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알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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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알바니아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알바니아계 민족의 전통적인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영토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알바니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서부, 세르비아 남부, 그리스 북부 일부 지역을 포함하며,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 내 비알바니아인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대알바니아"라는 용어 대신 "민족 알바니아" 또는 "알바니아 민족 재통일"을 선호한다.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대알바니아"라는 표현을 싫어하며 "민족 알바니아"라는 용어를 선호한다.[6] 이 외에도 "알바니아 민족 재통일"(Ribashkimi kombëtar shqiptar|sq)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7]
대알바니아주의는 1878년 프리즈렌 동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프리즈렌 동맹은 오스만 제국 내 알바니아인들의 자치와 권리 보호를 목표로 했으나, 제국의 붕괴와 발칸 전쟁을 거치며 독립 국가 수립 운동으로 발전했다.[10]
대알바니아주의는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발칸 반도에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나타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와 독일의 점령 기간에 현실화될 뻔했다. 코소보 전쟁과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이 개념과 관련된 주요 사건이었으며, 코소보 해방군(KLA)은 대알바니아 건설을 목표로 활동했다.
현대에는 알바니아 내에서 대알바니아를 지지하는 정당들이 등장했지만, 유권자들의 지지는 제한적이며, EU 통합을 선호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대알바니아주의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며, 주변 국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국제 사회의 반대에 직면해왔다.
2. 용어
2. 1. 민족 알바니아
'''민족 알바니아'''(Shqipëria Etnikesq)는 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알바니아계 민족의 전통적인 고향으로 주장되는 영토를 지칭한다. 이 지역에는 많은 비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102] "민족 알바니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바니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서부, 세르비아 남부의 알바니아계 지역,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바니아 원주민이 거주했던 그리스 북부 일부 지역(차메리아)을 포함한다.[6] 그러나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 내에 상당수의 비알바니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6] 알바니아인들이 사용하는 또 다른 용어는 "알바니아 민족 재통일"(Ribashkimi kombëtar shqiptarsq)이다.[7]
민족적 알바니아는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영토의 일부 (프레셰보(Preševo|프레셰보sr), 메드베자(Medveđa|메드베자sr), 부야노바츠(Bujanovac|부야노바츠sr)), 북마케도니아 서부, 몬테네그로 남부 울친(Ulcinj|울치니sr) 등을 포함한다. 그리스 영토 이피로스의 일부는 알바니아인들로부터 차메리아라고 불리며, "민족적 알바니아"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2. 2. 대알바니아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대알바니아"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으며, "민족 알바니아"라는 용어를 선호한다.[6] '''민족 알바니아'''(Shqipëria Etnike|슈치퍼리아 에트니케sq)는 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많은 비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계 민족의 전통적인 고향으로 주장되는 영토를 지칭한다.[102]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바니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서부, 세르비아 남부의 알바니아계 지역,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바니아 원주민이 거주했던 그리스 북부 일부 지역(차메리아)을 포함하는 지역을 지칭한다.[6]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 내에 상당수의 비알바니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6] 알바니아인들이 사용하는 또 다른 용어는 "알바니아 민족 재통일"(Ribashkimi kombëtar shqiptar|리바슈키미 콤버타르 슈치프타르sq)이다.[7]
민족적 알바니아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민족적 알바니아인의 역사적 영토로 주장되는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 범위에는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영토의 일부 ( 프레셰보(Preševo|프레셰보sr), Preshevë / Presheva|프레셰바sq), 메드베자(Medveđa|메드베자sr), Medvegja|메드베자sq), 부야노바츠(Bujanovac|부야노바츠sr), Bujanoci|부야노치sq), 북마케도니아의 서부, 몬테네그로 남부의 울친(Ulqin / Ulqini|울친sq, Ulcinj|울치니sr) 등이 포함된다. 그리스 영토 이피로스의 일부는 알바니아인들로부터 차메리아(Çamëria)라고 불리며, "민족적 알바니아"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2. 3. 기타 용어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대알바니아"라는 표현을 싫어하며 "민족 알바니아"라는 용어를 선호한다.[6] '''민족 알바니아'''(Shqipëria Etnikesq)는 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많은 비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계 민족의 전통적인 고향으로 주장되는 영토를 지칭한다.[102]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바니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서부, 세르비아 남부의 알바니아계 지역,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바니아 원주민이 거주했던 그리스 북부 일부 지역(차메리아)을 포함하는, 4개의 오스만 제국 빌라예트보다 작은 지역을 지칭한다.[6]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 내에 상당수의 비알바니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6] 알바니아인들이 사용하는 또 다른 용어는 "알바니아 민족 재통일"(Ribashkimi kombëtar shqiptarsq)이다.[7]
3. 역사
1912년 알바니아 독립 선언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지만,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영토 확장을 우려한 열강들의 개입으로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 전체를 포함하지는 못했다.[12][13]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은 코소보와 차메리아 지역을 알바니아에 병합하여 대알바니아주의를 일시적으로 실현했다.[28][29] 이 과정에서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을 추방하고 알바니아 문화를 장려했지만,[33][34] 전쟁 후 연합국에 의해 국경이 이전 상태로 복원되면서 대알바니아는 해체되었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시기 코소보 해방군(KLA)은 코소보 독립과 대알바니아 건설을 목표로 무장 투쟁을 벌였다.[44][45][46][47][48] 코소보 전쟁 이후 KLA는 해산되었지만, 일부 구성원들은 프레셰보 계곡과 마케도니아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이어갔다.[56]
중부 세르비아(코소보 제외)의 프레셰보 계곡 지역은 알바니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곳으로, 프레셰보, 메드베자, 부야노바크 해방군이 코소보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세르비아 정부와 무력 충돌을 빚기도 했다.[97]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의 알바니아인 비율은 다음과 같다.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역 역시 알바니아계 주민이 많이 거주하며, 일리리다 공화국 선포와 같은 상징적인 독립 시도가 있었다.[93][94][95]
3. 1. 오스만 제국 시기 (19세기 말 ~ 20세기 초)
20세기 초 발칸 전쟁 이전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신하였다.
