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들 데이비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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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랜들 데이비드슨은 1903년부터 1928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영국의 성공회 성직자이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아치볼드 캠벨 테이트의 군종 신부와 램버스 궁전 부속 목사를 거쳐 빅토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윈저의 디콘, 로체스터 주교, 윈체스터 주교를 역임했다. 데이비드슨은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928년 은퇴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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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들 데이비드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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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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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랜달 데이비드슨 |
전체 이름 | 랜달 토마스 데이비드슨 |
출생일 | 1848년 4월 7일 |
출생지 | 에든버러 |
사망일 | 1930년 5월 25일 |
사망지 | 런던 |
국적 | 영국 |
종교 | 성공회 |
배우자 | 이디스 머독 테이트 (1878년 11월 12일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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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
관구 | 캔터베리 관구 |
교구 | 캔터베리 교구 |
착좌 | 1903년 2월 12일 |
퇴임 | 1928년 11월 12일 |
이전 | 프레더릭 템플 |
이후 | 코스모 랭 |
다른 직위 | 윈체스터 주교 (1895–1903) 국왕 왕실 예배당 서기 (1891–1903) 로체스터 주교 (1891–1895) 윈저 대성당 참사회장 겸 빅토리아 여왕 가정 예배 담당 사제 (1883–1891) |
영적 귀족 | 1895년 – 1928년 11월 12일 |
세습 귀족 | 1928년 11월 14일 – 1930년 5월 25일 |
서품 | |
부제 서품 | 1874년 |
사제 서품 | 1875년 |
주교 성성 | 1891년 4월 25일 |
주교 서임 |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 |
학력 | |
모교 | 하로 학교 |
훈장 | |
경칭 접두사 | 가장 존경하는 분이자 가장 명예로운 분 |
경칭 접미사 | GCVO, PC |
2. 초기 생애와 교육
해로우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데이비드슨은 1848년 4월 7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곡물 상인인 헨리 데이비드슨이었고, 어머니는 헨리에타(결혼 전 성 스윈턴)였다. 그는 4명의 자녀 중 장남이었다.[1] 부모님은 모두 스코틀랜드 교회 장로교 신자였으며, 아버지 쪽 가문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장로교 목사였다.[2] 하지만 데이비드슨의 회고에 따르면, 가족 분위기는 "매우 비종파적"이었고, 특정 교파의 교리를 배우기보다는 "개인적인 종교"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3] 그의 전기 작가인 조지 벨은 데이비드슨 가족이 엄숙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신앙심을 가졌고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기록했다.[4] 데이비드슨은 어릴 때 어머니와 여러 보모, 개인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2세에는 영국 미들랜즈의 웍솝에 있는 작은 사립학교에 보내졌는데, 이곳에서의 교육은 충분하지 못했다고 여겨졌다. 특히 그는 평생 라틴어와 그리스어 기초가 부족했던 점을 아쉬워했다.[5]
1862년, 14세가 된 데이비드슨은 해로우 스쿨에 입학했다.[67] 해로우 스쿨은 종교적으로 성공회 전통을 따랐고, 데이비드슨은 그곳에서 견진성사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성홍열을 앓는 바람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견진성사를 받지 못했고, 1865년 6월 세인트 조지 교회, 하노버 스퀘어에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런던 주교 아치볼드 캠벨 테이트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2][6] 해로우 시절 데이비드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교장 헨리 몬터규 버틀러와 두 번째 하우스마스터였던 브루크 포스 웨스트코트였다. 그는 버틀러 교장의 설교와, 건축, 시, 철학, 역사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룬 웨스트코트의 가르침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7] 데이비드슨과 웨스트코트는 평생에 걸쳐 서로에게 조언을 구하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67]
해로우에서의 마지막 학년을 앞둔 1866년 여름 방학, 데이비드슨은 남은 생애에 영향을 미친 사고를 당했다. 형, 친구와 함께 토끼 사냥을 하던 중 실수로 자신의 총에 허리를 맞은 것이다.[2] 상처는 매우 심각하여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였으나,[67] 그는 천천히 회복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는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오랫동안 사용해야 했고, 다리가 항상 어느 정도 무력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점차 나아져서 다리의 완전한 힘을 되찾았지만, 엉덩이 부위의 상처에서 비롯된 이상한 결과인 영구적인 약한 발목만 남았다. 또한, 그것들이 지나갈 적이 없지만, 내가 그것들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던 다른 문제들도 시작되었다. 만약 누군가 그 가을에 내가 몇 년 후에 옥스퍼드에서 라켓 경기를 통해 컵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면, 그것은 터무니없었을 것이다.[8]
