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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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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명보초(大明通行寶鈔)는 명나라에서 발행된 지폐로, 1375년 닥나무 껍질로 처음 만들어졌다. 1관(貫) 지폐는 1,000개의 청동 주화와 교환 가능했으나, 정부의 무제한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낡은 지폐 교환 수수료 부과, 잦은 정책 변화, 은 유입 증가 등으로 가치가 하락하여 결국 쇠퇴했으며, 명나라 이후 청나라는 지폐 발행을 자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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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보초
기본 정보
대명보초
대명보초
종류지폐
통화보초(寶鈔)
발행 국가명나라
액면가1관(貫)에서 500문(文)까지
역사적 시기명나라
사용 기간1375년 ~ 1644년
특징
재료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법정 가치은 1냥(兩) = 보초 1관(貫)
실제 가치액면가의 극히 일부
참고
비고지폐 과잉 발행으로 가치 폭락

2. 배경

원나라 말기에는 지폐 남발로 인한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화폐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되어 물물 교환이 성행하는 등 경제적 혼란이 극심했다.[5][9]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고자 초기에는 원나라의 지폐인 교초 유통을 잠정적으로 용인하는 한편, 1361년 남경에 보원국(寶源局)을 설치하고 동전인 대중통보를 발행하여 화폐 질서를 회복하려 시도했다. 이는 동전 규격 통일과 물가 안정을 목표로 한 조치였으나, 여전히 원나라 시대의 화폐 단위와 교초가 통용되는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명나라 정부는 독자적인 화폐 제도를 확립하고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해 새로운 지폐 발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2. 1. 송나라와 원나라의 지폐

지폐의 전신으로 알려진 "비전"(飛錢)은 당나라에서 발행되었으나, 이는 교환 매개체로 사용될 목적이 아니었고 특정 지점 간 거래에만 사용되어 진정한 지폐로 보기는 어렵다. 세계 최초의 지폐는 송나라사천의 상인들이 발행한 약속 어음인 "교자"이다.[2] 진종 (997–1022) 재위 시기, 송나라 정부는 사천의 16명 상인에게 교자 발행 독점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민간 발행 지폐는 회수에 시간이 걸리고 인플레이션 문제가 발생하자, 1023년 정부는 교환국을 설치하여 지폐 발행을 국유화했다. 정부 보증을 받은 지폐는 성공적으로 통용되었고, 사람들은 동전처럼 신뢰하게 되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교자 외에도 "회자"와 "관자" 등 다른 종류의 지폐도 발행되었다.[3] 몽골 제국이 중국을 정복하기 이전, 여진족의 금나라 역시 "교초" (交鈔)라는 지폐를 발행한 바 있다.[4]

명나라 건국 이전의 원나라는 심각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으며 지폐 가치가 폭락했다.[5] 원나라 시대에도 구리 동전은 계속 유통되었으며, 지대통보(至大通寶), 대원통보(大元通寶), 지정통보(至正通寶)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화폐 단위로는 여전히 "문"이 사용되었다.[6][7] 이 점차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정부 발행 지폐가 이를 보완했다.[8] 쿠빌라이 칸 재위 시기에는 견직물을 기준으로 한 중통교초(中統交鈔)가 발행되었고, 1271년에는 지원보초(至元寶鈔)가 발행되었다. 은을 기반으로 한 지대은초(至大銀鈔)도 있었으나 1년 만에 유통이 중단되었다. 1350년부터는 마지막 지폐 시리즈인 지정교초(至正交鈔)가 발행되었다.

원나라 지폐는 송나라 지폐와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특정 지역에서는 지폐가 유일한 합법 통화였으며, 불환지폐로서 구리 동전이나 은괴로 교환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전 시대 지폐가 신뢰를 얻었던 주된 이유는 '태환'(兌現, "현물로 전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지폐가 어떤 실물 가치에도 기반하지 않고 강제 통용되면서 인플레이션에 더욱 취약해졌다. 이 때문에 몽골 정부는 백성들이 구리 합금 동전을 계속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때때로 새로운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원나라 말기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지폐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고, 물물 교환이 주요 교환 수단이 되었다.[9]

원나라의 지폐인 교초.

