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실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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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실복신은 백제 무왕의 조카로, 백제 멸망 후 승려 도침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왜국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임존성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복신은 금강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왜국의 지원을 받아 신라와 당나라에 맞서 싸웠으나, 내부 권력 다툼 끝에 부여풍에게 살해당했다. 현재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곳은 전라북도 부안군 우금산성이다.
귀실(鬼室氏)는 백제 성왕의 아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왕족의 방계 혈족이었다. 따라서 복신은 의자왕의 먼 친척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귀실정인(鬼室貞仁)이었으며, "귀실(鬼室)"이라는 성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 복신은 왕족의 친척으로서 최고위 관직인 대신(佐平)을 역임했다.
무왕의 조카이며 법왕의 서손자(庶孫子)라고는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의 가계에 대해 《구당서》 및 《자치통감》등의 중국 사서를 인용한 신라의 《삼국사기》는 그를 무왕의 조카라고 기록했다. 기록에는 '질(姪)'과 '종자(從子)'로 적었다. 이 경우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에게는 그가 종제(從弟)이며 부여풍에게는 숙부가 된다. 《일본서기》에는 그를 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고 부르는데, 《신찬성씨록》에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귀신의 감화'를 받아 성을 귀실(鬼室)로 바꿨다[10]고 설명하고 있어서, 원래 왕족이었던 복신의 가계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부여씨에서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국 시대 부여군 은산면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죽어갔다. 마을 주민이 점쟁이를 데려와 점을 쳐보니, 백제 멸망 때 죽은 병사들의 원혼이 떠돌아다니며 병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유골을 수습하고 전라도 굿을 지내주자 질병이 없어졌다고 한다.
복신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고 나·당 연합군과의 전쟁에 앞장섰지만, 《삼국사기》에는 그의 열전이 실려 있지 않다. 이는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 오히려 풍왕에게 살해당했다는 《구당서》의 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충신과 역적에 대한 평가를 분명히 밝히는 유교적 대의를 따랐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복신은 왕을 업신여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결국 왕위를 넘보고 목숨을 잃은 역적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드물게 남효온[15]이나 정약용[16] 등 일부 문인들이 한시에서 복신을 추모하기도 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의 《일본서기》는 복신을 많은 장수들 중에서 홀로 신묘한 계책을 낸 인물로 존경하고 있다.
2. 생애
627년 8월, 무왕의 '조카'로 불리는 복신(福信) 또는 신복(信福)이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달솔(達率, 2등 관등)이었다. 당 태종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지만, 628년 2월 백제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신라를 공격하여 협정을 파기했다.[1]
660년,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공격받았다. 수도 사비는 함락되었지만, 복신은 오늘날의 예산군 인근에서 저항했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한 후, 복신과 승려 도침은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백제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여풍 왕자를 불렀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백제군 잔당을 모아 신라-당나라 군대에 일련의 공격을 가했다.[2]
663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반란군을 역공하여 주류성을 포위했다. 이때 복신은 배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을 죽이려 했으나, 부여풍이 먼저 그를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강 전투에서 부흥 운동은 멸망했다.[3]
'''일본서기에서 발췌:'''
복신이 죽은 주류성의 위치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의 우금산성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4]
복신과 도침의 영혼을 달래는 제례는 고대 백제 수도 근처인 부여군 은산리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2. 1. 출생 및 성장
백제 무왕의 조카이자 법왕의 서손자(庶孫子)라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구당서》 및 《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를 인용한 신라의 《삼국사기》는 그를 무왕의 조카라고 기록했다. 기록에는 '질(姪)'과 '종자(從子)'로 적었다. 이 경우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에게는 그가 종제(從弟)이며 부여풍에게는 숙부가 된다. 《일본서기》에는 그를 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고 부르는데, 《신찬성씨록》에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귀신의 감화'를 받아 성을 귀실(鬼室)로 바꿨다[10]고 설명하고 있어서, 원래 왕족이었던 복신의 가계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부여씨에서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귀실(鬼室氏)은 백제 제26대 국왕 성왕의 아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왕족의 방계 혈족이었다. 따라서 복신은 백제의 마지막 국왕으로 인정받는 의자왕의 먼 친척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귀실정인(鬼室貞仁)이었으며, "귀실(鬼室)"이라는 성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은 "Kwisil Poksin"으로도 로마자 표기되며, 일본에서는 "Kishitsu Fukushin"으로 읽힌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으로, 627년 가을 8월에 무왕의 사절로 당에 파견[11]되었을 때 관위는 2위 달솔이었다. 당 태종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지만, 628년 2월 백제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그들은 신라를 공격하여 협정을 파기했다.[1]
2. 2. 백제 부흥운동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귀실복신은 승려 도침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2] 이들은 일본에 인질로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신라와 당나라에 맞섰다.
