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몽금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몽금전쟁은 1211년부터 1234년까지 몽골 제국과 금나라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가 몽골 유목민을 탄압하고 조상 암바가이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몽골군은 1211년부터 1215년까지의 1차 침공에서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포위하고 화북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후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을 떠난 후 무칼리가 이끄는 몽골군은 1216년부터 1229년까지 금나라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며 한인 군벌을 활용해 세력을 확장했다. 1229년 오고타이 칸이 즉위한 후 2차 침공이 시작되어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 주력군을 격파하고 개봉을 함락시켰다. 1234년 채주 전투에서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몽골 제국은 중원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금나라가 참전한 전쟁 - 개희북벌
    한탁주가 권력 강화를 위해 금나라를 공격하고자 일으킨 개희북벌은 오희의 배신과 군사적 실패로 끝나 남송에 정치적,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 몽골 제국이 참전한 전쟁 - 제9차 십자군
    1271년부터 1272년까지 에드워드 1세가 주도한 제9차 십자군은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위협받던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세력을 지원하고 맘루크 왕조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려 했으며, 십자군 국가 방어에 기여하고 십자군 운동 종말의 계기가 되었다.
  • 몽골 제국이 참전한 전쟁 - 몽송전쟁
    몽송전쟁은 몽골 제국과 남송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칭기즈 칸의 계획과 몽골 대사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1271년 원나라 건국 이후 쿠빌라이의 공격으로 남송이 멸망하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종결되었다.
  • 송나라가 참전한 전쟁 - 금송 전쟁
    금송 전쟁은 1125년부터 1234년까지 남송과 금나라 간에 약 120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소흥화의를 기점으로 양상이 변화했으나 영토 분쟁과 패권 경쟁이 이어지며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결국 양국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 송나라가 참전한 전쟁 - 송-대구월 전쟁
    981년 송나라가 딘 왕조가 멸망한 혼란을 틈타 대구월을 침공했으나, 레호안이 이끄는 대구월군이 박당강 전투와 치랑 전투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지켜낸 전쟁이다.
몽금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몽골-금 전쟁
전쟁의 부분몽골의 중국 정복
시기1211년–1234년
장소화북, 만주
결과몽골-남송 연합의 승리, 금나라 멸망, 몽골 제국의 화북 영유
교전 세력
교전국 1몽골 제국
동요국 (거란)
서하 (1210-1219)
남송 (1233-1234)
교전국 2금나라
서하 (1225-1227)
지휘관
몽골-남송 연합군 지휘관칭기즈 칸
제베
무칼리
보오르

툴루이
오고데이 칸
수부타이
차카타이 칸
테무게 옷치긴
야율유가
사천택
맹공
장홍범


곽간

유흑마 (유의)
금나라 지휘관위소왕 가젠
선종
애종
말제

완안진화상
완안합달
완안승휘 (복흥)
포선만노
고기
호사호
이랄포아

마용
병력 규모
몽골-남송 연합군약 90,000–120,000명의 기병
한족 병력 40,000명
거란족 병력 30,000명
남송 병력 20,000명
1212년: 90,000명
1231년: 50,000명
1233년: 15,000명
금나라1212년: 30,000–50,000명 (야호령 전투)
1231년: 200,000명
1233년: 100,000명
금 제국 전체 군사력: 만리장성 전체에 배치된 800,000명의 보병과 150,000명의 고도로 훈련된 기병
관련 전투
주요 전투야호령 전투
중도 전투
대창원 전투
삼봉산 전투
개봉 포위전
채주 전투

2. 배경

몽골 기병대가 여진족 전사들과 전투를 벌이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국가로, 한때는 강성했으나 13세기 초에는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금나라는 피지배민족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 몽골족 등 다른 유목민족을 제어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들과 더불어 다른 유목민족을 차별하고 이간질시키고 주기적으로 몽골을 토벌하여 남성들을 죽이는 정책을 써서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다.[4]

특히 칭기즈 칸의 조상 암바가이 칸이 금나라에 의해 처형당한 사건은 몽골족의 분노를 샀다. 금나라 희종은 암바가이에게 십자가형을 명령했다. 금나라는 또한 몽골 유목민을 노예로 삼거나 죽이는 정기적인 징벌 원정을 수행했다.[4]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내부를 안정시킨 후, 금나라에 복종을 요구했으나, 금나라는 이를 거부했다. 1210년, 칭기즈 칸(재위 1206–27)의 궁정에 완안영기의 금 왕위 등극을 선포하고 몽골의 종속국 복종을 요구하는 사절단이 도착했다. 여진족은 강력한 스텝 유목민을 물리치고 케레이트족 및 타타르족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스텝의 모든 부족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금나라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몽골족으로 전향하여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를 공격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함정이나 다른 사악한 계획을 두려워하여 거절했다. 복종을 증명하라는 명령을 받자 칭기즈 칸은 남쪽을 향해 침을 뱉고 말에 올라 북쪽으로 향하며 충격을 받은 사절이 먼지를 뒤집어쓰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금나라 황제에게 매우 모욕적인 메시지를 보냈고, 사절은 금나라 궁정에 돌아가서 감히 반복하지 못했다. 금나라 사절에 대한 그의 거부는 몽골과 여진족 사이의 전쟁 선언과 다름없었다.[4]

칭기즈 칸은 1211년 초 케를렌 강으로 돌아온 후,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긴 토론을 조직하여 모든 구성원이 이 과정에 참여했다. 칸은 근처 산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했다. 그는 모자와 허리띠를 벗고 영원한 하늘 앞에서 절하며 자신의 백성이 여진족에게 품은 여러 세대에 걸친 불만을 이야기하고 조상의 고문과 살해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여진족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넷째 날 새벽, 칭기즈 칸은 "영원한 푸른 하늘이 우리에게 승리와 복수를 약속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5]

