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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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북군은 군벌 시대에 장쭤린이 이끄는 봉천군벌의 군대로, 펑톈 성에 주둔한 제27사단을 시작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928년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동북변방군으로 개명되었고, 장쉐량이 지휘했다. 동북군은 여러 군벌과의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제2차 직봉 전쟁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에 저항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이후 홍군과의 전투, 시안 사건 등을 겪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해체되어 일부는 중국군에 편입되었다. 동북군은 자체적인 해군과 공군을 보유했고, 봉천 병창을 통해 무기를 생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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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군 - 장쉐량
장쉐량은 만주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자 동북군 지휘관으로서 만주사변 당시 부저항 정책과 시안 사건 주도를 통해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인물이며,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동북군 - 장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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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쉰은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청나라 복벽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은퇴하여 사업가로 활동했다. - 북양군벌 - 베이징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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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인종의 명으로 1040년부터 1044년까지 편찬된 《무경총요》는 당시의 군사 지식을 집대성한 방대한 군사서로, 군사 제도, 전략, 전술, 무기 기술, 해상 전투 기술, 음양오행설, 점술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중국 군사사와 과학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동북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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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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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1911년 – 1937년 |
국가 | 중화민국 |
충성 | 봉천군벌 (1911년–1928년) 안국군 (1926년–1928년) 국민정부 (1928년–1937년) |
본부 | 선양, 랴오닝 |
규모 | |
병력 | 170,000–250,000명 (1924년) |
해군 | 군함 4척 및 지원정 7척 (1929년) |
항공기 | 40–100대 (1924년) |
지휘부 | |
총사령관 | 장쭤린 (초대) 장쉐량 (마지막) |
주요 지휘관 | 장쭝창 궈쑹링 리징린 |
장비 | |
주요 공급국 |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
참여 전투 | |
주요 전투 | 제1차 직봉 전쟁 제2차 직봉 전쟁 반봉 전쟁 북벌 중소 분쟁 만주사변 국공 내전 |
명칭 | |
한자 (간체) | 东北军 |
한자 (번체) | 東北軍 |
한어 병음 | Dōngběi Jūn |
웨이드-자일스 | Tung1-pei3 Chün1 |
의미 | 동북군 |
역사 | |
창설 | 1911년 |
해체 | 1937년 |
2. 명칭
동북군은 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다. 장쭤린의 첫 주요 군사 부대인 제27사단은 펑톈 성에 주둔했기 때문에 "펑톈군"(奉系軍)이라고 불렸다. 그가 다른 동북 삼성에 주둔한 더 많은 사단을 지휘하게 되면서, "펑톈군"은 펑톈에 주둔한 군대만을 지칭하는 데 계속 사용되었지만,[1] 또한 장쭤린의 모든 부대를 지칭하는 환유법이 되었다. 심지어 당시의 관찰자들도 이것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2]
동북군은 20세기 초 만주에서 장쭤린이 조직한 산적 세력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만주는 가난으로 인해 많은 젊은이들이 산적질에 의존했다.[1] 쇠퇴해가는 청나라는 평화를 유지할 자원이 부족했고,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이 위협받았다. 청나라 군인들은 평판이 좋지 않아 종종 산적보다 인기가 없었다.[1] 지방 당국은 심지어 성공적인 산적들을 포섭하려 시도했는데, 1903년 장쭤린과 그의 추종자들은 신민의 공식 수비대가 되었다.
> 허주국 장군이 지적했듯이, "펑톈군" (펑쥔)은 장쭤린과 그의 참모진에 의해 중앙 통제되었기 때문에 "동북군"(둥베이쥔)으로 명명되어야 한다. 펑톈군이라고 불린 것은 사람들이 펑톈군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 학자들은 1928년 이전 기간 동안 "펑톈군"과 "동북군"을 서로 바꿔서 사용한다.[3][4][2][5] 1928년 이후, 이 군대는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东北边防军|Dōngběi bian fáng jūn중국어)으로 개명되었다. 그 이후부터, 영어 자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Northeastern Army"의 변형을 사용한다.
