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테오도라 (1906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테오도라(1906년)는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의 딸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의 누나이다. 1931년 바덴의 베르톨트 변경백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에서 생활했다. 전후에는 영국 왕실과 교류하며, 1969년 서독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그리스의 왕녀 -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이리니 (1942년)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이리니는 194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그리스 공주로, 한때 왕위 추정 상속인이었으며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 망명 후 인도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월드 인 하모니"를 설립하고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 - 그리스의 왕녀 -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엘레니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엘레니는 그리스 국왕의 딸로 루마니아 왕세자비가 되었으며, 이혼 후 아들이 루마니아의 왕이 되자 대비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구출에 기여하여 열방의 의인으로 선정된 후 망명하여 사망했다. - 덴마크의 왕녀 - 몽페자 여백작 아테나
몽페자 백작부인 아테나는 덴마크 왕족으로 태어나 왕족 작위는 박탈되었지만 왕위 계승 순위를 유지하며, "몽페자 아테나 백작부인 각하"로 불린다. - 덴마크의 왕녀 -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는 프레데리크 왕자와 조피 프리데리케 사이에서 태어나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과 결혼하여 1남 5녀를 두었고, 예술과 시에 관심을 보이며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하다가 사위에게 유리하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후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사망했다. - 그리스 글뤽스부르크가 - 콘스탄티노스 2세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로, 재위 기간 중 정치적 혼란과 군사 쿠데타, 왕정 폐지를 겪었으며, 올림픽 요트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그리스 글뤽스부르크가 - 에든버러 공작 필립
1921년 그리스에서 태어난 에든버러 공작 필립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으로, 해군 복무 후 왕실 배우자로서 70년 이상 공무를 수행하며 왕실 현대화에 기여하고 자선 활동을 펼쳤다.
그리스와 덴마크의 공주 테오도라 (190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바덴 변경백부인 |
본명 | Θεοδώρ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Δανίας (그리스어) |
출생일 | 1906년 5월 30일 |
출생지 | 타토이 궁전, 타토이, 그리스 |
사망일 | 1969년 10월 16일 |
사망지 | 콘스탄츠, 독일 |
매장지 | 미멘하우젠 묘지, 잘렘, 독일 |
배우자 | 베르톨트, 바덴 변경백 (1931년 8월 17일 결혼 - 1963년 10월 27일 사별) |
자녀 | 마르가리타 공주 막시밀리안,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왕자 |
왕가 | 글뤽스부르크가 |
아버지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
어머니 | 앨리스 오브 바텐베르크 |
이름 (그리스어) | |
그리스어 표기 | Θεοδώρα της Ελλάδας |
가계 | |
가문 | 글리크스부르크 가문 |
2. 생애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공주의 둘째 딸인 테오도라는 1906년 5월 30일 아테네 근처의 타토이 궁전에서 태어났다.[1] 비잔틴 황후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라"로 세례를 받았지만,[1] 가족들은 그녀를 "돌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1]
테오도라는 세 명의 언니 마르가리타, 체칠리에, 조피아와 남동생 필리포스와 함께 성장했다. 그녀의 가족은 20세기 초 그리스 왕국이 겪었던 불안정한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1]
1912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에 맞서 싸웠다. 테오도라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군에 복무했고,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간호사로 활동했다.[1] 1913년 3월, 게오르기오스 1세가 암살당하면서 테오도라 가족은 코르푸의 몽 레포 궁전에 정착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1915년 10월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전선 도시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8] 1916년 7월, 방화범이 타토이 영지를 공격했고, 12월 1일 프랑스 해군은 아테네 왕궁을 폭격했다.[12]
1917년 6월,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되고, 테오도라 가족은 스위스로 망명했다.[1] 10월 혁명 이후 테오도라의 친척 여러 명이 러시아에서 처형되었고, 1918-1919년 겨울에는 헤센 대공국의 대공가가 전복되었다.