완안영기는 칭기즈 칸의 행동을 듣고 분노하여 칸에게 "우리 제국은 바다와 같고, 당신의 제국은 한 줌의 모래와 같다… 어찌 당신을 두려워하겠는가?"라는 메시지를 보냈다.[6]

3.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 ~ 1215년)

1211년, 칭기즈 칸몽골군을 이끌고 금나라를 침공했다. 몽골군은 오사보 전투, 야호령 전투, 회화보 전투 등에서 금나라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며 금나라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34] 특히 야호령 전투는 3일에 걸친 격전 끝에 몽골군이 승리함으로써, 금나라가 기동 부대를 잃고 몽골의 강력한 기병 부대에 대항할 수단을 상실하게 된 결정적인 전투였다.[34]

1213년, 몽골군은 거용관을 우회하여 자형관을 돌파하고, 금나라의 수도 연경(베이징)을 포위했다. 이와 동시에 화북 지역의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35] 몽골군은 전군을 우익, 중앙, 좌익의 3군으로 나누어 각지를 침략하면서 금나라를 철저하게 약화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35]

1214년, 금 선종은 막대한 세폐와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몽골과 강화를 체결했다.[35] 그러나 선종은 곧 수도를 남쪽의 개봉(카이펑)으로 옮기며(정우의 남천)[37] 몽골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215년, 몽골군은 연경을 함락시키고, 요하 일대를 초토화시켰다.[34] 이 과정에서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거란족이 몽골에 협력하면서 금나라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특히, 거란족 지도자 야율유가요나라를 다시 세우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금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4. 무칼리의 침공 (1216년 ~ 1229년)

칭기즈 칸서요, 호라즘 왕국 등 서방 원정을 떠난 후, 무칼리는 약 2만 명의 몽골군과 4만~7만 명의 타민족 군대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에 대한 공세를 지속했다.[38] 무칼리는 1218년산동 일대와 대정 일대를 점령하고, 후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하 및 고려와 연대하여 이를 궤멸시켰다. 1223년까지 개봉 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곡창 지역을 정복했다.[43]

한편, 금나라는 30여 년간 휴전 상태였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1217년부터 1224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별다른 소득 없이 국력만 낭비하고 오히려 남송의 적개심만 키웠다. 이로 인해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막대한 세폐가 끊기면서 경제적 손실이 커졌고, 서하 역시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223년, 무칼리는 산시성으로 진격하여 장안을 공격했으나, 20만 명에 달하는 금나라 수비군이 강력하여 포위는 수개월 동안 이어졌다. 결국 무칼리는 병으로 사망했고, 몽골군은 퇴각했다.[39]

무칼리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보올이 뒤를 이어 화북 경략을 계속했다. 1225년에는 무선이 진정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천택이 이를 토벌하여 몽골의 지배는 유지되었다.

5. 오고타이 칸의 침공 (1229년 ~ 1232년)

오고타이 칸은 아버지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금나라의 평화 회담 제안을 거절했지만, 금나라 관리들은 몽골 사절들을 살해했다.[11]

금나라아이종 황제 치하 군대는 여러 몽골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1229년 다창위안 전투, 1230년 웨이저우 전투, 1231년 다오후이구 전투에서 주요 승리를 거두었다.

케식 사령관 도콜쿠가 통관에 대한 정면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완안 허다에게 패배하여 1230년 수부타이는 철수해야 했다. 1231년, 몽골군은 다시 공격하여 마침내 펑샹을 점령했다. 장안의 금나라 수비대는 공황에 빠져 도시를 버리고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허난성으로 후퇴했다. 한 달 후, 몽골군은 북쪽, 동쪽, 서쪽에서 카이펑으로 집결하기 위해 삼각 공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툴루이 휘하의 서부군은 펑샹에서 시작하여 통관을 통과한 다음 한강 (샹양 구, 샹판 근처)에서 남송 영토를 통과하여 카이펑 남쪽으로 다시 나타나 여진족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완안 허다는 이 계획을 알고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툴루이를 요격했다. 덩저우에서 그는 수만 명의 기병을 산등성이 뒤에 숨겨 계곡에 매복했지만, 툴루이의 첩자들이 그에게 경고하여 그는 주력 부대를 보급 부대와 함께 유지하고, 더 적은 수의 경기병을 계곡 주변으로 돌려 금나라 군대를 뒤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완안 허다는 그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몽골의 공격에 대비했다. 덩저우 남서쪽의 위산에서 두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금나라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고 격렬하게 싸웠다. 몽골군은 위산에서 약 30 리 물러났고, 툴루이는 전략을 바꾸었다. 툴루이는 완안 허다를 붙잡아 두기 위해 병력의 일부를 남겨두고, 대부분의 병력을 분산된 부대로 카이펑을 북쪽으로 공격하여 허다에게 경고하는 것을 피했다.

덩저우에서 카이펑으로 가는 길에 몽골군은 쉽게 군현을 점령했고, 완안 허다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점령한 모든 보급품을 불태웠다. 완안 허다는 철수해야 했고, 쥔저우의 산봉우리 언덕에서 몽골군과 마주쳤다. 이때, 황하에 있던 금나라 군대도 툴루이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으로 전환되었고, 오고타이 칸 휘하의 몽골 북부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얼어붙은 강을 건너 툴루이와 합류했다. 심지어 이 시점에서도 그들의 연합된 전력은 약 5만 명에 불과했다. 1232년까지, 여진족 통치자 아이종은 카이펑에서 포위되었다. 그들은 함께 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오고타이 칸은 곧 떠났고, 최종 정복을 그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1229년에 새로 즉위한 오고타이는 즉위 후 첫 번째 대사업으로 금나라의 완전 정복을 선언했다.[47] 금나라는 약화되었지만, 통치 범위가 좁아짐으로써 오히려 병력의 집중이 용이해졌고, 몽골군에게도 일종의 도박과 같은 침공이었다.[48][49] 몽골군은 전통적인 3군 체제를 취하여, 우익을 툴루이, 좌익을 테무게 옷치긴, 중앙군을 황제 오고타이 자신이 이끄는 원정군이 편성되었다. 또한, 오고타이의 형인 차카타이는 몽골 고원에 잔류하여 본토 방위를 맡았지만, 차카타이와 각 군의 지휘관에게 할당된 임무는 이 시기의 몽골 정권 내부에서의 입지를 반영한 것이었다.[50]

