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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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은 1467년 또는 1468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1500년 브라질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1497년 포르투갈 왕실의 지원을 받아 인도 항해를 위한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항해 도중 현재의 브라질 해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을 포르투갈 영토로 선언하고, 이후 인도 항해를 이어갔다. 캘리컷에서 무역 협정을 맺었으나, 충돌로 인해 교역소를 파괴하고 캘리컷을 포격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보이기도 했다. 귀국 후 국왕과의 불화로 인해 4차 포르투갈 인도 함대의 지휘관에서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둔 생활을 하다 1520년경 사망했다. 브라질 발견은 사후에 브라질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발견이 의도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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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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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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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포르투갈 함대 사령관 |
출생 이름 | 페드루 알바르스 데 고우베이아 |
출생 | 1467년 또는 1468년 |
출생지 | 벨몬테, 포르투갈 |
사망 | 1520년 (52–53세) |
사망지 | 산타렝, 포르투갈 |
배우자 | 이사벨 데 카스트로(1503년 결혼) |
자녀 | 페르낭 알바르스 카브랄 안토니우 카브랄 카타리나 데 카스트로 기오마르 데 카스트로 이사벨 레오노르 |
이름 | |
다른 이름 | 페로 알바르스 카브랄 페드르알바르스 카브랄 페드랄바르스 카브랄 페드랄루아레스 카브랄 |
개인 정보 | |
종교 | 가톨릭교 (그리스도 기사단 단원) |
부모 | 아버지: 페르낭 알바르스 카브랄 어머니: 이사벨 고우베이아 |
2. 초기 생애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은 1467년 또는 1468년에 포르투갈 벨몬트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페드루 알바르스 드 고베이아였으나, 1503년 형이 사망한 후 아버지의 성을 따라 카브랄로 불리게 되었다.[2] 카브랄 가문은 마케도니아의 카라누스 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다.
카브랄은 아폰수 5세의 궁정에서 인문학을 배우고 무예를 익혔으며, 1484년 주앙 2세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았다. 1497년 마누엘 1세는 카브랄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그리스도 기사단 작위를 수여했다.[6]
2. 1. 가문의 배경
Pedro Álvares Cabralpt의 가문은 벨몬트 지역의 영주 가문이었다.[5] 카브랄 가문은 14세기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카브랄의 증조부이자 국경 군사 사령관이었던 알바루 질 카브랄은 카스티야 왕과의 전쟁에서 주앙 1세에게 충성을 유지한 몇 안 되는 포르투갈 귀족 중 한 명이었다. 주앙 1세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알바루 질에게 벨몬트의 세습 봉토를 하사했다.[5]카브랄 가문의 문장은 은색 바탕에 두 마리의 자주색 염소가 그려져 있다. 자주색은 충성을 상징하며, 염소는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카브랄''은 '염소'를 의미한다).[5]

2. 2. 교육 및 궁정 생활
카브랄은 아폰수 5세와 주앙 2세의 궁정에서 인문학을 배우고 무기를 다루는 법과 전투 훈련을 받으며 하급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6] 1484년, 주앙 2세는 카브랄에게 '모소 피달고'(젊은 귀족)라는 칭호를 부여했다.[6]마누엘 1세는 1497년에 카브랄에게 연간 30,000 레알의 수당을 지급하고,[6] 왕실 평의회에서 ''피달고''(귀족) 칭호를 부여했으며, 그리스도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하는 등 그를 총애했다.[6]
3. 브라질 발견 (1500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이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은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인도 탐험 원정을 명받았다. 목적은 귀중한 향신료를 가져오고, 아랍인, 터키인, 이탈리아 상인들을 거치지 않는 인도와의 향신료 무역 루트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500년, 카브랄은 13척의 함대를 이끌고 대서양 서부로 출항하여 예정대로 항해를 진행, 같은 해 4월에 육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큰 섬이라고 생각했으나,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4년)에 근거하여 포르투갈 영토임을 확인하고 이 땅을 포르투갈 영토로 선언했다.