데이비드슨은 예상외로 좋은 회복을 보였지만,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았다.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았다. 그의 몸에 일부 총알이 남아 반복적인 복부 질환을 일으켰고;[9] 엉덩이 손상은 빈번한 요통을 유발했으며 탈장으로 인해 트러스를 착용해야 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 1926년 윈스턴 처칠은 당시 78세였던 데이비드슨이 여전히 자주 스쿼시를 치는 것에 놀라움을 기록했다. 이 사고는 그가 여러 상을 노리던 해로우에서의 마지막 학년을 망쳤고,[11] 옥스퍼드 장학금을 받을 기회도 잃게 만들었다.[12]
데이비드슨은 1867년 10월 트리니티 칼리지, 옥스퍼드에 평민 신분으로 입학했다. 당시 트리니티 칼리지는 특별한 명성이 없었고, 데이비드슨은 교수진이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범하다고 생각했다.[13] 옥스퍼드에서는 고교회파와 저교회파 사이의 논쟁이 활발했지만, 그는 기독교 전례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이러한 논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14] 그의 주된 목표는 학업을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건강 문제가 학업에 영향을 미쳤다. 원래는 고전과 철학(Greats)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책에 생각을 집중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 상대적으로 덜 힘든 법률과 역사를 선택했다고 후에 밝혔다.[15] 그는 1871년 11월 3등급 문학사(BA) 학위를 받았다.[16] 옥스퍼드 석사(MA) 학위는 1875년에 수여되었다.[17]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데이비드슨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낸 뒤 부모님과 함께 6주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돌아온 후에는 템플 교회의 마스터(Master of the Temple)인 찰스 보건 밑에서 서품을 받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18] 그러나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아 3개월 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19] 추가적인 휴식과 중동 지역으로의 요양 여행[23]을 다녀온 후, 1873년 10월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이듬해 3월에 마칠 수 있었다.[20]
2. 2. 해로우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교
해로우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했다.3. 성직 초기: 사제 서품과 캔터베리 대주교와의 만남
옥스퍼드 대학교 시절,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아치볼드 캠벨 테이트의 아들 크라퍼드 테이트와의 친분을 계기로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다. 1874년 부제 서품을 받고 켄트주 다트퍼드에서 교구 사제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21]
1877년, 친구 크라퍼드 테이트의 후임으로 아치볼드 테이트 대주교의 상주 채플린이자 비서로 임명되어 람베스 궁에서 근무하게 되었다.[23][24] 이는 데이비드슨이 잉글랜드 교회 중심부와 깊은 인연을 맺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후 테이트 가문의 개인적인 비극을 함께 겪으며 대주교의 깊은 신임을 얻었고[28], 1878년에는 대주교의 둘째 딸 에디스 머독 테이트와 결혼하여 테이트 가문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2]
람베스 궁에서 데이비드슨은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며 교회 내 주요 현안에 관여했다.[2] 테이트 대주교가 사망한 1882년 이후에는 그의 후임 선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주목을 받아 신뢰받는 조언자가 되었다.[31][32]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1883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윈저 대성당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31]
3. 1. 사제 서품과 다트퍼드 교구

데이비드슨의 옥스퍼드 시절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은 크라퍼드 테이트였다. 그는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아치볼드 캠벨 테이트의 아들이었다. 데이비드슨과 크라퍼드는 함께 서품을 준비하고 있었고, 1874년 3월 아치볼드 테이트 대주교의 교구에서 부제 서품을 받았다.
부제 서품 후 데이비드슨은 켄트주 다트퍼드의 교구 사제로 배정되었으며, 이듬해인 187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21] 그는 다트퍼드에서 2년 반 동안 두 명의 교구 목사 밑에서 일했다. 첫 번째 목사는 온건한 고교회주의자였고, 두 번째는 온건한 복음주의 성공회 신자였다. 전기 작가 벨(Bell)은 젊은 데이비드슨이 이 시기 두 목사로부터 "목회 활동과 신앙 모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기록했다.[22]
3. 2. 람베스 궁 채플린과 테이트 가문과의 인연
데이비드슨은 옥스퍼드 시절 아치볼드 캠벨 테이트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의 아들인 크라퍼드 테이트와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데이비드슨과 크라퍼드 모두 서품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1874년 3월 캔터베리 대교구에서 함께 부제 서품을 받았다. 데이비드슨은 켄트주 다트퍼드의 교구 사제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21] 그는 다트퍼드에서 2년 반 동안 온건한 고교회주의자와 온건한 복음주의 성공회 신자인 두 명의 교구 목사 아래에서 일하며 목회 활동과 신앙 양면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22]
1876년 말, 아버지의 상주 채플린 겸 비서로 일하던 크라퍼드 테이트가 다른 직책을 원하자, 테이트 대주교는 데이비드슨을 후임으로 선택했다.[23] 1877년 5월, 데이비드슨은 대주교의 관저이자 본부인 람베스 궁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며, 이는 50년 이상 지속될 잉글랜드 교회 중심부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24]

