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케야마 시게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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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가마쿠라 막부 초기의 무장으로,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막부 창업에 기여했으나, 호조 씨와의 갈등으로 인해 몰락했다. 그는 용맹함과 충성심으로 칭송받았으며, 다양한 일화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호조 씨와의 대립 과정에서 모반 혐의를 받아 처형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생애와 관련된 유적, 유물, 그리고 전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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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 시게야스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아버지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와 함께 호조 씨와의 갈등으로 몰락하여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죽음은 하타케야마 씨의 멸망을 초래했다. - 하타케야마씨 (헤이시)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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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 시게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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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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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하타케야마 씨 |
이름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
이명 | 쇼지 지로 |
계명 | 실산종진대거사 (出生地에 있는 보리사, 하쿠타 산 만푸쿠 사의 계명. 그 외 여러 개 있음.) |
묘소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공원 (사이타마 현후카야 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목 무덤 (가나가와 현요코하마 시아사히 구) 외 |
생애 | |
시대 | 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초기 |
출생 | 1164년 |
사망 | 1205년7월 10일 (향년 42세) |
관직 및 지위 |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
주군 | 요리토모 → 요리에 → 사네토모 |
가계 | |
씨족 | 간무 헤이시요시후미류 하타케야마 씨 |
부모 | 아버지: 하타케야마 시게요시, 어머니: 미우라 요시아키의 딸 또는 에도 시게쓰구의 딸 |
형제 | 시게타다, 나가노 사부로 시게키요, 시부에 로쿠로 시게무네, 호라이 사부로 쓰네요시? |
배우자 | 아다치 도모토의 딸, 정실: 호조 도키마사의 딸 |
자녀 | 시게히데, 시게야스, 시게마사, 엔요, 시게요시, 사다오카 부인 (시마즈 다다히사 실), 딸? (아시카가 요시즈미 실?) |
2. 생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로, 헤이케 이야기 등 당시 기록에 따르면 용맹하고 강인한 무사였다.
1184년 아와즈 전투 이후, 토모에 고젠을 포획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3]
쥬에이 2년(1183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와 요리토모가 대립했을 때, 요리토모는 동생인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게 군사를 주어 오미국으로 진출시켰다. 이듬해(1184년) 정월, 가마쿠라 군과 요시나카 군은 우지 강과 세타에서 충돌했다.
『헤이케 이야기』와 『겐페이 조세이키』에 따르면, 요시쓰네 군에 속해 있던 시게타다는 500기의 병력을 이끌고 우지 강을 건넜다. 이때 말이 활에 맞아 걸어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같은 처지의 오오쿠시 시게치카가 매달리자 그를 강 건너편으로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있다.[6]
요시나카 군을 격파한 요시쓰네는 교토로 들어가 고시라카와 법황을 알현했고, 시게타다도 함께 법황에게 이름을 올렸다. 『겐페이 조세이키』에서는 시게타다가 토모에 고젠과 일대일 대결을 벌여 그녀의 갑옷 소매를 찢었고, 토모에 고젠은 도망쳤다고 한다. 이 우지 강 전투에서 가마쿠라 군은 승리했고, 요시나카는 멸망했다.
1184년 2월,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는 셋쓰국 후쿠하라(현재의 효고현 고베시)까지 후퇴한 헤이케를 공격하기 위해 교토를 출발했다. 시게타다는 노리요리 군에 속해 있었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요시쓰네 군에 속했고, 『겐페이 조세이키』에서는 히요도리 고개에서 말을 잃은 시게타다가 말을 업고 언덕을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가마쿠라 군은 크게 승리했고, 헤이케는 사누키국 야시마로 도망쳤다.
이후 요리토모는 노리요리에게 대군을 주어 주고쿠·규슈로 원정을 보냈지만, 신뢰할 만한 사료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시게타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겐페이 조세이키』에서는 요시쓰네의 군대에 속하여 야시마 전투를 치렀다고 하지만, 신뢰성은 낮다.
