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 (화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회자는 남송 시대에 발행된 지폐로, 동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흥 연간에 처음 사용되었다. 임안 지역에서 '동남회자'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으며, 정부 지출의 절반을 동전, 절반을 회자로 지불하는 '전회중반제'를 통해 신용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군비 지출 증가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발행량이 급증하면서 가치가 하락하고, 위조 문제가 발생했다. 남송 정부는 분계 제도를 통해 회자의 가치를 유지하려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막지 못했고 결국 몽골의 침략 이후 교초로 대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송 - 동도사략
《동도사략》은 북송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130권의 책으로, 송 태조부터 송 흠종까지의 황제, 황족, 주요 인물들의 기록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부록을 담아 북송 시대 역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 남송 - 경원의 당금
경원의 당금은 1195년부터 한탁주 집권기에 주희를 중심으로 한 정학 세력을 탄압하여 관직에서 축출하고 정학을 위학으로 규정하여 과거 시험에서 금지한 사건으로, 남송의 학문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화폐사 - 대명보초
대명보초는 명나라에서 닥나무 껍질로 발행된 지폐로, 무제한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잦은 정책 변화 등으로 가치가 하락하여 쇠퇴했다. - 화폐사 - 비트코인의 역사
비트코인의 역사는 작업 증명 방식과 분산형 디지털 화폐 제안을 거쳐 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의 백서 발표와 2009년 네트워크 시작 후 가격 변동, 최초 상거래, 경쟁 암호화폐 출현, 거래소 파산, 하드 포크, 엘살바도르 법정 통화 채택,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했으며, 현재 국가별 규제 차이와 불법 콘텐츠 저장 가능성 등의 문제점이 있다. - 송나라의 경제 - 교자 (지폐)
교자는 송나라 시대 쓰촨 지방에서 철전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 발행된 지폐로, 사영 기업에서 시작하여 정부가 관장하며 널리 사용되었으나, 과도한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다른 화폐로 대체되었다. - 송나라의 경제 - 비전 (화폐)
당나라 시대 동전 유통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비전은 상인들이 발행하고 현금으로 교환하는 어음 시스템으로, 송나라 교자에 영향을 주었으며 지폐와 현대 금융 시스템의 기원이 되었다.
회자 (화폐) | |
---|---|
일반 정보 | |
![]() | |
유형 | 지폐 |
발행국 | 남송 |
사용 기간 | 1160년 - 1278년 |
역사 | |
도입 | 1160년 |
폐지 | 1278년 |
설명 | 회자는 1160년부터 남송 정부에서 발행한 지폐이다. 그것들은 진회의 고문인 왕전이 건의한 바에 따라 병용되었다. 회자는 소금 통행증을 위한 지폐였다. 그것들은 주로 소금세에 사용되었지만 상품 구매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
가치 | |
액면가 | 200문 300문 500문 1관 |
참고 | |
같이 보기 | 중국의 화폐 교초 |
2. 발행
남송 소흥 말기, 조정은 동전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폐인 '회자'(會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도 임안 (현 항저우시) 일대에서 사용되어 '동남회자'(東南會子)라고 불렸다.[13] 1160년 전단례(錢端禮)가 임안태수로 부임하면서 관 주도로 회자를 발행하게 되었고, 공식 기구인 행재회자무(行在會子務)가 설치되어 발행 업무를 전담했다.[14] 초기 회자는 1관, 2관, 3관의 액면가로 발행되어 동남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회자의 안정적인 유통과 가치 유지를 위해 정부 지출의 절반은 동전, 절반은 회자로 지불하는 '전회중반제'(錢會中半制)를 시행하기도 했다. 점차 양절동서로, 강남동서로, 호남 등 다른 지역에서도 회자를 발행하면서 회자는 남송의 주요 화폐로 자리 잡았다. 효종 시기에는 군비 지출 증가로 발행량이 늘어났고, 200문, 300문, 500문 등 소액권도 발행되었다.[15] 또한 수도 외 지역에서의 교환을 위해 '도독부회자', '호북회자' 등 지역별 회자도 등장했다.
