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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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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로, 20세기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도미노 시스템'과 '근대 건축 5원칙'을 통해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사보아 저택, 유니테 다비타시옹, 롱샹 성당 등 다양한 건축 작품을 남겼다. 특히, 7개국 17개 건축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그의 건축 철학을 널리 알렸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은 인간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근대 건축 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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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개요
국립서양미술관 본관
국립서양미술관 본관
한국어 명칭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근대 건축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영어 명칭The Architectural Work of Le Corbusier, an Outstanding Contribution to the Modern Movement
프랑스어 명칭L’Œuvre architecturale de Le Corbusier, une contribution exceptionnelle au Mouvement Moderne
위치독일, 아르헨티나, 벨기에, 프랑스, 인도, 일본, 스위스
등재 정보
면적98.4838 ha (완충 지역 1,409.384 ha)
등재 기준(1), (2), (6)
분류기념물 9건, 유적 8건
등록 연도2016년 (제40회 세계 유산 위원회)
지정 번호1321
상세 위치 (유럽)
파리 및 주변 지역의 위치
파리 및 주변 지역의 2개 유적 위치
추가 정보
참고 자료http://whc.unesco.org/en/list/1321rev
참고 자료http://whc.unesco.org/en/news/1556/

2. 르 코르뷔지에의 생애와 건축 철학

르 코르뷔지에(1933년)


르 코르뷔지에(1887년~1965년)는 스위스라쇼드퐁에서 태어난 건축가이다. 시계 제조로 유명한 도시에서 자라 처음에는 시계 제조의 길을 가려 했으나, 약시로 인해 포기했다고 전해진다.[10] 그의 고향에는 초기 작품인 장느레 저택이 남아 있으며, 이는 당시 지역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 르 코르뷔지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을 위해 저렴한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 'Dom-Ino|도미노프랑스어' 시스템을 고안했는데,[11] 이는 라틴어 '도무스'(Domus, 집)와 프랑스어 'Inovation|이노바시옹프랑스어'(혁신)을 결합한 조어이자 놀이 도미노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를 활용하여 기둥, 바닥 슬래브, 계단만으로 구조를 이루는 이 방식은, 과거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두꺼운 벽이 필수적이던 전통 건축과 달리 벽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3] 이는 현대 건축의 중요한 특징인 유리 외벽 고층 건물 등의 발상으로 이어졌다.[3]

1920년대에는 저렴한 대량 생산 주택 모델로 흰색 상자 형태의 '시트로앙'(Citrohan) 주택을 제안했다. 이는 당시 저렴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던 시트로엥(Citroën)의 이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도미노 시스템과 결합하여 발전했으며,[13] 1926년에는 필로티, 수평으로 긴 창 등을 포함한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정립하기에 이른다.[14] 이 5원칙을 가장 잘 구현한 걸작으로는 '''사보아 저택'''이 꼽힌다.[15]

1939년에는 소장품 증가에 따라 미술관을 계속 확장할 수 있는 '무한히 성장하는 미술관' 개념을 구상했다. 나선형으로 화랑을 배치하고 필요에 따라 바깥으로 증축하는 방식이다. 이 구상이 완전히 실현된 미술관은 없지만, 인도 '''찬디가르'''의 미술 갤러리, 아흐메다바드의 삼스카르 켄드라 미술관, 일본 도쿄의 '''국립 서양 미술관'''(본관) 등이 이 구상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1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프랑스 부흥성의 요청으로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건설했으며, 이후 여러 도시에 유사한 형태의 공동 주택을 선보였다. 그는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밝혔지만,[17] 말년에는 의뢰를 받아 종교 건축물도 설계했다. 특히 초기 작품의 기하학적 형태와는 다른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롱샹 성당'''은 후기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받는다.[18]

이러한 그의 건축 작품들은 20세기 건축의 혁신을 이끌고 국제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주요 작품 다수가 여러 대륙에 걸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181]

2. 1. 근대 건축 5원칙

르 코르뷔지에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로서,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정립하였다. 그의 건축 작품들은 공동 주택, 공장, 미술관, 종교 건축 등 다양하며, 이 중 근대 건축의 5원칙에 부합하고 20세기 건축의 국제화를 잘 보여주는 7개국 17개 건축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건축물들은 20세기 다변하는 건축의 진화 과정에서 혁신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 새로운 건축 기술을 적용하여 창조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모더니즘 운동에 공헌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이는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을 아우르는 최초의 국제적 문화유산 공동 등재 사례이다.[181]

2. 2. 주요 건축 개념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주요 건축 개념'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는 르 코르뷔지에의 소개와 그의 건축 작품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전반적인 내용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3.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유네스코 세계유산)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인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프랑스어)는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정립하는 등 20세기 건축과 도시 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혁신적인 건축 작품들은 시대를 앞서 나간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가 협력하여 등재를 추진했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여러 차례 보류 결정 끝에 2016년 제40회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등재되었다. 등재된 유산은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독일, 아르헨티나, 인도, 일본7개국에 걸쳐 있는 17개의 건축물로 구성된다. 이 건축물들은 라 로슈 저택, 사보아 저택, 롱샹의 노트르담 뒤 오 성당, 국립 서양 미술관 등을 포함하며, 주택, 공장, 미술관, 종교 건축 등 다양한 유형을 아우른다.

이 유산은 20세기 건축의 국제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새로운 건축 기술을 창의적으로 적용하여 모더니즘 운동에 기여한 점과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 흩어진 건축물들을 하나의 연속 유산으로 공동 등재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181] 상세한 등재 과정과 건축물 목록, 등록 기준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등재 과정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은 20세기 건축이 높은 평가를 받아 세계유산으로 등록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등재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특히 그의 건축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프랑스에서 르 코르뷔지에 재단을 중심으로 등재를 추진했으며, 2004년에는 세계유산 등록을 위한 위원회도 발족했다.[103]

프랑스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이 있는 다른 국가들에게 참여를 요청했고, 스위스, 벨기에, 독일, 아르헨티나, 인도, 일본 6개국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각국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을 8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총 23건을 등재 후보로 선정했다.[131] 초기 후보에는 잔느레-페레 주택, 쇼브 주택, 쿡 주택, 바이센호프 지들룽 주택, 사보아 저택, 이무블 클라르테, 스위스 학생회관,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국립서양미술관, 롱샹 성당, 라 투레트 수도원, 찬디가르 등이 포함되었다.[6]