3. 역사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는 장쭤린의 변경 순찰대대를 북양군의 제27사단으로 재편성하고 확장했으며, 장쭤린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쭤린은 만주 복고에 대항하여 위안스카이를 지지했고, 그 보상으로 제28사단과 제29사단을 자신의 군대에 추가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장쭤린의 부대는 5만에서 7만 명 사이의 병력으로 성장했다.
동북군은 초창기에 명목상 소속이었던 북양군의 상징을 사용했다.[1]
장쭤린이 지휘하는 봉계군벌의 군대인 봉군은 1920년 직계군벌과 연합하여 환계군벌을 패퇴시키고 산해관 안쪽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봉군은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며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제1차 직봉전쟁(1922년)에서는 패배했지만, 제2차 직봉전쟁(1924년)에서는 펑위샹의 베이징 쿠데타에 힘입어 승리했다. 반봉 전쟁(1925년)에서는 궈숭링의 배신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일본의 도움으로 극복했다.
1929년 봉군은 형식상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이 되었으며, 약칭 동북군이 되었다. 장쉐량이 동북군을 총괄하였으며, 병력은 약 30만 명이었다.
1930년 중원대전에서 장제스를 지원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장악했다. 같은 해, 소련과의 봉소분쟁에서는 패배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저항하지 않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했다. 다만 헤이룽장성 주석 마잔산 등은 독자적으로 일본군에 저항했다.
1933년 에는 만리장성 방어전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34년 장쉐량은 홍군 토벌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5년 홍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은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었으나,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억류되었다.
1937년 장제스는 동북군을 해체, 개편하였다. 이후 동북군 잔존 병력은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3. 1. 군벌의 군대로서
장쭤린이 지휘하는 봉계군벌의 군대인 봉군은 1920년 직계군벌과 연합하여 환계군벌을 패퇴시키고 산해관 안쪽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922년 직계 군벌과 충돌하여 제1차 직봉전쟁이 발발했지만 패배하여 산해관 밖으로 물러났다.
동북군은 초창기에 명목상 소속이었던 북양군의 상징을 사용했다.[1]
1924년 제2차 직봉전쟁에서는 직계 군벌 내부의 펑위샹이 베이징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직계군벌이 패배했고, 봉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대부분의 관내 지역을 장악하고 상하이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925년 우페이푸가 반봉 전쟁을 일으키자, 펑위샹은 봉군의 궈숭링에게 모반을 유도했으나, 봉군은 펑위샹을 격퇴하고 1926년 봄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후 봉군은 직계 군벌과 협상하여 정전했다.
1927년 장쭤린은 스스로 대총통 겸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에 취임했다. 1928년 봉군은 국민당 소속의 장제스, 리쭝런의 국민혁명군과 펑위샹, 옌시산의 연합군에 패배했다. 장쭤린은 본거지인 만주로 후퇴하다가 일본군의 계략으로 철도가 폭파되어 암살되었고, 그 아들 장쉐량이 봉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장쉐량은 일본이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동북군은 20세기 초 만주에서 장쭤린이 조직한 산적 세력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만주의 가난은 많은 젊은이들이 산적질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1] 쇠퇴해가는 청나라는 평화를 유지할 자원이 부족했고,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이 위협받았다. 청나라 군인들은 평판이 좋지 않았고, 종종 산적보다 인기가 없었다.[1] 지방 당국은 심지어 성공적인 산적들을 포섭하려 시도했는데, 1903년 장쭤린과 그의 추종자들은 신민의 공식 수비대가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는 장쭤린의 변경 순찰대대를 북양군의 제27사단으로 재편성하고 확장했으며, 장쭤린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쭤린은 만주 복고에 대항하여 위안스카이를 지지했고, 그 보상으로 제28사단과 제29사단을 자신의 군대에 추가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장쭤린의 부대는 5만에서 7만 명 사이의 병력으로 성장했다.