금나라와의 전쟁 등으로 회자 발행이 계속 증가하면서 가치 하락 문제가 발생했다. 건도 3년(1167년)에는 은을 풀어 구권 회자를 회수하고 소각했으며, 이듬해부터는 3년을 주기로 신권을 발행하고 구권을 교환하는 '분계'(分界) 제도를 도입하여 발행량을 통제하려 했다.[17] 그러나 동전 부족 심화와 계속되는 전쟁 비용 때문에 회자 발행량은 통제되지 못하고 급증했다. 가정 2년(1209년) 유통액은 1억 1,560만 관에 달했고, 소정 5년(1232년)에는 3억 2,900만 관으로 폭증했다.
결국 순우 7년(1247년) 분계 제도가 사실상 폐지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18] 회자 가치는 폭락했고, 200관짜리 회자로는 짚신 한 켤레도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19] 몽골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군비 조달을 위한 회자 남발은 더욱 심화되었다.[2] 이 외에도 납과 주석 판매 대금으로 지급된 '연석회자'(铅锡会子) 등 특수한 목적의 회자도 존재했다.[20]
2. 1. 초기 발행
소흥 말년에 남송 조정은 동전 공급 부족 문제에 직면하여 재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회자'(會子)라는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도 임안 지역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으며, '동남회자'(東南會子)라고 불렸다.소흥 30년(1160년) 2월, 전단례(錢端禮)가 임안태수(臨安太守)로 부임하면서 회자 발행은 관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과거 사천 지역에서 발행되었던 교자를 모방한 것이었으며[13], "성 안팎에서 (회자를) 동전과 함께 통용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남송 조정은 공식적으로 행재회자무(行在會子務)[14]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회자 발행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초기 회자는 1관, 2관, 3관의 세 종류 액면가로 발행되었으며(관은 도라고도 불렸다), 남송의 동남(東南) 지역 여러 로(路)에서 널리 유통되어 '동남회자'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당시 호부시랑(戶部侍郎, 현대의 기획재정부 차관에 해당)이었던 전단례가 회자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회자 제작에 사용되는 종이는 휘주(徽州, 현재의 안후이성 황산시)나 지주(池州, 현재의 안후이성 츠저우시) 등지에서 조달했으며, 성도와 임안에서 인쇄하여 발행했다. 송 황실에서도 회자의 원활한 발행과 유통을 돕기 위해 내탕금인 좌폐전(左帑錢) 10만 민(緡)을 자본금으로 지원했다.
회자 발행 초기, 남송 정부는 여러 시도 끝에 '전회중반제'(錢會中半制)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는 정부 지출 시 비용의 절반은 동전으로, 나머지 절반은 회자로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전회중반제의 시행 목적은 회자의 신용도를 유지하고 급격한 가치 하락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양절동서로(兩浙東西路), 강남동서로(江南東西路), 호남(湖南) 등 다른 지역에서도 자체적으로 회자를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회자는 점차 남송 영토 내에서 주요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기축통화와 유사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반면, 실물 화폐인 동전의 유통량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나중에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물건 가격을 회자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효종 재위기에는 북방 민족과의 전쟁 등으로 군사비 지출이 급증하면서 정부는 더 많은 회자를 발행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 발행된 회자 전부를 수도 임안에서 동전으로 즉시 교환해 줄 수는 없었다. 이에 정부는 '도독부회자'(都督府會子, '회남교자'라고도 불림)와 '호북회자'(湖北會子)를 발행하여 각각 건강(건강부)과 악주(악주)에서 동전으로 교환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수도 임안의 자금 부족을 심화시키지 않으면서도, 다른 지역의 회자가 대량으로 수도에 유입되어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효종은 한때 강북(양쯔강 이북) 지역에서 동남회자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으나, 이는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거래 활동을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강북 지역에서도 동남회자 사용이 다시 허용되었지만, 동전으로의 교환은 여전히 제한되었다.
융흥 원년(1163년)에는 기존의 고액권 외에 200문, 300문, 500문과 같은 소액권 회자도 추가로 발행되었다. 당시의 문인 홍적(洪适)은 그의 저서 《호부걸면발견전폐자》(户部乞免发见钱札子)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작은 군(郡)들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아 부유한 집이 드물다. 부유한 상인들의 발길도 닿지 않아 시장에서 화폐 유통이 매우 적으니, 백성들은 모두 회자를 내어 세금을 납부한다."[15] 이는 회자가 점차 동전을 대체하여 지방의 세금 납부 수단으로까지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금나라와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군비 조달을 위해 회자 발행은 계속 증가했고, 이로 인해 몇 년 사이에 회자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도 2년(1166년) 11월 14일을 기준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회자의 총액은 1,560만 도(관)에 달했다. 이에 정부는 건도 3년(1167년) 12월, 칙령을 내려 국고의 은 200만 냥을 풀어 낡은 회자 500만 냥 어치를 교환해 주고, 회수된 낡은 회자는 모두 소각하도록 했다. 또한 이때부터 3년을 한 주기로 하여 정기적으로 새 회자를 발행하고 기존 회자를 교환해 주는 제도를 시행했으며, 한 주기당 발행 총액을 1천만 관으로 제한하여 통화량 관리를 시도했다.
