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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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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성인은 대만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1945년 이전에 대만으로 이주한 한족을 지칭한다.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푸젠성 등지에서 이주해 온 한족의 후손으로, 일본 제국 지배와 중화민국 시대의 2.28 사건을 겪으며 외성인과의 갈등을 겪었다. 본성인은 호로인과 객가인으로 나뉘며, 민주화 이후 타이완 정체성을 긍정하는 움직임 속에서 모국어 교육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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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인
기본 정보
유형사회 집단
위치타이완
민족적 관련성
관련 집단한족
언어
모어민난어
객가어
타이완어 표준중국어
본성인
본성인 (한자)本省人
본성인 (병음)Běnshěngrén
본성인 (주음부호)ㄅㄣˇ ㄕㄥˇ ㄖㄣˊ
본성인 (대만어)Pún-séng-lâng
역사적 맥락
역사적 배경청나라 시대부터 타이완에 거주한 한족의 후손
일본 통치 시대 이전부터 타이완에 거주한 사람들
사회적 의미
사회적 지위타이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문화적 특징
문화적 정체성타이완의 독자적인 문화 형성
타이완 문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
정치적 함의
정치적 영향력타이완의 정치 지형에 중요한 영향
타이완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

2. 역사

본성인이라는 용어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해왔다.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 시기, 즉 일제 강점기에는 '본성인'(本省人|번성런중국어)이라는 용어가 타이완 거주민을 총칭하는 말로 쓰였으며, 당시 일본인은 '외성인'(外省人|와이성런중국어)으로 불렸다. 중국 대륙에서 이 시기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당산인'(唐山人|탕산런중국어)으로 지칭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이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이른바 외성인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했고, 기존 타이완 주민들인 본성인들은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47년 2.28 사건으로 폭발하며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깊은 골을 만들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본성인'은 1945년 이전부터 타이완에 거주하던 주민 및 그 후손을, '외성인'은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성인과 외성인의 구분은 단순히 이주 시점만으로 명확히 나뉘지 않으며, 특히 호로어 구사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푸젠성 장저우시 핑허 현 출신의 작가 린 위탕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외성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호로어를 이해하고 구사했기에 본성인과의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친밀감을 형성하고, 때로는 본성인과 외성인을 구분하는 주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싱가포르리콴유 총리가 타이완 시투 자연교육구역을 방문했을 때, 호로어로 현지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본 당시 총통 장징궈가 언어 장벽에 좌절감을 느꼈다는 일화도 있다. 장징궈는 중국 국민당 회의나 국회의원 강닝샹에게 외국 정상도 타이완 주민과 직접 소통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으며, 이는 그가 타이완어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타이완 민중당 당수였던 손천에 따르면, 장징궈는 통치 말기에는 타이완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

'본성인'이라는 용어는 혈통이나 계급적 함의를 내포하기도 했다. 초기 타이완 역사에서는 호로족, 객가족, 타이완 원주민 사이에 상업, 토지,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했으며, 일본 제국과 같은 새로운 외부 세력의 등장은 이러한 내부 갈등 구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초기 이주민 중에는 푸젠성 남부나 객가족 지역 외에 사족이나 후이족 출신도 있었다.

타이완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타이완 정체성이 강조되면서, 본성인과 외성인의 구분은 점차 희미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이러한 구분의 의미가 약화되고 있으며, 타이완 사회의 통합과 다원주의적 정체성 형성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2. 1. 이주와 정착

본성인의 조상은 주로 명나라청나라 시대에 중국 푸젠성 등지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해 온 한족들이다. 타이완은 청나라 때 정식 영토로 편입되었다.

객가족과 호로족이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호로족이 타이완 인구의 약 4분의 3을 차지하는 다수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그들의 모국어인 호로어는 타이완에서 널리 사용된다. 초기 타이완 역사에서는 이주민인 호로족, 객가족과 기존의 타이완 원주민 사이에 상업, 토지, 수자원 등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초기 이주민이 모두 푸젠성 남부나 객가족 지역 출신은 아니었으며, 사족이나 후이족 출신의 이주민도 있었다.