알바니아 독립 운동은 1878년 프리즈렌 동맹(코소보에 기반을 둔 위원회)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 동맹의 목표는 오스만 제국 틀 내에서 민족 알바니아인의 문화적, 정치적 자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동맹의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10] 오스만 제국의 동맹의 문화적 목표에 대한 반대는 결국 동맹을 알바니아 민족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반적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점진적인 붕괴에 대한 반작용이자, 주로 무슬림이었던 알바니아인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발칸 및 기독교 민족 운동에 대한 대응이었다.[10] 알바니아 인구가 있는 빌라예트를 오스만 국가 내의 더 큰 단일 알바니아 자치주에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으며, 대알바니아는 우선순위로 고려되지 않았다.[10][11][8] 오스만 제국 말기의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적인 대알바니아를 구상하기는 했지만, 알바니아 민족 국가를 만들려는 분리주의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100][10][9]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특정 정치와 연결되지 않고 기존 국가 내에서 사회 문화적, 역사적, 언어적 권리를 옹호하는 데 주로 집중했다.[10][11]
3. 2. 발칸 전쟁과 알바니아 독립 (1912~1913)
20세기 초 발칸 전쟁 이전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신하였다.[10]
알바니아 독립 운동은 1878년 프리즈렌 동맹(코소보에 기반)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 동맹의 목표는 오스만 제국 틀 내에서 민족 알바니아인의 문화적, 정치적 자치였다.[10]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동맹의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동맹의 문화적 목표에 대한 반대는 결국 동맹을 알바니아 민족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10]
전반적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점진적인 붕괴에 대한 반작용이자, 주로 무슬림이었던 알바니아인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발칸 및 기독교 민족 운동에 대한 대응이었다.[10] 알바니아 인구가 있는 빌라예트를 오스만 국가 내의 더 큰 단일 알바니아 자치주에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으며, 대알바니아는 우선순위로 고려되지 않았다.[10][11][8] 오스만 제국 말기의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적인 대알바니아를 구상하기는 했지만, 알바니아 민족 국가를 만들려는 분리주의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100][10][9]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특정 정치와 연결되지 않고 기존 국가 내에서 사회 문화적, 역사적, 언어적 권리를 옹호하는 데 주로 집중했다.[10][11]
발칸 전쟁 동안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임박하면서, 이스마일 켐알리를 대표하는 알바니아인들은 1912년 11월 28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 하기에 이르렀다.[12] 독립의 주된 동기는 발칸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이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병합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12][13]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알바니아 독립을 지지했는데, 이는 알바니아 해안을 가진 세르비아가 아드리아 해에서 경쟁 세력이 되고 동맹국 러시아의 영향력에 열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4][15][16][17][18][19][20][21] 지정학적 이해관계 외에도, 일부 열강들은 더 많은 오스만 발칸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을 알바니아에 포함시키는 것을 꺼렸는데, 이는 알바니아가 유럽에서 유일한 무슬림 지배 국가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22] 러시아-프랑스 제안은 주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 중앙 알바니아를 기반으로 하는 축소된 알바니아를 위한 것이었고, 이는 세르비아와 그리스도 지지했는데, 그들은 무슬림만이 알바니아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23] 더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와 그리스 국가의 일부가 되면서,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진 알바니아 학자들은 독립 선언을 알바니아 민족주의 운동의 부분적인 승리로 해석한다.[24]
3. 3.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1939년 알바니아 침공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은 코소보와 차메리아를 중심으로 대알바니아주의를 추진했다.
이탈리아는 코소보와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역을 이탈리아 보호령 알바니아에 병합했다.[28][29] 이 지역에서는 알바니아 학교를 통해 민족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교육을 강요하고, 알바니아식 이름과 성 사용을 의무화했다.[32] 발리 콤베타르는 대알바니아 보존을 위해 이탈리아와 협력했다.[30][31][32]
많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식민지 개척자들을 추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33] 이들은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지배를 외세로 여기고,[34] 추축국에 협력하여 복수전을 펼쳤다.[29] ''불네타리'' 민병대는 세르비아 정착촌을 불태우고 세르비아인을 살해했으며,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식민지 개척자들은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으로 추방되었다.[33][34]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어 사용이 허용되었지만,[35]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탈리아를 외국 점령자로 간주하며 저항했다.[36] 1943년 부얀 회의에서 확장된 국경 유지를 위한 협력이 시도되었으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7] 전쟁 후, 일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통치 복귀에 배신감을 느끼고 저항했다.[38][39][40]
알바니아 파시스트당은 코소보, 차메리아 등을 "대알바니아"로 통합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협력했다.[42][43] 1941년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점령 후, 알바니아 파시스트들은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 대부분이 알바니아에 통합되었다고 주장했다.[42][43] 1941년 5월부터 1943년 9월까지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계 민족 거주 지역 대부분을 괴뢰 알바니아 정부에 두었다. 차메리아는 알바니아 고위 위원이 임명되었지만, 아테네의 이탈리아 군사 사령부 통제하에 있었다.
