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디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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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우디안주의는 16세기 영국에서 부상한 신학적, 정치적 운동으로, 엘리자베스 종교 개혁 이후 영국 종교 정책의 기조를 형성했다. 루터교,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일부 가톨릭 교리, 칼뱅주의의 일부 요소를 혼합한 형태로, 성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과 객관성, 보편 속죄를 강조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성사를 은혜의 수단으로 삼아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자유 의지를 기반으로 예정론을 거부하며, 왕권신수설을 지지했다. 라우디안주의는 정치적으로 왕을 지지하는 기사당과 연결되었으며, 청교도와의 갈등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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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디안주의 | |
---|---|
개요 | |
유형 | 기독교 운동 |
기원 | 17세기 초 잉글랜드 |
창시자 | 논쟁 중, 일반적으로 윌리엄 로드와 관련됨 |
영향 받은 것 | 아르미니우스주의, 성공회, 가톨릭교회 전통, 군주제 |
영향 준 것 | 성공회, 고교회파, 앵글로-가톨릭주의 |
신학적 특징 | |
강조점 | 의식, 성례전, 권위주의적 교회 정치, 왕권신수설 |
주요 교리 | 성례전 중심주의, 성공회 기도서 준수, 교회 권위 강화,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경향 |
역사적 배경 | |
발달 시기 | 1620년대 ~ 1640년대 |
주요 인물 | 윌리엄 로드, 찰스 1세, 리처드 몽태규, 존 코신, 매튜 렌, 윌리엄 주드, 프랜시스 화이트, 리처드 닐 |
반대 세력 | 청교도, 칼뱅주의자 |
정치적 측면 | |
정치적 입장 | 왕권신수설 옹호, 국왕의 권위 강화 |
사회적 영향 | 종교적 통일 추구, 예배 의식 강조, 사회 질서 유지 |
논쟁과 비판 | |
주요 비판 | 가톨릭 경향, 의례주의, 권위주의적 통치, 종교적 억압 |
결과 | 청교도 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간주됨, 윌리엄 로드 처형 |
기타 | |
관련 용어 | 고교회파, 앵글로-가톨릭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캐롤라인 신학 |
2. 신학
라우디안주의는 1559년 엘리자베스 종교 개혁 이후 형성된 잉글랜드 교회의 신학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당시 잉글랜드 교회의 신학은 루터교,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일부 가톨릭 교리, 그리고 칼뱅주의 요소가 혼합된 상태였다. 특히 예정론은 39개 신조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는데, 라우디안주의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기존의 칼뱅주의적 예정론, 특히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비판하며 발전했다.
라우디안주의 신학의 핵심은 성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믿음, 보편 속죄 교리, 그리고 모든 인간이 자유 의지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한 데 있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의 개인 중심적 구원관과 대비되는 것으로, 구원은 세례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속하고 성찬을 통해 신앙이 성장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설교 중심의 청교도와 달리 세례와 성찬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다. 또한 개인의 거룩함과 선행, 매일의 예배 참여를 중시했으며, 예배의 형식에 있어서도 로우 처치의 소박함보다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미학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주관적인 종교적 체험이나 열광주의보다는 교회의 성사와 같은 객관적인 신앙의 수단을 신뢰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39개 신조에 따라 성인 숭배, 성체 숭배, 미사 희생 제사 교리 등을 명백히 거부하며 청교도와 마찬가지로 반(反) 교황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정치 신학적으로 라우디안주의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했다. 왕의 권력은 백성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입장은 기사당과 이후 토리지 운동으로 이어졌다.