해안 탐사 결과 육지가 대륙의 일부임을 알게 되자, 카브랄은 마누엘 1세에게 보고하기 위해 배 한 척을 급파했다. 이 대륙은 남아메리카였으며, 카브랄이 포르투갈령으로 선언한 지역은 훗날 브라질이 되었다. 이후 함대는 인도를 향해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은 대항해 시대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남아메리카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경쟁을 촉발시켰다. 또한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삼아 광대한 포르투갈 해상 제국을 건설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3. 1. 함대 구성 및 출항
카브랄이 이끄는 함대는 13척의 배와 1,50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10][11] 이 함대에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디오구 디아스, 니콜라우 코엘류와 같이 경험이 풍부한 항해사들이 포함되어 해군 문제에 대한 조언을 맡았다.[9]함대는 두 부대로 나뉘었다. 첫 번째 부대는 9척의 캐러크(나우)와 2척의 카라벨로 구성되어 인도 칼리컷과의 무역 관계를 맺고 팩토리를 설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두 번째 부대는 1척의 캐러크(나우)와 1척의 카라벨로 구성되어 오늘날 모잠비크의 소팔라 항구로 향했다.[22]
1500년 3월 9일 정오, 카브랄의 함대는 리스본을 출발했다.[12]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의 그란 카나리아를 거쳐[42] 카보베르데로 향했다.[43] 이후, 볼타 두 마르(volta do mar) 항해술을 이용해 대서양을 횡단했다.[45]
3. 2. 브라질 도착 및 탐험

1500년 4월 22일, 카브랄 함대는 오늘날 브라질 북동부 해안에 도착했다. 카브랄은 그곳에서 가까운 산을 Monte Pascoal|몬테 파스쿠알영어 (null|부활절의 산한국어이라는 뜻. 이 날이 부활절 주간이었기 때문이다)이라고 이름 지었다.[40]
4월 23일, 카브랄은 선장들을 기함에 모아 원주민과의 접촉을 논의했다.[38]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원정에 참여했던 니콜라우 코엘류가 원주민과 접촉하여 물품을 교환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38]
4월 24일, 카브랄 함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천연 항구에 정박하고, 그곳을 포르투 세구루 (null|안전한 항구한국어라는 뜻)라고 명명했다.[38] 이때, 원주민 2명이 카브랄을 만나러 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회담이 진행되었고, 카브랄은 그들에게 선물을 주었다.[38]
카브랄과 접촉한 원주민은 투피니킴 족으로, 석기 시대 수준의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도 했다. 이들은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고, 일부는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38]
4월 26일, 카브랄은 더 많은 원주민들이 나타나자 제단을 세우고 미사를 열어, 훗날 브라질이 될 이 땅을 축복했다.[38]
이후 며칠 동안 포르투갈인들은 물, 식량, 목재 등을 조달하고, 높이 약 7m의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 5월 1일, 카브랄은 이 땅을 포르투갈 영토로 선언하고 십자가를 세운 뒤 두 번째 미사를 열었다. 그는 이 땅을 Ilha de Vera Cruz|이라 데 베라크루스pt (null|진정한 십자가의 섬한국어이라는 뜻)이라고 이름 붙였다.[38]
5월 2일, 카브랄은 발견 사실을 알리기 위해 Gaspar de Lemos|가스파르 데 레모스영어[39] 혹은 André Gonçalves|앙드레 곤살베스es[39]가 지휘하는 보급선을 포르투갈로 보내고,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인도로 향했다.[39]
4. 인도 항해 (1500-1501년)
1500년 3월 9일,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이끄는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했다.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와 카보베르데를 거쳐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4월 22일 현재의 브라질에 도착했다. 카브랄은 이 땅을 ''Ilha de Vera Cruzpt'' (진정한 십자가의 섬)이라고 명명하고 포르투갈 영토임을 선언했다.[40]
현지 원주민들과의 만남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카브랄은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주고, 가톨릭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석기 시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는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카브랄은 새로운 발견을 알리기 위해 레무스 (혹은 곤살베스)가 이끄는 배를 포르투갈로 돌려보냈다. 이후 남아메리카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다 아프리카로 방향을 틀었으나, 5월 23일경 남아프리카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를 포함한 많은 선원과 배를 잃었다.[15]
4. 1. 남아프리카 해역의 비극
카브랄 함대는 1500년 5월 남아메리카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다가 아프리카로 방향을 틀었다. 5월 23일 또는 24일, 남아프리카 대서양의 고기압 지대에서 폭풍을 만나 4척의 배를 잃었다. 이 재해로 1488년 희망봉에 처음 도달한 유럽인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를 포함하여 380명이 사망했다.[15]거친 날씨와 돛대 손상으로 인해 나머지 배들은 흩어졌다. 디오구 디아스가 지휘하는 배 한 척은 홀로 표류했고,[15] 나머지 여섯 척은 재결집하여 각각 세 척씩 두 개의 대형을 이루어 희망봉을 지나 동쪽으로 항해했다.
