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은 기원전 203년부터 기원전 111년까지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현재의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걸쳐 있었다. 진나라 장군 조타가 건국했으며, 처음에는 진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나 점차 자치권을 확보했다. 남월은 한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여후 집권 시기에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조타 사후, 남월은 한나라의 간섭을 받다가 기원전 111년 한무제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남월은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했으며, 한족 문화와 월족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남월의 유적은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등에 남아 있으며, 특히 광저우에는 남월왕릉과 궁전 유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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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 - 찌에우 왕조 조타가 건국한 찌에우 왕조는 남월의 왕조로, 여러 왕을 거치며 한족과 월족 문화가 융합된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베트남 역사가들은 이 왕조를 베트남의 왕조로 보기도 한다.
남월 - 한나라의 남월 정복 한나라의 남월 정복은 기원전 111년 한나라가 남월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9개의 군으로 나누어 통치한 사건으로, 남월 내부 분열과 쿠데타를 계기로 발생했으며, 한나라의 남방 확대와 경제적 영향력 강화에 기여했지만 토착 문화 억압 등 논란도 있다.
백월 - 산월 산월은 중국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에 걸쳐 회계군 등지에서 활동하며 손책, 동습, 육손 등에게 토벌당하거나 오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부족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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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최대 영역에서 남월의 위치
기본 정보
공식 명칭
남월
한자 표기
南越 또는 南粵
로마자 표기
Nányuè
월어
Naam4 Jyut6
베트남어
Nam Việt
좡어
Namz Yied
의미
남쪽의 월(越)
위치
중국 남부, 베트남 북부
수도
번우
역사
건국
기원전 204년
멸망
기원전 111년
주요 사건
진나라 "평정 전쟁" (기원전 218년) 한나라에 첫 조공 (기원전 196년) 조타 즉위 (기원전 183년) 오락 정복 (기원전 179년) 한나라에 두 번째 조공 (기원전 179년)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영남 지방 공략을 시작하여, 기원전 214년에 평정하고 남해군, 계림군, 상군 3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09년 진승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유방과 항우의 초한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은 혼란에 빠졌다.[1]
기원전 208년 남해군위 임효가 병에 걸려 용천현령 조타(찌에우 다)가 군위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고, 임효가 사망하자 조타는 남해군위에 취임하여 군대를 동원해 중원의 반란군 진입을 막고, 진나라 관료를 숙청한 뒤 심복으로 등용하였다.[1]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멸망한 후, 기원전 203년 조타는 계림군과 상군을 병합하여 남월국을 건국하고 남월 무왕(南越武王)을 자칭하였다.[1] 조타는 남쪽으로 어우락국을 공격하여 병합하였다.
혜제 (재위: 기원전 195년~기원전 188년) 시기 한나라와 남월국의 우호 관계가 발전했지만, 고제의 황후 여후(呂后) 집권 5년째(기원전 183년)부터 관계가 악화되었다.[74] 조타는 황제를 칭하며 한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그의 사후 남월국은 내부 분열과 한 무제 (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의 즉위로 약화되었다. 기원전 111년, 남월국은 한나라에 멸망하고 9군이 설치되었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기원전 202년 중국을 재통일한 후, 한나라 조정은 남월을 신중하게 대하였다. 기원전 196년, 육가를 보내 조타의 충성을 얻어냈다.[20] 남월은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했다.
기원전 195년 유방 사후 여태후가 정권을 잡고 조조의 친족을 살해하고 묘를 파괴하자, 조조는 남월의 황제를 선포하고 창사국을 공격했다. 여태후는 군대를 보냈으나 실패했고, 조조는 민월 등을 병합했다.
기원전 179년, 유항이 즉위하여 조조와 화친했다. 육가를 남월에 보내 여태후의 정책을 비판하고 조조를 회유하자, 조조는 다시 한나라에 복속하고 "황제" 칭호를 버렸다.[22] 그러나 조조는 남월 내에서 계속 "황제"로 불렸다.
기원전 137년 조타가 사망하고 손자 조호(조흔)가 계승했다. 기원전 135년 민월(閩越)이 남월을 공격하자 조호는 무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무제는 군대를 파견하려 했으나 민월에서 반란이 일어나 중지되었다. 무제는 조호에게 사의를 표하고 태자 조영제(趙嬰斉)를 입조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월 대신들은 조호의 입조를 반대했고, 조호는 12년간 입조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 조타가 병에 걸려 조영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영제는 한나라에서 곡씨(樛氏)를 황후로, 조흥(趙興)을 태자로 책봉해달라고 요청했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조영제는 폭군으로 알려졌으며, 무제는 조영제에게 입조를 요구했으나 조영제는 거부했다.
기원전 115년 조영제가 사망하고 조흥이 왕위를 계승했다. 기원전 113년 무제는 안국소기를 보내 조흥에게 조현을 명령했다. 남월국의 실권은 승상 여가(呂嘉)에게 있었고, 곡태후는 안국소기와 사통하여 신뢰를 잃었다. 곡태후는 한나라에 귀속될 것을 설득하고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내지 제후의 예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무제는 남월의 청을 받아들여 관직을 설치하고 한나라 법률을 적용하려 했다. 여가는 한나라 귀순에 반대했고, 조흥은 여가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문제를 미루었다. 조흥과 곡태후는 여가를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여가는 반란을 일으켜 조흥, 곡태후, 한나라 사신을 살해했다.
기원전 112년 무제는 한천추와 구락에게 군사를 주어 남월로 보냈으나, 여가는 조흥을 비난하며 왕궁을 공격하여 모두 살해했다.
2. 1. 건국
영남 지방은 옛날부터 이민족인 백월의 활동 지역이었고,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후, 영남 지방의 공략에 착수했다. 기원전 219년, 시황제는 도수를 총사령관으로, 정정 출신 한인인 조타(찌에우 다)를 부장으로 임명하여 50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영남 지방을 공격했다.[1]
도수는 주민을 학살하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현지에서 살해당하자, 진나라는 임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4년에 걸쳐 공략, 기원전 214년에 영남 지방을 평정했다.[1]
진나라는 영남 지방을 평정하고 남해군, 계림군, 상군의 3군을 설치하였다. 임오는 남해군 위에 임명되었고, 남해군 내에 박라(博羅), 용천(龍川), 번우(番禺), 게양(揭陽) 네 현을 설치하였다. 조타(찌에우 다)는 용천현령으로 임명되었다.[1]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병으로 죽고, 진 이세황제가 제위를 계승했지만, 기원전 209년 진승 오광의 난이 발생하면서 진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유방과 항우에 의한 초한쟁패가 시작되어 중국은 혼란에 빠졌다.[1]
기원전 208년, 남해군위 임효가 중병이 들자, 용천현령 조타(찌에우 다)가 군위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임효가 사망하자 조타는 남해군위에 취임하여 군대에 중원의 반란군 진입을 저지하도록 명령하고, 진나라가 남해군에 파견했던 관료를 숙청하고, 자신의 심복을 관료로 등용하였다.[1]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멸망한 후, 기원전 203년 조타는 계림군과 상군을 병합하여 남월국을 건국하고, 남월 무왕(南越武王)을 자칭하였다.[1]
2. 2. 툭판 왕조의 병합
조타(찌에우 다)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 어우락국을 공격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조타의 아들 쫑 투이와 어우락의 공주 미 쩌우가 결혼했고, 사랑에 눈이 먼 미 쩌우는 쫑 투이에게 아버지의 비밀병기인 신노(神弩)를 보여주었다. 쫑 투이는 방아쇠틀을 몰래 망가뜨렸고, 이어 쳐들어온 남월국의 군대를 어우락은 막지 못했다고 한다.