1920년 10월, 알렉산드로스 국왕이 사망하고, 1920년 그리스 국민투표를 통해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위했다.[1] 테오도라 가족은 코르푸의 몬 레포 궁전으로 돌아갔다.[2] 1921년 6월 10일, 필리포스 왕자가 태어났다.[4]
터키와의 군사적 패배 이후, 1922년 9월 콘스탄티노스 1세는 게오르기오스 2세에게 양위했다.[13] 안드레아스 왕자는 군사 재판에서 추방과 파면을 선고받고, 1922년 12월 가족과 함께 그리스를 떠났다.[14]
테오도라 가족은 1923년 생클루에 정착하여 마리 보나파르트 공주의 관대함에 의존했다. 1924년 3월 제2 헬레닉 공화국 선포 이후, 테오도라 가족은 크리스티안 10세로부터 덴마크 여권을 받았다. 테오도라와 마르가리타는 영국에서 버킹엄 궁전 무도회 등 귀족 행사에 참석했지만, 재산 부족과 망명 생활로 인해 구혼자를 찾기 어려웠다.
1931년 8월 17일, 테오도라는 베르톨트와 결혼했다.[3][5] 부부는 잘렘 성으로 이사했고,[6][7][8][9] 마르가리타(1932–2013),[10] 막시밀리안(1933–2022), 루드비히(1937년 출생) 세 자녀를 두었다.[11][12]
1933년부터 독일이 나치화를 겪는 동안, 1935년 10월 콘딜리스 장군에 의해 헬라스 공화국이 전복되었다. 1936년 초, 테오도라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공작에게 1922년에 내려진 추방령이 해제되어 다시 조국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테오도라도 1938년 1월 파블로스 왕세자와 프레데리카 공주의 결혼식에 맞춰 베르톨드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
테오도라의 자매 체칠리에와 마르가리타, 마리 알렉산드라(베르톨트의 자매)는 나치당에 가입했지만, 바덴 변경백 부부는 나치 정권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베르톨트는 국방군에 입대하여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 부상을 입었다.[4] 테오도라는 독일 적십자사에서 활동했고, 베르톨트는 자신의 성에 유대인을 숨겼다.[4] 전쟁 중 테오도라는 가족의 죽음으로 우울증을 겪었다.[4]
독일의 패배 이후에도 베르톨트와 테오도라는 위협받지 않았고,[7] 베르톨트는 1948년 잘렘 학교를 다시 열었다.[5] 1946년 그리스 왕정 복고 이후, 테오도라 부부는 아테네에 정기적으로 초청받았다.[8]
1950년대 초, 영국 왕실과 독일 친척들 사이의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테오도라는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 초대받았다.
1963년 10월 27일, 남편 베르톨트가 사망하자 테오도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10] 테오도라는 1969년 10월 16일 콘스탄츠에서 사망했다.[10]
2. 1. 어린 시절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공주의 둘째 딸인 테오도라는 1906년 5월 30일 아테네 근처의 타토이 궁전에서 태어났다.[1] 비잔틴 황후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라"로 세례를 받았지만,[1] 가족들은 그녀를 "돌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1]


테오도라 공주는 언니 마르가리타,[1] 여동생 체칠리에,[1] 소피와 함께[1]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1] 테오도라와 그녀의 여동생들은 어머니와 함께 영어로 대화했지만, 친척과 가정교사가 있을 때는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스어도 사용했다.[1] 공주들은 정식으로 영어와 그리스어를 교육받았다.[1]
테오도라의 어린 시절은 20세기 초 그리스 왕국이 겪었던 불안정한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1] 1907년부터 1908년까지 대부분을 국외에서 보냈는데,[1] 영국, 독일, 몰타, 러시아에 머물면서[1] 루이 마운트배튼 등 많은 친척들과 재회했다.[1]
1909년,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 국왕의 정부에 맞서 조직된 군사 쿠데타인 구디 쿠데타가 발생했다.[1] 이 사건 직후, 안드레아스 왕자와 그의 형제들은 군에서 사임해야 했다.[1] 잠시 망명 생활을 고려한 후, 부부는 그리스로 돌아와 셋째 딸을 낳았다.[1]