2. 2. 일본 통치 시대

일본 제국이 타이완을 통치하던 시기, 즉 일제 강점기에는 "본성인(本省人|번성런중국어)"이라는 용어가 타이완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 "외성인(外省人|와이성런중국어)"은 일본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당산인(唐山人|탕산런중국어)"이라고 불렸다.

당시 타이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민족은 호로족이었으며, 이들은 푸젠성 등지에서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이주해 온 한족의 후예이다. 타이완 총독부는 이들 호로족을 "타이완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불렀다. 호로족 스스로도 자신들을 "토착민" 또는 "타이완인"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섬에 이미 오스트로네시아계 원주민 부족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표현이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들은 각자의 언어적 배경에 따라 객가족, 원주민 등으로 구분되어 불렸다.

2. 3. 중화민국 시대와 2.28 사건

1945년 일본 제국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라 타이완에서 물러난 후,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을 접수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 즉 외성인들이 타이완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6]

외성인의 타이완 유입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중화민국이 타이완을 접수한 "대만 광복(臺灣光復)" 시점부터 1947년 2.28 사건 발생 전후까지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중국 대륙에서 일본이 남긴 자산을 접수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와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타이완으로 건너왔다.[6] 그러나 이들 외성인 관료들은 자산 접수 과정에서 부패를 저지르거나 공정하지 못한 처리로 기존 타이완 주민들, 즉 본성인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차별 대우와 본성인들의 누적된 불만은 결국 1947년 2.28 사건 발발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10]

2.28 사건이 발생하자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은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중국 대륙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진압 과정에서 약 1만 8천 명에서 2만 8천 명에 달하는 본성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10] 이 참혹한 사건은 타이완 본성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국민당 정권의 일방적인 통치 방식에 대한 극심한 반감과 소외감을 심어주었다.[10] 2.28 사건은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으며, 이후 타이완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외성인의 두 번째 대규모 유입은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 정권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8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1949년 말 전후로 국민당 중앙 정부가 전면적으로 타이완으로 이전하면서 이주 규모는 정점을 찍었다.[6] 타이완으로 이전한 국민당 정권은 장기간 계엄령 하에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이어갔다. 중앙 정부의 주요 정치 권력은 소수의 외성인 엘리트가 독점했고, 이는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정치·사회적 권력 불균형 구조를 장기간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0]

2. 4. 민주화 이후

1986년 가을, 오랫동안 일당독재를 이어온 국민당 정권이 야당인 민주진보당의 결성을 허용하면서 타이완 정치의 민주화가 시작되었다.[11] 1949년 이후 계속되었던 장기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중국 내전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 선출되어 임기가 계속 유지되던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국민대회가 정상화되었다. 1996년에는 총통 직선제가 처음 실시되었고,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에서 민주진보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결과가 나타났다.[11]

이러한 민주화 과정은 본성인의 관점에서 볼 때, 과거 국민당 독재 하에서 억압받고 소외되었던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되찾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1] 타이완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인 호로인이 사용하는 호로어는 "타이완어"로 불리며, 선거나 국회에서도 사용되는 등 그 위상이 빠르게 높아졌다.[11] 이에 객가인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객가어 부활 운동과 같은 문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12]

최근에는 타이완 내 여러 민족 집단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다원주의적인 문화 정책과 국민 통합을 위한 정책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12] 타이완 정체성을 긍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해졌으며,[13] 본성인과 원주민의 문화와 언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초등학교에서 모국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타이완어, 객가어, 원주민 언어를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다.[13]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 풍습, 언어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려는 노력 또한 활발해지고 있다.[13]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민족 간의 구분이나 차이가 점차 희미해지는 경향을 보인다.[13]

3. 용어

타이완의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본성인(本省人)'이 타이완인을, '외성인(外省人)'이 일본인을 지칭했으며, 중국 본토에서 온 이주민은 '당산인(唐山人)'으로 불렸다. 현재 통용되는 '본성인'과 '외성인'의 구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화민국의 타이완 통치와 함께 정착된 개념이다. '본성인'은 일반적으로 1945년 이전에 타이완에 정착한 한족 및 그 후손을 의미하며, 이들 중 다수는 호로족이다.