좌익군을 이끄는 테무게 옷치긴은 불가사의하다고 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우익·중앙군에 늦게 산둥 방면으로 진군하여, 거의 실전을 치르지 않고 이 원정을 마쳤다.[51] 테무게 옷치긴의 임무는 굳이 허베이 백성들의 공황을 부추겨 허난으로의 인구 유입을 일으키고, 금나라 영내에서의 식량 부족을 유발하는 데 있었다고 보인다.[52] 중앙군을 이끄는 오고타이는 1230년 8월에 서경(대동부)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산시 지방을 남하하여 황하 북안에 이르렀지만, 12월에 하중부를 함락시킨 후에는 정면으로 금군과 싸우려 하지 않고, 좀처럼 황하를 건너지 않았다.[51] 중앙군의 목적은 금군 주력을 황하 남안에 유인하여 미끼가 되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3]

가장 어려운 길을 가게 된 것은 툴루이가 이끄는 우익군으로, 우익군은 전군 중 샨시 방면에서 유일하게 금나라 영토 깊숙이 침공했다.[54] 1230년 중에는 샨시 지방의 중심지인 경조를 함락시키고, 허난 방면의 수비가 굳건한 것을 보자 남송 영토를 경유하는 대규모 우회를 감행하여, 샨시·쓰촨·허난에 걸쳐 있는 산악 지대를 지나 남쪽에서 허난 일대로 들어갔다.[53] 툴루이 군의 접근 소식에 초조해진 금군은 완안합달 등이 이끄는 주력군을 남하시켰지만, 1232년 정월에는 이를 기회로 본 오고타이 군도 마침내 일제히 황하를 건너, 금군은 위기적 상황에 빠졌다.[55] 그리고 음력 정월 16일, 삼봉산 전투에서 툴루이가 이끄는 군단이 금나라 주력군을 궤멸시킴으로써 금나라는 야전에서 몽골군에 대항할 수단을 잃었고, 수도인 카이펑은 텅 빈 성이 되어 몽골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56]

6. 개봉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1232년 ~ 1234년)

애종은 1233년에 송나라에 사절을 보내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금나라 사신은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송나라를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송나라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요청을 거절했다.[46] 대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 송나라는 허난 지역의 일부를 받는 대가로 몽골에 군수 물자를 제공했다.[46]

7. 곽하마의 항전 (1236년)

금나라 멸망 이후에도 곽하마를 포함한 일부 금나라 유민들은 몽골에 저항하였다. 곽하마는 2년 동안 몽골군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대패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결함으로써 최후를 맞았다. 이로써 금나라의 부흥 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12]

8. 결과

몽골 제국은 1234년 숙적이었던 금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원수를 갚고 중원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금나라 멸망 이후, 몽골 제국은 여진족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벌였다.[4] 일부 여진족은 학살을 피해 고려로 피난하여 하층민을 이루기도 했다. 살아남은 여진족과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한족은 원나라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어 남인이라 불리게 되었다.[4]

금나라는 고려-몽골 전쟁과 몽골-남송 전쟁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지만, 23년 동안 몽골 제국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서하, 서요, 호라즘 제국, 조지아 왕국 등이 멸망하는 동안에도 금나라는 북중국 지역의 목초지를 빼앗기고 기병의 상당수가 소모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금나라의 멸망은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를 가져왔다. 몽골 제국은 화북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후 몽골 제국은 고려남송을 압박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9. 몽골의 통치 정책

몽골은 항복한 도시와 주민들에게는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예를 들어, 수부타이에게 항복한 카이펑,[14] 리 팅즈가 남송에 의해 처형된 후 리 팅즈의 부관이 바얀에게 항복한 양저우,[15]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한 항저우[16]는 약탈과 학살을 면했다. 반면, 저항하는 세력에게는 가혹하게 대처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여진족을 상대로 대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몽골은 다양한 민족 출신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에 투항한 한족과 거란족이 많았는데, 스톈저와 류헤이마,[20] 거란족 샤오 잘라[21] 등은 몽골 군대에서 투먼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들은 오고타이 칸을 섬기며, 몽골의 행정 구조를 구축하는데 기여했다.[28]

몽골은 의사, 장인, 종교 성직자를 중요하게 여겨 북중국의 도시를 점령했을 때 그들을 죽음에서 면제하고 데려오도록 명령했다.[29] 또한 한족 귀족인 연성공과 천사도는 이전 왕조부터 몽골 제국과 원나라에서 그들의 칭호를 계속 소유하게 했다.