1943년 이탈리아 항복 후 독일군이 점령했을 때도 무솔리니가 만든 국경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전쟁 이후 국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그리스의 차메리아는 역사적인 야니나 빌라예트의 일부로, 알바니아인들은 ''차메리아''라고 부르며 대알바니아에 포함시키기도 한다.[98][3][99][100][101] 테스프로티아의 무슬림 참인들은 축-참 알바니아인 협력 이후 알바니아로 피난 갔으며,[103] 이들은 그리스에 재산 보상을 청구하고 있지만, 그리스는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104]
3. 3. 1. 이탈리아 점령기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침공했다.[25]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알바니아인들의 지지를 얻고 발칸 정복이라는 전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알바니아의 미해결 영토 문제를 이용했다.[26] 이탈리아는 코소보를 알바니아에 병합했고, 이는 양 지역 알바니아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27]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역도 이탈리아 보호령 알바니아에 병합되었다.[28][29]
이 지역에서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와 파시즘 교육을 강조하는 알바니아 학교에 모든 사람이 다녀야 했고, 알바니아식 이름과 성을 사용해야 했다.[32] 토지 소유주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민족주의자들은 발리 콤베타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협력 정부와 함께 대알바니아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30][31][32]
많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 특히 1919년 이후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식민지 개척자들을 몰아내는 데 집중했다.[33]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지배를 외세로 간주했고,[34] 추축국 점령자들과 협력했다.[29] 유고슬라비아 통치가 무너지자 알바니아인들은 복수 행위를 벌였고, 일부는 ''불네타리'' 민병대에 합류하여 세르비아 정착촌을 불태우고 세르비아인을 살해했다.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식민지 개척자들은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으로 추방되었다.[34] 이탈리아 당국은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어 사용을 허용했다.[35]
그러나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이탈리아인들을 외국 점령자로 여기며 저항하기도 했다.[36] 1943년에서 1944년 사이 부얀 회의에서 발리 콤베타르와 알바니아 공산주의자들은 확장된 국경 유지를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지만,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7] 전쟁이 끝날 무렵, 일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통치로의 복귀에 배신감을 느꼈고,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유고슬라비아에 저항했다.[38][39][40]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유고슬라비아에 포함된 것을 점령으로 간주했다.[41]
알바니아 파시스트당은 1939년 이탈리아 보호령 알바니아의 집권 정당이 되었고, 셰프케트 벨라치 총리는 코소보, 차메리아 등을 "대알바니아"로 통합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알바니아와 이탈리아의 행정적 통합을 승인했다. 1941년 봄,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통합이 실현되었다. 알바니아 파시스트들은 1941년 5월에 거의 모든 알바니아인이 거주하는 영토가 알바니아에 통합되었다고 주장했다.[42][43]
1941년 5월부터 1943년 9월 사이에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계 민족이 거주하는 거의 모든 영토를 괴뢰 알바니아 정부에 두었다. 여기에는 코소보 일부,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일부, 몬테네그로의 일부 국경 지역이 포함되었다. 차메리아에서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 고위 위원인 제밀 디노를 임명했지만, 해당 지역은 아테네의 이탈리아 군사 사령부의 통제를 받아 기술적으로는 그리스의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군이 이탈리아인을 대체했을 때, 그들은 무솔리니가 만든 국경을 유지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전쟁 이후 국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3. 3. 2. 독일 점령기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대신하여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독일은 무솔리니가 만든 국경을 그대로 유지했다.[42][43] 이는 코소보, 차메리아 등 알바니아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 계속해서 알바니아에 속해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국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이로 인해 대알바니아는 해체되고, 코소보와 다른 지역들은 다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의 영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3. 3. 3. 유고슬라비아/그리스와의 관계
1939년 알바니아를 침공한 이탈리아는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역 등을 이탈리아 보호령 알바니아에 병합했다.[28][29]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발칸반도 점령이라는 전쟁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26]
병합된 지역에서는 알바니아 학교에서 민족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교육 과정이 강요되었으며, 모든 사람은 알바니아식 이름과 성을 사용해야 했다.[32] 토지 소유주, 자유주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 반대자들은 발리 콤베타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협력 정부와 함께 대알바니아 보존을 추구했다.[30][31][32]
많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 특히 1919년 이후 정착한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식민지 개척자들을 몰아내는 데 집중했다.[33]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지배를 외세로 간주했고,[34] 추축국 점령자들과 협력했다.[34] 유고슬라비아 통치 붕괴는 알바니아인들의 복수 행위로 이어졌고, 일부는 ''불네타리'' 민병대에 합류하여 세르비아 정착촌을 불태우고 세르비아인을 살해했으며,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식민지 개척자들은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으로 추방되었다.[33][34] 이러한 행동의 목표는 동질적인 대알바니아 국가 건설이었다.[34]
코소보의 이탈리아 당국은 알바니아어 사용을 허용했지만,[35] 민족주의적 알바니아 요소들은 이탈리아인들을 외국 점령자로 간주하며 그들에게 대항했다.[36]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저항에 참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7] 전쟁이 끝날 무렵, 일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통치 복귀에 배신감을 느꼈고,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파르티잔과 유고슬라비아 군대에 저항했다.[38][39][40]
알바니아 파시스트당은 셰프케트 벨라치 총리의 주도로 코소보, 차메리아 등을 "대알바니아"로 통합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았다.[42][43] 1941년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점령 후, 알바니아 파시스트들은 거의 모든 알바니아인이 거주하는 영토가 알바니아에 통합되었다고 주장했다.[42][43]
