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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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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집단학살은 1914년부터 1923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발생한 폰토스 그리스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과 추방을 의미한다. 폰토스 지역은 흑해 남부 해안에 위치한 곳으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종교적 차별과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인해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1913년에서 1923년 사이에 강제 추방, 노동, 학살 등의 피해를 입었다. 1914년과 1923년 사이에 약 35만 3천 명의 폰토스 그리스인이 사망하고, 150만 명이 강제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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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집단학살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폰투스 그리스인 집단학살
다른 명칭Γενοκτονία των Ελλήνων του Πόντου (그리스어)
일부그리스인 집단학살
위치폰투스 지역 – 아나톨리아 북동부
기간1914년–1923년
유형집단학살
대량 살해
죽음의 행진
인종 청소
대량 추방
노동 대대
목표폰투스 그리스인
가해자청년 튀르크당
터키 국민 운동
동기반그리스 감정
튀르크화
반동방 정교회 감정
사망자350,000–360,000명
추가 정보
관련 지역포카이아, 트라키아
사건
주요 사건스미르나 대화재 (1922)
관련 사건강제 이주
죽음의 행진
기타
피해자
인종그리스인
지역특히 폰투스, 카파도키아, 이오니아, 동트라키아
사망자 수250,000–550,000명 이상
배경
발발 시점1913–1922년
가해자오스만 제국
터키 국민 운동
기타 정보
관련 문서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
참고자료
연구대량학살 연구 국제 협회 (IAGS)
관련 결의스웨덴 의회 결의안
네덜란드 의회 결의안
오스트리아 의회 결의안
아르메니아 결의안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소아시아는 튀르크인, 아제르바이잔인, 폰토스인(코카서스 그리스인 포함), 카파도키아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자자인,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시리아인, 유대인, 라즈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과 튀르크인 간의 갈등은, 튀르크인들이 기독교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적이 될 것을 우려하고, 일부 튀르크인들은 현대적인 민족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이러한 민족 집단이 튀르키예 국가의 통합을 위협할 수 있다고 믿어 해당 집단을 국가 영역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2. 1. 폰토스 지역의 역사와 그리스인 정착

기원전 700년부터 폰토스 지역의 흑해 남부 해안 근처에는 폰토스 그리스인들이 살았다. 이들은 많은 중요한 그리스 철학자들과 저술가들을 배출한 강력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11세기가 되자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 중앙과 폰토스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7] 395년부터 1453년까지 존속한 비잔티움 제국 아래에서 두 집단은 평화롭게 공존했다.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어 사용자는 적어도 기원전 800년경 호메로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80]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최초의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로 스미르나를 언급하며, 밀레토스탈레스(기원전 7세기), 에페소스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6세기), 키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인 시노페디오게네스(기원전 4세기)를 포함한 많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나톨리아 원주민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인들은 흑해를 "Πόντος Εὔξεινος (Euxinos Pontos)"(환대의 바다)라고 표현했으며, 기원전 8세기에는 흑해 연안을 배로 항해하여 아나톨리아 연안에 정착했다. 흑해 연안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 도시는 트라브존, 삼순폰투스, 시노페, 헤라클레이아 폰티카이다.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34년-기원전 1세기) 동안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에 따라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소아시아 내부에서도 지배적이 되었다. 로마 시대와 비잔티움 지배하에서 이 지역의 헬레니즘화가 가속화되어, 기원후 1세기 초까지는 현지 인도유럽어아나톨리아어파가 소멸하고,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그리스어의 표준어인 코이네로 대체되었다.[81][82][83]

소아시아에 남은 그리스 문화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 아래에서 계속되는 천 년 동안 번영했다. 소아시아 주민들은 제국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정교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4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많은 저명한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 원주민이었으며, 성 니콜라스(270-343년)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349-407년), 성 소피아 대성당의 설계자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6세기)를 비롯하여 제국의 여러 왕조에는 포카스 가문 (10세기)와 콤네누스 가문(11세기) 등이 있었고, 후기 르네상스 학자로는 트라페존드의 게오르기 (1395–1472년)과 요하네스 베사리온(1403-1472년)이 있다.

튀르크인이 후기 중세에 소아시아 정복을 시작했을 때, 비잔티움 그리스인 시민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 중 가장 큰 집단이었다. 튀르크인의 소아시아 내부 정복 후에도 소아시아 흑해 연안의 산악 지대는 그리스인 국가(예: 트라페존트 제국)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트라페존트 제국은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 10년 전까지 유럽 측 그리스 영토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2. 2. 오스만 제국과 청년 튀르크당

오스만 제국(1299-1922) 성립 후,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기독교 소수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 집단에 비해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8] 많은 그리스인들은 더 나은 교육과 높은 경제적 지위를 누렸는데, 이는 오스만 관리들의 불만을 샀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종교가 충성심의 표시로 여겨졌지만, 대부분의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8]

청년 튀르크 운동의 정치적 목표 중 하나는 오스만 제국을 "튀르키예화"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언어, 역사, 문화를 통해 튀르크인들을 통합하는 것이었고, 이는 오스만 제국 내 비튀르크계 소수 민족의 희생을 수반했다. 청년 터키 혁명은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는 폰토스 그리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 관리들은 폰토스 그리스인과 같은 기독교 소수 민족이 제국에 불안정을 초래할까 봐 우려했다.[9] 그 결과, 폰토스 그리스인을 포함한 비튀르크계 소수 민족을 국가에서 제거하려는 폭력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1914년과 1923년 사이에 약 35만 3천 명의 폰토스 그리스인이 사망했고 150만 명이 추방되었다.[10] 학살에는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고, 청년 터키와 케말리스트 두 가지 주요 단계가 있었다.[8]