라우디안주의의 등장은 잉글랜드 교회 내 청교도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는 청교도를 단순한 의견 차이를 가진 형제가 아닌, 교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했다. 그는 성공회가 루터교나 심지어 반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보았다. 1633년 라틴-영어 사전에 'Praedestinatiani'(예정론을 숙명론적으로 따르는 이단)라는 단어가 새로 등재된 것은 당시 예정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1636년 로드 대주교가 성직자들에게 짧은 머리를 강요하자 많은 청교도들이 이에 반발하여 머리를 더 길게 기르는 등(
2. 1. 예정론 비판과 보편구원론
1559년의 엘리자베스 종교 개혁은 라우디안주의가 부상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교회의 종교 정책 기조를 형성했다. 당시 신학은 루터교,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일부 가톨릭 교리, 그리고 칼뱅주의의 요소가 혼합된 형태였다. 예정론 교리는 신자들의 절망과 불복종을 막기 위해 신중하게 다루어졌다. 39개 신조 중 제17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예정된 이들을 언급하며 잉글랜드 교회의 기초 원리로 삼았지만, 유기(버림받음)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 일반적으로 제시된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의 행위에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명백히 선언된 것을 따라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generally)'는 라틴어 'generaliter'를 번역한 것으로, 단순한 보통이 아닌 '보편적으로'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제31조는 "그리스도는 한 번 이루신 완전한 구속, 속죄, 그리고 세상 전체의 모든 죄, 원죄와 실제 죄를 위한 만족이시다"라고 선언하여 보편 속죄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라우디안주의는 성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 속죄가 이루어졌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사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다양한 개혁주의 예정론 이론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라우디안주의에서 예정론은 개인이 아닌 교회적 선택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는데, 이는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삼으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이었다. 구원은 세례를 통해 교회에 들어와 교회에 머무르며 배교하지 않고, 성찬을 통해 신앙이 양육되고 강화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이는 구원이 반드시 성사를 통해 교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통해 온다는 칼뱅주의의 핵심 교리를 대체하는 중요한 변화였다. 칼뱅주의에서는 한번 선택받은 구원은 잃어버릴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우디안주의는 39개 신조에서 비판받은 로마 가톨릭의 관행, 예를 들어 성인 숭배, 성체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은 거부했으며, 미사 희생에 관한 로마 교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우디안주의는 청교도만큼이나 "교황주의자"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라우디안주의는 성사를 죄를 고백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은혜의 수단으로 강조했으며, 설교보다 세례와 성찬의 중요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개인의 거룩함과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가르쳤으며, 매일의 예배를 권장했다. 또한, 로우 처치 칼뱅주의자들의 소박한 예배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예배의 미학에서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예배가 "고상하고 건조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소명을 확인하는 주관적인 방식보다는 객관적인 방식을 선호했으며, 열광주의와 같은 개인적 종교 체험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라우디안주의의 정치 신학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했다.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왕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왕에게 직접 부여된다고 보았다. 이 사상을 따르는 이들은 기사당으로 불렸으며, 이후 토리지 운동으로 이어졌다.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유럽 대륙의 개혁 교회와 모든 유형의 청교도들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라우디안주의가 이러한 선택관을 거부하고 억압하면서, 잉글랜드 교회 내 성공회와 청교도 진영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특히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는 청교도 칼뱅주의자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존 휘트기프트와 같은 전임자들의 온건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드는 청교도 비국교도들이 기존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며, 오히려 성공회가 루터교나 심지어 반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1633년에 출판된 표준 라틴-영어 사전은 윌리엄 로드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사전에는 처음으로 "Praedestinatiani"라는 단어가 포함되었다. 이 단어는 "모든 특정한 문제, 사람 또는 행위에 대한 숙명론적 예정론을 고수하고, 모든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일어난다고 믿는 이단자들, 특히 특정 사람들의 구원과 저주에 관해"라고 정의되어, 예정론을 강하게 비판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했다. 1636년, 로드 대주교가 모든 성직자에게 짧은 머리를 하도록 명령하는 법령을 내리자, 많은 청교도들은 이에 반발하여 그의 권위에 대한 경멸의 표시로 머리를 더욱 길게 길렀다().[3]
이러한 신학적, 정치적 갈등은 잉글랜드 교회 내의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결국 성공회와 청교도는 더 이상 하나의 교회로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훗날 대추방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2. 2. 성사의 중요성