2. 3. 한나라와의 관계
혜제(재위: 기원전 195년~기원전 188년) 집권 기간 동안 한나라와 남월국의 우호적 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혜제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뜨자 고제의 황후인 여후(呂后)가 정권을 잡았는데, 집권 초기 4년간은 한나라와 월나라의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5년째(기원전 183년) 봄,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74] 조타(찌에우 다)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한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조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양측이 대등하게 전쟁을 벌였으나, 그의 사후 남월국 내부에서는 중국인 집단과 토착 세력 간의 분열이 진행되었고, 한나라에서는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가 즉위하여 강성해졌다. 기원전 111년, 남월국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 위치에는 9군이 설치된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기원전 202년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전쟁으로 중국 곳곳이 황폐해지고 인구가 감소하였으며, 제후들의 반란과 흉노의 잦은 북방 침입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나라 조정은 처음에는 남월을 매우 신중하게 대하였다. 기원전 196년, 유방(당시 고조 황제)은 육가를 남월에 보내어 조조의 충성을 얻고자 하였다. 육가는 남월에 도착하여 조조를 만났는데, 조조가 월나라 복장을 하고 월나라 풍습에 따라 맞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0] 육가는 조조가 월인이 아닌 중국인이므로 중국식 의복과 예법을 지켜야 하며 조상의 전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꾸짖었다. 육가는 한나라 조정의 강력함을 과시하며 남월과 같은 작은 나라가 감히 한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경고하였다. 또한 조조의 중국 본토에 있는 친척들을 죽이고 조상의 묘를 파괴할 것이며, 월나라 백성들을 선동하여 조조를 몰아낼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조조는 한 고조의 옥새를 받고 한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남월과 한나라 창사국 사이에 국경 무역이 시작되었다. 형식적으로는 한나라의 속국이었지만, 남월은 상당한 사실상의 자치권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95년 유방이 죽은 후, 그의 부인 여태후가 정권을 잡았다. 여태후는 아들 한 회제와 손자 유공, 유홍을 위해 황태후로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여태후는 조조의 고향인 정정(현재 정정현, 허베이성)에 사람을 보내 조조의 친족들을 대거 살해하고 조상의 묘를 파괴하였다. 조조는 창사왕 무천이 자신을 모함하여 여태후에게 남월과 한나라 사이의 무역을 중단시키고 창사국에 남월을 병합하기 위한 정복을 준비하도록 부추겼다고 생각하였다. 복수심에 불탄 조조는 스스로 남월의 황제라 선포하고 창사국을 공격하여 한나라 영토 내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였다. 여태후는 주조 장군을 보내 조조를 징벌하려 하였으나, 남쪽의 습하고 더운 기후로 인해 군대 내에 전염병이 급속히 퍼졌고, 약화된 군대는 산맥을 넘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남월이 승리하였지만, 여태후가 죽을 때까지 군사적 충돌은 계속되었다. 조조는 이후 동쪽의 이웃 나라 민월을 속국으로 병합하였다. 예랑과 통什|통십중국어도 남월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79년, 유항이 한나라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여태후의 정책들을 많이 뒤집고 조조와 남월에 대해 회유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정정에 관리를 파견하여 도시를 수비하고 조조의 조상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재상 진평은 육가를 남월에 파견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육가는 조조와 이미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가는 다시 판여에 도착하여 황제의 편지를 전달하였는데, 편지에는 여태후의 정책이 남월과 한나라 조정 사이의 적대감을 야기하고 국경 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조는 다시 한나라에 복속하기로 결정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버리고 "왕"으로 돌아갔으며, 남월은 다시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변화는 표면적인 것이었고, 조조는 남월에서 계속 "황제"로 불렸다.[22]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이 한(漢)을 건국하고, 중원(中原)을 시작으로 항우의 잔여 세력을 평정했다. 이때 중원은 오랜 전란으로 민중의 생활이 곤궁했고, 경제적 재건이 우선되었기에 남월국(南越國)에 대한 군사적 행동은 취해지지 않았다. 기원전 196년, 유방은 대부(大夫) 육가(陸賈)를 남월에 파견하여 조도(趙佗)의 귀순을 요구했다. 육가의 설득 결과, 조도는 유방의 남월왕 인수(印綬)를 받고 한(漢)에 복종하며, 남월국은 한의 책봉체제(冊封體制)에 편입되었다. 이후 남월국과 한나라는 상호 사신을 파견하고 교역을 하게 되었다. 유방은 평화적으로 조도를 귀순시키는 데 성공하여 남월국이 한의 적대 세력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기원전 195년, 유방이 죽자 유방의 정실인 여후(呂后)가 조정을 장악하고 육가가 은퇴하면서 조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여후는 남월 국경 지대에 대한 철을 비롯한 물자의 남월 수출을 금지했다. 이에 조도는 여후가 한 내부의 군국(郡國) 중 남월과 국경을 접한 장사국(長沙國)과 동맹을 맺고 남월국을 병합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한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이탈을 선언하며 스스로 "'''남월무제(南越武帝)'''"라 칭하고 '''황제'''를 자칭했으며, 장사국의 국경 지역의 여러 현을 공격했다. 여후는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竈)를 총대장으로 삼아 남월에 원정을 보냈으나, 고온다습한 기후에 막혀 실패했다. 이때 조도는 진상품을 이용한 외교를 전개하여 인근의 민월(閩越)·구월(甌越)(서구(西甌))·낙월(駱越)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하여 남월국의 최대 영토를 확립했다. 또한 황제의 명칭으로 명령을 내리며 한과의 대립 태세를 명확히 했다.
기원전 179년, 여후가 죽고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남월에 대한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승상(丞相) 진평(陳平)의 건의에 따라 회유책으로 전환했다. 문제는 조도의 조상 묘지를 정비하고, 묘지를 지키는 사람을 두어 매년 제사를 지내게 하거나, 조도의 형제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하사하는 등 다시 조도의 귀순 공작을 벌였고, 고조 유방 시대에 남월과의 협상을 담당했던 육가를 복직시켜 다시 남월에 파견하여 조도를 설득한 결과, 조도는 결국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한에 대한 귀순을 표명하고 다시 "남월왕"을 자칭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경제(景帝)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도는 대외적으로는 한나라 신하를 자칭하며, 매년 봄가을에는 사신을 장안(長安)에 파견하여 황제의 조견(朝見)을 받았다. 그러나 '''남월 내부에서는 황제의 칭호가 여전히 사용'''되었다.