2. 2. 명나라 초기의 경제 상황



전 왕조인 원나라에서는 교초라고 불리는 지폐가 유통되었다. 원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각지에서 독립 세력이 일어났고, 그중 한 명인 주원장은 오(吳, 훗날의 )를 건국했다. 초기 명 정부는 독자적인 지폐를 발행하는 대신 동전을 발행하는 정책을 선택했다. 동전 발행을 위해 남경에 宝源局|보원국중국어을 설치하고, 1361년(지정 21년)에 대중통보를 발행하며 민간에서의 화폐 주조(사주)를 금지했다.

왕조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민간의 쌀 가격은 1석(石)당 3000문(文)까지 치솟았으나, 정부는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관청에서 정한 가격(공정 가격)을 1석당 1000문으로 고정했다. 또한 화폐 교환 비율은 원나라 시기의 단위를 계승하여, 대중통보의 계산 단위를 1관(貫)은 400문, 1량(兩)은 40문, 1전(錢)은 4문으로 정했다. 대중통보와 기존 교초 간의 교환 비율을 설정함으로써 교초의 유통을 유지하고 경제적 혼란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이처럼 보초가 발행되기 전까지 명나라 초기에는 교초가 계속 사용되었다. 대중통보 발행은 동전의 규격을 통일하여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3. 대명통행보초의 발행

홍무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명나라 최초의 지폐인 大明通行寶鈔|대명통행보초중국어1375년에 발행되었다. 같은 해 지폐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寶鈔提舉司|보초제거사중국어가 설립되었으며,[10] 초기 지폐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졌다.[11] 이 지폐는 송나라원나라의 지폐와 달리 사용 지역이나 유효 기간에 제한 없이 영구히 통용될 목적으로 발행되었다.[12]

그러나 대명보초는 실물 화폐나 준비금으로 뒷받침되지 않았고 발행량에도 제한이 없어[10]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점차 신뢰를 잃어갔다. 명나라 정부는 군인 급여 지급[13] 등 필요에 따라 지폐를 계속 발행했지만, 기존 지폐의 회수나 가치 유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부족했다.[14]

3. 1. 발행 목적

1관 지폐 생산에 사용된 인쇄판.


주원장이 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로 즉위한 후, 명 정부는 홍무 7년(1374년) 9월에 보초 발행을 위한 전담 조직인 寶鈔提舉司|보초제거사중국어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홍무 8년(1375년) 3월부터 대명통행보초를 본격적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10]

초기 보초 발행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당시 통용되던 동전에 비해 위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명 정부는 보초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유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시행했다.

  • 위조 방지: 보초 위조범은 참수형에 처하고, 위조범을 밀고하는 사람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했다.
  • 교환 비율 고정: 보초 1관의 가치를 동전 1,000문, 1냥, 2.5전으로 고정했다.
  • 보초 종류: 초기에는 1관, 500문, 400문, 300문, 200문, 100문의 6종류를 발행했다.
  • 귀금속 통제: 민간에서 이나 을 화폐처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 세금 납부: 상업세를 납부할 때, 동전 3할과 보초 7할의 비율로 내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명 정부는 원나라 시기부터 사용되던 교초를 대명통행보초로 대체하고, 국가의 화폐 제도를 안정시키려 했다.

보초의 정확한 발행 규모는 기록이 부족하여 추정만 가능하다. 홍무 18년(1385년)경에는 연간 500만에서 600만 정(錠, 2,500만~3,000만 관) 정도, 홍무제 통치 후반기에는 연간 약 1,000만 정(5,000만 관) 규모로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나라교초 발행량보다는 적은 수준이었다. 보초 회수량은 홍무제 후반기에 약 400만 정(2,000만 관) 정도로 추정된다.

보초 발행은 매년 일정량을 찍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단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발행된 보초는 주로 군인들에게 포상으로 지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1385년 이후에는 다른 임시적인 목적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상적인 국가 재정 운영을 위해 발행되었던 원나라교초와는 다른 점이다.

1389년에는 "以便民用|이변민용중국어" (백성을 돕고) 내수 거래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10문, 20문, 30문, 40문, 50문의 소액권을 추가로 발행하기도 했다.

3. 2. 특징



1관의 대명통행보초. 1개 100문의 동전 묶음이 10개 있어 액면을 나타낸다. 발행 연월일은 공란으로 인쇄 후 기입했다.


