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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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의 이슬람교는 7세기 중엽에 중국에 전래되었으며, 당 고종 황제는 무함마드를 기리기 위해 광저우에 중국 최초의 모스크인 회성사를 건립하도록 했다. 이슬람교는 당나라의 국제적인 교류와 아랍 상인들의 활동을 통해 중국에 전파되었으며, 당나라 조정은 무슬림들을 위해 번방을 설치하고 이슬람 율법에 따른 재판을 허용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가 아바스 왕조에 패배하면서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는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당나라 말기에는 양주와 광저우에서 무슬림에 대한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이슬람교는 당나라의 회창의 폐불에서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존속했다. 당나라 시대에는 시안 대청진사와 같은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으며,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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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원
중국 무슬림의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이슬람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은 651년에 제3대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이 파견한 사절단을 통해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이 사절단은 무함마드의 동료인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이끌었다고 전해진다.[25][3]
당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구당서에는 651년(영휘 2년)에 '대식국'(大食國, 아랍)에서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이슬람과의 공식적인 첫 접촉으로 본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직접 중국에 왔다는 전승의 증거는 부족하다고 보지만, 이슬람 초기 수십 년 안에 무슬림 외교관과 상인들이 당나라에 도착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25][3]
당시 당나라는 중앙아시아 지역과 활발히 교류하는 등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중국 내 여러 도시에 거주하던 아랍 및 페르시아 출신 상인들의 존재가 초기 이슬람 전파의 배경이 되었다.[25][3]
2. 1. 초기 이슬람과 중국의 접촉
중국 무슬림의 전승에 따르면, 이슬람은 651년 제3대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이 파견한 사절단에 의해 처음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절단은 무함마드의 외삼촌인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이끌었다고 전해지며, 당 고종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광저우에 중국 최초의 모스크인 회성사 건립을 명했다고 한다.[25][3]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와카스 본인이 직접 중국에 왔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보면서도,[25][3] 이슬람 초기 수십 년 내에 무슬림 외교관과 상인들이 당나라에 도착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25][3] 당나라의 국제적인 성격과 중앙아시아와의 활발한 교류는 이미 중국 각지 도시에 거주하던 아랍 및 페르시아 상인 공동체와 더불어 이슬람 전파의 배경이 되었다.[25][3]
당나라의 정사(正史)인 《구당서》에는 651년(영휘 2년) '대식국'(大食國, 아랍)에서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26] 이는 공식적인 첫 접촉으로 간주된다. '대식'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인을 부르던 '타지'(Tazi)를 중국어로 음차한 것이다.[26][5] 이후 713년에도 대식국 사절단의 방문 기록이 있으며,[26][5] 798년까지 총 37회 이상 사절단이 방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712년에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사절이 당 황제 앞에서 절하는 것을 거부하며 "오직 알라에게만 경배한다"고 말한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4]
중국 내 초기 이슬람 정착민들은 주로 아랍과 페르시아 출신 상인들로 구성되었다.[27][6] 당나라 시기 이슬람교는 '대식법'(大食法)으로 불렸으며, 서아시아에서 온 무슬림들은 '호인'(胡人) 또는 '번객'(蕃客) 등으로 지칭되었다.