라우디안주의는 성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보았다. 이는 보편 속죄와 자유 의지 사상에 기반하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사를 은혜의 수단으로 삼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한 개혁주의 예정론 이론들은 거부되었고, 예정론은 교회적 선택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즉,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삼으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으로 해석했다.구원은 세례를 통해 교회에 들어가고, 배교하지 않으며 교회에 머무르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또한 성찬을 통해 신앙이 양육되고 강화된다고 보았다. 이는 칼뱅주의의 주요 관점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칼뱅주의는 구원이 반드시 성사를 통해 교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통해 온다고 가르쳤으며, 이 선택은 상실될 수 없다고 보았다. 라우디안주의는 이러한 개인 중심적 구원관 대신 성사와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라우디안주의는 39개 신조에서 비판받은 로마 가톨릭의 특정 관행, 예를 들어 성인 숭배, 성체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은 명확히 거부했다. 미사 희생에 관한 로마 교리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청교도와 마찬가지로 "교황주의자"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라우디안주의는 성사를 죄를 고백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은혜의 수단으로 강조했다. 특히 설교보다 세례와 성찬의 중요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개인의 거룩함과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가르쳤으며, 매일의 예배를 권장했다. 또한, 로우 처치의 칼뱅주의자들과는 달리 예배의 미학적 측면, 즉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예배는 "고상하고 건조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소명을 확인하는 데 있어 주관적인 체험이나 열광주의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객관적인 신앙의 수단들이 중시되었다.
2. 3. 자유의지 강조
라우디안주의는 성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믿음, 보편 속죄 교리,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사를 은혜의 수단으로 삼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자유 의지에 신학적 기반을 둔다. 이는 다양한 개혁주의 예정론 이론, 특히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라우디안주의에서 예정론은 단체적 선택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삼으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되었다.구원은 세례를 통해 교회에 들어가 그 안에 머무르며 이탈하지 않고, 성찬을 통해 신앙이 양육되고 강화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이는 구원이 반드시 성사를 통해 교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통해 오며 그 선택은 상실될 수 없다고 본 칼뱅주의의 핵심 가르침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성사는 죄를 고백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은혜의 수단으로 강조되었으며, 설교보다 세례와 성찬례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개인의 거룩함과 선행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가르쳐졌으며, 매일의 예배가 권장되었다. 또한 로우 처치의 칼뱅주의자들과 달리 예배의 미학적 측면에서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소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주관적인 체험보다는 객관적인 수단(성사)이 중시되었으며, 열광주의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 39개 신조에서 비판받았던 로마 가톨릭의 관행, 예를 들어 성인 숭배, 성체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은 거부되었으며, 미사 희생에 관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우디안주의는 청교도와 마찬가지로 "교황주의자"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2. 4. 반(反) 교황주의
라우디안주의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39개 신조에서 이미 비판받았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특정 관행들을 명확히 거부했다. 예를 들어, 성인 숭배, 성체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같은 행위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미사가 희생 제사라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 역시 거부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라우디안주의는 청교도와 마찬가지로 당시 "교황주의자"로 불리던 세력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3. 예배와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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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치
라우디안주의는 잉글랜드 교회 내에서 정치적으로 청교도 세력과 첨예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윌리엄 로드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라우디안주의자들은 청교도를 기존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대립은 예정론과 같은 신학적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장 규제 등 교회 운영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청교도들은 라우디안주의의 권위적인 방식에 반발하며 저항했고, 이는 잉글랜드 사회의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잉글랜드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나아가 잉글랜드 내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4. 1. 청교도와의 갈등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유럽 대륙의 개혁 교회와 모든 유형의 청교도들에게 중요한 신학적 특징이었다. 라우디안주의자들이 이 교리를 거부하고 억압하면서 성공회와 청교도 진영 사이에는 잉글랜드 교회 내부에 깊은 갈등이 발생했다.윌리엄 로드 대주교는 그의 전임자였던 존 휘트기프트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휘트기프트는 청교도 칼뱅주의자들을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형제로 보았으나, 로드는 이들을 기성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는 오히려 성공회가 루터교나 심지어 반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1633년에 출판된 표준 라틴-영어 사전은 윌리엄 로드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사전에는 처음으로 "Praedestinatiani"라는 단어가 포함되었다. 이 단어는 "모든 특정한 문제, 사람 또는 행위에 대한 숙명론적 예정론을 고수하고, 모든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일어난다고 믿는 이단자들, 특히 특정 사람들의 구원과 저주에 관하여"라고 정의되었다.