겐랴쿠 2년(1185년) 3월, 요시쓰네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를 멸망시켰다.
2. 1. 초기 생애와 요리토모와의 만남
하타케야마 씨는 반도 팔평 씨의 하나인 지치부 씨의 일족으로, 무사시 국오부스마 군 하타케야마 고(현재의 사이타마현후카야시 하타케야마)를 영지로 삼았다. 같은 일족으로는 에도 씨, 가와고에 씨, 토시마 씨 등이 있었다. 많은 동국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하타케야마 씨도 겐지의 가신이 되었다. 아버지 시게요시는 헤이지의 난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패사하자, 헤이케를 따라 20년에 걸쳐 충실한 가신으로 섬겼다.[1]지쇼 4년 8월 17일, 요시토모의 셋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모치히토 왕의 령지를 받들어 거병했다. 이때 아버지 시게요시가 다이번 역으로 교토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영지에 있던 17세의 시게타다가 일족을 이끌게 되었고, 헤이케 측으로 요리토모 토벌에 나섰다. 23일에 요리토모는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오바카게치카에게 크게 패하여 궤주[5], 사가미 국에 출진한 하타케야마 세력은 24일에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에서 요리토모와 합류하지 못하고 돌아온 미우라 씨 일족과 전투를 벌였다. 미우라 씨는 다타라 요시하루와 그 가신인 이시이 고로 등의 희생을 치르면서도 본거지인 미우라로 돌아갔지만, 하타케야마 세력은 시게타다의 가신 50여 명이 효수당하고 무사시 국으로 퇴각[5]했다. 시게타다는 이 회계의 치욕을 씻기 위해 미우라 씨를 습격하려 하여 지치부 일족으로 무사시 검교직인 가와고에 시게요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요청에 응한 가와고에 시게요리에 에도 시게나가도 가세하여, 무사시 국의 무사단 수천 기를 이끌고, 26일에 미우라 씨의 본거지인 기누가사 성을 공격[5], 27일 혼자 성에 남은 외할아버지인 노령의 미우라 요시아키를 쳐 죽였다(기누가사 성 전투)[5].
9월, 요리토모는 아와 국에서 재거하여, 지바 쓰네타네, 가즈사 히로쓰네 등을 더하여 2만 기 이상의 대군으로 불어난 보소 반도를 진군하고, 무사시 국에 들어갔다. 10월 4일, 시게타다는 가와고에 시게요리, 에도 시게나가와 함께 나가이 나루터에서 요리토모에게 귀복했다[5]. 『겐페이 성쇠기』에 따르면 시게타다는 선조 타이라노 무쓰나가 하치만타로 요시이에로부터 받은 시라하타를 가지고 귀참하여, 요리토모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시게타다는 선봉을 명받아 사가미 국으로 진군, 요리토모의 대군은 저항을 받지 않고 가마쿠라에 들어갔다.
시게타다는 고케닌에 포함되었고, 요리토모의 오쿠라 고쇼로의 이전이나 쓰루오카 하치만구 참배의 경호 등의 『아즈마카가미』의 기사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요와 원년 7월의 쓰루오카 하치만구 사전 개축의 상량식에서 공장에게 말을 하사할 때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함께 말을 끌고 있다. 이때 시게타다는 요리토모의 장인인 호조 도키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게타다는 아버지 시게요시가 아직 헤이케 쪽에 있었던 것도 있어, 반드시 요리토모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같은 지치부 일족 중에서도 오야마다 씨가 중용되어 하타케야마 씨는 대우 면에서 차별을 받는 등, 요리토모가 일족 간에 대우에 격차를 두어 내부 분단을 꾀했다는 견해도 있다.
