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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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비질리오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537년부터 555년까지 재임한 교황이다. 그는 부제와 교황 특사를 거쳐, 교황 아가피토 1세 사후 고트족의 압력과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질리오는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 재건에 힘썼으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삼장서 단죄 칙령에 반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단성설 논쟁과 삼장서 논쟁에 휘말렸다. 결국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승인한 후 로마로 귀환하던 중 시라쿠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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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질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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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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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교황 |
교회 | 칼케돈 기독교 |
임기 시작 | 537년 3월 29일 |
임기 종료 | 555년 6월 7일 |
선임자 | 실베리오 |
후임자 | 펠라지오 1세 |
출생일 | 기원전 497년경 |
출생지 | 동고트 왕국, 로마 |
사망일 | 555년 6월 7일 |
사망 장소 | 동로마 제국 시칠리아 시라쿠사 |
2. 생애 초기
비질리오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15][1] 531년 부제 서품을 받고 로마 교회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17][3] 교황 보니파시오 2세는 비질리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했으나,[17] 반대에 부딪혀 다음 해 지명을 철회했다.[14] 보니파시오 2세의 후임자인 교황 아가페토 1세는 비질리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황 특사로 임명했다.[4] 그곳에서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라 황후는 폐위된 단성론 성향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안티무스 1세 복권을 위해 비질리오에게 접근하기도 했다.[4][14]
2. 1. 가문 배경
비질리오는 로마 귀족 가문의 일원이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그의 부친 요한네스는 테오도릭 대왕으로부터 집정관의 칭호를 받았다.[15][1]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그의 형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레파라투스는 동고트 왕국의 비티게스 왕에 의해 인질로 끌려갔으나, 537년 고트족의 집단 학살 현장을 벗어나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한다.[16][2]2. 2. 초기 경력
비질리오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 ''교황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요한네스(또는 요한)는 테오도릭 대왕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로부터 집정관 칭호를 받았다.[15][1]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그의 형 레파라투스는 원로원 의원으로, 동고트 왕국의 비티게스 왕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537년 학살 명령 직전 탈출했다.[16][2]비질리오는 531년 부제 서품을 받고 로마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로마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성좌의 후계자를 지명할 권한을 부여하는 칙령에 동의했으나, 이 결정은 오늘날 무효로 여겨진다.[17][3] 이 칙령에 따라 교황 보니파시오 2세는 비질리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인 성직자들에게 이를 공표했다.[17]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한 반대가 일자, 보니파시오 2세는 다음 해(532년)에 비질리오의 후계자 지명을 철회하고 관련 칙령을 불태웠다.[14]
보니파시오 2세의 후임자인 교황 아가페토 1세(재위 535–536)는 비질리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황 특사(Apocrisiarius|아포크리시아리우스lat)로 임명했다.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라 황후는 비질리오를 통해, 아가페토 1세에 의해 폐위된 단성론 성향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안티무스 1세를 복권시키고 자신의 단성론 정책에 대한 지원을 얻으려 했다.[4] 비질리오는 테오도라 황후로부터 성좌와 약 317.51kg의 금을 약속받고 그녀의 계획에 동의했다고 전해진다.[14]
3. 교황 대리 시절