독일 제국 군대의 수행원에 따르면, 오스만 정부의 장관 엔베르 파샤는 1915년 10월에 "그가 아르메니아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쟁 중에 그리스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3. 전개

무드로스 휴전 협정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살아남은 그리스인들은 아나톨리아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집이 파괴되어 안전하지 않았다. 이 협정은 그리스가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들을 보호해야 할 경우 터키를 침공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는 1919년 5월 15일 스미르나(이즈미르)에 상륙하여 제2차 그리스-터키 전쟁을 시작했다.[19]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삼순에 도착하여 질서 확립 명령을 받았지만, 더 많은 터키 민족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 폰토스 그리스인들에 대한 전술을 강화했다.[19] 5월 19일은 폰토스 단체들에 의해 폰토스 문제의 최종 해결 날짜로 확립되었고 폰토스 대량 학살 희생자 추모일로 간주된다. 반면, 터키에서는 이 날이 독립 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되며, 터키 국가는 5월 19일을 아타튀르크 기념일, 청소년 및 스포츠의 날 (터키어: ''Atatürk'ü Anma, Gençlik ve Spor Bayramı'')로 지정했다.[25][26]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 있는 폰토스 대량 학살을 기리는 임시 파빌리온


"터키 해방 전쟁"(터키어: ''Turk Kurtuluş Savaşı'')이라는 용어는 그리스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일부 현대 터키 및 서구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구르 위밋 웅고르는 그리스-터키 전쟁과 아르메니아-터키 전쟁(1919-1923)이 본질적으로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기독교인들의 민족적 분리와 배제를 나타내는 국가 형성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앙카라 정부는 특정 아나톨리아 지역의 영구적인 점령과 헬레니즘화를 우려했는데, 이는 다른 오스만 그리스인들의 분리주의를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5월 15일 스미르나에 그리스군이 상륙한 후 흑해 연안에 폰투스 국가가 수립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1919년 5월 말, 샘순에 도착한 케말은 콘스탄티노플에 "40개의 게릴라 부대"가 터키인들을 죽여 "폰투스 국가"를 세우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폰투스와 아나톨리아 다른 지역의 오스만 그리스인 대다수는 민족주의적 호소에 흔들리지 않았다.

1919년 동안 국가주의자들은 최소 24개의 마을에서 약 12,000명의 폰투스 그리스인을 학살했다.[29]

1920년 초 케말리스트 반 그리스 선전이 시작되었다. 국가주의 군 장교들은 샘순 근처 마을들을 순회하며 기독교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몰살을 주장했다. 케말리스트들은 혼합 도시 오르두의 그리스 주교 폴리카포스를 체포하여 앙카라로 추방했다.

1920년 여름, 산적 두목 오스만 아가는 해안 마을들을 약탈했다. 기레순에서는 8월 13일 밤 오스만이 모든 기독교인 남성들을 투옥했다. 그 후 매일 저녁 5~6명의 기독교인들이 끌려나와 총살당했다. 아미소스, 파프라, 아르바 지역의 그리스 마을들은 "완전히 사라졌다".[30]

대규모 작전은 1920년 3월 이즈미트에서, 9월에는 카파도키아에서 시작되었다.[31][32] 젊은 튀르크들이 그리스인들에게 체계적으로 자행하기를 두려워했던 일들을 터키 민족 운동은 기회만 생기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33]

폰투스에서의 대규모 작전은 1921년 3월에 시작되었다. 이는 주로 누레딘 파샤 장군이 이끄는 중앙군과 토팔 오스만이 이끄는 비정규군(체테)에 의해 주도되었다.

1921년 초, 신체 건강한 그리스인들은 노동 대대에 배속되었는데, 한 선교사는 이들이 "실제로 굶어 죽거나 동사할 운명"이었다고 썼다. 절멸 작전은 봄에 시작되어 그리스 시골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다. 흑해의 두즈제(쿠르츠유) 카자 마을에서는 많은 노인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알라잠, 바프라, 차르샴바 주변 마을들과 하브자, 비시르코프루와 같은 내륙 지역도 공격을 받았다.

여름이 되자 작전은 도시로 확대되었다. 바프라에서는 그리스 엘리트들이 만찬에 초대된 후 학살당했다. 터키인들은 젊은 그리스 남성들을 잡아 학살했다. 6월 5일, 바프라에 터키군과 준군사 조직이 포위하여 남성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8월 초, 바프라의 무타사리프는 한 미국 해군 장교에게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남은 그리스인들을 모두 추방하라는 명령을 앙카라에서 받았다"고 알렸다.

인근 차르샴바에서는 기독교 여성들이 잡혀 대부분 사형 행진에 보내졌고, 가장 매력적인 18명은 납치되어 오스만 아가 지휘하의 군대의 즐거움을 위해" 억류되었다.

바프라 주변의 다른 지역에서는 추방이 학살과 일관되게 동반되었다. 수르멜리에서는 300명이 집에 모여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8월까지 오르두 지역의 모든 남성들이 추방되었다.

폰투스의 중심지인 삼순도 주요 표적 중 하나였다(삼순 추방 참조). 1921년 초봄에는 선교사들이 목격한 야간 살인 사건이 있었다. 늦은 봄 동안 토팔 오스만과 그의 산적들은 도시 주변의 그리스인 정착지를 약탈하고 불태우며 민간 그리스인들을 살해했다. 주요 학살과 추방은 여름에 발생했다. 6월 16일, 앙카라의 민족주의 정부는 16세에서 50세 사이의 모든 그리스 남성을 추방하도록 승인했고,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36] 이 추방은 누레딘 파샤에 의해 수행되었다.[36] 삼순의 미국 근동 구제 근무자들은 추방된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보내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삼순의 NER 고아원은 그 지역의 그리스 어린이들로 가득 찼다.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아마시아시바스를 거쳐 하르푸트로, 거기서 디야르바키르, 비틀리스, 반으로 행진했다. 6월에 내려진 추방 명령으로 인해 삼순에서 거의 2만 1,000명이 강제 추방되었다.[36]