2. 2. 가마쿠라 막부 창업의 공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이다. 헤이케 이야기 등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용맹하고 강인한 무사였다.1184년 아와즈 전투 이후, 토모에 고젠을 포획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3]
쥬에이 2년(1183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와 요리토모가 대립했을 때, 요리토모는 동생인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게 군사를 주어 오미국으로 진출시켰다. 이듬해(1184년) 정월, 가마쿠라 군과 요시나카 군은 우지 강과 세타에서 충돌했다.
『헤이케 이야기』와 『겐페이 조세이키』에 따르면, 요시쓰네 군에 속해 있던 시게타다는 500기의 병력을 이끌고 우지 강을 건넜다. 이때 말이 활에 맞아 걸어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같은 처지의 오오쿠시 시게치카가 매달리자 그를 강 건너편으로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있다.[6]
요시나카 군을 격파한 요시쓰네는 교토로 들어가 고시라카와 법황을 알현했고, 시게타다도 함께 법황에게 이름을 올렸다. 『겐페이 조세이키』에서는 시게타다가 토모에 고젠과 일대일 대결을 벌여 그녀의 갑옷 소매를 찢었고, 토모에 고젠은 도망쳤다고 한다. 이 우지 강 전투에서 가마쿠라 군은 승리했고, 요시나카는 멸망했다.
1184년 2월,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는 셋쓰국 후쿠하라(현재의 효고현 고베시)까지 후퇴한 헤이케를 공격하기 위해 교토를 출발했다. 시게타다는 노리요리 군에 속해 있었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요시쓰네 군에 속했고, 『겐페이 조세이키』에서는 히요도리 고개에서 말을 잃은 시게타다가 말을 업고 언덕을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가마쿠라 군은 크게 승리했고, 헤이케는 사누키국 야시마로 도망쳤다.
이후 요리토모는 노리요리에게 대군을 주어 주고쿠·규슈로 원정을 보냈지만, 신뢰할 만한 사료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시게타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겐페이 조세이키』에서는 요시쓰네의 군대에 속하여 야시마 전투를 치렀다고 하지만, 신뢰성은 낮다.
겐랴쿠 2년(1185년) 3월, 요시쓰네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를 멸망시켰다.
2. 3. 호조 씨와의 갈등과 몰락
호조 도키마사에게 아들 하타케야마 시게야스가 살해당하자, 시게타다는 이에 대해 발언했다. 이러한 무모함에 대한 보상은 나머지 가족과 함께 죽음이었다.[1]그 후 요리토모와 요시츠네는 대립하여, 요시츠네는 교토에서 거병했지만 실패하고 도망쳤다. 요시츠네의 장인인 카와고에 시게요리는 연좌되어 주살되었고, 시게요리가 가지고 있던 무사시 류쇼소 죠켄코직을 시게타다가 계승했다.
분지 2년 (1186년), 요시츠네의 애첩인 시즈카 고젠이 요리토모의 명으로 츠루오카 하치만구에서 시라뵤시의 춤을 선보였을 때, 시게타다는 구리하코를 쳐서 반주를 맡았다.
분지 3년 (1187년), 시게타다가 지토에 임명된 이세국 누마타노 미쿠리야에서 그의 대관이 행패를 부렸기 때문에, 시게타다의 신병은 치바 타네마사에게 죄인으로서 맡겨졌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시게타다는 단식했다. 요리토모는 시게타다의 무용을 아껴 사면했지만, 시게타다가 일족과 함께 무사시국의 스가야관으로 돌아가자 사무라이 도코로 소사의 카지하라 카게토키가 이를 의심하여 모반의 의혹이 있다고 참언했다. 요리토모는 중신들을 모아 시게타다를 칠 것인지 심의했다. 오야마 토모마사가 시게타다를 변호하여, 우선, 시모카베 유키히라가 사자로서 파견되었다. 유키히라에게 사정을 들은 시게타다는 비분강개하여 자결하려 했지만, 유키히라가 이를 만류하고 가마쿠라에서 해명하도록 설득했다.