2. 1. 1.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1912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에 맞서 싸웠다. 테오도라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다시 군에 소집되어 콘스탄티노스 왕세자 휘하에서 복무했고,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간호사로 활동하며 부상병들을 돌보았다.[1] 부모님과 함께 갈 수 없었던 테오도라와 여동생들은 1912년 12월 테살로니키에 잠시 머물렀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테네에서 전쟁 기간을 보냈다.[1] 그리스는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했지만,[2] 이 분쟁은 1913년 3월에 게오르기오스 1세의 암살로 이어지기도 했다.[3]게오르기오스 1세의 죽음은 테오도라와 그녀의 친척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왕은 유언을 통해 코르푸의 몽 레포 궁전을 안드레아에게 물려주었다.[4] 수년 동안 아테네와 타토이 궁전에서 군주와 가까이 살았던 안드레아와 그의 가족은 마침내 자신들만의 거처를 갖게 되었다.[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중립을 선언했고,[5] 처음에는 테오도라와 그녀의 친척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테오도라와 여동생들은 1914년 여름을 코르푸에서 보내며 4개월 동안 햇볕과 바다를 즐겼다.[6]
그러나 전쟁이 그리스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7] 테살로니키에 주둔한 안드레아는 1915년 10월에 연합군의 마케도니아 전선 도시 점령에 직면했다.[8] 그 직후인 12월, 패주한 세르비아군은 코르푸에서 피난처를 찾았고,[9] 앨리스와 딸들은 몽 레포를 떠나 수도로 갔다.[10] 몇 달 동안 왕실 구성원에 대한 위협은 더욱 커졌다.[11] 1916년 7월, 방화범이 국왕과 왕비, 여러 자녀들이 함께 있던 타토이 영지를 공격했다.[11] 12월 1일, 프랑스 해군은 아테네 왕궁을 폭격하여 테오도라와 여동생들은 어머니와 함께 지하실로 피신해야 했다.[12]
2. 1. 2. 스위스 망명
1917년 6월, 콘스탄티노스 1세는 동맹국에 의해 그리스에서 폐위되고 추방되었으며, 동맹국은 그의 둘째 아들인 젊은 알렉산드로스를 왕위에 앉혔다.[1] 테오도라의 가족은 15일 뒤, 새로운 군주가 측근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망명해야 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에 강제로 거주하게 된 이 작은 가족은 처음에는 생모리츠의 호텔에 머물렀고, 그 후 루체른에 정착하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았다.망명은 가족의 유일한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10월 혁명 이후 테오도라의 친척 여러 명(로마노프 왕가)이 러시아에서 처형되었다. 이러한 사건 직후 테오도라가 어머니를 통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헤센 대공국의 대공가는 1918-1919년 겨울에 다른 모든 독일 왕조와 함께 전복되었다.
1919년 초, 테오도라는 덴마크의 외교적 중재 덕분에 볼셰비키의 손에서 벗어난 아버지 쪽 할머니인 올가 왕대비와 재회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녀는 또한 전쟁으로 인해 바텐베르크 가문이라는 이름을 마운트배튼으로 바꾸어야 했던 어머니 쪽 조부모님과 재회했다.
2. 2. 청년기
테오도라는 1906년 그리스 코르푸섬에서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오브 배튼버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의 넷째 아들이었고, 어머니 앨리스는 영국으로 귀화한 독일 귀족인 루이스 알렉산더 마운트배튼의 딸이었다. 테오도라는 가족 내에서 "돌라(Dolla)"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남동생 필리포스는 훗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결혼하여 에든버러 공작이 되었다.테오도라는 세 명의 언니 마르가리타, 체칠리에, 조피아와 함께 독일 왕족 및 귀족과 결혼했다.