삼순 주변 마을들도 그리스인들이 몰살되었다. 한 지역 그리스인 생존자는 1921년에 기레순 시장이었던 토팔 오스만과 그의 부하들이 마을을 공격했을 때, 아이들을 우물에 던져 넣고 돌을 던졌으며, 노인들을 교회, 학교, 창고에 가득 채우고 불을 질렀다고 회상했다.[38] 12월에 한 선교사는 "헛간에 갇혀 산 채로 불에 타 죽은 남성, 여성, 어린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해 여름 폰투스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학살은 흑해 연안 남쪽의 메르지폰에서 발생했다. 토팔 오스만과 그의 '흉악범'들은 도시에 들어와 4일 동안 1,000~1,500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39][40]

1922년 삼순 지역을 방문했던 소련 외교관 세멘 아랄로프는 터키의 이 지역이 엄청난 황폐를 겪었고, 오스만 아가가 불과 칼로 전체 지역을 통과했다고 썼다.[41]

1921년 기레순 지역에서 학살된 그리스인들


이러한 행동에 대한 지역 무슬림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케말 정권의 권위주의적 본질 때문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두 명의 목격자는 1921년 8월 트라브존 당국이 모든 성인 그리스 남성에게 요새에서 유료 노동을 할 것을 명령했다고 전했다. 500명 이상이 응했고, 즉시 투옥되었고 그들의 집은 약탈당했다. 그 남성들은 그 후 50명씩 그룹으로 내륙으로 추방되어 7일 동안 "빵 한 조각조차 없이" 행군을 강요당했다. 어느 날 밤 그들은 10명씩 그룹으로 데려가 총에 맞았다.

동시에 케말주의자들은 그리스 지식인, 사업가, 사제들을 제거하고 있었다(아마시아 재판 참조).

1922년 초봄, 국민당(Nationalists)은 그리스 문제를 가능한 한 신속하게 해결하려는 목표로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1922년 4월, USS ''폭스'' 함장 윌리엄 리히는 4월 10일이나 11일에 삼순에서 추가로 1,300명의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고 보고했다.[42]

토팔 오스만과 그의 체테는 오르두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남자는 거의 남지 않았지만 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 몇몇 여성과 소녀들을 골랐다. 그런 다음 군인들은 다른 모든 그리스인들을 두 건물로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선택된 여성들은 밤 동안 강간당하고 다음 날 학살당했다. 오스만의 부대는 인근 9개 마을에서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

5월까지 럼볼드는 아시아 소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새로운 잔혹 행위가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트라브존과 그 배후지는 새로운 추방의 중심지였다.

영국군 중령 A. 롤린슨은 "그리스인들이 집중적으로 경작해 왔던 해안 산맥과 그 비옥한 계곡은 이때 모든 곳에서 버려져 마을들이 버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22년 5월, 허버트 애덤스 기본스는 트레비존드가 그리스 남성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2년 전 트레비존드에 2만 5천 명의 그리스인이 있었다고 추산했다. "오늘날 80세에서 14세 사이의 남성 인구는 6명의 사제와 10명의 민간인입니다."[43] 1922년 6월까지 미국 선교사들은 폰투스에서 모든 마을이 비어 있다고 보고했다.[45]

1923년 1월 30일 로잔 조약에서 그리스와 터키 간 인구 교환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서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그리스의 무슬림과 소아시아의 정교회 그리스인들이 교환되었다.[50] 소아시아 그리스인들에 관해서는, 조약 체결 당시 그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도망쳤기 때문에(120만 명의 "교환 대상" 중 조약에 따라 실제로 이주한 사람은 19만 명에 불과했다) 교환은 상당히 형식적인 것이었다.[51][52]

민족주의자들에게 이 조약의 이점은 남아 있는 그리스인들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고 이미 도망친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53] 폰투스에서는 로잔 조약이 그리스인 학살의 결과를 법적으로 확정지었을 뿐이다. 그리스 마을들은 파괴되었고 교회들은 훼손되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사망하거나 조지아 또는 러시아로 도망쳤다. 소규모 그리스 게릴라 부대만이 가족과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폰투스 숲에서 방황했다.

협정을 알게 된 많은 폰투스인들은 계속해서 터키인들을 불신했다. 때로는 국제 사절단이 도착하더라도 그들이 숲을 떠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온갖 종류의 선박으로 소련으로 이동하려고 시도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판텔리스 아나스타시아디스 대령이 25명의 병사와 300명의 민간인과 함께 1923년 12월 말에 두 대의 모터 스쿠너를 이용하여 포티에 도착한 경우가 있다. 150명의 폰투스인(여성 25명 포함)을 태운 또 다른 스쿠너는 얄타에 도착했다.

3. 1. 1단계 (1914-1918)

1913년에서 1914년 사이 그리스인에 대한 최초의 탄압은 주로 소아시아 서부를 목표로 했기에 폰투스 지역에는 거의 미치지 못했다. 1915년부터 러시아군이 아직 점령하지 않은 서부 폰투스와 동부 폰투스 일부 지역에서 대규모 강제 추방이 시작되었다.[11]

오스만 정부는 폰투스 그리스계 주민들을 잔혹하게 박해했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같은 대규모 절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청년튀르크당이 (1916년까지 중립을 유지했던) 아테네가 앙탕트 편에 가담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리스 또한 무슬림 소수 민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아르메니아인들을 "반란군"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리스인들은 봉기하지 않았다.[12]

