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트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트당은 1940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시작된 아랍 민족주의 정당이다. 아랍 민족주의, 아랍 사회주의, "통일, 자유, 사회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하며,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집권했다. 1963년 시리아, 1968년 이라크에서 쿠데타로 집권하였으나, 이라크는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붕괴되었고, 시리아는 내전 이후 활동이 중단되었다. 바트당은 아랍 세계 전역에 지부를 두었으나, 여러 차례 분열과 대립을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수단의 정당 - 국민회의 (수단)
국민회의는 1998년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에 의해 창당된 수단의 유일 정당으로, 다르푸르 분쟁에서 잔자위드 민병대를 지원하여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되었으며, 201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잃고 몰락했다.
바트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당명 |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
로마자 표기 | Ḥizb al-Ba‘th al-ʻArabī al-Ishtirākī |
설립일 | 1947년 4월 7일 |
합병 | 아랍 바트 아랍 바트 운동 아랍 사회주의 운동 |
해산일 | 1966년 2월 23일 (단일 정당으로서) 2003년 5월 16일 (이라크 지역 지도부) 2024년 12월 11일 (시리아 지역 지도부) |
후계 정당 |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이라크 지역 및 바트당 (이라크 주도 파벌)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시리아 지역 및 바트당 (시리아 주도 파벌) |
본부 위치 | 시리아 다마스쿠스 |
신문 | 알-바트 |
![]() | |
색상 | 검정 하양 녹색 빨강 (범아랍색) |
슬로건 | 통일, 자유, 사회주의 아랍 만세 영원한 사명을 가진 단일 아랍 국가 |
웹사이트 | 바트당 공식 웹사이트 |
정치 이념 | |
정치적 위치 | 좌익 |
이념 | 바트주의 아랍 민족주의 아랍 사회주의 범아랍주의 반시오니즘 혁명적 사회주의 좌익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반미주의 권위주의 |
주요 인물 | |
창립자 | 미셸 아플라크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 |
총비서 | 미셸 아플라크 (1954–1965) 무니프 라자즈 (1965–1966) |
관련 주제 | |
관련 인물 | 자키 알 아르수지 미셸 아플라크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 압둘라 리마위 와히브 알가님 푸아드 알리리카비 살라 자디드 하페즈 알아사드 아메드 하산 알바크르 사담 후세인 바샤르 알아사드 이잣 이브라힘 알두리 |
관련 조직 | 아랍 해방 전선 알아우다 알아부드 네트워크 제이시 무함마드 거부주의자 뱀당 지하드와 해방을 위한 최고 사령부 낙쉬반디 군대 이라크 혁명군을 위한 총군사위원회 자유 이라크군 |
관련 개념 | 아랍 민족주의 아랍 사회주의 아사드주의-사담주의 갈등 나세르주의 범아랍주의 |
지부 | |
알제리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바레인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이집트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이라크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요르단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쿠웨이트 | 친 이라크 |
레바논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리비아 | 친 이라크 |
모리타니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팔레스타인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수단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시리아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튀니지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예멘 | 친 이라크 친 시리아 |
분파 | |
분파 | 아랍 사회주의 혁명 바트당 (1960–1962/63) 사회주의 레바논 (1965–1970) 아랍 혁명 노동자당 (1966–현재) 민주 사회주의 아랍 바트당 (1970–현재) 수단 바트당 (2002–현재) |
2. 역사
1940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사회주의를 결합한 이념을 바탕으로 등장한 바트당은 1947년 4월 7일 제1차 당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남예멘, 수단 등 여러 아랍 국가에 지부를 설립하며 범아랍 정당으로 성장했다. 특히 시리아와 이라크 지부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두 나라 모두 196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이념 노선과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시리아 중심의 당과 이라크 중심의 당으로 분열되었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 분열은 이후 중동 정치 지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2. 1. 창당과 초기 활동
바트당의 기원은 1940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알라위파 출신의 아랍 민족주의자 자키 알아르수지가 니체, 마르크스, 헤겔, 피히테, 베르그송 등의 사상에 영향[42]을 받아 조직한 비밀 결사 "아랍 바트"(البعث العربي|알바아스 알아라비ar)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아르수지와 그의 제자들은 아랍 민족의 부흥을 목표로 활동했다.
1947년 4월 7일, 다마스쿠스에서 미셸 아플락(안티오키아 정교회 신자)과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수니파 무슬림), 그리고 알아르수지의 추종자들이 모여 제1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아랍 바트당을 공식 창당했다.[3] 이는 시리아 지역 지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3] 초기 바트당은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사회주의를 결합한 이념을 내세웠다.
1953년에는 아크람 알하우라니가 이끌던 아랍 사회당과 통합하여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으로 당명을 변경했으며, 이는 1954년 6월 열린 제2차 전당대회에서 공식 승인되었다.[4] 이 대회에서는 7명의 국가 지도부가 선출되었는데, 아플락, 비타르, 하우라니가 시리아 지역 지부를,[5] 압둘라 리마위와 압달라 나와스가 요르단 지부를 대표했다.[6]
창당 이후 바트당은 아랍 세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여러 국가에 지부를 설립했다.
국가 | 설립 연도 |
---|---|
팔레스타인 | 1949년 |
레바논 | 1951년 |
이라크 | 1951년 또는 1952년[7][8][17][9][10] |
요르단 | 1954년[11] |
남예멘 (예멘) | 1958년[11] |
수단 | 1964년 |
카타르와 튀니지에서는 활동이 불법화되기도 했으나, 여러 아랍 국가에서 범아랍 정당으로서 기능했다. 특히 시리아와 이라크 지부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다.
시리아 지역 지부는 1950년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1954년 시리아 총선에서는 22석을 확보하며 제2당으로 부상했고,[12] 기존 인민당과 국민당의 정치적 실패 속에서 대중적 지지를 넓혀나갔다.[13] 이를 바탕으로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가 외무부 장관에, 칼릴 칼라스가 경제부 장관에 임명되는 등 내각에도 참여했다.[14] 바트당은 이 시기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끌던 이집트와의 통합을 강력히 추진하여 1958년 아랍연합공화국(UAR)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5]
이라크에서는 후아드 알리카비가 1951년[7] 또는 1952년[8]에 이라크 지역 지부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1947년 또는 1948년 설립설도 제기되나[17][9], 1952년 국가 지도부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10] 확실한 것은 리카비가 1952년 초대 지역 서기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9] 초기에는 리카비 주변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주축이었으나, 점차 수니파가 당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16] 1958년 7월 14일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졌을 당시 이라크 지부 당원은 약 300명이었다.[17] 이들은 압드 알카림 카심이 이라크를 UAR에 가입시킬 것이라 기대하며 그의 집권을 지지했다.[18] 그러나 카심이 집권 후 '이라크 우선주의' 정책으로 돌아서자[18] 바트당은 이에 반발했고, 1959년에는 젊은 사담 후세인 등이 참여한 카심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19][20]
UAR 결성 이후 당내에서는 노선 갈등과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1959년 8월 열린 제3차 전당대회에서는 이라크 지역 서기장 후아드 알리카비가 국가 지도부가 UAR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민다고 비판했으며,[21] 아플락과 비타르가 당내 협의 없이 결정했던 시리아 지역 지부 해산(1958년)을 사후 승인했다.[22] 또한 요르단 지역 서기장 압둘라 리마위가 제명되자, 그는 독자적으로 아랍 사회주의 혁명 바아스당을 창당했다.[23][24] 국가 지도부는 탈리브 엘시비브를 임시 이라크 지역 서기장으로 임명하고[21] 1961년에는 리카비를 당에서 제명했다.[21]
1960년 8월 제4차 전당대회에서는 아플락과 비타르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해산되었던 시리아 지역 지부의 재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한 당의 아랍 민족주의 노선보다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념적 변화가 나타났다.[25][26]
2. 2. 시리아와 이라크의 집권
1963년 바트당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각각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이라크에서는 1963년 2월 라마단 혁명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통해 압드 알카림 카심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 쿠데타는 바트당 장교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가 주도했으며, 오랫동안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3] 당시 관련 문서는 기밀로 분류되어 있지만,[4][5] 쿠데타 전후로 이라크 바트당과 미국 관리들 사이에 협력 관계가 있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6][7] 집권 직후 바트당은 민병대인 국가경비대를 동원하여 공산주의 및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다. 그러나 당내 극심한 파벌주의와 폭력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같은 해 11월, 압둘 살람 아리프 대통령과 나세르주의자들의 반격 쿠데타로 실각하여 지하 활동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알바크르와 젊은 사담 후세인 등 주요 인물들이 투옥되기도 했다.[46]
시리아에서는 1963년 3월 8일, 3월 8일 혁명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통해 나짐 알쿠드시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 쿠데타는 시리아 지역 지부의 군사위원회가 주도했으며, 혁명사령부 국가평의회(NCRC)를 설립하여 국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리아 바트당 역시 집권 초기부터 극심한 내부 분열에 시달렸다. 당원 수가 매우 적었으며, 군사위원회는 민간 지도부를 불신하고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1966년 2월 23일, 시리아에서는 군사위원회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살라 자디드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미셸 아플락,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 등 바트당 창립 멤버들을 포함한 기존 지도부를 축출했다. 이 쿠데타는 범아랍주의를 우선시하는 아플락의 "국가주의자"(qawmi) 진영과 대시리아 건설 등 시리아 중심의 노선을 추구하는 자디드의 "지역주의자"(qutri) 진영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아플락 그룹보다 더 급진적인 좌파 성향을 보였으며, 이 쿠데타를 계기로 시리아 바트당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이 사건은 시리아와 이라크 바트당의 완전한 분열을 초래했다. 두 나라는 각자 별도의 당 지도부를 구성했으며, 시리아는 자키 알아르수지를, 이라크는 여전히 아플락을 바트 사상의 공식적인 창시자로 내세우며 경쟁하게 되었다.
