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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가 | 이란 과도 정부 |
국가 표어 | مرا داد فرمود و خود داور است (마라 다드 파르무드 오 호드 다바르 아스트) |
국가 표어 (번역) | 정의는 그가 나에게 명령한 것이고, 그분 스스로가 심판자이시다 |
국가 (1925–1933) | سلامتی دولت علیهٔ ایران (살라마티예 도울라테 알리예예 이란) "페르시아 숭고한 국가에 대한 경례" |
국가 (1933–1979) | سرود شاهنشاهی ایران (소루데 샤한샤히예 이란) "이란 제국 국가" |
수도 | 테헤란 |
가장 큰 도시 | 수도 |
공용어 | 페르시아어 |
종교 | 시아 이슬람 (다수, 법률상 공식 종교) |
데몬 | 이란인 |
면적 | 1648195 km2 |
면적 순위 | 17위 |
GDP (PPP) | 1978년 US$3,844 ($23,568.06, 2023년 기준) |
통화 | 리알 (ریال) (IRR) |
정치 | |
정부 형태 | 단일 의회 입헌 군주제 (법률상) 단일 의회 반(半) 입헌 군주제 (사실상) |
지도자 칭호 | 샤 |
샤 (1925–1941) | 레자 샤 팔라비 |
샤 (1941–1979)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
총리 (1925–1926, 처음) | 모함마드 알리 포루기 |
총리 (1979, 마지막) | 샤푸르 바크티아르 |
의회 | 국민 자문 의회 (단원제, 1925–1949) 의회 (양원제, 1949–1979) |
상원 | 상원 |
하원 | 국민 자문 의회 |
역사 | |
시대 | 전간기 • 제2차 세계 대전 • 냉전 |
시작 | 1925년 |
시작 사건 | 제헌 의회에서 팔라비 왕조 지지 투표 |
시작 날짜 | 12월 15일 |
사건 1 | 영국-소련의 이란 침공 |
사건 1 날짜 | 1941년 8월 25일 – 9월 17일 |
사건 2 | 유엔 가입 |
사건 2 날짜 | 1945년 10월 24일 |
사건 3 | 쿠데타 |
사건 3 날짜 | 1953년 8월 19일 |
사건 4 | CENTO 가입 |
사건 4 날짜 | 1955년 11월 3일 |
사건 5 | 백색 혁명 |
사건 5 날짜 | 1963년 1월 26일 |
종료 날짜 | 1979년 2월 11일 |
종료 사건 | 이슬람 혁명 |
종료 날짜 | 1979년 2월 11일 |
기타 |
2. 역사
팔라비 왕조는 카자르 제국 말기, 레자 샤 팔라비가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고 1925년 스스로 샤(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레자 샤는 이란의 근대화를 목표로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그의 세속주의 정책은 종교 세력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란은 중립국을 표방했으나, 영국과 소련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침공을 당했다. 이로 인해 레자 샤는 퇴위하고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이란은 연합국의 중요한 보급로(페르시아 회랑) 역할을 수행했다. 전후 소련군 철수 과정에서 1946년 이란 위기가 발생하는 등 냉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아버지의 개혁 노선을 이어받아 1963년 백색 혁명을 추진하며 토지 개혁, 여성 참정권 부여 등 사회 변화를 시도했다. 또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며 친서방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모사데그 총리 축출 사건 이후 강화된 샤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통한 반대파 탄압, 급격한 서구화 정책은 국민적 불만을 심화시켰다.
결국 1978년부터 본격화된 반정부 시위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란 혁명으로 발전했다. 1979년 1월, 샤는 해외로 망명했고, 이란의 오랜 군주제는 막을 내리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 1. 왕조의 성립
팔라비 왕조의 창시자 레자 샤 팔라비는 영국과 소련의 주권 침해를 막지 못했던 카자르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 아흐마드 샤 카자르(Ahmad Shah Qajar)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1921년 레자 팔라비가 일으킨 쿠데타로 아흐마드 샤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1925년 12월 12일, 그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이란 의회(Majlis)는 아흐마드 샤를 폐위시키며 카자르 왕조는 막을 내렸다. 의회는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전직 준장이었던 레자 팔라비를 페르시아 제국의 새로운 샤(왕)로 추대했다.