3. 1. 1. 제1차 직봉전쟁
장쭤린이 지휘하는 봉계군벌의 군대인 봉군은 1922년 직계군벌과의 충돌로 제1차 직봉전쟁을 일으켰다. 봉군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허베이성을 점령하려 했으나, 우익이 붕괴되면서 패배했다. 패배 원인으로는 지휘 능력 부족이나 봉천 지휘관들이 직계 군벌과 비밀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봉군은 포병과 기관총을 일부 사용했으나, 훈련 부족과 현대 무기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봉군은 만주로 후퇴해야 했고, 제1사단과 제16사단은 거의 전멸했으며, 제28여단 중 한 개 여단만이 살아남았다. 여러 혼성 여단도 흩어졌으며, 장쭤린과 오랫동안 함께 했던 많은 장교들은 패배로 인해 불신을 받게 되었다.
3. 1. 2. 제2차 직봉전쟁
제1차 직봉전쟁에서 패배한 후, 장쭤린과 그의 고문들은 군대를 재조직하고 재장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무능하거나 불충성스러운 옛 동료들은 지휘부에서 숙청되었다. 장쭤린은 외국 무기 구매와 선양 병기창에서의 국내 생산 개발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 소규모 해군과 공군에도 자금이 투입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엇갈린 결과를 가져왔다. 1924년 봉천군은 1922년보다 장비와 지휘 면에서 훨씬 나아졌지만, 부패한 장교들이 여전히 높은 직책을 유지했고, 참모 대학 출신 신임 장교들과 장쭤린의 산적 시절 출신 구임 장교들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1924년 말, 우페이푸와의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다. 장쭤린은 저장성의 안휘 군벌, 광둥성의 국민당과 삼각 동맹을 맺었다. 봉천군은 총 17만에서 25만 명으로 구성된 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제2군(리징린 지휘)과 제6군(쉬랑저우 지휘)은 랴오닝성 차오양으로 북상하여 러허 성의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했다. 남쪽에서는 제1군(장덩쉬안)과 제3군(장쉐량)이 산하이관 점령에 실패했지만, 궈쑹링이 이끄는 성문 직접 공격이 실패한 후, 차오양에서의 승리로 풀려난 봉천군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직군 진지를 측면 공격했다. 지우먼커우에서의 추가 돌파는 직군이 산하이관에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펑위샹은 베이징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장악했고, 옌시산이 직군 증원을 막으면서 우페이푸의 입지는 붕괴되었다.
1924년 12월부터 1925년 1월 말까지, 장종창은 반란을 일으킨 치시에위안을 장쑤성과 상하이에서 진압했다. 1925년 4월에 장종창이 산둥성을 장악했고, 8월에 양위팅이 장쑤성을, 장덩쉬안이 안후이성을 받았다.
3. 1. 3. 반봉 전쟁
1925년 우페이푸가 일으킨 반봉 전쟁에서, 펑위샹은 봉군(奉軍)의 궈숭링에게 모반을 부추겼으나, 봉군은 펑위샹을 격퇴하고 1926년 봄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후 봉군은 직계 군벌과 협상하여 정전했다.[1]
단일 지배 세력의 부재는 대규모 분쟁의 재개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0월, 후베이성의 군벌로 재등장한 우페이푸는 전국적인 지도력 복귀를 꾀했다. 같은 달, 저장성의 독립 군벌 순촨팡은 장쑤성과 안후이성을 침공하여 양위팅과 장덩쉬안을 빠르게 격파하고, 산둥성을 놓고 장종창과 전투를 벌였다. 펑톈군의 어려움에 더해, 전리품 분배 문제는 지휘부 내의 기존 긴장을 악화시켰다. 개혁파 바오딩 군사학교 출신인 궈숭링은 승진에서 누락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의 파벌에서는 리징린만이 군벌 지위를 얻었을 뿐이었다. 장쭤린과 칸은 "늙은이"였고, 양위팅과 장덩쉬안은 새로운 인물이었지만, 도쿄 신부 학교 출신이었다. 궈숭링은 장쭤린을 자신의 삼동군사학교 제자이자 스승이며 친구로 존경했던 장쉐량으로 교체하려 했다. 리징린과 펑위샹의 묵시적인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궈숭링은 11월 22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펑톈군 최정예 부대 7만 명을 지휘했으며, 산하이관을 점령하여 선양의 장쭤린과 그의 나머지 군대를 분리했다. 궈숭링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선양을 포위하고, 가는 길에 장덩쉬안과 30명 이상의 펑톈 지휘관을 체포했다. 궈숭링과 영향력 경쟁자였던 장덩쉬안은 총살당했다. 펑위샹은 11월 27일 반 펑톈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장종창은 장쭤린에게 충성을 유지했고, 리징린은 궈숭링 지원을 철회하고 국민군과 싸우면서 궈숭링이 선양을 점령하는데 필요한 병력이나 물자를 남겨두지 않았다. 일본의 도움으로 장쭤린은 1925년 말까지 사기가 저하된 궈숭링의 군대를 격파하고 만주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장쭤린은 궈숭링과 장덩쉬안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반란을 통해 다른 장교들의 충성이 즉각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리징린과 장종창은 선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사실상 독립적이었다.[1]