남송 초기에는 '전회중반제'를 통해 회자의 가치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동전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정부는 세금 수입 등에서 점차 이 원칙을 포기하게 되었다. 정부 수입에서 회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높이거나 심지어 전액 회자로만 납부받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러한 조치들은 회자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역설적으로 민간에서는 회자가 동전을 대체하는 주요 화폐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회자는 국가에 양세(兩稅)를 납부하거나 비단, 동전 등으로 교환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까지도 회자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이는 중국 역사상 지폐 사용이 빠르게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2. 전회중반제(錢會中半制)
남송 정부는 회자를 발행한 이후 여러 시도를 거쳐 '전회중반제'(錢會中半制)라는 제도를 확립했다. 이는 정부가 지출할 때 비용의 절반은 동전으로, 나머지 절반은 회자로 지불하는 방식이었다.[13] 이 제도의 목적은 회자의 신용도를 유지하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14]전회중반제가 시행되면서 회자는 점차 남송 영토 내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양절동서로, 강남동서로, 호남 등 일부 지역에서도 자체적으로 회자를 발행하면서 회자는 사실상 기축통화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반대로 동전의 사용은 줄어들었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물건값을 회자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 시대에 이르러 금나라와의 전쟁 등으로 군사 비용이 크게 늘어나자 정부는 더 많은 회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늘어난 회자를 수도 임안에서 모두 동전으로 바꿔주기 어려워지자, 정부는 '도독부회자'(都督府會子, 또는 회남교자)나 '호북회자'(湖北會子)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회자를 발행하여 각각 건강이나 악주에서 동전으로 교환하도록 했다. 이는 수도의 자금 부족을 막고 다른 지역의 회자가 수도로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융흥 원년(1163년)에는 200문, 300문, 500문과 같은 소액권 회자도 발행되었다. 당시 문인 홍적(洪适)은 "작은 군(郡)은 산골짜기에 있어 부유한 상인의 발길이 닿지 않아 화폐 유통이 매우 적으니, 민간에서는 모두 회자로 세금을 낸다"고 기록하여[15] 회자가 널리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나라와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회자 발행량은 급증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회자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건도 2년(1166년) 11월에는 회자 발행 총액이 1,560만 관(貫)에 달했다. 이에 정부는 건도 3년(1167년) 12월, 내탕고의 은 200만 냥을 풀어 낡은 회자 500만 냥어치를 교환해주고 회수하여 불태웠다. 또한 이때부터 3년을 주기로 새로운 회자를 발행하여 이전 회자를 교환해주고, 교환되지 않은 옛 회자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분계'(分界) 제도를 도입했으며, 한 주기당 발행 한도를 1,000만 관으로 제한하려 했다.
초기에는 전회중반제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동전이 점점 귀해지자 정부는 세금을 거둘 때 회자의 비율을 높이거나 아예 전액 회자로 받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원칙을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회자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지만, 역설적으로 민간에서는 동전 대신 회자를 주요 화폐로 사용하는 현상이 더욱 확산되었다. 회자는 양세 납부나 비단, 동전 교환 등에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까지 널리 사용하게 되면서 중국 사회에 지폐 사용이 빠르게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회자 발행량은 계속해서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영종 가태 3년(1203년)에는 항주회자고(杭州会子库)에 감관(감독관)이 설치되었다. 개희 3년(1207년)에는 한 해 세입의 82%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자를 발행했으며,[16] 가정 2년(1209년)에는 유통되는 회자 총액이 1억 1,560만 관에 달해 건도 4년(1168년)의 11배를 넘었다. 가정 11년(1218년)에는 금나라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또다시 500만 관의 회자가 추가로 발행되었다.