청년튀르크는 "백색 학살" 즉, 강제 추방과 강제 노역이라는 전술을 따랐다.[13][14] 폰투스 그리스인 남성들(18~48세)은 강제로 노역 대대에 징집되었고, 때로는 90%가 넘는 수가 사망했다. 터키 동부 주에서 터키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한 영국 정보 장교는 "노역 대대에서 그리스인의 생존 기간은 일반적으로 두 달 정도"라고 추정했다. 이런 방식으로 청년튀르크 정권은 군사 물자를 이동시킬 수 있었고, 폰투스 남성들을 과로사시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전투 연령의 남성들을 절멸하여 저항할 능력이 있는 상당수의 인구를 제거했다.[12]

시골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도시 지역에서 터키인들은 폰투스 그리스인들의 농가를 습격하고 강제 추방 절차를 시작했다. 희생자들은 대열을 지어 행진했고, 그곳에서 일반적으로 80~90%의 사망률을 경험했다. 호위병들이 원할 때마다 희생자들을 학대하고, 때로는 직접 살해를 통해 학살을 저질렀다.[12] 강제 추방에는 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포함되었는데, 1915년 초에는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노역 대대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12]

1916년 1월, 러시아는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그 결과, 그들은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4월까지 리제와 트라브존을 포함한 동부 폰투스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후퇴하는 동안 카밀 파샤는 그리스 마을 주민들의 강제 추방을 명령했다. 이것은 영하에 가까운 온도에서 겨울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동사했다. 봄과 여름 동안 당국은 트라브존 주의 수십 개 마을에 영향을 미치는 강제 추방을 계속했다. 일부 그리스인들은 주변 숲과 산으로 피신했다. 많은 여성들이 체포되어 바젤론 수도원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터키인들은 "먼저 그들을 범하고, 그런 다음 죽였다".[12]

정부는 강제 추방이 "군사적 이유"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내정 간섭"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며 서구의 항의에 맞섰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많은 지역에서도 그리스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예를 들어, 뉘녜 지역 주민들은 1915년 12월 추방되었다. 이네볼루와 그 주변 마을 시데, 파테리, 아치도노, 카라자, 아스코르다시의 그리스 인구는 1916년 6월 추방되었다.[12]

독일 영사 M. 쿠크호프는 1916년 7월 16일 삼순에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시노프와 카스타노무 지역의 해안 지역 전체 그리스 인구가 추방되었다 (...) 터키어로 추방과 절멸이라는 용어는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대부분의 경우 죽지 않은 사람들은 질병이나 기아의 희생자가 되기 때문이다."[15][16][17] 1916년 8월 21일자 뉴욕 타임스의 특별 전보는 흑해 지역의 터키 당국이 "상당수의 마을에서 민간인들을 체포하여 내륙의 강제 수용소로 여러 무리로 보내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데, 그들은 다수가 절대적으로 식량 없이 도보로 가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참한 대열은 터키인들의 공격을 받아 소지품을 강탈당하고, 불행한 어머니들은 자녀들과 헤어진다. 강제 추방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15][17][18]

1916년 12월 동안 터키인들은 삼순, 바프라, 오르두, 티레볼루, 아마시아, 차르샴바에서 유력 인사들을 추방했고, "탈영"으로 200명의 그리스인들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바프라 내륙의 마을 주민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한 미국 해군 장교는 이 추방자들이 "청소"를 위해 온탕에 넣어진 다음 매우 적은 옷과 식량으로 행진했기 때문에 동상, 굶주림, 탈진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삼순에서는 유력 인사 추방 후 1917년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대규모 추방이 실시되었다. 추방자들의 집은 그 후 약탈당하고 불타거나 무하지르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행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터키 마을에 흩어졌다. 미국의 영사가 전후 조사한 결과, 약 5,000명의 그리스인들이 학살, 추방, 산으로의 도피로 도시에서 제거된 것으로 추산된다. 팻사, 니카사르, 차르샴바 지역에서도 강제 추방이 있었다.[12]

불가리아세르비아와 함께 체결된 유사한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1913년 11월 14일 그리스와 소규모 주민 자발적 교환 합의서에 서명했다. 다른 몇몇 그리스 마케도니아 거주 무슬림아이든주 및 Western Thrace|서트라키아영어의 일부 그리스인을 위한 유사한 합의서가 1914년 7월 1일에 서명되었다. 합의서는 그리스가 일부 섬을 병합하는 데 동의하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이 해당 그리스인들을 강제로 집에서 내쫓은 후 체결되었다. 주민 교환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지 않았다.[65] 이 오스만 제국의 방법(이미 시행된 영구적인 주민 제거를 위한 주민 교환 방식)은 전후 그리스와 터키의 주민 교환으로 반복되었다. 이는 소아시아 그리스인들의 탈출을 공식적이고 영구적으로 그리스인 학살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66][86]

1913년 초봄, 오스만 제국은 에게해 지역과 동트라키아 지역에 집중된 그리스인 추방 프로그램과 강제 이주를 시행했다. 이 지역의 그리스인들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졌다. 주민 교환 시행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Special Organization (Ottoman Empire)|오스만 제국 특무 기구영어는 그리스 마을들을 공격하여 주민들이 고향에 남는 것을 포기하고 무슬림 난민들과 교체되도록 유도했다. 오스만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이 작전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해 그리스인 마을들을 비우는 병행 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사례는 1914년 6월 12일 서아나톨리아에 있는 스미르나 북서쪽 25마일(약 40km)의 포카이아(그리스어: Φώκαια)에서 발생했다. 그곳에서 터키계 비정규군이 50명의 주민을 살해했고, 나머지 주민들은 그리스로 도망쳤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Massacre of Phocaea|포카이아 학살영어). [87]

1914년 6월 터키계 비정규병에 의해 자행된 학살 당시의 포카이아 사진


국내외 압력에 따라 탈라트 파샤는 1914년 4월 트라키아를 방문한 후 에게해에서 보고서를 조사하고 그리스와의 긴장을 완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이러한 사건들을 알지 못했고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 여행에서 에게해 연안 지역의 "정화"를 담당했던 쿠슈추바시 에슈레프를 만나 이 사건이 공개되지 않도록 경고했다.[12]