궈숭링의 반란 동안 국민군은 즈리 군벌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리징린을 즈리성에서, 칸자오시를 러허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궈숭링이 패배하자 펑톈군은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홍창회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이끌고 있던 우페이푸와 동맹을 맺었다. 대규모 공세로 국민군은 3월 베이징에서 철수했지만, 군대는 온전했다. 펑톈군은 물류의 정교함과 현대 전술의 능숙함을 보여주면서, 난커우에서 국민군 방어선의 다음 라인을 돌파하기 위해 집중적인 중(重)포병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펑위샹의 군대는 북방 원정이 군사적 계산을 바꾸기 시작할 때까지 서북부의 험준한 지형으로 대부분 후퇴할 수 있었다.[1]
3. 2. 국민혁명군에 편입
1929년 봉군은 형식상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이 되었으며, 약칭 동북군이 되었다. 총 병력은 약 30만 명이었고, 장쉐량이 총괄하였다. 1930년 각 군벌과 장제스 간에 중원대전이 벌어졌는데, 동북군은 장제스를 지지했고, 다시 산해관 안으로 출동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만주 철도 이권을 둘러싸고 소련과 장쉐량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봉소분쟁) 동북군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지휘한 소련군에게 참패하였고, 만주 주요 요지가 점령당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저항하지 않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했다. 다만 헤이룽장성 주석 마잔산 등은 독자적으로 일본군에 저항했다.
1933년 에는 만리장성 방어전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34년 장쉐량은 악예환(鄂豫皖, 후베이성, 허난성, 안휘성) 홍군 토벌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병력 16만 명을 이끌고 간쑤성으로 이동하였다. 1935년 장제스의 명령으로 간쑤 성 일대에서 홍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하여 3개 사단을 잃었다.
장제스는 홍군 토벌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장쉐량과 동북군 장병들은 장제스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장쉐량은 은밀히 상하이로 가 두중위안 등을 만났고, 중국 공산당 비밀당원 류딩과 동북군-홍군 간 화평을 논의하였다. 1936년 1월 25일,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의 이름으로 "홍군과 동북군의 연합항일을 위해 동북군 전체 장병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은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었으나,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억류되었다.
3. 2. 1. 중원대전
1929년 봉군은 형식상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이 되었으며, 약칭 동북군이 되었다. 총병력은 약 30만 명이었고, 장쉐량이 총괄하였다. 1930년 각 군벌과 장제스 간에 중원대전이 벌어졌는데, 동북군은 장제스를 지지했고, 다시 산해관 안으로 출동하여 베이징과 톈진을 장악하였다.
장쉐량은 중원대전에서 장제스를 지원하여, 동북군은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과 톈진 지역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국민당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화북 지역은 중앙 행정 통제에서 벗어났다. 장제스는 난징에 대한 공식적인 복종을 대가로 군벌 자치를 묵인했다.