4. 2. 아프리카 동해안 항해
카브랄은 킬와 섬에서 현지 왕과 협정을 맺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41]。말린디에서는 현지 왕과 만나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여 물품을 교환하고, 최종 목적지인 인도로 향하기 위한 안내인을 고용했다[41]。 이후 함대는 아라비아 해를 건너 안제디바 섬에 도착하여 칼리컷으로 가기 전 마지막 보급을 했다[41]。
4. 3. 캘리컷에서의 학살
1500년 9월 13일, 카브랄의 함대는 칼리컷에 도착했다.[16] 카브랄은 자모린(칼리컷 통치자의 칭호)과 협상하여 공장과 창고 설립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12월 16일 또는 17일, 아랍인과 인도인 300명(혹은 수천 명)이 공장을 기습 공격했다. 석궁병들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50명 이상의 포르투갈인이 사망했고, 생존자들은 배로 탈출했다. 카브랄은 이 공격이 아랍 상인들의 선동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24시간 동안 자모린의 해명이나 사과는 없었다.[17]이에 분노한 포르투갈인들은 항구에 정박해 있던 아랍 상선 10척을 나포, 승무원 약 600명을 살해하고 화물을 압수한 뒤 배를 불태웠다. 또한 카브랄은 칼리컷을 하루 종일 포격하도록 명령했다.
5. 유럽 귀환 (1501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보고를 받은 마누엘 1세는 카브랄에게 캘리컷 남쪽에서 교역할 수 있는 다른 항구를 찾도록 지시했다. 카브랄 함대는 코치와 칸누르 등 다른 인도 도시들과 교역하며 향신료를 확보했다.[18] 1501년 1월 16일, 귀중한 향신료를 실은 함대는 칸나노르에서 추가 거래를 한 후, 포르투갈로 귀환을 시작했다.
귀환 도중 배 한 척이 좌초되어 침몰했고, 모잠비크 섬에서 보급을 받은 후 순찰선 한 척이 소팔라로 보내졌다. 또한, 다른 순찰선은 국왕에게 항해 성공 소식을 먼저 알리기 위해 출발했다. 5월 22일, 남은 두 척의 배가 희망봉을 돌았고, 6월 2일 베세기체(현재의 다카르)에 도착하여 다른 배들과 재회했다.
디오구 디아스는 마다가스카르 섬을 처음으로 본 유럽인이 되었고, 아덴만에서 해적의 공격을 받는 등 여러 모험을 겪은 후였다. 베세기체에서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포함된 다른 포르투갈 함대도 발견되었는데, 그는 카브랄에게 브라질이 섬이 아닌 대륙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니콜라우 코엘류의 배는 1501년 6월 23일 포르투갈에 먼저 도착했고,[19] 카브랄은 다른 배들을 기다린 후 7월 21일에 도착했으며, 다른 배들도 그 뒤를 따랐다. 13척의 배 중 5척만이 화물을 싣고 돌아왔고, 6척은 손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대가 운반한 화물은 포르투갈 왕실에 최대 800%의 이익을 안겨주었다.[19]
5. 1. 코친 및 칸누르와의 동맹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보고서에서 경고를 받은 마누엘 1세는 카브랄에게 캘리컷(코지코드) 남쪽에서 무역할 수 있는 다른 항구를 찾도록 지시했다. 그 항구는 코치였고, 함대는 12월 24일에 코치에 도착했다.[18] 코치는 명목상 캘리컷의 봉신이었지만, 다른 인도 도시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코치는 독립을 원했고, 포르투갈은 이러한 인도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18] 카브랄은 코치의 통치자뿐만 아니라 다른 인도 도시의 통치자들과도 동맹을 맺고 상관을 설립했다. 마침내 귀중한 향신료를 싣고, 함대는 1501년 1월 16일 포르투갈로 귀환하기 전 추가적인 무역을 위해 칸누르로 향했다.[18]5. 2. 귀환 항해
카브랄의 함대는 1501년 1월 16일 인도를 떠나 포르투갈로 귀환을 시작했다.[18] 아프리카 동해안으로 향하던 중, 배 한 척이 모래톱에 좌초되어 침몰하기 시작했다. 다른 배에 공간이 없어 화물은 버려졌고, 카브랄은 배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19] 이후 함대는 모잠비크 섬으로 이동하여 보급을 받고 희망봉 항해를 준비했다. 순찰선 한 척은 소팔라로, 또 다른 순찰선은 항해 성공 소식을 알리기 위해 먼저 출발했다. 페드루 드 아타이데가 지휘하는 배는 함대와 떨어졌다.[19]5월 22일, 두 척만 남은 함대는 희망봉을 돌았다.[19] 6월 2일에는 베세기체(현재의 다카르)에 도착하여, 먼저 출발한 니콜라우 코엘류의 배뿐만 아니라, 1년 넘게 잃어버렸던 디오구 디아스의 배와도 재회했다. 디오구 디아스는 마다가스카르 섬을 처음으로 본 유럽인이 되었고, 아덴만에서 해적의 공격을 받는 등 여러 모험을 겪은 후였다. 디아스의 배에는 7명의 쇠약한 선원만 남아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동료를 보자 기쁨에 사망했다.[19] 베세기체에서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포함된 다른 포르투갈 함대도 발견되었는데, 그는 카브랄에게 브라질이 섬이 아닌 대륙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니콜라우 코엘류의 배는 1501년 6월 23일 포르투갈에 먼저 도착했다.[19] 카브랄은 다른 배들을 기다린 후 7월 21일에 도착했고, 다른 배들도 그 뒤를 따랐다. 13척의 배 중 5척만이 화물을 싣고 돌아왔고, 6척은 손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물은 포르투갈 왕실에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19]
6. 말년과 죽음