1636년, 성공회 대주교 윌리엄 로드는 모든 성직자에게 짧은 머리를 하도록 명령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에 많은 청교도들은 로드의 권위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머리를 더 길게 길렀다. [3]
이러한 지속적인 갈등은 잉글랜드 교회 내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성공회와 청교도는 더 이상 하나의 교회로 통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대추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5. 역사
라우디안주의는 17세기 초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서 등장한 신학 및 교회 정치 운동으로, 제임스 1세 통치 말기에 그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과의 왕실 결혼 협상 등으로 칼빈주의 성향의 성직자들과 국왕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제임스 1세는 랜슬롯 앤드루스, 조지 몽테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윌리엄 로드와 같은 반(反)칼빈주의 성향의 인사들을 등용하며 권력 구도에 변화를 주었다.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로드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면서 라우디안주의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로드는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고, 성찬상을 제단 형태로 바꾸어 동쪽 끝에 배치하도록 하는 등 성공회 의례와 교리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이는 성찬례와 현존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루터교의 관행과 유사했으며, 설교를 중시하는 칼빈주의 전통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라우디안주의 정책은 청교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로드는 일반 기도서에 명시된 예배 방식을 따르지 않는 청교도들을 비국교도로 규정하고 탄압했으며, 이는 잉글랜드 교회 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결국 이러한 종교적, 정치적 갈등은 주교 전쟁과 잉글랜드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내전 기간 동안 라우디안주의는 힘을 잃었으나, 1660년 스튜어트 왕정복고 이후 성공회 체제가 재건되면서 다시 영향력을 회복했다.
5. 1. 제임스 1세 시대
스페인과의 왕실 결혼 협상 문제로 제임스 1세는 설교단과 언론으로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국왕은 선포령, 반대자 감금, 1622년 설교자 지침 등을 통해 이러한 반대 여론을 억누르려 했으나, 캔터베리 대주교인 조지 애벗, 엑서터의 학장 서트클리프, 서리 대주교 헤이컬 등 잉글랜드 국교회 내 고위 성직자들까지 반대 목소리를 냈다.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제임스 1세는 윈체스터 교구의 랜슬롯 앤드루스, 런던 교구의 조지 몽테인과 같은 반(反)칼빈주의 성향의 교회 인사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윌리엄 로드를 주교로 승격시키면서, 새롭게 부상하던 라우디안주의 운동에 유리하도록 권력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칼빈주의와의 차별화는 시각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617년 더럼 주교로 임명된 리처드 네일은 성당 동쪽 끝에 있던 성찬상을 제단 형태로 바꾸었으며, 그의 후원을 받던 로드 역시 글로스터 교구에서 비슷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원했다.
5. 2. 찰스 1세 시대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반칼빈주의 성향의 교회 인사들을 중용했다. 특히 윌리엄 로드에게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약속하며 그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로드는 1628년부터 런던 주교로서 인쇄기를 통제하고 예정론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는 등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요크 대주교직 역시 1628년 칼빈주의자 매튜스가 사망한 후 로드 계열의 인물들로 채워졌으며, 1632년부터는 로드의 멘토였던 리처드 네일이 그 자리를 맡았다. 1628년 버킹엄 공작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이 되면서 모든 예정론적 가르침이 금지되었고, 이는 사실상 국가 차원에서 칼빈주의를 불법화하는 왕실 선포로 이어졌다.라우디안주의는 시각적인 측면에서도 칼빈주의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1617년 더럼 주교가 된 리처드 네일은 성당 동쪽 끝에 있던 성찬상을 제단으로 바꾸었으며, 로드 역시 글로스터 교구에서 비슷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원했다. 로드는 1630년대에 "제단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거처이며, 설교단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이것은 내 몸이다'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껏해야 '이것은 내 말이다'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며 제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633년 11월, 찰스 1세는 추밀원의 결정을 통해 모든 본당 교회가 성찬상을 성가대석 동쪽 끝 제단 위치에 두도록 명령했다. 이는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루터교의 관행과 유사했으며, 설교를 중시하는 칼빈주의의 전통을 약화시키는 조치였다.