징기스칸은 서방 호라즘 원정을 계획하면서 1218년 금나라 침공을 중단하고, 무칼리에게 동방 계획을 위임했다.[38] 무칼리는 징기스칸의 대리인으로서 '태사 국왕', '권황제(가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39]

금나라 영토였던 화북에서는 몽골군의 약탈과 금나라 통치 체제 붕괴로 치안이 악화되자, 현지 주민들이 자위 조직을 조직했다.[40] 이들은 '의군'이라 불렸으나, 몽골에 항복하여 '한인 세후'라는 군벌을 형성했다.[41] 이들 중 사천택, 장유, 장영 등은 '바아토르' 칭호를 받고 준몽골인으로 대우받았다.[42]

무칼리 군은 1218년 보정의 장유, 1220년 진정의 무선, 동평의 엄실 등 강대한 군벌을 항복시키며 세력을 넓혔다.[43] 1222년 금군의 기습으로 하중부가 함락되는 위기가 있었으나, 알찰의 활약으로 재탈환했다. 1223년 무칼리가 사망했지만, 아들 보올이 뒤를 이었다.[44]

1225년 무선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천택이 이를 토벌하여 진정되었다. 결국 하북은 진정 사씨, 보정 장씨, 제남 장씨, 동평 엄씨 등 한인 세후들이 분할 지배하는 체제가 확립되었고,[45] 금나라는 하북 지배권을 완전히 잃었다.[46]

10. 주요 전역

1211년 야호령 전투와 1213년 怀来战役|회래 전투중국어, 1214년 贞祐之乱|정우의 난중국어이 일어났다. 1214년부터 1215년까지는 중도 전투가, 1228년/1230년에는 대창원 전투가 있었다. 1231년에는 도회곡 전투가 있었고, 1232년 삼봉산 전투와 1231년부터 1232년까지 이어진 개봉 포위전이 있었다. 1233년부터 1234년까지는 채주 전투가 벌어졌다.[34]

10. 1. 1차 침공 (1211년 ~ 1215년)

금나라는 피지배 민족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 몽골족 등 다른 유목민족을 제어하는 정책을 폈으며, 이들을 차별하고 이간질하며 주기적으로 토벌하여 남성들을 죽이는 정책으로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다.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공격한 이유는 조상 암바가이 칸이 금 해릉양왕에게 처형된 원한 때문이었다.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1211년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의 모든 병력(추정치 약 9만~12만 명)을 총동원하였다.

1211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첫 방어선인 오사보에서 금나라군과 오사보 전투를 벌였고, 야호령 전투에서 승리하여 금나라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이후 금나라는 성채전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불리해졌다. 몽골군은 만리장성의 관문인 거용관을 우회하여 함락시키고 금나라의 수도 연경(베이징)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금나라 구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였다.

칭기스칸은 아들들을 시켜 대동(다퉁) 인근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목초지를 급습하여 군마를 빼앗았다. 이로 인해 금나라는 보병 위주로 군사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금나라는 요동 지역의 거란족과 몽골이 손을 잡는다는 소식을 듣고 거란족을 탄압하였는데, 이는 야율유가를 필두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요나라를 다시 세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금나라는 60만 대군을 일으켜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야율유가 부대에게 참패하였다.

1212년 몽골군은 다시 금나라를 두 갈래로 나눠서 침공했는데, 징기스칸의 본부대는 대동을 포위하고 구원하러 온 금나라군을 격파했고, 제베의 부대는 요양(랴오양)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어 몽골군은 다시 변경으로 후퇴하였다.

1213년 7월, 몽골군은 금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여 자형관을 뚫고 수도에서 온 구원군을 격파했고, 별동대를 보내 후방에서 거용관을 공격하여 다시 점령하였다. 이후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포위했고, 이와 동시에 몽골군은 병력의 일부를 남긴 채 화북지역의 성들을 초토화시켰다.

1214년 연경 포위가 계속되자 금 선종은 막대한 세폐와 자신의 딸과 부인을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고, 몽골군은 이에 응하고 철수하였다.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개봉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수비군 일부를 남겨 지키게 했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징기스칸은 연경을 포위했고, 무칼리에게 대정 부근의 요하 일대를 공략하게 하였다. 1215년 무칼리는 금나라군을 격파하고 대정을 점령하였고, 이후에도 요하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10. 1. 1. 야호령 전투 (1211년)

1211년 가을, 몽골 제국군은 금나라의 첫 방어선인 오사보에서 금나라군과 오사보 전투를 벌였다. 수적으로는 금나라군이 훨씬 우세했으나, 제베가 우회해서 후방을 기습했고, 여러 요충지에 분산 배치된 금나라군은 각개격파를 당했다. 오사보를 뚫은 몽골군은 흩어져 있는 금나라군을 규합한 완안승유의 군대와 야호령 전투를 벌였는데, 이번에도 무칼리의 별동군이 우회해서 금군의 후위를 위협하여 승리하였다.[34] 이 전투로 몽골군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금나라는 기동 부대를 잃고 몽골의 강력한 기병 부대에 대항할 수단을 잃어 양국의 승패는 사실상 결정되었다고 평가된다.[34]

10. 1. 2. 중도 전투 (1215년)

1213년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현재의 베이징)를 포위했을 때, 금나라 장군들은 민병대를 소집하여 몽골군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안겨주었다. 몽골군은 거용관과 자경구를 돌파하고[8] 1214년 초까지 화북 평원 전체를 약탈했다. 칭기즈 칸은 중도에서 금나라 황제의 궁정을 포위했다.[9] 몽골군이 중도를 포위했을 때, 금나라 정부는 몽골 제국의 조공국이 되는 것에 잠정적으로 동의하여 칭기즈 칸에게 여진족 금나라 황제 완안 영기의 딸인 기국 공주를 바쳤다.[10] 그러나 몽골군이 철수했을 때, 금나라 금 선종은 수도를 남쪽의 카이펑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금나라 수도가 카이펑으로 옮겨진 후, 금나라 재상 완안 승휘와 장군 모란 금중이 중도를 지키도록 남겨졌다. 몽골로 귀순한 금나라 군대가 남쪽에서 중도를 공격하여 루거우 다리를 점령했다. 칭기즈 칸은 항복한 거란 장군들이 이끄는 병력을 다시 중도를 공격하도록 파견했다. 모란 금중의 부관은 그 휘하의 모든 군대와 함께 몽골군에게 항복하여 중도를 위기에 빠뜨렸다. 선종 황제는 북쪽으로 증원군을 보냈지만, 중도는 1215년 6월 1일 몽골군에게 함락되었다.[34]

10. 2. 무칼리의 경략 (1216년 ~ 1229년)

칭기즈 칸서요와 호라즘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동안, 무칼리가 이끄는 몽골군은 화북 지역에서 금나라에 대한 공세를 계속했다.[38] 무칼리는 약 2만 명의 몽골인과 4만~7만 명의 다른 민족 군대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1217년~1218년산동 일대와 대정 일대를 점령했다.[39] 또한 후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하와 고려와 연대해서 궤멸시켰다. 그리고 1223년까지 개봉 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곡창 지역을 정복했다.