1941년 5월부터 1943년 9월 사이,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계 민족 거주 지역 대부분을 괴뢰 알바니아 정부에 두었다. 여기에는 코소보,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일부, 몬테네그로 일부 국경 지역이 포함되었다. 차메리아는 알바니아 고위 위원이 임명되었지만, 아테네의 이탈리아 군사 사령부 통제하에 기술적으로는 그리스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군 점령 후에도 무솔리니가 만든 국경은 유지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은 국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한편, 그리스의 미개척 영토 주장은 역사적인 야니나 빌라예트의 일부인 차메리아였다.[98][3][99][100][101] 알바니아인들이 ''차메리아''라고 부르는 테스프로티아는 때때로 대알바니아에 포함된다.[102] 1928년 테스프로티아 현에는 약 2만 명의 무슬림 참인이 있었으나, 축-참 알바니아인 협력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알바니아로 피난을 갔다.[103] 추방된 무슬림 참인의 후손들은 그리스에 의해 압류된 재산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고 있지만, 그리스는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104]
3. 4.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0년대)
코소보 해방군(KLA)은 1990년대 코소보를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시키고, 궁극적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을 포함하는 "대알바니아" 건설을 목표로 한 알바니아계 준군사 조직이었다. KLA는 알바니아계 이주민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44][45][46][47][48] KLA 사령관 술레이만 셀리미는 알바니아 민족 통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49]
1998년까지 KLA의 작전은 무장 봉기로 발전했다. 미국 난민 이민 위원회(USCRI)는 KLA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 인구를 '청소'하려는 공격을 감행했다고 보고했고, UNHCR은 55,000명의 난민이 몬테네그로와 중부 세르비아로 피난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코소보 세르비아인이라고 추정했다.[50]
KLA의 작전은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대대적인 단속을 촉발했고, 이는 코소보 전쟁으로 이어졌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과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의 군사 개입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탈출과 난민 위기를 촉발했고, 이는 결국 NATO의 군사 개입을 초래했다.[51][52]
전쟁은 쿠마노보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하고 국제적 존재감을 허용했다.[53][54] 코소보 해방군은 해산되었고, 이후 일부 구성원들은 프레셰보 계곡과 마케도니아에서 계속 활동했다.[56]
3. 4. 1. 코소보 전쟁 (1998-1999)
코소보 해방군(KLA)은 1990년대에 코소보의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그리고 이웃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계 소수 민족을 포함하는 "대알바니아"를 건설하려는 알바니아계 준군사 조직이었다. KLA는 알바니아 디아스포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44][45][46][47][48]
KLA 사령관 술레이만 셀리미는 알바니아 민족 통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49]
1998년까지 KLA의 작전은 무장 봉기로 발전했다. 미국 난민 이민 위원회(USCRI)는 KLA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 인구를 '청소'하려는 공격을 가했다고 보고했고, UNHCR은 55,000명의 난민이 몬테네그로와 중부 세르비아로 피난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코소보 세르비아인이라고 추정했다.[50]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유고슬라비아 보안군, 경찰, 정부 관리, 세르비아계 마을에 대한 KLA의 작전은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대대적인 단속을 촉발했고, 이는 1998–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이어졌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과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의 군사 개입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탈출과 난민 위기를 촉발했고, 이는 결국 나토가 인종 청소 작전을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하게 만들었다.[51][52]
이 전쟁은 쿠마노보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하고 국제적 존재감을 허용했다.[53][54] 코소보 해방군은 해산되었으며, 일부 구성원은 프레셰보 계곡에서 UÇPMB를 위해 싸우고, 다른 구성원은 마케도니아의 무장 민족 분쟁 동안 국가 해방군(NLA) 및 알바니아 민족군(ANA)에 합류했다.[56]
3. 4. 2. 프레셰보 계곡, 마케도니아 분쟁
코소보 해방군(KLA)은 1990년대 유고 연방으로부터 코소보의 분리 독립을 추구하고, 코소보,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계 민족을 포함하는 "대알바니아" 건설을 목표로 했던 알바니아계 준군사 조직이었다. KLA는 알바니아계 이주민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44][45][46][47][48] KLA 사령관 술레이만 셀리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열강들이 알바니아 민족을 여러 발칸 국가들로 분할했으며, 이들을 통일하고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49]
1998년, KLA의 작전은 무장 봉기로 발전했다. 미국 난민 이민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KLA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 인구를 '청소'하려는 공격을 가했다.[50] UNHCR은 55,000명의 난민이 몬테네그로와 중부 세르비아로 피난했으며, 대부분 코소보 세르비아인이라고 추정했다.[50] KLA의 작전은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대대적인 단속을 촉발했고, 이는 1998–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이어졌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과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의 군사 개입은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탈출과 난민 위기를 촉발했고, 이는 NATO의 군사 개입을 초래했다.[51][52] 전쟁은 쿠마노보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코소보 해방군은 해산되었다.[53][54] 이후 일부 구성원은 프레셰보 계곡에서 UÇPMB를 위해 싸우고, 다른 구성원은 마케도니아의 무장 민족 분쟁 동안 국가 해방군(NLA) 및 알바니아 민족군(ANA)에 합류했다.[56]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역은 알바니아계 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2002년 인구 조사에서 알바니아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했다.[89][90] 알바니아인이 다수이거나 소수가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는 테토보(Tetova), 고스티바르(Gostivari), 스트루가(Struga), 데바르(Diber) 등이 있다.[91] 1980년대에 알바니아의 미개척주의 조직들이 SR 마케도니아에서 나타났다.[92] 1992년, 스트루가의 알바니아 활동가들은 일리리다 공화국(Republika e Iliridëssq)의 설립을 선포했으나, 이는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졌다.[93][94][95]
중부 세르비아(코소보 제외)의 미결합주의 주장은 남부 프레셰보 계곡에 있으며, 프레셰보(Preshevësq), 부야노바츠(Bujanocsq), 메드베자(Medvegjësq)의 지방 자치체를 포함한다. 2001년, 이 지역의 알바니아인은 70,000명으로 추산되었다.[96]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당 지방 자치체의 알바니아인 비율은 다음과 같다.
