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대정익찬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정익찬회는 1940년 일본에서 설립된 정치 조직으로,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신체제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초기에는 일국일당 체제를 지향했으나, 점차 정부 시책에 협력하는 보완적 행정 조직으로 변질되었다. 대정익찬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 다양한 단체를 통제하며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지,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등을 통한 군국주의 강화, 사회 통제 등이 있었다. 1945년 국민의용대 결성을 명분으로 해산되었으며, 한국에 황민화 정책, 강제 동원, 자원 수탈, 문화 말살 정책 등을 추진하여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전체주의 정당 - 아마나트
    카자흐스탄의 집권 여당인 아마나트는 1999년 "오탄"으로 창당되어 "누르 오탄"을 거쳐 현재의 당명으로 변경되었으며, 압도적인 득표율로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며 카자흐스탄의 정치 및 경제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1940년 설립된 정당 - 바트당
    바트당은 아랍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랍 통일을 이념으로 1940년 시리아에서 창당되어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정권을 잡았으나 분열과 갈등을 겪으며 현재 여러 아랍 국가에서 활동 중이다.
  • 고노에 신체제운동 - 쇼와 연구회
    1930년 고토 류노스케가 설립한 쇼와 연구회는 메이지 헌법과 정치 문제점을 검토하고 정치 개혁을 추구한 일본의 정책 연구 단체로,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아시아 신질서 구상과 대정익찬회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나 1940년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어 해산되었다.
  • 고노에 신체제운동 - 기획원 사건
    기획원 사건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 전시체제기획원에서 발생한 일련의 검거 사건으로, 게이힌 그룹, 판임관 그룹, 고등관 그룹 사건으로 나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다수의 기획원 관계자들이 체포되어 만철 조사부 사건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시 경제 체제하의 사상 탄압 및 사회주의 운동 탄압의 성격을 지닌다.
대정익찬회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정익찬회 로고
대정익찬회 로고
원어 이름大政翼賛会
로마자 표기Taisei Yokusankai
종류정치 결사
창립일1940년 10월 12일
해산일1945년 6월 13일
본부 위치도쿄도지요다구
기관지『대정익찬』
지도부
총재고노에 후미마로 (1940–1941)
도조 히데키 (1941–1944)
고이소 구니아키 (1944–1945)
스즈키 간타로 (1945)
부총재야나가와 헤이스케 (1941)
안도 기사부로 (1941–1943)
고토 후미오 (1943–1944)
오가타 다케토라 (1944–1945)
창립자고노에 후미마로
관련 조직
청년 조직대일본청년당
여성 조직대일본부인회
준군사 조직익찬손년대
의용전투대
정치 조직익찬정치회
정치 이념
정치적 입장신체제운동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대정익찬운동
파시즘
국가주의
일본 제국주의
일본 군국주의
일본 초국가주의
국민보수주의
범아시아주의
종교국가신토
해체 정보
해산 이유국민의용대로 발전적 해소
후신국민의용대
이전 정당
기타
색상빨강 하양
국가대정익찬의 노래

2. 역사적 배경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한 신체제 운동이 전개되었다. 기존 정당들은 신체제 운동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고노에의 주도하에 신체제 운동이 추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자, 일본 내에서도 강력한 지도 체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명문가 출신으로 인기가 높았던 고노에가 신체제 운동의 맹주로 떠올랐다. 기존 정당들은 고노에에 대항하는 대신 신체제에 참여하여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입헌민정당입헌정우회는 연합하여 반(反) 고노에 신당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나가이 류타로의 당 해산론과 구하라 후사노스케의 고노에 지지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민정당과 정우회 양 파는 당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1940년, 근로국민당과 동방회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자진 해산하여 대정익찬회에 합류했다. 쇼와연구회도 대정익찬회로 발전적 해소를 명분으로 1940년 11월에 해산되었다.