662년 5월, 부여풍이 귀국하자 복신은 그를 맞이하고 국정을 모두 위임했다.[6][7] 왜국은 복신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했고, 복신은 포로로 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 등을 왜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662년 7월, 부여풍은 복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의심하여 먼저 그를 제거했다.[6][7]
2. 2. 1. 초기 활동
660년,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수도 사비는 함락되었지만, 복신은 오늘날의 예산군 인근에서 저항했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한 후, 복신과 승려 도침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2] 이들은 백제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여풍 왕자를 불러들였다. 복신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백제군 잔당을 모아 신라-당나라 군대에 일련의 공격을 가했다.[2]
2. 2. 2. 부흥운동의 전개
660년 7월, 신라의 김유신과 김양도는 웅진성으로 도주했던 의자왕과 태자를 사로잡았다. 복신은 승려 도침과 함께 임존성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을 시작했고, 곧 남잠성과 정현성 등의 지방군도 가담했다. 신라는 8월 26일에 임존성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9월 1일, 복신은 휘하의 달솔과 사미승 각종(覺宗)을 왜국에 파견해 처음으로 백제 패망을 전했다. 9월 3일, 비성에는 유수(留守)가 된 유인원(劉仁願)의 주둔군 1만 명만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 9월 23일, 부흥군은 사비성에 잠입했으나 격퇴당하였다. 결국 부흥군은 사비성의 외성을 무너뜨리고 군량을 조금씩 빼앗은 뒤, 사비성 남쪽 산마루의 요충지에 네 개의 요새를 쌓고, 물자 수송로를 봉쇄해 사비성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펼쳤다. 이에 신라는 당군을 지원하고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10월 9일 태종무열왕이 직접 태자 김법민(훗날의 문무왕)과 함께 이례성(尒禮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30일에는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있던 부흥군의 요새를 공격해서 점령하고 1,500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2]
복신은 당군 포로 100명을 왜국에 보내면서, 처음으로 군사 지원과 왜국에 체류중이던 인질 부여풍의 송환을 요구했다. 왜국의 지원을 받아 백제군 잔당을 모아 신라-당나라 군대에 일련의 공격을 가했다.[2]
663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반란군을 역공하여 주류성(周留城)으로 알려진 요새를 포위했다. 이때 복신은 부흥 운동을 배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부여풍이 먼저 그를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강 전투에서 부흥 운동은 멸망했다.[3]
'''일본서기에서 발췌:'''
복신이 죽은 주류성의 위치는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의 우금산성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4]
662년 5월, 부여풍이 귀국했을 때 복신은 왕을 맞이하러 나가 국정을 모두 위임했다. 왜국은 그 후에도 복신에게 군수 물자를 보냈고, 복신 또한 포로로 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 등을 왜국으로 보냈다. 662년 7월, 부여풍은 복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도리어 그를 죽였다.[6][7]
2. 2. 3. 고사비성 전투와 왜의 지원