로드 대주교는 청교도 칼빈주의자들을 단순히 신학적 견해가 다른 형제가 아니라, 기존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는 성공회와 루터교, 심지어 반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1633년판 표준 라틴-영어 사전은 로드에게 헌정되었고, 처음으로 "Praedestinatiani"라는 단어가 포함되었다. 이 단어는 "모든 특정한 문제, 사람 또는 행위에 대한 숙명론적 예정론을 고수하고, 모든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일어난다고 믿는 이단자들, 특히 특정 사람들의 구원과 저주에 관해"라고 정의되었다. 로드는 교회 내의 통일성을 중시하여, 1604년판 일반 기도서의 예식을 따르지 않는 청교도들을 비국교도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1636년 로드가 모든 성직자에게 짧은 머리를 하도록 명령하자, 많은 청교도들은 이에 반항하여 머리를 더 길게 길렀다. [3]
이러한 로드의 정책과 청교도에 대한 입장은 잉글랜드 교회 내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1630년대에는 팸플릿과 설교 등을 통한 종교적 논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1637년 로드가 스코틀랜드에 새로운 기도서 사용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청교도 언약도들이 결성되었고 이는 주교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성공회와 청교도는 더 이상 하나의 교회로 공존하기 어려워졌으며, 이는 훗날 대추방의 원인이 되었다.
1640년대 이후, 찰스 1세와 그를 지지하는 왕당파는 의회파의 거센 공격에 직면했다. 청교도들은 왕권신수설에 도전하는 서적들을 출판했으며, 그중 새뮤얼 러더퍼드의 《렉스, 렉스》(Lex, Rex)가 유명하다. 당시 '진정한 종교'와 '훌륭한 정부'는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왕당파가 지지하는 주교제에 대한 공격도 거세졌다. 왕당파는 왕이 임명하고 왕에게 책임을 지는 주교 중심의 잉글랜드 국교회를 지지한 반면, 대다수 청교도 의원들은 회중이 선출하거나 회중 자체에 책임을 지는 장로교나 회중교회 형태의 교회 구조를 선호했다.[4]
주교들은 종교적 역할 외에도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설교와 출판을 통제하는 국가 검열관 역할을 했으며, 교회 법원을 통해 모독, 이단, 간음 등 종교적, 도덕적 문제뿐만 아니라 결혼, 상속 분쟁까지 다루었다.[5] 또한 귀족원의 일원으로서 왕실에 유리하게 법안 통과를 막기도 했다. 따라서 1640년 성직자 법안에 의해 주교들이 의회에서 축출된 것은 내전으로 가는 중요한 단계였다. 이로써 찰스 1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법안 통과를 막을 힘을 잃게 되었다.[6]
주교들의 축출은 일시적으로 검열 제도를 약화시켰고, 특히 런던을 중심으로 팸플릿, 서적, 설교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주교제 폐지와 회중교회 또는 장로교 형태의 교회 정치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종교 및 정치 사상을 담고 있었다.