2. 2. 1. 그리스 귀환
1920년 10월 2일, 테오도라 공주의 사촌인 알렉산드로스 국왕이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그리스에 심각한 제도적 위기가 초래되었다. 1920년 그리스 총선거에서 패배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가 해외로 은퇴하고, 1920년 그리스 국민투표를 통해 콘스탄티노스 1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1]
1920년 11월 23일, 안드레아스 왕자는 아테네에서 환영을 받았고, 며칠 후 그의 아내와 네 딸이 합류했다.[2] 그 후 테오도라 공주는 가족과 함께 코르푸로 돌아가 몬 레포 궁전에서 살았다. 같은 시기에 앨리스 공주는 다시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3] 1921년 6월 10일, 가족은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훗날의 에든버러 공작 필립)를 맞이했다.[4] 그러나 이 출생을 둘러싼 기쁨은 그리스-터키 전쟁 발발과 함께 안드레아스 왕자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군대에 합류하면서 가려졌다.[5]
전쟁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라 공주와 그녀의 형제들은 몬 레포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1922년 봄에 외할머니와 고모 루이즈의 방문을 받았다.[6] 고대 묘지 위에 세워진 궁전 근처 공원에서 공주들은 고고학에 전념하며 도자기, 청동 조각, 뼈 등을 발견했다.[7]
이 기간 동안, 테오도라 공주와 그녀의 자매들은 처음으로 여러 주요 사교 행사에 참여했다. 1921년 3월, 공주들은 아테네에서 사촌 헬레네와 루마니아의 카롤 2세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8] 1922년 7월, 그들은 삼촌 루이스와 부유한 상속녀 에드위나 애슐리의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서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9]
2. 2. 2.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터키와의 군사적 패배와 그로 인한 정치적 불안은 테오도라와 그녀의 가족의 삶을 뒤흔들었다. 1922년 9월, 콘스탄티노스 1세는 장남 게오르기오스 2세에게 양위했다.[13] 한 달 후, 안드레아스 왕자는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고, 재판부는 그에게 사카리아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었다. 외국 공관의 개입으로 처형을 면한 왕자는 추방과 파면을 선고받았다. 코르푸에서 잠시 머문 후,[14] 왕자와 그의 친척들은 1922년 12월 초 HMS ''칼립소'' 호를 타고 급히 그리스를 떠났다.[14]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을 거치는 여러 주간의 여정 끝에, 테오도라와 그녀의 부모, 형제들은 1923년 생클루에 정착했다. 이들은 마리 보나파르트 공주의 집에 인접한 곳에 정착하여 7년 동안 그녀의 관대함에 의존했으며, 테오도라의 다른 두 이모인 아나스타시아 공주와 루이 마운트배튼 부인에게도 의지했다. 마리 보나파르트는 조카들의 학비를 지원했고, 루이 마운트배튼 부인은 조카들에게 "쓰던" 옷을 제공하는 습관을 들였다. 테오도라의 부모는 수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들의 금전적인 문제와 가정을 유지하는 어려움을 정기적으로 목격했다.
1924년 3월 제2 헬레닉 공화국 선포 이후 그리스 국적을 박탈당한 테오도라와 그녀의 가족은 사촌인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으로부터 덴마크 여권을 받았다. 결혼 적령기가 되자, 테오도라 공주와 그녀의 여동생 마르가리타는 정기적으로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어머니의 외할머니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과 함께 살았다. 이모 루이즈는 점차 그들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보모이자 상담자가 되었고, 두 젊은 소녀는 1920년대 동안 버킹엄 궁전에서의 무도회와 댄스, 생일 파티, 정원 파티, 경마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국 귀족 행사에 참석했다. 두 공주는 또한 런던 체류를 이용하여 아버지 쪽 할머니인 올가 여왕과 같은 많은 친척들을 방문했는데, 그녀는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알렉산드라 여왕의 정기적인 손님이었다. 그러나 젊은 소녀들의 재산 부족과 망명 생활은 구혼자를 거의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0년까지 그들 중 누구도 아직 약혼자를 찾지 못했지만, 1923년 6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가 루이즈 이모에게 결혼을 요청했을 때 기뻐했다.