2. 1. 신체제 운동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한 신체제 운동이 전개되었다. 기존 정당들은 신체제 운동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고노에의 주도하에 신체제 운동이 추진되었다.[33]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자, 일본 내에서도 강력한 지도 체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명문가 출신으로 인기가 높았던 고노에가 신체제 운동의 맹주로 떠올랐다. 기존 정당들은 고노에에 대항하는 대신 신체제에 참여하여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입헌민정당입헌정우회는 연합하여 반(反) 고노에 신당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나가이 류타로의 당 해산론과 구하라 후사노스케의 고노에 지지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민정당과 정우회 양 파는 당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33]

고노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 성립 이후 신체제를 담당할 일국일당 조직 구상에 착수했다. 당시 고노에의 브레인이었던 고토 다카노스케가 주재하고 고노에도 참가했던 정책 연구 단체 쇼와 연구회가 동아 협동체론과 신체제 운동 촉진 등을 주창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상의 결과로 대정익찬회가 발족되어 국민동원체제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33]

2. 2. 기존 정당의 해산과 통합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중의원의 반대로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아리마 요리야스 농림대신과 오타니 손유 탁무대신은 고노에를 당수로 하는 신당을 만들어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르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정우회민정당이 신당에 의해 당이 붕괴될 것을 우려하여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법안이 통과되었고, 신당의 필요성이 사라져 계획은 백지화되었다.[35]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자, 일본 내에서도 강력한 지도 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신체제운동이 일어났고, 명문가 출신으로 인기가 높았던 고노에에게 기대가 집중되었다. 기존 정당들도 고노에에 대항하기보다는 신체제에 참여하여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민정당 총재 마치다 주지와 정우회 정통파 하토야마 이치로는 양당이 합당하여 반(反)고노에 신당을 만들려는 비밀 협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민정당의 나가이 류타로는 당 해산을 주장했고, 정우회 정통파 총재 구하라 후사노스케는 요나이 내각의 총사직에 가담하여 고노에의 총리 재등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양당 합당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민정당과 정우회 양 파벌(정통파·혁신파)은 당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35]

1940년, 근로국민당과 동방회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자진 해산하여 대정익찬회에 합류했다. 쇼와연구회도 대정익찬회로 발전적 해소를 명분으로 1940년 11월에 해산되었다. 의회 내 파벌은 존속했지만 정치 활동은 할 수 없었고, 관련 단체인 익찬의원동맹 등이 정치 활동을 했다. 해산한 각 정당이나 내무성 등도 대정익찬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협력적인 자세를 취했다.[35]

3. 설립 과정과 목적

1938년 국가총동원법중의원의 기성 정당의 반대로 폐기될 위기에 처했을 때, 아리마 요리야스 농림대신·오타니 손유 탁무대신은 고노에 후미마로를 당수로 한 신당을 만들어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하는 것을 검토하였다. 하지만 신당에 의해 당이 붕괴되는 것을 우려한 정우회·민정당이 찬성으로 선회하여 법안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신당의 필요성이 없어졌고, 이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어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진행되자 일본도 강력한 지도 체제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신체제운동이 일어났고, 그 맹주로서 명문 출신이며 인기와 명성이 높았던 고노에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기성 정당측에서도 고노에에 대항하는 것보다 신체제에 참가하여 유리한 입장을 차지해야 한다고 하는 의견이 높아졌다. 나가이 류타로가 당의 해산론을 주창하였고, 구하라 후사노스케도 요나이 내각의 총사직에 가담하여 고노에의 수상으로의 재등장을 공언하였기 때문에, 민정당·정우회 양파는 당을 해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고노에는 제3차 고노에 내각의 성립 이후 신체제를 담당할 일국일당 조직 구상에 착수한다. 당시 고노에의 브레인인 고토 류노스케가 주재하는 쇼와 연구회가 동아협동체론이나 신체제운동 촉진 등을 주창하고 있었다. 1940년 10월 12일, 이러한 구상의 결과로 대정익찬회가 발족되어 국민동원체제의 핵심 조직이 된다. 총재는 내각총리대신이 맡았으며, 중앙 본부 사무국 아래에 하부 조직으로 도부현 지부, 대도시 지부, 시구정촌 지부, 정내회, 부락회 등이 설치된다. 본부는 도쿄 회관에 설치되었다.