홍무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명나라 최초의 지폐인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寶鈔)는 1375년에 발행되었다. 이를 위해 같은 해 지폐 생산 감독 기관으로 보초제거사(寶鈔提舉司)가 설립되었다.[10] 초기 보초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졌으며,[11] 동전에 비해 위조가 어렵다는 점이 발행의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고려되었다.

1관(貫) 지폐는 명나라 전역에서 청동 주화 1,000문(文)과 동일한 가치를 가졌으며, 지폐에는 100문짜리 동전 묶음 10개가 그려져 액면가를 나타냈다. 더 낮은 액면가인 100문, 200문, 300문, 400문, 500문 지폐에는 더 적은 수의 동전 묶음이 그려졌다.[10] 1389년에는 "백성을 돕고"(以便民用) 국내 거래를 개선하기 위해 10문, 20문, 30문, 40문, 50문의 소액권 지폐가 추가로 발행되었으며, 여기에는 묶이지 않은 동전이 그려져 있었다.[14]

1관 지폐의 크기는 세로 33.8cm, 가로 22cm였으며, 다른 출처에서는 36.4cm × 22cm로[10] 기록되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지폐 중 하나였다. 용지는 짚과 뽕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푸른 기가 도는 회색을 띠었으며, 당시 제지 기술의 한계로 두께가 일정하지 않았다. 인쇄는 동판을 이용한 1색 인쇄였다. 지폐 상단에는 '대명통행보초'라는 명칭이, 중앙에는 액면가와 동전 묶음 그림이, 테두리에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 문양이 새겨졌다. 하단에는 발행 기관(초기에는 중서성, 1380년 폐지 후에는 호부[14]), 유효 통화임을 알리는 문구, 위조 시 참수형에 처하고 신고자에게는 높은 포상을 한다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10] 발행 연월일은 빈칸으로 두었다가 발행 시 먹으로 써넣었으며, 연호는 황제가 바뀌어도 계속 홍무 연호를 사용했다. 중앙에 2개, 뒷면에 1개의 붉은 관인이 찍혔다.

대명보초는 송나라원나라의 지폐와 달리 사용 지역에 제한이 없었고 유효 기간도 설정되지 않아 영구히 통용될 예정이었다.[12] 명 정부는 보초의 가치를 관리하기 위해 위조범 참수 및 밀고 장려, 보초 1관 = 동전 1000문 = 은 1냥 = 금 2.5전의 교환 비율 설정, 민간의 금은 사용 금지, 상업세 납부 시 동전 3할과 보초 7할 비율 강제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대명보초는 실물 화폐나 준비금으로 뒷받침되지 않았고, 정부는 발행량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10] 이로 인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376년에는 낡은 지폐를 새 지폐로 교환해주는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공묵비(工墨費)'라는 명목으로 지폐 1장당 30문의 수수료를 부과했다.[10] 1380년에는 판독 불가능한 지폐의 교환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이 시행되면서 사람들은 가치가 떨어진 낡은 지폐를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했다.[10] 정부는 이 기간 동안 군향(軍餉, jūn xiǎng)[13] 지급 등 다양한 형태로 더 많은 지폐를 시장에 발행했지만, 기존의 낡은 지폐는 거의 받아들이거나 교환하지 않아 사람들은 대명보초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14]

영락제 시대 이후 대명보초는 명나라의 유일한 법정 지폐로 고정되었으나,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도한 발행은 결국 심각한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지폐 시스템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535년까지 보초 1관의 가치는 동전 0.28개 수준으로 폭락했으며,[15] 홍치제정덕제 시기에는 지폐 생산과 사용이 사실상 중단되었다.[4] 1643년, 반란군 이자성에 맞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재정적 어려움[16] 속에서 지폐 재발행이 제안되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편, 잉글랜드 은행은 1920년대에 대명보초 발행에 경의를 표하며 은행 내에 닥나무 묘목을 심기도 했다.[12]

4. 대명통행보초의 가치 하락과 정책 변화

지폐는 금속 화폐에 비해 발행이 용이하지만,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행량과 회수량의 관리가 중요하다. 명(明) 정부는 처음부터 보초(宝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려는 정책이 부족했으며, 이로 인해 홍무제(洪武帝) 시대부터 보초의 가치 하락이 시작되었다. 홍무 9년(1376년) 초 1관(貫)으로 쌀 1석(石)을 살 수 있었던 것이 건문 4년(1402년)에는 0.1석으로 가치가 폭락했으며, 민간에서는 동전과의 교환 비율도 급격히 하락했다.