2. 2. 3. 앨리스 공주의 정신 질환
테오도라, 마르가리타, 필립은 1928년 여름 루마니아에서 헬레네 공주의 초대를 받아 시나이아에서 몇 주 동안 머물렀다.[1][2] 당시 니콜라에 공자는 미혼이었고, 헬레네는 그가 친척 중 한 명과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시동생과 사촌을 결혼시키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3]
이후 앨리스는 심리적인 문제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정신 건강 위기에 처한 앨리스 공주는 자신이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딸들의 잠재적 남편에 대한 신성한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자신을 성녀로 여기며 곧 예수의 신부라고 선언했다.[4] 이 상황에 당황한 안드레아스 왕자는 아내를 요양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5] 1930년 4월, 가족이 독일 다름슈타트에 머무르는 동안 앨리스는 스위스 크로이츠링겐에 있는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6]
2. 3. 독일 정착
1933년부터 독일이 나치화를 겪는 동안, 1935년 10월 콘딜리스 장군에 의해 헬라스 공화국이 전복되었다. 한 달 후, 테오도라의 사촌인 게오르기오스 2세 국왕이 국민투표 이후 왕위에 복귀했다. 1936년 초, 테오도라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 공작에게 1922년에 내려진 추방령이 해제되어 다시 조국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테오도라도 1938년 1월 파블로스 왕세자와 프레데리카 공주의 결혼식에 맞춰 베르톨드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테오도라의 자매 체칠리에와 마르가리타, 마리 알렉산드라(베르톨트의 자매)는 나치당에 가입했지만, 바덴 변경백 부부는 나치 정권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국회의사당 방화령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독재가 확립된 직후, 독일계 유대인 교육자인 쿠르트 한이 체포되었다. 영국 정부의 개입으로 풀려났지만, 쿠르트 한은 잘름의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베르톨트는 독일 당국으로부터 학교를 계속 운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2] 1941년까지 비교적 자율성을 누렸지만, 이 학교는 원래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나치화 과정을 겪었다.[3]
2. 3. 1. 결혼과 잘렘 정착

1931년 6월, 테오도라는 베르톨트와 약혼했다.[1] 그는 독일 제국의 마지막 총리이자 1929년 11월부터 바덴의 명목상 대공의 아들이었다. 그는 교양 있는 사람이었고, 아버지와 그의 비서인 쿠르트 한의 도움을 받아 1920년에 학교를 설립한 잘렘에 거주했다.[2][3][4] 1931년 8월 17일, 테오도라와 베르톨트는 바덴바덴의 ''노이에스 로스''에서 루터교와 정교회 두 종교 의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로 인해 대규모 가족 재회가 이루어졌지만 신부의 어머니인 앨리스 공주는 참석하지 않았다.[3][5] 결혼식 후, 신혼 부부는 이탈리아 카프리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스웨덴 시인 악셀 문테를 맞이했다.[3]
다시 독일로 돌아온 부부는 1803년 세속화 이후 왕실 거주지로 변모한 옛 시토회 수도원인 잘렘 성으로 이사했다.[6][7][8][9] 바덴 변경백 부부는 마르가리타 (1932–2013),[10] 막시밀리안 (1933–2022), 그리고 루드비히 (1937년 출생)의 세 자녀를 두었다.[11][12] 어머니의 운명을 걱정하던 테오도라는 여러 차례 크로이츨링겐을 방문했지만, 앨리스는 항상 딸을 따뜻하게 맞이하지는 않았다.[13] 테오도라는 어머니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 동생 필립이 혼란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필립을 잘렘의 학교에 다니게 하고 1933년에 남편과 함께 그와 함께 살게 했다.[14] 그러나 독일에서 나치즘이 부상하면서 그녀는 결정을 번복하고 1934년 마침내 고든스톤에 입학하게 된 영국으로 그를 다시 보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테오도라는 가족 여러 명을 잘렘으로 맞이했다. 밀포드 헤이븐 후작 부인은 손녀와 여러 번 머물렀고, 앤드루 왕자도 그랬다. 공주는 또한 건강 문제를 회복한 후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맞이했다. 체칠리에는 1937년 7월 잘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후, 1937년 11월 16일 가족과 함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2. 3. 2. 정치적 격변

테오도라의 자매 체칠리에와 마르가리타, 마리 알렉산드라(베르톨트의 자매)는 나치당에 가입했지만, 바덴 변경백 부부는 나치 정권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국회의사당 방화령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독재가 확립된 직후, 독일계 유대인 교육자인 쿠르트 한이 체포되었다. 영국 정부의 개입으로 풀려났지만, 쿠르트 한은 잘름의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영국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베르톨트는 독일 당국으로부터 학교를 계속 운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2] 1941년까지 비교적 자율성을 누렸지만, 이 학교는 원래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나치화 과정을 겪었다.[3]
1933년부터 독일이 나치화를 겪는 동안, 1935년 10월 콘딜리스 장군에 의해 헬라스 공화국이 전복되었다. 한 달 후, 테오도라의 사촌인 게오르기오스 2세 국왕이 국민투표 이후 왕위에 복귀했다. 1936년 초, 테오도라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 공작에게 1922년에 내려진 추방령이 해제되어 다시 조국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테오도라도 1938년 1월 파블로스 왕세자와 프레데리카 공주의 결혼식에 맞춰 베르톨드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다.
