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프라이
1. 개요
헤르만 프라이는 독일의 바리톤 가수로, 1952년 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오페라와 가곡 무대에서 활약했다.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에서 활동하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바이로이트 음악제 등에서 공연했고, 모차르트와 로시니 오페라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슈베르트 가곡 해석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슈베르티아데 음악제를 개최하고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1998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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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헤르만 프라이 |
|---|---|
| 출생 | 1929년 7월 11일 |
| 사망 | 1998년 7월 22일 |
| 출생지 |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
| 사망지 | 뮌헨 |
| 직업 | 바리톤 가수 |
| 학력 | 베를린 음악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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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공로장 수훈자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는 미국 외교 정책을 주도한 유대인 출신 외교관으로, 현실주의 외교와 데탕트 정책을 통해 미소 관계 완화 및 중 relations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베트남 전쟁 종식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100세에 사망했다. -
바이에른 공로장 수훈자 -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제265대 교황으로 재임하며,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보수적인 신념과 스캔들 대처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
그래미상 수상자 -
지미 카터
지미 카터는 해군 장교와 땅콩 농장 운영을 거쳐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도덕적, 진보적 이미지로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퇴임 후 카터 센터 설립과 인도주의 활동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
그래미상 수상자 -
버락 오바마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으로, 시민 운동가 및 법률가,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미국 상원의원을 거쳐 2008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2임기를 역임하며 의료보험 개혁법 추진, 이라크 전쟁 종식,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 등의 업적을 남겼다. -
1929년 출생 -
찰스 틸리
찰스 틸리는 미국의 사회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로, 역사 사회학, 사회 운동, 국가 형성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며 관계적, 과정 중심적 접근 방식으로 사회과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29년 출생 -
정석모
경찰 출신 행정가이자 정치인인 정석모는 치안국장, 도지사, 차관, 6선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충청권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계 은퇴 후에는 건양대학교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 생애
헤르만 프라이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 시대에 성장기를 보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징병될 예정이었으나 전쟁 종결로 입대하지 않았다. 베를린 음악대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1952년 헤센 방송 협회 주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음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초기에는 가곡 리사이틀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비스바덴에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에 입단하여 1960년까지 활동했으며, 이 시기 후반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비롯한 여러 주요 무대에서 객원 가수로도 활약했다. 1960년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볼프람 역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1965년에는 같은 역할로 바이로이트 음악제 무대에도 섰다. 그의 레퍼토리는 초기 베르디 작품에서 점차 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중심으로 옮겨갔으며, 오페레타와 독일 민요, 학생가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텔레비전 출연을 통해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1976년에는 오스트리아 호에넴스에서 슈베르티아데 음악제를 창설하여 슈베르트 음악 보급에 기여했으며, 1982년부터는 함부르크의 음악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또한 자서전을 출판하고, 1988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직접 연출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1998년, 독일 바이에른주 크라이링에서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헤르만 프라이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 시대의 독일에서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징집될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종결되면서 실제 입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베를린 음악대학교에서 귄터 바움과 해리 고트샬크에게 성악을 배웠다. 1952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헤센 방송 협회의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2. 경력
프라이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 시대에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징병을 피했다. 베를린 음악대학교에서 귄터 바움과 해리 고트샬크에게 성악을 배웠고, 195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헤센 방송 협회의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는 가곡 리사이틀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비스바덴에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에 입단하여 1960년까지 활동했고, 이 시기 후반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객원 가수로도 활동했다.
1960년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볼프람 역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으며, 1965년에는 같은 역할로 바이로이트 음악제 무대에도 섰다. 초기에는 베르디의 작품도 불렀으나, 점차 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또한 오페레타와 독일 민요, 학생가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으며, 텔레비전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면에서 밝은 캐릭터로 친숙했던 에리히 쿤츠의 뒤를 잇는다는 평가도 받았다.