그는 사산 제국 시대의 팔레비어를 연상시키는 '팔라비'를 왕조의 이름으로 채택했는데,[6] 이미 1919년 11월에 자신의 성으로 팔라비를 선택한 바 있었다.[7] 새 왕조를 세운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1세)는 강력한 개혁과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1928년에는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했으며,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서구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레자 샤의 강경한 세속주의 정책은 특히 성직자 계층의 반발을 샀다. 반면, 이란의 중산층과 유산층은 샤의 정책을 지지했다. 1935년 3월 20일, 레자 샤는 외국 대표들에게 공식 문서에서 '이란'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서구인들이 사용해 온 '페르시아'라는 명칭 대신, 페르시아어로 자국을 부르는 이름인 '이란'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59년에 '페르시아'와 '이란' 모두 사용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레자 샤는 영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그의 많은 개발 프로젝트에는 외국 기술 전문 지식이 필요했지만, 그는 카자르 왕조 시대에 페르시아, 영국, 소련 간의 불만족스러운 관계 때문에 영국 및 소련 회사에 계약을 주는 것을 피했다. 영국은 영-이란 석유 회사를 통해 이란의 석유 자원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레자 샤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및 기타 유럽 국가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1939년 이후, 독일과 영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적대 관계가 되면서 이란에 문제를 야기했다. 레자 샤는 이란을 중립국으로 선포했지만, 영국은 이란에 있는 독일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이란 남서부에 있는 영국 석유 시설을 사보타주하라는 임무를 띤 스파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독일 시민의 추방을 요구했다. 레자 샤는 이것이 그의 개발 프로젝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2. 2.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레자 샤는 영국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이란의 발전을 위해 외국의 기술 지원이 필요했지만, 영국-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통해 이란의 석유 자원을 통제하던 영국이나 북쪽의 강대국 소련의 도움은 받기를 꺼렸다. 대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와 같은 제3국으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고자 했다.[6]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독일과 영국이 전쟁 상태에 돌입하자 레자 샤는 이란의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란에 체류 중인 독일 기술자들이 스파이 활동을 하며 영국 소유의 정유 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레자 샤는 개발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영국과 소련은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에 대한 보급로 확보(페르시아 회랑) 및 이란 유전 지대 보호, 독일 세력 견제를 명분으로 1941년 8월 25일 이란을 침공했다.[8] 이란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일주일도 안 되어 항복했으며, 레자 샤는 퇴위 압력을 받아 1941년 9월 16일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9][10][11] 레자 샤는 이후 망명길에 올라 3년 뒤 남아프리카 연방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망했다.

전쟁 기간 동안 이란은 페르시아 회랑으로서 미국과 영국의 군수 물자를 소련으로 보내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또한, 추축국의 진격을 피해 탈출한 12만 명이 넘는 폴란드 난민과 폴란드 군대가 이란을 거쳐 이동했다.[12] 1943년 테헤란에서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요제프 스탈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은 테헤란 선언을 통해 전후 이란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약속했다. 같은 해 9월 13일, 연합국은 모든 외국 군대가 1946년 3월 2일까지 이란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3][28]
그러나 종전 후에도 소련군은 북부 지역에 계속 주둔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이 시기 이란 투데 당(공산당)은 특히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며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군이 질서 회복을 위해 북부로 진입하려 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1945년 11월, 투데 당의 지원을 받은 아제르바이잔 인민 정부가 이란 북서부에서 자치를 선언했다.[13][14][28][29] 또한 쿠르드족 민족주의자들도 마하바드 공화국을 수립했다.