1640년 성직자 회의에서는 주교 제도와 기존 성공회 계층 구조 유지를 서약하는 내용을 담은 ''교회 헌법과 규범'' (규범 VI)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 규범은 사실상 시행되지 못했다. 1640년 12월까지 13명의 주교가 탄핵되었고, 1641년 12월에는 추가로 12명이 탄핵되었다. 의회가 개회된 지 8주 만에, 의회는 단순히 성공회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교회 질서 전체를 폐지하고 청교도 방식으로 재건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내전 기간 동안 고등 종교 재판소가 폐지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을 기소할 권한을 잃었고, 교구 차원에서 국교회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청교도들은 기도서와 성직자복을 찢고, 성찬상을 옮겼으며, 제단 난간을 불태우는 등 기존 성공회 예식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라우디안주의에 기반한 성공회 체제는 1660년 왕정복고 이후에야 재건될 수 있었다. 찰스 1세의 마지막 의식을 집전했던 윌리엄 주손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성공회는 다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5. 3. 잉글랜드 내전과 왕정복고
1630년대 로드는 교회 내 순응을 강조하며 일반 기도서에 명시된 예배 방식을 따르지 않는 청교도들을 비국교도로 규정했다. 이러한 정책은 팸플릿, 설교, 로비 활동을 통해 반발을 샀고, 종교적 의견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로드가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식 개혁을 강행하려 한 시도는 1637년 스코틀랜드용 기도서 발행으로 정점에 달했으며, 이는 청교도 언약도의 결성과 주교 전쟁 발발로 이어졌다.1640년대 이후, 찰스 1세와 그를 지지하는 왕당파는 의회파의 거센 공격에 직면했다. 청교도들은 왕의 신성한 권리를 비판하는 서적들을 출판했는데, 그중 새뮤얼 러더퍼드의 Lex, Rex|렉스, 렉스la가 유명하다. 당시 '진정한 종교'와 '훌륭한 정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여겨졌기에, 주교 제도에 대한 공격 역시 거세졌다. 로드를 지지하는 왕당파는 왕이 임명하고 왕에게 책임을 지는 주교제 교회를 선호한 반면, 대다수 청교도 의원들은 회중이 선출한 장로나 회중 자체에 의해 운영되는 장로교 또는 회중교회식 교회 운영을 지지했다.[4]
주교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역할을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가 검열관으로서 출판과 설교를 통제했으며, 교회 법원에서는 신성모독, 이단, 간통과 같은 종교적 문제뿐 아니라 결혼 및 상속 분쟁까지 다루었다.[5] 또한 귀족원 의원으로서 왕실에 불리한 법안 통과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1640년 성직자 법안 통과로 주교들이 의회에서 축출된 것은 내전으로 가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로 인해 찰스 1세는 더 이상 자신에게 반대하는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6]
주교들의 축출은 일시적으로 검열 제도의 종식을 가져왔고, 특히 런던을 중심으로 팸플릿, 서적, 설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주교제 폐지와 회중교회 또는 장로교 형태의 교회 정치를 옹호하는 급진적인 종교 및 정치 사상을 담고 있었다.
1640년 잉글랜드 성직자 회의에서는 ''교회 헌법과 규범''이 통과되었는데, 여기에는 규범 VI으로 주교 제도와 당시 성공회 위계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서약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1640년 규범을 만들었던 성직자 회의의 사제와 주교들은 몇 달 안에 이를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1640년 12월까지 13명의 주교가 탄핵되었고, 1641년 12월에는 추가로 12명이 탄핵되었다. 의회가 개회된 지 8주 만에 성공회 복원이 아닌 교회 질서 전체의 폐지와 청교도식 재건 요구가 제기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고등 종교 재판소가 폐지되면서 교회는 더 이상 범죄 기소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교구 차원에서 국교회가 보호받지 못함을 의미했다. 청교도들은 기도서와 흰옷을 찢고 성찬상을 옮겼으며, 제단 난간을 불태우는 등 기존 성공회 의식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잉글랜드 국교회의 재건은 1660년 스튜어트 왕정복고 이후 이루어졌다. 찰스 1세에게 마지막 의식을 집전했던 윌리엄 주손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성공회는 다시 국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Oxford Movement in Context
1997
[2]
서적
Evangelical Theology
1980
[3]
문서
2010
[4]
간행물
The influence of Calvinism on politics
https://core.ac.uk/d[...]
2009-Autumn
[5]
서적
The Royalist War Effort 1642–1646
Routledge
2003
[6]
서적
The King's War, 1641–1647
Penguin Classics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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