'토착 타이완인'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본성인', 특히 호로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사용에는 혈통이나 계급적 함의가 내포될 수 있다. 초기 타이완 역사에서는 호로족, 객가족, 원주민 사이에 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했으며, 일본 통치기를 거치며 이러한 내부 갈등은 점차 완화되었다. 또한, 초기 이주민이 모두 남부 푸젠이나 객가 지역 출신만은 아니었으며, 만주족이나 후이족 등 다양한 배경의 이주민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타이완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외성인들 역시 중국 본토 주민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외성인'으로 지칭하는 등 용어의 의미와 사용 맥락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3. 1. 본성인과 외성인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은 타이완의 주요 민족 집단을 구분하는 중요한 용어이다.[4] 일반적으로 본성인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전에 명나라, 청나라 시기부터 타이완으로 이주해 온 한족과 그 후손을 가리킨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등지에서 건너왔으며, 타이완은 청나라 때 정식으로 중국 영토에 편입된 후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반면 외성인은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한족과 그 후손을 지칭한다.[5][6]

일제강점기에는 '본성인'이라는 용어가 타이완인을, '외성인'이라는 용어가 일본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당산인(唐山人)'으로 불렸다. 현재 통용되는 '본성인'과 '외성인'의 구분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이 타이완을 통치하면서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타이완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중화민국의 타이완 성으로 편입되었다.[4] 10월 25일, 장제스의 대리인 천의는 마지막 타이완 총독 안도 도시키치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1946년 1월 행정원 훈령에 따라, 1945년 10월 25일을 기준으로 당시 타이완 주민들은 중화민국 국적을 회복한 것으로 간주되어 '본성인'이 되었다.[5] 이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국 국민당과 국민정부군 병력 및 그 가족들이 대거 타이완으로 이주하면서 '외성인' 집단이 형성되었다.[5][6]

이 과정에서 기존의 본성인들은 새로 유입된 외성인 정권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았고, 이는 1947년 2.28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탄압과 학살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는 상당히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갈등의 요인으로 남아 있다.

본성인의 대다수는 푸젠성 남부에서 유래한 호로족이며, 타이완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 때문에 그들의 언어인 호로어는 타이완에서 널리 사용된다. 객가족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이주했지만 수적으로는 소수이다. 일제 강점기 타이완 총독부는 호로족을 주로 '타이완인'으로 지칭했으며, 호로족 스스로도 자신들을 '토착민' 또는 '타이완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본성인'과 '외성인'이라는 용어 자체는 타이완 고유의 것은 아니다. 중국 본토에서도 특정 성에 본관(본적지)을 두고 거주하는 사람을 '본성인', 다른 성 출신 주민을 '외성인'이라고 부른다.[3] 하지만 타이완에서는 이 구분이 단순한 출신지 구분을 넘어, 역사적 경험과 정치적 입장이 얽힌 민족 집단 간의 차이를 강하게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4]

본성인과 외성인의 구분은 때때로 모호하며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푸젠성 출신이지만 1945년 이후 타이완으로 이주한 작가 린 위탕은 분류상 외성인이지만, 스스로는 호로어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본성인과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했다. 또한,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장징궈싱가포르리콴유 총리가 타이완 방문 시 호로어로 현지 주민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언어 장벽과 본성인과의 거리감을 통감하며, 이후 타이완 사회에 통합되려는 노력을 보인 일화도 있다. 타이완 사회가 민주화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외성인들 역시 중국 본토 주민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외성인'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3. 2. 기타 명칭

