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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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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르인은 기원이 불분명하지만, 튀르크계 유목 민족으로,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 어원은 튀르크어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7세기 대불가리아를 건설했으나 카자르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후 불가르인들은 볼가강 유역에 볼가 불가리아를, 다뉴브강 유역에 제1 불가리아 제국을 건설했다. 제1 불가리아 제국은 기독교를 수용하고 슬라브족과 융합하여 현대 불가리아인의 기원이 되었으며, 볼가 불가리아는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불가르어는 오구르어파에 속하며, 추바시어가 가장 가까운 언어로 여겨진다. 불가르인은 다양한 민족 집단과의 융합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현대 볼가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추바시인 등에게 유산을 남겼다.

2. 어원 및 기원

불가르족(Bulgar)이라는 명칭의 정확한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원시 튀르크어 어근 *''bulga-''* ("휘젓다", "섞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7] 이 단어는 "혼합된"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8] 일부 학자들은 "선동하다", "반란을 일으키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9] 이는 유목민의 이동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오스만 카라타이는 "혼합"이라는 어원이 훈족과의 융합을 전제한다면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구르족은 463년에 유럽에서 기록되었지만, 불가르족은 482년까지 언급되지 않아 민족 형성이 일어나기에 너무 짧은 기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르족이 동쪽에서 이동하기 전에 이미 "혼합"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산핑 천과 같은 학자들은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혼혈"이자 "문제 야기자"로 묘사된 결인(Jie people, Buluoji)(중국 중세어 ''b'uo-lak-kiei'')과 같은 집단들과의 연관성을 제기한다.[8]

보리스 시메오노프는 불가르족을 내몽골의 투르크계 민족인 ''Pugu''(僕骨; ''buk/buok kwət''; ''Buqut'')와 연결 짓기도 한다.[12]

후대 비잔티움 자료에서는 오노구르족과 불가르족의 이름이 연결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불가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동게르만어족 어근, 라틴어, 초기 투르크어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지만, 제한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불가르인의 조상은 오구르에 속하는 부족으로, 2세기경 우랄 산맥을 넘어 카스피해흑해 사이 초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시작했다. 일부는 훈족의 서진에 참여하여 동유럽으로 이동했고, 5세기부터는 동로마 제국 영역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6세기 중엽, 쿠브라트를 으로 하여 부족 연합 국가 “대불가리아”를 형성하고, 아조프해 북쪽 해안에서 볼가 강 하류 지역의 초원 지대를 차지했다.

쿠브라트 사후, 부족 연합은 분열되었고, 북쪽에는 볼가 불가르, 서쪽에는 도나우 불가르가 형성되었다. 원주지에 남은 불가르인들은 “대불가리아”라고 불리며 아조프로스토프나도누 북쪽 초원을 지배했다.

7세기경 카자르가 서진하자 대불가리아는 몰락하고, 많은 부족민들은 카자르 칸국에 가담하여 점차 동화되었다. 10세기 카자르 멸망과 함께 거의 해체되었으며, 현재 북카프카스의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에 사는 발카르인이 불가르인의 후예라는 설이 있지만,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2. 1. 오노구르족과의 관계

오노구르족과 불가르족의 이름은 후대 비잔티움 자료에서 연결되어 나타난다. 아가톤(8세기 초)은 오노구르 불가르족 국가에 대해 썼다. 니케포로스 1세(9세기 초)는 쿠브라트가 ''오노구룬두르''의 주인이었다고 언급했고, 그의 동시대인 테오파네스는 그들을 ''오노구룬두르-불가르''라고 언급했다.[12] 콘스탄티누스 7세(10세기 중반)는 불가르인들이 이전에 자신들을 오노구룬두르라고 불렀다고 언급했다.[12]

현대 학자들은 ''oğuz'' 또는 ''oğur''을 투르크 부족 연맹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로 간주하며, 투르크어 ''*og/uq'' ("혈연 또는 친족 관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불가르족은 오노구르족, 우티구르족, 쿠트리구르족의 잔당을 포함한 대규모 연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2]