카게토키가 심문에 나서 기청문을 제출하도록 요구했지만, 시게타다는 "나에게는 두 마음이 없고, 말과 마음이 다르지 않으니 기청문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카게토키가 요리토모에게 전하자, 요리토모는 아무 말 없이 시게타다와 유키히라를 불러 포상을 주고 돌려보냈다.
분지 5년 (1189년) 여름의 오슈 전투에서 선봉을 맡았다. 아츠카시 산의 싸움에서, 미우라 요시무라, 카사이 키요시게 등이 진을 빠져나가 먼저 공격하려 했다. 이를 안 시게타다의 낭당이 보고했지만, "선봉을 받으면 공적은 모두 내 것이다. 먼저 공격하려는 자들을 막는 것은 무략의 본의가 아니다"라며 유연하게 대응했다. 이 전투에서 시게타다는 승리했고, 후지와라 야스히라는 히라이즈미를 불태우고 도망쳤으며, 오슈 후지와라씨는 멸망했다.
전후 처리에서 카지하라 카게토키가 야스히라의 낭당인 유리 하치로를 심문했지만, 카게토키가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자 하치로는 완강하게 응하지 않았다. 요리토모는 시게타다에게 심문을 맡겼고, 시게타다는 예를 다해 대했기에 하치로는 감동하여 심문에 순순히 응하며 "아까 그 남자(카게토키)와는 천지 차이다"라고 말했다(좋은 경찰·나쁜 경찰).
오슈 전투의 공로로, 무츠국 카스가오카군 지토 직에 임명되었다. 카스가오카군은 좁은 땅이지만, 시게타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라고 『아즈마카가미』에 기록되어 있지만, 무츠국에 "카스가오카"라는 군은 없다. 타마츠쿠리군의 "카스가오카"라는 지명에 해당하거나, 나가오카군의 오기라고 보는 설 등이 있지만, 불분명하다.
겐큐 원년 (1190년)에 요리토모가 상경했을 때는 선봉을 맡았고, 우콘에노다이쇼 배하의 수행 7명 안에 선택되어 참원의 공봉을 했다.
겐큐 4년 (1193년)에 무사시국의 탄당 (남서부)과 코다마당 (북서부) 두 무사단의 사이에 갈등이 생겨, 합전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 이를 듣고 중재에 들어가 화평을 이루게 하여 국내의 개전을 막았다 (이때, 코다마당의 본종가는 쇼 이에나가라고 생각된다).
쇼지 원년 (1199년) 정월, 요리토모의 사망 시, 시게타다는 자손을 지키도록 유언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유우키 토모미츠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것을 카지하라 카게토키가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비방중상했다고 참언했다. 이를 안 미우라 요시무라, 와다 요시모리 등이 분노하여, 여러 장수 66명에 의한 카게토키 탄핵의 연판장이 만들어졌고, 시게타다도 이에 이름을 올렸다. 카게토키는 가마쿠라에서 추방되었고, 이듬해 쇼지 2년 (1200년)에 추토를 받아 멸망했다 (카지하라 카게토키의 변).