명 정부는 보초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도했다. 원나라에서도 시행했던 도초법(倒鈔法)을 실시하여 낡은 지폐를 교환해주려 했으나, 민간의 혼초(昏鈔) 환율 문제와 관리들의 부정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홍무 23년(1390년) 관련 기관인 행용고(行用庫)가 폐지되었다. 또한 동전 발행 중단과 , 사용 금지 조치를 여러 차례 시행했지만, 민간의 은 사용을 막지 못해 오히려 은 가치를 높이고 보초 가치 하락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1402년에는 소금 판매 대금을 보초로 강제 징수하는 호구식염법(戶口食鹽法)을 제정하기도 했다.

영락제 시대에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이전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영락 7년(1409년) 보초를 대량으로 발행하면서 가치가 더욱 급격히 하락했다. 이후 선덕제 시대에는 강남 경제 발전에 따라 실물 경제가 중요해지면서 보초 가치를 회복시키려 선덕 4년(1429년)부터 운하 통행세를 보초로 징수하는 초관(鈔關) 제도를 시행했지만, 이미 신뢰를 잃고 떨어진 보초의 가치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명 정부의 다양한 정책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명통행보초의 가치 하락을 막지 못하고 화폐 시스템의 혼란은 지속되었다.

4. 1. 가치 하락 원인

금속 화폐에 비해 지폐는 발행이 용이하지만,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행액과 회수액의 관리가 중요하다. 원(元) 정부는 전반부에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지폐 정책을 운영했다. 그러나 명(明) 정부는 처음부터 보초(宝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려는 정책이 부족했고, 홍무제(洪武帝) 시대부터 가치 하락이 시작되었다. 홍무제 시기에는 보초 회수 계획이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보초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예를 들어, 쌀과의 교환 비율 변화는 다음과 같다.

연도보초 1관(貫) 당 쌀 교환량
홍무 9년 (1376년)1석(石)
홍무 18년 (1385년)0.4석
홍무 30년 (1397년)0.2석
건문 4년 (1402년)0.1석



동전과의 공식적인 교환 비율은 보초 1관 = 1000문(文)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시장(민간)에서는 동전에 대한 보초의 가치 하락이 진행되었다. 민간에서의 환율 기록을 보면, 홍무 23년(1390년)에는 초 1관 = 돈 250문, 홍무 27년(1394년)에는 초 1관 = 돈 160문까지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명 정부는 보초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원나라에서도 시행했던 도초법(倒鈔法)을 실시했다. 이것은 손상되거나 낡은 보초(혼초, 昏鈔)를 3%의 수수료를 받고 새 지폐로 교환해주는 제도였으며, 이를 위한 조직으로 행용고(行用庫)가 설립되었다. 교환을 보증하여 보초의 가치 하락을 막으려 했지만, 제도적인 운용은 불충분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민간에서의 혼초 환율 문제였다. 민간 거래에서는 혼초를 사용할 경우 일반 보초의 2배 가격을 요구했고, 일부 관리(서리, 胥吏)는 이를 이용하여 새 지폐로 세금을 징수한 뒤 혼초로 교환하여 차익을 얻었다. 이처럼 보초에 이중 가격이 존재하게 되자, 홍무 23년(1390년) 이 행위가 발각되어 행용고는 폐지되었다. 행용고의 폐지는 명 정부가 보초의 이중 가격 문제를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보초의 가치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명 정부는 대책으로 동전 발행 중단과 금은 사용 금지를 총 7번 실시했지만, 민간의 은 사용은 멈추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은의 가치를 높여 보초의 가치 하락이 계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명 정부는 추가 대책으로, 소금의 강제 판매를 통해 대금을 보초로 지불하게 하는 호구식염법(戶口食鹽法, 1402년)을 제정했다.