3. 역사

7세기 옛 대불가리아 멸망 이후 불가르인들의 이동


600년 이후 어느 시점부터 투르크의 지배가 약해지면서 아바르인들이 다시 그 지역을 장악했다.[18] 7세기 중반 서튀르크 칸국이 쇠퇴하면서 '오노군두르-불가르(Onoğundur–Bulğars)'로 기록된 불가르인들이 아바르 지배에 맞서 다시 등장하였다.[18] 이들은 쿠브라트(약 635년)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산 제국-아바르 연합에 대항하여 헤라클리우스(610–641)와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쿠브라트는 그의 삼촌 오르가나와 함께 61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았다.[18] 그는 옛 대불가리아('마그나 불가리아'(Magna Bulgaria)) 또는 '오노군두르-불가르' 국가, 혹은 '라벤나 우주지리서'에 나오는 '파트리아 오노구리아'(Patria Onoguria)로 알려진 국가를 건설하였다.[12]

쿠브라트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오노군두르 불가르인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유일한 스텝 유목민족으로 여겨진다.[19] 그의 사망 시기는 650년에서 663년 사이로 추정된다.[19] 니케포로스 1세에 따르면, 쿠브라트는 다섯 아들에게 "서로의 거주지를 결코 분리하지 말고, 서로 화합하여 그들의 힘이 번영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의 사건들은 옛 대불가리아가 느슨한 부족 연합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흑해-카스피해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의 유산과 지배권을 두고 카자르인들과 불가르인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서튀르크의 투쟁, 즉 누시비 부족과 카자르인들을 이끈 아시나 씨족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쿠브라트와 많은 불가르 통치자들의 기원으로 여기는 두루/투-루 부족(일부 학자들은 두루(Dulo) 씨족과 연관짓는다) 사이의 투쟁의 연장선으로 본다. 결국 카자르인들이 승리하였고, 불가르 연합의 일부는 해체되었다.

이후 쿠브라트의 아들들의 분파는 각각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3. 1. 튀르크계 유목민의 이동

600년 이후 어느 시점부터 튀르크의 지배가 약해지면서 아바르인들이 다시 그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18] 7세기 중반 서튀르크 칸국이 쇠퇴하고 결국 붕괴하면서, '오노군두르-불가르(Onoğundur–Bulğars)'로 기록된 불가르인들이 아바르 지배에 맞서 다시 등장하였다.[18] 그들은 쿠브라트(약 635년)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사산조-아바르 연합에 대항하여 헤라클리우스(610–641)에 의해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쿠브라트는 그의 삼촌 오르가나와 함께 61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았다.[18] 그는 옛 대불가리아('마그나 불가리아'(Magna Bulgaria)) 또는 '오노군두르-불가르' 국가, 혹은 '라벤나 우주지리서'에 나오는 '파트리아 오노구리아'(Patria Onoguria)로 알려진 국가를 건설하였다.[12]

쿠브라트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오노군두르 불가르인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유일한 스텝 유목민족으로 여겨진다.[19] 그의 사망 시기는 서기 650년에서 663년 사이로 추정된다.[19] 니케포로스 1세에 따르면, 쿠브라트는 다섯 아들에게 "서로의 거주지를 결코 분리하지 말고, 서로 화합하여 그들의 힘이 번영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의 사건들은 옛 대불가리아가 느슨한 부족 연합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흑해-카스피해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의 유산과 지배권을 두고 카자르인들과 불가르인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서튀르크의 투쟁, 즉 누시비(Nushibi) 부족과 카자르인들을 이끈 아시나 씨족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쿠브라트와 많은 불가르 통치자들의 기원으로 여기는 두루/투-루(Duolu/Tu-lu) 부족(일부 학자들은 두로 씨족과 연관짓는다) 사이의 투쟁의 연장선으로 본다. 결국 카자르인들이 승리하였고, 불가르 연합의 일부는 해체되었다.