1914년 여름, 오스만 제국 특무 기구는 정부와 군 고위 관계자들의 지원을 받아 트라키아와 서아나톨리아에서 수천 명 중 수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Labour Battalions (Ottoman Empire)|노동 대대영어에 징집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 내륙 수백 마일 지점으로 보내져 도로와 건물 건설, 터널 굴착 등의 현장 노동에 동원되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오스만 제국 경비대에 의해 불법적으로 살해되거나 질병과 빈곤으로 쇠약해져 갔다. 박해 정책과 민족 정화는 폰투스, 카파도키아, 킬리키아를 포함한 오스만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88]

서아나톨리아에서의 기독교인 강제 추방은 여러 면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공통점이 있다. Şükrü Kaya|슈크뤼 카야영어, Nazım Bey|나짐 베이영어 및 Mehmed Reshid|메흐메트 레시드영어는 특무 기구와 노동 대대 모두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작전과 비공식적 폭력의 병행 계획 모두에 참여했다. 국가 인구 정책의 은폐는 두 경우 모두에서 시행되었다.[12]

제1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 근동 지역의 헬레니즘. 그리스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서아나톨리아와 동트라키아 일부 지역을 보여준다. 폰투스인 지역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1914년 11월 이후 오스만 제국의 정책은 이주하는 그리스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 침식된 코카서스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코카서스 전역 (Caucasus Campaign) 실시에 있어서, 특히 국가 정책으로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특히 흑해 지역(폰투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데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 전환은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에 대한 박해를 중단시키려는 독일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그리스의 정치인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아테네에서 독일 대사에게 그리스의 중립 조건으로 요구한 결과였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에게 같은 작전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정책 변경을 시행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중앙 관청에서 전신으로 명령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과 살해 행위조차 저지르며 주(州) 지역 관리들에 의해 처벌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후 의도적인 폭력과 금품 갈취가 강화되었고, 협상국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베니젤로스파를 위해 탄약을 공급했다(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독일 제국에 우호적이었다).[12]

1915년 7월, 그리스의 대리 공사는 “강제 이주는 터키 내 그리스인 국민에 대한 절멸 전쟁과 다름없으며, 그들의 조치는 그리스인들을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시키려는 음모이다. 이 명백한 목적에 있어서, 만약 전쟁 종결 후 기독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유럽이 다시 문제가 된다면, 거기에는 가능한 한 소수만 남을 것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12]

정책 변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 거주지를 공동화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은 제한된 규모이지만 계속되었다. 정책은 모든 그리스인이 아닌, 군사적으로 약하다고 여겨지는 지역이 특히 표적으로 삼아졌다. 1919년 총대주교청 기록에 따르면 많은 마을의 공동화가 살인과 약탈에 의해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식량을 만들 시간을 얻지 못하거나, 거주 불가능한 곳으로 이주되어 사망했다.[12]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에 대한 국가 정책은 1916년 가을에 다시 바뀌었다. 연합국은 그해 봄까지 레스보스섬, 키오스섬과 사모스섬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러시아인들은 아나톨리아의 에르주룸 공세 (Erzurum Offensive)를 향했으며, 그리스는 연합국 편에서 전쟁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어, 국경 거주 그리스인 강제 추방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12]

1917년 1월, 탈라트 파샤는 삼순 지역에서 어떤 인물이나 그 재산에도 폭행을 가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30킬로미터에서 50킬로미터 내륙”으로 그리스인들을 강제 추방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1916년 12월 이후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온 정부 법령의 집행은 베헤딘 샤키르 (Behaeddin Shakir)가 이 지역에 왔을 때 명령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자들은 노동 대대에 끌려갔고, 여자와 아이들은 공격당했으며, 마을은 근처 무슬림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삼순의 승려 게르마노스 카라반겔리스 (Germanos Karavangelis)는 총대주교청에 3만 명이 앙카라 지역으로 강제 이송되었고, 이송자 대열이 공격당해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보고했다. 탈라트 파샤는 도적에 의한 그리스인 마을 파괴와 약탈에 관해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1917년 후반, 명령이 그 범위를 해안 도시 사람들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고, 집행을 통제하는 군인에게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보내졌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12]

추방된 그리스인들은 내륙 주의 그리스인 마을이나, 일부 이전 추방 전 아르메니아인이 살았던 마을로 보내졌다. 그리스인 마을들은 군사적으로 우려되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무인화되었고, 거기에 무슬림 이주민이나 난민들이 거주했다.[12]

1917년 1월 14일, 스웨덴 대사 코스바 안카르스베르드 (Cossva Anckarsvärd)가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 추방 결정에 관해 콘스탄티노플로 특전을 보냈다.

노동 수용소 (labour camp)와 같은 곳에서의 기아나 죽음의 행진을 포함한 강제 추방과 같은 잔혹 행위는 "백인 학살"로 여겨졌다. 오스만 제국 관리 라페트 베이 (Rafet Bey)는 그리스인의 제노사이드에 가담했고, 1916년 11월 삼순에서 오스트리아 영사 크비아트코프스키에게 라페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고되어 있다: “''우리는 아르메니아인에게 행한 것처럼 그리스인도 끝내야 한다… 오늘, 나는 모든 시야에 들어오는 그리스인을 살해하기 위해 내륙으로 분대를 파견했다…''”[89]

3. 2. 2단계 (1919-1923)