비극적이게도, 크라퍼드 테이트는 1878년 5월 짧은 투병 끝에 사망했고,[25] 그의 어머니 역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26][27] 이후 몇 년간 테이트 대주교는 데이비드슨에게 여러 매력적인 교구를 제안했지만, 데이비드슨은 슬픔에 잠긴 대주교 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여겼다. 테이트 대주교는 데이비드슨을 "진정한 아들"이라 부르며 깊이 의지했다.[28] 전기 작가 벨은 이를 데이비드슨의 이타심으로 해석했지만, 후대 전기 작가들은 교회의 중심부에 남으려는 결정에 개인적인 야망도 작용했을 수 있다고 보았다.[2][29]
1878년 11월 12일, 데이비드슨은 테이트 대주교의 둘째 딸인 에디스 머독 테이트(1858–1936)와 결혼했다. 당시 에디스는 19세였다. 데이비드슨의 친구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직 후임자인 코스모 랭은 이 결혼을 "마음과 정신의 완벽한 결합"이라고 묘사했다. 에디스 데이비드슨은 품위 있는 안주인이자 헌신적인 아내로 평가받았으며, 부부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2]
결혼 후 4년 동안, 데이비드슨은 람베스 궁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테이트 대주교의 생각을 완벽히 파악했고, 대주교는 사위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며 더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데이비드슨은 1881년 고교회 지지자와 성공회 의례주의를 반대하는 복음주의자 사이의 논쟁에서 테이트 대주교를 대신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882년에는 구세군에 대한 성공회 교회의 접근 방식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구세군이 창시자 윌리엄 부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고 보았다.[2]
1882년 테이트 대주교는 건강이 악화되자 데이비드슨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윈체스터 주교 해럴드 브라운이나 트루로 주교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테이트는 자신의 의사를 빅토리아 여왕이나 수상 W. E. 글래드스톤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1882년 12월 테이트가 사망한 후, 데이비드슨은 대주교의 뜻이 여왕에게 전달되도록 조치했다.[31] 며칠 후, 여왕은 데이비드슨을 불러 만났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왕은 일기에 "매우 감명받았다... 데이비드슨 씨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적었다.[32] ''옥스퍼드 국립 인명 사전''은 당시 34세였던 데이비드슨이 63세의 여왕에게 신뢰받는 측근이 되었다고 기록했다.[2] 벤슨이 테이트의 후임으로 결정되자 빅토리아 여왕은 데이비드슨에게 다음 트루로 주교 인선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28년간 윈저 대성당의 원장으로 봉직했던 제럴드 웰슬리가 1882년 사망하자 그의 후임자 선정에 대해서도 자문을 구했다.[34]
데이비드슨은 새로운 대주교 벤슨 아래에서도 람베스 궁에 채플린이자 비서로 남았다. 그러나 1883년 5월, 새로운 윈저 원장으로 임명된 조지 코너가 불과 몇 달 만에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벤슨 대주교의 조언에 따라 여왕은 데이비드슨을 공석이 된 윈저 원장으로 임명했다.[31]
4. 윈저의 주임 사제
데이비드슨은 윈저에서 6년 동안 학장으로,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 채플린으로 봉사했다. 여왕은 그에게 점점 더 애착을 갖게 되었고, 1884년 3월 막내 아들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가 사망한 후에는 더욱 가까운 개인적 관계를 발전시켰다. 이 사건과 다른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여왕은 종교적 위안을 얻기 위해 데이비드슨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벨의 말처럼 "그에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점점 더 많은 신뢰를 주게" 되었다.[35] 여왕은 1883년부터 1901년까지 모든 중요한 교회 임명에 대해 데이비드슨과 상의했다.[35]
다른 문제에 있어서 그의 조언이 항상 여왕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그녀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하는 데는 요령이 필요했다. 그는 일기에 "여섯 일곱 살짜리 버릇없는 아이를 다루는 것보다 예순 일흔 살짜리 버릇없는 아이를 다루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라고 쓰기도 했지만,[36] 나중에는 "내 생각에는 그녀는 때때로 그녀의 분노를 샀지만, 그들의 동기가 좋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들을 가장 좋아하고 신뢰했다"라고 회고했다.[35] 그의 전기 작가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그녀의 ''고지에서의 삶의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의 또 다른 권을 출판하는 것은 신중하지 않다는 그의 재치 있으면서도 단호한 충고를 인용한다. 여왕은 마지못해 그의 조언을 따랐다.[38]
데이비드슨은 여왕에게 조언하는 것 외에도 캔터베리 대주교 벤슨의 핵심 조언자로 남아 있었다. 벤슨은 거의 매일 그에게 편지를 썼고, 특히 1888년부터 1890년까지 링컨의 에드워드 킹 고교회파 링컨 주교가 불법적인 의례적 관행 혐의로 재판을 받던 동안 그에게 크게 의존했다.[35] 데이비드슨은 ''더 타임스''에 글을 써서 교회와 대중의 여론에 영향을 미쳤고, 저명한 앵글로-가톨릭 평신도인 할리팩스 경과 연락을 취하며 벤슨을 도왔다.[2] 윈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데이비드슨은 캐논 윌리엄 벤햄과 협력하여 테이트의 2권짜리 전기를 집필했으며, 이는 1891년에 출판되었다.[40]
5. 주교 서임
데이비드슨은 해로우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치볼드 캠벨 테이트가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낼 당시 그의 군종 신부가 되었고, 이후 테이트 대주교의 딸과 결혼했다. 테이트의 후임인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 대주교 시절에는 램버스 궁전의 부속 목사로 일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신임을 얻은 데이비드슨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윈저 디콘(Dean of Windsor)으로 임명되는 이례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후 로체스터 주교와 윈체스터 주교를 차례로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하고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 관리를 맡기도 했다. 마침내 1903년, 데이비드슨은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5. 1. 로체스터 주교