형제들이 갈라선 이유가 내분 때문인지 강력한 카자르의 압력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20] 바트바얀과 코트라그가 이끄는 불가르인들은 폰토스 스텝 지역에 남아 비잔티움과 루스의 자료에서 '흑 불가르인'으로 알려졌으며 카자르의 속국이 되었다.[20] 코트라그가 이끄는 불가르인들은 7세기와 9세기 동안 볼가 중류 지역으로 이동하여 수도인 볼가르를 중심으로 볼가 불가리아를 건설했다.[20]

아흐마드 이븐 루스타(10세기)에 따르면 볼가 불가르인들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베르술라(바르실스), 두 번째는 에세겔, 세 번째는 불가르였다." [21]

3. 2. 대불가리아 (7세기)



7세기 중반, 서돌궐이 쇠퇴하면서 불가르인들은 쿠브라트의 지휘 아래 아바르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18] 쿠브라트는 사산 제국-아바르 연합에 대항하여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619년 그의 삼촌 오르가나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았다.[18] 그는 옛 대불가리아(또는 '마그나 불가리아')로 알려진 국가를 건설하였다.[12]

쿠브라트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오노군두르 불가르인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유일한 스텝 유목민족으로 여겨진다. 그의 사망 시기는 650년에서 663년 사이로 추정된다.[19] 니케포로스 1세에 따르면, 쿠브라트는 다섯 아들에게 "서로의 거주지를 결코 분리하지 말고, 서로 화합하여 그들의 힘이 번영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후 옛 대불가리아는 느슨한 부족 연합이었음이 드러났다. 흑해-카스피해 스텝 지역에서 투르크의 유산과 지배권을 두고 카자르인들과 불가르인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서투르크의 투쟁, 즉 누시비 부족과 카자르인들을 이끈 아시나 씨족,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쿠브라트와 많은 불가르 통치자들의 기원으로 여기는 두루/투-루 부족(일부 학자들은 두루(Dulo) 씨족과 연관짓는다) 사이의 투쟁의 연장선으로 본다. 결국 카자르인들이 승리하였고, 불가르 연합의 일부는 해체되었다.

6세기 중엽, 불가르인들은 쿠브라트를 으로 하여 부족 연합 국가 “대불가리아”를 형성하고, 아조프해 북쪽 해안에서 볼가 강 하류 지역의 초원 지대를 차지했다. 하지만 쿠브라트 사후, 이 부족 연합은 곧 분열되었고, 북쪽에는 볼가 불가르, 서쪽에는 도나우 불가르가 이주해 갔다. 원주지에 남은 불가르인들은 부족 연합 국가를 유지하며 아조프해 연안을 지배했다. 볼가 강 계와 도나우 강 계로 갈라진 사람들과의 대비에서 “대불가리아”라고 불리며, 그 본거지는 현재 아조프로스토프나도누 북쪽 초원에 있었다.

7세기경 카프카스 북쪽 기슭의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 카자르가 서돌궐의 지배를 벗어나 서진하자, 대불가리아는 몰락하고 많은 부족민들은 카자르 칸국에 가담했다. 이들은 점차 카자르인과 동화되어 갔고, 10세기 카자르 멸망과 함께 거의 해체되었다.

3. 3. 후속 이동



600년 이후 투르크의 지배가 약해지면서 아바르인들이 다시 그 지역을 장악했다. 7세기 중반 서투르크 칸국이 쇠퇴하면서 불가르인들은 아바르 지배에 맞서 다시 등장하였다. 이들은 쿠브라트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고, 옛 대불가리아(마그나 불가리아)를 건설하였다.

쿠브라트 사후, 옛 대불가리아는 부족 연합이 느슨해지면서 카자르인들과 불가르인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서투르크의 투쟁, 즉 누시비 부족과 카자르인들을 이끈 아시나 씨족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쿠브라트와 많은 불가르 통치자들의 기원으로 여기는 두루/투-루 부족 사이의 투쟁의 연장선으로 여겨진다. 결국 카자르인들이 승리하였고, 불가르 연합의 일부는 해체되었다.