이라크에서는 실각했던 바트당이 1968년 7월 17일, 7월 17일 혁명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알바크르가 다시 전면에 나섰고, 이후 사담 후세인이 점차 권력을 강화하며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 주도 다국적군에 의해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일당제 체제를 유지했다.
시리아에서는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디드 정권의 입지가 흔들렸다. 결국 1970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가 교정 운동이라는 이름의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자디드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43] 이후 하페즈 알아사드와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로 이어지는 아사드 정권은 2024년 반군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시리아를 통치했으며, 정권 붕괴 직후인 2024년 12월 11일, 시리아 바트당은 활동 무기한 중단을 선언했다.[18]
이처럼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이후 주도권 다툼과 이념적 차이, 아플락 망명 문제 등으로 인해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43][44]
2. 3. 분열과 대립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은 1963년 각국에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지만, 이후 노선 차이와 주도권 경쟁으로 인해 분열과 대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라크 바트당은 시리아의 영향력 하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며 다마스쿠스 중심의 당 지도부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갈등의 조짐은 1959년 이라크 지역 지부 서기장 푸아드 알리카비가 국가 지도부가 아랍연합공화국(UAR) 결성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면서 나타났다. 같은 해 열린 제3차 전당대회에서는 미셸 아플락과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가 당내 협의 없이 결정했던 시리아 지역 지부의 해산을 사후 승인하고, 독자 노선을 보이던 요르단 지역 지부 서기장 압둘라 리마위를 제명했다. 리마위는 이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바트당을 창설하기도 했다.
1960년 제4차 전당대회에서는 아플락과 비타르의 기존 지도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아랍 민족주의보다는 당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노선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념적 갈등은 1963년 제6차 전당대회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 대회에서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 지부는 "사회주의적 계획", "집단 농장", "생산 수단에 대한 노동자 통제" 등 소련식 사회주의를 연상시키는 급진적인 요구를 채택했다. 이로 인해 당의 창시자인 아플락은 명목상의 지도자 지위만 유지하게 되었고, 당의 실권은 급진파에게 넘어갔다.
결정적인 분열은 1966년 시리아 쿠데타로 인해 일어났다. 군사위원회의 실력자였던 살라 자디드가 이끄는 '지역주의자'(قطري|쿠트리ar, qutri) 세력은 기존의 범아랍주의를 강조하던 아플락과 비타르 중심의 '국가주의자'(قومي|카우미ar, qawmi)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했다. 자디드 정권은 이전보다 더 급진적인 좌파 노선을 표방하며 아플락 등 온건파를 당에서 완전히 제거했다.
이 쿠데타를 계기로 바트당은 시리아 중심의 다마스쿠스 지도부와 이라크 중심의 바그다드 지도부로 완전히 나뉘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특히, 시리아에서 권력을 잃고 축출된 아플락을 이라크 바트당 정권이 받아들여 보호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43][44] 분열 이후 시리아 바트당은 자키 알아르수지를 바트 사상의 공식적인 창시자로 내세운 반면, 이라크 바트당은 여전히 미셸 아플락을 창시자로 간주하는 등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대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을 지원했던 시리아에 대해 이라크가 국교를 단절하는 등[49][50][51] 양국 바트당 정권은 중동 정세 속에서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다.
3. 이념과 정책
바트당은 정규당원, 견습당원, 지지당원의 세 등급으로 구성되었다. 정규당원은 당 회의 참석, 투표, 당직 출마 권한을 가졌다. 시리아에서는 정규당원이 되기까지 총 3년의 기간(지지당원 18개월, 견습당원 18개월)이 필요했다.
바트당의 핵심 이념은 "단결, 자유,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이는 아랍 민족의 통일 국가 건설,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사상의 자유, 그리고 독자적인 아랍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의 초기 사상은 미셸 아플락(Michel Aflaq)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점차 세속주의적 경향을 강화했다.[13][14]
바트당은 1940년 자키 알-알수지(Zaki al-Arsuzi)의 비밀 결사에서 시작되어 1947년 아플락, 살라후딘 알-비타르(Salah al-Din al-Bitar) 등을 중심으로 공식 출범했으며, 1953년 악람 알-하우라니(Akram al-Hawrani)의 아랍 사회당과 합병했다.
원래 단일 정당이었으나, 내부 갈등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으로 분열되어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 '''시리아 바트당''' (아랍 사회주의 바아스당 시리아 지역 지도부)은 1963년 쿠데타(3월 8일 혁명)로 집권했으나, 1966년 시리아 쿠데타와 1970년 하피즈 알-아사드(Hafez al-Assad)의 쿠데타(교정 운동)를 거치며 아사드 가문의 장기 통치 체제가 구축되었다.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정당들과 연립하여 "국민 진보 전선"(PNF)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라크 바트당과는 주도권 다툼과 아플락 망명 문제 등으로 대립했다.[43][44] 2024년 12월 8일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정권이 붕괴하자, 12월 11일 활동 무기한 중단을 선언하고 사실상 해산되었다.
- '''이라크 바트당''' (아랍 사회주의 바스당 이라크 지역 지도부)은 1968년 쿠데타(7월 17일 혁명)로 집권하여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1979년 사담 후세인 집권 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강조하는 이라크 민족주의(와타니야)와 아랍 민족주의(카우미야)를 결합한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45]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에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했으나(1984년), 이란을 지원한 시리아 바트당 및 북한과는 단교했다.[48][49][50][51] 걸프 전쟁에서 쿠웨이트 침공 후 다국적군에 패배했다.
3. 1. 아랍 민족주의

바트당의 이념은 처음부터 아랍 민족주의 사상에 기반했으며, 당 스스로를 "아랍 통일당"이라고 칭했다. 1945년부터 1947년 사이 자키 알-아르수지가 이끌던 아랍 바트당의 당원들을 받아들이면서 범아랍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당의 핵심 이념은 1940년 미셸 아플락이 출판한 수필 모음집 "피 사빌 알-바아쓰(Fi Sabil al-Ba'ath)", 즉 "르네상스로 가는 길"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책은 20년 이상 당의 주요 이념 서적으로 기능했다.[10]
아플락은 "영원한 메시지를 가진 하나의 아랍 민족"(ummah arabiyyah wahidah thatu risalah khalidahara)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신념을 표현했다. 바트주의는 아랍 인종의 순수성이나 민족적 쇼비니즘보다는 계몽주의 시대의 이상에 기반을 두었다. 당 헌법 제1조는 "아랍인들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며, 이 민족은 단일 국가에서 살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아랍 조국은 불가분의 정치적, 경제적 단위를 구성하며, 어떤 아랍인도 다른 아랍인들과 떨어져 살 수 없다"고 명시하여 아랍 민족의 통합과 단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작가 타비사 페트란(Tabitha Petran)은 바트당 이념의 기본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랍 민족은 역사 속에서 영속적인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아랍 민족은 사회적, 경제적 형성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에 영감을 주는 초월적인 사실로 간주되며, 그 최고의 공헌 중 하나는 이슬람의 형태를 취한다. 아라비아, 비옥한 초승달 지대, 북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이슬람적 가치, 특히 아랍어와 아랍 문화를 부여한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아랍 민족이었다. 이러한 아랍 민족 개념은 역사에 대한 아랍의 공헌을 암묵적으로 긍정한다. 반면 아랍의 쇠퇴는 종교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정화와 정신적인 행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초기 바트당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역사가 한나 바타투는 "아플락은 기본적으로 도시적 관점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그의 특별한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아플락은 전통적인 지주 계급에 대해서도 명시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악람 알-하우라니가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고 소위 "과도기적 바트당원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초대 집행위원회 위원 중에서는 와히브 알가님만이 농민과 노동자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아플락,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 자릴 알-사이디드 등 다른 위원들이 중산층 출신으로 그들의 가치관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 바트당이 발표한 "원칙 선언"에서는 세속주의적 경향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 선언은 당의 교육 정책 목표가 "국가의 통합과 그 사명의 영속성을 믿는 새로운 아랍 세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13] 또한 이 새로운 세대는 "미신과 낙후된 관습의 속박에서 벗어난 과학적 사고"에 전념하며, 종교 대신 아랍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14]
3. 2.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이 내세운 아랍 사회주의는 서구의 전통적인 사회주의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이념 체계였다. 이는 아랍 세계의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바트당의 목표는 단일 아랍 국가 건설을 통한 민족 해방과 사회 개혁 달성에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1940년 다마스쿠스에서 알라위파 출신 아랍 민족주의자 자키 알-알수지(Zaki al-Arsuzi)가 니체, 마르크스, 헤겔, 피히테, 베르그송 등 서구 철학 사상의 영향을 받아[42] 조직한 비밀 결사 "아랍 바아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1947년 미셸 아플락(Michel Aflaq)과 살라후딘 알-비타르(Salah al-Din al-Bitar) 등이 중심이 되어 공식 정당으로 출범하면서 아랍 민족의 '부흥'(바아스)을 기치로 내걸었다.
초기 바트당은 아플락과 같은 중산층 출신 지식인들이 주도했으며, 이들은 주로 도시적 관점에서 아랍 민족주의 담론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농민이나 노동 계층이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초기 당 활동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1953년 악람 알-하우라니(Akram al-Hawrani)가 이끌던 아랍 사회주의당과 합병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하우라니의 합류는 바트당이 농민 문제 등 사회 개혁 의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당의 이념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농촌 출신 당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특히 시리아에서는 군부 내 농촌 출신 인사들이 부상하면서 당의 성격과 정책 방향에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라크에서는 1979년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 이후, 아랍 민족주의(카우미야)와 더불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예로서 이라크 고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라크 민족주의(와타니야)를 융합한 독자적인 형태의 바트주의를 발전시켰다.[45] 이는 범아랍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각국, 특히 이라크의 국가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3. 3. "통일, 자유, 사회주의"
“단결, 자유,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바트당 사상의 핵심 원리이다.- 단결 (통일): 이는 독립적이고 강력한 아랍 국가의 건설을 의미했다. 바트당은 스스로를 "아랍 통일당"이라고 묘사했으며, 당 헌법 제1조는 "아랍인들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한다. 이 민족은 단일 국가에서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랍 조국은 불가분의 정치적, 경제적 단위를 구성한다"고 명시하여 아랍 민족주의에 기반한 통일 국가 건설 의지를 분명히 했다.