기원전 137년, 조타(趙佗)가 사망하였는데, 백 세가 넘는 고령이었기 때문에, 친자들은 모두 조타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위는 손자인 조흔(趙眜)(조호(趙胡))이 계승하였다. 조흔이 즉위한 지 2년 후인 기원전 135년, 민월(閩越)이 왕위 계승으로 불안정한 남월(南越)의 변방 성읍을 공격하였다. 조흔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 민심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민월의 남월 공격을 설명하고, 한(漢)나라의 사건 처리를 요청하였다. 무제는 조흔의 행동을 책봉 체제의 구현으로 여기고, 왕회(王恢)·한안국(韓安國) 두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민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남령(南嶺)에 이르기 전에, 민월왕 주영(騶郢)의 동생 주여선(騶余善)이 반란을 일으켜 주영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귀순하였으므로, 토벌 계획은 중지되었다.
무제는 주여선을 새로운 민월왕으로 봉하고, 중대부 엄조(嚴助)를 남월국에 파견하여 민월의 국내 정세를 조흔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조흔은 이 고지를 듣고 무제에게 사의를 표명하고, 태자 조영제(趙嬰斉)를 입조시키기로 결정하고, 자신도 시기를 보아 한나라에 입조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엄조가 귀국하자, 남월국의 대신들이 조타의 유훈을 근거로 조흔에게 자신이 한나라에 입조하면 무제에게 구금될 우려가 있으며, 망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간하였다. 결국 조흔은 남월을 통치한 12년 동안, 병을 이유로 입조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 병에 걸린 조타(趙眜)는 무제에게 한(漢)에서 숙위(宿衛)를 담당하고 있던 아들 조영제(趙嬰斉)의 귀국을 요청했다. 같은 해 조타가 죽자 조영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영제는 입조(入朝) 이전에, 남월(南越)에서 남월인(南越人)의 아내를 맞이하여 장남인 조월(趙越)을 낳았다. 한편 장안(長安)에서도 감단곡가(邯鄲樛家)의 여자인 곡씨(樛氏)를 맞이하여 아들 조흥(趙興)을 낳았다. 조영제가 남월왕(南越王)의 왕위를 계승한 후, 무제에게 곡씨의 책후(立后)와 조흥의 책태자(立太子)를 상주(上奏)했다. 무제는 이 상주를 받아들였지만, 이 책태자극(立太子劇)은 미래 남월국의 쟁란의 화근이 되었다. 조영제는 폭군이었으며, 사람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무제는 남월국에 자주 사자를 파견하여 조영제에게 장안으로의 입조를 요구했지만, 무제에 의해 장안에 머물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병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대신 막내아들 조차공(趙次公)을 입조시켜 숙위를 맡겼다.
기원전 115년, 조영제(趙嬰斉)가 병사하자 태자인 조흥(趙興)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어머니는 구씨(樛氏) 상왕태후였다. 기원전 113년, 무제는 안국소기(安國少季)를 남월(南越)로 사신으로 파견하여 조흥과 구태후에게 내지의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무제의 조현을 받도록 명령했다. 당시 조흥은 어렸고, 구태후는 중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월국의 실권은 승상 여가(呂嘉)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구태후는 조영제와 혼인하기 전에 안국소기와 사통했고, 안국소기가 남월에 사신으로 도착하자 다시 사통하여 이로 인해 구태후는 남월에서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구태후는 민심 이탈이 전란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나라의 위세를 빌려 조흥과 신하들에게 한나라에 귀속될 것을 설득하고, 사신을 통해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내지 제후의 예에 따라 3년에 한 번 장안에 입조하여 무제의 조현을 받고, 또한 한나라와의 국경 요새를 철거하겠다고 청했다. 무제는 남월의 청을 받아들여 남월국 승상, 내사, 중위, 태부 등의 관인을 제작하고, 그 외 관직을 남월국에 설치하기로 했다. 이는 한나라가 직접 남월국의 고급 관료를 임면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무제는 남월국에서 시행되던 형벌 중 黥刑과 劓刑 등을 야만적인 풍습이라 하여 폐지하고, 한나라 법률을 적용했으며, 남월에 파견한 사신을 남월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게 하여 남월 국내의 안정화를 도모했다. 무제의 칙령을 받은 조흥과 구태후는 즉시 입조 준비에 착수했다.
남월국의 승상 여가는 당시 상당한 고령이었지만, 조전(趙眜), 조영제(趙嬰斉) 시대부터 조흥(趙興)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남월왕을 보필했고, 또한 종족 70여 명이 관직에 있었으며, 더욱이 남월 왕실과의 혼인 관계로 국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고 주변으로부터도 신뢰를 받아 남월국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여가는 한나라에 귀순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조흥은 이러한 독립 지향과 사대 지향의 대립을 처리할 수 없었고, 또한 여가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생각하여, 병을 핑계로 한나라 사신과의 면회를 거부하며 문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조흥과 구태후는 여가가 먼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연회 자리에 한나라 사신과 여가를 초청하여, 한나라 사신에 의해 여가와 주변 인물을 살해할 것을 계획했다. 연회에서 태후는 여가가 한나라에 귀속되지 않는 것을 비난했고, 그 말에 동조한 한나라 사신에 의해 살해될 것을 기대했으나, 여가의 동생 정(正)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 밖에 대기하고 있었고, 안국소기 등 사신들도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가는 상황의 이상함을 알아채고 궁궐을 빠져나갔고, 이에 분노한 구태후는 창을 들고 추격하려 했으나 조흥에 의해 저지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여가는 동생의 병사 일부를 집 수비에 사용하고, 병을 이유로 다시 조흥과 사신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신들과 밀회를 거듭하며 반란 준비에 착수했다.
무제는 남월 정권에 위기가 발생한 것을 알자, 안국소기 등 사신들의 무능함을 질책하고, 동시에 조흥과 구태후가 이미 한나라에 귀순한 것을 확인하고, 여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기원전 112년, 한천추(韓千秋)와 구태후의 동생 구락(樛樂)에게 군사 2천 명을 주어 남월로 향하게 했다. 한천추와 구락이 남월에 진입하자 여가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여가는 먼저 조흥이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중원 출신 구태후가 한나라 사신과 음모를 꾸며 한나라에 귀속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남월국의 사직을 돌보지 않고 한 황제의 은총만을 바라고 있다고 비난하며, 동생과 함께 왕궁을 공격하여 조흥, 구태후와 한나라 사신을 모두 살해했다.
2. 4. 남월국의 멸망
혜제(재위: 기원전 195년~기원전 188년)가 집권한 기간 동안 한나라 왕조와 남월국의 우호적 왕래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혜제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뜨자 고제의 황후인 여후(呂后)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다. 여후 집권기의 전반 4년간은 한나라와 월나라의 관계가 여전히 그런대로 현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5년째 되던 해(기원전 183년) 봄, 한나라와 월나라 간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74] 조타(찌에우 다)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수시로 한과 전쟁을 벌였다. 조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양쪽이 대등한 전쟁을 벌였으나, 그의 사후 남월국 내부에서는 중국인 집단과 토착 세력 간의 분열이 진행되었고, 한나라에서는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가 즉위하여 강성해졌다. 기원전 111년, 남월국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 위치에는 9군이 설치된다.