1982년부터는 함부르크의 음악 대학교에서 후진을 지도했으며, 자서전을 출판했다. 또한, 1976년 오스트리아 호에넴스에서 슈베르티아데 음악제를 창설하여 직접 공연할 뿐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을 초청해 연주회를 기획했다. 1988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998년, 독일 바이에른주 크라이링에서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2.2.1. 주요 활동 및 역할
그는 가곡 독창회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헤센 방송 협회 주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이듬해 헤시셰스 슈타츠테아터 비스바덴에서 달베르의 오페라 깊은 땅의 모루치오 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에 합류하여 1960년까지 활동했으며, 이 시기 마지막 몇 년 동안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객원 가수로 자주 출연했다.
196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탄호이저의 볼프람 역으로 데뷔한 이후 197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했으며, 1990년대 초반까지도 간헐적으로 무대에 섰다. 1965년에는 같은 역할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하여 1966-67년, 1981-84년, 1986년에도 출연했다. 경력 초기에는 베르디의 작품도 불렀으나, 점차 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프라이는 특히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오페라에서 피가로 역으로 명성을 얻었다. 모차르트의 다른 역할, 특히 마술피리의 파파게노와 여자는 다 그래의 굴리엘모 역시 자주 연기했으며,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백작 역을 맡아 녹음하기도 했다. 때때로 돈 조반니 역으로도 공연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에서는 뛰어난 아이젠슈타인 연기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코믹 오페라(오페라 부파)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지적인 무대 해석, 생동감 넘치는 연기, 유쾌함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의 기교적인 민첩성과 뛰어난 코믹 연기는 1970년대 모차르트와 로시니 오페라 프로덕션에서 그를 중요한 캐스팅 선택지로 만들었다.
텔레비전 출연과 영상물 작업에도 적극적이어서, 1972년 장-피에르 포넬이 연출한 로시니의 오페라 영화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피가로 역을 맡았다. 이 작품에는 로지나 역의 테레사 베르간사, 알마비바 백작 역의 루이지 알바가 함께 출연했으며,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를 맡았다. 그는 또한 독일어로 번역된 버전의 '세비야의 이발사' TV 생방송에도 출연하여 프리츠 분덜리히, 한스 호터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1976년에는 포넬이 연출한 모차르트 오페라 영화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피가로 역을 연기했다. 오페레타 공연과 독일 텔레비전 출연을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특히 일찍 세상을 떠난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와 함께 미디어에서 주목받으며, 분덜리히의 타미노 역에 맞서 파파게노 역을 자주 연기했다.
바그너 역할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달리, 부드럽고 높은 바리톤 음역에 맞는 볼프람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벡메서 역으로 제한했다. 벡메서 역할은 베른트 바이클과 함께 출연한 영상으로도 남아있다.
1976년, 프라이는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주의 호엔엠스에서 첫 번째 슈베르티아데 포어아를베르크를 창설했다. 이 축제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의 삶과 작품을 기리기 위한 행사이다. 1976년 5월 8일에 열린 첫 슈베르티아데의 개막 공연은 레너드 호칸슨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헤르만 프라이의 독창회였다. 그는 이 축제를 통해 직접 노래하는 것 외에도 뛰어난 연주자들을 초청하여 매년 많은 연주회를 기획했다.
그의 레퍼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스스로 "나의 인생의 중심"이라고 언급했던 슈베르트를 비롯한 독일 가곡(Lied)이었다. 그의 가곡 해석은 때때로 음정의 불안정함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이를 극복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필립스 레코드를 통해 민네징어 가곡부터 20세기까지의 독일 가곡 역사를 아우르는 '독일 가곡 전집' 녹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체계적인 녹음 유산을 남겼다. 그 외에도 다수의 오페라와 가곡 녹음을 남겼다.