무드로스 휴전 협정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리스인들은 아나톨리아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이 파괴되어 안전하지 않았다. 이 휴전 협정은 그리스가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들을 보호해야 할 경우 터키를 침공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는 1919년 5월 15일 스미르나(이즈미르)에 상륙하여 제2차 그리스-터키 전쟁을 시작했다.[19] 이 전쟁 기간 동안 폰토스 그리스인 학살의 두 번째 단계가 발생하여 해당 지역의 그리스인들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45]

미국의 역사가 라이언 진저러스는 국민당이 집단 처벌과 인구 정책에 기울었다고 언급했다.[20] 스위스 역사가 한스-루카스 키저는 1919년 봄부터 케말 파샤가 전 컵(CUP) 세력과 함께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에 대한 국내 전쟁을 재개했다고 기술했다.[21] 영국의 역사가 마크 레빈은 CUP가 집단 학살을 통해 제국을 동질적인 국가로 변모시켰고, 케말리스트들이 이를 완료하여 독립과 주권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했다.[22] 그는 또한 튀르키예 민족 운동을 케말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집단 학살자들이 절대적인 통제권을 빼앗을 수 있었던 강경파였다고 묘사했다.[23]

네덜란드-튀르키예 역사가 우구르 위밋 웅괴르는 케말리스트 정권과 CUP 정권의 연속성을 언급하며, 케말리스트 인구 정책 이전에 임시적인 추방이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역사가 벤자민 리버먼은 국민당의 폰토스 그리스인에 대한 태도를 CUP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태도와 비교하며, 폰토스 그리스인들이 반역자로 낙인찍혔다고 설명했다. 케말리스트들은 튀르키예 민족 동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폰토스 그리스인과 다른 기독교 소수 민족에 대한 젊은 투르크 민족 청소 정책을 계속했다.[24][5]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삼순에 도착하여 질서를 확립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더 많은 터키 민족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 폰토스 그리스인들에 대한 전술을 강화했다.[19] 5월 19일은 폰토스 단체들에 의해 폰토스 문제의 최종 해결 날짜로 확립되었고 폰토스 대량 학살 희생자 추모일로 간주된다. 반면, 터키에서는 이 날이 독립 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되며, 터키 국가는 5월 19일을 아타튀르크 기념일, 청소년 및 스포츠의 날 (터키어: ''Atatürk'ü Anma, Gençlik ve Spor Bayramı'')로 지정했다.[25][26]

"터키 해방 전쟁"(터키어: ''Turk Kurtuluş Savaşı'')이라는 용어는 그리스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일부 현대 터키 및 서구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구르 위밋 웅고르는 그리스-터키 전쟁과 아르메니아-터키 전쟁(1919-1923)이 본질적으로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기독교인들의 민족적 분리와 배제를 나타내는 국가 형성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앙카라 정부는 특정 아나톨리아 지역의 영구적인 점령과 헬레니즘화를 우려했는데, 이는 다른 오스만 그리스인들의 분리주의를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5월 15일 스미르나에 그리스군이 상륙한 후 흑해 연안에 폰투스 국가가 수립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1919년 5월 말, 샘순에 도착한 케말은 콘스탄티노플에 "40개의 게릴라 부대"가 터키인들을 죽여 "폰투스 국가"를 세우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폰투스와 아나톨리아 다른 지역의 오스만 그리스인 대다수는 민족주의적 호소에 흔들리지 않았다.

1919년 동안 국가주의자들은 최소 24개의 마을에서 약 12,000명의 폰투스 그리스인을 학살했다.[29]

1920년 초 케말리스트 반 그리스 선전이 시작되었다. 국가주의 군 장교들은 샘순 근처 마을들을 순회하며 기독교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몰살을 주장했다. 케말리스트들은 혼합 도시 오르두의 그리스 주교 폴리카포스를 체포하여 앙카라로 추방했다.

1920년 여름, 산적 두목 오스만 아가는 해안 마을들을 약탈했다. 기레순에서는 8월 13일 밤 오스만이 모든 기독교인 남성들을 투옥했다. 그 후 매일 저녁 5~6명의 기독교인들이 끌려나와 총살당했다. 아미소스, 파프라, 아르바 지역의 그리스 마을들은 "완전히 사라졌다".[30]

대규모 작전은 1920년 3월 이즈미트에서, 9월에는 카파도키아에서 시작되었다.[31][32] 젊은 튀르크들이 그리스인들에게 체계적으로 자행하기를 두려워했던 일들을 터키 민족 운동은 기회만 생기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33]

폰투스에서의 대규모 작전은 1921년 3월에 시작되었다. 이는 주로 누레딘 파샤 장군이 이끄는 중앙군과 토팔 오스만이 이끄는 비정규군(체테)에 의해 주도되었다.

1921년 초, 신체 건강한 그리스인들은 노동 대대에 배속되었는데, 한 선교사는 이들이 "실제로 굶어 죽거나 동사할 운명"이었다고 썼다. 절멸 작전은 봄에 시작되어 그리스 시골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다. 흑해의 두즈제(쿠르츠유) 카자 마을에서는 많은 노인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알라잠, 바프라, 차르샴바 주변 마을들과 하브자, 비시르코프루와 같은 내륙 지역도 공격을 받았다.

여름이 되자 작전은 도시로 확대되었다. 바프라에서는 그리스 엘리트들이 만찬에 초대된 후 학살당했다. 터키인들은 젊은 그리스 남성들을 잡아 학살했다. 6월 5일, 바프라에 터키군과 준군사 조직이 포위하여 남성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8월 초, 바프라의 무타사리프는 한 미국 해군 장교에게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남은 그리스인들을 모두 추방하라는 명령을 앙카라에서 받았다"고 알렸다.

인근 차르샴바에서는 기독교 여성들이 잡혀 대부분 사형 행진에 보내졌고, 가장 매력적인 18명은 납치되어 오스만 아가 지휘하의 군대의 즐거움을 위해" 억류되었다.