- 자유: 여기서의 자유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 이는 식민지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미셸 아플락은 바트당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국민과 상의하지 않고 과도기에 국민을 통치하고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당내 민주주의는 지지했다.
- 사회주의: 바트당의 사회주의는 서구에서 정의하는 사회주의가 아닌, 독특한 형태의 아랍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바트당 사상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통치하에 시작되었다. 아랍 사회주의의 초기 해석은 경제적 평등이나 국가 통제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대신 아랍 국가와 국민을 식민지배와 압제로부터 해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미셸 아플락의 수필 모음집인 "피 사빌 알-바아쓰(Fi Sabil al-Ba'ath)"("르네상스로 가는 길"이라는 뜻)는 20년 이상 바트당의 주요 이념 서적이었다.[10]
3. 4. 신바트주의
초기 바트당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보였다. 역사가 하나 바타투(Hanna Batatu)는 아플락이 기본적으로 도시적 관점을 가졌으며, 농민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아플락의 저술에서 농민 문제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심도 있는 논의는 부족했고, 전통적인 지주들에 대한 명시적인 적대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악람 알-하우라니(Akram al-Hawrani)가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고 소위 "과도기적 바스당원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초대 집행위원회 위원 중에서는 와힙 알-가님(Wahib al-Ghanim)만이 농민과 노동자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아플락, 살라 알-딘 알-비타르(Salah al-Din al-Bitar) 등 다른 위원들이 중산층 출신으로 그들의 가치관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초기 당 조직은 농촌 지역에서 깊은 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 창당 대회 대의원 217명 중 농민과 노동자는 각각 한 명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은 교사 또는 대학생이었다. 악람 알-하우라니(Akram al-Hawrani)의 아랍 사회주의당(ASP)이 바트당과 합병했을 때도, 농민 출신 ASP 회원 대부분은 바트당에 합류하기보다는 하우라니 개인의 추종자로 남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트당원의 다수는 농촌 출신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특히 1958년 시리아 지역 지부 해체와 군사위원회의 등장 이후 나타난 "과도기적 바스당"은 관점, 정책, 이념 면에서 뚜렷한 농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당의 이념도 급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60년 바트당이 발표한 "원칙 선언"에서는 급진적 세속주의가 강조되었다. 이 선언문은 당의 교육 정책 목표가 "국가의 통합과 그 사명의 영속성을 믿는 새로운 아랍 세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13] 또한, 이 새로운 세대는 "미신과 낙후된 관습의 속박에서 벗어난 과학적 사고"에 전념하고, 종교 대신 아랍 민족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14] 이는 당의 이념이 점차 세속적이고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4. 조직
바트당은 1940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미셸 아플라크(Michel Aflaq)와 살라후딘 알-비타르, 그리고 자키 알-아르수지 등의 주도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947년 공식 창당되었다. 이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등 여러 아랍 국가에 지부를 설립하며 범아랍 정당으로 성장했다. 특히 시리아와 이라크 지부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양국 모두 196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이후 이라크 지부는 시리아 중심의 민족 지도부(National Command)와 갈등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고, 두 지역 조직은 당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당의 핵심 이념은 아랍 민족주의였으며, 아플락의 저서 "피 사빌 알-바아쓰"("르네상스로 가는 길")는 오랫동안 주요 이념 서적으로 간주되었다.[10] 바트주의는 아랍 민족을 "영원한 메시지를 가진 하나의 아랍 민족"으로 규정하고 아랍 세계의 통일과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인종적 배타주의가 아닌 계몽주의적 이상에 기반했으며, 이슬람 또한 아랍 민족의 중요한 문화적 유산으로 포용했다.
시리아 지역 조직은 1966년 쿠데타 이후 아플락 등 초기 민족 지도부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970년 하피즈 알-아사드가 교정 운동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아사드 가문의 통치가 이어졌으나, 2024년 정권 붕괴로 사실상 해산되었다.
이라크 지역 조직은 1968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사담 후세인 시대에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사담 후세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산을 강조하는 이라크 민족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를 결합한 독자 노선을 추구했으나[45],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등을 거치며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고 결국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정권이 붕괴되었다.
4. 1. 전국 조직
1940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창당된 바트당은 1947년 4월 7일 제1차 당대회를 다마스쿠스에서 개최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점차 아랍 각국으로 세력을 넓혀 1949년 팔레스타인, 1951년 레바논, 1952년 이라크, 1954년 요르단, 1958년 남예멘, 1964년 수단에 각각 지부를 설립하며 범아랍 정당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카타르와 튀니지에서는 활동이 불법화되었다. 여러 지부 중 시리아와 이라크 지부가 가장 강력했으며, 두 나라의 바트당은 모두 1963년에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후 이라크 바트당은 시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추구하며 다마스쿠스의 중앙 지도부와 당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고, 레바논을 제외한 아랍 각국의 바트당 지부들은 점차 이라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아랍연합공화국(UAR)의 실패, 즉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 실패 이후, 바트당 내부에서는 지역주의자(Qutriyyunar)와 국가주의자(범아랍주의자)(Qawmiyyunar)라는 두 주요 파벌 간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당은 여전히 아랍 통일을 추구했지만, UAR 해체를 반대하지 않았고 감마르 압델 나세르 통치 하의 이집트와 새로운 연합을 원하지 않는 모순적인 입장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 지도부는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당내 범아랍 국가주의자들은 나세르주의자로 변모했고, 온건 아랍 국가주의자들은 나세르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주의 연합당을 창당했다. 나세르와 연합 시대에 모두 환멸을 느낀 세력은 바트당에 남았지만, 범아랍주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1962년 2월 21일, 국가 사령부(National Command)는 UAR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며 나세르의 이집트와 분권화된 연방 연합 형태의 UAR 재건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범아랍 프로젝트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많은 일반 당원, 특히 시리아 지역 지부 당원들은 범아랍주의와 아플라크 중심의 당 지도부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시리아 지역 지부가 재건되었을 때, 다수의 지방 당원들은 드루즈족, 알라위족, 이스마일리파 출신이었다. 이들은 시리아 지역 지부 해산 사실을 통보받지 못해 사실상 국가 사령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1962년 제5차 전당대회에서 지역주의자들이 채택한 "과거의 실수를 감안하여 이집트와의 연합을 갱신한다"는 슬로건을 지지했지만, 이를 실현 가능한 목표라기보다는 선전 구호로 여겼다.
당원들 사이에서 범아랍 프로젝트에 대한 환멸이 커지면서 당의 사회주의 해석은 급진화되었다. 전 시리아 공산당 당원이었던 야신 알 하피즈(Yasin al-Hafiz)는 아랍 사회주의 개념을 지역 조건에 맞춘 과학적이고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자말 알 아타시(Jamal al-Atassi)는 1963년 기존의 아랍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계급 투쟁이 사회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며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개념 채택을 촉구했다.
함무드 알 슈피(Hammud al-Shufi)는 시리아 지역 조직의 책임자였던 시리아 지역 서기 시절, 당내 마르크스주의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여러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당원들을 시리아 지역 당의 고위직에 등용했다. 한편, 알리 살리 알 사디(Ali Salih al-Sadi)가 이끄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1963년 이라크 지역 지부를 장악하여 당 이념의 공식적인 급진화를 이끌었다.
제6차 전당대회에서는 당 이념에 관한 헌장을 작성할 이념위원회가 선출되었고, 그 결과물로 ''출발점들(Points of Departure)''이라는 문서가 나왔다. 이 문서는 아랍 통일의 중요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키고 사회주의를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 개념들이 바트당의 개념과 함께 사용되었지만, 특정 개념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원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제6차 전당대회는 인민민주주의와 같은 핵심 마르크스-레닌주의 원리를 차용하여 사회주의 전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사회주의적 미래로 향하는 여정을 이끌어가는 중재자이자 지도자(권력을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11]
''출발점들''은 당의 전통적인 이념과의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지만, 아랍 통일에 사회주의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바트주의를 포괄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구세대를 비판했다. 이 문서는 아랍 통일이 진보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중요성을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필수 불가결한 기반"으로 재정의했다. 이는 아랍 통일을 중간 목표로 보았지만 고전적 바트주의의 중심에 두었던 아플라크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었다.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 당의 즉각적이고 주요한 목표로 부상한 것이다.
편협하고 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기존의 아랍 사회주의 개념은 "아랍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출발점들''은 사유재산에 대한 고전적인 바트당의 견해를 비판했다. 과거 바트당은 소부르주아 계층을 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유재산을 지지했으나, 새 문서는 경제의 주요 부문 국유화, 소부르주아의 사회주의 경제로의 점진적 통합,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과 그 연합 세력의 제거를 촉구했다. 국가 자본주의로의 변질을 막기 위해 사회주의 경제는 전위 정당과 노동 대중의 참여를 통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아랍 사회주의로 가는 길"의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 노동 대중의 경제 관리 참여와 함께 경제의 주요 부문을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필요한 혁명을 실행하기 위한 집단 농장을 조성하는 것…대회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혁명적 전위"에 의해 이끌어져야 하며, 최종 목표는 진정한 국민을 구성하는 계급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국가의 급속한 발전을 보장하는 "인민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체제는 당을 중심으로, 대중 조직과 평의회를 이끌고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운영될 것이다. [12]
4. 2. 지역 조직
1940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창당된 바트당은 1947년 4월 7일 제1차 당대회 이후 아랍 각국으로 세력을 넓혔다. 1949년 팔레스타인, 1951년 레바논, 1952년 이라크, 1954년 요르단, 1958년 남예멘, 1964년 수단에 각각 지부를 설립하여 범아랍 정당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카타르와 튀니지에서는 불법화되었다.이 중 시리아와 이라크의 당 조직이 가장 강력했으며, 두 나라 모두 1963년에 바트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후 이라크 바트당은 시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추구하며 다마스쿠스의 지도에서 이탈했고, 두 조직은 당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레바논을 제외한 다른 아랍 국가의 바트당 지부들은 점차 이라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랍연합공화국(UAR), 즉 이집트와 시리아의 연합 실패 이후 바트당 내부에서는 큰 분열이 발생했다. 당은 지역주의자들(Qutriyyun|쿠트리윤ar)과 국가주의자(범아랍주의자)들(Qawmiyyun|카우미윤ar)로 나뉘었다. 이집트와의 연합이 붕괴되면서 바트당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당은 여전히 아랍 통일을 추구했지만, UAR 해체에 반대하지 않았고 감마르 압델 나세르 통치 하의 이집트와 새로운 연합을 추진할 의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합주의를 표방했던 바트당 지도부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바트당 내 범아랍 국가주의자들은 나세르주의자가 되었고, 보다 온건한 아랍 국가주의자들은 나세르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주의 연합당을 창당했다. 나세르와 연합 시대에 모두 환멸을 느낀 세 번째 그룹은 바트당에 남았지만, 범아랍주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1962년 2월 21일, 국가 사령부는 UAR의 성공과 실패를 언급하며 나세르의 이집트와 분권화된 연방 형태의 연합으로 UAR을 재건하자고 제안하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일반 당원들은 범아랍주의와 미셸 아플라크의 지속적인 당 장악에 환멸을 느껴 이러한 정책 변화에 반대했다.