겐닌 3년 (1203년)의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서는 시게타다는 호조씨 편을 들어 히키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요리이에는 유폐되었고, 후에 암살되었다. 후계 장군에는 동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즉위했고, 집권인 호조 토키마사가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히키 씨 멸망 후, 상경하여 교토수호가 된 사위 무사시노카미히라가 토모마사 대신 호조 토키마사가 무사시 국무를 장악하게 되면서, 시게타다와 토키마사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메이게츠키』겐큐 원년(1204년) 정월 18일 조에 따르면, 교토에서 "토키마사가 시게타다와 싸워 패배하여 산중에 숨었다. 오에노 히로모토가 이미 살해되었다고 한다"라는 오보가 퍼지는 등, 두 사람의 대립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교토의 토모마사 저택에서,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아내가 될 보몬 노부키요의 딸을 맞이하기 위해 상경한 고케닌들의 환영 연회가 열린 자리에서, 시게타다의 아들 시게야스가 토모마사와 말다툼을 벌였다. 주변의 중재로 수습되었지만, 다음 날에는 시게야스와 함께 상경했던 토키마사와 마키노카타의 아들 마사노리가 병으로 급사했다. 그리고 마사노리의 매장과 시게야스와 토모마사의 싸움에 대한 보고가 동시에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또한,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사네토모의 정실을 맞이하는 사절로 상경한 고케닌의 대표를 마사노리 1명으로 하고 있지만, 『츄시왕기』겐큐 원년 11월 3일 조에 따르면 토키마사도 함께 상경했음이 확인된다[7]。
『시마즈 가문 문서』에 따르면, 토키마사는 시게타다 부자를 파문했지만, 이듬해 겐큐 2년(1205년) 정월에 치바 나리타네의 중재로 양자는 일단 화해했다[8]。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토키마사는 시게타다가 모반을 꾀했다고 하여, 아들 요시토키·토키후사에게 시게타다 토벌을 의논했고,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충실하고 정직한 시게타다가 모반을 일으킬 리가 없다"며 이에 반대하지만, 마키노카타로부터 추궁당하여, 결국 동의했다고 한다. 시게타다의 사촌 이나게 시게나리 (토키마사의 사위)가 어전에 올라 시게타다의 모반을 호소했고, 쇼군 사네토모는 시게타다 토벌을 명했다.
6월 22일, 가마쿠라에 있던 시게야스는 모략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때, 시게타다는 "가마쿠라에 이변이 있으니, 급히 참진하시오"라는 허위의 명령을 받고 130기 정도를 이끌고 스가야 관을 나와 가마쿠라로 향하는 도중에 있었다. 무사시 국 후타마타가와 (현재의 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아사히구)에서 요시토키를 대장군으로 하는 수만 기가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게타다는 각오를 다지고, 불과 몇 안 되는 병력으로 버티며 요시토키의 대군을 상대로 분전했다. 아이코 스에타카에게 사살되어 전사했다. 『구간초』에는 시게타다에게 덤벼드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년 42세.
합전 후, 요시토키는 보내져 온 시게타다의 목을 보고 "오래도록 눈을 맞춘 친밀함을 잊지 못해, 슬픈 눈물을 금할 수 없다"고 비탄에 잠겼고, 그리고, "모반을 꾀하는 것은 이미 허탄하다", "참소에 의해 주륙을 당하다"라고, 시게타다 토벌을 참소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아버지 토키마사의 소행을 규탄했다고 『아즈마카가미』에는 기술되어 있다.
시게타다 모반을 호소한 이나게 시게나리가 오코토 행원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아들 오자와 시게마사는 우사미 스케무라에게 토벌되었다. 게다가 미우라 요시무라가 가마쿠라에 있던 시게나리의 동생 하리야 시게토모 부자를 토벌했다. 인망이 있던 시게타다를 죽인 것으로, 토키마사와 마키노카타는 고케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같은 해 윤 7월에 마키 씨 사건이 일어나, 토키마사와 마키노카타는 실각하여 이즈국으로 추방되었고, 히라가 토모마사는 살해되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무사시 무사 집단의 수령인 하타케야마 씨와, 무사시노카미인 토모마사를 후견하는 호조 씨에 의한 유력 국 무사시 지배를 둘러싼 충돌이 있었으며, 또한, 토키마사의 선처의 아들 요시토키와, 후처의 사위 토모마사의 호조 가문 내의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평가와 영향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후대에 모범적인 무사이자 인격자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기록인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시게타다를 옹호하고 찬미하는 내용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호조 도키마사를 추방하고 무사시 국의 영웅 시게타다를 멸망시킨 호조 요시토키(도쿠소)를 변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6]