1940년, 근로국민당이나 동방회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대정익찬회에 합류하였다. 쇼와 연구회도 대정익찬회에 발전적으로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1940년 11월에 해산하였다.

고노에는 대정익찬회를 개혁주의 정당으로 구상하여 관료, 정치인 및 군부 간의 뿌리 깊은 이견과 정치적 파벌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가루이자와에서 준비위원회를 열고, 다양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37명의 위원을 임명했다. 여기에는 고토 후미오, 아리마 요리야스, 구하라 후사노스케, 하시모토 킹고로, 하야시 센주로, 야나가와 헤이스케, 아베 노부유키 등이 포함되었다.

1940년 대정익찬회 간부

3. 1. 일국일당 체제 지향

대정익찬회는 나치 독일의 국민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나 이탈리아 왕국국가 파시스트당을 모델로 한 일국일당의 강력한 정치 체제를 지향했다.[35] 그러나 대일본제국 헌법은 천황 친정을 기본으로 하였기에, 내각총리대신을 지도자로 한 일국일당 조직은 천황의 권위를 침해하고 국체에 반한다는 비판(이른바 막정비판론)이 우익세력으로부터 존재하였다.[35]

이러한 대립은 대정익찬회 설립 과정에서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다. 1940년 10월 12일 대정익찬회 발회식에서, 정치 조직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강령·선언을 내각총리대신이자 익찬회 총재인 고노에 후미마로는 발표하지 않았다.[35] 고노에 총재는 "대정익찬회의 강령은 대정익찬·신도 실천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외에는 사실 강령도 선언도 필요 없다고 해야 하며, 국민은 모두 밤낮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헌신의 성의를 다할 뿐이다"라며 넘어갔다.[35]

1941년 1월에 열린 제76제국의회 및 2월 6일의 귀족원 예산총회에서 고노에는 현 상태의 대정익찬회가 헌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정치 결사로서의 대정익찬회를 반대하던 내무대신 히라누마 기이치로(전 내각총리대신)는 대정익찬회가 치안경찰법상의 정치 결사가 아니고 공사 결사라고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같은 해 4월 1일에 혁신파의 반대에도 익찬회의 개혁안이 제시되었고, 정치단체화를 목표로 하고 있던 고노에의 측근 아리마 요리야스가 사무총장을 사임하는 등, 점차 성격이 정부 시책을 측면에서 협력해 나가는 보완적·행정조직적인 것으로 축소되어 갔다. 총재는 내각총리대신이, 도부현 지부장은 도부현 지사가 각각 겸임하게 되었다. 결국 대정 익찬회의 실상은 나치스와 같은 독재정당과는 약간 다른 양상을 나타내는 조직이었다.

3. 2. 쇼와 연구회와의 관계

昭和研究会|쇼와 켄큐카이일본어고노에 후미마로의 정책 브레인 집단으로, 대정익찬회 설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13] 동아 협동체론과 신체제 운동 촉진 등을 주장하며 대정익찬회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13]

고노에는 昭和研究会|쇼와 켄큐카이일본어의 권고를 바탕으로 대정익찬회를 통해 관료, 정치인, 군부 간의 깊은 이견과 정치적 파벌을 극복하고자 했다. 1937년 여름, 고노에는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37명의 위원을 가루이자와에서 열린 준비위원회에 임명했다. 이 위원회에는 고토 후미오, 아리마 요리야스, 기업가이자 우익 대변인인 구하라 후사노스케 등이 포함되었다. 군부의 급진파는 하시모토 킹고로가 대표했으며, 전통주의 군부는 하야시 센주로, 야나가와 헤이스케, 아베 노부유키가 대표했다.[13]

1940년 쇼와 연구회는 대정익찬회에 발전적으로 해소된다는 명목으로 해산되었다.[13]

4. 조직 구조 및 활동

대정익찬회의 발족


대정익찬회는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를 중심으로 하는 일국일당 조직으로, 총재는 내각총리대신이 맡았다. 중앙 본부 사무국 아래 도부현 지부, 대도시 지부, 시구정촌 지부, 정내회, 부락회 등 하부 조직을 두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다.[18] 본부는 도쿄회관(東京會舘)에 설치되었다.