시리아 지역 지부가 재건되었을 때, 지방 당원들의 대다수는 드루즈족, 알라위족, 또는 이스마일리파 출신이었다. 이들 지방 당원들은 시리아 지역 지부가 해산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지방 지부와 국가 사령부 간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1962년 지역주의자들이 제5차 전당대회에서 채택한 "과거의 실수를 감안하여 이집트와의 연합을 갱신한다"는 슬로건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이는 실현 가능한 목표라기보다는 선전 구호로 여겨졌다.
4. 3. 군 조직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군 조직'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5. 각국의 바트당
1940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창당된 바트당은 1947년 제1차 당대회 이후 범아랍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여러 아랍 국가로 세력을 확장했다. 팔레스타인(1949년), 레바논(1951년), 이라크(1952년), 요르단(1954년), 남예멘(1958년), 수단(1964년) 등지에 지부를 설립하며 범아랍 정당으로 기능했다. 다만 카타르와 튀니지에서는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다.
여러 지부 중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으며, 두 나라 모두 196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이라크의 바트당은 시리아 중심의 지도부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양측은 당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레바논을 제외한 다수 아랍 국가의 바트당 지부들은 점차 이라크 바트당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레바논, 요르단, 예멘, 팔레스타인 등 다른 국가들에서도 바트당 조직이 활동했으나, 내부 분열을 겪거나 소규모 정당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이라크 노선을 지지하는 주요 세력으로는 요르단과 예멘의 바트당이 남아있다. 그 외 수단, 모리타니, 바레인 등에서도 소규모 바트당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 각 국가별 바트당의 구체적인 역사와 활동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5. 1. 시리아
1940년 알라위파 출신 아랍 민족주의자 자키 알아르수지와 그의 제자들이 다마스쿠스에서 비밀 결사 "아랍 바아스"를 결성한 것이 시초 중 하나로 여겨진다.[42] 1947년에는 미셸 아플락과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 등이 중심이 되어 다마스쿠스에서 창당 대회를 열고 정식 정당으로 출범했다. 1953년 악람 알하우라니가 이끌던 아랍 사회당과 합병하여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으로 개칭했다.1954년 아디브 시샤클리 군사 정부가 무너지고 민주정이 복원되면서 바트당은 시리아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해 총선에서 142석 중 15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고, 시리아 공산당(SCP)과 함께 노동자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주요 정당이었다. 친이집트 성향, 반제국주의 기조, 사회 개혁 주장으로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시리아 사회국민당(SSNP), SCP 등 다른 정당들과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군부 내 지지 기반 확보에도 힘썼다.
1958년 이집트와의 통합으로 아랍 연합 공화국(UAR)이 결성되자 바트당은 스스로 해산했으나, 1961년 시리아 쿠데타로 UAR이 해체되자 1962년 당을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당내 군사위원회는 아플락 등 민간 지도부의 승인 하에 쿠데타를 준비했다.

1963년 3월 8일, 군사위원회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3월 8일 혁명). 쿠데타 직후 바트당원과 나세르주의자들로 구성된 혁명사령부 국가평의회(NCRC)가 설립되었으나, 실권은 군부가 쥐고 있었다. 당시 당원 수가 2,500명에 불과했던 바트당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으며, 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은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집권 이후 바트당 내에서는 이념적 갈등과 파벌 싸움이 격화되었다. 특히 이라크 지부의 알리 살리흐 알사아디 등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급진파가 부상하며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 도입을 주장했고, 이는 1963년 10월 제6차 전당대회에서 일부 반영되었다. 당의 창시자인 아플락은 이러한 변화에 반발했지만, 당 지도부는 점차 급진파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1966년 2월 23일, 군사위원회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살라 자디드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아플락과 비타르 등 기존 지도부를 축출했다. 이 쿠데타는 대시리아 건설을 우선시한 자디드의 "지역주의자"(qutri) 파벌과 전통적인 범아랍주의를 내세운 "국가주의자"(qawmi) 파벌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자디드와 그 지지자들은 아플락 등 온건파보다 더 급진적인 좌파 성향을 보였으며, 제6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급진 노선을 수용했다. 이 쿠데타는 시리아 바트당과 이라크 바트당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만들었으며, 시리아 바트당은 자키 알아르수지를 당 사상의 공식 창시자로 내세우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군부가 당과 국가를 완전히 장악하는 신바트주의 경향이 뚜렷해졌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시리아가 패배한 후, 당내 권력 투쟁이 다시 불거졌다. 결국 1970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하피즈 알아사드가 '교정 운동'이라 불리는 무혈 쿠데타를 통해 자디드를 실각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피즈 알아사드는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국민 진보 전선(PNF)을 결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바트당 일당 독재에 가까운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갔다. 그의 사후에는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승계했다.
시리아 바트당 정권은 같은 뿌리를 둔 이라크의 바트당 정권과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이는 양국 간의 주도권 경쟁, 이념적 차이, 그리고 시리아에서 축출된 아플락을 이라크가 보호한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43][44]
2024년 12월 8일, 시리아 내전 과정에서 반군 세력의 공세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붕괴했다. 이후 시리아 바트당 지역 지도부는 12월 11일 당의 모든 활동을 무기한 중단하고 당 자산을 시리아 과도 정부에 이관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18]
5. 2. 이라크
이라크의 바트당 지역 지부는 1951년[17] 또는 1952년[17]에 후아드 알리카비(Fuad al-Rikabi)에 의해 설립되었다. 다른 주장으로는 1948년에 리카비와 시아파 무슬림인 사둔 하마디(Sa'dun Hamadi)가 설립했다는 설도 있다.[45] 확실한 것은 리카비가 1952년 지역 지부의 초대 지역 서기로 선출되었다는 것이다.[45] 초기 당원 대부분은 리카비가 자신의 친구와 가족들을 중심으로 모집했기 때문에 시아파 무슬림이었다. 그러나 점차 수니파가 주도하게 되었다.[46]
1958년 7월 14일 혁명으로 하시미트 왕정이 타도되었을 때, 지역 지부는 300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다.[46] 이라크 지역 지부는 압드 알 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이 이라크의 아랍 연합 공화국 가입을 추진할 것이라는 이유로 그의 통치를 지지했다.[46] 카심 내각 16명의 구성원 중 12명이 바트당 당원이었다.[46] 그러나 카심은 권력을 장악한 후 아랍 연합 공화국에 대한 입장을 바꾸고 기존의 "이라크 우선 정책"으로 회귀했다.[46] 이러한 전환은 지역 지부와 다른 아랍 민족주의 단체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46] 이로 인해 지역 지부는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이끄는 그룹을 모아 카심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47]
지역 지부는 라마단 혁명에서 권력을 장악했다.[47] 쿠데타는 지역 지부의 주요 인물인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Ahmed Hassan al-Bakr)가 주도했다.[47] 음모자들은 나세르주의자인 압둘 살람 아리프(Abdul Salam Arif)를 대통령으로, 알 바크르를 총리로 임명했다.[47] 그러나 실제 권력은 지부의 지역 서기인 알리 살리 알 사디(Ali Salih al-Sadi)의 손에 있었다.[47] 권력을 장악한 후 지역 지부는 민병대인 국가경비대를 통해 공산주의 및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라크 전문가 말릭 무프티(Malik Mufti)는 아플락(Aflaq)이 알 사디의 당내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아리프의 쿠데타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48] 쿠데타로 지역 지부는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48] 쿠데타로 인해 알 바크르와 사담 등 여러 바트당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지부는 1964년 알 바크르를 지역 서기로 선출했다.[48]
1968년 7월의 쿠데타(7월 17일 혁명)부터 2003년 3월의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이라크에서 일당 독재 정치를 펼쳤다.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라크 국민은 문명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후손이다"라는 이라크 민족주의(와타니야)와 아랍 민족주의(카우미야)를 융합한 독자적인 바트주의를 만들어냈다.[45]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주도했지만, 이집트가 전년인 1978년 바그다드 정상회담에서 아랍 연맹에서 추방당하자 이라크를 아랍의 맹주로 만들려고 했다.[46]
1980년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많은 아랍 국가들과 소련, 프랑스, 중국 등 동서양의 강대국들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았다.[47] 미국과는 국교를 회복했고(1984년), 이란을 지원한 시리아 바트당과 북한[48] 에 대해서는 국교를 단절했다.[49][50]
세계 4위의 군사 강국이 된 이라크는 영토적 야심을 강화하여 걸프 전쟁에서 루마이라 유전을 둘러싼 갈등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지만, 미국 등 다국적군에 패배했다.