늘어나는 발행량과 함께 위조지폐 문제도 심각해지자 남송 조정은 '분계' 제도를 통해 회자의 유통 기한을 정하고 주기적으로 교환하여 가치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엄격하게 시행되지 못했다.[17] 결국 순우 7년(1247년)에는 17, 18회차 발행분 회자의 사용 제한을 없애버리면서 분계 제도마저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는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18] 당시 18회차 200관짜리 회자 한 장으로는 짚신 한 켤레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그 가치가 폭락했다.[19]
이 외에도 정부에 납이나 주석을 팔고 받은 일종의 현금 인출 증명서인 '연석회자'(铅锡会子)나,[20] 사료에 기록된 '환유전회자'(還有錢會子), '기부전물회자'(寄附钱物会子) 등 다양한 형태의 회자가 존재했다.
2. 3. 지역별 회자
회자는 현재의 저장성 일대인 량저(兩浙) 지역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소흥 말년(1160년 이전) 남송 조정은 동전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임안 (현 항저우시) 부근에서 주로 사용되어 '동남회자'(東南會子)라고 불렸다. 소흥 30년(1160년) 2월, 전단례(錢端禮)가 임안태수(臨安太守)가 되면서 이전에 사천에서 발행되던 교자를 참고하여 회자 발행을 정부 업무로 공식화했고[13], 임안성 안팎에서 동전과 함께 통용되도록 허락했다.[3] 이후 남송 조정은 정식으로 "행재회자무"(行在會子務)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회자 발행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14][4][5]초기 동남회자는 1관, 2관, 3관의 액면가로 발행되었으며, 남송의 동남 지역 여러 로(路)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당시 호부시랑(戶部侍郎)이었던 전단례가 관련 업무를 주관했고, 회자 용지는 휘주나 지주 등지에서 조달하여 성도와 임안에서 인쇄했다. 송 황실에서도 좌폐전 10만 민(緡)을 지원하여 회자 유통을 도왔다. 융흥 원년(1163년)에는 200문, 300문, 500문의 소액권 회자도 추가로 발행되었다.
효종 재위 기간에는 군사비 지출이 늘어나면서 회자 발행량이 급증했다. 늘어난 회자 물량으로 인해 수도 임안에서의 동전 교환에 어려움이 생기자, 조정은 '도독부회자'(都督府會子, 또는 '회남교자')와 '호북회자'(湖北會子)를 발행하여 각각 건강 (현 난징시)과 악주 (현 어저우시)에서 동전으로 교환하도록 했다. 이는 수도의 자금 부족을 심화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지역 회자가 수도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효종은 한때 강회(江淮) 지역에서 동남회자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으나, 상업 활동에 지장을 주자 다시 허용하되 동전 교환은 불가능하게 했다.
중앙 정부가 발행한 회자 외에도 여러 지역별 회자가 존재했다.
명칭 | 발행 지역 | 주요 특징 | 관련 시기/정보 |
---|---|---|---|
동남회자 | 임안 (현 항저우시) 및 동남 지역 | 최초의 회자. 초기 1/2/3관, 이후 200/300/500문 액면가 추가. | 소흥 말년 첫 발행, 1160년 관 주도 발행, 1163년 소액권 추가. |
도독부회자 (회남교자) | 건강 (현 난징시) | 효종 시기 군비 조달 목적. 건강에서 동전 교환. | 효종 치세 |
호북회자 | 악주 (현 어저우시) | 효종 시기 군비 조달 목적. 악주에서 동전 교환. 500민(mín), 1000민 액면가. 총 700만 민 규모 생산. | 효종 치세 |
철전 회자 | 진양 | 100문, 200문, 300문 액면가. 진양 지역에서만 유통. | - |
은 회자 | 사천 | 은본위 지폐. 1전(qián), 1.5전 액면가. | 1137년 도입 |
연석회자 | - | 납과 주석을 정부에 판매하고 받은 현금 인출 증명서. | - |
기타 | 섬서성, 후베이, 호광 등 | 편전회자(便錢會子), 직변회자(直便會子), 호광회자(湖廣會子), 환유전회자(還有錢會子), 기부전물회자(寄附钱物会子) 등. 회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75년 섬서성에서 발견됨. | - |
별도로 "연석회자"(铅锡会子)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납과 주석을 정부에 판매하여 얻은 현금의 인출 증명서였다.[20][11] 사료에 따르면 "환유전회자"(還有錢會子)와 "기부전물회자"(寄附钱物会子)도 있었다. 이처럼 회자는 남송 시대에 걸쳐 다양한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발행되고 유통되었다. 비록 중앙에서 발행한 동남회자가 가장 중요했지만, 각 지역의 필요에 따라 특화된 회자들이 존재하며 남송의 경제 시스템을 뒷받침했다.