영락제 시대에는 수도를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하는 비용 조달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락 7년(1409년)에 북경에 보초제거사(宝鈔提挙司)를 설치하여 보초를 증발(增發)했기 때문에, 보초 가치는 격렬하게 하락했다. 이후 선덕제 시대에는 강남 경제의 발전으로 실물 경제가 주축이 되면서 보초의 재건이 시도되었다. 선덕 4년(1429년)부터는 운하에 초관(鈔關)이라고 불리는 관소를 설치하여 통행세(선료, 船料)를 보초로 징수했지만, 이미 하락한 보초의 가치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4. 2. 정부의 대응

지폐는 금속 화폐에 비해 발행하기 쉽지만, 그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행량과 회수량의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원나라 정부는 초기에 지폐 정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했으나, 명나라 정부는 처음부터 보초(宝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려는 정책이 부족했고, 홍무제 때부터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홍무제 시기 보초 가치 하락은 다음과 같다.

홍무제 시기 대명보초 가치 하락
연도쌀 대비 가치 (1관 당)동전 대비 가치 (1관 당, 민간 환율)
홍무 9년 (1376년)쌀 1석-
홍무 18년 (1385년)쌀 0.4석-
홍무 23년 (1390년)-돈 250문
홍무 27년 (1394년)-돈 160문
홍무 30년 (1397년)쌀 0.2석-
건문 4년 (1402년)쌀 0.1석-



정부가 정한 공식 환율은 보초 1관당 동전 1000문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민간에서는 보초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위 표와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

명 정부는 보초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원나라에서도 시행했던 도초법(倒鈔法)을 실시했다. 이는 낡거나 손상된 보초(혼초, 昏鈔)를 수수료 3%를 받고 새 지폐로 교환해주는 제도로, 이를 위해 행용고(行用庫)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민간에서는 낡은 지폐인 혼초가 새 지폐 가치의 절반으로 거래되었고, 일부 서리들은 이를 악용해 차익을 챙겼다. 이로 인해 보초 가격이 이중으로 형성되는 문제가 발생했고, 결국 홍무 23년(1390년) 이 행위가 발각되어 행용고는 폐지되었다. 행용고 폐지는 정부가 보초의 이중 가격 문제를 사실상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보초의 가치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명 정부는 추가 대책으로 동전 발행을 중단하고 의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총 7번 실시했지만, 민간에서의 은 사용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은의 가치만 높여 보초의 가치 하락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1402년에는 가구별로 소금을 강제로 할당하고 그 대금을 보초로 납부하게 하는 호구식염법(戶口食鹽法)을 제정하기도 했다.

영락제 시대에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영락 7년(1409년) 북경에 보초제거사(宝鈔提挙司)를 설치하고 보초 발행량을 크게 늘렸다. 이로 인해 보초 가치는 폭락했다. 이후 선덕제 시대에는 강남 지역의 경제 발전에 따라 실물 경제가 중요해지면서 보초의 가치를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선덕 4년(1429년)부터는 운하에 초관(鈔關)이라는 세관을 설치하여 선박 통행료(선료, 船料)를 보초로 징수했지만, 이미 떨어진 보초의 가치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3. 한계