2003년 4월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자, 대부분의 당 간부는 이웃 나라 시리아로 망명하거나 이라크 전역에 잠복했다. 5월에는 미군에 의해 바트당 해산 선언이, 연합국 임시 당국(CPA)에 의해 “비바아스화 지령”이 발표되면서 바트당 출신 간부 및 당원에 대한 공직 추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구 정권 하에서 일해 온 공무원, 교사, 대학교 교수, 판사, 군인, 경찰, 의사 등이 일제히 실직했다.[51]
이 “비바아스화” 정책에 대해서는, 미국 국무부나 CPA의 전신인 복구 인도 지원실(ORHA) 관계자 등으로부터 “전후 이라크 통치를 어렵게 만든다”는 반대 의견도 제기되었지만[51], 국방부나 백악관 내 소위 “네오콘”에 가까운 그룹, 그리고 네오콘에 접근했던 반체제 단체인 “이라크 국민회의(INC)”의 아흐마드 찰라비가 이 “비바아스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 조치는 이후 이라크 복구에 필요한 인재를 몰아내 버렸다는 점에서 이라크 군 해체와 함께 미국의 점령 정책 실패로 비판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바트당 출신이기도 했던 아이야드 알라위 과도 정부 총리에 의해 일부에 한정하여 바트당 출신의 공직 추방 완화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바트당에 강경했던 이브라힘 알자파리 이행 정부 총리 시대에는, 모든 전 바트당 당원에 대한 공직 추방 및 처벌을 규정한 “비바아스화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의회 내 전 당원의 공직 복귀를 막기 위한 감시 기관인 “비바아스화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에 많은 전 간부 및 당원을 배출했던 수니파 아랍인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그 결과 누리 알말리키 정권 하에서 구 정권 하에서 범죄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간부 및 하급 당원에 한정하여 공직 추방 전면 해제, 연금 지급, 사회 복귀 지원을 하는 ‘책임과 정의’ 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전 당원의 공직 복귀가 허용되었다. 또한 이라크 정부와 해외에서 활동하는 이라크 바트당 사이에서 화해를 위한 협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9년 하반기에 이라크 국내에서 테러가 잇달아 발생하자, 시아파 주도의 이라크 정부는 테러 배후에 바트당이 있다고 비난하며 전 당원에 대한 대응이 강경해졌다. 2010년 1월, “정의와 책임 추궁 위원회”(비바아스화 위원회의 후신 기구)는 3월에 열릴 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 중에 “사담 구 정권 지지자가 섞여 있다”면서 전 바트당 당원과 구 정권 정보 기관 출신 후보자의 선거 참여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에 대해 수니파 정당과 세속 정당이 반발하여 법원에 항소했고, 이라크 고등법원도 “정의와 책임 추궁 위원회”의 결정을 무효로 판결했지만, 이 결정에 이라크 정부와 시아파 정당이 반발하여 판결을 대법원에 위임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정의와 책임 추궁 위원회”의 결정을 인정하여 전 당원의 출마는 금지되었다.
현재 이라크 공화국 신헌법에서는 바트당과 그와 관련된 조직은 '''범죄 조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재결당이나 사상의 보급, 동당에 대한 지지나 찬양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이라크 당국에 기소되어 체포된 전 바트당 간부의 재산 몰수 등이 결정되어 있다.
현재 바트당 지도자(RC 서기장)는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전 혁명 지도 평의회 부의장이며, 이자트 알두리는 사담의 처형 후 이 직책에 취임했다. 그러나 사담의 죽음으로 당내 노선 대립에 제동이 걸리지 않게 되고, 일부 당 간부는 이자트 두리 밑을 떠나 시리아 동부 하세케에서 회의를 열고, 전 당 군사국 멤버였던 젊은 바트당 간부 무함마드 유니스 알아흐마드를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했다. 이후 유니스는 이자트 두리를 당에서 추방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맞서 이자트 두리가 유니스와 그와 관련된 당원을 추방했다. 그 결과 이라크 바트당은 주류인 이자트 두리파와 측류인 유니스파로 분열되었다.[52]
두 파벌 중 이자트 두리와 그의 파벌은 이란과 동맹 관계에 있는 시리아 정부에 대해 깊은 불신을 품고 있으며, 제휴에도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자트 두리는 유니스파와의 내분으로 인한 당 분열에 관해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라크 바트당에 대한 미국의 음모를 지원한다면서 시리아 정부를 비난했다[52]. 이브라힘은 시리아 정부를 적대시하며 시리아 정부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고, 시리아 내전 발발 후에는 결국 시리아 정부와 결별하고 시리아 국내에서 활동하는 수니파 반체제 세력과 연대를 표명하는 등 대립 관계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니스는 시리아 정부와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 이라크 정부는 구 바트당 간부의 신병 인도를 시리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이라크 바트당은 이라크 국내와 시리아뿐만 아니라 요르단, 예멘 등 인근 아랍 국가, 프랑스 등 유럽에도 해외 지도부를 두고 자금 조달과 지하 간행물 발행을 통해 이라크 국내 구 정권 잔당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바트당 간부가 결성한 반제국주의를 내건 통일전선 이라크 애국 동맹(Iraqi Patriotic Alliance)은 공산주의자부터 이슬람주의자에 이르는 많은 반미 테러 조직을 규합하고 있으며, 사담의 공인이었다고 한다.
2008년 12월 18일, 뉴욕 타임스는 이라크 치안 담당자의 말을 인용하여 내무부 테러 대응 부대원 35명이 바트당 정권 부활을 위해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라크 내무부는 체포된 것은 내무부 교통 경찰 부장 등 간부와 하급 직원이며, 바트당 계열 무장 조직인 “알아우다”의 멤버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테러 대응 부대와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그들은 쿠데타가 아니라 내무부 건물 방화를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쿠데타를 기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사건의 발단이 내무부의 부패 고발에 있다거나 체포된 직원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보도도 있다. 이후 이라크 정부 자신이 쿠데타 의혹 자체를 부정하는 발표를 했다.
2009년 8월 26일, 이라크 군은 8월 19일 재무부와 외무부를 겨냥한 폭탄 테러 사건의 배후로 전 바트당 당원인 위삼 알리 카딤 이브라힘(Wissam Ali Kadhem Ibrahim)을 체포했다고 발표하고, 그의 진술 내용을 비디오 영상으로 기자단에 공개했다. 영상에서 위삼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은 자신이 1975년에 바트당에 입당하여 1995년까지 디얄라주 경찰로 근무했고, 2002년까지 변호사로 일했으며, 구 정권 붕괴까지 디얄라주 무크다디야시의 바트당 지도자였고, 2005년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망명하여 이라크 바트당 유니스파에 가입하여 2007년 8월 이라크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위삼은 테러 한 달 전 그의 상관인 시리아 거주 이라크 바트당 유니스파 간부 사타르 팔란(Sattar Farhan)이 “이라크를 혼란에 빠뜨리도록” 테러 계획 실행을 지시받았다고 밝혔다.
10월 25일에는 사법부와 바그다드 주청사를 겨냥한 동시 테러가 발생했고, 이라크 정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시리아에 거점을 둔 바트당 잔당 세력이 알카에다와 연계하여 이번 테러를 실행했다고 발표했다. 다시 테러 가담 혐의로 체포된 전 바트당 당원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의 진술을 공개했다.
파리에 거점을 둔 “Intelligence Online” 웹사이트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다마스쿠스에서 이라크 바트당 지도자와 회합을 가졌다고 보도했다[53]. 회합에서 바트당 측은 무장 투쟁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바트당의 정치 참여 허용, 바트당 계열 무장 세력의 이라크군 편입, 비바아스화법 폐지를 요구했다고 한다. 회합은 요르단 종합 정보부의 주선으로 2009년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의 목적은 시아파 주도의 이라크 정부와 바트당의 화해를 중재하는 것이라고 하며, Intelligence Online은 “CIA의 전략이 실패하면 미군은 내전 중인 국가에서 철수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2011년 10월 이라크 정부는 국내에서 테러를 기도했다면서 구 이라크 군 장교를 포함한 620명의 전 바트당 당원을 구금하고, 추가로 350명의 전 당원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고 밝혔다.
내무부 간부 아드난 알아사디에 따르면 실제 체포자 명단에는 800명 이상의 전 바트당 당원이 포함되어 있으며, 바트당원이 2011년 말 미군 철수 후 폭동, 암살, 시아파를 겨냥한 폭탄 테러 등을 계획했다고 한다. 아사디에 따르면 바트당은 이슬람국가(ISIL)를 통해 알카에다 이라크와 협력하고 있으며, 자금 제공, 정보 제공, 병참 지원 등이 바트당의 역할이라고 한다[54].
이자트 알두리와 그가 이끄는 성전과 해방의 최고 사령부(Supreme Command for Jihad and Liberation) 및 낙시반디 군(Army of the Men of the Naqshbandi Order) 등 무장 집단은 이슬람국가(ISIL)와 협조하여 2014년에는 모술 공략 등에도 참가하여 “이슬람국가”의 이라크 북서부 세력 확장을 도왔다.
그러나 이자트 두리파의 지지 기반 일부는 수피 신자이며, “이슬람국가”의 급속한 세력 확장에 경계심을 강화하여 동맹 관계는 2014년 말에 결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피에 속하지 않는 당 관계자 중에는 “이슬람국가”와의 협력을 계속하는 자나 “이슬람국가” 구성원이 된 자도 있으며, 동맹 관계 결렬 시 이들 전 당 관계자는 “이슬람국가”의 이자트 두리파 공격에 가담했다. 또한 이자트 두리가 이끄는 무장 조직은 이라크 정부와의 전투도 계속하여 곤경에 처했다. 그리고 2015년 4월 18일 이라크 군이 17일에 실시한 소탕 작전으로 이자트 두리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55]
현재 이라크 바트당은 양파로 분열된 채 파벌 대립이 전혀 수습되지 않고 있다. 이자트 두리파는 무함마드 유니스 알아흐마드를 이라크 정부와의 협상에서 배제하기를 바라며, 유니스파는 이라크 국내 파괴 및 점령에 대한 이자트 두리파의 책임을 비난하고, 두리파의 정치적 복권을 거부하고 있다[56].