바프라 주변의 다른 지역에서는 추방이 학살과 일관되게 동반되었다. 수르멜리에서는 300명이 집에 모여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8월까지 오르두 지역의 모든 남성들이 추방되었다.

폰투스의 중심지인 삼순도 주요 표적 중 하나였다(삼순 추방 참조). 1921년 초봄에는 선교사들이 목격한 야간 살인 사건이 있었다. 늦은 봄 동안 토팔 오스만과 그의 산적들은 도시 주변의 그리스인 정착지를 약탈하고 불태우며 민간 그리스인들을 살해했다. 주요 학살과 추방은 여름에 발생했다. 6월 16일, 앙카라의 민족주의 정부는 16세에서 50세 사이의 모든 그리스 남성을 추방하도록 승인했고,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36] 이 추방은 누레딘 파샤에 의해 수행되었다.[36] 삼순의 미국 근동 구제 근무자들은 추방된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보내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삼순의 NER 고아원은 그 지역의 그리스 어린이들로 가득 찼다.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아마시아시바스를 거쳐 하르푸트로, 거기서 디야르바키르, 비틀리스, 반으로 행진했다. 6월에 내려진 추방 명령으로 인해 삼순에서 거의 2만 1,000명이 강제 추방되었다.[36]

삼순 주변 마을들도 그리스인들이 몰살되었다. 한 지역 그리스인 생존자는 1921년에 기레순 시장이었던 토팔 오스만과 그의 부하들이 마을을 공격했을 때, 아이들을 우물에 던져 넣고 돌을 던졌으며, 노인들을 교회, 학교, 창고에 가득 채우고 불을 질렀다고 회상했다.[38] 12월에 한 선교사는 "헛간에 갇혀 산 채로 불에 타 죽은 남성, 여성, 어린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해 여름 폰투스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학살은 흑해 연안 남쪽의 메르지폰에서 발생했다. 토팔 오스만과 그의 '흉악범'들은 도시에 들어와 4일 동안 1,000~1,500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39][40]

1922년 삼순 지역을 방문했던 소련 외교관 세멘 아랄로프는 터키의 이 지역이 엄청난 황폐를 겪었고, 오스만 아가가 불과 칼로 전체 지역을 통과했다고 썼다.[41]

이러한 행동에 대한 지역 무슬림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케말 정권의 권위주의적 본질 때문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두 명의 목격자는 1921년 8월 트라브존 당국이 모든 성인 그리스 남성에게 요새에서 유료 노동을 할 것을 명령했다고 전했다. 500명 이상이 응했고, 즉시 투옥되었고 그들의 집은 약탈당했다. 그 남성들은 그 후 50명씩 그룹으로 내륙으로 추방되어 7일 동안 "빵 한 조각조차 없이" 행군을 강요당했다. 어느 날 밤 그들은 10명씩 그룹으로 데려가 총에 맞았다.

동시에 케말주의자들은 그리스 지식인, 사업가, 사제들을 제거하고 있었다(아마시아 재판 참조).

1922년 초봄, 국민당(Nationalists)은 그리스 문제를 가능한 한 신속하게 해결하려는 목표로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1922년 4월, USS ''폭스'' 함장 윌리엄 리히는 4월 10일이나 11일에 삼순에서 추가로 1,300명의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고 보고했다.[42]

토팔 오스만과 그의 체테는 오르두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남자는 거의 남지 않았지만 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 몇몇 여성과 소녀들을 골랐다. 그런 다음 군인들은 다른 모든 그리스인들을 두 건물로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선택된 여성들은 밤 동안 강간당하고 다음 날 학살당했다. 오스만의 부대는 인근 9개 마을에서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

5월까지 럼볼드는 아시아 소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새로운 잔혹 행위가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트라브존과 그 배후지는 새로운 추방의 중심지였다.

영국군 중령 A. 롤린슨은 "그리스인들이 집중적으로 경작해 왔던 해안 산맥과 그 비옥한 계곡은 이때 모든 곳에서 버려져 마을들이 버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22년 5월, 허버트 애덤스 기본스는 트레비존드가 그리스 남성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2년 전 트레비존드에 2만 5천 명의 그리스인이 있었다고 추산했다. "오늘날 80세에서 14세 사이의 남성 인구는 6명의 사제와 10명의 민간인입니다."[43] 1922년 6월까지 미국 선교사들은 폰투스에서 모든 마을이 비어 있다고 보고했다.[45]

3. 3.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1923)

1923년 1월 30일 로잔 조약에서 그리스와 터키 간 인구 교환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서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그리스의 무슬림과 소아시아의 정교회 그리스인들이 교환되었다.[50] 소아시아 그리스인들에 관해서는, 조약 체결 당시 그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도망쳤기 때문에(120만 명의 "교환 대상" 중 조약에 따라 실제로 이주한 사람은 19만 명에 불과했다) 교환은 상당히 형식적인 것이었다.[51][52]

블라시스 아그치디스는 사건들의 상징적인 일치를 지적했다. 그는 전례 없는 인도적 재난의 정점이었던 교환 의정서 서명이 최초의 나치 집회가 뮌헨에서 끝난 다음 날 이루어졌다고 적었다. 이 집회에서 히틀러베르사유 조약의 폐지를 요구했다. 히틀러가 뮌헨에서 요구한 것은 이미 로잔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그의 오랜 동맹"인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달성되었다.[53]

민족주의자들에게 이 조약의 이점은 남아 있는 그리스인들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고 이미 도망친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53] 폰투스에서는 로잔 조약이 그리스인 학살의 결과를 법적으로 확정지었을 뿐이다. 그리스 마을들은 파괴되었고 교회들은 훼손되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사망하거나 조지아 또는 러시아로 도망쳤다. 소규모 그리스 게릴라 부대만이 가족과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폰투스 숲에서 방황했다.