2. 2. 당과 아바스 왕조의 관계
아랍인들은 당나라(618–907)의 기록에 '대식'(大食)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는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인을 부르던 '타지'(Tazi)를 중국식으로 음역한 것이다.[26][5] 651년(당 고종 2년) 첫 아랍 대사가 당나라 궁정을 방문하면서 양측의 직접적인 접촉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713년의 기록에도 이슬람 세계로부터 사신이 도착했음이 언급되어 있다.[27][6] 중국 내 초기 주요 이슬람 정착지는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로 구성되었다.[27][6]아랍 측 기록에는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이 카슈가르를 잠시 점령했다가 합의 후 철수했다고 주장하지만,[28][7]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29][30][31][8][9][10]
715년, 아랍의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페르가나 계곡의 왕 이크시드를 폐위시키고 알루타르를 새로 왕위에 앉혔다. 폐위된 왕은 쿠차에 있던 당의 안서도호부로 피신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당나라는 장소송 휘하의 병력 10,000명을 페르가나에 파견하여 나망간에서 알루타르와 아랍 점령군을 격파하고 이크시드를 복위시켰다.[32][11] 717년에는 아크수 전투에서 당나라 장군 양가혜가 아랍과 토번(티베트)의 연합 공격을 격퇴했다.[33][12] 이 공격에는 돌기시의 카간 술루크도 가담했다.[34][35][13][14] 717년 8월 15일, 우치투르판과 아크수가 돌기시, 아랍, 토번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아사나헌 휘하의 카를룩 병력과 양가혜가 이끄는 당군이 이를 물리쳤다. 아랍 사령관 알 야슈쿠리(Al-Yashkuri)는 패배 후 타슈켄트로 도주했다.[36][37][15][16]
750년(천보 9년), 당나라 장군 고선지는 타슈켄트 왕이 번신으로서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슈켄트를 공격하여 왕을 살해했다. 타슈켄트 왕자는 아바스 칼리파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아바스 칼리파국은 군대를 파견했다.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 3만 명은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칼리파국 군대와 충돌했다. 5일간의 대치 끝에 당군 일부였던 카를룩이 아바스 칼리파국 측으로 돌아서면서 고선지는 협공을 받아 대패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가 촉진되었으나, 아바스 칼리파국이 중국 본토로 직접 진출하지는 않았다.
탈라스 전투 이후 당과 아바스 칼리파국은 관계를 개선하여 서로 사신을 교환했다. 756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당 숙종은 아바스 칼리파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아바스 칼리파국은 페르시아인과 이라크인으로 추정되는 1,000명 이상의 병력을 간쑤성으로 파견하여 난 진압을 도왔다. 이들은 난이 평정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장안 인근에 정착했다.[17] 안사의 난 중 장안에는 4,000명 이상의 무슬림이 발이 묶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토번이 당나라 서쪽 지역을 점령하면서 육로 교통이 어려워졌지만,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토번의 세력 확장에 맞서기 위해 당과 아바스 칼리파국은 동맹을 맺기도 했다.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766–809)는 장안에 사신을 파견했다.[17] 이러한 외교 관계는 762년 바그다드가 건설된 이후 이슬람 세력이 인도양을 거쳐 동아시아까지 해상으로 진출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수도가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진 후, 바스라와 시라프 같은 항구에서 인도, 말라카 해협을 거쳐 남중국으로 향하는 항로가 활발해졌다. 남중국의 주요 항구였던 광저우(아랍어로는 칸푸, Khanfu)에는 상당한 규모의 무슬림 상인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한때 그 수가 20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38][17] 851년 광저우를 방문한 페르시아 상인 술라이만 알-타지르는 이곳의 무슬림 공동체가 자체적인 분쟁 해결 기구를 가질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기록했다.
3. 주요 사건
당나라 시대에는 이슬람교 신자를 포함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760년 양주에서 송주 자사의 반란 중에 발생한 760년 양주 학살과 878년 광주(광둥)에서 황소의 난 중에 일어난 광저우 학살이 있다.[43][44][45][22][23][24] 이러한 학살은 종교적, 조직적 위협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로 외국 상인들의 재물을 노린 약탈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3. 1. 양주 대학살 (760년)
760년 당나라 시기, 양주(揚州)에서는 송주 자사의 반란 중에 외국 상인 수천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나라 시대에 무슬림을 포함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발생한 주요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학살의 주된 원인은 종교적, 정치적 이유보다는 상인들의 재물을 노린 약탈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3. 2. 광주 대학살 (878-879년)