1940년 근로국민당과 동방회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대정익찬회에 합류했다. 쇼와연구회도 같은 해 11월에 해산하여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었다. 의회 내 파벌은 존속했지만 정치 활동은 하지 못하고, 관련 단체인 익찬의원동맹 등이 활동했다.

1942년 4월 30일 실시된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익찬정치체제협의회(익협)가 결성되어 466명의 후보자를 추천, 전 의석의 81.8%인 381명이 당선되었다.

1942년 6월 23일 대일본산업보국회, 농업보국연맹, 상업보국회, 일본해운보국단, 대일본 부인회, 대일본청소년단 6개 단체를 산하에 통합하였다. 1945년 3월 조직 일부가 익찬정치회를 개편한 대일본정치회와 통합되었고, 6월 본토 결전에 대비한 국민의용대 결성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군부의 무리한 통폐합으로 익찬정치회 일부가 호국동지회 등을 결성, 대일본정치회에 대항하는 혼란이 발생했고, 수습되지 않은 채 종전을 맞았다.

4. 1. 조직 개편 과정

1940년 10월, 대정익찬회는 전국적인 동네 자치 조직인 반상회(일본어: 隣組|도나리구미일본어)를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다.[18] 1940년 11월 6일자 '사진 주보'는 이 기반 시설의 목적을 "1억 명의 인구를 이 새로운 조직 아래 하나의 몸으로 묶어 국가를 위해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능력을 수행하는 새로운 질서 운동"이라고 설명했다.[18]

1942년 대정익찬회 선거 연설


1942년 2월, 모든 여성 단체는 대일본 부인회로 통합되었고, 5월에 대정익찬회에 합류했다. 20세 미만이고 미혼인 여성을 제외한 모든 일본 성인 여성은 이 협회에 가입해야 했다.[19] 같은 해 6월에는 모든 청년 단체가 독일의 돌격대를 모델로 하여 익찬 소년단으로 통합되었다.[20]

1942년 3월, 도조 히데키 총리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선거 후보 지명 위원회를 설립하여 선출된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으며, 이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후보자를 투표에서 제외시켰다.[21] 1942년 일본 중의원 선거 이후, 모든 국회의원은 익찬 정치회에 가입해야 했고, 사실상 일본을 일당제로 만들었다.

대정익찬회는 태평양 전쟁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약 3개월 전인 1945년 6월 13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대정익찬회의 조직 개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시기주요 조직
1940년 10월 (발족 당시)총무국, 조직국, 정책국, 기획국, 의회국
1941년 4월 (1차 개편)총무국, 조직국, 동아국
1942년 6월 (2차 개편)총무국, 연성국, 실천국, 흥아국, 조사국
1943년 10월 (3차 개편)총무국, 국민운동국, 단체국, 선전본부, 식량생산본부, 흥아총본부


4. 2. 주요 활동

대정익찬회는 전시 총동원 체제 구축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통과를 통해 전략 산업, 뉴스 매체, 노동조합을 사실상 국유화하여 중화민국과의 총력전을 준비했다. 노동조합은 국민 징용령으로 대체되었으며, 정부는 민간 노동자를 주요 군수 산업에 징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애국적인 행사와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야마토 정신(대일본정신) 및 팔굉일우와 같은 슬로건을 홍보하여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통해 국민들을 동원하고 세뇌했다. 이는 "옛 일본의 정신과 미덕을 회복"하라는 요구였다.[15]

대정익찬회는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것 외에도 반상회(일본어: 隣組|도나리구미일본어) 지역 연합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특정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17] 또한 생산성 증대, 배급 감시 및 민방위 조직에도 역할을 했다.

1940년 10월, 대정익찬회는 전국적인 동네 자치 조직인 반상회를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다.