2. 3. 3.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여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테오도라의 남편 베르톨트는 국방군에 입대하여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4] 기센에서 치료를 받은 후 잘름으로 돌아와 전쟁 기간 동안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비교적 어려움 없이 지냈다.[4] 테오도라는 독일 적십자사와 다른 자선 단체에서 활동했고, 베르톨트는 자신의 성에 유대인을 숨기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4]나치의 그리스 점령으로 인해 테오도라는 가족의 많은 부분과 단절되었다.[4] 그녀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프랑스 리비에라에 고립되었고 그와 연락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4] 그녀의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아테네에서 전쟁을 보냈지만 1940년, 1942년, 그리고 1944년에 그녀의 딸들을 몇 번 방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형인 헤센의 크리스토프와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고트프리트,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 필립이 서로 다른 진영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고통스러워했다.[4]
전쟁은 테오도라와 그녀의 친척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1943년 10월, 그녀의 여동생 소피의 남편은 아펜니노 산맥 상공을 비행하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몇 달 후인 1944년 1월, 베르톨트의 유일한 여동생인 마리 알렉산드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크푸르트 폭격 중 미 육군 항공대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1944년 12월, 그녀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모나코에서 사망했고, 그는 다시는 자녀들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테오도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렸다.[4]
2. 4. 전후
독일의 패배와 연합군의 점령 이후 바덴은 프랑스와 미국의 행정부에 놓였지만,[6] 베르톨트와 테오도라는 위협을 받지 않았다.[7] 베르톨트는 1948년에 잘렘 학교를 다시 열 수 있었는데, 학교 운영은 그의 사촌인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에게 위임했다.[5] 2년 전, 테오도라의 여동생 소피는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와 결혼했고,[5] 부부가 잘렘으로 이주하면서 테오도라는 여동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5]한편, 테오도라와 그녀의 오빠 필립의 관계는 더 복잡해졌다. 1939년부터 필립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와 관계를 맺었고,[5] 1947년 7월 10일 두 사람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5] 그러나 필립 가족이 독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영국 왕실과 정부를 두렵게 했다. 그들은 왕실이 과거 나치당 회원들과 공개적으로 연관될 경우 대중이 윈저 왕가의 게르만 기원을 기억할 것을 우려했다.[5] 결국 필립 공자는 자신의 결혼식에 누이들을 초대할 수 없었다.[5] 오빠가 겪어야 할 어려움을 이해한 테오도라와 마르가리타, 소피는 자신들의 소외가 잘못되고 상처가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자신들의 사촌인 루마니아의 여왕 어머니와 아오스타 공작 부인이 분쟁 중 나치 정권의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를 받은 것을 알고 모욕감을 느꼈다.[5]
테오도라와 그녀의 여동생들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렸지만, 1947년 11월 20일을 마리엔부르크 성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의 초청을 받아 사촌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헤세와 라인 공자 루이, 헤세와 라인 공주 마가렛과 함께 오빠의 결혼을 축하했다.[5]
1946년 그리스 왕정 복고 이후,[8] 테오도라와 그녀의 남편은 정기적으로 아테네에 초청되었다. 이 부부는 파블로스 국왕과 프레데리카 왕비가 1954년에 주최한 "왕들의 크루즈"에 초대받았으며, 1963년 헬레니즘 왕조 100주년 기념 행사에도 초청받았다. 테오도라와 그녀의 가족은 1962년 소피아 공주와 아스투리아스 공의 결혼과 1964년 콘스탄티노스 2세와 덴마크의 앤마리 공주의 결혼을 기념하여 아테네에 초청받기도 했다.[8]
1950년대 초, 영국 왕실과 독일 친척들 사이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테오도라, 그녀의 자매들, 그들의 남편과 몇몇 자녀들은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 초대받았다. 스페인 전기 작가 리카르도 마테오스 사인스 데 메드라노에 따르면, 테오도라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여왕은 그녀를 가장 좋아하는 시누이로 여겼다.