木華黎|무칼리중국어는 동방에서 징기스칸의 대리인으로 행동하며, 태사 국왕·권황제(가황제)의 칭호를 받았다.[39]

한편, 금나라 영토였던 화북에서는 몽골군의 약탈과 통치 체제 붕괴로 치안이 매우 나빠졌다.[40] 이를 우려한 현지 백성들은 자위 조직을 만들었고, 금나라 조정은 이들을 "의군"이라 부르며 하북 회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몽골에 항복하여 "한인 세후"라 불리는 군벌을 형성했다.[41] 이들 중 사천택, 장유, 장영 등은 "바아토르" 칭호를 받고 준몽골인으로 대우받았다.[42]

1218년에는 보정의 장유, 1220년에는 진정의 무선과 동평의 엄실 등 강대한 군벌을 항복시키며 몽골의 세력권은 더욱 넓어졌다.[43] 1222년 금군의 기습으로 하중부가 함락되어 위기에 처했지만, 알찰의 활약으로 재탈환했다. 1223년 무칼리는 병으로 사망했지만, 아들 보올이 뒤를 이어 화북 경략은 계속되었다.

1225년 무선이 진정에서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충실했던 한인 무장 사천예를 살해했지만, 사천예의 동생 사천택이 군세를 모아 토벌하여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무칼리의 경략과 한인 군벌의 노력으로 하북의 여러 세력은 점차 통합되었고, 진정 사씨·보정 장씨·제남 장씨·동평 엄씨와 같은 한인 세후에 의해 분할 지배되는 체제가 확립되었다.[44][45] 반면 금나라는 하북 지배권을 완전히 잃고, 하남만을 지배하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다.[46]

10. 3. 2차 침공 (1229년 ~ 1234년)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즉위하였다.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에 평화 회담을 제안했으나, 금은 몽골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하였다. 이에 격노한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침공하기로 결정하고, 1229년 즉위 후 첫 번째 대사업으로 금나라 완전 정복을 선언했다.[47]

당시 황하 북부 대부분은 이미 몽골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금나라 영역은 서쪽 시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 낙양과 개봉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좁고 긴 띠 모양이었다. 금나라 국경은 북쪽과 서쪽이 각각 황하와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몽골과 접했고, 남쪽은 평야 지대를 두고 남송과 접하고 있어,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은 황하 도하나 산악 지대 돌파에 어려움을 겪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전통적인 3군 체제를 취하여, 우익을 톨루이, 좌익을 테무게 옷치긴, 중앙군을 오고타이 칸 자신이 이끄는 원정군을 편성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장안 방면 공격을 위해 수부타이에게 동관 공략을 명령하였다.

금나라 장수 완안진화상은 400명의 병사로 8,000여 명의 몽골군을 격파하였다(대창원 전투).[11]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는 충효군(忠孝軍)으로, 금나라 말기 정예부대였다.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 했고, 동쪽에서는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 위주(衛州)를 공격했다. 금나라는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위주를 지원했다.

케식 사령관 도콜쿠가 통관 정면 공격을 시도했지만, 완안 허다에게 패배하여 1230년 수부타이는 철수해야 했다.

1231년, 몽골군은 다시 공격하여 펑샹을 점령했다. 장안 수비대는 공황에 빠져 도시를 버리고 허난성으로 후퇴했다. 몽골군은 북쪽, 동쪽, 서쪽에서 카이펑으로 집결하는 삼각 공격을 결정했다. 툴루이 휘하 서부군은 펑샹에서 출발, 통관을 통과한 후 한강 (샹양 구, 샹판 근처)에서 송나라 영토를 통과하여 카이펑 남쪽으로 기습할 계획이었다.

금군은 대창원에서 다시 승리하고 경양 포위를 풀었으나, 몽골 별동대의 후방 급습과 역습으로 크게 패하고 위주를 내주었다.

1232년 정월 삼봉산 전투에서 툴루이 군단이 금나라 주력군을 궤멸시켜 금나라는 야전에서 몽골군에 대항할 수단을 잃었고, 수도 개봉은 몽골군에 포위되었다.[56]

같은 해 3월, 오고타이 군과 툴루이 군은 합류 후 수부타이, 구유크, 테무데이 콜치, 타차르 콜치 등 4명의 장수가 이끄는 부대를 남기고 본대는 북으로 돌아갔으며, 이들에 의해 개봉 포위가 시작되었다.[57]

1233년 10월 금나라는 투항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고, 11월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이 포위에 가세했다.[57]

1234년 정월, 몽골군 공세가 좁혀지는 가운데 금 애종은 황족에게 황제위를 양위했지만, 곧 몽골군이 성내로 쇄도해 애종은 자살하고 양위받은 황족도 살해되어 금나라는 멸망했다.[59]

10. 3. 1. 대창원 전투 (1230년, 1231년)

1229년 다창위안 전투大昌原之戰중국어, 1230년 웨이저우 전투, 1231년 다오후이구 전투에서 금나라 군대는 몽골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주요 승리를 거두었다.[11]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즉위한 후 금나라에 평화 회담을 제안했지만, 금나라 관리들은 몽골 사절들을 살해했다.[11]

금나라아이종 황제 치하에서, 금나라 군대는 몽골의 여러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특히 1230년 대창원 전투에서는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400명의 병사가 8,000여 명의 몽골군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11] 이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였다.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는 충효군(忠孝軍)으로, 금나라 말기 정예부대였다.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 했다. 금군은 대창원에서 다시 승리하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

10. 3. 2. 도회곡 전투 (1231년)

1229년 오고타이 칸은 즉위 후 첫 번째 대사업으로 금나라의 완전 정복을 선언했다.[47] 금나라는 약화되었지만, 통치 범위가 좁아짐으로써 오히려 병력 집중이 용이해졌고, 이는 몽골군에게도 일종의 도박과 같은 침공이었다.[48][49]

금나라 애종 치하의 군대는 몽골의 여러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1229년 대창위안 전투, 1230년 웨이저우 전투, 1231년 도회곡 전투에서 주요 승리를 거두었다.