1942년 2월, 모든 여성 단체는 대일본 부인회로 통합되어 5월에 대정익찬회에 합류했다. 20세 미만이고 미혼인 여성을 제외한 모든 일본 성인 여성은 이 협회에 가입해야 했다.[19] 마찬가지로 6월에는 모든 청년 단체가 독일의 돌격대de를 모델로 하여 翼賛青年団|익찬청년단일본어으로 통합되었다.[20]

1942년 3월, 도조 히데키 총리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선거 후보 지명 위원회를 설립하여 선출된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으며, 이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후보자를 투표에서 제외시켰다.[21] 1942년 일본 총선 이후, 모든 국회의원은 翼賛政治会|익찬정치회일본어에 가입해야 했다.

대정익찬회는 태평양 전쟁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약 3개월 전인 1945년 6월 13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4. 3. 관련 단체

대정익찬회는 산하 및 관련 단체를 통해 사회 각 분야를 통제했다.

  • 1942년 6월 23일에는 대일본산업보국회·농업보국연맹·상업보국회·일본해운보국단·대일본부인회·대일본청소년단의 여섯 단체를 산하에 통합하였다.[18]
  • 1940년 10월, 대정익찬회는 전국적인 동네 자치 조직인 반상회(일본어: 隣組)를 체계화하고 공식화했다.
  • 1942년 2월, 모든 여성 단체는 대일본 부인회로 통합되었고, 5월에 대정익찬회에 합류했다. 20세 미만이고 미혼인 여성을 제외한 모든 일본 성인 여성은 이 협회에 가입해야 했다.[19]
  • 6월에는 모든 청년 단체가 독일의 돌격대를 모델로 하여 익찬소년단으로 통합되었다.[20]
  • 1942년 일본 총선 이후, 모든 국회의원은 익찬 정치회에 가입해야 했다.
  • 국본사 - 1921년 대심원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이 설립한 정치 단체.
  • 대일본흥국동지회 - 1927년 11월, 국본사 간부 변호사 아야카와 다케지가 일본신문사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정치 단체.

5. 성격 변화와 한계

대정익찬회는 설립 초기에는 일국일당 체제를 지향했으나, 점차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1940년 10월 12일 대정익찬회 발회식에서 강령과 선언을 발표하지 않았고, 1941년 1월과 2월에는 제국의회에서 헌법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

1941년 4월 1일 익찬회 개혁안이 제시되면서 정치단체화를 목표로 하던 아리마 요리야스 등이 물러나고, 정부 시책을 측면 지원하는 행정 조직으로 축소되었다. 내각총리대신이 총재를, 도도부현 지사가 지부장을 겸임하게 되면서, 나치스와 같은 독재정당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5. 1. 정치 결사 vs. 공사 결사 논쟁

1940년 10월 12일 대정익찬회 발회식에서, 내각총리대신이자 익찬회 총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정치 조직에 당연히 있어야 할 강령이나 선언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대정익찬회 위헌론은 잦아들지 않았고, 1941년 1월 제76회 제국의회2월 6일 귀족원 예산총회에서 고노에는 현재 대정익찬회의 헌법상 문제를 사실상 인정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무대신(전 내각총리대신)은 대정익찬회가 치안경찰법상 정치 결사가 아닌 공사 결사라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35]

5. 2. 행정 보조 조직으로의 변질

1941년 4월 1일, 혁신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익찬회의 개혁안이 제시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단체화를 목표로 했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측근 아리마 요리야스는 사무총장에서 물러났고, 익찬회는 점차 정부 시책을 측면에서 협력하는 보완적·행정조직적인 성격으로 축소되었다. 총재는 내각총리대신이, 도도부현 지부장은 도도부현 지사가 각각 겸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대정 익찬회의 실상은 나치스와 같은 독재정당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6. 해산과 전후 처리

1945년 6월 13일, 대정익찬회는 본토 결전에 대비한 국민의용대 결성을 명분으로 해산되었다.[1] 이후 조직 일부는 대일본정치회와 통합되었으나,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6. 1. 대일본정치회와의 통합과 갈등

대정익찬회는 해산 과정에서 조직 일부가 대일본정치회와 통합되었으나,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기시 노부스케 등은 대일본정치회에 반발하여 호국동지회를 결성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1]