오페라와 가곡 외에도 J.S. 바흐의 수난곡이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과 같은 종교 음악 연주회에도 자주 참여했다. 미국에서의 첫 리사이틀은 1956년에 열렸고, 일본에서는 1961년에 처음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1982년부터는 함부르크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2.2.2. 슈베르티아데
1976년, 헤르만 프라이는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 주의 호엔엠스에서 첫 번째 슈베르티아데 포어아를베르크를 조직했다. 슈베르티아데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의 삶과 작품을 기리는 행사이다. 첫 슈베르티아데는 1976년 5월 8일 저녁, 레너드 호칸슨의 피아노 반주와 함께 프라이의 독창회로 시작되었다. 프라이는 이 음악제를 통해 직접 노래하는 것 외에도 뛰어난 연주자들을 초청하여 매년 많은 연주회를 기획했다.
1997년, 프란츠 슈베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 1월 24일부터 슈베르트의 생일인 1월 31일을 거쳐 2월 5일까지 12일 동안 '슈베르티아데'라는 이름의 연속 콘서트(총 6회)를 열었다. 이때 피아노 반주는 미하엘 엔드레스가 맡았다. 이 콘서트에서는 '실러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괴테 가곡집', '겨울 나그네', '다양한 시인들의 가곡', '백조의 노래' 등이 연주되었다.
마지막 날 마지막 곡이었던 '비둘기의 편지'를 부를 때, 프라이가 노래를 잇지 못하고 잠시 무대 뒤로 퇴장했다가 다시 나와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며칠 후 인터뷰에서 그는 하인리히 하이네 시와 요한 가브리엘 자이들 시 사이의 간극 때문에 감정적으로 노래를 바로 잇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가곡집 '백조의 노래'는 원래 하이네와 루트비히 렐슈타프의 시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슈베르트 사후 출판사에 의해 자이델의 시에 붙인 '비둘기의 편지'가 포함되어 현재의 형태로 출판되었다.
2.2.3. 후진 양성
1982년부터 함부르크 국립 음악 및 연극 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자서전 《첫날밤 열기: 헤르만 프라이의 회고록》을 출판했다. 또한 1976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호에넴스에서 슈베르티아데 음악제를 창설하여, 직접 노래하는 것 외에도 뛰어난 연주자들을 초청하며 매년 많은 연주회를 기획했다.
2.2.4. 말년
1976년부터 오스트리아 호에넴스에서 슈베르티아데 음악제를 직접 주최했다. 그는 이 음악제에서 직접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동료 연주자들을 초청하여 매년 다채로운 연주회를 기획하며 음악제의 성공을 이끌었다. 1982년부터는 함부르크 음악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같은 해 자서전을 출판했다. 또한 연출가로서도 활동하여, 1988년에는 세계적인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직접 연출했다.
1997년은 프란츠 슈베르트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로, 프라이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 연속 콘서트를 열었다. 1월 24일부터 슈베르트의 생일인 1월 31일을 지나 2월 5일까지, 총 12일간 피아니스트 미하엘 엔드레스와 함께 '슈베르티아데'라는 이름 아래 총 6회의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에서는 슈베르트의 대표적인 가곡들인 '실러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괴테 가곡집', '겨울 나그네', '다양한 시인들의 가곡', 그리고 '백조의 노래' 등이 연주되어, 슈베르트 해의 주요 행사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마지막 날 공연에서는 마지막 곡인 '비둘기의 편지'(Die Taubenpost독일어)를 부르던 중 노래를 잇지 못하고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노래를 마친 일화가 있다. 며칠 후 한 음악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가곡집 '백조의 노래' 앞부분을 장식하는 하이네의 시 세계와 마지막 곡 '비둘기의 편지'의 작사가인 자이델의 시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때문에 제13곡까지의 마음으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1998년 7월 22일, 독일 바이에른주 크라이링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였다.
2.3. 음성
프라이는 뚜렷하고 세련된 음색을 지녔다. 동시대 인물이자 약간 연상이었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비교하면, 프라이의 목소리는 더 어둡고 깊은 소리를 냈지만, 피셔-디스카우와 마찬가지로 세련미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테너 음역까지 소리를 끌어올리는 능력이 뛰어났다.