5. 3. 레바논
레바논 지부는 1951년[1] 또는 1949년에서 1950년 사이에 결성되었다. 아랍연합공화국(UAR) 시기에는 나세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1960년 4월, UAR은 레바논 지부의 기관지인 As Sahafäh|아스 사하파ara가 UAR 통치하의 시리아로 반입되는 것을 금지했다.레바논 지부는 트리폴리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가졌다. 1960년 레바논 총선에서 압드 알-마지드 알-라페이(Abd al-Majid al-Rafei)는 국회의원 당선에 근접했으나 실패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레바논 공산당의 강력한 비판이 이어졌는데, 트리폴리에서는 공산당이 라시드 카라미 후보를 지지하여 바트당의 승리를 막으려 했다. 1961년 7월 17일에는 압둘라 리마위(Abdullah Rimawi)가 이끄는 경쟁 바트당원들이 레바논 지부 회원 여러 명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UAR 시대 시리아 지부에서 나타난 파벌 갈등은 레바논 지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바논 대표단이 주로 참석한 제4차 전당대회(레바논 개최)에서는 나세르에 반대하는 결의안들이 통과되었다. 또한 아플락과 비타르의 지도력과 이념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집트와의 연합을 서둘렀고, 1958년 시리아 지부를 잘못 해산했으며, 사회주의보다 범아랍주의를 우선시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 결의안은 또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더 활용하고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 사이에서 당의 기반을 강화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레바논 지부의 입장에 대응하여 아플락은 제5차 전당대회에서 이라크 대표단을 동원해 레바논 대표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제6차 전당대회에서는 레바논 지부의 주브란 마즈달라니(Jubran Majdalani)와 칼리드 알-알리(Khalid al-Ali)가 전국 지휘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7차 전당대회에서는 전국 지휘부가 군사위원회와 협력하여 레바논 지부의 좌파 성향 인물들을 지도부에서 제거하거나 제명했다. 그럼에도 레바논 지부는 마즈달라니, 알-알리, 압드 알-마지드 라피(Abd al-Majid Rafi) 세 명을 전국 지휘부에 선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레바논의 바트당은 시리아의 영향을 받는 시리아파와 이라크의 영향을 받는 이라크파로 분열되었다.[1] 이라크파는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와해되었으나, 2006년 6월 حزب طليعة لبنان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히즈브 탈리아 루브난 알 아라비 알 이시티라키ara (아랍 사회주의 레바논 전위당)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2]
5. 4. 요르단
1940년대 후반, 바트주의 사상은 요르단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요르단강 동쪽으로 처음 퍼져나갔다. 지역 지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되기 전에도 학생과 교수들이 모여 바트주의 사상을 논의하는 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다. 1951년 알카락의 한 교사 그룹이 지역 지부를 설립했으며, 초기에는 아브드 알라만 슈카야르의 진료소가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는 바흐자트 아부 가르비야가 첫 번째 당원이 되어 조직 구축을 책임졌으며, 주로 예루살렘과 람알라에서 활동이 활발했다.1951년 압둘라 리마위의 집에서 제1차 지역 대회가 열려 당의 방향을 설정했고, 이듬해인 1952년 압달라 나와스의 집에서 열린 제2차 지역 대회에서는 지역 사령부를 선출하고 리마위를 지역 서기로 임명했다. 슈카야르, 가르비야, 나와스는 지역 지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리마위와 나와스의 주도로 지부는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당원 모집에 성공을 거두었다. 1954년에는 범아랍 바트당의 요르단 지부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1956년 8월 28일, 요르단 바트당 지부는 고등법원에 의해 합법 정당으로 인정받았다. 그 이전에도 리마위와 나와스는 1950년과 1951년 요르단 의회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바 있다 (당시 지부는 합법 정당이 아니었다). 1951년 선거에서는 총 3명의 바트당 관련 인사가 의회에 진출했으며, 리마위는 1956년 선거까지 의석을 유지했다. 그러나 당시 선거는 민주적으로 치러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슈카야르는 1951년 선거 당시 급진적인 견해 때문에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낙선하기도 했다. 바트당 후보들은 주로 요르단강 동쪽의 이르비드와 암만, 서안 지구의 예루살렘과 나블루스에서 지지를 받았다.
정부에 의해 요르단 남부로 강제 망명되었던 슈카야르는 망명 기간 동안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서적을 접하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망명에서 돌아온 후 요르단 공산당과의 선거 연합을 추진하려 했으나, 리마위, 나와스, 가르비야, 무니프 알라자즈 등 다른 지도부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바트당을 떠났다.
합법화 이후 바트당은 다시 활동이 금지되어 비합법 정당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93년에는 이라크의 이라크 바트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당명을 '요르단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حزب البعث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 الأردني|히즙 알바아스 알아라비 알이슈티라키 알우르두니ar)으로 변경하였다. 현재 요르단 바트당은 예멘의 바트당과 함께 이라크 바트당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남아있다.
5. 5. 기타 국가
1940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창당된 바트당은 1947년 4월 7일 제1차 당대회 이후 아랍 각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949년 팔레스타인, 1951년 레바논, 1952년 이라크, 1954년 요르단, 1958년 남예멘, 1964년 수단에 지부를 설립하며 범아랍 정당으로 기능했으나, 카타르와 튀니지에서는 불법화되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이 가장 강력했으며, 두 나라 모두 1963년에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후 이라크 바트당은 시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걸으며 시리아 바트당과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고, 레바논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랍 국가 바트당 지부들은 이라크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레바논: 시리아파와 이라크파로 분열되었다. 이라크파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와해되었으나, 2006년 6월 '아랍 사회주의 레바논 전위당'(حزب طليعة لبنان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ar)으로 재건되었다.
- 요르단: 1954년 지부가 결성되었으나 이후 불법화되었다. 1993년 이라크 바트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요르단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Jordanian Arab Socialist Ba'ath Party영어)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현재 이라크 바트당을 지지하는 세력 중 하나이다.
- 예멘: '예멘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지역 지도부'(Arab Socialist Ba'ath Party – Yemen Region영어)로 시작하여 북예멘과 남예멘에 지부가 설립되었다. 현재는 두 파로 분열되었으며, 한 분파는 '바트 민족당'으로 개칭했으나 예멘 대의원의 기능 정지로 인해 활동이 미미하다. 예멘의 바트당 역시 이라크 바트당을 지지한다.
- 팔레스타인: 바트주의를 표방하는 두 조직, 즉 이라크 바트당의 지원을 받는 '아랍 해방 전선'(جبهة التحرير العربية|자브하트 앗타흐리르 알 아라비야ar, ALF)과 시리아 바트당의 지원을 받는 '알사이카'(منظمة الصاعقة|무나잠맛 알사이카ar)가 설립되었다.
- 리비아: 1950년대 아므르 타헤르 데가예스(Amr Taher Deghayes)에 의해 지역 지부가 설립되었다. 아랍 연합 공화국 수립 이후 바트주의는 리비아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많은 지식인들이 이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나세르주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부는 나세르주의자로 전향했다. 1960년대 초, 리비아 왕국 정부는 바트당원과 나세르주의자 군 장교들을 왕국의 체제 전복 혐의로 투옥했으며, 형량은 8개월에서 2년까지 다양했다. 1964년까지 리비아 지역 지부는 지역 사령부 아래 한 단계인 지부 수준만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며, 당시 당원 수는 50명에서 150명 사이로 추산된다.
- 쿠웨이트: 바트당 창당 이후 지역 지부가 설립되었다.
- 사우디아라비아: 지역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알리 가남(Ali Ghannam)이 제7차 전국 지휘부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1966년 분열 이후 어느 파를 지지했는지는 불분명하나,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사우트 알탈리야''(Sawt al-Tal'iyyaar)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사우디 왕가와 미국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당원 대부분은 시아파 무슬림이었다.
- 튀니지: 1950년대 지역 지부가 설립되었으나 오랫동안 지하 조직으로 활동해야 했고 불법화되었다. 2011년 재스민 혁명 이후 합법 정당으로 인정받았다.
- 수단: 1963년 말 바트당 세포 조직이 설립되고 있었으며, 1964년 공식 지부가 설립되었다. 현재 소규모 정당으로 존재한다.
- 알제리: 1988년 일당제 종식 이후 '알제리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이 설립되었다.
- 모리타니, 바레인: 소규모 정당으로 바트당이 존재한다.
- 이집트: 1963년 말 바트당 세포 조직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 카타르: 바트당 활동이 불법화되었다.
6. 주요 당원
6. 1. 시리아
시리아의 바트당은 정식 명칭이 Arab Socialist Ba'ath Party – Syria Region|아랍 사회주의 바아스당 시리아 지역 지도부영어이다. 이 당은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정당들과 연립하여 National Progressive Front|국민 진보 전선영어(PNF)이라는 협력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당의 기원은 1940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라위파 출신의 아랍 민족주의자 자키 알-알수지와 그의 제자들이 다마스쿠스에서 비밀 결사 '아랍 바아스'를 결성했다. 알-알수지는 니체, 마르크스, 헤겔, 피히테, 베르그송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42]
1947년, 다마스쿠스에서 미셸 아플락과 살라후딘 알비타르가 중심이 되어 창당 대회를 열고 '아랍 바아스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이들은 당시 الطليعة|알-탈리아ar(전위)라는 신문의 편집자였으며 아랍 부흥 운동(Harakat al-Ihya al-'Arabi)을 이끌고 있었다. 1953년에는 악람 알하우라니가 이끌던 아랍 사회당과 합병하여 '아랍 사회주의 바아스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4년, 아디브 시샤클리의 군사 정부가 무너지고 민주 체제가 복원되면서 바트당은 시리아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 해 시리아 총선에서 142석 중 15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다. 당시 바트당은 시리아 공산당(SCP)을 제외하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었다. 친이집트적 입장, 반제국주의적 태도, 사회 개혁 주장 등으로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바트당은 대시리아 건설을 주장했던 시리아 사회국민당(SSNP) 등 다른 이념적 경쟁자들과 경쟁했으며, 특히 계급 투쟁과 국제주의를 내세운 시리아 공산당(SCP)과는 주요한 적대 관계였다. 이들 정당은 의회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활동하며 군부 내 지지 기반 확보에 힘썼다.