기원전 115년, 조영제(趙嬰斉)가 병사하자 태자인 조흥(趙興)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어머니는 구씨(樛氏) 상왕태후였다. 기원전 113년, 무제는 안국소기(安國少季)를 남월로 사신으로 파견하여 조흥과 구태후에게 내지의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무제의 조현을 받도록 명령했다. 당시 조흥은 어렸고, 구태후는 중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월국의 실권은 승상 여가(呂嘉)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구태후는 조영제와 혼인하기 전에 안국소기와 사통했고, 안국소기가 남월에 사신으로 도착하자 다시 사통하여 이로 인해 구태후는 남월에서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구태후는 민심 이탈이 전란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나라의 위세를 빌려 조흥과 신하들에게 한나라에 귀속될 것을 설득하고, 사신을 통해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내지 제후의 예에 따라 3년에 한 번 장안에 입조하여 무제의 조현을 받고, 또한 한나라와의 국경 요새를 철거하겠다고 청했다.
무제는 남월의 청을 받아들여 남월국 승상, 내사, 중위, 태부 등의 관인을 제작하고, 그 외 관직을 남월국에 설치하기로 했다. 이는 한나라가 직접 남월국의 고급 관료를 임면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무제는 남월국에서 시행되던 형벌 중 黥刑과 劓刑 등을 야만적인 풍습이라 하여 폐지하고, 한나라 법률을 적용했으며, 남월에 파견한 사신을 남월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게 하여 남월 국내의 안정화를 도모했다. 무제의 칙령을 받은 조흥과 구태후는 즉시 입조 준비에 착수했다.
남월국의 승상 여가는 당시 상당한 고령이었지만, 조전(趙眜), 조영제 시대부터 조흥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남월왕을 보필했고, 또한 종족 70여 명이 관직에 있었으며, 더욱이 남월 왕실과의 혼인 관계로 국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고 주변으로부터도 신뢰를 받아 남월국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여가는 한나라에 귀순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조흥은 이러한 독립 지향과 사대 지향의 대립을 처리할 수 없었고, 또한 여가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생각하여, 병을 핑계로 한나라 사신과의 면회를 거부하며 문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조흥과 구태후는 여가가 먼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연회 자리에 한나라 사신과 여가를 초청하여, 한나라 사신에 의해 여가와 주변 인물을 살해할 것을 계획했다. 연회에서 태후는 여가가 한나라에 귀속되지 않는 것을 비난했고, 그 말에 동조한 한나라 사신에 의해 살해될 것을 기대했으나, 여가의 동생 정(正)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 밖에 대기하고 있었고, 안국소기 등 사신들도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가는 상황의 이상함을 알아채고 궁궐을 빠져나갔고, 이에 분노한 구태후는 창을 들고 추격하려 했으나 조흥에 의해 저지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여가는 동생의 병사 일부를 집 수비에 사용하고, 병을 이유로 다시 조흥과 사신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신들과 밀회를 거듭하며 반란 준비에 착수했다.
무제는 남월 정권에 위기가 발생한 것을 알자, 안국소기 등 사신들의 무능함을 질책하고, 동시에 조흥과 구태후가 이미 한나라에 귀순한 것을 확인하고, 여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기원전 112년, 한천추(韓千秋)와 구태후의 동생 구락(樛樂)에게 군사 2천 명을 주어 남월로 향하게 했다. 한천추와 구락이 남월에 진입하자 여가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여가는 먼저 조흥이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중원 출신 구태후가 한나라 사신과 음모를 꾸며 한나라에 귀속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남월국의 사직을 돌보지 않고 한 황제의 은총만을 바라고 있다고 비난하며, 동생과 함께 왕궁을 공격하여 조흥, 구태후와 한나라 사신을 모두 살해했다.
3. 지리
남월은 지리적으로 다양한 지역을 포함했다. 북쪽으로는 남령(南嶺) 산맥을 경계로 장사국(長沙國)과 접했고, 동쪽으로는 민월국(閩越國)과 경계를 이루었다. 남쪽으로는 현재 베트남 중부의 장산산맥(長山山脈)과 대령(大嶺) 이북 지역까지 뻗었으며, 서쪽으로는 야랑국, 무렴국, 구정국 등과 국경을 접했다.[34]
남월국의 영토는 오늘날의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대부분과 푸젠성, 후난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일부, 그리고 베트남 북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34]
3. 1. 영역
남월의 초기 영역은 북쪽으로는 남령(南嶺) 지역에 이르렀는데,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북부 삼강(三江), 용승(龍勝), 흥안(興安), 공성(恭城), 가주(賀州) 및 광둥성 북부 연산(連山), 양산(陽山), 낙창(樂昌), 남웅(南雄), 연평(連平), 화평(和平), 초령(蕉嶺)을 포함한다. 이곳은 대부분 당시 장사국(長沙國)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현재의 푸젠성 서부 영정(永定), 평화(平和), 장포(漳浦) 일대이며, 민월국(閩越國)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현재의 베트남 중부 장산산맥(長山山脈) 및 대령(大嶺) 이북 지역이었다. 서쪽으로는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백색(百色), 덕보(德保), 파마(巴馬), 동란(東蘭), 하지(河池), 환강(環江) 일대이며, 야랑국, 무렴국, 구정국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34]
남월국의 영토는 오늘날의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대부분과 푸젠성, 후난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일부, 그리고 베트남 북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34]
남월의 군(郡)과 알려진 현(縣)
남월국의 최대 영토
남월은 원래 진나라의 南海, 桂林, 湘 3군으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179년 이후, 조타(趙佗)는 민월(閩越), 옛랑(夜郎), 동시(同師) 등을 남월의 지배하에 두도록 설득했지만, 이들은 남월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다. 전한이 남월을 정복한 후, 남월의 영토는 남해, 창오(蒼梧), 유림(鬱林), 합포(合浦), 교지(交趾), 구진(九真), 日南 등 7군으로 나뉘었다. 전통적으로 진나라의 남방 정복에는 베트남 북부 지역 절반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지역 또한 남월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진나라가 현재 베트남 지역을 정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중국의 지배는 남월 자체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34]
3. 2. 행정 구역
남월국은 진나라의 남해군(南海郡),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3군을 기초로 하여 건국되었다. 건국 후, 조타는 진의 군현제를 답습하였다. 군을 설치할 때, 조타는 남해군과 계림군은 변경하지 않고, 상군을 교지군과 구진군으로 분할했다. 남해군은 대략적으로 현재의 광둥성의 대부분을 포함한 영역이며, 진나라 때 설치된 번우(番禺), 용천(龍川), 박라(博羅), 게양(掲陽) 4현 외에, 새로 정양(湞陽), 함광(含洭) 등 2현을 설치했다.[35] 그 중 현재의 광저우시 웨슈 구(廣州市 越秀區)에 위치한 번우현을 남해군의 중심지로 삼아 남월국의 궁전도 건축되었다. 1983년, 이 장소에서 남월 문왕 조말(南越 文王 趙眜)의 능묘가, 1995년과 2000년에는 남월국 궁서어화원과 궁전의 옛 건축물의 잔존물이 발굴되어 궁궐의 규모를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조모의 묘 출토 갑옷과 복제품
계림군은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의 대부분을 포함한 지역이며, 그 아래에 포산(布山), 사회(四会) 등 2개의 현이 설치되었다. 그 중 포산현(布山)은 계림군의 중심지이며,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구이강(貴港)에 비정되고 있다. 1976년, 구이강에는 라백만 1호 무덤이 발굴되어 고고학 조사에 의해 계림군의 고관으로 추정되고 있다. 교지군과 구진군은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서 중부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부 행정 구역은 상림현(象林縣)이 알려져 있을 뿐이어서 자세한 것은 불분명하다.