3. 2. 2. 중소 분쟁 (1929년)
1929년 봉군은 형식상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이 되었으며, 약칭 동북군이 되었다. 장쉐량이 동북군을 총괄하였으며, 병력은 약 30만 명이었다. 1930년 만주 철도 이권을 둘러싸고 소련과 장쉐량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동북군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지휘한 소련군에게 참패하였고, 만주 주요 요지가 점령당했다. (\봉소분쟁)[3]
3. 2. 3. 만주사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장쉐량은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에 저항하지 않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했다.[3]
헤이룽장성 주석 마잔산과 소수의 부대는 장제스의 무저항 정책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싸웠다.[4]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서북군 사령관 양후청은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과 항일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여론에 영향을 받아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어 항일전선이 구축되었으나,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억류되어 난징에 머물렀다.
3. 2. 4. 홍군과의 전투
1934년 3월, 장쉐량은 악예환(鄂豫皖, 후베이성, 허난성, 안휘성을 가리킴) 홍군 토벌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잔류 병력 16만 명을 이끌고 간쑤성으로 이동하였다. 1935년 장제스의 명령으로 간쑤 성 일대에서 홍군을 공격, 세 번의 전투를 치렀으나 참패하여 3개 사단을 잃었다.
장제스는 홍군 토벌을 우선시하여 일본의 침략을 제쳐두고 있었다. 장쉐량과 동북군 장병들은 홍군에 전력을 쏟으면서도 일본에 무대응하는 장제스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장쉐량은 은밀히 상하이로 가 두중위안, 이셔덩 등을 만났다.
이때 중국 공산당 비밀당원 류딩이 장쉐량을 찾아와 동북군과 홍군 간 화평을 논의하였다. 1936년 1월 25일,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등의 이름으로 "홍군과 동북군의 연합항일을 위해 동북군 전체 장병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3. 2. 5. 시안 사건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서북군 사령관 양후청은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과 항일을 요구하는 전국의 여론에 영향받아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1] 이 사건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이 실행되어 항일전선이 구축되었으나,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억류되어 난징에 머물렀다.[1]
3. 3. 중일전쟁
1937년 3월 장제스는 동북군을 허난성과 안휘성으로 이동시켜 해체, 개편하였다. 1945년까지 동북군 49군, 57군, 67군은 송후 전투와 난징 전투에 참전하였다. 동북군 51군은 화이허와 쉬저우 전투에 참전하였고, 53군은 후베이성, 허난성, 안휘성, 후난성을 돌아가면서 싸웠다. 53군의 일부는 팔로군에 편입되었다.
4. 구조
봉천군은 원래 제27사단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1917년, 만주 복고를 지지하여 해임된 지휘관이 있던 제28사단과 새로 창설된 제29사단을 포함하여 확장되었다. 이론적으로 이 부대들은 여전히 국가 북양군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장쭤린에게만 복종했다.
제1차 직봉 전쟁 이후 군대 개편으로 기본 부대는 여단이 되었다.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이론적으로 여단은 3개 연대, 각 연대는 3개 대대, 각 대대는 150명으로 구성된 3개 중대로 나뉘었다. 따라서 표준 여단의 총병력은 약 4,000명이었다. 여단은 반드시 사단의 하위 부대가 아니었고, 일부는 사단 소속이었지만 대부분은 일본군 방식의 독립 혼성 여단으로 운용되었다.