불가르인의 조상은 오구르에 속하는 부족으로, 2세기경 우랄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서부에서 유럽 대륙 동부로 이동하여 카스피해흑해 사이 초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일부는 훈족의 서진에 참여하여 동유럽으로 이동했다. 5세기부터 불가르인의 일파는 아바르인과 함께 여러 차례 동로마 제국 영역에 침입하기 시작했다.

6세기 중엽, 불가르인들은 쿠브라트를 으로 하여 부족 연합 국가 “대불가리아”를 형성하고, 아조프해 북쪽 해안에서 볼가 강 하류 지역의 초원 지대를 차지했다. 하지만 쿠브라트 사후, 이 부족 연합은 곧 분열되었고, 북쪽에는 볼가 불가르, 서쪽에는 도나우 불가르가 이주해 갔다. 원주지에 남은 불가르인들은 부족 연합 국가를 유지하며 아조프해 연안을 지배했다.

카프카스 북쪽 기슭의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 카자르가 서돌궐의 지배를 벗어나 서진하자, 7세기경 대불가리아는 몰락하고 많은 부족민들은 카자르 카간국에 가담했다. 이들은 점차 카자르인과 동화되어 10세기 카자르 멸망과 함께 거의 해체되었다.

이후 쿠브라트의 아들들의 분파는 각각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3. 3. 1. 볼가 불가리아 (7세기~13세기)

쿠브라트의 둘째 아들 코트라그가 이끄는 부족 집단은 볼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카마 강과 합류하는 지점 근처 볼가 강 굽이에 정착하여 농업무역에 종사하는 볼가 불가르가 되었다(현재의 타타르스탄 공화국 주변).[34] 이후 하자르의 지배를 받다가 압바스 칼리파와 교류하여 922년에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다.[32][34] 하자르가 쇠퇴하면서 독립하여 왕국을 세웠으나, 13세기몽골 제국에 정복되어 멸망했다.

볼가 불가르인들은 킵차크 칸국의 백성이 되었고, 오늘날 볼가 강 굽이에 사는 튀르크계인 볼가 타타르인이나 추바시인은 그 후손으로 여겨진다. 특히 추바시인이 사용하는 추바시어튀르크어족 중에서도 불가르인들이 사용했던 언어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3. 3. 2. 도나우 불가리아 (7세기~11세기)

쿠브라트의 셋째 아들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인들은 흑해 북쪽 해안을 따라 발칸 반도로 이동하여 도나우 강 하류에 정착했다. 이들을 도나우 불가르라고 부른다. 이들은 남쪽에 있던 동로마 제국과 싸워 나라를 세우고 현지의 슬라브인들을 지배하여 680년에 제1 불가리아 제국(불가르 칸국)을 건국했다.

8세기~9세기 아드리아 해 하류 지역 불가르인 무덤 지도


7세기 고대 대불가리아 쇠퇴 후 불가르인들의 이동과 정착


이후 이 불가르인 집단은 9세기경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점차 코카소이드 계열의 남슬라브인과 동화되어 오늘날의 불가리아인을 형성하게 되었다.

불가르인들은 7개의 슬라브 부족을 정복했는데, 그중 세베리아인들은 발칸 산맥의 리시 고개에서 동쪽으로 재정착되었고, 다른 여섯 부족은 남부와 서부 지역으로 재정착되었다. 학자들은 슬라브족이 침략에 저항했다는 기록이 없는 이유가 비잔티움의 과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18] 슬라브 부족 조직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지배적인 불가르인들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여겨진다.[19][20]

8세기~11세기 흑해 지역의 무역로


제1 불가리아 제국(681~1018)은 발칸반도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테르벨(700~721) 시대에 불가르인들은 비잔티움을 두 번 도왔다. 705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왕위를 되찾도록 돕고, 717~718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아랍군을 물리쳤다.[21]