지폐는 금속 화폐에 비해 발행이 쉽지만, 그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행량과 회수량의 균형을 맞추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원(元) 정부는 초기에는 비교적 성공적인 화폐 정책을 펼쳤으나, 명(明) 정부는 처음부터 보초(宝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려는 의지나 정책이 부족했다. 결국 홍무제 시대부터 보초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홍무 9년(1376년)에는 보초 1관(貫)으로 쌀 1석(石)을 살 수 있었지만, 불과 9년 뒤인 홍무 18년(1385년)에는 0.4석으로 가치가 떨어졌고, 홍무 30년(1397년)에는 0.2석, 건문(建文) 4년(1402년)에는 0.1석까지 폭락했다. 정부가 정한 공식 환율은 보초 1관당 동전 1000문(文)으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민간에서는 보초의 가치가 동전에 비해 훨씬 낮게 평가되었다. 예를 들어, 홍무 23년(1390년) 민간에서는 보초 1관이 동전 250문으로 거래되었고, 홍무 27년(1394년)에는 160문까지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명 정부는 보초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원나라에서도 시행했던 도초법(倒鈔法)을 도입했다. 이는 낡거나 손상된 보초, 즉 혼초(昏鈔)를 3%의 수수료를 받고 새 지폐로 교환해주는 제도였다. 이를 위해 행용고(行用庫)라는 기관까지 설립하여 지폐 교환을 보증하려 했으나, 제도 운영은 미흡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민간에서 형성된 혼초의 비정상적인 환율이었다. 민간 거래에서 혼초는 일반 보초보다 두 배의 가치로 통용되었고, 일부 서리(胥吏)들은 이를 악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겼다. 결국 보초는 이중 가격 구조를 갖게 되었고, 이러한 폐단이 드러나자 홍무 23년(1390년) 행용고는 폐지되었다. 행용고의 폐지는 사실상 명 정부가 보초의 이중 가격 문제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고, 보초의 가치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에 명 정부는 동전 발행을 중단하고 금과 은의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총 7차례나 시행했지만, 민간에서의 은 사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조치는 은의 가치를 더욱 높여 보초의 가치 하락을 부추기는 역효과를 낳았다. 추가 대책으로 1402년에는 소금을 강제로 판매하고 그 대금을 반드시 보초로 지불하게 하는 호구식염법(戶口食鹽法)을 제정하기도 했다.

영락제 시대에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대규모 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1409년 북경에 보초제거사(宝鈔提挙司)를 설치하고 보초를 대량으로 발행했다. 이는 보초 가치의 급격한 폭락을 초래했다. 이후 선덕제 시대에는 강남 지역의 경제 발전으로 실물 경제가 중요해지면서 보초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선덕 4년(1429년)부터는 운하에 초관(鈔關)이라는 세관을 설치하여 선박 통행료(船料)를 보초로 징수했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보초의 가치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 명나라 화폐 제도의 변화와 대명통행보초의 쇠퇴

명나라 초기에는 지폐인 보초(寶鈔)를 고액 거래에, 동전을 소액 거래에 사용하는 것을 공식적인 화폐 제도로 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초와 동전 모두 발행량이 부족하고 발행 속도도 일정하지 않아 화폐 유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동전의 원료인 구리 부족과 명나라 재정이 실물 경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점 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화폐 부족 상황 속에서 15세기 전반부터는 은정(銀錠, 은화)이 점차 주요 지불 및 유통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강남 지역의 발달된 생산력을 기반으로 포(布, 비단과 면포)나 쌀과 같은 현물 역시 고액 거래에 활용되었다.

한편,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해외로부터 대량의 이 유입되면서 명나라의 화폐 제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러한 은 유통의 증가는 결국 일조편법 시행으로 이어져 사실상 은본위제로 전환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보초의 가치 하락과 쇠퇴를 더욱 가속화했다.

결국 보초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명나라의 행정 법령집인 『대명회전』에는 홍치 2년(1489년)에 보초를 매매하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보초가 더 이상 화폐가 아닌 골동품으로 취급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명나라의 지폐 정책 실패는 후대의 왕조에게 영향을 주어, 청 초기에는 지폐를 발행하지 않는 배경이 되었다. 청나라 정부가 다시 지폐를 발행한 것은 아편 전쟁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재정난이 심화된 함풍 3년(1853년)에 이르러서였다.

5. 1. 은(銀) 유입 증가

명나라 초기에는 지폐인 보초(寶鈔)와 동전의 발행량이 부족하여 화폐 유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로 인해 15세기 전반부터는 은정(銀錠, 은화)이 지불과 유통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외로부터 대량의 이 유입되면서 명나라의 화폐 제도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은 중국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은을 지불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거점으로 한 남만 무역을 통해 일본산 은(왜은)을 명나라로 가져왔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포토시나 사카테카스 등에서 채굴한 은을 갤리언 무역(마닐라 갤리언)이라는 정기 항로를 통해 명나라로 운반했다.