| 자치단체 | 알바니아인 비율 |
|---|---|
| 프레셰보 | 95% |
| 부야노바츠 | 67% |
| 메드베자 | 26% |
코소보 전쟁 (1998–99) 이후, 알바니아 분리주의 단체인 프레셰보, 메드베자 및 부야노바츠 해방군(Ushtria Çlirimtare e Preshevës, Medvegjës dhe Bujanocitsq, UÇPMB)는 프레셰보 계곡을 코소보로 분리하려는 목표로 세르비아 정부에 대한 반란을 벌였다.[97]
4. 관련 지역
대알바니아주의가 주장하는 영토는 다음과 같다.
| 국가/지역/공동체 | 영토 | 면적 (km2) | 총 인구 | 알바니아인 |
|---|---|---|---|---|
| 알바니아 | 28748km2 | 2,821,977[83] | 2,312,356 | |
| 코소보 | 10887km2 | 1,739,825 | 1,616,869 | |
| 남동부 및 동부 몬테네그로 | 울친, 투지, 구시네, 플라브 및 로자예 시 | 1173km2–1400km2 | 620,029[84] | 30,439 |
| 서부 북마케도니아 | 서부 및 북서부 지역 | 2500km2–4500km2 | 1,836,713 | 446,245 |
| 프레셰보 계곡 | 프레셰보, 부야노바츠 및 부분적으로 메드베자 시 | 725km2–1249km2 | 120,966 | 96,595 |
| 에피루스/차메리아 | 테스프로티아 및 프레베자 (남부 역사적 에피루스) | N/A | N/A | N/A |
민족적 알바니아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적 알바니아인의 역사적 영토로 주장하는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여기에는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영토의 일부 (프레셰보(세르비아어: Preševo|프레셰보sr), 메드베자(세르비아어: Medveđa|메드베자sr), 부야노바츠(세르비아어: Bujanovac|부야노바츠sr)), 북마케도니아의 서부, 몬테네그로 남부의 울친( Ulqin / Ulqini|울치니sq) 등이 포함된다. 그리스 영토 이피로스의 일부는 알바니아인들이 차메리아라고 부르며, "민족적 알바니아"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4. 1. 코소보
코소보는 알바니아인이 인구의 약 90%를 차지하는 지역이다.[85]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알바니아인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지만, 코소보 북부 지역이 제외되고 남부 코소보에서 일부 보이콧이 있어서 이 수치는 신뢰하기 어렵다.[86]| 국가/지역 | 영토 | 면적 (km2) | 총 인구 | 알바니아인 |
|---|---|---|---|---|
| 코소보 | 10,887 | 1,739,825 | 1,616,869 |
민족적 알바니아는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알바니아인의 역사적 영토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여기에는 코소보, 알바니아, 세르비아 일부 지역( 프레셰보(Preševo|프레셰보sr), 메드베자(Medveđa|메드베자sr), 부야노바츠(Bujanovac|부야노바츠sr)), 북마케도니아 서부, 몬테네그로 남부의 울친(Ulqin / Ulqini|울치니sq) 등이 포함된다. 그리스 영토 이피로스 일부는 알바니아인들이 차메리아(Çamëria)라고 부르며 '민족적 알바니아'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2008년 2월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 국제 연합은 코소보가 다른 나라와 합병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소보의 독립은 대알바니아주의 실현을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대알바니아에 포함되는 지역을 독립시킨 후 알바니아와 합병하거나 연방을 구성하여 대알바니아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2007년 3월 국제 연합 개발 계획 조사에 따르면 코소보 알바니아인 중 2.5%만이 알바니아와의 통일을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07]
2010년대에도 대알바니아주의에 대한 주장과 비판은 계속되었다. 2014년 10월 14일 유로 2016 예선 세르비아 대 알바니아 경기 중, '대알바니아주의' 깃발을 단 드론이 경기장에 날아들어 양국 선수와 관중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기는 몰수 경기가 되었다. 세르비아 당국은 이 사건에 알바니아 에디 라마 총리의 동생이 관여했다고 보고 그를 체포했다.[108] (자세한 내용은 UEFA 유로 2016 예선 세르비아 대 알바니아 참조)
4. 2.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 영토 회복주의 주장은 크라야, 울친, 투지(말레시야), 플라브 및 구시네, 로자예(산자크)를 포함한 국경 지역에 걸쳐 있다.[87][88]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당 지방 자치 단체에서 알바니아인의 비율은 울친 70%, 투지 50%, 플라브 19%, 로자예 2%이다. 알바니아 공동체가 작고 보스니아 공동체가 다수인 산자크 지역에 대한 주장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알바니아 국가의 국경과 오스만 제국 말기의 존재를 근거로 한다.몬테네그로에는 알바니아인 인구가 일정 수 있으며, 이들은 주로 남부 말레시야, 포드고리차, 울친( Ulqin / Ulqinisq ), 포드고리차 근교 투지( Tuzisr ), 플라브( Plavë / Plavasq ), 구시( Gusinjesr ), 로자예( Rozhajë / Rozhajasq ) 등에 거주하고 있다.