잠정 목록 기재일[3]
국명기재일
스위스2004년 12월 28일
벨기에2005년 4월 4일
프랑스2006년 1월 31일
인도2006년 10월 23일
독일2007년 2월 1일
아르헨티나2007년 6월 1일
일본2007년 9월 14일



그러나 정식 추천서 제출 직전, 인도가 참여를 철회하면서 유일한 '공공 건축' 및 '도시 계획' 사례였던 찬디가르가 제외되었다.[132][133] 인도의 철회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국내 문화재 보호 법제상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3][134]
첫 번째 추천 (2009년)2008년 프랑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센터에 추천서를 제출했다. ICOMOS는 현지 실사 후 '탁월한 보편적 가치' 증명이 불충분하다며 '등록 보류'를 권고했다.[135] 2009년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르 코르뷔지에 작품의 세계유산 등재 자체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여러 대륙에 걸친 연속 등재 유산[137][138]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지와 건축가 개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연속성'을 구성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3][139][140][141] 결국 투표를 통해 보류가 결정되었고, 최종적으로는 ICOMOS 권고보다 한 단계 높은 '정보 조회'로 결의되었다. 결의문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 증명 보강과 관련국 공동 관리 체제 확충을 요구했다.[3][142][143]
두 번째 추천 (2011년)'정보 조회' 결의에 따라 추천 내용이 수정되었다. 평가 기준이 르 코르뷔지에 개인에서 근대 건축 운동에 대한 기여로 변경되었고, 구성 자산은 19건으로 축소되었다.[144] 추천 명칭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근대 건축 운동에 대한 현저한 기여 -"로 바뀌었다.[3] 공동 관리 체제 강화를 위해 "르 코르뷔지에 건축 자산 자치체 협의회"도 창설되었다.[3][145]

수정된 추천서는 2011년 2월에 다시 제출되었으나, ICOMOS는 이전보다 더 엄격한 "부등록"을 권고했다. ICOMOS는 근대 건축 운동이 르 코르뷔지에 한 명에게만 귀속될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19개 자산 전체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3] 다만 프랑스의 3개 자산(사보아 저택, 유니테 다비타시옹, 롱샹 성당)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며 개별 재추천을 권고했다.[147] 같은 해 제35회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는 여러 대륙에 걸친 연속 등재 유산의 의의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부등록'은 피하고 '계속 심의'가 결정되었다.[148][149]
세 번째 추천 및 최종 등재 (2016년)2014년 인도가 다시 참여하면서 2016년 등재를 목표로 세 번째 추천이 준비되었다.[150] 인도의 찬디가르 행정 지구가 다시 포함되었고, 프랑스의 스위스 학생회관과 자울 저택, 스위스의 장느레 저택이 제외되어 최종 후보는 7개국 17개 건축물로 확정되었다.[151] 이번 추천에서는 이전의 걸작으로서의 평가(세계유산 등록 기준 1) 주장을 철회하고, 20세기 건축에 미친 영향력(기준 2, 6)에 초점을 맞춰 가치를 증명하려 했다.[152]

ICOMOS는 '등록'을 권고했고[153], 마침내 2016년 제40회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등재되었다.[3][7][8] 이는 2004년 스위스의 건축물이 잠정목록에 처음 등록된 이후 12년 만의 결실이었다.

3. 2. 목록 (국가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중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17개 건축물은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독일, 아르헨티나, 인도, 일본 등 7개국에 걸쳐 있다.[19][20] 아래 목록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ID 순서로 정렬되었으며, 각 건축물의 ID, 명칭, 소재지, 설립 연도, 면적 정보를 포함한다.[21][22][23]

ID명칭소재지설립 연도부지 면적 (ha)완충 구역 면적 (ha)
1321-001라로슈-잔레 주택
Maisons La Roche et Jeanneret프랑스어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1925년0.097ha13.644ha
1321-002레만 호반의 작은 집
Petite villa au bord du lac Léman프랑스어
스위스
보주 (코르소)
1924년0.04ha5.8ha
1321-003페사크 주거 단지
Cité Frugès de Pessac프랑스어
프랑스
누벨아키텐 (페삭)
1925년2.179ha26.475ha
1321-004기예트 저택
Maison Guiette프랑스어
벨기에
안트베르펜주 (안트베르펜)
1927년0.0103ha6.7531ha
1321-005바이센호프 지들룽 주택
Maisons de la Weissenhof-Siedlung프랑스어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
1927년0.1165ha33.6213ha
1321-006사보아 저택
Villa Savoye et loge du jardiner프랑스어
프랑스
일드프랑스 (푸아시)
1931년1.036ha155.585ha
1321-007이무블 클라르테
Immeuble Clarté프랑스어
스위스
제네바주 (제네바)
1932년0.15ha1.8ha
1321-008포르토-모리토르의 집합주택
Immeuble locatif à la Porte Molitor프랑스어
프랑스
일드프랑스 (불로뉴-비양쿠르)
1934년0.032ha57.113ha
1321-009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é d’habitation Marseille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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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마르세유)
1952년3.648ha119.833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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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Manufacture à Saint-Dié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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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테스트 (생디에데보주)
1951년0.762ha64.912ha
1321-011쿠루체트 저택
Maison du docteur Curutchet프랑스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라플라타)
1953년0.027ha6.965ha
1321-012롱샹 예배당
Chapelle Notre-Dame-du-Haut de Ronchamp프랑스어
프랑스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롱샹)
1955년2.734ha239.661ha
1321-013카바농
Cabanon de Le Corbusier프랑스어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
1952년0.198ha176.172ha
1321-014찬디가르 카피톨 단지
Complexe du Capitole프랑스어
인도
펀자브 주 찬디가르
1962년66ha195ha
1321-015라 투레트 수도원
Couvent Sainte-Marie-de-la-Tourette프랑스어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에브)
1960년17.923ha99.872ha
1321-016국립서양미술관
Musée National des Beaux-Arts de l’Occident프랑스어
일본
도쿄도 (다이토구)
1959년0.93ha116.17ha
1321-017피르미니 문화의 집
Maison de la Culture de Firminy프랑스어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피르미니)
1965년2.601ha90.008ha


3. 2. 1. 프랑스

프랑스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관여한 건축물들이 각지에 남아 있으며, 그 중 10곳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잠정 목록에 기재된 것은 2006년 1월 31일이었다.[3] 2009년 추천 당시에는 14건이었지만, 2011년 추천을 앞두고 쿠크 저택과 구세군 난민원이 제외되었고, 2016년 심의를 위한 추천 시에는 스위스 학생회관과 자울 저택이 제외되었다.