협정을 알게 된 많은 폰투스인들은 계속해서 터키인들을 불신했다. 때로는 국제 사절단이 도착하더라도 그들이 숲을 떠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온갖 종류의 선박으로 소련으로 이동하려고 시도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판텔리스 아나스타시아디스 대령이 25명의 병사와 300명의 민간인과 함께 1923년 12월 말에 두 대의 모터 스쿠너를 이용하여 포티에 도착한 경우가 있다. 150명의 폰투스인(여성 25명 포함)을 태운 또 다른 스쿠너는 얄타에 도착했다. 아그치디스는 로잔 조약 1년 후에도 폰투스 산악 지대에 그리스 게릴라가 여전히 존재했다고 적었다. 소련 영토에 도착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54]

약 19만 명의 그리스인이 오스만 제국에서 그리스로 보내졌고, 약 35만 명의 무슬림이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에는 더 이상 그리스계 기독교인이 남지 않았다.[8]

불가리아세르비아와 함께 체결된 유사한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1913년 11월 14일 그리스와 소규모 주민 자발적 교환 합의서에 서명했다.[65] 1914년 7월 1일, 그리스 마케도니아 거주 무슬림아이든주 및 Western Thrace|서트라키아영어의 일부 그리스인을 위한 유사한 합의서가 체결되었다. 이 합의서는 그리스가 일부 섬을 병합하는 데 동의하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이 해당 그리스인들을 강제로 집에서 내쫓은 후 체결되었다.[65] 주민 교환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지 않았다.[65] 이 오스만 제국의 방법(이미 시행된 영구적인 주민 제거를 위한 주민 교환 방식)은 전후 그리스와 터키의 주민 교환으로 반복되었다. 이는 소아시아 그리스인들의 탈출을 공식적이고 영구적으로 그리스인 학살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66][86]

4. 다른 지역과의 차이점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다른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공동체와 구별되는 독특한 역사, 문화, 생활 방식, 방언을 가지고 있었다.[55]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자위대를 조직하여 박해에 대응했으며, 체테(터키의 비정규군)와 오스만 군대와 싸우고 민간인을 보호하여 약 6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반면 서부 아나톨리아에서는 이러한 수준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56][57]

많은 폰토스 그리스인들이 지리적으로 더 가깝고 접근하기 쉬운 러시아 제국이나 조지아로 피난했다. 반면 서부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들은 대부분 그리스로 피난했다.[58]

그리스-터키 전쟁 (1919–1922) 중 그리스군폰토스에 상륙하지 않았고 상륙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서부 아나톨리아의 학살은 그리스-터키 전쟁과 연결될 수 있지만,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폰토스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은 전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59]

폰토스 대량 학살은 그리스 집단학살과 달리 폰토스에만 적용되는 별도의 기념일(5월 19일)을 가지고 있다.[25]

5. 학살 인정 논쟁

국제 집단학살 학자 협회(IAGS)는 2007년 12월 16일에 폰투스 그리스인 집단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60] 이들은 1914년부터 1923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에 대한 작전이 집단 학살에 해당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70] "그리스인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은 규모 면에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IAGS 회장 그레고리 스탠턴(Gregory Stanton)은 터키 정부에 세 가지 집단 학살(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을 인정하도록 촉구했다.[126]

그러나, 피터 발라키안(Peter Balakian), 타넬 악참(Taner Akçam) 등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은 이 문제가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8] 마누스 미들라르스키(Manus Midlarsky)는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인 집단 학살 의도를 선언했지만, 실제 학살은 "민감한 지역"에 한정되었고, 대전 말기 그리스인 대다수가 생존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단 학살은 오스만인들에게 실현 가능한 선택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129] 타넬 악참은 오스만 정부의 그리스인에 대한 대우가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척도와 비교될 수 있지만, 그 의도, 규모, 동기는 다르다고 결론지었다.[123]

그리스 의회는 1994년과 1998년에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의 운명에 관한 두 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1994년 법령은 소아시아 폰투스 지역의 집단 학살을 확인하고 5월 19일을 추모일로 지정했다.[134] 1998년 법령은 소아시아 전역의 그리스인 학살을 기념하여 9월 14일을 추모일로 지정했다.[135] 그러나 이 법안들은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즉시 비준되지 않았다.

키프로스 공화국 또한 이 사건을 "소아시아 폰투스 지역의 그리스인 집단 학살"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른다.[142]

터키 정부는 1998년 그리스의 입법에 대해 "역사적 근거 없이" 집단 학살로 사건이 기록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리스가 아나톨리아에서 일으킨 파괴와 학살에 대해 터키에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3]

2010년 이후, 스웨덴, 아르메니아,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여러 국가에서 그리스인 집단 학살을 인정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144][146][147][148]

6. 기념 및 추모



1940년대 초, 홀로코스트 시대에 폴란드계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122] 렘킨은 터키에서 그리스인의 운명을 자세히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2] 1946년 8월 ''뉴욕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집단 학살은 이제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과거에 전혀 무시된 것도 아니다. 터키인에 의한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인의 학살은 처벌 없이 외교 활동이 진행되어 왔다. 만약 렘킨 교수가 그의 길을 갖고 있다면, 국제 범죄로서 집단 학살은 확립될 것이다.[123]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집단학살방지협약(CPPCG)이 채택되어 1951년에 발효되면서 집단 학살을 법적으로 정의하였다. "집단 학살"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 그리스인의 몰살은 "대학살"(그리스어: η Σφαγήel), "대재앙"(η Μεγάλη Καταστροφήel), 또는 "대비극"(η Μεγάλη Τραγωδίαel)으로 알려져 있었다.[124]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는 그리스 전역에 세워져 있으며, 호주, 캐나다, 독일, 스웨덴, 미국 등 해외에도 있다.[149][150]

7.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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