4. 3. 북마케도니아
북마케도니아 서부 지역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2002년 인구 조사에서 알바니아계 인구는 509,083명으로,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했다.[89][90] 알바니아인이 다수이거나 상당수 거주하는 주요 도시로는 테토보, 고스티바르, 스트루가, 데바르 등이 있다.[91]1980년대에는 비니차, 키체보, 테토보, 고스티바르 등에서 알바니아 민족주의 조직들이 나타났다.[92] 1992년, 스트루가의 알바니아 활동가들은 일리리다 공화국(Republika e Iliridëssq) 설립을 선포하며 자치 또는 연방화를 주장했다.[93] 그러나 이 선언은 상징적인 의미에 그쳤고, 일리리다 자치 국가 구상은 북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계 정치인들에게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4][95]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북마케도니아의 총인구는 1,836,713명이며, 이 중 알바니아인은 446,245명으로 전체 인구의 24.3%를 차지한다.
| 지역 | 면적 (km2) | 총인구 | 알바니아인 |
|---|---|---|---|
| 서부 북마케도니아 | 2,500–4,500 | 1,836,713 | 446,245 |
4. 4. 세르비아 (프레셰보 계곡)
세르비아(코소보 제외) 프레셰보 계곡에는 프레셰보(세르비아어: Preševosr, 알바니아어: Preshevësq) , 부야노바츠(세르비아어: Bujanovacsr, 알바니아어:Bujanocsq), 메드베자(세르비아어: Medveđasr, 알바니아어:Medvegjësq) 지방 자치체가 있으며, 알바니아인 공동체가 있다. 2001년, 이 지역의 알바니아인은 70,000명으로 추산되었다.[96]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당 지방 자치체의 알바니아인 비율은 다음과 같다.| 지방 자치체 | 알바니아인 인구 (2021년) | 알바니아인 비율 |
|---|---|---|
| 프레셰보 | 34,098명 | 95% |
| 부야노바츠 | 29,681명 | 67% |
| 메드베자 | 2,816명 | 26% |
코소보 전쟁 (1998–99) 이후, 알바니아 분리주의 단체인 프레셰보, 메드베자 및 부야노바츠 해방군(알바니아어: Ushtria Çlirimtare e Preshevës, Medvegjës dhe Bujanocitsq, UÇPMB)은 프레셰보 계곡을 코소보로 분리하려는 목표로 세르비아 정부에 대한 반란을 벌였다.[97]
4. 5. 그리스 (차메리아)
알바니아인들이 ''차메리아''라고 부르는 그리스 북서부 해안 지역인 테스프로티아는 때때로 대알바니아에 포함된다.[102] 이 지역은 역사적인 이피로스의 일부이자, 야니나 빌라예트에 속했다.[98][3][99][100][101]1912년 11월 28일, 알바니아 독립 선언으로 오스만 제국 군대가 물러나면서 이피로스(차메리아)는 알바니아에 귀속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13년 런던 회의(en)에 의해 그리스령이 되었다.
1928년 그리스 정부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테스프로티아 현에는 약 2만 명의 무슬림 참인이 있었다.[103] 1943년 알바니아를 병합한 이탈리아가 패전한 후, 많은 이슬람교도 차메리아인 (Çams)은 이탈리아군을 대신하여 차메리아를 점령한 독일군에 가담하여 차메리아인 부대를 결성했다. 한편, 다른 차메리아인들은 그리스 레지스탕스 조직인 민족해방전선(en)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4년, 영국의 특수 작전 집행부 지휘 하에 있던 그리스 민족 공화 동맹에 의해 차메리아의 알바니아인들은 그리스에서 강제 퇴거되었다. 이들은 1941-1944년 나치와 협력하여 여러 범죄를 저지른 후,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알바니아로 피난을 가야 했다.[103]
전후 첫 인구 조사(1951년)에서 이 지역에는 단 123명의 무슬림 참인만 남아 있었다. 추방된 무슬림 참인의 후손들(현재 알바니아에 최대 17만 명이 살고 있다고 주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남부 이피로스에 최대 3만 5천 명의 무슬림 참인이 살았다고 주장한다.[104] 이들 중 다수는 그리스에 압류된 재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는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104]
5. 현대의 상황 (2000년대 이후)
2008년 코소보 독립은 국제 연합에서 타국과의 합병을 인정하지 않지만, 대알바니아주의 실현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07]
2014년 10월 14일, 유로 2016 예선 세르비아 대 알바니아 경기 중 "대알바니아주의" 깃발을 매단 드론이 날아와 선수와 관중 간 난투극이 벌어져 몰수 경기가 되었다. 세르비아는 에디 라마 알바니아 총리의 동생을 체포했다.[108]
발칸 반도 알바니아인 문제는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 쇠퇴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서방 열강의 결정 결과라는 견해가 있다.