1890년이 되자, 여왕이 그를 윈저에서 잃고 싶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슨의 주교 서임이 임박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41] 그는 공석이었던 두 교구, 우스터와 로체스터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42] 당시 사우스워크 교구가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로체스터 교구는 템스 강 남쪽의 런던 지역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고, 잉글랜드에서 세 번째로 큰 교구였다. 데이비드슨은 우스터보다 로체스터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로 솔즈베리 경 총리에게 램버스에서 보낸 시간 동안 그 지역과 성직자들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거의 알지 못하는 우스터보다 로체스터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43]
1891년 4월 25일, 벤슨 대주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데이비드슨을 주교로 성임했다.[44] 그러나 11일 후, 데이비드슨은 천공성 궤양으로 심각하게 앓아누웠고, 6개월 동안 케닝턴에 있는 자택에 머물러야 했다.[2] 로체스터 대성당에서의 착좌식은 10월까지 연기되었고, 그때가 되어서야 다시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45]
1893년 광부 파업 동안, 데이비드슨은 노동 분쟁 해결의 필수 조건으로 노동자들의 적절한 생활 수준 보장을 요구하며 주목받았다. 그의 정치적 입장이 급진적이지는 않았기에, 1889년 웨스트코트 등이 기독교 교리를 국가 경제 및 사회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 설립한 기독교 사회 연합에는 가입하지 않았다.[46] 그는 교회의 역할에 집중하며, 기독교 자선 활동을 통해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사회 생활의 어떤 영역에서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지 고려하는 것을 잠시라도 안전하게 무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47]
주교 성임 직후 왕실 시종관으로 임명된 그는 빅토리아 여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 벤슨 대주교의 가까운 동맹으로 남았는데, 특히 1894년부터 1895년 사이 핼리팩스와 다른 고위 성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협상하여 성공회의 성직 서품에 대한 교황의 인정을 얻으려 했을 때 그러했다. 데이비드슨은 핼리팩스에게 교황청의 단순한 인정만으로는 로마와 캔터베리 사이의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48] 결국 핼리팩스의 시도는 의도와는 반대로, 교황 레오 13세가 성공회 서품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는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결과를 낳았다.[49]
1895년, 로체스터 주교 임기 말에 데이비드슨은 주교로서의 선임 순서에 따라 귀족원 의석을 얻을 자격이 주어졌다.[51] 그는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즐겼지만, 런던 남부에서 4년 동안 세 차례나 병을 앓았고, 그의 건강 상태로는 로체스터 주교라는 힘든 직무를 계속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졌다.[35]
5. 2. 윈체스터 주교

1895년, 데이비드슨은 상대적으로 업무 부담이 적고 대부분 농촌 지역인 윈체스터 교구로 전임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교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빅토리아 여왕과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에서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다.[2] 이듬해 캔터베리 대주교 벤슨이 사망하자, 런던 주교 프레데릭 템플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템플, 데이비드슨, 맨델 크레이튼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여왕은 데이비드슨의 건강 문제를 염려하여 그가 공석이 된 런던 주교직을 맡는 것을 반대했다.[2] 템플은 전임자들과 달리 데이비드슨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는데, 이는 데이비드슨이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노린다고 오해했기 때문일 수 있다. 데이비드슨은 국교회의 주요 논의에서 갑자기 배제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53]
윈체스터 주교 시절, 데이비드슨은 열성적인 앵글로-가톨릭 성향의 사제 로버트 돌링과의 문제로 논란에 직면했다. 돌링은 새로 지은 교회에 위령 미사를 위한 제단 3개를 설치했는데, 이는 연옥에서의 기도를 인정하지 않는 영국 국교회 교리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데이비드슨은 돌링과 만나 타협점을 찾으려 했으나, 돌링은 이를 거부하고 사임했다.[56] 이 사건은 데이비드슨에게 영국 국교회 내 고교회파를 배척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2] 그는 성체 축복과 같은 로마 가톨릭 교리는 거부하는 개신교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향이나 장백의 같은 예식적 요소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다.[57]
데이비드슨은 1901년 초 빅토리아 여왕이 임종할 때 곁을 지켰으며, 여왕의 장례식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58] 같은 해 2월, 맨델 크레이튼의 사망으로 런던 교구 주교직이 다시 공석이 되자 데이비드슨에게 제안되었으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한번 거절했다.[59] 대신 그는 귀족원 활동에 집중하여 교육, 아동 보호, 주류 판매 허가, 상점 노동 시간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자주 발언했다.[63] 또한 국가 교회 정책에도 꾸준히 관여하며 아서 밸푸어 총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밸푸어는 데이비드슨이 반대 의견까지 명확하고 공감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60]