남월국의 영토는 오늘날 광둥성(廣東省),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대부분과 복건성(福建省), 호남성(湖南省), 귀주성(貴州省), 운남성(雲南省)의 일부, 그리고 베트남 북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다.
3. 3. 민족
남월의 주민 대다수는 고월족에서 유래한 토착 주민이었으며, 이 외에도 중원에서 온 수십만 명의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월족은 남월, 서오(西甌), 낙월 등의 지계로 나뉘어 있었다. 남월은 광둥성 동북부, 중부 및 광서장족자치구 동부 일대에, 서오는 광서 서강 중류 지역 및 귀강 유역과 베트남 지역에, 낙월은 광서장족자치구 좌강·우강 유역 및 베트남 홍강 삼각주, 귀주성 서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다.[29]
조타(趙佗)는 和輯百越중국어 정책을 추진하여 현지 월족과 한족 이주민 간의 화합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한족과 월족 문화의 융합을 목표로 했다.[42]
초기에는 한족이 지도층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월족 출신 관리들이 늘어났다. 특히 "복잡한" 지역에서는 월족 족장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다.[42]
조타의 지도 아래, 한족 이주민들은 월족의 관습을 받아들였고, 두 민족 간의 결혼도 흔해졌다. 왕실에서도 한족과 월족 간의 결혼이 이루어졌다.[42]
이러한 민족 융합 정책은 남월국의 안정, 경제 발전, 문화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5. 1. 군사 제도
남월의 군대는 대부분 진(秦)나라가 침략했던 수십만 명(최대 50만 명)의 진나라 군인들과 그 후손들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204년 왕국이 건국된 후, 일부 백월(百越) 주민들도 군대에 합류하였다. 남월의 군 장교들은 장군, 좌장군, 교위(校, 소령), 위(尉, 대위) 등으로 불렸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중국식 계급 체계와 동일했다. 군대는 보병, 해군, 기병으로 구성되었다.[41] 남월국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당시 무기를 추정해 보면, 무기는 청동 또는 철로 제작되었으나, 철은 귀한 물품이었던 듯 청동제 무기가 주류였다. 무기 종류로는 검, 창, 화살촉이 확인된다.
광서(廣西)의 무덤에서 발굴된 청동검. 전국(戰國) 말기 또는 남월(南越) 초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5. 2. 민족 정책
조타(趙佗)는 진나라의 정책을 계승하여 현지 월족과 한족 이주민 간의 화합을 위한 "화집백월(和輯百越)"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한족과 월족 문화의 융합을 목표로 했다.[42]
초기에는 한족이 지도층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월족 출신 관리들이 늘어났다. 남월의 마지막 재상인 여가(呂嘉)는 월족 출신이었고, 그의 친족 70명 이상이 관리로 일했다. 특히 "복잡한" 지역에서는 월족 족장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다.[42]
조타의 지도 아래, 한족 이주민들은 월족의 관습을 받아들였고, 두 민족 간의 결혼도 흔해졌다. 왕실에서도 한족과 월족 간의 결혼이 이루어졌는데, 마지막 왕인 조건덕(趙建德)은 조영기(趙嬰齊)와 월족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42]
이러한 민족 융합 정책은 남월국의 안정, 경제 발전, 문화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6. 외교
남월은 주변국들과 다양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한나라와는 조공과 책봉을 통해 복속 관계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을 빚으며 대립하기도 했다. 기원전 196년 한 고조는 육가(陸賈)를 보내 조타를 남월왕으로 책봉하여 처음 복속 관계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183년 여후(呂后)의 철 등 물자 수출 금지로 인해 조타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기원전 179년 문제의 회유책으로 조타는 다시 한나라에 복속되었으나, 남월 내부에서는 여전히 황제 칭호가 사용되었다.[46] 기원전 135년 민월의 공격에 조흔이 무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한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이후 남월은 한나라에 종속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기원전 112년 승상 여가(呂嘉)의 반란으로 한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창사국은 한나라의 제후국으로, 남월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창사국은 독자적인 외교권이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대(對) 남월 정책에 따라 남월과의 관계가 결정되었다.[1][2]
민월과의 관계는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에는 대등한 관계였으나, 남월이 한나라를 격퇴한 후에는 남월에 복속되기도 했다. 기원전 135년 민월이 남월을 공격하고, 이후 다시 한나라에 복속되면서 양국은 다시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
이족의 여러 부족들은 남월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남월이 한나라를 처음 격퇴한 후 대부분 남월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 관계는 기원전 111년 남월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3]
6. 1. 한나라와의 외교
기원전 196년, 한 고조는 육가(陸賈)를 남월에 파견하여 조타를 남월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로써 남월은 한나라에 처음 복속되었으며, 기원전 183년까지 13년간 이 관계가 유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남월은 남쪽의 진귀한 물건을 조공으로 바쳤고, 한나라는 철기, 말, 소 등을 남월에 제공하며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국은 국경을 삼엄하게 경비하였다.[45]
기원전 183년, 여후(呂后)가 남월에 대한 철 등의 물자 수출을 금지하면서 남월은 처음으로 한나라에 반항하였다. 조타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창사국을 공격했으며, 한나라는 군대를 파견했으나 남월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로 인해 남월은 주변국인 민월과 험양의 존중과 복속을 받았다.[46]
기원전 179년, 문제가 즉위한 후 한나라는 회유책으로 전환하였다. 문제는 조타의 조상 묘지를 정비하고 형제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하사하는 등 조타의 귀순을 유도했다. 육가를 다시 남월에 파견하여 설득한 결과, 조타는 황제 칭호를 버리고 한나라에 다시 복속하여 남월왕을 자칭하였다. 그러나 남월 내부에서는 여전히 황제 칭호가 사용되었다.
기원전 137년, 조타가 사망하고 손자 조흔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기원전 135년, 민월이 남월을 공격하자 조흔은 무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무제는 군대를 파견하였고, 민월왕 주영(騶郢)의 동생 주여선(騶余善)이 반란을 일으켜 주영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귀순하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기원전 122년, 조흔이 사망하고 아들 조영제(趙嬰斉)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조영제는 한나라에서 곡씨(樛氏)를 맞이하여 아들 조흥(趙興)을 낳았고, 무제에게 곡씨와 조흥의 책봉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조영제는 자주 한나라 사신의 입조 요구를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하고, 대신 막내아들 조차공(趙次公)을 입조시켰다.
기원전 115년, 조영제가 사망하고 조흥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기원전 113년, 무제는 안국소기(安國少季)를 파견하여 조흥과 구태후에게 조현을 받도록 명령했다. 남월국의 실권은 승상 여가(呂嘉)가 쥐고 있었고, 구태후는 안국소기와 사통하여 남월에서 신뢰를 잃었다. 구태후는 한나라에 귀속될 것을 설득하고,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내지 제후의 예에 따를 것을 청했다. 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남월국의 관직을 설치하고 형벌을 폐지하는 등 직접 통치를 강화했다.
여가는 한나라 귀속에 반대하였고, 조흥과 구태후는 여가를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기원전 112년, 여가는 반란을 일으켜 조흥, 구태후, 한나라 사신을 모두 살해했다.