대알바니아 실현 목표는 극소수 과격론자에게만 해당되며, 대다수 알바니아인은 이웃 국가와의 평화 공존을 바란다. 그러나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그리스 거주 알바니아인의 인권 보호를 바라고 있다. 몬테네그로는 알바니아인 대표가 정치, 경제 분야에 진출해 있고, 민족적·종교적 차별은 없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세르비아, 그리스, 북마케도니아 정치인들은 "대알바니아" 용어로 민족 증오를 부추기고, 알바니아인 소수 민족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5. 1. 정치적 움직임
2000년대 알바니아에서는 대알바니아를 옹호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정당들이 등장했다. 2002년 알바니아 국민 해방 전선(KKCMTSH)과 국민통일당(PUK)은 합병하여 알바니아 민족 해방군(AKSh) 무장 단체의 정치 조직으로 활동했고, KLA와 NLA의 일부 이탈자들로 구성된 알바니아 연합 국민 전선(FBKSh)을 결성했다.[57][62] 국제적으로 테러 단체로 간주되는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2000년대 코소보,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에서 다양한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57][58][59] 2000년대 초, 차메리아 해방군(UCC)은 그리스 북부 에피루스 지역에서 활동하려던 준군사 조직으로 알려졌다.[60][61]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정당으로는 군주주의 정당인 합법 운동당(PLL), 국민통일당(PBKSh)과 함께 선거 문턱을 넘어 의회에 진출한 발리 콤베타르가 있다.[62][67] 대알바니아를 옹호하는 일부 정당들은 주로 미미했으며 알바니아 정치 무대의 변두리에 머물렀다.[67] 코소보 문제는 알바니아 유권자들 사이에서 제한적인 호소력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그들은 대알바니아를 창출하기 위해 국경 재조정을 옹호하는 정당을 선출하는 데 관심이 없다.[62]
2012년 알바니아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적 논평을 불러일으켰으며, 살리 베리샤 총리는 알바니아 영토가 그리스 북부의 프레베자와 세르비아 남부의 프레셰보까지 확장된다고 언급하여 알바니아 이웃 국가들을 분노하게 했다.[63]
코소보에서는 좌익 민족주의 운동이 베테벤도세(자결)라는 정당으로 변모하여 코소보-알바니아 관계 강화와 발칸 반도에서의 범알바니아 자결을 옹호하고 있다.[64][65] 또 다른 소규모 민족주의 정당인 발리 콤베타르 코소보(BKK)는 코소보 독립과 범알바니아 통일을 지지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원조 단체의 후계자임을 자처한다.[62]
대알바니아는 주로 정치적 수사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발칸 알바니아인들은 전반적으로 범죄, 취약한 거버넌스, 시민 사회를 근절하고 다양한 알바니아 인구를 통합하는 해결책으로 EU 통합을 보고 있다.[66][67]
2020년 7월 19일, 알바니아계 가수인 두아 리파는 극단적인 알바니아 민족주의 지지자들과 관련된 배너 이미지를 공유한 후 비난을 받았다.[68] 같은 배너는 2014년 세르비아 대 알바니아 축구 경기에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69] 이 배너는 미개척지(Irredentism) 대알바니아 지도를 묘사하고 있으며, 캡션은 "토착민"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수의 마케도니아인, 그리스인, 몬테네그로인, 세르비아인을 포함한 트위터 사용자들은 이 가수를 민족 민족주의로 비난했다.[70][71] 정치학자 플로리안 비버는 리파의 트윗을 "바보 같은 민족주의"라고 묘사했다.[70]
2021년 2월, 유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알빈 쿠르티 전 코소보 총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통일을 지지하는 투표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72]
이 개념은 또한 특히 일리리다 (북마케도니아의 제안된 서부 지역)와 관련하여 마케도니아 및 세르비아 정치권의 민족주의자들이 지지 기반을 결집하려는 시도로 자주 사용된다.[82]
5. 2. 여론
2010년 ''갤럽 발칸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대알바니아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알바니아(63%), 코소보(81%), 북마케도니아(53%)의 알바니아인 다수가 지지했다. 그러나 같은 보고서에서 대부분의 알바니아인은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73][74]유엔 개발 계획(UNDP)이 2007년 3월에 발표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2.5%만이 알바니아와의 통일이 코소보에게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96%는 코소보가 현재 국경 내에서 독립하기를 원한다고 답했다.[75]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이 2019년에 알바니아와 코소보 두 국가에서 2,5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코소보 알바니아인 응답자의 79.4%가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통일에 찬성했고, 알바니아 응답자의 82.9%가 찬성했다. 통일을 위해 세금을 낼 의향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코소보 응답자의 66.1%가 동의했고, 알바니아 응답자의 45.5%가 동의했다.[76]
5. 3. 논란
2000년대 알바니아에서는 대알바니아를 옹호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려는 정당들이 등장했다.[62] 2002년 알바니아 국민 해방 전선(KKCMTSH)과 국민통일당(PUK)이 합병하여 알바니아 민족 해방군(AKSh) 무장 단체의 정치 조직으로 활동하고 KLA와 NLA의 일부 이탈자들로 구성된 알바니아 연합 국민 전선(FBKSh)을 결성했다.[57][62] 국제적으로 테러 단체로 간주되는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그 구성원들은 2000년대 코소보,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에서 다양한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57][58][59] 2000년대 초, 차메리아 해방군(UCC)은 그리스 북부 에피루스 지역에서 활동하려던 준군사 조직으로 알려졌다.[60][61]코소보 문제는 알바니아 유권자들 사이에서 제한적인 호소력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그들은 대알바니아를 창출하기 위해 국경 재조정을 옹호하는 정당을 선출하는 데 관심이 없다.[62] 2012년 알바니아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적 논평을 불러일으켰으며, 살리 베리샤 총리는 알바니아 영토가 그리스 북부의 프레베자와 세르비아 남부의 프레셰보까지 확장된다고 언급하여 알바니아 이웃 국가들을 분노하게 했다.[63]