2. 4. 발행량 증가와 분계(分界) 제도
효종의 치세에는 군비 지출이 급증하면서 정부는 더 많은 회자를 발행했다.[2] 융흥 원년(1163년)에는 200문, 300문, 500문의 소액 회자도 발행되었다. 금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회자는 계속 발행되었고, 이로 인해 몇 년 사이에 회자의 가치가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건도 2년(1166년) 11월 14일 시점에는 총 발행액이 1,560만 관(貫)에 달했다.회자의 가치 하락과 위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송 조정은 대책을 마련했다. 건도 3년(1167년) 12월에는 칙령을 내려 내탕고의 은 200만 냥을 풀어 낡은 회자 500만 냥 어치를 교환해주고, 회수된 낡은 회자는 모두 불태웠다. 이듬해인 건도 4년(1168년)에는 회자의 발행 및 사용 기한에 제한을 두는 분계(分界)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이는 3년을 주기로 새로운 회자를 발행하여 이전 회자를 교환해주고, 기한 내에 교환되지 않은 구권은 가치를 잃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옛 회자를 회수하고 회자의 가치를 안정시키려 했으며, 초기에는 발행 규모도 1천만 관으로 제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분계 제도는 실제로는 엄격하게 시행되지 못했다.[8][17]
회자 발행량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영종 가태 3년(1203년)에는 항주회자고(杭州会子库)에 감독관을 두었으며, 개희 3년(1207년)에는 한 해 평균 세입의 82%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자를 발행했다.[7][16] 가정 2년(1209년)에는 회자 유통액이 1억 1,560만 관에 달해 건도 4년(1168년)의 11배 수준으로 급증했다. 가정 11년(1218년)에는 금나라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추가로 500만 관의 회자가 발행되었다.
몽골 제국의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소정 3년(1230년)부터 이전의 난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몽골군이 사천과 섬서를 공격했다. 군비 조달을 위해 회자 발행은 더욱 남발되어, 소정 5년(1232년)에는 발행액이 3억 2,900만 관으로 폭증했으며 위조 회자 문제도 심각해졌다. 순우 5년(1245년)에도 군수품 조달을 위해 대량의 회자가 발행되었고, 순우 6년(1246년)에는 누적 발행액이 총 6억 5천만 관에 달하며 악성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결국 순우 7년(1247년), 조정은 17계와 18계 회자의 사용 제한을 없애면서 사실상 분계 제도를 폐지했다.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9][18] 당시 18계 회자 200관으로는 짚신 한 켤레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화폐 가치가 폭락했다.[10][19] 몽골군이 계속 남하하면서 군비 수요는 더욱 늘어났고, 정부는 계속해서 엄청난 양의 회자를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2]
'''회자 발행액 변화'''
시기 | 유통 중인 회자의 가치 (관) | 비고 |
---|---|---|
1,560만 | | ||
(1,000만으로 제한 시도) | 분계 제도 시작 | ||
4,100만 | | ||
1억 1,560만 | 건도 4년의 11배 | ||
3억 2,900만 | 몽골 침입 시기 | ||
6억 5,000만 | 누적 발행액 |
남송 시대의 주요 지폐였던 회자는 발행 초기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통되었으나, 점차 과도한 발행과 전쟁 비용 충당 등으로 심각한 가치 하락을 겪었다.