바덴의 변경백과 변경백작 부인은 정기적으로 가족들을 살렘에 있는 그들의 거처로 초대했다. 1957년 딸 마르가리타와 유고슬라비아의 토미슬라브 왕자의 결혼[9]과 1966년 아들 막시밀리안 폰 바덴과 오스트리아의 발레리 대공녀의 결혼은 유럽 귀족들의 대규모 만남의 기회가 되었다. 1965년, 테오도라는 서독을 공식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을 기념하여 살렘에서 대규모 리셉션을 열었다.
2. 4. 1. 독일 점령과 필립의 결혼
독일의 패배와 연합군의 점령 이후 바덴은 프랑스와 미국의 행정부에 놓였지만,[6] 베르톨트와 테오도라는 위협을 받지 않았다.[7] 베르톨트는 1948년에 잘렘 학교를 다시 열 수 있었는데, 학교 운영은 그의 사촌인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에게 위임했다.[5] 2년 전, 테오도라의 여동생 소피는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와 결혼했고,[5] 부부가 잘렘으로 이주하면서 테오도라는 여동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5]한편, 테오도라와 그녀의 오빠 필립의 관계는 더 복잡했다. 1939년부터 필립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와 관계를 맺었고,[5] 1947년 7월 10일 두 사람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5] 그러나 필립 가족이 독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영국 왕실과 정부를 두렵게 했다. 그들은 왕실이 과거 나치당 회원들과 공개적으로 연관될 경우 대중이 윈저 왕가의 게르만 기원을 기억할 것을 우려했다.[5]
결국 필립 공자는 자신의 결혼식에 누이들을 초대할 수 없었다.[5] 오빠가 겪어야 할 어려움을 이해한 테오도라와 마르가리타, 소피는 자신들의 소외가 잘못되고 상처가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자신들의 사촌인 루마니아의 여왕 어머니와 아오스타 공작 부인이 분쟁 중 나치 정권의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를 받은 것을 알고 모욕감을 느꼈다.[5]
테오도라와 그녀의 여동생들은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면서, 1947년 11월 20일을 마리엔부르크 성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의 초청을 받아 사촌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헤세와 라인 공자 루이 그리고 헤세와 라인 공주 마가렛과 함께 오빠의 결혼을 축하했다.[5]
2. 4. 2. 왕실 서클 복귀
1946년 그리스 왕정 복고 이후,[8] 테오도라와 그녀의 남편은 정기적으로 아테네에 초청되었다. 이 부부는 파블로스 국왕과 프레데리카 왕비가 1954년에 주최한 "왕들의 크루즈"에 초대받았으며, 1963년 헬레니즘 왕조 100주년 기념 행사에도 초청받았다. 테오도라와 그녀의 가족은 1962년 소피아 공주와 아스투리아스 공의 결혼과 1964년 콘스탄티노스 2세와 덴마크의 앤마리 공주의 결혼을 기념하여 아테네에 초청받기도 했다.[8]1950년대 초, 영국 왕실과 독일 친척들 사이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테오도라, 그녀의 자매들, 그들의 남편과 몇몇 자녀들은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 초대받았다. 스페인 전기 작가 리카르도 마테오스 사인스 데 메드라노에 따르면, 테오도라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여왕은 그녀를 가장 좋아하는 시누이로 여겼다.
바덴의 변경백과 변경백작 부인은 정기적으로 가족들을 살렘에 있는 그들의 거처로 초대했다. 1957년 딸 마르가리타와 유고슬라비아의 토미슬라브 왕자의 결혼[9]과 1966년 아들 막시밀리안 폰 바덴과 오스트리아의 발레리 대공녀의 결혼은 유럽 귀족들의 대규모 만남의 기회가 되었다. 1965년, 테오도라는 서독을 공식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을 기념하여 살렘에서 대규모 리셉션을 열었다.