878년부터 879년 사이, 황소의 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광주(廣州, 현재의 광둥)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760년 양주 대학살과 더불어 당나라 시대에 외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주요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된다.반란군 지도자 황소가 이끄는 군대는 광주를 점령한 후 그곳에 거주하던 외국 상인들을 학살했다.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시라프의 아부 자이드(Abu-Zaid of Siraf)는 당시 학살된 외국 상인이 12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했으며, 후대의 역사가 마수디(Mas'udi)는 희생자 수를 20만 명으로 추정했다.[43][44][45][22][23][24] 또 다른 아랍 지리학자 아부 자이드 하산(Abu Zaid Hassan) 역시 "최소 12만 명의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기독교인, 그리고 파르시(조로아스터교 신자)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희생자들은 주로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기독교인(네스토리우스파), 그리고 파르시라 불리던 조로아스터교 신도들이었다. 기록에 따라 학살된 인원은 12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
이 학살은 희생자들이 특정 종교를 믿거나 외국인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반란군이 부유했던 외국 상인들의 재물을 약탈하려는 목적이 주요 원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4. 사회

당대에는 실크 로드와 천주(泉州)를 통한 바닷길을 통해 아랍과 페르시아의 무역상들이 꾸준히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에 도착한 이들 중 다수는 무슬림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광저우의 주강 남쪽 외국인 거주 구역인 번방(蕃坊)에 모여 살았다.[38] 이곳에는 그들만의 모스크(청진사)도 있었다.[38]
758년에는 광저우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무슬림 정착촌이 있었으나, 어떤 소요 사태로 인해 주민들이 흩어진 기록이 있다. 같은 해, 하이난 섬 항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아랍과 페르시아 해적들[38] 때문에 해상 무역로 일부가 베트남 북부와 조주(潮州) 지역으로 우회하기도 했다.[38] 광저우의 이슬람 공동체가 세웠던 모스크는 원대인 13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349년부터 1351년 사이에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처음 지어진 건물의 탑 일부만 남아 있다.
중국의 초기 이슬람 건축물로는 장안(현재의 시안)의 대청진사(大清真寺)가 유명하며, 내부에 있는 석판 기록에 따르면 742년에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대학습항청진사(大学习巷清真寺)가 705년에 건립되었다는 기록도 있다.[39]
한편, 안사의 난으로 인해 토번이 당나라와 서역 간의 교통로를 막으면서 장안에 발이 묶인 외국인(호인 胡人, 번객 蕃客)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오랫동안 관청의 지원에 의존해 생활했다. 수십 년 후 덕종 때 재상 이필(李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적을 조사했는데, 장안에 정착한 외국인이 4,000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필은 이들에게 더 이상 급여를 지급하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당나라에서 직업을 구해 정착하도록 조치했다. 그러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외국인이 직업을 구해 장안에 그대로 머물렀다.
이처럼 당나라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번방이라는 특정 구역에 모여 살면서 그들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하며 생활했다. 번방 내에서는 자체적인 규율에 따라 생활했으며, 이는 당나라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번방과 법률 참조)
4. 1. 번방과 법률
당나라를 방문한 무슬림들은 매일의 예배와 한족과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특정 지역에 모여 살았다. 당나라는 이들의 거주지를 번방(蕃坊)으로 지정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번방 내의 분쟁을 처리하기 위해 덕망과 인망이 있는 무슬림 한 명을 번장(蕃長)으로 임명했다.또한, 무슬림 간의 소송을 재판하기 위해 별도의 법관이 임명되었으며, 재판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는 당나라의 법률인 『당률(唐律)』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해당 법률에는 "외국인이 같은 외국인끼리 사건을 일으킨 경우에는 그들의 본래 풍속과 법률(本俗法)에 따라 처리하고, 다른 종류의 사람과 사건을 일으킨 경우에는 당나라 법률에 따라 처리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851년(대중 5년) 당나라를 여행했던 아랍 상인 술라이만은 광저우의 번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광저우에는 이슬람교의 관리자가 한 명 있고, 모스크도 한 곳 있다. 각지에서 온 이슬람교 상인들이 광저우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중국 황제는 이슬람교 재판관을 임명하여 이슬람교의 풍속에 따라 무슬림들을 다스리게 했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원나라 시대에 광저우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 역시 "이 대도시의 일부에는 이슬람교도의 거리가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 사원, 여관, 시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법관과 교장을 두고 있다. 단지 이 도시 내뿐만 아니라, 대략 이슬람교도가 거주하는 곳에는 모두 법관과 교장이 있다"라고 기록하여 번방의 자치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광저우의 번방에서는 본국 칼리프의 이름을 부르며 금요 예배가 행해지기도 했다.