밸푸어 총리는 데이비드슨의 조언을 계속 구했다. 특히 정부가 추진하던 초등 교육 개혁 과정에서 1902년 교육법 초안 작성에 대한 데이비드슨의 기여는 매우 중요했으며, 침례교 목사 존 클리포드가 이끄는 비국교도 진영의 격렬한 반대에 맞서 법안을 방어하는 데에도 그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61] 또한 1902년 8월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준비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장이 병으로 자리를 비우자, 데이비드슨이 예배 순서를 정하고 버킹엄 궁전과 램버스 궁전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다.[62] 국왕 대관식 4개월 후, 캔터베리 대주교 템플이 사망하자 밸푸어 총리는 데이비드슨을 그의 후임자로 지명했다.[63]
6. 캔터베리 대주교
1903년 프레데릭 템플의 뒤를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67][64] 그는 대주교로서 "영국 교회 내의 위대한 중심 정당"을 유지하는 데 힘썼으며,[66] 20세기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공동 기도문''을 현대화하고 교회 내 규율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67] 또한 교회 내의 무질서를 조사하기 위해 왕립 위원회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67][68]
데이비드슨은 교회가 자체적인 사안에 대해 더 많은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강력한 지지 아래 잉글랜드 교회 의회(권한) 법 1919 (Enabling Act)가 제정되었다. 이 법은 교회가 의회에 입법안을 제출할 권한을 부여하여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하게 한 중요한 조치였다.[106][107] 그러나 웨일스 교회의 분리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비국교도가 다수였던 웨일스에서는 성공회가 지배 엘리트의 교회로 인식되어 분리 요구가 높았다.[108] 데이비드슨은 분리에 반대했지만, 의회는 1914년 웨일스 교회 분리법을 통과시켰고, 이는 상당한 지연 끝에 1922년 발효되었다.[109]
그는 1928년까지 대주교직을 수행했으며, 이전의 모든 캔터베리 대주교들이 사망으로 임기를 마친 것과 달리, 처음으로 은퇴한 대주교로 기록되었다.
6. 1. 취임과 초기 활동

1896년 프레데릭 템플 대주교가 임명될 당시에는 세 명의 후보가 고려되었으나, 1902년에는 랜들 데이비드슨이 유일한 후보였다.[67] 그는 대체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더 급진적인 앵글로-가톨릭 신자들은 예외였다.[67] 데이비드슨은 1903년 2월 12일 캔터베리 대주교로 취임했다.[64]
전임자 템플과 달리, 데이비드슨은 처음부터 조언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1997년 연구에서 데이비드슨의 주요 조언자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존 워즈워스 솔즈베리 주교 ("다소 제한적인 교회 학식을 갖춘 훌륭한 인물"), 프랜시스 페짓 옥스퍼드 주교 ("학자이자 신학자"), 에드워드 탤벗 로체스터 주교 ("실용적인 교구 운영자"), 코스모 랭 스텝니 주교(훗날 요크 대주교가 됨, "램버스를 런던 자택처럼 여기며 거의 필수적인 존재가 된 동료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 비서였던 스탬퍼드햄 경.[65]
데이비드슨은 자신이 "영국 교회 내의 위대한 중심 정당"이라고 부르는 것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66] 그는 20세기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공동 기도문''을 현대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성공회 교리에 따라 영국 국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을 포용하고, 소수의 고교회파 강경론자들이 교회 규칙을 따르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67] 그는 아서 밸푸어 총리의 신중한 지원을 받아, 교회 내 만연한 무질서를 조사하고 해결책을 제안하기 위한 왕립 위원회 설립을 추진했다. 위원회는 교회가 자체적인 사안에 대해 더 많은 통제권을 가져야 하지만, 교회의 관행을 규율하는 법률을 시행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67][68] 데이비드슨은 완고한 보수주의자도, 모험적인 개혁가도 아닌 중도 노선을 견지했다. 사망한 아내의 자매와의 재혼을 허용하는 결혼법 개정에 반대했으나,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은 1907년에 개정되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1904년 8월, 데이비드슨은 부인과 함께 미국 성공회의 삼년회(Triennial Convention)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이는 캔터베리 대주교로서는 최초의 미국 방문이었다.[67] 그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영국과 북미 성공회 간의 긴밀한 관계 구축에 기여했다.[71] 이러한 해외에서의 성과와 달리, 국내에서는 국가 교육 정책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 간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좌절을 겪었다. 자유당은 1902년 교육법 통과에 반대했으며, 1906년 집권 후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자유당의 추가 개혁 시도는 보수당의 반대에 부딪혔고, 데이비드슨은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양측의 타협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는 일관된 초등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주요한 후회 중 하나로 여겼다.[72] 1907년, 데이비드슨은 노령 연금 제도에 대해 명시적인 지지를 즉각 표명하지 않아 일부 자유주의자들을 실망시켰다. 그는 지지를 표명하기 전에 구체적인 제안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73] 반면, 콩고에서 벨기에인들이 저지른 잔학 행위와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인들이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훨씬 더 단호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74]