케식 사령관 도콜쿠가 통관에 대한 정면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완안 허다에게 패배하여 1230년 수부타이는 철수해야 했다. 1231년, 몽골군은 다시 공격하여 마침내 펑샹을 점령했다. 장안의 금나라 수비대는 공황에 빠져 도시를 버리고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허난성으로 후퇴했다. 한 달 후, 몽골군은 북쪽, 동쪽, 서쪽에서 카이펑으로 집결하기 위해 삼각 공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툴루이 휘하의 서부군은 펑샹에서 시작하여 통관을 통과한 다음 한강 (샹양 구, 샹판 근처)에서 송나라 영토를 통과하여 카이펑 남쪽으로 다시 나타나 여진족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10. 3. 3. 삼봉산 전투 (1232년)

1229년에 새로 즉위한 오고타이 칸은 즉위 후 첫 번째 대사업으로 금나라의 완전 정복을 선언했다.[47] 금나라는 약화되었지만, 통치 범위가 좁아짐으로써 오히려 병력의 집중이 용이해졌고, 몽골군에게도 일종의 도박과 같은 침공이었다.[48][49]

금나라의 아이종 황제 치하 군대는 여러 몽골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1229년 다창위안 전투, 1230년 웨이저우 전투, 1231년 다오후이구 전투에서 주요 승리를 거두었다.

케식 사령관 도콜쿠가 통관에 대한 정면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완안 허다에게 패배하여 1230년 수부타이는 철수해야 했다. 1231년, 몽골군은 다시 공격하여 마침내 펑샹을 점령했다. 장안의 금나라 수비대는 공황에 빠져 도시를 버리고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허난성으로 후퇴했다. 한 달 후, 몽골군은 북쪽, 동쪽, 서쪽에서 카이펑으로 집결하기 위해 삼각 공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툴루이 휘하의 서부군은 펑샹에서 시작하여 통관을 통과한 다음 한강(샹양 구, 샹판 근처)에서 송나라 영토를 통과하여 카이펑 남쪽으로 다시 나타나 여진족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완안 허다는 이 계획을 알고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툴루이를 요격했다. 덩저우에서 그는 수만 명의 기병을 산등성이 뒤에 숨겨 계곡에 매복했지만, 툴루이의 첩자들이 그에게 경고하여 그는 주력 부대를 보급 부대와 함께 유지하고, 더 적은 수의 경기병을 계곡 주변으로 돌려 금나라 군대를 뒤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완안 허다는 그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몽골의 공격에 대비했다. 덩저우 남서쪽의 위산에서 두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금나라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고 격렬하게 싸웠다. 몽골군은 위산에서 약 30 리 물러났고, 툴루이는 전략을 바꾸었다. 툴루이는 완안 허다를 붙잡아 두기 위해 병력의 일부를 남겨두고, 대부분의 병력을 분산된 부대로 카이펑을 북쪽으로 공격하여 허다에게 경고하는 것을 피했다.

덩저우에서 카이펑으로 가는 길에 몽골군은 쉽게 군현을 점령했고, 완안 허다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점령한 모든 보급품을 불태웠다. 완안 허다는 철수해야 했고, 쥔저우의 삼봉산(三峰山)에서 몽골군과 마주쳤다. 이때, 황하에 있던 금나라 군대도 툴루이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으로 전환되었고, 오고타이 칸 휘하의 몽골 북부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얼어붙은 강을 건너 툴루이와 합류했다. 심지어 이 시점에서도 그들의 연합된 전력은 약 5만 명에 불과했다.

1232년 정월, 삼봉산 전투에서 툴루이가 이끄는 군단이 금나라 주력군을 궤멸시킴으로써 금나라는 야전에서 몽골군에 대항할 수단을 잃었고, 수도인 개봉은 텅 빈 성이 되어 몽골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56]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균주 방향의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많은 금군이 탈영하여 균주성 방향으로 흩어지자 몽골군은 이를 기습하였고, 결국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었다.

1232년까지, 금나라의 아이종 황제는 카이펑에서 포위되었다. 몽골군은 금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오고타이 칸은 곧 떠났고, 최종 정복을 그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10. 3. 4. 개봉 포위전 (1232년 ~ 1233년)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뒤를 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에 평화 회담을 제안했지만, 금나라 관리들은 몽골 사절들을 살해했다.[11]

금나라아이종 황제 치하 군대는 여러 몽골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1229년 대창원 전투, 1230년 웨이저우 전투, 1231년 도회곡 전투에서 주요 승리를 거두었다.