소련의 이러한 괴뢰국 수립 시도는 전후 냉전의 첫 번째 주요 갈등 중 하나인 1946년 이란 위기를 촉발했다. 결국 미국의 외교적 압력과 이란 정부의 군사적 대응 속에서, 소련은 석유 채굴권 양보 약속을 받고 1946년 5월 군대를 철수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제르바이잔 인민 정부와 마하바드 공화국은 1946년 말 이란군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어 소멸했으며, 소련에 약속했던 석유 양보안 역시 이란 의회에서 비준되지 않아 무효화되었다.[15][16]
2. 3. 냉전 시기
1941년 9월 16일, 아버지 레자 샤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2대 황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부친이 추진했던 개혁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곧 정부 운영을 둘러싸고 샤와 민족주의 성향의 노련한 정치가 모하마드 모사데그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1951년, 이란 국회인 마질리스는 79표 대 12표로 모사데그를 총리로 선출했다. 모사데그는 곧바로 영국 소유의 석유 회사를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는데(아바단 위기), 이는 서방의 석유 금수 조치로 인한 경제 파탄을 우려한 샤의 반대에 부딪혔다. 샤는 잠시 국외로 피신했지만, 1953년 8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아약스 작전)가 성공하면서 귀국했다. 쿠데타 이후 모사데그는 왕당파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모사데그 실각 이후, 이란은 미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정학적으로 미국과 동맹을 확고히 했다. 특히 존 F. 케네디 행정부 시절 미국은 이란을 중동 지역의 안정 유지에 중요한 동맹국으로 간주했다.[17]
샤는 세속주의와 근대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1963년부터는 백색 혁명을 시작하여 토지 개혁, 여성 참정권 부여 등 사회 전반의 개혁을 시도했다. 또한 국가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1971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키루스 대왕의 아케메네스 제국 건국을 기념하는 이란 건국 2500주년 축제를 성대하게 개최했고, 1974년에는 수도 테헤란에서 1974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백색 혁명은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 왕권 강화를 위한 과도한 국방비 증액, 인플레이션 심화, 생필품 부족 현상 등은 국민들의 불만을 키웠다. 또한 급격한 서구화와 세속주의 정책은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결국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2. 4. 이란 혁명과 왕조의 붕괴

샤의 정부는 비밀 경찰인 사바크(SAVAK)를 동원하여 좌파와 이슬람주의자를 포함한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1970년대 중반, 샤는 늘어나는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을 위한 "백색 혁명" 계획을 더욱 야심차게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경제적 변화는 성직자들의 불만을 키웠다.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은 이러한 불만을 샤의 통치를 뒤엎고 이슬람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으로 모았다.
1978년 학생 시위로 시작된 반정부 움직임은 호메이니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합세하면서 이란 혁명으로 번져나갔다. 샤 정부의 기반이 흔들리자, 결국 1979년 1월 샤는 해외로 망명했고, 이란의 2500년 군주제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슬람 혁명으로 사바크는 해체되고 사바마(SAVAMA)로 대체되었는데,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혁명 후 사바마는 샤의 측근이었던 호세인 파르두스트 장군이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샤는 신병 치료를 위해 이집트, 멕시코, 미국, 파나마 등을 떠돌았으며, 마지막에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배려로 이집트에 머물렀다.[18] 1980년 샤가 사망하자, 황태자였던 레자 팔라비가 ''부재중''(in absentia) 상태로 팔라비 왕조의 수장 자리를 계승했다.[18][30] 레자 팔라비와 그의 아내, 세 딸은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 포토맥에 거주하고 있다.[19][30]
레자 팔라비는 현재의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전복될 경우 왕위를 되찾기 위해 2013년 파리에 망명 정부 성격의 이란 국민 위원회를 설립했다.[5] 또한 2019년 2월에는 이란 내 다양한 반대 세력을 통합하려는 목표로 '이란의 피닉스 프로젝트'라는 새로운 계획을 시작했다.[20]
3. 정치
1925년,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 출신 레자 칸은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왕(샤)으로 즉위하며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 왕조의 이름은 고대 사산 제국의 팔레비어에서 따왔다.[6][7] 레자 샤는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개혁에 반대하는 일부 성직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중산층과 중상류층의 지지를 받았다. 1935년에는 국호를 '페르시아' 대신 '이란'으로 사용하도록 공식화했다. 그의 후계자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59년 페르시아와 이란 모두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팔라비 제국은 입헌 군주제를 채택했으며, 국왕이 국가 원수, 총리가 정부 수반을 맡는 의원 내각제 형태로 운영되었다. 의회는 초기에는 단원제인 국민 자문 의회(Majlis, مجلس شورای ملیfa)였으나, 1949년 상원(Senate, کاخ مجلس سناfa)이 신설되면서 양원제로 개편되었다.