대알바니아는 주로 정치적 수사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발칸 알바니아인들은 전반적으로 범죄, 취약한 거버넌스, 시민 사회를 근절하고 다양한 알바니아 인구를 통합하는 해결책으로 EU 통합을 보고 있다.[66][67]
2020년 7월 19일, 알바니아계 가수인 두아 리파는 극단적인 알바니아 민족주의 지지자들과 관련된 배너 이미지를 공유한 후 비난을 받았다.[68] 같은 배너는 2014년 세르비아 대 알바니아 축구 경기에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69] 이 배너는 미개척지 대알바니아 지도를 묘사하고 있으며, 캡션은 "토착민"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수의 마케도니아인, 그리스인, 몬테네그로인, 세르비아인을 포함한 트위터 사용자들은 이 가수를 민족 민족주의로 비난했다.[70][71] 정치학자 플로리안 비버는 리파의 트윗을 "바보 같은 민족주의"라고 묘사했다.[70]
2021년 2월, 유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알빈 쿠르티 전 코소보 총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통일을 지지하는 투표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72]
2008년 2월에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다. 국제 연합에서는 독립한 코소보가 타국과 합병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이 코소보의 독립은 대알바니아주의 실현을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007년 3월 국제 연합 개발 계획의 조사에 따르면, 코소보의 알바니아인 중 불과 2.5%만이 알바니아와의 통일이 코소보에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107]
2014년 10월 14일, 유로 2016 예선에서 세르비아 대 알바니아의 경기가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되었는데, 경기 중에 "대알바니아주의" 깃발을 매단 드론이 피치 위로 날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양국의 선수와 서포터(관객은 세르비아 측만) 간의 난투극이 발생하여 몰수 경기가 되었다. 세르비아 당국은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VIP석에 있던 에디 라마 알바니아 총리의 동생을 체포했다.[108]
6. 국제 사회의 반응
산 스테파노 조약과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알바니아인이 거주하는 영토가 다른 국가에 할당되자, 프리즈렌 동맹이 이에 반발했다.[77]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국제 사회가 대알바니아 건설 노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78]
2004년 코소보에서는 자결권을 옹호하며 외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베테벤도스예 운동이 결성되었다. 베테벤도스예는 2010년 12월 선거에서 12.66%의 득표율을 얻었으며, 알바니아와의 통합에 대한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79]
2012년에는 적흑 동맹(Aleanca Kuq e Zisq)이 알바니아에서 정당으로 설립되었으며, 이 정당의 핵심 프로그램은 모든 알바니아인을 그들의 고향에서 민족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다.[80]
6. 1. 주변국의 우려
1878년 베를린 조약은 알바니아인이 거주하는 영토를 다른 국가에 할당했고, 이에 프리즈렌 동맹이 반발했다.[77] 1999년 크리스토퍼 힐 주 마케도니아 미국 대사는 "우리는 1990년대 대세르비아주의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그것은 끝났다. 우리는 앞으로 다음 세기에 '''대알바니아주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117]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국제 사회가 대알바니아 건설 노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78]2012년 알바니아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살리 베리샤 알바니아 총리는 그리스 프레베자부터 세르비아 프레셰보까지, 그리고 북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에서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까지 뻗어있는 "알바니아 영토"를 언급하여 주변국들을 분노하게 했다.[81]
세르비아, 그리스, 북마케도니아 등지의 정치인들은 "대알바니아"라는 용어를 민족적 증오를 부추기고 알바니아인 정치 활동가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하며, 알바니아인 소수 민족의 인권·정치적 권리 침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보인다.
6. 2. 국제기구의 입장
산 스테파노 조약과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알바니아인이 거주하는 영토가 다른 국가에 할당되자, 프리즈렌 동맹이 이에 반발했다.[77]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국제 사회가 대알바니아 건설 노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78]
6. 3. 국제위기그룹(ICG) 보고서
국제 위기 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은 2004년 2월 "대알바니아주의: 발칸 안정에 얼마나 큰 위협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105] 이 보고서는 대알바니아주의 주장이 널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라고 언급하며, 알바니아인들 사이에서 대알바니아나 국경 이동으로 인한 폭력은 정치적으로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도덕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119]보고서는 알바니아와 그리스 정부에 1945년 그리스에서 추방된 참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했다. 이 문제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이용되고, 참족의 정당한 불만이 다른 민족주의 운동에 묻히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6] ICG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알바니아는 코소보와 문화적, 경제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별도의 국가 지위를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19]
7. 한국과의 비교 및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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