케식 사령관 도콜쿠가 통관에 대한 정면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완안 허다에게 패배하여 1230년 수부타이는 철수해야 했다. 1231년, 몽골군은 다시 공격하여 마침내 펑샹을 점령했다. 장안의 금나라 수비대는 공황에 빠져 도시를 버리고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허난성으로 후퇴했다. 한 달 후, 몽골군은 북쪽, 동쪽, 서쪽에서 개봉으로 집결하기 위해 삼각 공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툴루이 휘하의 서부군은 펑샹에서 시작하여 통관을 통과한 다음 한강 (샹양 구, 샹판 근처)에서 송나라 영토를 통과하여 카이펑 남쪽으로 다시 나타나 여진족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완안 허다는 이 계획을 알고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툴루이를 요격했다. 덩저우에서 그는 수만 명의 기병을 산등성이 뒤에 숨겨 계곡에 매복했지만, 툴루이의 첩자들이 그에게 경고하여 그는 주력 부대를 보급 부대와 함께 유지하고, 더 적은 수의 경기병을 계곡 주변으로 돌려 금나라 군대를 뒤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완안 허다는 그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몽골의 공격에 대비했다. 덩저우 남서쪽의 위산에서 두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금나라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고 격렬하게 싸웠다. 몽골군은 위산에서 약 30 리 물러났고, 툴루이는 전략을 바꾸었다. 툴루이는 완안 허다를 붙잡아 두기 위해 병력의 일부를 남겨두고, 대부분의 병력을 분산된 부대로 카이펑을 북쪽으로 공격하여 허다에게 경고하는 것을 피했다.

덩저우에서 카이펑으로 가는 길에 몽골군은 쉽게 군현을 점령했고, 완안 허다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점령한 모든 보급품을 불태웠다. 완안 허다는 철수해야 했고, 쥔저우의 산봉우리 언덕에서 몽골군과 마주쳤다. 이때, 황하에 있던 금나라 군대도 툴루이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으로 전환되었고, 오고타이 칸 휘하의 몽골 북부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얼어붙은 강을 건너 툴루이와 합류했다. 심지어 이 시점에서도 그들의 연합된 전력은 약 5만 명에 불과했다. 1232년까지, 아이종 황제는 카이펑에서 포위되었다. 그들은 함께 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오고타이 칸은 곧 떠났고, 최종 정복을 그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1229년에 새로 즉위한 오고타이는 즉위 후 첫 번째 대사업으로 금나라의 완전 정복을 선언했다.[47] 금나라는 약화되었지만, 통치 범위가 좁아짐으로써 오히려 병력의 집중이 용이해졌고, 몽골군에게도 일종의 도박과 같은 침공이었다.[48][49] 몽골군은 전통적인 3군 체제를 취하여, 우익을 툴루이, 좌익을 테무게 옷치긴, 중앙군을 황제 오고타이 자신이 이끄는 원정군이 편성되었다. 차카타이는 몽골 고원에 잔류하여 본토 방위를 맡았지만, 차카타이와 각 군의 지휘관에게 할당된 임무는 이 시기의 몽골 정권 내부에서의 입지를 반영한 것이었다.[50]

좌익군을 이끄는 테무게 옷치긴은 느린 속도로 산둥 방면으로 진군하여, 거의 실전을 치르지 않고 이 원정을 마쳤다.[51] 테무게 옷치긴의 임무는 허베이 백성들의 공황을 부추겨 허난으로의 인구 유입을 일으키고, 금나라 영내에서의 식량 부족을 유발하는 데 있었다고 보인다.[52] 중앙군을 이끄는 오고타이는 1230년 8월에 서경(대동부)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산시 지방을 남하하여 황하 북안에 이르렀지만, 12월에 하중부를 함락시킨 후에는 정면으로 금군과 싸우려 하지 않고, 좀처럼 황하를 건너지 않았다.[51] 중앙군의 목적은 금군 주력을 황하 남안에 유인하여 미끼가 되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3]

가장 어려운 길을 가게 된 것은 툴루이가 이끄는 우익군으로, 1230년 중에는 샨시 지방의 중심지인 경조를 함락시키고, 허난 방면의 수비가 굳건한 것을 보자 남송 영토를 경유하는 대규모 우회를 감행하여, 샨시·쓰촨·허난에 걸쳐 있는 산악 지대를 지나 남쪽에서 허난 일대로 들어갔다.[53] 툴루이 군의 접근 소식에 초조해진 금군은 완안합달 등이 이끄는 주력군을 남하시켰지만, 1232년 정월에는 이를 기회로 본 오고타이 군도 마침내 일제히 황하를 건너, 금군은 위기적 상황에 빠졌다.[55] 그리고 음력 정월 16일, 삼봉산 전투에서 톨루이가 이끄는 군단이 금나라 주력군을 궤멸시킴으로써 금나라는 야전에서 몽골군에 대항할 수단을 잃었고, 수도인 개봉은 텅 빈 성이 되어 몽골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56]

같은 해 3월, 오고타이 군과 툴루이 군은 합류한 후 수부타이, 구유크, 테무데이 콜치, 타차르 콜치 등 4명의 장수가 이끄는 부대를 남겨두고 본대는 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이 4명의 장수에 의해 개봉의 포위가 시작되었다.[57] 이미 대량의 피난민이 도망쳐 들어온 개봉에서는 식량 부족과 역병으로 비참한 상태에 빠졌고, 금나라는 황족인 조왕 악가(애종의 형인 형왕 반도의 아들)를 인질로 내세워 일시적으로 몽골군과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는 애종에게 투항 조건으로 황제 칭호를 버릴 것을 강요한 사자 당경이 살해되었고, 개봉 구원을 꾀했던 지방의 여러 군대가 패배한 것도 있어, 애종은 1233년 정월 23일에 일부 측근과 함께 개봉을 버리고 귀덕으로 도망쳤다.

개봉에서는 남겨진 재상에 의해 몽골에 대한 항전이 계속되었지만, 최립이 성내 쿠데타를 일으켜 성내 지휘를 장악하고, 같은 해 4월에 수부타이에게 투항함으로써 개봉은 함락되었다.