교황 아가피토 1세는 비질리오를 교황 대리로 임명하여 동로마 제국으로 파견하였다. 단성설을 지지했던 테오도라 황후는 단성설 신봉을 이유로 강제로 물러난 안티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에 복직시키려 했고, 이를 위해 비질리오와 협력하고자 했다. 테오도라 황후가 비질리오에게 접근한 것은 안티무스를 축출한 교황 아가피토 1세에 대항하고, 단성설을 지지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18] 테오도라 황후는 비질리오에게 교황직과 함께 약 317.51kg의 금화를 약속하며 그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비질리오는 이 제안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질리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는 동안, 536년 4월 22일 교황 아가피토 1세가 사망했다. 로마에서는 고트족 왕의 영향력 아래 실베리오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실베리오가 교황으로 서품된 직후,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를 점령했고, 곧이어 고트족에게 포위당했다. 고트족의 포위는 완전하지 않았으나, 로마 시민들과 동로마 군인들은 도시 함락을 두려워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 로마의 여성, 어린이, 불필요한 하인들을 나폴리로 피신시켰다.[5]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교황 실베리오는 로마를 고트족에게 넘기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실베리오를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수도승 복장을 입혀 그리스로 추방했으며, 같은 혐의로 여러 원로원 의원들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6]
실베리오의 폐위에 비질리오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질리오에게 비판적인 ''교황 연대기''의 저자들은 비질리오가 황제의 명령을 벨리사리우스에게 전달하여 실베리오 폐위를 종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실베리오가 어떻게 선출되고 서품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언급하지 않는다.[7] 반면,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가 실베리오를 폐위시킨 직후 비질리오를 교황으로 임명했다고 기록했다.[6] 비질리오는 537년 3월 29일에 주교 서임을 받고 교황으로 즉위했다. 실베리오가 사망한 후, 비질리오는 선출 과정의 정당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모든 성직자들에게 교황으로 인정받았다.[14]
4. 교황 선출 과정 (537년)
비질리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는 중에 536년 4월 22일 교황 아가피토 1세가 선종하였다. 후임 교황으로는 고트족 왕의 외압으로 실베리오가 선출되었다. 그 해 가을,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실베리오의 허락을 받아 로마를 장악하였다. 이후 동고트족 군대가 로마를 포위 공격하였다. 고트족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 벨리사리우스는 전투에 불필요한 여인, 어린이, 하인 등을 나폴리로 떠나도록 지시하였다.[19][5]
이 시기에 교황 실베리오는 로마를 고트족에게 넘기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즉시 실베리오를 교황직에서 강제로 폐위시키고 수도복을 입혀 그리스로 유배 보냈다. 몇몇 원로원 의원들도 같은 혐의로 로마에서 추방되었다.[20][6]
실베리오의 폐위에 비질리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초기 문헌들에서 명확하지 않다. 비질리오에게 비판적인 《교황 연대표》의 저자들은 그가 실베리오를 폐위시키라는 제국의 명령을 벨리사리우스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한다.[21][7] 반면,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가 실베리오를 폐위시킨 직후 비질리오를 후임 교황으로 임명했다고 기록했다.[20][6]
비질리오는 537년 3월 29일 주교 서임을 받고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전임 교황 실베리오가 선종하자, 로마 교구의 모든 사제들은 비질리오의 선출 과정에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하고 받들었다.[14]
5. 교황 재임 기간 (537년 - 555년)
비질리오의 교황 재임 기간은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라 황후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단성설 문제와 삼장서 논쟁이라는 중대한 신학적 논쟁에 휘말리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와의 갈등을 겪는 등 파란만장한 시기였다.[22][14] 이 기간 동안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어 8년 가까이 머물기도 했다.[24] 그의 재임 중 활동과 주요 사건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5. 1. 초기 활동

테오도라 황후의 도움으로 교황좌에 올랐으나, 비질리오는 교황이 된 후 단성설에 반대하는 전임 교황들의 입장을 고수하여 황후의 기대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 비질리오가 단성설을 지지하며 안티무스, 세베루스, 테오도시우스 등에게 보냈다는 서한이 존재하지만, 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는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22][8] 비질리오는 결국 안티무스를 총대주교로 복직시키지 않았다.[14]
비질리오는 야심이 많았지만 행정 능력 또한 뛰어났다. 교황이 된 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로마의 건물들을 개축하고 성당들을 새로 지었으며, 묘지를 개방하는 등 도시 재건에 힘썼다.
540년경, 비질리오는 단성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두 통의 서한을 보냈다. 하나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게,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나스에게 보낸 것으로, 두 서한 모두 에페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의 가르침 및 교황 레오 1세의 교리를 지지하며 안티무스 총대주교의 사임을 전적으로 옹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2][14]
교황 재위 초기에 작성된 여러 서한들을 통해 비질리오가 서방 교회의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538년 3월 6일, 그는 형의 미망인과 혼인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테우데베르트 1세의 참회 문제에 관해 아를의 주교 체사리오에게 답변하며 이 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23][9] 538년 6월 29일에는 브라가의 주교 프로푸투루스에게 교회 훈령에 관한 여러 질문에 답하는 교서를 전달했다.