3. 가치 절하
소흥 말년, 남송 조정은 동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도 임안 일대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소흥 31년(1161년) 전단례가 임안부 지부로 부임하면서 교자를 본떠 관영 발행 체계를 갖추었다.[3] 초기에는 일관, 이관, 삼관의 액면가로 발행되었고, 정부는 동전과 회자를 절반씩 사용하는 "전회중반제"를 시행하고 황실 자금을 지원하는 등[4][5] 회자의 신용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효종 치세에 군비 지출이 늘어나면서 회자 발행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남송 조정은 회자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건도 4년(1168년)부터 3년 주기로 신구 회자를 교환하고 폐기하는 분계(分界) 제도를 도입하고 발행액을 제한하려 했으나[8],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특히 동전이 귀해지자, 정부는 수입 방면에서 전회중반제의 방침을 버리고, 회자의 비율을 높이거나, 심지어 전액 회자로 지불하기도 했다. 이처럼 점차 회자의 가치는 떨어졌지만, 민간에서는 주요 화폐로서 경화를 대체해 갔다. 회자는 양세를 납부하고, 견이나 경화로 교환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므로, 농민들까지 회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중국에서 지폐의 사용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회자의 가치 하락은 몽골 제국과의 전쟁이 본격화된 이종 소정 연간(1228년~) 이후 극심해졌다.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무분별한 발행과 위조 화폐 문제[2]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다. 순우 연간(1241년~)에는 누적 발행액이 급증하며[12] 악성 인플레이션 상태에 이르렀고[9], 회자의 실질 가치는 폭락하여[10] 화폐 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2]
결국 경정 5년(1264년), 집권자 가사도는 실질 가치가 없어진 회자를 대체하기 위해 1관당 동전 770문의 가치를 지닌 새로운 화폐 견전관자(見錢關子)를 발행했지만[12], 이미 붕괴된 경제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남송이 멸망한 후 회자와 관자는 모두 원나라에서 발행한 교초로 대체되었다.[2]
3. 1. 인플레이션 심화
이종(理宗) 소정(绍定) 3년(1230년) 이후 이전의 난이 발생하고, 이듬해 몽골 제국 군대가 사천과 섬서를 공격하면서 군비 지출이 급증했다.[2] 소정 5년(1232년)에는 회자 발행액이 3억 2,900만 관(貫)으로 폭증했으며, 이는 건도 4년(1168년)의 33배에 달하는 규모였다.[7][12] 발행량 증가와 함께 위조 회자 문제도 심각해졌다.[2]
순우 5년(1245년)에도 군수 조달을 위해 대량의 회자가 발행되었다. 순우 6년(1246년)에는 누적 발행된 회자가 총 6억 5천만 관에 달했다.[12] 결국 순우 7년(1247년), 남송 조정은 기존에 3년 주기로 신구 회자를 교환해주던 분계(分界) 방식을 폐지하고 17·18계(회차) 회자의 사용 기한 제한을 없앴다. 이는 회자의 가치를 유지하던 최소한의 장치를 없앤 조치로 악성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다.[9] 당시 가희 연간(1237년~1240년) 임안에서는 회자 1관의 가치가 동전 300~400문(文) 수준으로 떨어졌으며[12], 순우 9년(1249년)에는 1관이 동전 6백 문의 가치를 지녔다는 기록도 있다. 상황이 악화되어 18계 회자 200관으로는 짚신 한 짝도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10] 회자의 가치가 폭락하자 사람들은 실물 자산인 동전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화폐 유통을 마비시켜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2]
경정 5년(1264년), 권력을 잡은 가사도(賈似道)는 가치가 폭락한 회자를 대체하기 위해 실물 은에 기반한 새로운 화폐인 견전관자(見錢關子)를 발행했다. 견전관자는 1관당 동전 770문의 가치를 지녔으나, 이미 무너진 화폐 시스템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12] 결국 몽골군이 남하하면서 남송이 멸망한 후, 회자와 관자는 모두 원 조정에서 발행한 교초로 대체되었다.[2]
3. 2. 견전관자(見錢關子) 발행