6. 2. 창사국과의 외교
장사국은 당시 한나라에 속한 제후국이었다. 그 영토는 현재의 후난성 대부분과 장시성 일부를 포함했다. 한 고조가 오뢰를 초대 장사왕으로 봉하면서 남해(南海), 상(湘), 귀릉(桂陵) 3군의 통치권까지 부여했는데, 이 때문에 장사와 남월 사이에는 처음부터 갈등이 발생했다.[1] 한나라와 남월의 국경은 사실상 장사국의 국경과 일치했으므로 양쪽 모두 국경을 계속해서 강화했다. 정책 측면에서 장사국은 어떠한 자주권도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 조정의 남월에 대한 정책은 자동적으로 장사국의 정책이 되었다.[1]
창사국(長沙国)은 남월국의 북쪽에 위치했으며, 유방(劉邦)이 초대 창사왕 오예(呉芮)를 봉할 때 남월국이 실제로 통치하던 남해군(南海郡),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3군도 오예에게 분봉된 데서 기인하여, 창사국과 남월국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창사국은 한나라의 제후국이었으며, 한나라의 남월국에 대한 정책과 외교에 따라 창사국의 남월국에 대한 정책이 결정되었고, 자주적인 외교는 거의 없었다.[2]
6. 3. 민월과의 외교
민월은 중국 남동부 해안을 따라 남월의 북동쪽에 위치했으며, 오늘날 푸젠성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민월은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 군대에 패했고, 그 지역은 진나라의 통치 아래 민중군으로 조직되었으며, 민월의 지배자 무주는 폐위되었다. 진나라 멸망과 한나라 건국 후 무주가 유방을 지지했기 때문에 기원전 202년 한나라 조정에 의해 민월왕으로 복위되었다.
남월과 민월의 관계는 세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기원전 196년부터 기원전 183년까지로, 조타가 처음으로 한나라에 복속했던 시기이며, 두 왕국은 비교적 대등한 입장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기원전 183년부터 기원전 135년까지로, 민월은 한나라가 남월을 처음 공격했을 때 남월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남월에 복속했다.
세 번째 단계는 기원전 135년에 왕영왕이 약화된 남월을 공격하여 조모로 하여금 한나라에 원조를 요청하게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민월은 다시 한나라에 복속하여 남월과 다시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6. 4. 서남 제국과의 외교
이족은 남월의 서쪽에 거주했으며, 염랑, 오련, 주정 등 여러 지역에서 남월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염랑은 이족의 가장 큰 국가였으며, 현재의 귀주성, 운남성 대부분과 사천성 남부를 포함했다. 일부 학자들은 고대 이족이 백월과 관련이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염랑과 남월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남월이 한나라를 처음으로 격퇴한 후, 거의 모든 이족 부족들이 남월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대부분은 기원전 111년 남월이 멸망할 때까지 그 충성심을 유지했다. 한무제가 남월을 최종적으로 공격하는 동안, 대부분의 이족 부족들은 침공을 돕기를 거부했다. 결란이라는 한 부족장은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나아가 한나라에서 그의 영토로 파견된 사신과 건위군에 주둔한 태수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한나라 초 서남쪽 이민족 국가로는 야랑, 무렴, 구정을 들 수 있다.[3] 그중에서도 야랑은 서남 지역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의 귀주성, 운남성 및 사천성 남부 일대를 지배했다.[3] 기원전 183년, 조도가 한나라의 공격을 격퇴하자, 야랑은 지배하던 서남 이민족 국가들을 모아 남월국에 귀순했고, 그 관계는 남월국의 멸망까지 지속되었다.[3] 하지만 이 귀속 관계는 매우 느슨한 것이었으며, 남월국의 지배권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3]
7. 경제
남월은 농업, 수공업, 상업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영위했다.
전국시대 영남 지역은 벼농사를 지었지만, 석기나 청동기 농기구를 사용하여 생산성이 낮았다. 진의 시황제가 영남을 정복한 후, 중원의 철제 농기구와 선진 농업 기술이 유입되어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다.[1]조타는 농업 발전에 힘쓰고 장사국과의 교역을 통해 철제 농기구와 가축을 수입했다. 여후의 경제 봉쇄로 교역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곧 회복되어 남월국 멸망까지 이어졌다.[1]
남월국의 무덤에서는 써레, 괭이, 호미, 낫, 도끼 등 다양한 철제 농기구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철 자원과 가공 기술 부족으로 철제 농기구는 중원 수입에 의존했고, 보급은 도성과 군현 중심지에 한정되었다. 지방에서는 여전히 석기, 청동기가 사용되었다.[1] 주요 곡물로는 벼, 기장, 수수, 두 등이, 과일로는 감귤, 복숭아, 라이치 등이 재배되었다. 특히 벼는 고월인의 주식이었고, 라이치는 영남 지역 특산물로 유방에게 진상되기도 했다.[1]
동판
춘추시대부터 영남 지역에는 원시적인 청동 주조 기술이 있었지만, 진시황의 통일 이후 중원 기술이 전래되면서 청동기 사용이 크게 늘었다. 남월왕릉 등에서는 다양한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남월국에서 주조된 것이다. 철기는 진시황 통일 이후 대량으로 나타났고, 남월국 시대에는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철광 자원이 부족하여 중원 수입이나 재활용에 의존했다.