4. 1. 지휘부
1923년 펑톈 군의 고위 참모진은 총사령관 장쭤린, 부사령관 쑨례천과 우쥔성, 참모총장 양위팅으로 구성되었다. 1929년 고위 참모진은 총사령관 장쉐량, 지린 부사령관 장쭤샹, 헤이룽장 부사령관 완푸린, 하얼빈 특별 지구 사령관 장징후이로 구성되었다.[2]4. 1. 1. 주요 지휘관
부대 또는 역할 | 지휘관 | 위치 |
---|---|---|
제1사단 | 리징린 | 펑톈 |
제27사단 | 장쭤샹 | 펑톈 |
제29사단 | 우쥔성 | 헤이룽장성 |
제1여단 | 칸 자오시 | 펑톈 |
제2여단 | 장쉐량 | 펑톈 |
제3여단 | 장쭝창 | 펑톈 |
제4여단 | 장쭤타오 | 펑톈 |
제5여단 | 리전성 | 펑톈 |
제6여단 | 궈숭링 | 펑톈 |
제7여단 | 탕위린 | 펑톈 |
제8여단 | 천위쿤 | 지린성 |
제9여단 | 류샹지우 | 지린 |
제10여단 | 위선청 | 지린 |
제11여단 | 바잉거 | 헤이룽장 |
제12여단 | 자오언전 | 펑톈 |
제13여단 | 딩자오 | 지린 |
제14여단 | 양더성 | 펑톈 |
제15여단 | 완푸린 | 헤이룽장 |
제16여단 | 치언밍 | 펑톈 |
제17여단 | 장밍지우 | 헤이룽장 |
제18여단 | 장환샹 | 지린 |
제19여단 | 가오웨이요 | 펑톈 |
제20여단 | 후융쿠이 | 지린 |
제21여단 | 차이융전 | 지린 |
제22여단 | 스더산 | 헤이룽장 |
제23여단 | 리솽카이 | 펑톈 |
제24여단 | 싱스롄 | 펑톈 |
제25여단 | 차이핑번 | 펑톈 |
제26여단 | 리구이린 | 지린 |
제27여단 | 페이쥔성 | 펑톈 |
제1기병여단 | 무췬 | 펑톈 |
제2기병여단 | 펑진산 | 헤이룽장 |
제3기병여단 | 쑤시린 | 펑톈 |
제4기병여단 | 장쿠이지우 | 헤이룽장 |
제5기병여단 | 천푸성 | 헤이룽장 |
1923년 펑톈 군의 고위 참모진은 총사령관 장쭤린, 부사령관 쑨리에천과 우쥔성, 참모총장 양위팅으로 구성되었다. 1929년 고위 참모진은 총사령관 장쉐량, 지린 부사령관 장쭤샹, 헤이룽장 부사령관 완푸린, 하얼빈 특별 지구 사령관 장징후이였다.[2]
이 외에도 주목할 만한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 장쭝창 – 산둥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부패와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아 타임지에서 "중국 최악의 군벌"로 칭했다.[4]
- 우쥔성 – 기병대 사령관이자 헤이룽장성 군정 장관으로, 황구툰 사건에서 장쭤린과 함께 사망했다.[3][5]
- 궈숭링 – 포병 장교이자 육군대학 교관으로, 장쉐량의 멘토였다. 이후 장쭤린에게 반기를 들었다.
- 리징린 – 펑톈 파벌의 즈리군 사령관이자 1924~25년 즈리성 지사를 지냈다.
- 추위푸 – 리징린의 후임으로 즈리성 지사 및 즈리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네차예프 – 펑톈 군에서 복무한 모든 백계 러시아인 용병의 ''사실상'' 사령관이자, 제65보병사단 공식 사령관이었다.
4. 2. 해군 및 공군
동북군은 주로 육군 중심의 병력이었지만, 소규모 해군과 공군도 보유하고 있었다. 해군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중국이 만주 지역의 강을 순찰하기 위해 연합국으로부터 노획한 독일의 포함 2척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인숴 대령의 지휘 아래 이 함선들은 쑹화 강 함대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1923년, 함대는 선훙리에 부제독 휘하의 동북 해방위 사령부에 편입되었다. 제2차 직봉 전쟁에서 펑톈 군벌이 승리한 후, 선훙리에는 장쭝창의 지휘 아래 산둥성으로 전출되었다. 그는 1929년까지 만주로 돌아와 4척의 포함과 7척의 지원 선박을 지휘했다. 공군은 많은 투자를 받았지만 규모가 작았고, 동북군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프랑스에서 구매한 항공기는 100대 미만이었으며, 이 추정치가 정확하더라도 대부분 비행에 적합하지 않았고, 훈련된 조종사의 부족으로 인해 다른 항공기들도 운행할 수 없었다.5. 인원
장쭤린이 1911년 만주 전선 및 중앙로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장징후이, 장쭤샹, 탕위린, 쭤펀을 포함한 그의 측근들이 연합군의 고위 장교가 되었다. 봉천군 병사들은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봉천성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27사단이 칭나라 시대에 마련된 모집 영토 시스템에 따라 징병을 했던 곳이 바로 봉천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집 시스템은 부대 결속에 이점을 주어 장쭤린이 초기에 유지했다. 다른 만주 지방 기반의 사단이 흡수되면서 군대의 지리적 구성은 다양해졌다. 제2차 직봉 전쟁 이후 리징린과 장쭝창의 사단이 각각 직군과 산동으로 재배치되면서 현지 주민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현지인들이 두 군대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22년 이등병 월급은 칭나라 시대와 동일한 4.2 위안이었다. 