7. 역대 지도부

대정익찬회는 총재, 부총재, 사무총장 등의 지도부를 두었다. 역대 총재는 모두 내각총리대신을 겸임했다.[42]

7. 1. 역대 총재

역대 총재는 모두 내각총리대신을 겸임했다.[42]


7. 2. 역대 부총재


7. 3. 역대 사무총장

이름재임 기간
아리마 요리야스1940년 10월 12일 ~ 1941년 3월 27일
이시와다 쇼타로1941년 3월 29일 ~ 1941년 10월 22일
요코야마 스케나리1941년 10월 28일 ~ 1942년 6월 15일
고토 후미오1942년 6월 15일 ~ 1943년 6월 2일
마루야마 쓰루키치1943년 6월 2일 ~ 1944년 2월 25일
고토 후미오 (취급)1944년 2월 25일 ~ 1944년 3월 18일
오바타 다다요시1944년 3월 18일 ~ 1944년 7월 22일
안도 교시로1944년 7월 22일 ~ 1945년 6월 13일


8. 한국에 미친 영향

대정익찬회 창립 축하 행사


대정익찬회는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를 억압하고 일본 제국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한국의 전략 산업, 언론, 노동조합국유화하여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15]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일본 제국의 통치를 옹호하는 논리에 묻히고 말았다.[16]

8. 1. 황민화 정책 추진

대정익찬회는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것 외에도 隣組|도나리그미|tonarigumi일본어 지역 연합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특정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17] 또한 생산성 증대, 배급 감시 및 민방위 조직에도 역할을 했다.

국가 총동원법이 통과되면서 노동 조합은 국민 징용령으로 대체되었으며, 이 법은 정부가 민간 노동자를 주요 군수 산업에 징용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사회는 애국적인 행사와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大日本精神|대일본정신|일본어(야마토 정신) 및 八紘一宇|팔굉일우|일본어와 같은 슬로건을 홍보하여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통해 동원되고 세뇌되었다. 이는 "옛 일본의 정신과 미덕을 회복"하라고 촉구했다.[15]

8. 2. 강제 동원과 자원 수탈

대정익찬회는 국가 총동원법에 의거, 진행 중인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지를 높였다. 隣組|도나리그미일본어 지역 연합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특정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으며,[17] 생산성 증대, 배급 감시 및 민방위 조직에도 역할을 했다.

국가 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징용령으로 정부는 민간 노동자를 주요 군수 산업에 징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는 애국적인 행사와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大日本精神|대일본정신일본어(大和|야마토일본어 정신) 및 八紘一宇|팔굉일우일본어와 같은 슬로건을 홍보하여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통해 동원되고 세뇌되었다.

8. 3. 문화 말살 정책

대정익찬회는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것 외에도 도나리그미|tonarigumi일본어 지역 연합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특정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17] 또한 생산성 증대, 배급 감시 및 민방위 조직에도 역할을 했다. 사회는 애국적인 행사와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대일본정신|야마토 정신일본어 및 팔굉일우일본어와 같은 슬로건을 홍보하여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통해 동원되고 세뇌되었다. 이는 "옛 일본의 정신과 미덕을 회복"하라고 촉구했다.[15]

9. 비판적 평가



대정익찬회는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전략 산업, 뉴스 매체, 노동 조합을 사실상 국유화하고, 국민 징용령으로 민간 노동자를 군수 산업에 강제 동원했다. 야마토 정신|야마토다마시일본어 및 팔굉일우|핫코이치우일본어 같은 슬로건을 내세워 일본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펼치며, "옛 일본의 정신과 미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 지지를 높이고, tonarigumi|도나리구미일본어를 통해 공공 질서 유지, 공공 서비스 제공, 생산성 증대, 배급 감시 및 민방위 조직에 기여했다.[17] 일부에서는 국체일본어에 기반하여 제국 신민은 이미 제국 통치를 지지해야 한다는 반대도 있었다.[16]

대정익찬회는 군사화되어 회원들은 카키색 제복을 착용했다. 전쟁 말기에는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연합군 침공 시 결전 의용대와 통합될 예정이었다.