  • 라 로슈-잔느레 주택 (1923년~1925년): 파리에 지어진 2가구 주택으로, 현재는 르 코르뷔지에 재단(프랑스어: Fondation Le Corbusier)의 본부가 입주해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만년에 이 건물을 자신에게 중요했던 저택으로 꼽았다.[3] 의뢰인은 『에스프리 누보』지의 지원자였던 은행가 라울 라 로슈(Raoul La Roche)와 르 코르뷔지에의 형인 음악가 알베르 잔느레(Albert Jeanneret)였다.[38] 라 로슈는 르 코르뷔지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고객이었고,[3] 르 코르뷔지에는 이 건물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었다.[39] 1926년 근대 건축의 5원칙이 발표되기 전에 이미 수평 연속 창이 실현된 점이 이 주택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주 언급된다.[3][40] 내부는 시트로엥 주택을 기본으로 트인 홀, 완만하게 굽은 벽면과 슬로프 등 다채로운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3] 르 코르뷔지에는 이를 "건축적 산책로"라 부르며 건물 안을 걸으며 새로운 표현을 감상하는 경험을 강조했다.[3] 한편, 다양한 요소를 담아 전체적인 인상이 부분별 인상에 비해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41] 2009년 추천 당시 "개인 저택"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으로서는 "건축에서의 최초의 퓌리스 표현"을 실현했다는 점이 평가받았다.[42]

  • 페삭 집합 주택 (프랑스어: Cité Frugès, 1924년): 보르도 근교 페삭에 지어진 집합 주택이다. 제당 공장 경영자이자 르 코르뷔지에의 저서 『건축을 향하여』에 공감한 앙리 푸르제(Henri Frugès)가 공장 노동자를 위한 주택 건설을 의뢰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시트로엥 주택 이념과 통하는 테일러주의적 양식을 적용하여 상자형 주택을 설계했다.[44][45] 측면 상부에 돌출된 계단은 기하학적 디자인에 움직임을 더해 외관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였다.[46] 페삭 집합 주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스케치로 구상했던 상자형 주택 도시 경관을 실현한 드문 예이다.[47] 하지만 당초 135호 예정이었던 계획은 46호 건설에 그쳤다.[3] 보수적인 주민들의 간섭,[48] 현지 업자 배제로 인한 마찰,[3] 수도 미비 등의 문제가 있었고, 르 코르뷔지에의 고집으로 건설비가 상승하여 노동자 주택으로는 부적절한 입주비가 되었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거주하기까지는 임대료 배려를 담은 르슈르 법(1929년) 제정을 기다려야 했다.[3] 입주 후 주민들이 보르도 지역 특유의 지붕 등을 덧붙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최초 모습으로 복원되었다.[3] 2009년 추천 당시 "규격 주택"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으로서는 1920년대 양산형 주거 최대 규모이자 "근대 주거에 의한 집합 주택의 프로토타입"이라는 점이 평가받았다.[49]

  • 사보아 저택 (1928년~1931년): -- 파리 교외 푸아시에 지어진 저택으로, 행정관 사보아 부부의 주말 별장으로 의뢰되었다.[3] 근대 건축의 5원칙이 집약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50][51] 가는 기둥(필로티)이 흰 직육면체 건물을 받쳐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3] 1층은 차고와 사용인실, 2층은 주요 주거 공간으로 수평 연속 창을 통해 개방감을 확보했다. 전면 유리창 대신 창으로 처리하여 주변 초지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분리된 공간감을 주도록 의도했다.[52] 3층에는 옥상 정원이 있으며,[3] 각 층은 경사로로 연결되어 다양한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3] 르 코르뷔지에가 제시한 견학 동선은 북쪽 외관 감상 후 1층 진입, 경사로를 이용해 2, 3층(옥상 정원)을 둘러보고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53] 그러나 지붕 없는 디자인은 비에 취약하여 입주 직후부터 누수 문제가 발생했다.[54] 건축비가 2배로 늘었음에도 유지되던 사보아 부부와의 관계는 누수 등 여러 문제로 인해 소송 직전까지 갔다.[55]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스의 건초 창고로 사용되었다. 전후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 장관 앙드레 말로의 강력한 보존 주장으로 철거를 면하고 단계적 수복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50][3] 2009년 추천 당시 "개인 저택"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 등록 시 "근대 건축 운동의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인 아이콘"[56]으로 평가받았다. 같은 부지 내 "정원사 오두막"은 정원사를 위한 "최소한의 주택" 실천 예로, 큰 저택과의 대비는 부자와 빈자의 대비를 넘어 르 코르뷔지에의 실천이 모두를 향했음을 보여준다.[3][58]

  • 포르토-모리토르의 집합주택 (1931년~1934년): 파리 근교 불로뉴-비양쿠르에 세워진 집합주택이다. 가장 위 2개 층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와 주거 공간이 있어 그가 생애 마지막까지 거주했다.[3] 외관은 스위스 학생회관과 유사하나,[60] 불로뉴 숲 인근 입지 조건으로 인한 현지 규제로 파사드의 창의성은 제한적이었다.[61] 입주자 부족 등으로 인한 자금난으로 옥상 메조넷 구상이 중단되기도 했다.[3] 내부는 입주자 개인의 주거 환경 향상을 위해 욕실, 주방 외 중앙 난방과 지하 차고를 갖추고 사용인 주거 환경도 배려했다.[62] 2009년 추천 당시 "집합주택"으로 분류되었으며,[3] 세계유산 포함 이유는 "전면 유리로 된 파사드의 세계 최초 집합주택"[3]이라는 점이다.