660년 9월 3일, 사비성에는 유수(留守)가 된 유인원(劉仁願)의 주둔군 1만 명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 9월 23일, 부흥군은 사비성에 잠입했으나 격퇴당했다. 결국 부흥군은 사비성의 외성을 무너뜨리고 군량을 조금씩 빼앗은 뒤, 사비성 남쪽 산마루의 요충지에 네 개의 요새를 쌓고, 물자 수송로를 봉쇄해 사비성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펼쳤다.[2] 신라는 당군을 지원하고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10월 9일 태종무열왕이 직접 태자 김법민(훗날의 문무왕)과 함께 이례성(尒禮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30일에는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있던 부흥군의 요새를 공격해서 점령하고 1,500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2]
661년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금강 동쪽에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복신과 도침은 상잠장군(霜岑將軍)·영군장군(領軍將軍)을 자칭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당군은 1천 명을 뽑아 복신을 공격했지만, 부흥군에 격퇴당했다.[2]
복신은 신라가 파병한 지원군이 주류성으로 진격하던 661년 3월 5일,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 신라군이 군영을 짓느라 대열이 정비되지 않은 틈에 기습했다. 12일에 고사비성(古沙比城) 바깥에 주둔하면서 신라군은 두량윤성을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어 4월 19일 군사를 돌이켰다. 복신은 남은 신라 병사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알고 퇴각하는 신라군의 후방을 빈골양(賓骨壤)에서 습격했고, 신라군의 우수한 무기와 식량, 말과 수레 등 각종 보급품을 획득했다. 이에 남쪽의 성들이 일시에 복신에게 가담했으며, 여세를 몰아 복신은 다시 사비성에 주둔한 당군에 대한 포위전을 펼쳤다. 복신에게 포위되어 보급로가 차단당한 당군은 신라 보급군이 보내주는 식량으로 이겨내었다.[2]
6월에 이르러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붕어하였다. 이때 사비성은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에 포위되어 있었다. 왜국은 복신이 부여풍의 송환을 요구한 때부터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선을 만들던 사이메이 천황이 죽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뒤를 이어 소복 차림으로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군사 파병에 주력하여, 이에 사이노무라치 아치마사(狹井連檳榔)와 하타노 미야쓰코 에치노 다쿠쓰(秦造朴市田來津)를 시켜, 5천 왜군으로 부여풍을 백제로 보냈다.[2]
2. 2. 4. 전황의 악화와 피성 천도
662년 12월 1일, 백제 부흥군은 수도를 주류성에서 피성(避城, 지금의 김제시)으로 옮겼다. 왜군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적과 너무 가깝고 지대도 낮다며 반대했지만, 지도부는 피성으로 천도했다. 663년 2월, 김흠순과 김천존이 이끄는 신라 중앙군이 거열성(居列城)·거물성(居勿城)·사평성(沙平城)을 차례로 공격하여 모두 함락하고 덕안성(德安城)을 쳐서 1,070명의 부흥군을 제거했으며, 신라군은 부흥군 지휘부가 있는 피성으로 진격하였다. 결국 피성으로 옮긴 지 두 달 만에 부흥군 지휘부는 에치노 다쿠쓰의 말대로 다시 주류성으로 피난하였다.[12]
2. 2. 5. 내분과 죽음
부흥군 내부에서는 초기부터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자마자 복신은 도침을 기습하여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권력을 탐한 풍왕은 제사만 주관하게 되자 복신을 살해하였다.[13]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의 전통에 따라 복신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젓갈이 되어 부흥군에게 나누어졌다고 한다.[14]
663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반란군을 공격하여 주류성(오늘날의 전라북도 부안군 우금산성으로 추정[4])을 포위했다.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풍왕마저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풍왕에게 먼저 살해당하고 고구려로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강 전투에서 부흥 운동은 막을 내렸다.