9. 1. 권위주의적 통치

대정익찬회는 일당 독재의 강력한 정치 체제를 목표로 했다. 이는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을 체결한 추축국이었던 나치 독일의 국민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왕국의 파시스트당과 일본 만주국만주국 협화회를 이상적인 형태로 생각하는 세력으로부터 자주 언급되었다.[35]

하지만, 대일본제국 헌법은 천황 친정을 뜻하는 것이며, 총리를 지도자로 한 일당 독재는 국체에 반한다는 "막정론 비판"이 존재했다. 이러한 대립은 설립 과정에서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고, 1940년 10월 12일에 대정익찬회 발회식이 거행되었지만, 당일에도 정치 조직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강령·선언 등이 정리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35] 총리이자 대정익찬회 총재인 고노에 후미마로는 "대정익찬회의 강령은 대정익찬·신도 실천이라는 말로 요약된다."라며 그 자리를 넘겼다.

1941년 1월에 열린 제76회 제국 의회 및 2월 6일의 귀족원 예산 총회에서 고노에가 현 상태의 대정익찬회에 헌법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어서 내무대신 히라누마 기이치로도 대정익찬회는 "정치결사"가 아닌 "공사결사"이며, "위생조합과 같은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 인정을 계기로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중의원 유일의 회파 "중의원 클럽"은 해산되고, 소속 중의원 의원 전원이 무소속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해 4월 1일, 익찬회의 개혁안이 제시되었고, 직후 국민 조직·정치 단체화를 목표로 하던 고노에 측근인 아리마 요리야스 사무총장·고토 타카노스케 조직국장 등이 사임했다. 이듬해 1942년 5월 15일, 각의에서 대정익찬회 개편을 결정하고, 6월에는 기시다 쿠니오 문화부장 등이 떠났다. 이후, 대정익찬회는 점차 그 성격은 내무성의 관료경찰 관료에게 좌우되어, 정부의 시책에 측면에서 협력해 가는 보완적·행정 조직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총재는 총리가, 도도부현 지부장은 도도부현 지사가 각각 겸임하게 되었다.

독일의 나치당에 의한 일당 독재와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지만, 총재에 의한 중의 통재에 중점을 두는 등 유사한 점도 존재했다.

9. 2. 전쟁 범죄 가담

대정익찬회는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것 외에도 tonarigumi|도나리구미일본어 지역 연합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특정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17] 또한 생산성 증대, 배급 감시 및 민방위 조직에도 역할을 했다.

대정익찬회는 군사 조직처럼 회원들은 카키색 제복을 착용했다. 분쟁의 마지막 시기에 회원들은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예상되는 연합군 침공의 경우 결전 의용대와 통합될 예정이었다.

국가 총동원법은 정부가 민간 노동자를 주요 군수 산업에 징용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사회는 애국적인 행사와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야마토 정신|야마토다마시일본어팔굉일우|핫코이치우일본어와 같은 슬로건을 홍보하여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통해 동원되고 세뇌되었다. 이는 "옛 일본의 정신과 미덕을 회복"하라고 촉구했다.[15]

9. 3. 역사 왜곡과 미화

대정익찬회는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전략 산업, 뉴스 매체, 노동 조합을 사실상 국유화하여 중화민국과의 총력전을 준비했다.[15] 노동 조합은 국민 징용령으로 대체되었으며, 이 법은 정부가 민간 노동자를 주요 군수 산업에 징용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사회는 애국적인 행사와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야마토 정신|대일본정신일본어 및 팔굉일우|"팔굉일우"일본어와 같은 슬로건을 홍보하여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통해 동원되고 세뇌되었다. 이는 "옛 일본의 정신과 미덕을 회복"하라고 촉구했다.[15]

대정익찬회는 진행 중인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것 외에도 tonarigumi|tonarigumi일본어 지역 연합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특정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17] 또한 생산성 증대, 배급 감시 및 민방위 조직에도 역할을 했다.