1926년경 봉천군은 최대 17만 명에서 25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봉천군에는 병사, 장교, 고문으로서 여러 외국인들이 포함되었다. 일본인 고문은 군사적 전문 지식을 제공하고 관동군 장교들과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마키노 타케마, 키쿠치 타케오, 혼조 시게루 등이 주요 일본인 고문이었다. 백 러시아인은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 후 만주로 도망쳐 온 외국인 병사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네차예프가 이끄는 러시아인들은 유능한 전투 부대로 명성을 얻었지만, 기강 부족과 잔혹 행위로 인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6년 러시아인의 수는 약 5,270명으로 최고조에 달했으며, 대부분 장쭝창 휘하의 제65보병사단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1926~1927년 쑨촨팡과의 전투에서 큰 사상자를 냈고, 장쉐량은 장쭝창의 반란에 가담한 남은 백 러시아 부대를 해산했다.
초기 장교 핵심은 장쭤린에게 충성하는 산적 동료들이었다. 1919년, 베이양 정부의 전쟁부는 동북 육군 사관 학교 설립을 후원했고, 장쭤린은 이를 지지했다. 바오딩 육군 사관 학교 졸업생인 포병 장교 궈쑹링 등이 교수로 채용되었다. 이 사관 학교는 1919년부터 1930년까지 7,971명의 장교를 훈련시켰고, 봉천군 하급 및 중급 장교의 중추를 형성했다. 장쭤린은 형식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전직 산적 장교들을 사관 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제1차 직봉 전쟁에서 봉천군이 패배한 후, 장쭤린과 고문들은 "구세력"들의 무능함을 주요 요인으로 보았다. 몇몇은 지휘에서 해임되고 형식적인 군사 훈련으로 경력을 시작한 "신세력" 장교들로 대체되었다. 신세력은 국내 교육을 받은 파벌(바오딩 육군 사관 학교 (궈쑹링, 리징린), 동북 육군 사관 학교(장쉐량))과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파벌(한린춘, 양위팅, 장덩쉬안)로 나눌 수 있었다. 구세력과 신세력, 이 세 파벌 장교들 간의 관계는 종종 군대를 분열시킬 정도로 격렬했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파벌은 중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했고, 중국에서 교육받은 파벌은 군사적 모험에 반대했다.[5] 구세력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군사 문제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파벌 간의 경쟁은 1925년 궈쑹링이 이끈 반란의 중요한 원인이었고, 이 반란은 장쭤린을 거의 전복시킬 뻔했다. 장쭤린의 최종 승리는 궈쑹링의 중국에서 교육받은 파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장쭤린 정권의 마지막 몇 년은 전문적인 기술보다 충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6. 장비
군벌 시대 동안 현대 무기는 비쌌고 구하기 어려웠다. 펑톈군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 산적들이 사용하던 무기로 무장했다. 한양 88식은 독일의 게베어 1888을 본떠 만든 것으로, 청나라 시대의 표준 보병 소총이었기 때문에 널리 퍼져 있었다.[1] 1식 소총 (마우저 1907식의 중국 카피)도 청나라 말기와 초기 중화민국 시대에 소량 생산되어 사용되었을 수 있다.[2] 만주가 러시아와 일본이 점령한 한반도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모신-나강 1891년형, 일본의 다양한 무라타 소총, 그리고 1897년과 1905년형 일본 아리사카 소총도 흔히 사용되었다.[3] 하지만 이러한 무기들의 품질은 전반적으로 낮았다.[4]
1916년 군벌 시대가 시작될 당시, 중국에는 8개의 병기창이 있었지만 만주에는 새로운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펑톈군에게 가장 큰 문제였다.[5] 1922년 이전까지 봉천의 "병창"은 소량의 탄약만 생산할 수 있었다. 새로운 보급품은 단편적으로 들어왔는데, 장쭤린은 1911년 위안스카이로부터 무기를 받았고, 1917년 돤치루이와의 협약을 통해 1700만엔 상당의 일본 군수품을 압수했다. 1920년에는 안후이 군벌을 격파하면서 자동차와 비행기를 포함한 대량의 일본 자금 지원 장비를 노획했다. 특히 자동차는 매우 귀중했는데, 1926년까지 중국 전체에 8,000대 밖에 없었다. 러시아 내전의 연합군 개입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배치되었던 프랑스의 르노 FT 전차는 1919년 펑톈군에게 제공되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주요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에 합의하면서 이러한 횡재는 줄어들었다.