이종(理宗) 소정(绍定) 3년(1230년) 이후 이전의 난이 발생하고, 이듬해에는 몽골 제국 군대가 사천과 섬서 지역을 공격하면서 남송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었다. 소정 5년(1232년)에는 회자의 발행액이 3억 2,900만 관으로 급증하여 이전보다 33배나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위조 회자 문제도 심각해졌다.순우 연간에도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한 군수 조달을 위해 회자 발행은 계속되었다. 순우 5년(1245년)에도 대량의 군수품 조달이 회자를 통해 이루어졌고, 순우 6년(1246년)에는 누적된 회자 발행액이 총 6억 5천만 관에 달했다. 결국 순우 7년(1247년), 회자는 극심한 가치 하락, 즉 악성 인플레이션 상태에 빠졌다.[9] 남송 조정은 기존에 3년 주기로 신구 회자를 교환해주던 분계(分界) 방식을 폐지하고 17·18계 회자의 사용 제한을 없앴는데, 이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다. 당시 18계 회자 200관으로는 짚신 한 짝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그 가치가 폭락했다.[10] 이미 가희 연간(1237년 ~ 1240년)에 수도 임안에서는 회자 1관의 가치가 동전 300~400문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고[12], 순우 9년(1249년)에는 1관당 동전 600문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경정 5년(1264년), 당시 남송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가사도(賈似道)는 이렇게 가치가 폭락한 회자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인 견전관자(見錢關子)를 발행했다. 견전관자는 1관당 동전 770문의 가치를 지니도록 정해졌다. 그러나 몽골군이 계속 남하하여 결국 남송이 멸망하면서, 회자와 견전관자는 모두 원 조정에서 발행한 교초로 대체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교자, 관자와 더불어 회자는 남송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폐 형태였다. 처음에는 현재의 저장성 주변인 량저(兩浙) 지역에서 도입되었으나, 점차 사용 범위가 확대되어 일상적인 상거래뿐만 아니라 세금 징수에도 사용되었고, 제국의 서부 및 북부 지역까지 확산되었다.[2] 소흥 말년(1161년경), 남송 조정은 동전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수도 임안 일대에서 주로 사용되어 '동남회자'라고도 불렸다. 소흥 31년(1161년) 2월, 전단례가 임안부 지부가 되면서 사천의 교자 발행 사례를 참고하여 회자 발행을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고, '행재회자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발행과 유통을 감독했다.[3][4][5]
효종 재위 기간 동안 지폐 사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구리 동전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회자가 필수적이라고 평가되었다. 당시 유통되는 동전의 양이 시장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고액권 회자가 일일 유통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효종은 주기적으로 회자를 갱신하려 했으나, 만료된 회자가 완전히 폐기되지 않고 낮은 가치로 계속 유통되면서 전체 유통량은 오히려 증가했다. 본래 회자는 발행 후 3년이 지나면 만료되고 명목 가치에 해당하는 동전으로 교환해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9년마다 새로운 회자를 발행하여 유통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발행액도 점차 늘어나 1195년에는 3,000만 "관"에 달했다.[2]
남송 조정은 회자의 신용을 유지하고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정부 지출의 절반은 동전, 절반은 회자로 지불하는 '전회중반제'를 시행했다. 초기에는 이 제도가 회자의 가치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동전 부족이 심화되면서 정부 수입에서 회자의 비율을 높이거나 전액 회자로 받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점차 그 의미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자는 양절동서로, 강남동서로, 호남 등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며 남송의 주요 통화로 자리 잡았고, 일반 서민들도 물건 가격을 회자로 표시할 정도였다. 효종 시기에는 군비 지출 증가로 회자 발행량이 더욱 늘어났다. 남송 조정은 임안의 자금 부족을 막고 다른 지방의 회자가 수도로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발행된 회자(도독부회자, 호북회자 등)는 해당 지역(건강, 악주 등)에서만 동전으로 교환할 수 있도록 제한하기도 했다. 또한 강회 지역에서의 동남회자 통용을 금지하기도 했으나, 상인들의 불편을 초래하여 결국 통용을 허용하되 동전 교환은 제한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융흥 원년(1163년)에는 200 "문", 300 "문", 500 "문" 등 소액권 회자도 발행되었다. 문인 홍적은 당시 상황에 대해 "작은 군은 산 속에 있어 부유한 상인의 발길이 닿지 않아 화폐 유통이 적고, 민간에서는 모두 회자로 세금을 납부한다"고 기록하여[6] 회자가 농촌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송금 전쟁과 같은 전쟁 비용 충당 및 몽골의 침입에 따른 군비 증가는 회자의 남발로 이어졌다.[2][7] 회자의 발행량이 급증하면서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다음 표는 회자 유통액의 변화를 보여준다.