1957년 말, 시리아 공산당의 세력이 강해지자 위기감을 느낀 바트당은 이집트와의 연합을 촉구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이는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고,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아랍 연합 공화국(UAR)을 결성했다. 바트당 지도부는 특정 정당의 활동 금지가 경쟁자인 공산당에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 판단하여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UAR은 1961년 다마스쿠스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인해 해체되었다. 악람 알하우라니와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나중에 서명을 철회)를 포함한 일부 바트당 출신 정치인들도 쿠데타 지지 성명에 참여했다. UAR 해체 후, 바트당은 1962년 당 대회를 통해 재건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내 군사위원회는 민간 당원들에게는 존재를 숨겼으며, 미셸 아플락과 접촉하여 쿠데타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이라크 바트당이 라마단 혁명으로 집권에 성공하자, 시리아 바트당의 군사위원회는 나짐 알쿠드시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를 서둘렀다. 1963년 3월 8일 쿠데타 (소위 '3월 8일 혁명')는 성공했고, 시리아에 바트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쿠데타 주도 세력은 '혁명사령부 국가평의회'(NCRC)를 설립했으나, 이는 처음부터 군인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구조였다.
집권 이후 바트당 내부는 극심한 분열에 시달렸다. 소수파였던 군사위원회가 실권을 장악했으며, 1963년 중반 당원 수가 2,500명에 불과할 정도로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다. 이후 당원 수가 늘었지만 권위주의적 통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민간파는 급진 사회주의자와 온건파로 나뉘어 갈등했고, 군부 내에서도 분열이 있었다. 시리아 지역 사령부는 점차 당의 중앙 조직인 국가 사령부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1966년 시리아 쿠데타로 이어졌다. 이 쿠데타로 미셸 아플락을 비롯한 창당 세대 민족 지도부는 살라흐 자디드 등 시리아 지역 지도부에 의해 축출되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시리아가 패배하자, 당내 온건파였던 하페즈 알아사드가 1970년 쿠데타(교정 운동)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하페즈 알아사드와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로 이어지는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시리아 바트당과 이라크 바트당은 같은 이념을 표방했지만, 양국 간의 주도권 다툼과 미셸 아플락 망명 문제 등으로 인해 심각한 대립 관계에 있었다. 아플락은 1966년 쿠데타 이후 이라크로 망명하여 이라크 바트당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는 알-알수지를 지지했던 자디드와 아사드에게 불만을 샀다.[43][44]
미국의 부시 행정부 시절, 레바논 문제와 팔레스타인 분쟁 등으로 대립하던 시리아를 고립시키기 위해 미국 의회 내 강경파 의원들과 보수 논객들 사이에서 시리아 바트당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2024년 12월 8일, 시리아 내전 끝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붕괴했다. 이후 시리아 지역 지도부는 12월 11일 당의 모든 활동을 무기한 중단하고 당 자산을 시리아 과도정부로 이전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실상 해산 상태가 되었다.[18]
6. 2. 이라크
정식 명칭은 '''아랍 사회주의 바스당 이라크 지역 지도부'''이다. 이라크 바스당은 시리아에서 창설된 바스당의 이라크 지부로 결성되었다. 1951년 4월 7일에 "당 지역 지도부"(RC)가 설립되었고, 이듬해인 1952년에 "당 민족 지도부"(NC)가 설치되었다. 당 지역 지도부 초대 서기장은 후아드 리카비이다.1968년 7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이라크에서 일당 독재 정치를 펼쳤다.
집권 초기인 1967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단절했으며, 1972년에는 소련과 우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1970년대 말까지 소련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개선되기도 했다.
1979년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이라크 국민은 문명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이라크 민족주의(와타니야)와 아랍 민족주의(카우미야)를 융합한 독자적인 바스주의를 내세웠다.[45] 또한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주도했으며, 이집트가 1978년 바그다드 정상회담 결정으로 아랍 연맹에서 추방되자 이라크를 아랍의 맹주로 만들려 시도했다.[46]
1980년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많은 아랍 국가들과 소련, 프랑스, 중국 등 동서양 강대국들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았다.[47] 전쟁 중이던 1984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회복했으나, 이란을 지원한 시리아 바스당과 북한[48]과는 국교를 단절했다.[49][50][51]
전쟁을 거치며 세계 4위의 군사 강국으로 부상한 이라크는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며 걸프 전쟁에서 루마이라 유전을 둘러싼 갈등을 빌미로 쿠웨이트를 침공했으나,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에 의해 패배했다.
7. 평가 및 비판
바트당은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이념을 내걸고 출범했으나[42],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집권한 이후에는 권력 투쟁과 일당 독재 체제 구축으로 이어지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양국의 바트당 정권은 같은 이념적 뿌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도권 다툼과 정치적 이견으로 인해 상호 대립 관계에 놓였다.[43][44]
시리아에서는 1970년 하피즈 알-아사드의 집권 이후 아사드 가문의 세습 통치가 이어졌으나, 2024년 아사드 정권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의 독재 하에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등 침략 전쟁을 일으켜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정권이 붕괴되었다.
정권 붕괴 후 이라크에서는 연합국 임시 당국(CPA) 주도의 '비바트화' 정책이 시행되어 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직 추방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이라크 재건에 필요한 인력 부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52] 이후 이라크 바트당 잔존 세력은 테러 활동 연루 의혹과 내부 분열[53][58]을 겪었으며, 현 이라크 헌법은 바트당을 범죄 조직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 시기에는 시리아 바트당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7. 1. 긍정적 평가
바트당은 그 창립 배경에서 아랍 민족주의 이념을 핵심으로 삼았다. 1940년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자키 알-알수지(Zaki al-Arsuzi)와 같은 알라위파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니체, 마르크스, 헤겔 등 서구 사상가들의 영향[42] 아래 비밀 결사 "아랍 바아스"를 조직한 것이 시초였다. 이후 1947년 미셸 아플락(Michel Aflaq)과 살라후딘 알-비타르(Salah al-Din al-Bitar) 등이 주도한 아랍 부흥 운동(حركة الإحياء العربي|Harakat al-Ihya al-'Arabiar)을 기반으로 공식 정당으로 출범하였다.당명 자체에 '아랍 사회주의 바아스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분열된 아랍 민족의 통합과 부흥(바아스)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이상을 통해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지향점을 가졌다. 이는 1953년 악람 알-홀라니(Akram al-Hawrani)가 이끌던 아랍 사회당과의 합당을 통해 더욱 명확해졌다.
이라크의 경우, 1979년 집권한 사담 후세인은 아랍 민족주의(카우미야)와 이라크 고유의 민족주의(와타니야)를 결합한 독자적인 바트주의를 내세웠다.[45] 이를 바탕으로 이집트가 아랍 연맹에서 축출된 상황을 이용하여 이라크를 아랍 세계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46] 이러한 아랍 민족주의적 기치는 이란-이라크 전쟁 등에서 다른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47]
7. 2. 부정적 평가
시리아 바트당은 1966년 시리아 쿠데타를 통해 창립 멤버인 미셸 아플락 등을 축출하는 내부 권력 투쟁을 겪었다. 이후 1970년 하피즈 알-아사드가 다시 쿠데타(교정 운동)로 집권하면서 아사드 가문의 장기 집권 토대를 마련했다. 시리아 정권은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정당들과 연립하여 국민 진보 전선(PNF)을 결성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바트당이 독점했다. 2024년 12월 8일,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반정부 시위와 내전 격화로 붕괴하자, 시리아 지역 지도부는 12월 11일 당 활동의 무기한 중단을 선언하며 사실상 해산되었다.[43][44]이라크 바트당은 1968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이라크에서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1979년 집권한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민족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를 결합한 독자 노선을 걸으며 아랍 세계의 맹주가 되려 했다.[45][46] 이를 위해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촉발했으나 다국적군에 패배했다.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정권이 무너진 후, 미군과 연합국 임시 당국(CPA)은 바트당 해산 및 "비바트화 지령"을 통해 당원들의 공직 추방을 단행했다. 이 조치는 구 정권 하에서 일했던 공무원, 군인, 교사, 의사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대거 실직시켜 이라크 재건에 필요한 인력 부족 문제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2] 이후 공직 추방 완화 조치가 일부 시행되기도 했으나, 새로운 이라크 헌법은 바트당을 범죄 조직으로 규정하고 당의 재건이나 사상 전파, 지지 및 찬양 행위를 금지했다.
정권 붕괴 후 바트당 잔존 세력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시리아 등 주변국으로 망명했으며, 일부는 무장 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이들은 2008년 쿠데타 기도 의혹[54], 2009년 바그다드 정부 청사 폭탄 테러[55][56] 등 각종 테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특히 이슬람국가 (ISIL)와 협력하여 2014년 모술 함락 등에 가담하기도 했으나,[57] 이후 ISIL의 급진성에 대한 반발 등으로 협력 관계는 결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바트당은 사담 후세인 사후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파와 무함마드 유니스 알아흐마드파로 분열되어 내부 갈등을 겪고 있다.[53][58]
8. 한국과의 관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란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북한과 국교를 단절한 바 있다.[48][49][50][51] 시리아 바트당 정권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8. 1. 시리아
-- | |
자키 알-알수지 |
정식 명칭은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 시리아 지역 지도부'''(Arab Socialist Ba'ath Party – Syria Region영어)이다. 시리아의 바트당 정권은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정당들과 연립하여 협력 조직인 “국민 진보 전선”(PNF)을 결성했다.