6. 2. 램버스 회의와 국제 성공회 공동체
1908년 7월과 8월, 데이비드슨은 전 세계 성공회 주교들이 참석하는 제5차 람베스 회의를 주재했다.[75] 이 회의에는 241명의 주교가 참석했다.[76] 주요 논의 주제는 신앙과 현대 사상의 관계, 성직자 공급 및 훈련, 교육, 해외 선교, 기도서의 개정 및 "개선",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같은 "치유 사역"에 대한 교회의 관계, 결혼과 이혼 문제, 성공회의 조직, 그리고 다른 교회들과의 재결합 등이었다.[76] 대중의 관심은 기독교 연합을 위한 주교들의 열망에 집중되었다. 결의안은 재결합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나 동방 정교회와의 최종적인 재결합 가능성을 저해할 수 있는 비국교도들을 향한 조치를 취하는 데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67]
데이비드슨의 제안에 따라 제6차 램버스 회의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0년 7월과 8월에 램버스 궁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252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주교들은 성공회 교리의 네 가지 기본 원칙인 램버스 4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회의의 주요 의제인 "모든 기독교인에게 호소"를 발전시켰는데, 이 호소는 성공회 교회가 다른 전통의 교회들과의 연합을 추구할 기초를 제시했다.[110]
회의의 다른 결의안으로는 국제 연맹을 "정치에서의 기독교의 표현"으로 환영하고, 여성의 부제 서품 자격을 확인하며, 결혼을 간통 외에는 이혼의 용납할 수 있는 사유 없이 해소될 수 없는 평생의 결합으로 선언했다. 주교들은 피임, 심령주의, 그리고 영매술을 통해 죽은 자와 소통하려는 시도를 비난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신지학은 심각한 오류를 포함한다고 명시되었지만, 경제적 유물론에 대한 반작용을 보여준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110][111]
6. 3. 제1차 세계 대전과 국내 정치
성공회 분파 간의 갈등은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이어진 키쿠유 논쟁으로 나타났다.[87] 몸바사 주교였던 윌리엄 조지 필과 우간다 주교였던 존 제이미슨 윌리스는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키쿠유 지역 스코틀랜드 교회 교구에서 열린 초교파 선교사 회의에 참석하여, 비국교도 동료들과 함께 에큐메니컬 성찬 예배에 참여했다.[88] 이 행동과 다른 교회와의 선교 협력 합의는 잔지바르 주교 프랭크 웨스턴의 비난을 받았다. "앵글로-가톨릭 강경파의 챔피언"으로 묘사된 웨스턴은[89] 필과 윌리스 주교에 대한 이단 재판을 요구했다. 데이비드슨은 개인적으로 두 주교가 "무모했다"고 생각했지만, 웨스턴과 그를 지지한 옥스퍼드 주교 찰스 고어의 비난은 "터무니없고" "지나치게 비난적"이라고 보았다.[90] 이 문제는 언론에서 몇 주간 논의되었으나, 결국 데이비드슨의 포용적이고 실용적인 견해가 우세하여 논쟁은 점차 가라앉았다.[2][35]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데이비드슨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그는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을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여겼다.[91] 그러나 그는 "약속된 말에 대한 충실 의무와 폭력으로부터 약한 국가를 방어해야 할 의무" 때문에 영국이 싸워야 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5] 그는 성직자들이 비전투원으로 복무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전투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92][93]
독일 신학자 그룹이 독일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자, 데이비드슨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과거에 의견이 달랐던 이들을 포함한 많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독일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 하지만 그는 "전쟁의 공포를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서 반독일 수사에는 몰두하지 않았다".[35] 『더 타임스』는 "그는 일부 성직자들이 발언하는 격렬한 비난과 전쟁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승인에 빠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67] 그는 영국에 있는 적국인으로 분류된 독일인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인을 돕기 위한 기금에도 기부했다.[94]

전쟁 기간 동안 데이비드슨은 영국 측의 비도덕적인 전쟁 수행 방식을 비판했다.[95] 그의 반대는 주로 정치 지도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되었으나, 일부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져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증오 메일이 램버스 궁전에 쏟아졌다"고 기록될 정도였다.[2] 그는 영국군의 패배를 숨기기 위한 허위 정보 유포,[96] 독가스 사용, 1917년 4월 프라이부르크에 대한 징벌적 폭격,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등에 항의했다.[2][35] 1916년에는 서부 전선의 병사들을 만나기 위해 8일간 프랑스를 방문했다.[67]
전쟁 중 아일랜드의 내란 문제 역시 데이비드슨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는 이스터 봉기에 참여한 로저 카스먼 경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에 반대했으며, 전쟁 후에는 블랙 앤 탠스의 폭력을 비난했다.[97]
전쟁 마지막 해에는 고교회파의 추가적인 반발에 대처해야 했다. 옥스퍼드 주교 찰스 고어는 헨슬리 헨슨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로이드 조지 총리가 그를 주교로 임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98][99] 평신도와 대부분의 성직자 여론은 고어에 반대했다. 데이비드슨은 이 논쟁으로 인해 사임을 고려할 정도로 고심했지만,[100] 결국 헨슨을 지지했다. 헨슨은 비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신앙 고백을 발표하는 데 동의했다.[100] 데이비드슨은 공개적으로 "공정한 사람은 헨슨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에게 기독교 신앙의 훌륭하고 강력한 교사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그를 옹호했고,[102] 고어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항의를 멈췄다.[100][103]