  • 유니테 다비타시옹 (마르세유) (1945년):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모식도
    제2차 세계 대전 후 복구기에 마르세유에 지어진 집합 주택이다. 기본 구조는 3개 층을 단위로 L자형과 역L자형 주거 공간을 조합하고 그 사이에 복도를 두는 방식이다.[65] 각 세대는 동서 양쪽에 창이 있어 일조를 확보할 수 있다.[66] 2층 구조의 복층형 세대이며, 창문에는 브리즈 소레유(햇빛 가리개)가 설치되어 외관에 포인트를 준다.[67] 3개 층당 1개의 복도만 지나가도록 설계되어 15층 건물에 총 5개의 복도만 있다.[68] 이 복도는 구조상 햇빛이 들지 않아 건설 초기 위생 관계자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69] 내부는 『빛나는 도시』에서 구상한 "수직 도시"를 지향하여,[70] 약 1600명이 거주하는 주거 공간 외에 호텔, 슈퍼마켓, 유치원, 옥상 수영장, 스포츠 짐 등 생활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71][3][72] 르 코르뷔지에가 제창한 치수 체계인 모듈러가 가장 엄격하게 적용된 예이기도 하다.[3] 건물은 필로티로 들어 올려져 있는데, 스위스 학생회관의 가는 기둥과 달리 역삼각형의 중후한 기둥이 사용되었다. 이는 시각적 효과를 위한 선택으로, 구조적으로는 더 가늘어도 가능했기에 기둥 내부는 배관 공간으로 활용되었다.[73] 원래 4동이 계획되었으나 1동만 건설되어 광대한 녹지에 여러 동이 솟아 있는 이미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르세유 유니테는 높이 평가받으며 다른 도시에도 건설되었으나, 후속 유니테들은 간략화된 요소들을 포함하여[3] 마르세유의 것이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74] 르 코르뷔지에 전체 작품 중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75] 2009년 추천 시 "집합 주택"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으로서는 "건축의 브루탈리즘의 기점이 되는 작품"이자 "독립성과 공동성의 조화를 만들어낸 새로운 주거 방식의 주요 시도"라는 점이 평가받았다.[76]

  • 생-디에 공장 (1946년~1951년): 알자스-로렌 지방 생-디에-데-보주에 재건된 메리야스 등 직물 공장이다. 위진 뒤발(프랑스어: Usine Duval) 또는 클로드 & 뒤발 공장이라고도 불린다.[3] 르 코르뷔지에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복구를 위한 여러 도시 계획안을 제안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생-디에 재건 계획도 그중 하나였으며, 유니테 다비타시옹 등을 포함한 포괄적 도시 계획을 구상했다.[77] 실현되지 않은 계획을 지지했던 공장주 장-자크 뒤발(Jean-Jacques Duval)이 전쟁으로 파괴된 공장 재건을 르 코르뷔지에에게 의뢰했다.[78] 뒤발의 기능적인 공장 요구에 따라,[79] 르 코르뷔지에는 필로티가 있는 1층을 원료 보관 및 포장, 3층을 원료 재단, 2층을 주요 작업 공간으로 설계하여 효율적인 작업 동선을 만들었다.[3] 그는 기존의 어두운 공장과 대비되는, 노동 환경을 개선한 "녹색 공장" 개념을 제시했다.[80] 목재 건물을 사용하고 주변에 녹지를 조성했으며, 작업장 창문으로는 성당이 보이도록 배려했다.[81] 창문은 많은 빛을 받아들이는 동시에,[82] 브리즈 소레이유를 유럽에 도입한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83] 또한 선박 이미지를 활용하여 조형에 반영했다.[3] 2009년 추천 당시 "표준 대형 건축"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으로서는 "'빛나는 도시'와 '아테네 헌장'에서의 표준형"으로 위치하며, "노동 상태에 혁신성을 가져오는 녹색 공장의 프로토타입"이라는 점이 평가받았다.[3]

  • 롱샹 예배당 (1950년~1955년):
    롱샹 예배당 (모형)
    오트손 주 롱샹의 언덕에 세워진 예배당으로, 정식 명칭은 "노트르담 뒤 오 예배당"이다. 예로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 이곳의 기존 교회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자, 성직자 알랭 쿠튀리에(Alain Couturier)의 의뢰로 르 코르뷔지에가 재건을 맡았다.[84] 게 등딱지를 모티브로 한 지붕[85] 등 이전의 직선적 양식과 다른 조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움푹 들어간 벽면은 미사를 위한 음향 효과를, 중앙이 팬 천장은 빗물 확보를 고려한 기능적 설계이다.[86] 내부 채광 방식은 자울 저택과 유사하며, 벽면에 이전 교회 잔해를 활용한 것은 도미노 시스템 이념과 연결된다는 해석도 있다.[87] 후기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특이한 디자인으로 초기에는 비판도 받았다. 건축가 마키 후미히코 등은 그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모호함 자체를 가치로 보기도 한다.[88][89] 2009년 추천 당시 "종교 건축"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으로서는 "20세기의 종교 건축에 혁명적이며, 기독교 건축의 아이콘이다"라는 점이 평가받았다.[3]

  • 컵 마르탱의 휴가 오두막 (프랑스어: Site corbuséen du Cap Martin, 1951년):
    컵 마르탱의 휴가 오두막
    지중해 연안 로크브륀-카프-마르탱에 지어진 휴가용 오두막(카바농)으로, 아내 이본(Yvonne)에게 선물했다. 이본은 인근 망통 출신으로[90] 1957년 사망했고, 르 코르뷔지에는 이후에도 이곳을 자주 찾다가 1965년 8월 근처에서 해수욕 중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91] 근처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부부의 묘비가 있다.[92] 지역 식당 주인 토마 루뷔타토(Thomas Rebutato)에게 몇 채의 건물을 지어준 대가로 받은 땅에 지었다.[93] 밑변 3.66m 정사각형, 높이 2.66m의 콤팩트한 통나무집으로, 내부에 다양한 가구와 비품을 배치했다. 이는 모듈러의 엄격한 적용이자 "최소 주택" 구상의 실천이다.[94] 2009년 추천 당시 "규격 주택"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으로서는 "인간 공학과 엄격한 기능주의자로서의 접근 방식을 바탕으로 도달한 최소 공간의 원형"이자 "종합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았다.[95]