『겐페이조스이키』, 『요시츠네기』 등에서도 시게타다는 모범적인 무사로 묘사되었고, 널리 유포된 『소가타리』에서는 소가 형제를 참언에서 구하는 은인으로 등장한다.[11] 이러한 서적들은 에도 시대에 널리 읽혀 시게타다의 인기를 높였으며, 조루리 작품에서도 시게타다는 호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요곡 『다이부츠 구요(大仏供養)』를 바탕으로 제작된 『출세 가케키요』에서는 요리토모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범적인 무사로 그려지며, 시게타다를 치기 위해 변장한 아쿠시치뵤에 가게키요를 간파하는 역할로 등장한다.[11] 『가라 센다이하기』에서는 악역인 가지와라 가게토키를 간파하는 관대하고 공정한 인물로 묘사되며,[11] 『히라가나 세이스이키』에서는 적이었던 도모에 고젠이나 히구치 가네미쓰에게도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행동거지가 훌륭한 무사로 칭찬받는 인물로 그려진다.[11]
이처럼 후대에 시게타다는 뛰어난 무장이면서도 성실하고 자비로운 인격자로 묘사되었으며, 참언을 일삼아 동료를 함정에 빠뜨리는 악인으로 묘사된 가지와라 가게토키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11]
3. 1. 긍정적 평가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가마쿠라 막부의 후대 편찬서인 『아즈마카가미』에서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악인으로 단정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찬미하는 기사가 눈에 띈다. 『아즈마카가미』에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옹호하고, 과도하게 찬미하는 기사는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를 추방하고 무사시 국의 영웅을 멸망시킨 호조 요시토키(도쿠소 가문)를 변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으로 여겨진다.[6]후세에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양식적이고 모범적인 인간으로서의 평가를 확립했다. 『아즈마카가미』뿐만 아니라 『겐페이조스이키』, 『요시츠네기』에서도 모범적인 무사로 묘사되었으며, 유포본인 『소가가타리』에서는 소가 형제를 참언에서 구하는 은인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서적들은 에도 시대에 널리 보급되어 자주 읽혔기 때문에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인기도 높아졌으며, 『소가가타리』 등의 영향을 받은 조루리 작품에서도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호인으로 묘사된다. 요곡 『다이부츠 구요(大仏供養)』를 기반으로 제작된 『출세 가케키요』에서는, 항상 요리토모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범적인 무사로 소개되며,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치려 인부로 변장한 아쿠시치뵔에 가게키요를 간파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가라 센다이하기』에서는 악역인 가지와라 가게토키를 간파하는 관대하고 공정한 인물로 등장하며, 『히라가나 세이스이키』에서는 적의 도모에 고젠이나 히구치 가네미쓰 등으로부터 지(智)와 용기를 겸비하고 행동거지가 훌륭한 무사로 칭찬받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후대의 시대에는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참언을 이용하여 동료를 함정에 빠뜨리는 악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뛰어난 무장이자 성실하고 자비로운 인격자로 묘사되었다.
3. 2. 부정적 평가
하지만 히키 씨 멸망 후, 호조 토키마사가 무사시 국무를 장악하게 되면서 시게타다는 토키마사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1204년 교토에서는 "토키마사가 시게타다와 싸워 패배하여 산중에 숨었다."라는 오보가 퍼질 정도로 두 사람의 대립은 널리 알려졌다.[7]1205년, 토키마사는 시게타다가 모반을 꾀했다고 주장하며 아들 호조 요시토키에게 시게타다 토벌을 의논했다. 요시토키는 시게타다가 모반을 일으킬 리 없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시게타다 토벌에 동의했다. 이후 시게타다는 모략에 의해 살해되었고, 요시토키는 시게타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토키마사의 소행을 규탄했다고 『아즈마카가미』에 기록되어 있다.