3. 레퍼토리
헤르만 프라이의 레퍼토리는 오페라와 가곡을 중심으로 매우 폭넓었으며, 특히 부파 계열의 오페라 역할에서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였다. 독일 가곡, 그중에서도 슈베르트의 작품 해석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J.S. 바흐의 수난곡이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과 같은 종교 음악 연주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미국에서는 1956년, 일본에서는 1961년에 첫 연주회를 가졌다.
3.1. 오페라
헤르만 프라이는 다양한 오페라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부파 계열 역할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주요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역할들에서 그는 천의무봉한 가창을 선보였다. 특히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모두 피가로 역을 성공적으로 소화했는데, 이는 독일인 성악가로서는 드문 성과로 평가받는다.
3.2. 가곡
프라이의 레퍼토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본인이 "나의 인생의 중심"이라고 언급했던 슈베르트의 가곡이었다. 슈베르트를 비롯한 그의 독일 가곡 해석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때때로 나타나는 음정의 불안정함은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충분히 보완되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필립스 레코드에서 민네징어 가곡부터 20세기 작품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독일 가곡 전집』을 녹음했다. 이는 5살 연상이자 동향 출신인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항상 비교되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체계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가곡 외에도 J.S. 바흐의 수난곡이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과 같은 종교 음악 연주회에도 자주 참여했다.
미국에서의 첫 리사이틀은 1956년에 열렸고, 일본에서는 1961년에 처음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1997년, 프란츠 슈베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 특별한 연주회를 열었다. 1월 24일부터 슈베르트의 생일인 1월 31일을 지나 2월 5일까지, 12일 동안 피아니스트 미하엘 엔드레스(Michael Endres)와 함께 총 6회의 '슈베르티아데' 연속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콘서트에서는 '실러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괴테 가곡집', '겨울 나그네', '다양한 시인들의 가곡', '백조의 노래' 등 슈베르트의 주요 가곡 작품들을 선보이며 슈베르트 해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마지막 날 공연에서 마지막 곡인 '비둘기의 편지'(Die Taubenpost)를 부르던 중 감정이 북받쳐 노래를 잇지 못하고 잠시 무대 뒤로 퇴장했다가 다시 나와 곡을 마쳤다는 일화가 있다. 며칠 후 인터뷰에서 프라이는 "하이네 시의 세계와 자이델 시의 세계 사이에 간격이 있어, (백조의 노래) 제13곡까지의 마음으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가곡집 '백조의 노래'가 본래 슈베르트가 하이네와 렐슈타프의 시로 구성하려 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고, 사후 출판사가 자이델의 시에 붙인 '비둘기의 편지'를 추가하여 출판한 배경과 관련된 그의 깊은 해석을 보여준다.
4. 음반
헤르만 프라이는 필립스 레이블을 통해 민네징어부터 20세기까지 가곡의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녹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오페라와 가곡 녹음을 남겼다.
그의 뛰어난 오페라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다. 특히 부파 계열 역할에서 뛰어난 가창을 선보였다.
특히 로시니의 작품에서는 피가로의 결혼과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을 모두 성공적으로 소화하며 독일 성악가로서는 드문 성과를 거두었다.
프라이 스스로 "나의 인생의 중심"이라고 언급했듯이, 그의 레퍼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슈베르트를 비롯한 독일 가곡이었다. 그의 독일 가곡 해석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때때로 음정이 불안정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이를 충분히 보완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필립스 레코드에서 민네징어부터 20세기까지의 가곡 역사를 정리한 『독일 가곡 전집』을 녹음하는 등, 동시대의 위대한 바리톤 가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비교되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체계적인 녹음 유산을 남겼다.
이 외에도 J.S. 바흐의 수난곡이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과 같은 종교 음악 및 성악을 포함한 연주회 녹음에도 자주 참여했다.
5. 저술 활동
자서전 《첫날밤 열기: 헤르만 프라이의 회고록》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