시기 | 유통 중인 회자의 가치 ("관") |
---|---|
13세기 초 | 4,100만 "관"[2] |
1209년 (가정 2년) | 1억 1,560만 "관"[2][7] |
1231년 (소정 4년) | 3억 2,900만 "관"[2] |
회자는 위조가 쉬웠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2] 남송 조정은 회자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발행 및 사용 기한을 정하는 '분계' 제도를 건도 4년(1168년)에 도입했다. 3년 주기로 새 회자를 발행하고 구 회자를 교환해주며, 기한 내에 교환되지 않은 구권은 가치를 상실하게 하는 방식이었다.[8] 하지만 이 제도는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았고, 결국 순우 7년(1247년)에는 기존의 분계 방식을 폐지하고 17, 18계 회자의 사용 제한을 없앴다. 이는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9] 18계 200 "관"짜리 회자로는 짚신 한 켤레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폭락했다.[10] 가희 연간(1237년~1240년)에는 임안에서 회자 1 "관"이 동전 300~400 "문"의 가치밖에 인정받지 못했다.[12] 이러한 가치 폭락은 사람들이 동전을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게 만들어 시중의 동전 유통량을 더욱 감소시키는 악순환을 낳았고, 남송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2]
경정 5년(1264년), 실권을 잡은 가사도는 폭락한 회자를 대신하여 1 "관"당 동전 770 "문"에 해당하는 '견전관자'를 발행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남송이 멸망한 후, 회자와 관자는 모두 원나라가 발행한 교초로 대체되었다. 이 외에도 납과 주석을 정부에 판매하고 받은 현금 인출 증명서인 '연석회자'[11], '환유전회자', '기부전물회자' 등 특수한 목적의 회자도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조
[1]
백과사전
Paper Money in Premodern China.
http://chinaknowledg[...]
2016-05-10
[2]
백과사전
huizi 會子, a type of paper money.
http://chinaknowledg[...]
2016-05-10
[3]
서적
『建炎以来朝野雜記』甲集 卷16, 東南會子:「當時臨安之民、復私置便錢會子、豪右主之、錢處和為臨安守、始奪其利、以歸於官」
[4]
서적
『建炎以来系年要録』卷188, 紹興三十一年二月丙辰条:「置行在会子務、後隸都茶場、悉視川錢法行之」
[5]
문서
行在会子務は乾道年間に行在会子庫に改名され、『咸淳臨安志』や『夢粱録』でも「会子庫」と書かれている。
[6]
서적
『盤洲文集』拾遺
[7]
논문
劉光臨『市場、戰爭和財政國家 — 對南宋賦稅問題的再思考』<台大歴史学報> 第42期, 2008年12月
2008-12
[8]
서적
『宋史』卷181, 食貨下三:「光宗紹熙元年、詔第七、第八界會子各展三年。臣僚言:「會子界以三年為限、今展至再、則為九年、何以示信?」於是詔造第十界立定年限」
[9]
서적
『左史諫草』附方回 監簿呂公家傳:「端平初……鄭清之相、驟廢十五界、新行十七界、以准(十)六界之二、而物價騰踊」
[10]
서적
范文瀾『中國通史』第5卷(三)統治集團的衰朽
[11]
서적
『続資治通鑑長編』卷446, 元佑五年八月乙未条
[12]
논문
高橋弘臣『南宋臨安と東南会子』<愛媛大学法文学部論集人文学科編> 第31号, 2011年11月
2011-11
[13]
서적
李心傳《建炎以來朝野雜記》甲集卷十六《東南會子》:「當時臨安之民,复私置便錢會子,豪右主之,錢處和為臨安守,始奪其利,以歸於官。」
[14]
문서
《建炎以来系年要录》说绍兴三十一年“置行在会子务,后隶都茶场”。行在会子务后来改名为“行在会子库”,[[潜说友]]《咸淳临安志》和[[吴自牧]]《梦粱录》中都有会子库而无会子务。
[15]
서적
《盘洲文集》拾遗
[16]
논문
刘光临:《市场、战争和财政国家——对南宋赋税问题的再思考》,《台大历史学报》第42期,2008年12月
2008-12
[17]
서적
《宋史·食货志下三》记[[宋光宗|光宗]][[绍熙]]元年(1190年)宣布第7、第8界会子展界,臣僚言:“会子界以三年为限,今展至再,则为九年,何以示信?”
[18]
서적
[[吕午]]《左史谏草》附[[方回]]《监簿吕公家传》:“端平初……郑清之相,骤废十五界,新行十七界,以准(十)六界之二,而物价腾踊。”
[19]
서적
范文瀾:《中國通史》第五卷·(三)統治集團的衰朽
[20]
서적
《续资治通鉴长编》卷四四六元佑五年八月乙未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