남월국 무덤에서는 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옥기 제작도 발달했다. 사루옥의(絲縷玉衣), 청백옥각배(青白玉角杯) 등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었으며, 원료는 국내산과 해외 수입품을 모두 사용했다. 금은 세공, 방직, 칠기 등도 발달했으며, '''문제행씨용뉴금인(文帝行璽龍紐金印)''' 등 유물을 통해 기술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진 이전 영남 지역은 물물교환 경제였으나, 진의 통일 이후 중원 상인들이 화폐 경제를 도입했다. 남월국은 주변 지역 및 중원과 활발히 교역했으며, 기원전 196년 한나라와 교류가 시작되면서 반량전이 주요 화폐로 유통되었다. 해상 교역도 발달하여, 광저우시에서는 해상 실크로드의 조선소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7. 1. 농업
전국시대에는 영남 지역에서 수도 재배 등의 농경 활동이 이루어졌지만, 당시에는 석기나 청동기 농기구를 사용하는 간단한 방식이었으며,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중원 지역과 비교하여 생산성이 떨어졌다. 진의 시황제가 영남을 정복한 후, 50만 대군을 영남에 주둔시키고 중원에서 다량의 이민자를 이주시켜, 이들 이민자에 의해 중원의 철제 농기구와 선진적인 농업 기술이 유입되어 영남의 농업 생산 수준을 끌어올렸다.[1]
진의 군장이자 남월국의 건국 군주가 된 조타는 농업 발전에 중점을 두고 농업 생산 기술 향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사국과의 국경에 시장을 설치하고, 장사국을 통해 중원의 철제 농기구와 말, 소, 양 등의 가축 수입을 도모했다. 한때 여후에 의한 남월국의 경제 봉쇄로 교역이 중단된 적이 있었지만, 여후의 사망과 함께 교역은 회복되었고, 그 경제 교류는 남월국 멸망까지 이어졌다.[1]
남월국의 무덤에서 출토된 철제 농기구로는 써레, 괭이, 호미, 낫, 도끼, 끌, 손삽, 줄, 송곳, 긁개, 망치, 정 등이 확인되고 있다. 써레는 농경 시 잡초를 제거하고 흙을 갈아엎는 데 사용되는 상용 농기구였다. 괭이는 흙을 깊이 파는 농기구이며,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농작물의 뿌리를 캐내는 데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농작물을 수확하는 데 사용한 낫, 나무를 베는 데 사용한 도끼 등 수많은 철제 농기구를 도입함으로써 남월국의 농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남월국은 철 자원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가공 기술도 미숙했기 때문에 철제 농기구는 중원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내에서의 철제 농기구 보급은 더뎠으며, 도성과 군현의 중심지 및 그 주변에 한정하여 보급되는 데 그쳤고, 지방에서는 석기, 청동기의 사용이 주류였다.[1]
남월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중 주요 곡물로는 벼, 기장, 수수, 두, 의미, 고구마, 삼 등이 있으며, 과일로는 감귤, 복숭아, 자두, 라이치, 감람, 오람, 인면자, 참외, 목과, 오이, 표주박, 생강, 초피, 매실, 양매, 산조 등이 확인되고 있다. 그중 벼는 고월인의 주식이었고, 영남 지역은 고온다습한 기후 조건이었기에 벼농사에 적합했던 만큼 남월국 전역에서 재배되었다. 라이치는 영남 지역의 특산물이며, 전한유흠이 지은 『서경잡기』에는 조타가 유방에게 라이치를 진상한 기록이 있다. 또한 무덤에서는 적지 않은 주기가 출토되어 당시 남월국에서는 주조 기술이 발달했음을 보여준다.[1]
돼지, 소, 양, 닭 등도 무덤에서 출토되었고, 그 외에 야생 동물로는 화화작(シマアオジ), 대나무쥐 등도 출토되었다. 화화작은 현재 광동에서도 즐겨 먹는다. 이 외에도 어업도 성행했으며, 해수 및 담수의 어패류도 다량 출토되었다.[1]
7. 2. 수공업
영남 지역에서는 적어도 춘추시대에 이미 청동기가 사용되었고, 원시적인 청동 주조 기술이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청동기 사용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진시황이 영남을 통일하고 중원에서 청동기 주조 기술이 전래된 후에야 발전하여 사용하는 청동기의 종류와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남월왕릉(南越王墓)과 랍박만 1호묘(羅泊灣1號墓)에서는 각각 500점과 200점이 넘는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청동기는 일부 병기와 일용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남월국에서 주조된 것이며, 구규(勾鑃), 월식 동鼎, 제통(提筒), 향로, 북, 항아리 등의 종류가 확인되고 있다.
영남 지역의 철기는 진시황에 의한 통일 이후에 대량으로 출현하였다. 남월국 시대에는 철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남월왕릉에서는 246점의 농기구, 공구, 무기 등 다양한 철기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남월국 내 철광 자원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 재료는 중원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거나, 또는 철제품의 재활용에 의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월국의 무덤 부장품으로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이 토기이다. 남월왕릉에서는 991점이 출토되었으며, 실제 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 외에도 부장품으로서의 명기, 벽돌과 기와 등도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는 남월국에서 제작된 것이며, 독특한 양식은 기하인문토기라고 불린다.
또한 남월국에서는 옥기 제작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남월왕릉에서는 244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옥기는 의례용, 매장용, 장식용 등으로 분류되며, 다양한 양식의 것이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유명한 출토품으로는 사루옥의(絲縷玉衣), 청백옥각배(青白玉角杯), 승반고족배(承盤高足杯), 옥벽(玉璧), 용호병체옥대구(龍虎並體玉帶鉤), 용문중환옥패(龍紋重環玉佩) 등이 있다. 이들은 남월국 내에서 가공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원료는 국산품 외에도 대부분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였다.
상기 수공업 이외에도 남월국에는 금은 세공, 방직, 칠기 등의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그것은 남월왕릉에서 출토된 '''문제행씨용뉴금인(文帝行璽龍紐金印)''', '''태자구뉴금인(太子龜紐金印)''', '''호두금구함옥용(虎頭金鉤銜玉龍)''', '''금대구(金帶鉤)''' 등에 의해 당시 기술을 엿볼 수 있다.
7. 3. 상업
진 이전, 영남 지역은 물물교환의 원시적인 경제 상태였으며, 화폐 경제는 도입되지 않았다. 진의 영남 통일 이후 중원에서 많은 상인들이 이곳에 와서 중원의 교역 방식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점차 화폐 경제가 침투해 들어갔다. 남월국 건국 후 역대 국왕은 주변 지역 및 중원과의 교역을 활발히 하였고, 기원전 196년에 남월국과 한나라의 교류가 시작되자 조타는 남월국과 장사국의 경계에 관시(關市)를 설치하고, 중원으로부터 철기, 청동기 등의 교역을 통해 선진적인 기술을 도입하는 동시에 중원에 비취, 산호, 거북등껍질, 라이치 등의 특산품을 수출하였다. 당시 남월국에서 사용되었던 화폐는 모두 중원에서 수입된 것이었고, 남월국 고유의 화폐는 주조되지 않았다. 당시 유통되던 주요 화폐는 진나라부터 한나라에 걸쳐 유통된 반량전이었다.
이러한 육상 교역 이외에도 남월국에서는 해상 교역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현재 광저우시 중산사로의 진한 시대 조선소 유적이 발굴되었고, 조사에 따르면 번우에서는 하천 및 연안 항해를 할 수 있는 조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었다. 당시 남월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더 나아가 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상아와 유향 등의 교역을 하였고, 후에 이러한 항로는 '''해상 실크로드'''라고 불리게 되었다.
8. 문화
광저우에서 발굴된 조무(趙佗) 왕릉의 유물에서 보이듯이 한족 문화와 남월 문화는 상당한 방식으로 융합되었다. 광저우의 남월왕릉은 매우 풍부한 유물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 초, 월, 오르도스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보여주는 많은 청동기가 있다.[63]
8. 1. 언어와 문자
고대 중국어 외에도, 남월 원주민들은 현재 멸종된 고대 월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현대 장족어와 관련된 언어를 사용했다고 제안한다. 다른 학자들은 그 후손들이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을 사용했다고 제안한다.[43] 월족이 하나 이상의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다. 이 지역의 고대 중국어는 월족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대 학자들은 중국어에 많은 차용어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44]
로보완 1호분에서 출토된 청동북. 오른쪽 상단 확대 사진은 을 보여준다. 오른쪽 하단 확대 사진은 낚시하는 왜가리와 여러 명의 새 사람 모양의 인물을 보여준다.
남월국에서는 중국 중원에서 이주한 수십만 명의 한인(漢人)들이 고한어(古漢語)를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남월, 서오, 낙월 등의 주민 대부분은 고월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중국 동부 및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타이-카다이어족은 고월어의 후예로 여겨지며, 현재의 광동어의 조형(祖形)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문자에 관해서는 중원에서 온 이주민들이 가져온 한자를 사용했다. 남월왕릉(南越王墓)과 광서(廣西) 로박만(羅泊灣) 1호묘에서는 예서를 새긴 인장과 동기, 은기, 도기 등이 출토되었다.