카브랄은 마누엘 1세와의 불화로 해군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난 뒤, 1503년 이사벨 드 카스트로와 결혼하여 최소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산타렝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카브랄을 위해 마누엘 1세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해 이후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을 앓던 카브랄은 1509년 산타렝으로 물러났고, 1518년경 국왕 의회 기사로 승격되어 추가 수당을 받았다. 1520년경 사망하여 산타렝의 그라사 교회에 묻혔다.[25]
6. 1. 마누엘 1세와의 불화

카브랄이 귀환한 후, 국왕 마누엘 1세는 캘리컷에서 입은 손해에 보복하기 위해 새로운 인도 원정대 파견을 계획했고, 카브랄은 이 "보복을 위한 원정"의 지휘관으로 지명되었다. 카브랄은 8개월에 걸쳐 준비를 마쳤지만[20], 어떤 사정으로 출항 전에 해임되었다. 자세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20], 원정대의 한 분대를 이끌 예정이었던 빈센트 소드레를 총지휘관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카브랄은 이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20] 해임되었는지,[20] 스스로 사퇴했는지[20]는 불분명하지만, 1502년 3월에 부대가 출항했을 때 총지휘를 맡은 것은 카브랄이 아니라 소드레의 외조카인 바스코 다 가마였다.[21] 다 가마 지지 파벌과 카브랄 지지 파벌 사이에 적대감이 생겼다고 알려져 있으며, 카브랄은 이 시점에서 궁정을 영구적으로 떠났다.[20] 국왕은 이 불화에 매우 격분하여,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추방될 수 있었는데, 이는 다 가마의 지지자 중 한 명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20]
6. 2. 은둔 생활 및 사망
카브랄은 항해에서 돌아온 후, 마누엘 1세가 캘리컷에서 포르투갈이 입은 손실에 대해 보복하기 위한 새로운 인도 원정을 계획하면서, 이른바 "보복 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8개월 동안 준비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지휘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20] 일설에는 함대 일부의 지휘권을 비센테 소드레에게 주려는 제안에 카브랄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0] 해임되었는지, 스스로 물러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502년 3월 함대가 출발했을 때 지휘관은 카브랄이 아닌 바스코 다 가마였다.[21] 다 가마를 지지하는 파벌과 카브랄을 지지하는 파벌 사이에 적대감이 생겼고, 카브랄은 궁정을 떠났다.[20]1503년, 카브랄은 페르난두 1세의 후손이자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여동생을 어머니로 둔 ''도나'' 이사벨 드 카스트로와 결혼했다.[22] 부부는 최소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페르나웅 알바레스 카브랄과 안토니우 카브랄)과 두 딸(카타리나 데 카스트로와 기오마르 데 카스트로)이었다.[22] 알부케르크는 카브랄을 위해 1514년 마누엘 1세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23]
항해 이후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고통받던[25] 카브랄은 1509년 산타렝으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했다.[25] 1518년 또는 그 이전에 국왕 의회의 기사로 승격되어 2,437 레알의 수당을 받았다.[24] 이는 1497년에 그에게 부여된 연간 수당에 더해진 것이었다.[24] 카브랄은 1520년경에 사망하여 산타렝의 그라사 교회에 안치되었다.[25]
7. 유산 및 재평가
마르팀 아폰수 드 소자가 1532년에 상 비센테에 최초의 영구적인 포르투갈 정착지를 건설하면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이 될 땅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확장했다. 포르투갈은 서쪽으로 국경을 넓혀 원주민과 스페인으로부터 더 많은 땅을 정복했고, 1750년경에는 현재 브라질 국경의 대부분을 확보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의해 광대한 해상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1822년 9월 7일,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의 상속자인 돔 페드루 1세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2][3]
7. 1. 사후 재평가
카브랄의 발견은 그의 탐험 이후 거의 300년 동안, 심지어 그의 고향에서조차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상황은 1840년대에 페드루 1세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페드루 2세 황제가 브라질 역사 지리 연구소를 통해 카브랄의 삶과 탐험에 관한 연구와 출판을 후원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이는 브라질의 다양한 시민들 사이에 민족 의식을 육성하고 강화하려는 황제의 야심 찬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 즉, 히스패닉 아메리카 공화국들에 둘러싸인 독특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제국 거주민들에게 공통의 정체성과 역사를 부여하고자 했다.카브랄에 대한 관심이 처음으로 부활한 것은 1839년 브라질의 역사가 프란시스쿠 아돌푸 드 바르나겐(후에 포르투 세구루 자작)이 그의 안식처를 재발견하면서였다. 카브랄의 무덤이 거의 방치된 상태로 발견된 것은 당시 마리아 2세가 통치하던 포르투갈과 브라질 간의 외교적 위기로 이어질 뻔했다.