이렇게 해외로부터 은 유입이 증가하자, 명나라 정부는 결국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는 일조편법이라는 새로운 세금 제도로 이어졌으며, 사실상 은을 기본적인 화폐로 사용하는 은본위제를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5. 2. 대명통행보초의 쇠퇴

명나라 정부는 지폐인 보초(寶鈔)를 고액 거래용으로, 동전을 소액 거래용으로 하는 화폐 제도를 공식적으로 정했으나, 실제 유통에서는 동전과 보초 모두 발행량이 부족하고 발행 속도도 일정하지 않아 재정 운영에 필요한 화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는 동전의 원료인 구리가 부족했던 점과 명나라 재정이 실물 경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점에도 기인한다.

15세기 전반부터는 이러한 화폐 부족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은정(銀錠, 은화)이 지불 및 유통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강남 지역의 발달된 생산력에 기반한 실물 경제 체제 하에서는 포(布, 비단과 면포)나 쌀과 같은 현물도 고액 거래에 활용되었다.

보초에 관한 마지막 공식 기록은 명나라의 행정 법령집인 『대명회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홍치 2년(1489년)에는 보초를 매매하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는 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보초가 골동품처럼 거래되는 것을 금지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 중국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대량의 은을 유입시키면서 명나라의 화폐 제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거점으로 한 남만 무역을 통해 일본산 은(왜은, 倭銀)을 들여왔고, 스페인은 갤리언 무역을 통해 신대륙(포토시, 사카테카스 등)에서 채굴한 은을 대량으로 유통시켰다. 이러한 국제적인 은 유입 증가는 명나라 정부가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인정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게 만들었고, 이는 사실상 은본위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보초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했다.

명나라의 지폐 정책 실패는 후대의 왕조에게 교훈을 주었다. 청나라는 건국 초기에는 지폐를 발행하지 않았으며, 민간에서는 무거운 동전이나 은화를 대신하여 금융업자인 전장이 발행하는 예탁증서인 전표가 화폐처럼 유통되었다. 청나라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폐를 발행한 것은 아편 전쟁태평천국의 난 등 연이은 전쟁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던 함풍 3년(1853년)에 이르러서였다.

6. 명나라 이후의 화폐 제도

보초(寶鈔)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명나라의 행정 법령집인 『대명회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홍치 2년(1489년)에 보초를 매매할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보초가 골동품으로 거래되는 것을 금지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국외로부터의 은 유입은 명나라의 화폐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 중국에 도착하여 중국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대량의 은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거점으로 하는 남만 무역을 통해 일본산 은(왜은, 倭銀)을 유통시켰고, 스페인은 갤리언 무역(마닐라 갤리언)을 통해 중남미의 포토시나 사카테카스에서 채굴한 은을 대량으로 들여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나라 정부는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인정하고, 일조편법이라는 은본위제에 기반한 세금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명나라에 이어 중국을 지배한 왕조는 명나라의 지폐 정책 실패를 교훈 삼아 초기에는 지폐를 발행하지 않았다. 대신 민간에서는 무거운 동전이나 은화를 직접 운반하는 불편함을 덜기 위해 금융업자인 전장(錢莊)이 발행하는 예탁 증서인 전표(錢票)가 널리 유통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도 아편 전쟁태평천국의 난 등 연이은 전쟁으로 재정 부족에 시달리자 함풍 3년(1853년)에 결국 지폐를 발행하게 된다.

7. 현대적 의의

일본 나고야에 있는 도쿄-미쓰비시 UFJ 은행 화폐 박물관에 전시된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寳鈔) 지폐. 현대 미국 달러 지폐와 비교한 크기에 주목할 수 있다.


20세기 초, 대량의 1관(貫) 대명보초 지폐가 발견된 두 가지 주요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00년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외세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발생했다. 당시 팔국 연합 소속의 일부 유럽 군인들이 이화원에 있던 석가모니 불상을 뒤져 금은괴, 보석 등과 함께 1관 대명보초 지폐 묶음을 발견했다. 이 군인들은 귀금속에 더 큰 관심을 보였고, 지폐 묶음은 현장에 있던 미국 육군 군의관 루이스 리빙스턴 시먼에게 넘겨졌다. 시먼은 이 지폐들을 상하이에 위치한 세인트 존스 칼리지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중 한 장은 호세아 발루 모스가 저술한 책 ''중국 제국의 무역과 행정''에 석판 인쇄 복제본 형태로 실리기도 했다.[17]

두 번째 발견은 1936년경 베이징 성벽 일부를 허무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성벽의 거대한 문을 해체하던 중 벽 안에 묻혀 있던 1관 대명보초 지폐의 대규모 묶음을 찾아냈다. 노동자들은 훼손된 지폐들을 주변 구경꾼들에게 당시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몇 센트에 불과한 아주 적은 금액에 판매했다. 이때 옌칭 대학의 루터 캐링턴 굿리치도 두 장의 지폐를 구입했으며, 이후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18]

이러한 두 차례의 대량 발견으로 인해, 1관 대명보초 지폐는 현대의 지폐 수집가들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청나라 이전 중국 지폐가 되었다.