외교적으로 레자 샤는 영국과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다. 국가 발전에 필요한 기술 도입을 위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협력을 선호했다. 이는 영-이란 석유 회사를 통해 이란의 석유 자원을 통제하던 영국과의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이란은 중립국을 선언했으나, 영국은 이란 내 독일 기술자들이 자국의 석유 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독일인 추방을 요구했다. 레자 샤는 개발 프로젝트 차질을 우려해 이를 거부하면서 연합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3. 1. 정치 체제
팔라비 제국은 형식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채택했으며, 국왕이 국가 원수를, 총리가 정부 수반을 맡는 의원 내각제 형태로 운영되었다.의회는 원래 단원제인 국민 자문 의회(Majlis, مجلس شورای ملیfa)였으나, 1949년 상원(Senate, کاخ مجلس سناfa)이 설립되면서 양원제로 바뀌었다. 이때 기존의 국민 자문 의회는 하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원의 임기는 1952년 이전까지는 2년이었으나, 이후 4년으로 변경되었다.
백색혁명의 일환으로 1963년부터는 여성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3. 2. 역대 군주
wikitext이름 | 초상화 | 선대와의 관계 | 생몰년 | 즉위 | 퇴위/사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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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황제' | ||||||
1 | 레자 샤 팔라비 | -- | 아바스 알리의 아들 | 1878–1944 | 1925년 12월 15일 | 1941년 9월 16일 (양위) |
2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 ![]() | 레자 샤 팔라비의 장남 | 1919–1980 | 1941년 9월 16일 | 1979년 2월 11일 (혁명으로 퇴위) |
'망명 이후 명목상 수장' | ||||||
1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 레자 샤 팔라비의 장남 | 1919–1980 | 1979년 2월 11일 | 1980년 7월 27일 (사망) | |
2 | 파라 팔라비 (섭정) | ![]()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부인 | 1938– | 1980년 7월 27일 | 1981년 7월 27일 |
3 | 레자 팔라비 | ![]() |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장남 | 1960– | 1981년 7월 27일 | 현재 |
3. 3. 황족의 칭호
팔라비 제국의 황족은 다음과 같은 칭호와 경칭을 사용하였다.- 황제: '샤(Shah)'라고 불렸으며, 공식 칭호는 "이란의 왕중왕(Shahanshah of Iran)"이었다. 1965년부터는 '아리아메르(Aryamehr)', 즉 '아리아인의 빛'이라는 칭호도 함께 사용하였다. 경칭은 '폐하'(''His Imperial Majesty'')였다.
- 황후: '샤바누(Shabanou)'라고 불렸고, 칭호 다음에 이름과 "이란의(of Iran)"를 붙였다. 경칭은 '폐하'(''Her Imperial Majesty'')였다.
- 황태자: 황제의 장남은 '이란의 황태자'였으며, 경칭은 '전하'(''His Imperial Highness'')였다.
- 왕자: 황제의 차남 이하 아들들은 '왕자'를 의미하는 '샤푸르(Shahpur)' 칭호 다음에 이름과 성(팔라비)을 붙여 불렀다. 경칭은 '전하'(''His Imperial Highness'')였다.
- 공주: 황제의 딸들은 '공주'를 의미하는 '샤도흐트(Shahdokht)' 칭호 다음에 이름과 성(팔라비)을 붙였다. 경칭은 '전하'(''Her Imperial Highness'')였다.