10. 3. 5. 채주 전투 (1233년 ~ 1234년)

1232년 개봉 포위전 이후, 금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하북에서 새로운 군대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하남으로 돌아와 안양에 근거지를 세웠다. 그러나 흩어진 금나라 군대가 모여들면서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1233년, 애종은 부찰 관노가 지휘하는 450명의 한족 군대와 마용이 지휘하는 280명의 군대만 남겨 도시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대는 식량을 구하러 흩어 보냈다. 그러나 부찰 관노는 쿠데타를 일으켜 마용과 다른 대신들을 살해하고 애종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이때 몽골군은 안양을 포위했고, 부찰 관노는 45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몽골군 진영을 공격, 3,500명 이상의 몽골군을 익사시키고 몽골 장군 사지시부화(Sajisibuhua)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안양은 장기적으로 방어하기 어려웠고, 애종은 더 튼튼한 성벽과 많은 식량, 군대가 있는 채주로 이동할 것을 권유받았다. 부찰 관노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지만, 결국 애종은 음모를 통해 관노를 암살하고 채주로 이동했다.

한편, 한족 장군 사천택은 퇴각하는 애종을 추격하여 완안승의가 이끄는 8만 명의 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1233년 10월, 금나라는 몽골에 항복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고, 11월에는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이 포위에 가세했다.[57] 남송은 금나라를 ''쿠데타''하길 원했고, 대규모 군대를 현장에 배치했다. 금나라 군대의 잔여 병력은 몽골과 송나라 군대에게 맹렬하게 포위된 채주에 몸을 숨겼다. 이러한 상황에 몰린 여진족은 절망 속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적들의 합동 노력에 오랫동안 저항했다.

결국 1234년 정월, 몽골군의 공세가 좁혀지는 가운데 애종은 완안승린에게 황제위를 넘겨준 후 자살했다. 완안승린은 하루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써 1234년 2월 9일, 금나라는 멸망했다.[59]

참조

[1] 서적 Historical Atlas of the Medieval World, AD 600–1492 https://books.google[...] Barnes & Noble
[2] 문서 Mongol Warrior 1200–1350 Osprey Publishing
[3] 학술지 Numbers in Mongol Warfare Boydell Press
[4] 서적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Random House/Three Rivers Press
[5]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6] 문서 Aufzeichnungen über die Mongolischen Tatan von Chao Hung, 1221
[7] 문서 Weatherford 2004
[8]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https://archive.org/[...] Facts on File
[9] 문서 Weatherford 2004
[10]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1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 서적 This Is Rocket Science: True Stories of the Risk-Taking Scientists Who Figure Out Ways to Explore Beyond Earth https://archive.org/[...] National Geographic Books
[13] 서적 Defending Heaven: China's Mongol Wars, 1209–1370 https://books.google[...] Casemate Publishers 2013
[14] 서적 Defending Heaven: China's Mongol Wars, 1209–1370 https://books.google[...] Casemate Publishers 2013
[15] 서적 Defending Heaven: China's Mongol Wars, 1209–1370 https://books.google[...] Casemate Publishers 2013
[16] 서적 Shanghai https://books.google[...] Wiley-Academy 2002
[17] 서적 Defending Heaven: China's Mongol Wars, 1209–1370 https://books.google[...] Casemate Publishers 2013
[18] 서적 Global Connectio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19] 서적 Genghis Khan: Life, Death, and Resurrection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13
[20] 서적 Revue bibliographique de sinologie 2001 Éditions de l'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21] 서적 The Mechanics of Conquest and Governance: The Rise and Expansion of the Mongol Empire, 1185–1265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22] 서적 Foundations and Limits of State Power in China European Science Foundation by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23] 서적 Rulers from the steppe: state formation on the Eurasian periphery Ethnographics Press, Center for Visual Anthropology,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24] 웹사이트 窝阔台汗己丑年汉军万户萧札剌考辨--兼论金元之际的汉地七万户 A Study of XIAO Zha-la the Han Army Commander of 10,000 Families in the Year of 1229 during the Period of Khan (O)gedei http://d.wanfangdata[...] 2017-02-26
[25] 웹사이트 窝阔台汗己丑年汉军万户萧札剌考辨-兼论金元之际的汉地七万户-国家哲学社会科学学术期刊数据库 http://www.nssd.org/[...] Nssd.org 2018-02-26
[26] 웹사이트 新元史/卷146 https://zh.wikisourc[...]
[27]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klxsw.com[...] 2016-05-03
[28] 학술지 A Recipe to Qubilai Qa'an on Governance: The Case of Chang Te-hui and Li Chi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9] 서적 The Politics of Chinese Medicine Under Mongol Rule Routledge 2016
[30] 서적 Historical Atlas of the Medieval World, AD 600–1492 https://books.google[...] Barnes & Noble
[31] 학술지 Numbers in Mongol Warfare Boydell Press
[32] 문서 愛宕/寺田2008
[33] 문서 愛宕/寺田2008
[34] 문서 杉山2014
[35] 문서 愛宕/寺田2008
[36] 서적 (제목 없음)
[37] 서적 (제목 없음)
[38] 서적 (제목 없음)
[39] 서적 (제목 없음)
[40] 서적 (제목 없음)
[41] 서적 (제목 없음)
[42] 서적 (제목 없음)
[43] 서적 (제목 없음)
[44] 서적 (제목 없음)
[45] 서적 (제목 없음)
[46] 서적 (제목 없음)
[47] 서적 (제목 없음)
[48] 서적 (제목 없음)
[49] 서적 (제목 없음)
[50] 서적 (제목 없음)
[51] 서적 (제목 없음)
[52] 서적 (제목 없음)
[53] 서적 (제목 없음)
[54] 서적 (제목 없음)
[55] 서적 (제목 없음)
[56] 서적 (제목 없음)
[57] 서적 (제목 없음)
[58] 서적 (제목 없음)
[59] 서적 (제목 없음)
[60] 문서 곽하마의 부흥 운동까지 합쳐서
[61] 문서 야율유가의 투항
[62] 문서 (제목 없음)
[63] 문서 (제목 없음)
[64] 문서 병으로 사망함
[65] 문서 (제목 없음)
[66] 문서 야율걸노한테 살해당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