시리아 바트당의 기원은 1940년 12월, 니체, 마르크스, 헤겔, 피히테, 베르그송의 사상에 영향[42]을 받은 알라위파 아랍 민족주의자 자키 알-알수지와 그의 제자들이 다마스쿠스에서 비밀리에 “아랍 바트”(البعث|알-바트ar, 부흥)라는 이름의 조직을 결성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1947년, 다마스쿠스에서 الطليعة|알-탈리아ar(al-Tali`a, 전위)의 편집자이자 아랍 부흥 운동(Harakat al-Ihya al-'Arabiar)을 이끈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후딘 알-비타르 등을 중심으로 창당 대회를 열고 정당(아랍 바트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1953년에는 악람 알-홀라니가 이끄는 아랍 사회당과 합병하여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으로 개칭했다. 1963년 3월 8일 쿠데타(바트 혁명)를 통해 집권당이 되었다.
그러나 1966년 시리아 쿠데타에서 아플라크 등 당 민족 지도부는 살라흐 자디드 등 당 시리아 지역 지도부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시리아가 패배하자, 당 온건파인 하피즈 알-아사드가 1970년 쿠데타(교정 운동)로 정권을 장악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은 같은 이념을 내세우고 같은 해에 정권을 잡았지만, 양국의 주도권 다툼과 더불어, 알-알수지를 지지했던 자디드와 아사드에게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아플라크를 이라크가 보호한 것에 대한 불만 등으로[43][44]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 하에서 레바논 문제와 팔레스타인 분쟁 등에서 대립하던 시리아를 고립시키기 위해 미국 의회의 일부 강경파 의원과 보수 논객들을 중심으로 바트당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2024년 12월 8일 반군의 공세로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붕괴하자, 시리아 지역 지도부는 같은 해 12월 11일 당의 활동을 무기한 중단하고 당 자산을 시리아 과도 정부(Syrian transitional government영어)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여 사실상 해산되었다.
8. 2. 이라크
정식 명칭은 '''아랍 사회주의 바스당 이라크 지역 지도부'''이다. 이라크 바스당은 시리아에서 창설된 바스당의 이라크 지부로 결성되었다. 1951년 4월 7일에 "당 지역 지도부"(RC)가 설립되었고, 그 이듬해인 1952년에 "당 민족 지도부"(NC)가 설치되었다. 당 지역 지도부 초대 서기장은 후아드 리카비이다.
1968년 7월의 쿠데타(7월 17일 혁명)부터 2003년 3월의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이라크에서 일당 독재 정치를 펼쳤다.
1967년에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1972년에 소련과 우호 조약을 체결했으며, 1970년대 말까지 소련과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개선되었다.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라크 국민은 문명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후손이다"라는 이라크 민족주의(와타니야)와 아랍 민족주의(카우미야)를 융합한 독자적인 바스주의를 만들어냈다.[45]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주도했지만, 이집트가 전년인 1978년 바그다드 정상회담에서 아랍 연맹에서 추방당하자 이라크를 아랍의 맹주로 만들려고 했다.[46]
1980년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많은 아랍 국가들과 소련, 프랑스, 중국 등 동서양의 강대국들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았다.[47] 미국과는 국교를 회복했고(1984년), 이란을 지원한 시리아 바스당과 북한[48] 에 대해서는 국교를 단절했다.[49][50][51]
세계 4위의 군사 강국이 된 이라크는 영토적 야심을 강화하여 걸프 전쟁에서 루마이라 유전을 둘러싼 갈등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지만, 미국 등 다국적군에 패배했다.
참조
[1]
서적
Saddam's Word: Political Discourse in Iraq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
논문
The Baʻth: A Study in Contemporary Arab Politics
1961-01-01
[3]
논문
Embracing Regime Change in Iraq: American Foreign Policy and the 1963 Coup d'etat in Baghdad
https://academic.oup[...]
2015-01-01
[4]
서적
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Diplomacy: Oil and Arab Nationalism in Iraq
Stanford University Press
[5]
논문
The Kennedy Administration, Counterinsurgency, and Iraq's First Ba'thist Regime
https://www.cambridg[...]
2023-07-30
[6]
논문
The Kennedy Administration, Counterinsurgency, and Iraq's First Ba'thist Regime
https://www.cambridg[...]
2011-11-09
[7]
논문
Embracing Regime Change in Iraq: American Foreign Policy and the 1963 Coup d'etat in Baghdad
https://academic.oup[...]
2015-01-01
[8]
웹사이트
Background Note: Syria
https://2009-2017.st[...]
2007-05-01
[9]
논문
A weekly review of politics, literature, theology, and art.
https://books.google[...]
[10]
웹사이트
Michel Aflaq
https://rpl.hds.harv[...]
[11]
논문
The Soviet Union and the Syrian Ba'th regime: From hesitation to Rapprochement
https://www.jstor.or[...]
2000-04-01
[12]
논문
The Soviet Union and the Syrian Ba'th regime: From hesitation to Rapprochement
https://www.jstor.or[...]
2000-04-01
[13]
웹사이트
Bashar's Syria: The Regime and its Strategic Worldview
http://www.herzliyac[...]
[14]
서적
The Truth About Syria
Palgrave Macmillan
[15]
논문
The Soviet Union and the Syrian Ba'th regime: From hesitation to Rapprochement
https://www.jstor.or[...]
2000-04-01
[16]
논문
The Soviet Union and the Syrian Ba'th regime: From hesitation to Rapprochement
https://www.jstor.or[...]
2000-04-01
[17]
웹사이트
Iraq — Politics: The Baath Party
http://countrystudie[...]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
[18]
웹사이트
Assad’s Baath party suspends work indefinitely in Syria
https://www.france24[...]
France 24
2024-12-11
[19]
웹사이트
Tunisian Baath Party Celebrates 5th Anniversary of Saddam Hussein's Death
http://www.tunisia-l[...]
Tunisia-live.net
2012-01-04
[20]
웹사이트
Embattled in Arabia
http://www.humansecu[...]
Human Security Gateway
2009-06-03
[21]
웹사이트
Baath Party resumes underground activities
http://www.alarabiya[...]
alarabiya.net
2008-09-08
[22]
웹사이트
バアス党
https://kotobank.jp/[...]
2018-09-23
[23]
웹사이트
バアス党
https://kotobank.jp/[...]
2018-09-23
[24]
웹사이트
バアス党
https://kotobank.jp/[...]
2018-09-23
[25]
웹사이트
バアス党
https://kotobank.jp/[...]
2018-09-23
[26]
웹사이트
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Order Number 1: De-Ba'athification of Iraqi Society
http://www.iraqcoali[...]
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27]
웹사이트
Internal Statement
https://newspaper.al[...]
2024-12-11
[28]
웹사이트
Baath Party Of Syria's Assad Says Suspends Work Indefinitely
https://www.barrons.[...]
2024-12-11
[29]
논문
The Baʻth: A Study in Contemporary Arab Politics
[30]
뉴스
シリア:「国民対話会議」開催へ 主要な反体制派参加拒否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8-01-29
[31]
방송
授業番組「現代の国際政治」シリーズ 第8回「イラク(1)同盟者サダム・フセイン」
放送大学
[32]
서적
Arab Socialism. [al-Ishtirakīyah Al-ʻArabīyah]: A Documentary Survey
[33]
서적
The Old Social Classes and New Revolutionary Movements of Iraq
[3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Iraq
The Scarecrow Press, Ltd.
[35]
서적
A History of Iraq
Cambridge University Press
[36]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Communist Party of Iraq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7]
서적
A People's History of Iraq: The Iraqi Communist Party, Workers' Movements and the Left, 1924-2004
[38]
논문
[39]
서적
The Struggle for the Middle East: The Soviet Union and the Middle East, 1958-68
Routledge
[40]
서적
[41]
웹사이트
現代東アラブ地域情勢研究ネットワーク - シリア内閣
http://www.tufs.ac.j[...]
[42]
서적
Arab Nationalism :A History Nation and State in the Arab World
[4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Syria
[44]
서적
Asad: The Struggle for the Middle East
[45]
서적
The other Iraq: pluralism and culture in Hashemite Iraq
Stanford University Press
[46]
간행물
Iraq: New Power in the Middle East
Foreign Affairs
[47]
웹사이트
SIPRI Database
http://armstrade.sip[...]
[48]
웹사이트
労働党第6回大会の年 : 1980年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
https://ir.ide.go.jp[...]
アジア経済研究所
[49]
웹사이트
DPRK Diplomatic Relations
http://www.ncnk.org/[...]
National Committee on North Korea
2016-08-29
[50]
웹사이트
DPRK Diplomatic Relations
http://www.ncnk.org/[...]
National Committee on North Korea
2017-07-25
[51]
웹사이트
イラン・イラク戦争における北朝鮮のイラン派兵
http://www.erina.or.[...]
環日本経済研究所
2007-08-01
[52]
뉴스
이라크 전쟁 개전 2개월 전, 일본 정부와 국무부는 사담 체제 붕괴 후에도 전면적인 바아스당원에 대한 공직 추방은 하지 않고 신생 이라크군과 관료 기구에 범죄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간부를 등용하는 방향으로 일치했었다. 그러나 2003년 1월 20일에 발표된 “국가 안전 보장 대통령령”에 의해, 전후 복구는 국무부가 아닌 국방부의 관할이 되어, 이 방침은 포기되었다고 한다(共同통신 2006년 3월 19일 배포 기사에서).
共同通信
2006-03-19
[53]
웹사이트
http://www.jamestown[...]
[54]
뉴스
CIA 'seeks truce with Iraqi Baathists'
http://www.upi.com/T[...]
[55]
뉴스
Iraq's banned Baath holds first public meeting in Syria
http://www.france24.[...]
2010-05-01
[56]
뉴스
Saddam's loyalists in Syria blast US
http://seattletimes.[...]
[57]
뉴스
U.S. pullout gives al Qaeda space in north, west Iraq
http://uk.reuters.co[...]
Reuters
2011-11-18
[58]
뉴스
Could Iraq’s Baathists help in battle against Islamic State?
http://www.al-monito[...]
AL-MONITOR
2015-11-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