1871년, 유럽 여행 중이던 브라질 황제는 카브랄의 묘소를 방문하여 과학적 연구를 위한 발굴을 제안했고, 이는 1882년에 수행되었다. 1896년 두 번째 발굴에서 흙과 뼈 조각이 들어 있는 항아리가 반출되었다. 그의 유해는 여전히 포르투갈에 있었지만, 항아리는 결국 1903년 12월 30일 브라질의 구 리우데자네이루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로 카브랄은 브라질에서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는 그의 라이벌 바스쿠 다 가마에 의해 가려졌다.
역사가 윌리엄 그린리는 카브랄의 탐험이 "지리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와 경제에 미친 영향 때문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수의 항해가 "후세에 더 큰 중요성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시대에 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제임스 맥클리먼트는 "더 위대하거나 더 운이 좋은 사람들의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의 정복과 발견의 역사에서 카브랄의 위치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확언했다. 그는 카브랄이 "브라질의 첫 번째 발견자는 아니더라도, 역사상 주요 발견자로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7. 2. 의도적 발견설 논쟁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1세기 이상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만약 의도적이었다면, 포르투갈은 이미 서쪽에 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문제는 1854년 브라질 역사 지리 연구소 회의에서 페드루 2세 황제가 처음 제기하였다.[4]1854년 이전까지는 우연히 발견했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초기 저작으로는 페르나웅 로페스 드 카스타녜다의 《인도 발견과 정복의 역사》(1541년), 주앙 드 바루스의 《아시아의 데카다스》(1552년), 다미아웅 드 고이스의 《가장 행운아 D. 마누엘의 연대기》(1558년), 가스파르 코레이아의 《인도의 전설》(1561년),[5] 빈센테 두 사우바도르 신부의 《브라질의 역사》(1627년), 세바스티앙 다 로차 피타의 《포르투갈 아메리카의 역사》(1730년)가 있다.[6]
의도적이었다는 주장을 옹호하는 최초의 저작은 1854년 조아킴 노베르토 드 소자 이 실바가 출판했다.[7] 이후, 프란시스쿠 아돌푸 지 바르나겐,[8] 카피스트라누 지 아브레우,[8] 페드루 칼몽,[9] 파비우 라모스,[10] 마리우 바라타[11] 등 여러 학자들이 이 견해를 지지했다. 역사학자 헬리오 비안나는 카브랄의 발견에 "의도성의 징후가 있다 하더라도, 주로 남대서양 가장자리에 땅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나 이전의 의심에 근거하여" 이를 뒷받침할 반박할 수 없는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12] 토머스 스키드모어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13] 찰스 R. 복서는 고의적인 발견 항해였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며,[14] 역사학자 앤서니 스미스는 상충되는 주장이 "아마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15]
7. 3. 선구자들

카브랄에 앞서 빈센테 야녜스 핀손, Diego de Lepe|디에고 데 레페es 등 스페인 탐험가들이 브라질 해안을 탐험한 기록이 있다.[26] 핀손은 오늘날 상투 아고스틴 곶(브라질 페르남부쿠 주)에서 아마존강 입구까지, 레페는 오야포크 강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이들의 탐험은 일시적이었고, 이후 브라질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26]
역사학자 카피스트라노 데 아브레우,[26] 프란시스코 아돌포 데 바른하겐,[26] 마리오 바라타,[26] 헬리오 비안나[26]는 이들의 탐험이 이후 포르투갈어권 국가로 발전하는 브라질의 형성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독특한 역사, 문화, 사회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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