814년 유럽


크룸(803~814)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의 새로운 땅을 포함하여 두 배로 늘어났다. 그는 또한 침입한 비잔티움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판노니아 아바르족을 물리쳐 제국의 규모를 더욱 확장했다.[22] 865년 칸 보리스 1세(852~889) 통치 기간 동안 불가르인들은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고, 879년에는 동방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시메온 1세(893~927) 시대의 제국 최대 확장과 번영은 불가리아의 황금기로 여겨진다.[23] 그러나 페터 1세(927~969) 시대부터 그들의 힘은 쇠퇴했다. 헝가리인, 키예프 루스, 슬라브족, 그리고 페체네그족과 쿠만족이 그들의 영토에 많은 습격을 가했고, 약화된 그들은 결국 1018년 비잔티움 제국에 정복당했다.

3. 3. 3. 기타 분파

쿠베르가 이끄는 분파는 판노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테살로니키 지역으로 이동했다. 알체크가 이끄는 분파는 이탈리아세피노, 보야노, 이세르니아에 정착했다.[12]

4. 사회

불가르족은 중앙아시아 유목 기마민족의 전형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좋은 목초지를 찾아 계절에 따라 이동하면서도 정착 사회와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관심을 가졌다.[18] 이들은 정착 문화와 접촉하면서 대장장이, 도자기 제작, 목수 일 등의 기술을 습득했다.[18]

마다라 기수, 8세기 초 불가리아의 불가르 예술 작품


유목 사회에서 부족은 혈연 기반의 정치 조직으로 권력이 분산되었다. 부족은 정착 국가와의 관계에 따라 발전했으며, 사회적 응집력이 강할 때 정착 국가를 정복할 수 있었다. 유목민의 약탈은 지역 경제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늦출 수 있었다. 유목 국가에서는 유목민과 정착민의 통합이 제한적이었고, 일반적으로 조공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불가르족이 발칸 반도에 도착했을 때 초기에는 유목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슬라브족과 토착 주민들의 반지하 건물과 정착 또는 계절적 생활 방식을 빠르게 채택했다.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의 정착지는 이중 매장 방식의 묘지 유형을 제외하고는 구별하기 어렵다.

4. 1. 사회 구조

다뉴브 불가리아인들은 잘 발달된 씨족과 군사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24] 통치자는 칸 또는 카나수비기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4] 카우한은 왕국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칭호였고,[26] 최고 관리였다.[26] 일부 불가리아 비문에는 불가리아 통치자들이 그리스어 칭호인 아르콘 또는 슬라브어 칭호인 크냐즈와 차르로 언급되어 있다.[26]

상류 사회 계층은 보일라(후기 보야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6] 귀족은 '소'보일라와 '대'보일라로 나뉘었다.[26] 10세기에는 보야르에 세 계급이 있었는데, 여섯 명의 '대'보일라, '외부' 보일라, 그리고 '내부' 보일라가 있었다.[26] 9세기 중반에는 열두 명의 '대'보야르가 있었다.[26] '대'보일라는 국가의 군사 및 행정 직책을 맡았고,[26] 중요한 국가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모이는 의회에도 참여했다.[26]

바가인은 하위 귀족 계급이었고,[26] 아마도 의회에도 참여하는 군사 계급이었을 것이다.[26] 바가투르 칭호는 여러 비문에서 발견된다.[26] 이는 튀르크어 ''bagadur''(영웅)에서 유래했으며,[26] 높은 군사 계급이었다.[26]

5. 종교

불가르족의 종교는 일신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텐그리(텐그리)(불가르어로는 탕그라/텡그레)를 최고 신으로 숭배했을 것으로 보인다.[29] 텐그리는 기원전 2세기에 중국 국경에 정착한 흉노 연맹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29] 현대 터키어에서 신을 뜻하는 단어인 'Tanrı'는 같은 어근에서 유래한다.[30]

다뉴브 불가리아에서는 불가르족 군주들이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통치자"라고 묘사했는데,[26] 이는 유일신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다. 필리피(필리피)의 프레시안(프레시안(불가리아)) 비문(837년)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자는 하느님이 보시고, 거짓말을 하는 자도 하느님이 보신다. 불가르족은 기독교인(비잔티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은혜를 잊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보신다."라고 적혀 있다.