전쟁 기간 동안 데이비드슨은 평화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기독교적 이상주의가 정치적 현실주의와 동반되어야 하며, 기도와 증언과 함께 기독교인에게는 "생각할 의무"가 있고, 평화는 "우리가 마음, 즉 마음뿐만 아니라 마음을 이 새롭고 용감한 결심에 바칠 때"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104]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전쟁 후 설립된 국제 연맹을 강력하게 지지했다.[97]
6. 4. 총파업과 기도서 개정 논쟁
1926년 5월, 노동조합 회의(TUC)는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막고 악화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에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고자 총파업을 선언했다. 약 250만 명의 노동자들이 5월 3일부터 12일까지 파업에 참여하여 교통과 산업을 마비시켰다.[112] 데이비드슨은 이 상황에서 화해적인 역할을 하려 했으며, 역사학자 G. I. T. 매킨은 그의 개입을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25년 동안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데이비드슨은 5월 5일 상원에서 파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정부에 산업 분쟁 종식을 위한 조치를 촉구했다. 이틀 후, 그는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초교파 그룹을 소집하여 협상을 통한 해결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113] 이들은 협력의 정신으로 대화를 재개할 것을 촉구하며 세 가지 원칙, 즉 TUC의 총파업 중단, 정부의 일시적 석탄 산업 보조금 지급, 광산 소유주의 분쟁 중인 임금 조건 철회를 제시했다.[114] 데이비드슨은 이 호소문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리고자 했으나, BBC의 총책임자였던 존 레이스는 정부의 보복을 우려하여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115]이러한 노력은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다. 파업은 중단되었지만 광부들의 불만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비드슨과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공동 행동은 종교 간 통합을 향한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받았다. 한 비국교도 성직자는 데이비드슨에게 "제 평생 처음으로 이 나라의 기독교 세력이 단결하고 용감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지도력 덕분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연대감이 생겼습니다."라고 전했다.[116]

역사가 매튜 그림리는 1927년에서 1928년 사이의 기도서 개정 논쟁을 "교회와 국가에 관한 마지막 거대한 의회 투쟁"이라고 묘사한다.[117] 데이비드슨은 그의 튜더 시대 선임자인 토마스 크랜머처럼 새로운 기도서가 교회 내의 차이를 해결하고 규율을 회복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가졌다.[67] 그는 또한 현대화된 기도서가 성공회 예배를 풍성하게 하고, 16세기에 원본이 작성될 당시 예측하지 못했던 20세기의 필요에 부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67] 1906년부터 데이비드슨의 감독 하에 기도서 개정 작업이 진행되었고, 1927년에 마침내 개정본이 준비되었다. 교회 총회는 이를 승인하고 국회에 인가를 요청했다. 귀족원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241표의 찬성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윌리엄 브리지먼이 법안을 소개했지만, 그의 연설은 하원 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119] 반면, 반대 입장의 윌리엄 조인슨-힉스는 새로운 기도서가 로마 가톨릭 관습으로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하며 격렬하게 연설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120][121] 데이비드슨은 브리지먼의 연설에 대해 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지식도 없고 열정도 없는 형편없는 연설이었다"고 기록했다.[122] 벨 주교는 조인슨-힉스의 연설을 "현란했지만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119] 결국 하원은 238대 205표로 법안을 부결시켰다.[123] 하원 의원 오스틴 체임벌린은 이 결과 이후 데이비드슨을 "비극적으로 안타까운 인물"이라고 묘사했다.[124] ''더 타임스''는 "새로운 기도서를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의 개인적인 실망에 대해 대주교에게 동정을 표하지 않거나, 그의 수위 25년이 그 정점으로 여겨졌을 업적으로 끝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논평했다.[67]
다음 해인 1928년 6월 14일, 두 번째 시도 역시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이 패배 이후 데이비드슨은 교회 총회에서 "교회, 즉 주교와 성직자, 평신도들이 함께,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확인되었을 때,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여 그분 안에서 신앙을 공식화하고 예배 형식으로 그 거룩한 신앙의 표현을 마련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입니다."라고 선언했다.[125] 이 성명은 주교들의 만장일치 지지를 얻었다.[125] 데이비드슨의 일부 동료들은 의회의 기도서 거부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후임자 중 한 명인 윌리엄 템플은 "어떤 종류의 교회 분리가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했다.[127] 이전에 국교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헨슨 주교는 이제 국교 폐지 운동을 시작했다.[126] 역사가 에이드리언 헤이스팅스는 데이비드슨이 "기민한 책략과 지연을 통해" 동료 주교들이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을 막았다고 평가했다.[127]