1898년, 하라 카츠로는 『아즈마카가미의 성질과 그 사료로서의 가치』에서 『아즈마카가미』의 기록이 호조 요시토키를 옹호하기 위한 곡필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무사시 무사 집단의 수령인 하타케야마 씨와 무사시노카미인 히라가 토모마사를 후견하는 호조 씨 간의 무사시 지배를 둘러싼 충돌, 그리고 호조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3. 후대에 미친 영향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후대에 모범적인 무사이자 인격자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기록인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시게타다를 옹호하고 찬미하는 내용이 많이 보인다. 이는 호조 도키마사를 추방하고 무사시 국의 영웅 시게타다를 멸망시킨 호조 요시토키(도쿠소)를 변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겐페이조스이키』, 『요시츠네기』 등에서도 시게타다는 모범적인 무사로 묘사되었고, 널리 유포된 『소가타리』에서는 소가 형제를 참언에서 구하는 은인으로 등장한다.[11] 이러한 서적들은 에도 시대에 널리 읽혀 시게타다의 인기를 높였다. 조루리 작품에서도 시게타다는 호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요곡 『다이부츠 구요(大仏供養)』를 바탕으로 제작된 『출세 가케키요』에서는 요리토모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범적인 무사로 그려지며, 시게타다를 치기 위해 변장한 아쿠시치뵤에 가게키요를 간파하는 역할로 등장한다.[11] 『가라 센다이하기』에서는 악역인 가지와라 가게토키를 간파하는 관대하고 공정한 인물로 묘사된다.[11] 『히라가나 세이스이키』에서는 적이었던 도모에 고젠이나 히구치 가네미쓰에게도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행동거지가 훌륭한 무사로 칭찬받는 인물로 그려진다.[11]
이처럼 후대에 시게타다는 뛰어난 무장이면서도 성실하고 자비로운 인격자로 묘사되었으며, 참언을 일삼아 동료를 함정에 빠뜨리는 악인으로 묘사된 가지와라 가게토키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11]
4. 전설과 일화
전쟁 후, 아들 하타케야마 시게야스가 호조 도키마사에게 살해당하자 시게타다는 이에 대해 발언했다. 이러한 무모함에 대한 보상은 나머지 가족과 함께 죽음이었다.[1] 그의 명예를 지키려는 용감한 시도와 함께, 그의 강인함과 기술을 보여주는 다양한 행적들은 ''헤이케 이야기''와 기타 당시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헤이케 이야기''의 일화에 따르면, 그는 다른 여러 무사들과 함께 우지 강을 가장 먼저 건너기 위해 경쟁했다. 그의 말이 머리에 화살을 맞자, 그는 말을 버리고 활을 지팡이 삼아 강을 건너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둑을 막 오르려 할 때, 그의 양아들 오쿠시노 시게치카가 도움을 요청했고, 시게타다는 그를 붙잡아 육지로 던졌다. 시게치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승자이며 강을 가장 먼저 건넜다고 외쳤다.[2]
1184년 아와즈 전투 이후, 시게타다는 토모에 고젠을 포획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3]
- 시게타다는 전사 직전에 "내 마음이 바르다면 이 화살로 가지와 잎이 생겨 번성하라"고 하며 화살촉을 땅에 꽂았다. 이윽고 이 화살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려, 해마다 두 개씩 자라 번성하여 "거꾸로 화살 대나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시게타다는 호걸로도 알려져 있으며, 히요도리 고개의 전투에서는 자신의 말을 사용하여 벼랑을 내려갈 때, 말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안타까워 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스스로 벼랑을 내려갔다고 한다.
- 시게타다는 가마쿠라 가도의 숙장 마을인 고쿠분지(国分寺)의 기녀 아사즈마타유(夙妻太夫)와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헤이케(平家) 토벌을 위해 서국으로 떠나게 된다. 시게타다의 귀환을 기다리던 아사즈마타유에게 다른 남자가 시게타다를 포기하게 하기 위해 서국에서 죽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를 믿고 슬퍼한 아사즈마타유는 근처에 있는 연못(스미노이케(姿見の池))에 몸을 던졌다. 그 죽음을 슬퍼한 마을 사람들은 묘표로 소나무를 심었다.[12] 헤이케 토벌을 마치고 서국에서 돌아온 시게타다는 아사즈마타유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며 공양을 위해 절을 세우고, 아미타여래 입상을 안치하고 아사즈마타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금불을 만들어 조문했다고 한다.[13] 도쿄도 고쿠분지시에는 이 전설에서 이름을 따온 "코이가쿠보(恋ヶ窪)"라는 지명과, 스미노이케(姿見の池)가 있다.[14] 연못은 쇼와(昭和) 40년대에 매립되었지만, 헤이세이(平成) 11년에 연못을 재생하여 공원으로 정비되었다.