A rosette
플리스카 로제트(플리스카 로제트)는 텐그리즘 시대의 것으로, 고전 행성(고전 행성)을 나타내는 일곱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텐그리즘(텐그리즘)은 다양한 샤머니즘적 관행을 포함했던 것으로 보인다. 탕그라는 하늘, 빛, 태양과 관련된 남성 신이었다.[30] 이 종교는 탕그라의 여성적 대응체이자 주요 여신인 풍요의 여신 우마이(우마이)를 포함했다.[31] 탕그라에게 가장 신성한 생물은 말과 독수리, 특히 흰말이었다.[30] 불가르 유적지에서는 태양, 말, 기타 동물을 묘사한 청동 부적이 발견되었다.[30]

이교는 오래된 씨족 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토테미즘샤머니즘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30] 9세기에 전투 전에 불가르족은 "''주술과 농담과 부적과 특정한 점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시메온 1세(시메온 1세(불가리아))(893~927년)의 아들인 바이안(Baian)이 ''마법''을 통해 늑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오흐리드의 클레멘트(오흐리드의 클레멘트)는 불가르족의 불과 물 숭배에 대해 전했고, 11세기 오흐리드의 테오필락토스(오흐리드의 테오필락토스)는 기독교화 이전에 불가르족이 태양, 달, 별을 존중하고 개를 그들에게 제물로 바쳤다고 기억했다.

도나우 불가르는 865년에 보리스 1세(보리스 1세(불가리아))에 의해 기독교를, 볼가 불가르는 922년에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받아들였다.

6. 언어

불가르인의 언어는 불가르어라고 불리며, 튀르크어족오구르어파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이 언어는 현재 사라졌으며, 추바시어가 이 언어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35][36][37][38][39]

불가르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많지 않지만, 일부 언어학자들은 추바시어가 볼가 불가르의 방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40][41][42][43] 반면, 추바시어가 또 다른 별개의 오구르 튀르크어라는 주장도 있다.[44]

다뉴브 불가르 비문은 대부분 그리스 문자 또는 키릴 문자로 쓰여졌으며, 주로 그리스어 또는 그리스-불가르어로 작성되었다.[35] 다른 비문들은 쿠반 문자로 쓰여졌는데, 이는 오르혼 문자의 변형이다.[35] 이 비문들에는 때때로 슬라브어 어휘가 포함되어 있어, 학자들이 일부 불가르어 글로스를 식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35]

차탈라르 비문의 복원본. 오무르타그 칸(815~831)이 남긴 것으로, 그리스어로 쓰여 있다. 위 두 줄에는 "...그는 신에 의해 아르콘(통치자)이 되었다. 플리스카 평원에서..."라고 적혀 있다.


9세기부터 약 200년간 불가르인들은 불가르어와 슬라브어를 함께 사용하는 이중 언어 사용 기간을 거쳤다.[28] 그러나 슬라브화와 함께 불가르 튀르크어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28] 지배 계급이 모국어를 버리고 슬라브어를 채택하면서, 고대 슬라브어 텍스트에는 튀르크어 말투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28]

1990년대부터 일부 불가리아 학자들은 불가르어가 이란어군(특히 파미르어군)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52][53][54][55] 예를 들어, ''명칭 목록''에 나오는 아스파루흐와 베즈메르라는 이름은 이란어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52] 그러나 다른 불가리아 학자들은 이러한 "이란 가설"에 반대하며, 이는 불가리아의 반튀르크 감정에 기반한 이념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60][61]

7. 민족성

현대 학계는 민족 형성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불가르인의 기원을 설명한다. 불가르인은 여러 다른 문화적, 정치적, 언어적 실체의 형성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튀르크족 부족, 코카서스계, 이란계, 우랄계 민족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을 통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2]