  • 라 투레트 수도원 (1953년): 론 주 에브에 건설된 도미니코회 신학생을 위한 수도원이다. 정식 명칭은 "생 마리 드 라 투레트 수도원"이며, 롱샹 예배당과 마찬가지로 알랭 쿠튀리에의 추천으로 실현되었다.[96] 롱샹 예배당의 양식을 따르면서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집합 주택 양식도 도입하여 종교 건축과 집합 주택을 조화시켰다.[97] 대형 건축물 중 유일하게 르 코르뷔지에의 구상이 수정이나 반대 없이 실현된 사례이다.[3][98] 예산 제약으로 마감은 생략되었지만, 의도적으로 경사면에 건설하여 최상층 개인실에는 개방성을, 반 지하 예배당에는 폐쇄성을 부여하는 등 공간 설계에 공을 들였다. 특히 예배당은 천장의 채색된 원통에서 들어오는 빛이 어둠 속 원색 벽을 비추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3] 2009년 추천 당시 "종교 건축"으로 분류되었고,[3] 세계유산으로서는 "근대 건축 운동의 탁월한 집대성"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그 근거로는 "순수주의 형태를 조합하고, 브루탈리스트 텍스처로 주거라는 소재에 혁명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99]

  • 필르미니 문화의 집 (프랑스어: Maison de la culture de Firminy-Vert, 1953년~1965년):
    필르미니 문화의 집 경기장
    루아르 주 필르미니에 세워진 문화·주거 시설군 필르미니-베르(프랑스어: Firminy-Vert)의 일부이다. 당시 필르미니 시장 외젠 클로디우스 프티(Eugène Claudius-Petit)는 노동자 생활 환경 개선을 위해 새로운 시가지 "필르미니-베르"를 구상했다.[100] 르 코르뷔지에는 이곳에 경기장, "문화의 집", 유니테 다비타시옹, 생 피에르 교회 등을 설계하도록 의뢰받았다.[101] 그는 이들을 하나의 경관 속에서 통합적으로 구상했다.[3][102] 그의 구상은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고, 특히 생 피에르 교회는 시장 교체와 재정 문제로 오랫동안 미완성 상태였다가 2006년에야 준공되었다.[3][103] 문화의 집은 르 코르뷔지에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완성한 건축물이며,[104] 조각적인 파사드와 지붕의 경사, 만곡이 특징이다.[105] 2009년 추천 당시에는 "필르미니의 건축물군"으로 "도시 계획" 분류였으나,[3][106] 2016년 정식 등록에서는 문화의 집으로 좁혀졌다. 세계유산으로서는 생디에 공장처럼 아테네 헌장과 빛나는 도시 컨셉을 채용하면서 "건축에서의 근대의 조각적 형태를 선취했다"는 점이 평가받았다.[107]

3. 2. 2. 스위스

스위스( Suisse|스위스fra)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2곳이 등재되어 있다. 잠정 목록 등재는 2004년 12월 28일에 이루어졌으며[3], 초기 추천 과정에서는 다른 건물들도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두 곳만 남게 되었다.

레만 호반의 작은 집에 있는 길이의 창문


'''레만 호반의 작은 집'''은 르 코르뷔지에가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부모님을 위해 지은 주택이다. 이름 그대로 길이 20m, 폭 3m의 작은 규모이지만[122], 컴팩트한 공간에서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가구 배치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손님 방문 시 침대를 숨길 수 있는 칸막이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3], 이는 인간공학 등을 바탕으로 공간 효율성과 생활 편의성을 극대화하려는 "최소한의 주택" 개념을 보여준다.[123]

남쪽 벽면에는 11m 길이의 가로로 긴 창이 있어 풍부한 채광과 함께 레만 호와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내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 수평 창의 디자인은 1923년 오귀스트 페레와의 "창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르 코르뷔지에는 합리성과 필연성을 내세웠지만, 페레는 수평 창이 실내 공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124] 건물이 지어진 지 몇 년 후 회반죽 벽에 균열이 생기자, 르 코르뷔지에는 이를 노후화에 대응하는 실험의 기회로 삼아 금속제 파형 강판으로 외벽을 덮는 등 보수를 진행했다.[3] 이 건물은 세계유산으로서 "최소한의 주택의 아키타입(원형)"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125]

제네바의 이무블 클라르테


'''이무블 클라르테'''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제네바에 지어진 공동 주택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처음으로 설계한 아파트 건물이다.[126][127] 건축주 에드몽 바네르의 의뢰로 건설되었으며, 각 층은 8개의 주거 단위로 구성된다. 이 주택들은 르 코르뷔지에의 저서 『빛나는 도시』에서 제시된 개념들, 예를 들어 움직이는 칸막이 벽이나 빌트인 가구 등을 실제로 구현한 사례이다.[3] 금속 제조업자였던 바네르의 협력 덕분에 이 건물에는 처음으로 강철 프레임 구조가 도입되었다.[3] 또한, 남쪽 유리 외벽에는 강한 햇빛을 조절하기 위해 빨간색 블라인드가 설치되었는데, 르 코르뷔지에는 훗날 이를 브리즈 솔레이유(차양 장치) 디자인의 초기 형태 중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128] 이무블 클라르테는 공동 주택의 프리패브화를 향한 중요한 단계로 평가받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량 주택 공급 필요성이 커졌을 때 큰 영향을 미쳤다.[129] 세계유산으로서는 "근대 고급 주택의 프리패브 프로토타입"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3]

3. 2. 3. 벨기에

벨기에에서 등재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은 기예트 저택(Maison Guiette|fra) 1곳뿐이다. 이 저택은 2005년 4월 4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처음 등재되었다.[3] 과거 1958년 브뤼셀 만국 박람회 당시 필립스관 설계를 맡기도 했으나, 이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34]

기예트 저택


기예트 저택은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위치하며, 1926년부터 1927년에 걸쳐 화가 르네 기예트의 의뢰로 지어졌다. 좁은 대지에 세워진 3층짜리 상자 형태의 이 주택은 독일의 바이센호프 주택과 더불어 르 코르뷔지에의 시트로엥 주택 구상을 비교적 충실히 따른 몇 안 되는 사례로 꼽힌다.[35] 근대 건축의 5원칙 중 하나인 '자유로운 파사드'의 전형적인 예로 평가받기도 하지만[3], 좌우 비대칭의 창문 배치 등 파사드의 구성과 색채에서는 당시 네덜란드의 기하학적 추상 미술 운동인 데 스테일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있다.[3][36][37] 특히 르 코르뷔지에는 유일하게 현장을 방문했을 때 색상 번호를 직접 지정하며 색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전해진다.[3]