제1차 직봉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장쭤린은 현대화에 힘썼다. 그는 봉천 병창을 확충하고 개선하는 데 1700만위안 이상을 투자했으며, 1922년 타오즈핑, 1923년 한린춘, 1924년부터 양위팅 등 유능한 관리자들이 이를 감독했다. 1924년까지 봉천 병창의 예산은 월 200만위안이었는데, 이는 한양 병창의 1916년 연간 운영 예산이 100만위안을 약간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투자였다. 병창에는 전 세계에서 온 수천 명의 외국인 전문가를 포함하여 2만~3만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었다. 생산된 주요 소총은 봉천 병창 마우저로, 한린춘이 아리사카 소총을 개조한 것이다. 영국의 무기 제조사인 프랜시스 서튼은 최첨단 참호 박격포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고용되었고, 그는 장쭤린이 산둥을 통해 밀수 작전을 수행하도록 도왔다. 펑톈은 또한 중국에서 가장 큰 무기 수입국이었다. 그들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특히 일본에서 무기를 구매했다. 주요 수입품으로는 일본의 3식 중기관총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르노 전차 14대가 있었다. 펑톈군은 또한 지뢰, 철조망, 장갑 열차, 전차와 같은 다른 현대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1925년부터 봉천에 화학 무기 공장이 건설되었고, 장쭤린은 독일 및 러시아 전문가를 고용하여 염소, 포스겐, 겨자 가스를 생산했다. 펑톈이 통제하는 추가 병창으로는 1924년 헤이룽장에 건설된 것과 제2차 직봉 전쟁 이후 획득한 지난에 기반을 둔 두 곳이 있었다. 1928년까지 만주에 새로 건설된 병창은 중국 본토의 생산량을 능가하거나 능가할 수 있었다. 1928년 매달 펑톈 군벌은 7,500정의 소총, 70~80정의 기관총, 12만 발의 포탄, 약 900만 발의 탄약을 생산하는 등 다른 장비들을 생산했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생산량은 만주 경제에 지속 불가능한 부담을 주었다. 1929년 이후, 장쉐량은 병창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해야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Modern Warfare in China 1924–1925
https://www.iwm.org.[...]
Imperial War Museums
[2]
문서
Hōten mantetsu kōsho, “Shinnin minseichō no hyōban,” 3/11/1913, GK, JACAR, Ref: B03050178000, slides 58–59; Kantō totokufu rikugun sambōbu, “chō dai 466 gō,” 6/11/1913, GK, JACAR, Ref: B03050178000, slide 71; Sai Hōten sōryoji Ochiai Kentarō, Hōtenshō
[3]
웹사이트
(社会)北大营遗址建成陈列馆 九一八事变爆发地成记忆坐标
https://www.sohu.com[...]
2022-01-03
[4]
잡지
CHINA: Basest War Lord
https://content.time[...]
1927-03-07
[5]
서적
Nihon seifu no chūka minkoku ninshiki to Chō Gakuryō seiken
Yamamoto Yūz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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