8. 2. 음악과 무용
남월국의 무덤에서는 많은 악기가 출토되어 당시 음악과 무용이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타악기로는 종(鐘), 경(磬), 구거(勾鑃), 나(鐃), 동고(銅鼓) 등이, 현악기로는 금(琴), 슬(瑟) 등이, 관악기로는 피리 등의 종류가 확인되고 있다. 특색 있는 악기로는 동고가 있으며, 악기로 사용되는 것 외에도 유력자의 권력과 재산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 지역에서는 다수 출토되고 있다. 또한 남월국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많은 부분에 남월 무용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으며, 연구에 따르면 월무(越舞)와 한무(漢舞) 두 종류가 존재했고, 월무를 묘사한 유물이 많으며, 상로무(翔鷺舞), 우무(羽舞), 무무(武舞), 노죽무(蘆竹舞) 등이 있으며, 한무는 장소무(長袖舞)의 한 종류가 확인되고 있다.[1]
남월국의 남월, 서오, 낙월 주민들은 독특한 풍속을 지녔다. 중원(中原) 한인(漢人)의 신체와 모발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관념과는 달리, 남월에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여러 가지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있었다. 남월국은 바다에 접해 있어 어업이 발달하였고, 어패류를 즐겨 먹었다는 것을 동고(銅鼓)에 그려진 장식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주거는 소거(巢居)와 간란(干欄)이 주를 이루었다. 소거는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지은 것이고, 간란은 많은 기둥으로 건물을 지탱하는 양식의 가옥(고상식 가옥)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뱀, 벌레, 동물의 침입을 막고, 고온다습한 환경에 적응한 것이었다. 간란 건축은 현재에도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건축 양식이다.
순장(殉葬)과 렵수(獵首)(두목 베기) 풍습도 있었다. 남월왕묘(南越王墓)에서는 15구의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남월왕 조탐(趙眜)의 총애하는 후비와 근시들이었으며, 대부분 머리를 타격당한 흔적이 발견된다. 렵수는 출토된 유물에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의 목을 베어 허리에 매단 묘사가 있어 추측할 수 있다.
9. 유적
조조의 무덤
조조의 무덤에서 출토된 옥 잔
조조의 무덤에서 발굴된 용과 봉황이 새겨진 옥 장식판
right
광저우시(廣州市)에 위치한 남월국(南越國) 궁전 유적은 15000m2에 달한다. 1995년 발굴된 이 유적은 고대 남월 궁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1996년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초승달 모양의 연못, 중국식 정원, 그리고 진나라 건축 양식 등이 발견되었다.
1983년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서 남월왕의 고대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후 남월의 두 번째 통치자 조조(趙莫)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이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대부분의 유물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1988년 이곳에 남월왕릉박물관(Museum of the Mausoleum of the Nanyue King)이 건립되어 1,000여 점이 넘는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청동기 500점, 옥기 240점, 금속 유물 246점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남월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996년 중국 정부는 이 유적을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다.
1930년대 베트남 북부 Thanh Hoa에서 "서포후인(胥浦侯印, Seal for Captain of Tu Pho County)"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 인장이 발굴되었다.[47] 남월(南越)의 두 번째 왕 무덤에서 발견된 인장과 유사하여 이 청동 인장은 남월국의 공식 인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동손 문화에 속하는 유물들도 남월(南越)의 두 번째 왕 무덤과 함께 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남월국(南越國)의 유적은 중국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수도가 있었던 광저우시(廣州市)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현재 광저우시에는 남월국궁서유적(南越國宮署遺跡), 남월문왕묘(南越文王墓), 남월국목구수갑유적(南越國木構水閘遺跡), 연화산고채석장(蓮花山古採石場)의 4곳이 국무원으로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護単位)"로 지정되어 있다. 이 외에도 현재까지 250곳의 남월국 묘(墳墓)가 발굴되었다. 광저우시 이외에는 남웅(南雄)의 횡포관(横浦関), 양산(陽山)의 양산관(陽山関), 낙창(樂昌)의 조타성(趙佗城), 인화(仁化)의 진성(秦城) 등이 광둥성에서 발굴되었다. 광시성에서는 귀항(貴港), 하주(賀州), 평락(平樂), 합포(合浦), 오주(梧州), 유주(柳州) 등에서 묘가 발굴되었으며, 그중 중요한 유적(遺跡)으로는 귀항시(貴港市) 로박만(羅泊湾) 1·2호분(墳墓), 하주(賀州) 금종(金鐘) 1호분(墳墓) 등이 있다.
남월국(南越國) 궁서(宮署) 유적은 남월국 왕궁의 유적이며, 광동성(廣東省) 광저우시(廣州市) 월수구(越秀區)에 위치한다. 유적 면적은 150000m2이며, 어화원(御花園) 유적과 궁전 유적 등을 포함하는 전체 명칭이다. 어화원 유적은 1995년에 발견되었으며, 방지(方池), 만월지(彎月池), 곡거(曲渠), 평교(平橋), 보석(步石) 등 궁전 정원의 유적이 출토되었다. 1996년 11월 20일에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點文物保護単位)로 지정되었다. 2006년 6월 11일, 남월국 궁서 유적 중 정비가 완료된 3000m2가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1,000점이 넘는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다.
남월문왕묘(南越文王墓)는 남월국(南越國) 제2대 왕 조탁의 무덤으로, 일반적으로 남월왕묘라고 불린다. 1983년 광동성(廣東省) 광주시(廣州市) 월수구(越秀區) 상강산(象崗山)에서 묘도와 석실이 발견되었다. 부장품으로 1,000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동기 500여 점, 옥기 240여 점, 철기 246점 외에도 금기(金器), 은기(銀器), 도기(陶器)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사루옥의(絲縷玉衣)”와 “문제행새(文帝行璽)” 금인 등이 매우 가치 있는 유물로 주목받고 있다. 능묘에는 15명의 순장자가 확인되었다. 1988년 2월 8일, 능묘터에 “서한 남월왕 박물관(西漢南越王博物館)”이 개설되었고, 1996년 11월 20일에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護単位)로 지정되었다.
羅泊湾1호분은 광시 좡족 자치구 귀항시 라보완 근교에서 1976년에 발견되었다. 대형 수혈목곽묘와 묘도 남쪽의 수레 무덤으로 구성되며, 곽실 아래에서는 순장갱과 기물갱 등이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은 1,000점 이상이며, 7명의 순장자도 확인되어 남월국 계림군의 고급 관리 능묘로 추정된다. 羅泊湾2호분은 1979년에 발견되었으며 묘도를 갖춘 대형 목곽묘이지만, 도굴 피해를 입어 출토 유물은 123점이며, 그 외에 순장자 1명도 확인되었다. 이쪽은 남월국 왕후 일급 관리의 배우자 능묘로 추정된다.
1983년 6월 광둥성 광저우시 상강산에서 조호(문왕)의 무덤이 발견되어 청동제 제기, 악기, 병기, 생산용구, 옥기, 금은기, 상아, 칠기, 비단 직물 등의 부장품 1천여 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문왕과 순장자의 유해와 함께 문왕의 인장으로 추정되는 금인도 발견되었다. 서한 남월왕릉이라고 불린다. 참고로, 조타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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