2. 5. 말년
1940년대 말, 테오도라는 심장 문제로 고통받기 시작했다.[10]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고, 1962년 후안 카를로스 왕자와 소피아 공주의 결혼식에서 매우 쇠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10] 이후 건강은 말을 하거나 걷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시기와 괜찮은 시기를 오갔다.[10] 예측 불가능한 발작 때문에 항상 지팡이를 짚고 다녔으며, 이를 모두 뽑아야 해서 이상한 미소를 짓게 되어 어머니가 이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10]1963년 10월 27일, 남편 베르톨트는 아들 루드비히와 운전하던 중 치명적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0]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도라는 이탈리아 휴가에서 급히 돌아왔다.[10]
테오도라의 말년은 군사 정권의 그리스 수립과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과 그의 가족의 망명으로 영향을 받았다.[10] 콘스탄츠에 있는 닥터 뷔딩겐[10] 진료소[11]에 입원한 테오도라는 1969년 10월 16일에 사망했다.[10] 장례식은 살렘에 있는 바덴 가문의 영묘에서 조카 찰스 왕자를 포함한 많은 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나,[10] 캐나다 공식 방문 중이었던 형제 필립 공은 참석하지 못했다.[10]
3. 대중 문화
역사 드라마 시리즈 ''더 크라운''(2017)의 "친애하는 케네디 부인" 에피소드(시즌 2, 에피소드 8)에서 테오도라와 베르톨트에 대한 짧은 언급이 이루어진다.[12]
4. 가계
Theodorade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의 딸이다. 부계로는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와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의 손녀이며,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증손녀이다.[13] 모계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이며, 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외손녀이다.[13]
1. 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 공주 |
---|
2.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
3.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 |
4.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 |
5.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
6. 바텐베르크의 루이스 공자 |
7. 헤센-다름슈타트의 빅토리아 공주 |
8.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 |
9. 헤센-카셀의 루이즈 공주 |
10.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
11.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
12. 헤센-다름슈타트의 알렉산더 공자 |
13. 줄리아 하우케 백작부인 |
14. 헤센 대공 루이 4세 |
15. 영국의 앨리스 공주 |
참조
[1]
문서
Ricardo Mateos Sainz de Medrano mentions the Hellenic capital as her place of birth, but Hugo Vickers is more precise and names Tatoi Palace as the birthplace.
[2]
문서
According to Philip Eade, Berthold would have put forward the influence of his school on the British elites to justify his connection to the ''Führer'', who dreamed of an alliance with the United Kingdom. The margrave would also have used the presence in Salem of his young brother-in-law Philip to illustrate the role his school played as a bridge to Great Britain.
[3]
웹사이트
Die Historie der Schule Schloss Salem
https://www.schule-s[...]
2020
[4]
문서
This is what Ricardo Mateos Sainz de Medrano indicates, without giving more details.
[5]
간행물
Princes et nobles d'Allemagne des années 1920 à l'effondrement du IIIe Reich
https://www.cairn.in[...]
2001
[6]
웹사이트
La présence militaire en Allemagne de 1945 à 1993
http://docnum.univ-l[...]
2020-12-29
[7]
뉴스
How Britain planned to rescue 'royal relatives'
https://www.telegrap[...]
2006-05-09
[8]
서적
H.M. Konstantine XIII: King of the Hellenes
Atlantic International Publications
[9]
뉴스
HRH Princess Margarita of Baden
https://www.telegrap[...]
2013-01-20
[10]
간행물
Gestatten, eine echte Büdingen-Erbin – und sie ist für den Hotelbau direkt neben ihrem Haus an der Seestraße
https://www.suedkuri[...]
2021-01-04
[11]
문서
Ricardo Mateos Sainz de Medrano recalls a death in the small town of [[Büdingen]], in [[Hesse]] confusing the name of doctor Theodor Büdingen, founder of the clinic, with that of a small town in Hesse, but the authors of ''L’Allemagne dynastique'' confirm the place of death as Konstanz.
[12]
웹사이트
The Crown (2016–…): Season 2, Episode 8 - Dear Mrs. Kennedy - Full Transcript
https://subslikescri[...]
2021-01-04
[13]
서적
Lines of Succession: Heraldry of the Royal Families of Europe
Little, Brown
[14]
문서
オーストリア皇帝[[フランツ・ヨーゼフ1世 (オーストリア皇帝)|フランツ・ヨーゼフ1世]]と皇后[[エリーザベト (オーストリア皇后)|エリーザベト]]夫妻の孫[[フーベルト・ザルヴァトール・フォン・エスターライヒ=トスカーナ|フーベルト・ザルヴァトール]]大公の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