2009년 세계유산 추천 당시 기예트 저택은 '아틀리에'로 분류되었다.[3] 이 건물은 퓨리즘 건축 양식이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 적용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스위스와 프랑스를 제외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의뢰받아 지어진 건축물로서, 초기 르 코르뷔지에가 유럽 다른 지역에서도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되어 세계유산 구성 자산에 포함되었다.[3]

3. 2. 4. 독일

독일에서 등재된 건축물은 바이센호프 지들룽의 주택이 유일하며, 2007년 2월 1일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다.[24]

이 주택은 1927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지들룽 주택 전시에 출품된 것이다. 당시 주최자였던 독일공작연맹 책임자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초청으로 르 코르뷔지에는 1세대용과 2세대용 두 채의 주택을 설계하여 건설했다.[25] 르 코르뷔지에는 전년에 발표한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이 주택에 적용했으며[3], 특히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직육면체 형태를 본격적으로 구현했다. 하지만 이후 지어진 사보아 저택(1928년)처럼 모든 방향에서 입체감이 강조되지는 않고, 특정 각도에서는 평범한 벽면으로 보이기도 한다.[26]

건설 초기에는 공중에 뜬 직육면체 디자인이 비현실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비판과 함께[3][27], 출품작 중 단위 면적당 건축비가 가장 높아 특정 사회 계층만을 위한 건축이라는 지적도 있었다.[3]

2009년 추천 당시에는 "규격 주택"으로 분류되었다.[28] 세계유산의 구성 자산으로서 "대량 생산을 위해 구상된 양산 주거"의 현저한 모델이라는 점과 "주거를 테마로 하는 표명의 국제적인 반향으로 지구 규모의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평가받았다.[29]

3. 2. 5. 아르헨티나

Argentine|아르헨티나프랑스어에서 등록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은 쿠르체트 저택뿐이다. 잠정 목록 등재는 2007년 6월 1일에 이루어졌다[3].

쿠르체트 저택 외관


쿠르체트 저택 내부


쿠르체트 저택(1949년)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도인 라플라타에 세워진 저택이다. 의뢰인 Pedro Domingo Curutchet|페드로 도밍고 쿠르체트es는 외과 의사였으며, 저택은 주거 공간과 진료소를 겸하고 있다[30][31].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은 세계 여러 곳에 남아 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에 실제로 지어진 그의 주택은 이 쿠르체트 저택이 유일하다[3]. 아르헨티나 건축가 Amancio Williams|아만시오 윌리엄스es가 건설에 크게 기여했고, 윌리엄스가 떠난 후에는 Simon Ungars|시몬 웅가르스es가 협력했다[3].

주택이 밀집한 지역의 좁은 부지 조건 속에서 아르헨티나의 더운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브리즈 솔레이유(일사 조절 장치)[32] 설계에 신경을 썼다. 또한 그늘이 생기는 안뜰을 중심으로 건물을 U자형으로 배치하는 현지 스타일(르 코르뷔지에는 이를 "소시지"라고 불렀다)을 받아들여 4층 건물로 지었다[3][3].

2009년 추천 당시에는 "개인 저택"으로 분류되었다[3]. 이 건물이 세계유산의 구성 자산으로 평가된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 가운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근대 건축 운동의 국제화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었다[33].

3. 2. 6. 인도

인도 Inde|앵드프랑스어에 등재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은 찬디가르의 캐피털 콤플렉스 1곳이다. 찬디가르는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파키스탄에 속하게 된 기존 펀자브 주의 주도 라호르를 대신하기 위해 계획된 도시이다.[108] 르 코르뷔지에는 인도 정부의 의뢰를 받아 도시 전체 계획을 수립했다.[108] 그는 격자형 구획에 상업 지구와 행정 지구 등을 배치했다. 상업 지구에는 도미노 양식 건물을, 행정 지구에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고등 법원, 의사당 등을 설계했다.[109] 특히 고등 법원은 아치형 공간을 가진 지붕과 브리즈 소레이유가 특징이며, 의사당은 독특한 형태의 차양으로 유명하다.[109]

찬디가르의 의사당


열린 손 기념비


찬디가르의 행정 지구 건축물들은 높이 평가받지만, 도시 계획 자체는 지나친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비판과 함께 "실패작"이라는 평가도 받는다.[3] 르 코르뷔지에 본인 역시 여러 제약으로 인해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디가르는 르 코르뷔지에가 구상한 여러 도시 계획 중 유일하게 실현된 사례이다.[3]

캐피털 콤플렉스는 200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고[3], 한 차례 등재가 거부되었으나 2015년 재추천되어 2016년에 정식 등재되었다.[3]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찬디가르 도시 전체가 아니라 행정 지구의 중심부이다. 여기에는 고등 법원, 의사당, 합동 청사 건물 3곳과 '열린 손' La Main ouverte|라맹 우베르트프랑스어 기념비를 포함한 4개의 기념비가 포함된다.[110] 등재 이유는 "자유와 근대성, 그리고 독립된 열린 국가를 기념하는 기념비적이고 조각적인 주요 건축 작품"이라는 점이다.[111]

3. 2. 7.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본관


일본의 구성 자산은 국립서양미술관 하나뿐이며, 잠정 목록에는 2007년 9월 14일에 등재되었다.[3] 국립서양미술관(1955년 기본 설계)은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 공원 내에 있는 미술관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기본 설계를 담당했다. 이는 일본에 남아있는 유일한 르 코르뷔지에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유일하다.[3]

국립서양미술관 건립은 프랑스로부터 마쓰카타 컬렉션이 기증 반환[112]되면서 이를 수용할 공간이 필요해짐에 따라 추진되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선정된 정확한 경위는 불분명하나, 1953년 발족한 "가칭 프랑스 미술관 설치 준비 협의회"에서 프랑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하고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을 일본에 유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3]