또한 체사리오 주교가 선종한 후 아를의 주교가 된 아욱사니오와 그의 후임 아우렐리아노를 갈리아 지역 교회를 감독하는 교황 대리로 임명했다. 비질리오는 이들에게 교황 대리의 권한을 상징하는 팔리움을 수여하고, 지역 시노드를 소집하여 주교들의 여행과 팔리움 사용을 적절히 조절하도록 지시했다. 특히 아우렐리아노에게는 로마 교회가 동로마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에 영향을 받지 말고 교회의 평화 유지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14]
5. 2. 삼장서 논쟁 (543년 - 554년)
그리스도론에 대한 논쟁으로 제국이 분열될 것을 염려한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단성설을 따르는 이들을 교회와 다시 화해시키고자 했다. 이때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주교 테오도로 아스키다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요 인물들과 그들의 저술을 네스토리우스주의로 단죄하면 단성설 추종자들과의 일치가 쉬워질 것이라고 황제에게 조언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조언을 받아들여 543년 또는 544년에 새로운 칙령을 발표하여, 이미 사망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키루스의 테오도레토, 에데사의 이바스의 서신 등 세 인물과 관련된 문헌, 즉 삼장서(三章書, τρία κεφάλαια|트리아 케팔라이아grc)를 단죄했다.[10] 이 세 신학자는 실제로 일부 오류가 있었으나,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네스토리우스에 대항하여 사용한 용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었다. 특히 이바스와 테오도레토는 과거 이단으로 몰려 주교직을 박탈당했으나,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한 후 성좌와 칼케돈 공의회에 의해 복직된 인물들이었다.그러나 동방의 총대주교들과 주교들 다수는 강압에 의해 칙령에 서명했지만,[10] 서방 교회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부당하고 위험하다고 여겼다. 이미 사망한 인물들, 특히 칼케돈 공의회에서 인정한 인물들까지 단죄하는 것은 공의회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0] 이는 교회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으며, 사실상 단성설을 용인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어 제국 전역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교황 비질리오는 황제의 칙령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했다.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la)에 따르면, 545년 11월 20일 비질리오가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서 성녀 체칠리아 축일 미사를 집전하던 중, 황실 관리 안티무스가 와서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비질리오가 테베레강에 정박된 배에 오르자, 일부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분노를 표하며 배를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당시 로마는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에게 포위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비질리오가 로마 시민들을 위해 보낸 곡물선은 안타깝게도 적에게 나포되었다.[24][11] 비질리오는 545년 11월 22일경 로마를 떠나 시칠리아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546년 말 또는 547년 1월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14]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비질리오는 황제에게 고트족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로마와 이탈리아 주민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려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주된 관심사는 삼장서 문제였다. 비질리오는 이 문제에 대해 쉽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당시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교회 인사들 대부분이 그렇듯 비질리오 역시 그리스어에 능통하지 않아 직접 문제의 저술들을 판단하기 어려웠던 점도 논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10] 이로 인해 두 사람의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비질리오는 감금 상태에 놓이기도 했으며, 이때 자신을 감금한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하시오. 이는 내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처벌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당신은 나를 감금할 수 있지만, 복된 사도 베드로는 결코 당신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2]
결국 비질리오는 548년 4월 11일, 삼장서를 단죄하되 칼케돈 공의회의 권위는 계속 옹호한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안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의 반발은 계속되었고, 특히 548년 6월 28일 테오도라 황후가 사망한 후 말마티아, 아를, 스키티아의 토미 등 여러 지역 교회와 아프리카 교회 전체가 비질리오에게 등을 돌렸다. 비질리오의 입장 변화는 삼장서 자체의 단죄는 신학적으로 정당할 수 있으나, 당시 상황에서 이를 강행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며 서방 교회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
오랜 고심 끝에 비질리오는 553년 12월 8일(또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티키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한다는 의사를 밝혔다.[13] 그리고 554년 2월 26일에는 《헌장》(Constitutumla)을 통해 삼장서를 단죄하는 공의회의 결정을 공식적으로 재가하고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8년간의 어려운 시기를 보낸 비질리오는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합의에 이르렀고, 555년 봄 로마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6. 죽음
비질리오는 로마로 돌아가던 중 시라쿠사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살라리아 가도의 프리스킬라 카타콤바 위에 세워진 산 마르티노 아이 몬티 성당에 안장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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