- 외손자녀: 황제의 외손자녀들은 '왕손' 칭호를 사용했는데, 남성은 '발라 고하르(Vala Gohar)', 여성은 '발라 고하리(Vala Gohari)'라고 불렀다. 이 칭호 뒤에는 이름과 아버지의 성씨를 붙였다. 경칭은 '전하'(''His Highness'' 또는 ''Her Highness'')였다. 다만,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누이인 파테메(Fatemeh) 공주가 미국인 사업가와 첫 결혼하여 낳은 자녀들은 이 왕손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3. 4. 역대 총리
총리 | 재임 기간 | 비고 |
---|---|---|
모하마드 알리 포루기 | 1925년 ~ 1926년 | |
모스토우피 올-마말렉 | 1926년 ~ 1927년 | |
메흐디 헤다야트 | 1927년 ~ 1933년 | |
모하마드 알리 포루기 | 1933년 ~ 1935년 | |
마흐무드 잠 | 1935년 ~ 1939년 | |
아흐마드 마틴다프타리 | 1939년 ~ 1940년 | |
알리 만수르 | 1940년 ~ 1941년 | |
모하마드 알리 포루기 | 1941년 ~ 1942년 | |
알리 소헤일리 | 1942년 | |
아흐마드 카밤 | 1942년 ~ 1943년 | |
알리 소헤일리 | 1943년 ~ 1944년 | |
모하마드 사에드 | 1944년 | |
모르테자콜리 바야트 | 1944년 ~ 1945년 | |
에브라힘 하키미 | 1945년 | |
모흐센 사드르 | 1945년 | |
에브라힘 하키미 | 1945년 ~ 1946년 | |
아흐마드 카밤 | 1946년 ~ 1947년 | |
모하마드 레자 헤크마트 | 1947년 | |
에브라힘 하키미 | 1947년 ~ 1948년 | |
압돌호세인 하지르 | 1948년 | |
모하마드 사에드 | 1948년 ~ 1950년 | |
알리 만수르 | 1950년 | |
알리 라즈마라 | 1950년 ~ 1951년 | 암살 |
호세인 알라 | 1951년 | |
모하마드 모사데그 | 1951년 ~ 1952년 | |
아흐마드 카밤 | 1952년 | |
모하마드 모사데그 | 1952년 ~ 1953년 | 축출 |
파즐롤라 자헤디 | 1953년 ~ 1955년 | |
호세인 알라 | 1955년 ~ 1957년 | |
마누셰르 에그발 | 1957년 ~ 1960년 | |
자파르 샤리프에마미 | 1960년 ~ 1961년 | |
알리 아미니 | 1961년 ~ 1962년 | |
아사돌라 알람 | 1962년 ~ 1964년 | |
하산 알리 만수르 | 1964년 ~ 1965년 | 암살 |
아미르아바스 호베이다 | 1965년 ~ 1977년 | |
잠시드 아무제가르 | 1977년 ~ 1978년 | |
자파르 샤리프에마미 | 1978년 | |
골람 레자 아자리 | 1978년 ~ 1979년 | |
샤푸르 바크티아르 | 1979년 |
4. 인권 문제
팔라비 제국의 통치자였던 레자 샤 팔라비와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정치적 반대를 억압하기 위해 비밀경찰, 고문, 처형 등의 수단을 사용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으로 인해 팔라비 왕조는 때때로 "제국 독재" 또는 "1인 통치"로 묘사되기도 했다.[22] 다만, 이란은 1941년부터 1953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하기도 했다.[23]
5. 부패 문제
마누체르 간지는 고위 관리와 왕실의 부패를 상세히 기록한 반부패 연구 그룹을 이끌었다. 그는 13년 동안 최소 30건의 관련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샤는 이를 "허위 소문과 날조"라며 일축했다. SAVAK의 고위 관리였던 파르비즈 사베티는 정권에 대한 성공적인 반대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부패 혐의라고 보았다.[24]
6. 유산
카자르 왕조 시대의 이란은 페르시아적인 특징이 현대만큼 뚜렷하지 않았다. 서구인들은 이란을 페르시아라고 불렀고, 궁정과 행정에서 지배적인 언어는 페르시아어였지만, 순수한 페르시아 요소와 튀르크어 요소 사이의 구분은 1925년 팔라비 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팔라비 왕조는 이란을 페르시아 문화와 언어 중심으로 민족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어와 같은 소수 언어의 공식적인 사용을 금지하고 분리주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레자 샤는 강력한 중앙 정부 아래 이란을 다시 통일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학교와 신문 등에서 소수 언어 사용은 용납되지 않았다.
팔라비 왕조 이후 들어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소수 민족과 그들의 언어 사용에 대해 이전보다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했지만, 이란 내 최대 소수 민족인 아제리인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란의 통일과 영토 보전에 상당한 도전 과제가 되고 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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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사산 제국]]때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정식 국호는 이란이었지만 외국에서는 계속 페르시아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자신들을 가리킬 때 이란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원해서 이렇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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