7. 은퇴와 죽음
1928년 6월, 데이비드슨은 11월 12일을 기하여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135] 그는 영국 종교 개혁 이후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캔터베리 대주교로 재임했다.[2] 그는 이 직위에서 처음으로 자진 은퇴한 사람이었다.[128] 전례 없는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국왕은 데이비드슨의 공식 사임을 받아들이는 4인 위원회를 임명했다. 은퇴 후 그는 '''램버스 남작 데이비드슨'''으로 임명되었고, 해리스 경과 스탬퍼드햄 경에 의해 11월 14일 귀족원에 소개되었다.[136] 램버스 궁을 떠난 후, 데이비드슨은 첼시의 체인 워크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137]
그는 그곳에서 1930년 5월 25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8]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윌리엄 폭슬리 노리스 학장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을 제안했지만, 데이비드슨은 캔터베리에 묻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고, 그의 뜻에 따라 5월 30일 캔터베리 대성당의 회랑에 있는 챕터 하우스 맞은편에 묻혔다.[139] 그의 미망인은 1936년 6월에 사망하여 그와 함께 묻혔다.[140]
8. 유산과 평가
데이비드슨은 1928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평범하고 2류 재능을 가진 재미있는 늙은이, 그리고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며, 단지 최선을 다하고 의무를 지키려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평가했다.[142]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를 더 높게 평가한다. 비록 2017년 마이클 휴즈는 데이비드슨이 "대중의 기억, 어쩌면 교회에서조차 거의 잊혀졌다"고 지적하며[143], 그의 명성이 윌리엄 템플이나 마이클 램지와 같이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후계자들에게 가려졌다고 언급했지만[144], 다른 역사가들은 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사가 해스팅스는 데이비드슨을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교직자"로 칭하며, "놀라운 균형 감각, 지적 겸손함, 책임감, 그리고 일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뛰어난 공공 도덕적 책임감은 그에게 놀라운 영향력과 지위를 부여했다"고 평가했다.[145] 키스 로빈스는 데이비드슨이 지적 논쟁으로 교리의 차이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잉글랜드 교회라는 배가 특정 파벌에 의해 좌초되는 것을 막는 데 주력했으며, "대체로 침착하고 영감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놀랍도록 성공했다"고 분석했다.[146] 1966년 로저 로이드는 "세월이 흐르면서 데이비드슨이 모든 캔터베리 대주교들 중 가장 위대한 두세 명 중 한 명이라는 판단에 반박하려는 욕구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적었다. 그는 "말년에 개정 기도서 문제로 인해 그의 파악력이 다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높은 직책을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탁월함의 정점과 권위의 높이로 끌어올렸다"고 덧붙였다.[147]
조지 벨 주교는 데이비드슨이 "기독교 세계에서 성공회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잉글랜드 교회가 이전보다 훨씬 더 세계적인 관점을 갖도록 이끌었다"고 결론지었다. 벨은 또한 "교회 사람들의 애정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꾸준히 커졌다. ... 그의 일반적인 정책에서 그는 중간 노선을 유지했으며, 그는 명확한 리더십을 제공하지 않고 상황을 너무 기다린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그의 능력은 본질적으로 의장의 능력이었으며, 매우 공정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동시에 매우 단순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는 그에게 매우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우정과 신뢰를 얻게 했다"고 덧붙였다.[35]
미우스는 데이비드슨의 업적을 "잉글랜드 교회의 포괄성을 유지하고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요약했다. 그는 데이비드슨이 "국제 및 계급 갈등이 제도적 종교를 잊게 만들 수 있는 시기에 영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비전을 유지했다"고 평가하며, "데이비드슨의 가장 큰 기술은 의장으로서, 그는 대개 만장일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거의 50년 동안 그는 다른 누구보다 성공회 문제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덧붙였다.[2]
데이비드슨은 전임자들과 달리 사망이 아닌 은퇴로 물러난 최초의 캔터베리 대주교이기도 하다.
그가 받은 주요 훈장 및 임명은 다음과 같다.
연도 | 훈장 및 임명 |
---|---|
1895–1903 | 가터 훈장의 주교 |
1902 | 로열 빅토리아 훈장 기사단장 |
1903 | 추밀원 의원 |
1904 | 로열 빅토리아 훈장 기사십자 대십자장 (GCVO) |
1911 | 로열 빅토리아 체인 |
1918 | 왕립 구세주 훈장 그랜드 크로스 (그리스) |
1919 | 오더 드 라 쿠론느 대십자 훈장 (벨기에) |
1919 | 성 사바 훈장, 1등 (세르비아) |
1928 | 런던 시 자유 시민 |
참조
[1]
서적
Bell (Volume I), p. 5
[2]
웹사이트
Davidson, Randall Thomas, Baron Davidson of Lambeth (1848–1930), archbishop of Canterbury
https://www.oxforddn[...]
Oxford University Press
2019-12-08
[3]
서적
Hughes, p. 10
[4]
서적
Bell (Volume I), pp. 5–6
[5]
서적
Bell (Volume I), p. 10
[6]
서적
Bell (Volume I), p. 14
[7]
서적
Davidson, quoted in Bell (Volume I),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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