《일본서기》에서는 663년 6월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3]
선봉장인 가미츠케노노 기미 와카코는 사비의 누에에서 신라의 쌍둥이 성을 함락했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의 배신을 의심하여 그의 손바닥에 구멍을 내고 가죽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복신의 죄는 이것인데, 그를 참수할까 말까?" 그러자 달솔 덕집득이 말하길, "이 사악한 배신자는 풀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말하길, "썩은 개 같으니." 왕은 건장한 자에게 복신을 참수하고 그의 목을 절여두도록 명령했다.일본어
《삼국사기》와 《구당서》에 따르면, 풍장은 662년 5월에 귀국했고, 복신은 왕을 맞이하여 국정을 모두 맡겼다.[6][7] 왜국은 복신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했고, 복신 또한 포로로 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 등을 왜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662년 7월, 부여풍(부여풍장)은 복신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먼저 그를 죽였다.
665년, 복신의 친척으로 보이는 귀실집사는 복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천지 천황에게서 소금하의 위계를 받고, 백제 백성 남녀 400여 명과 함께 오미국 신사키군에 정착했다. 그러나 669년에는 남녀 700여 명과 함께 오미국 가모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8]
3. 가계
그는 두 아들, '''귀실집신'''(鬼室集信)과 '''귀실집사'''(鬼室集斯)를 두었는데, 둘 다 일본에 정착했다. 집사는 《일본서기》에 덴지 천황 8년(676년)에 일본에 와서 규슈 히고국의 기쿠치 씨를 포함한 여러 일본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관계 이름 부인 미상 아들 귀실집사 아들 귀실집신
4. 사후
이후 은산 지역 주민들은 매년 음력 2월 별신제를 지냈으며, 이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쳐 이어졌다. 1966년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은산별신제에서 복신은 귀신으로 존숭된다.[9]
복신과 도침의 영혼을 달래는 제례는 고대 백제 수도 근처인 부여군 은산리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귀실집사의 묘소는 시가현 가모군 히노정에 있는 귀실 신사에 있다.
5. 평가
6. 대중문화 속의 귀실복신
참조
[1]
뉴스
한국에선 잊혀진 백제 왕족… 日서 1500년간 조상신 추모
동아닷컴
2015-10-11
[2]
서적
Samguk Sagi, Scroll 28
[3]
서적
Nihon Shoki, Scroll 27
[4]
웹사이트
KNTO Destination Guide - Ugeumsanseong Fortress
http://www.visitkore[...]
2004-12-01
[5]
서적
Paekche of Korea and the Origin of Yamato Japan
Kudara International
1994
[6]
위키문헌
三國史記/卷28
[7]
위키문헌
舊唐書/卷199上#.E7.99.BE.E6.BF.9F
[8]
서적
巻第二十七 天智天皇 西海防備 および 藤原鎌足の死
講談社学術文庫
1988
[9]
웹사이트
日野町 姉妹都市 恩山面(大韓民国)
http://www.town.shig[...]
滋賀県蒲生郡日野町役場の公式Webページ
2014-11-29
[10]
문서
《신찬성씨록》좌파경제번(左派京諸蕃)·하(下), 구다라노기미(百濟公)조 "百濟公, 因鬼神感化之義, 命氏爲鬼室."
[11]
서적
삼국사기
1145
[12]
서적
《일본서기》·《[[삼국사기]]》 「[[신라본기]]」
[13]
서적
《일본서기》에 따르면 서기 663년 6월이었다.
[14]
서적
《구당서》는 복신이 먼저 풍왕을 죽이기 위해 병을 핑계로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풍왕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하고, 《일본서기》에도 풍왕이 먼저 복신을 의심해서 살해했다고 한다.
[15]
시
《추강집》권제3, "鶴唳風聲奔北日/任存城主抗唐兵/曹蜍李志生猶死/福信雖亡擅美名"('부여회고' 제9)
[16]
시
《다산시문집》권제2, "北部幾州懷福信/亂山無處覓扶豐."('부여회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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