타이완 섬의 지형적 모양이 고구마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본성인들은 스스로를 "고구마 사람"(番薯仔|판수자중국어 대만어: ''han-tsî-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고구마는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이며, 네덜란드의 타이완 식민지배 시기에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타이완에 처음 도입된 작물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한 외성인들은 "토란 사람"(芋仔|위자중국어 대만어: ''ōo-á'')으로 불린다. 특히 나이가 많은 외성인 군인들을 구어체로 "늙은 토란"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농담 삼아 "토란 고구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고구마보다 토란이 타이완에서 훨씬 더 오랜 재배 및 식용 역사를 가지고 있다. 토란은 오스트로네시아족대만 원주민과 호로인의 식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예를 들어, 일부 대만 원주민들은 "토란 과자"를 즐겨 먹었으며, 파이완족은 토란을 말려 보존하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호로인들 역시 토란을 으깨 돼지기름, 설탕 등과 섞어 만든 요리(토란 퓨레)를 연회 등에서 즐겨 먹었다.

4. 분포

타이완 전체 인구 중 본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85% 정도이며, 타이베이, 타이난, 가오슝 등을 비롯한 타이완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5. 정치

본성인들은 대부분 범록연맹에 속한 민주진보당 등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며, 민주진보당 출신 총통인 천수이볜차이잉원 역시 본성인이다.[15]

대만의 정치 민주화는 1986년 가을, 오랫동안 일당 독재를 이어온 국민당 정권이 야당인 민주진보당의 결성을 허용하면서 시작되었다.[11] 1949년부터 지속된 장기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중국 내전 시기 중국 대륙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국민대회가 정상화되었다.[11] 1996년에는 총통 직선제가 실시되었고(1996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 2000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 결과 국민당에서 민주진보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11]

이러한 민주화는 본성인의 관점에서 볼 때, 국민당 독재 하에서 소외되었던 토착 언어와 문화로의 회귀를 의미했다.[11] 대만 최대 민족 집단인 호로인이 사용하는 호로어는 '대만어'로 불리며 선거와 국회에서도 사용되는 등 그 지위가 높아졌다.[11] 최근에는 대만 내 각 민족 집단의 요구가 다원주의적인 문화 정책이나 국민 통합 정책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으며,[12]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움직임이 강해졌다.[13] 본성인과 원주민의 문화와 언어가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초등학교에서 대만어, 객가어, 원주민 언어 등 모국어 교육이 시작되었고,[13] 각 민족의 문화, 풍습, 언어를 후대에 전하려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13] 다만, 젊은 세대에서는 민족 간의 차이가 점차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추세이다.[13]

5. 1. 객가인과 정치

대만의 객가인은 약 31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13%를 차지하며, 선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14] 국립정치대학 교수 장명수(江明修)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소수 민족이었던 객가인은 인구가 많은 다른 이민자 집단에 맞서기 위해 국민당 정권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과거에는 약 70%가 국민당을 지지했다.[14] 이러한 경향은 2012년 중화민국 총통선거에서도 나타났는데, 객가인이 많이 거주하는 대만 북부의 신죽현(新竹縣)에서는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후보보다 약 2배의 표를 얻어 승리했고, 마잉주는 총통에 당선되었다.[14]

그러나 2014년 해바라기 학생운동을 계기로 젊은 세대의 정치 의식이 높아지면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 교수는 젊은 객가인들이 기존 정당과의 생각 차이를 느끼며 국민당 지지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14] 이러한 변화는 2016년 중화민국 총통선거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과거 국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신죽현(新竹縣)에서 객가인 표심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 후보와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접전을 펼쳤다.[14] 이는 8년 만의 정권 교체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변화였다.[14]

6. 하위 집단

'본성인'(本省人)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이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7][8] 이는 일제강점기에 타이완인을 가리키던 '본성인'과는 구별된다.