5. 유적과 유물
- '''적사위 오요로이''' : 일본 3대 오요로이 중 하나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가 봉납한 것으로 전해지는 무사시 미타케 신사의 보물이며 국보이다. 관련 항목 참조.
- '''흑칠 태도 명 보수''' : 시게타다가 봉납했다고 전해지는 대소 한 쌍의 태도로, 무사시 미타케 신사의 보물이며 국가의 중요 문화재이다.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공 사적 공원(사이타마현 후카야시 하타케야마): 하타케야마 관터(시게타다 탄생지)와 묘소가 있다.
- 스가야 관터(사이타마현 히키군 란잔정): 시게타다가 거처했던 스가야 관의 유적이다.
- 사이타마 현립 란잔 사적 박물관 : 스가야 관터에 건설된 박물관이다.
- 후타마타가와・쓰루가미네 고전장(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아사히구): 쓰루가미네 주민과 사이타마현 가와모토촌의 유지들이 건립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공 비석 등이 있다. 관련 항목, 관련 항목 참조. 이들은 요코하마시 등록 지역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 가와우라 온천: 시게타다가 복통을 앓던 밤, 꿈에 나타난 계시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온천이다.
6. 관련 작품
; 가부키
- 大仏殿万代礎|다이부쓰덴 만다이이시조일본어
- 関羽|간우일본어: 가부키 18번 중 하나로, 關羽|관우중국어로 분장한 시게타다가 등장한다.
- 景清|가게키요일본어: 가부키 18번 중 하나.
- ひらがな盛衰記|히라가나 세이스이키일본어
- 壇浦兜軍記|단노우라 가부토 군키일본어
- 宮島のだんまり|미야지마노 단마리일본어
; 영화
- 曾我兄弟 富士の夜襲|소가 형제 후지의 야습일본어 (1956년, 토에이 교토, 출연: 오토모 류타로)
; 텔레비전 드라마
- 草燃える|풀이 타오르다일본어 (1979년, NHK 대하드라마, 출연: 모리츠구 코지)
- 鎌倉殿の13人|가마쿠라 시대의 13인일본어 (2022년, NHK 대하드라마, 출연: 나카가와 타이시)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2]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3]
서적
Legend in Japanese Art
https://books.google[...]
[4]
간행물
肥後古記集覧
熊本市
[5]
문서
吾妻鏡
[6]
서적
吉見町史
木耳社
[7]
서적
史伝 北条義時
小学館
[8]
논문
畠山重忠の政治的遺産
勉誠出版
[9]
학술지
畠山物語との関連
岩波書店
[10]
간행물
吾妻鏡辞典
東京堂出版
[11]
학술지
河越重頼の娘-源義経の室
京都橘大学
[12]
웹사이트
一葉松
https://www.city.kok[...]
国分寺市
2023-02-22
[13]
웹사이트
恋ヶ窪伝説
http://kokufu.tokyo/[...]
ぶらり国・府
2023-02-24
[14]
웹사이트
姿見の池【都名湧水】
http://www.city.koku[...]
国分寺市
2020-03-08
[15]
웹사이트
指定・登録文化財目録
https://www.city.yok[...]
横浜市教育委員会
2020-11-27
[16]
웹사이트
川浦温泉ゆこゆこネット
https://www.yukoyuko[...]
2023-03-21
[17]
웹사이트
畠山重忠公の伝説
http://nirehara-jyog[...]
上行寺
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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