르 코르뷔지에는 미술관의 기본 설계만을 계약했으며, 구체적인 실시 설계는 그의 일본인 제자들인 사카쿠라 준조, 마에카와 구니오, 요시자카 다카마사가 담당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1955년 11월, 생애 유일하게 일본을 방문하여 8일간 머물며 제자들과 기본 설계를 진행했다. 이때 그는 계약 내용에는 없었지만 사카쿠라의 요청으로 미술관 주변의 종합적인 계획안도 구상하여, 연극 홀과 전시관을 포함한 문화 광장을 제안했다.[114] 그러나 당시 일본의 재정 상황으로 인해 미술관 외의 건물들은 건설되지 못했다.[115] 미술관 건설에는 모듈러 방식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으며, 1958년 3월 21일 기공식을 갖고 약 1년 후인 1959년에 준공되었다.[116]

국립서양미술관은 르 코르뷔지에의 '무한 성장 미술관' 구상에 따라 지어진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인도에서 계획되었던 두 미술관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던, 중앙 3층 높이의 홀을 통한 자연 채광 방식을 유일하게 구현한 미술관이기도 하다.[117] 반면, 부지 제약 등의 이유로 인도의 미술관보다는 규모가 다소 축소되었다.[3] 또한, 추후 증축이 필요했을 때 본래 구상대로 본관을 확장하는 대신 신관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18]

일본의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건립 후 50년이 지나야 중요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계 유산 잠정 목록 등재에 대한 정식 타진을 받은 2007년 9월 시점에는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에 같은 해 12월, 특례 조치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세계 유산 추천에 필요한 국내법적 보호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119]

2009년 세계 유산 추천 당시, 일본 문화청은 찬디가르와 아메다바드의 미술관과 비교하여 국립서양미술관이 '무한 성장 미술관' 구상을 더 완성도 높게 구현했다고 평가했다.[120] 이후 정보 조회 요청에 따라, 추천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고 마에카와 구니오 등을 통해 르 코르뷔지에가 일본 건축계에 미친 영향을 추가로 설명했다.[121] 2011년 ICOMOS는 비교 분석과 가치 증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으나,[3] 추가적인 수정을 거친 세 번째 추천에서 마침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국립서양미술관은 '무한 성장 미술관' 구상의 원형을 실현한 건물이며, 르 코르뷔지에 건축이 일본에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아가 "근대 건축 운동의 국제화 과정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3]

3. 3. 등록 기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준 (ⅰ), (ⅱ), (ⅵ)를 충족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9년 첫 번째 추천 당시, 추천 국가들은 이 유산이 다음의 세계유산 등록 기준을 충족한다고 주장했다.

  • (ⅰ)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르 코르뷔지에의 창의성이 다방면에 걸쳐 발휘되었으며, 추천된 건축물들이 단순한 형태나 색채의 독창성을 넘어 20세기 주택 및 도시 문제 해결에 대한 선구적인 해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기준을 충족한다고 보았다.[154]
  • (ⅱ)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20세기 건축과 도시 계획을 혁신한 "근대 건축 운동"과 관련하여,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군이 그 운동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기준을 충족한다고 주장했다.[3]
  • (ⅵ)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르 코르뷔지에가 20세기 건축과 도시 계획을 특징짓는 근대 건축 운동, 인터내셔널 스타일 등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 기준을 충족한다고 보았다.[3]


이 추천 기준은 2011년 두 번째 추천에서도 유지되었으나, "도시 계획" 부분이 제외되면서 설명이 일부 수정되었다.[155] 그러나 두 번째 추천 당시 ICOMOS는 기준을 충족하는 유산이 단 3곳뿐이라고 평가했다. 사보아 저택은 기준 (ⅰ), (ⅱ), (ⅵ)를,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기준 (ⅱ)와 (ⅵ)를, 롱샹 성당은 기준 (ⅰ)만을 충족한다는 판단이었다.[156] 또한 ICOMOS는 모든 구성 유산에 해당하지 않는 기준은 적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3]

이러한 평가를 고려하여, 2015년 세 번째 추천에서는 17개 유산 전체가 창조적 재능의 걸작임을 증명하는 대신, 기준 (ⅱ)와 (ⅵ)의 충족을 심화하여 증명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3]

세 번째 추천에 대해 ICOMOS는 기준 (ⅱ)와 (ⅵ)에 따른 등재를 권고했으며[157], 이는 추천국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그러나 이 권고를 바탕으로 열린 제40회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팡풀랴의 근대 건축군, 카라카스의 대학 도시와 같은 다른 모더니즘 건축 세계유산에 기준 (ⅰ)이 적용된 점을 고려하여 이 유산에도 기준 (ⅰ)을 적용해야 한다는 위원국의 제안이 지지를 얻어 최종적으로 기준 (ⅰ)도 포함되었다.[158] 다만, 이 결정은 각 구성 유산이 기준 (ⅰ)을 어떤 관점에서 충족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검토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3][159], 추천 과정에 참여했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나왔다.[3][160]

최종적으로 확정된 등록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기준 (ⅰ):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나타내는 걸작이며, 건축 및 사회에서의 20세기 근원적인 여러 과제에 대해 현저한 답변을 제시하는 것이다."[161]
  • 기준 (ⅱ): "근대 건축 운동의 탄생과 발전에 관하여, 전 세계 규모로 반세기에 걸쳐 일어난, 전례 없는 인류의 가치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3] 이 건축군은 "퓨리즘, 브루탈리즘, 조형적 건축이라는 근대 건축의 3가지 큰 조류의 탄생의 표식"[3]으로 평가된다.
  • 기준 (ⅵ): 구성 유산이 "그 이론과 작품에서 20세기에 현저한 보편적 의의를 갖는 근대 건축 운동의 사상과 직접적이고 물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3] 이는 "단지, 어떤 시점에서의 모범적인 위업에 그치지 않고, 반세기를 통해 전 세계에 착실하게 전파되어 간 건축 및 문자에 의한 제안의 현저한 총체이다."[3]