본성인은 주로 한족 계통으로, 대만으로 이주해 온 시기와 출신지에 따라 크게 민남인(호로인)과 객가인으로 나뉜다.[8] 이들은 네덜란드 통치 시대 이후부터 이주해 왔으며, 현재 본성인의 대다수는 민남인이 차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토착 타이완인'이라는 표현은 1945년 이전에 타이완으로 이주한 호로족과 호로어 사용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때로는 이들과 문화적으로 동화된 다른 집단을 포함하기도 했다. 초기 타이완 역사에서는 이들 집단 간에 갈등이 존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타이완의 독자적 정체성이 강조되면서 이러한 구분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6. 1. 민남인 (호로인)

민남인(호로인)은 본성인 중 한족계 본성인의 한 갈래로,[7][8] 객가인과 함께 네덜란드 통치 시대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주해 온 한족 이주민의 후예이다.[8] 이들은 주로 푸젠성 남부의 취안저우장저우 지역 출신의 민남어 사용자 및 광둥성 북동부 차오저우의 조주어 사용자를 기원으로 한다.[9][7]

민남인은 객가인과 비슷한 시기에 대만으로 이주했으나, 현재 대만 인구의 약 4분의 3을 차지하며 본성인의 대다수를 이룬다. 이 때문에 그들의 모국어인 민남어(호로어)는 대만에서 널리 사용된다. 일제강점기 타이완 총독부는 이들을 "타이완인"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호로인 스스로도 대만 원주민이 이미 존재했음에도 자신들을 '토착민' 또는 '타이완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으로 "토착 타이완인"이라는 용어는 1945년 이전에 대만으로 이주한 호로인과 민남어 사용자를 주로 가리키며, 이 과정에서 객가나 평포족 중 일부가 호로 문화와 언어에 동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호로인들은 이 용어를 1945년 이전부터 섬에 거주했던 호로 문화의 대만인만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중국 대륙표준 중국어 사용자들은 특히 중국 내에서 토착 타이완인을 호로족(민남인)으로만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민남어를 통한 정체성 인식은 린위탕의 사례에서도 엿볼 수 있다. 푸젠성 장저우시 출신인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으로 이주했지만, 자신을 외부인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 이유로 민남어를 통한 소통의 친밀함을 들었다. 그는 고향 사투리(민남어)를 듣는 것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장징궈 총통 시절에는 언어 장벽으로 인한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싱가포르리콴유 총리가 시터우를 방문했을 때, 장징궈는 리콴유가 주민들과 민남어로 즐겁게 대화하는 것을 보고 소외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는 중국 국민당 회의에서 "우리는 항상 타이완인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심지어 리콴유도 타이완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할 수 없다"고 토로했으며, 국회의원 강닝샹에게도 외국 정상이 대만 주민과 직접 소통하는데 자신은 민남어를 몰라 알아듣지 못한다고 좌절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이 장징궈가 통치 말기에 민남어를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초기 대만 역사에서는 민남인, 객가, 대만 원주민 사이에 상업적 이익, 토지, 수자원 등을 둘러싼 치열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시간이 지나고 일본과 같은 새로운 외부 세력의 통치를 겪으면서 이러한 내부 민족 간 갈등은 점차 완화되었다.

6. 2. 객가인

본성인 중 한족계는 크게 복건인과 객가의 두 주요 분파로 나뉜다.[8] 객가인은 본성인의 한 주요 집단으로,[7] 주로 광동성 북부 출신이며 객가어를 사용한다.[9][7]

객가는 원래 황하 유역의 중원 지대에 살았던 한족의 한 분파였으나, 잦은 전란을 피해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7] 이들은 호로족과 비슷한 시기에 대만으로 이주했으며, 초기 대만 역사에서는 호로족, 대만 원주민 등 다른 집단들과 상업, 토지, 수자원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대만에서 사용되는 객가어에는 사현(四縣), 해륙(海陸), 요평(饒平)이라는 세 가지 주요 방언 계통이 있다.[7]

6. 3. 기타

일제강점기에 '본성인(本省人)'은 타이완 사람을, '외성인(外省人)'은 일본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당산인(唐山人)'은 일제 시대에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현재 통용되는 '본성인'이라는 용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화민국이 타이완을 접수하면서 '외성인(外省人, 다른 성 출신 사람)'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객가족과 호로족은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으로 이주했지만, 타이완 인구의 약 4분의 3을 차지하는 호로족이 타이완 민족의 대다수를 이룬다. 이 때문에 그들의 모국어인 호로어가 널리 사용된다. 일제 강점기 타이완 총독부는 호로족을 '타이완인'으로 불렀다. 호로족 스스로도 원주민인 오스트로네시아 부족이 이미 존재했음에도 자신들을 '토착민' 또는 '타이완인'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들은 언어 배경에 따라 '객가족', '원주민', '외부인'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토착 타이완인'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전했다. 한편, 중국 본토의 많은 표준 중국어 사용자들은 토착 타이완인을 호로족으로만 지칭하기도 한다.