발터 포흘(Walter Pohl)에 따르면, 부족과 그 연합체의 존속은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전통과 의례에 기반한 신뢰성 있는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은 조직 형태가 안정적이면서도 유연했기 때문에 성공했지만, 판노니아 아바르인은 새로운 조건에 대응하지 못해 실패했다. 포흘은 사회 하층민들은 대규모 민족 집단의 일부라고 느끼지 않았으며, 뚜렷한 계층은 군대와 지배 엘리트 내부에만 존재했다고 설명했다.[62]

최근 연구들은 다양한 이질적인 집단을 지배한 전사 엘리트와 밀접하게 관련된 민족명을 고려한다. 이 집단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명칭을 정치적 명칭으로 채택했고, 엘리트들은 기원 신화를 통해 통치권과 왕족 혈통을 주장했다.

나지센트미클로스의 보물에서 나온 금으로 장식된 항아리는 포로를 잡은 전사를 묘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전사가 카자르인지, 판노니아 아바르인지, 혹은 불가르인인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튀르크족 부족은 훈족 이후 시대, 또는 기원후 2세기 초부터 폰토-카스피아 대초원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의 연합체는 튀르크계, 코카서스계, 이란계, 우랄계 민족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을 통합했다. 발칸 반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셈족, 슬라브족, 트라키아인, 아나톨리아 그리스인 등 다른 여러 민족과 접촉했다.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시바쇼프카(Sivashovka) 유형의 독특한 불가르 유적은 기원후 2세기부터 4세기까지의 후기 사르마티아 문화[63]와 6세기 펜코프카 문화의 안테스와 슬라브족 유적 위에 세워졌다. 8세기 이후 크리미아의 초기 중세 살토보-마야키 문화(알란계 문화) 정착지는 10세기에 페체네그족에 의해 파괴되었다.[36][18][20][64]

이전 이란계 부족들이 폰토-카스피아 대초원으로의 광범위한 튀르크계 이동에 둘러싸였지만, 그 후 수세기 동안 이란계와 튀르크계 언어는 모두 완전히 사라졌고, 이는 일반 대중 사이에서 슬라브어의 지배를 나타낸다.

8. 인류학과 유전학

2019년 연구에 따르면, 불가르족의 Y-DNA는 현대 볼가 타타르족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65] 헝가리 고고 유전학자 네파라치키 엔드레(Neparáczki Endre)는 "최근과 고대 인구 집단 중에서 볼가 타타르족이 정복자 전체 인구와 가장 유전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보여주며", "정복자와 이들 집단의 오노구르-불가르 조상 간의 직접적인 유전적 관계는 매우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66]

볼가 지역, 우크라이나, 몰도바의 모든 유적지에서 발견된 불가르족 관련 고인류학 자료는 복잡한 민족 문화적 과정을 보여준다.[67] 이 자료는 현지 주민과 이주해 온 사람들 사이의 동화 과정을 보여준다.[63] 모든 유적지에서 도네츠크 지역 일리체프키 마을 근처의 즐리브카(Zlivka) 묘지에서 발견된 인류학적 유형, 즉 소량의 동아시아계 혼합이 있는 두정골이 넓은 코카소이드계 유형이 발견되었는데, 불가르 남성이 여성보다 더 몽골리안족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68][63][67]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민족과 불가르족과 관련된 민족 집단에 대한 현대 유전 연구는 서유라시아 인구와의 관련성을 지적한다.[5][69] 형태학적 근접성에도 불구하고, 볼가핀족과 쿠만-킵차크족이 있는 볼가 지역, 오노구르-카자르족과 사르마티아-알란족이 있는 우크라이나, 그리고 몰도바트라키아의 슬라브 7부족의 현지 인구의 영향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67][70]

9. 유산

현대 민족주의에서는 "불가르 유산을 둘러싼 경쟁"이 존재한다(불가르 민족주의 참조). 볼가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추바시인은 볼가 불가르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며,[6] 헝가리인(마자르인)과 카라차이인-발카르인에게도 민족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불가르 민족 의회 회장인 구스만 칼릴로프는 타타르인의 명칭을 불가르인으로 변경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유럽 인권 재판소에 항소했으나, 2010년 패소했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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