4. 2. 무슬림의 중국화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외국인을 일컫는 번객(蕃客)과 호인(胡人)은 한족과의 결혼이 금지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혼혈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들은 중국식 이름으로 성씨를 바꾸는 개성(改姓)을 하기도 했는데, 본래 출신 국가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성씨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번객과 호인의 중국화가 진행되었으며, 일부는 자신의 출신지와 모국어를 잊고 완전히 한족 사회에 융합되기도 했다.5. 문화
당나라 시대에 이슬람교 문화는 주로 실크 로드와 해상 교역로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던 아랍인 및 페르시아인 상인들에 의해 전해졌다. 이들은 광저우, 장안 등 주요 도시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상업 활동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슬람 공동체는 불교, 도교 등 기존 중국 사회의 주류 종교 및 사상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며 비교적 독립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이러한 특징은 845년 회창폐불과 같은 대규모 종교 탄압 시기에도 이슬람교가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문화적 교류의 흔적은 건축과 기술 전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안과 광저우 등지에는 모스크(청진사)가 건립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중국 초기 이슬람 건축의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당나라의 포로들을 통해 제지술을 비롯한 선진 기술이 중앙아시아와 아바스 왕조 등 이슬람 세계로 전파되어 서양 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5. 1. 회창폐불과 이슬람
당나라 시대에 이슬람교는 주로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던 아랍 상인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하기보다는 상업 활동에 집중했으며, 중국어를 배우거나 현지 문화에 동화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40][19] 초기 무슬림 정착민들은 중국 내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종교 의식을 행했지만, 불교, 유교, 도교 등 기존 당 왕조의 사상이나 국가 정책에 맞서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해상 또는 육상 교역로를 통해 중국과 서방 세계를 오가는 유동적인 생활을 유지했다.[41][42][20][21]845년, 당 무종은 대대적인 종교 탄압 정책인 회창폐불을 단행하여 수도 장안에서 불교를 비롯한 모든 외래 종교를 추방했다. 이 조치로 중국 내 마니교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조로아스터교는 거의 소멸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이러한 탄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이는 무슬림 공동체가 중국 사회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상업에만 집중하는 '저자세'를 유지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40][19] 또한, 당시 이슬람교에는 불교 승려와 같은 전문적인 직업 종교인이 없었기 때문에 탄압의 주요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 2. 건축
당나라 시대에는 실크 로드와 천주를 통한 바닷길을 통해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무역상들이 꾸준히 중국에 도착했다.[38][17] 이들 중 다수 혹은 일부가 무슬림이었으며, 이들은 광저우의 주강 남쪽 방죽 근처 외국인 거주지인 번방이나 수도 장안 등지에 정착하며 모스크(청진사)를 건립했다.[38][17]
중국 초기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는 시안에 세워진 모스크들이 있다. 시안 대청진사(大清真寺)는 내부에 소장된 석판의 기록에 따라 742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보다 앞서 대학습항청진사(大学习巷清真寺)가 705년에 건립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명나라 천계 연간(1620년~1627년)에 세워진 비문을 근거로 한다.[39][18]
한편,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광저우에도 중요한 모스크가 세워졌다. 광저우의 이슬람 공동체는 회성사를 건립했는데, 이 역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회성사는 131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349년부터 1351년 사이에 재건되었다. 현재는 처음 지어졌던 건물의 탑 일부만 남아 있다.[17] 758년에는 광저우의 대규모 무슬림 정착촌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하여 주민들이 도주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같은 시기 하이난섬에 근거지를 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해적들의 활동으로 일부 해상 무역로가 다른 지역으로 우회되기도 했다.[38][17]
5. 3. 제지술의 서전
후한 시대에 채륜이 발명한 제지법은 751년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가 패배하면서 포로로 잡힌 중국인 중에는 제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술자들은 사마르칸트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제지술은 아바스 왕조로 전해졌다. 이후 제지술은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 등 더 서쪽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제지술뿐만 아니라 중국의 그림과 섬유 기술 역시 이 시기에 서쪽으로 전파되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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