역사적 구분에 따르면, '토착 타이완인'은 1945년 이전에 타이완으로 이주한 호로족과 타이완 호로어 방언 사용자를 가리키며, 여기에는 타이완 호로 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객가족과 평원 원주민도 포함된다. 그러나 일부 호로족 타이완인들은 이 용어를 1945년 이전에 섬에 거주했던 호로 문화의 타이완인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토착 타이완인과 비토착 타이완인(외성인)의 구분은 때때로 모호하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후 타이완으로 이주한 작가 린 위탕은 외성인으로 분류되어야 하지만, 그의 출신지는 푸젠성 장저우시 핑허현으로, 많은 본성인의 조상 출신지와 같다. 린 위탕 자신도 "사람들은 제가 외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저 또한 제가 외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때때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 언어가 친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언어가 본성인과 외성인을 구분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보았으며, 자신의 에세이에서 호로어를 이해할 때 느끼는 동질감과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가 타이완 시투 자연교육구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장징궈는 리콴유가 마을 사람들과 호로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중국 국민당 회의에서 장징궈는 "우리는 항상 타이완인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심지어 리콴유도 타이완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언어 장벽으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또한 국회의원 강닝샹에게 외국 정상이 타이완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는데 자신은 타이완어를 몰라 답답함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타이완 민중당 당수였던 손천은 이 사건이 장징궈에게 타이완어를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장징궈는 통치 말기에는 타이완 호로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

'토착 타이완인'이라는 용어는 원래의 의미 외에도 혈통과 계급적 함의를 내포하기도 한다. 초기 타이완 역사에서는 호로족, 객가족, 원주민 사이에 상업, 토지,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빈번했다. 시간이 지나고 일본과 같은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점차 완화되었다. 또한, 초기 이주민 중에는 남부 푸젠이나 객가 지역 출신 외에 만주족이나 후이족 등 다른 민족도 있었다. 현대에 들어 타이완 정부가 민주화를 통해 중국과 차별화된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외성인들 역시 중국 시민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비토착민(외성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More than 18 million, the "native" Taiwanese, are descendants of Chinese who migrated from Fujian and Guangdong Provinces on the mainland, primarily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https://2009-2017.st[...]
[2] 웹사이트 Native Taiwanese http://taiwanease.co[...] 2018-02-00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월까지만 표시
[3] 서적 (페이지 5) 1988-00-00 #년도 정보만 존재
[4] 서적 (페이지 62) 2001-00-00 #년도 정보만 존재
[5] 서적 (페이지 63) 2001-00-00 #년도 정보만 존재
[6] 서적 (페이지 14) 1988-00-00 #년도 정보만 존재
[7] 서적 (페이지 12) 1988-00-00 #년도 정보만 존재
[8] 서적 (페이지 19) 2005-00-00 #년도 정보만 존재
[9] 서적 (페이지 20) 2005-00-00 #년도 정보만 존재
[10] 서적 (페이지 28) 2005-00-00 #년도 정보만 존재
[11] 서적 (페이지 29) 2005-00-00 #년도 정보만 존재
[12] 서적 (페이지 30) 2005-00-00 #년도 정보만 존재
[13] 서적 (페이지 92) 2008-00-00 #년도 정보만 존재
[14] 뉴스 客家票、崩れる与党 旧来地盤、野党と互角 朝日新聞 2016-01-12
[15] 뉴스 <대만 총통선거 (D―5일)―관전포인트> 잡초 vs 난초…남―북 대결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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