참조

[1] 논문 Japan's Young Prince. Konoe Fumimaro's Early Political Career, 1916–1931
[2] 서적 東京會舘いまむかし 東京會舘
[3] 뉴스 婦人団体を統合、婦道修練を目指す 朝日新聞 1940-06-11
[4] 백과사전 大日本婦人会 https://kotobank.jp/[...] Shogakukan 2017-01-08
[5] 서적 Politics and Culture in Wartime Japa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6] 서적 A History of Fascism, 1914-1945 https://books.google[...] Routledge
[7] 학술지 The political economy of fascism: Myth or reality, or myth and reality? 2006-06
[8] 서적 Japan: A Modern History https://archive.org/[...] W. W. Norton & Company, Inc.
[9] 서적 Kabuki's Forgotten War: 1931-194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9
[10] 서적 The 1942 Japanese general election: political mobilization in wartime Japan Center for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Kansas
[11] Youtube 大政翼賛の歌 / Taiseiyokusan'nouta / Anthem of Taisei Yokusankai - With Lyrics https://www.youtube.[...]
[12] 서적 The Enigma of Japanese Power: People and Politics in a Stateless Nation
[13] 서적 Japanese Political History Since the Meiji Renovation 1868–2000
[1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15] 서적 Japan's War
[16] 서적 Japan: A Modern History
[17] 서적 The Police in Occupation Japan: Control, Corruption and Resistance to Reform
[18] 서적 Certain Victory M.E. Sharpe
[19] 웹사이트 Modern Japan in archives, the Yokusan System http://www.ndl.go.jp[...]
[20] 서적 Politics and Culture in Wartime Japa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1] 서적 Governing Japan: Divided Politics in a Major Economy
[22] 서적 東京會舘いまむかし 東京會舘
[23] 서적 日本全史(ジャパン・クロニック) 講談社
[24] 웹사이트 大政翼賛会 https://kotobank.jp/[...] 2019-02-20
[25] 웹사이트 大政翼賛会 https://kotobank.jp/[...] 2019-02-20
[26] 웹사이트 大政翼賛会 https://kotobank.jp/[...] 2019-02-20
[27] 웹사이트 大政翼賛会 https://kotobank.jp/[...] 2019-02-20
[28] 웹사이트 国民精神総動員運動 https://kotobank.jp/[...] 2019-02-20
[29] 웹사이트 大政翼賛会 https://kotobank.jp/[...] 2019-02-20
[30] 웹사이트 新体制運動 https://kotobank.jp/[...] 2019-02-20
[31] 웹사이트 新体制運動 https://kotobank.jp/[...] 2019-02-20
[32] 뉴스 近代発 見果てぬ民主Ⅸ <15> 新体制運動 政党なくなり大政翼賛会へ https://www.hiroshim[...] 中国新聞 2024-02-20
[33] 서적 Militarismus des Zivilen in Japan 1937–1940
[34] 서적 Militarismus des Zivilen in Japan 1937–1940
[35] 서적 昭和研究会
[36] 간행물 勞働時報 https://dl.ndl.go.jp[...] 厚生省勤勞局 1940-05
[37] 논문 戦時下の諸教会: 大日本戦時宗教報国会との関わりで https://cir.nii.ac.j[...] 1997
[38] 법규 普通銀行統制会約款 https://dl.ndl.go.jp[...] 1942
[39] 오디오 文學報國會發會式に於ける祝辭 (1) https://dl.ndl.go.jp[...] コロムビア 1942
[40] 법규 国民義勇隊組織ニ関スル件定 https://ndlsearch.nd[...] 閣議 1945-03-23
[41] 법규 国民義勇隊ノ組織ニ伴ヒ大政翼賛会、翼賛壮年団及大政翼賛会ノ所属団体ノ措置ニ関スル件 https://ndlsearch.nd[...] 閣議 1945-05-08
[42] 서적 翼賛国民運動史 翼賛運動史刊行会 1954
[43] 뉴스 東京で全市に回覧板を配布 東京日日新聞 1939-08-17
[44] 서적 일본사개설 지영사 199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