다른 액면가의 지폐들은 명나라 초대 황제인 홍무제 통치 기간에만 발행되었기 때문에 극소수만이 현존한다. 이 지폐들과 현존하지 않는 액면의 인쇄판은 중국 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4]

한편, 2016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한 경매 회사에서 나무로 만든 나한 조각상의 접힌 부분에서 1관 대명보초 지폐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나, 이후 조사 결과 위조품으로 밝혀진 사례도 있었다.[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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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Re-Examining the Authenticity of Song Paper Money Specimens 2006
[3] 논문 The Sung and Ming Paper Monies: Currency Competition and Currency Bubbles
[4] 서적 A Compilation of Pictures of Chinese Ancient Paper Money The China Finance Publishing House 1992
[5] 논문 Paper Money Inflation, Prices, Gresham's Law and Exchange Rates in Ming China 1997
[6] 논문 Monies of Account and Monetary Transition in China, Twelfth to Fourteenth Centuries 2010
[7] 논문 Monetary Terms in Chinese History 1975
[8] 간행물 A Study on the Song, Yuan and Ming Monetary Policies against the Context of Worldwide Hard Currency Flows during the 11th-16th Centuries, and their Impact on Ming Institutions and Changes Harrassowitz 2007
[9] 간행물 Paper Money among the Chinese 1975
[10] 웹사이트 Chinese Ming Banknote https://artsandcultu[...] British Museum 2018-09-14
[11] 웹사이트 Ming dynasty paper money: scientific analysis -The inclusion of a fourteenth-century Ming note in “A History of the World in 100 Objects” has brought unprecedented attention to these objects http://www.britishmu[...] 2018-09-14
[12] 웹사이트 Episode 72 - Ming banknote. http://www.bbc.co.uk[...] BBC 2014-14-09
[13] 웹사이트 "大明寶鈔"七十年內貶值一百倍說明了什麼?. http://history.peopl[...] people.cn 2018-09-14
[14] 웹사이트 Paper Money in Premodern China. http://chinaknowledg[...] Chinaknowledge 2018-09-10
[15] 웹사이트 Paper money, a Chinese invention? - First paper, then paper money. This is pure logic.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the first notes or better, the first paper money, appeared in China. With the invention of paper and printing on its account, this country was almost destined to produce the first paper money. https://www.nbbmuseu[...] National Bank of Belgium Museum 201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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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웹사이트 Ancient Chinese Cash Notes - The World's First Paper Money - Part II. http://thecurrencyco[...] The Currency Collector 2018-09-09
[19] 웹사이트 Mossgreen director Paul Sumner rejects claims collapsed auction house was a 'ponzi scheme'. https://mobile.abc.n[...] 2019-08-17
[20] 웹사이트 Stashed cash: Rare Ming Dynasty banknote found inside Chinese sculpture. https://www.foxnews.[...] Live Science 2018-09-14
[21] 문서 '대명회전(大明會典)'
[22] 문서 '명사(明史)』 卷81 「지(志)57•식화(食貨)5」'
[23] 문서 숭정(崇禎) 17년(1644년) 1644
[24] 서적 천공개물(天工開物)
[25] 문서 '대명회전(大明會典)』 卷31 「장고(庫藏)2·초법(鈔法)」'
[26] 문서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卷195'
[27] 서적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https://books.google[...] 더난출판 2019
[28] 문서 '대명회전(大明會典)』 卷41'
[29] 문서 '대명회전(大明會典)』 卷31'
[30] 서적 中国货币史 上海人民出版社 1988
[31] 뉴스 明代的纸币超发:“壹贯”宝钞曾只值几个铜子 http://culture.peopl[...]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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