4.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



르 코르뷔지에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로서,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정립하며 20세기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건축 철학과 작품들은 전 세계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근대 건축 5원칙은 현대 건축 디자인의 기초를 마련했다.[181]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을 위한 저렴한 주택 대량 생산 방안으로 '도미노'(Dom-Ino|도미노fra) 시스템을 고안했다.[11] 이는 기둥, 바닥 슬래브, 계단만으로 구조를 이루는 방식으로[12],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 덕분에 가능했다. 전통 건축과 달리 구조 역할을 하던 벽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열었다.[3] 1920년대에는 저렴한 대량 생산 주택 '시트로앙'(Citrohan)을 제안하고, 도미노 시스템과 결합하여 발전시켰다.[13]

1926년에는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으로 긴 창, 자유로운 파사드(입면)로 이루어진 근대 건축의 5원칙을 발표했다.[14] 이 원칙들은 그의 건축 철학의 핵심이 되었으며, '''사보아 저택'''은 이 원칙들이 가장 잘 구현된 걸작으로 꼽힌다.[1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프랑스 부흥성의 의뢰를 받아 주택 문제 해결책으로 집합 주택인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건설했으며, 이는 이후 여러 도시에 적용되었다. 또한, 소장품 증가에 따라 확장 가능한 '무한히 성장하는 미술관' 개념을 구상하여 '''찬디가르'''의 미술 갤러리, 아흐메다바드의 삼스카르 켄드라 미술관, 도쿄의 '''국립 서양 미술관'''(본관) 설계에 적용했다.[16] 만년에는 종교 건축에도 참여하여 초기 작품과는 다른 조형미를 보여주는 '''롱샹 성당'''과 '''라 투레트 수도원''' 등을 남겼다.[18][17]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들은 20세기 건축의 혁신과 국제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인정받는다. 그의 작품 중 7개국 17개 건축물은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 건축 기술을 창의적으로 적용하여 모더니즘 운동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181] 이는 여러 대륙에 걸쳐 건축 작품이 공동 등재된 최초의 사례로,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증명한다.[181] 세계유산 등재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초기에는 23개 작품이 추천되었으나 일부 제외 및 세계 유산 위원회의 문제 제기로 보류되기도 했다.[6] 그러나 관련 국가들의 노력 끝에 2016년, 17개 작품이 최종 등재되어[7][8] 그의 건축이 지닌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UNESCO World Heritage List https://whc.unesco.o[...] 2016-08-17
[2] 웹사이트 The Architectural Work of Le Corbusier, an Outstanding Contribution to the Modern Movement https://whc.unesco.o[...]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2019-07-07
[3] 웹사이트 「情報照会」決議への対応 国立西洋美術館 http://www.city.tait[...]
[4] 웹사이트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の世界遺産一覧表への記載決定について http://www.bunka.go.[...] 문화청
[5] 웹사이트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のユネスコ世界遺産一覧表への記載決定(第40回ユネスコ世界遺産委員会における審議結果) https://www.mofa.go.[...] 외무성
[6] 서적 『コンサイス外国地名事典』第3版 三省堂 1998
[7] 뉴스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世界遺産登録勧告へ http://www.fnn-news.[...] Fuji News Network 2016-05-17
[8] 웹사이트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の世界遺産一覧表への記載決定について(速報) http://www.city.tait[...] 문화청
[9] 문서 라・쇼=드=퐁은, 기구하게도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군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처음에 심의된 2009년에, 「[[라・쇼=드=퐁과 르・로클|라・쇼=드=퐁과 르・로클, 시계제조업의 도시계획]]」으로서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10] 서적 Harvnb|加藤|2008|p=xxxvi
[11] 서적 Harvnb|越後島|2007|pp=22-24
[12] 서적 Harvnb|暮沢|2009|pp=42-43
[13] 서적 Harvnb|越後島|2007|p=27-30
[14] 서적 Harvnb|越後島|2007|p=39, Harvnb|加藤|2008|p=xxxviii
[15] 서적 Harvnb|暮沢|2009|p=48
[16] 서적 Harvnb|山名|2009|p=100
[17] 서적 Harvnb|越後島|2007|p=200
[18] 서적 Harvnb|越後島|2007|pp=ii, 135-137
[19] 서적 Harvnb|Fondation Le Corbusier|2011| pp=12-21
[20] 문서 프랑스어의 국명의 並びと 일본어의 오십음에서의 並べ方는 일치하지 않지만、문화청의 자료에서는 프랑스어에 의한 並べ方가 踏襲되고 있으므로、여기에서도 그것에 따른다。
[21] 웹사이트 The Architectural Work of Le Corbusier, an Outstanding Contribution to the Modern Movement - Multiple Locations http://whc.unesco.or[...] 세계유산센터 2017-11-06
[22] 문서 [[프랑스의 지역권]]명은2016년1월1일에 합병에 의해서 변경되고 있으므로、ICOMOS의 권고서에 게재된 구지역권명을 새로운 지역권명에 고치고 있다。
[23] 서적 Harvnb|日本ユネスコ協会連盟|2016|p=2-7 ; harvnb|世界遺産検定事務局|2017|p=49
[24] 서적 Harvnb|ICOMOS|2016|p=212
[25] 서적 Harvnb|加藤|2008|pp=137-141
[26] 서적 Harvnb|越後島|2007|pp=46-48
[27] 서적 Harvnb|暮沢|2009|pp=223-224
[28] 서적 Harvnb|暮沢|2009|p=} pp.200-202
[29] 서적 Harvnb|山名|2017|p=9
[30] 서적 Harvnb|加藤|2008|p=162
[31] 서적 Harvnb|暮沢|2009|pp=219-220
[32] 문서 브리즈・소레이유とは、窓에 격자状의 出っ張りを 付けて 日陰をつくることで、室内に 과度に 日が 差し込まないようにする工夫である。言い換えると、窓は 格子枠의 奥に 引っ込んでいるように見える。
[33] 서적 Harvnb|山名|2017|p=12
[34] 서적 Harvnb|暮沢|2009|p=16
[35] 서적 Harvnb|加藤|2008|pp=134-136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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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문서 日本側が美術品の「返還」を希望したのに対し、フランス側は、美術品はいったんフランスの所有となったものであり、フランスから日本へ「寄贈」するとの立場であった。このため、国立西洋美術館では「'''寄贈返還'''」という言葉を使い、パンフレット等にも「フランス政府から寄贈返還された松方コレクション」と紹介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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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웹인용 The Architectural Work of Le Corbusier, an Outstanding Contribution to the Modern Movement http://whc.unesc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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