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카 데 카스티야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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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블랑카 데 카스티야는 1188년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와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의 딸로 태어났다. 1200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의 존 사이의 조약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와 결혼했다. 1226년 남편 루이 8세가 사망하자 어린 아들 루이 9세의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하며, 잉글랜드의 침략을 물리치고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루이 9세가 성년이 된 후에도 정치에 깊이 관여했으며, 1248년 루이 9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다시 섭정으로 활동했다. 1252년 사망하여 모뷔송 수도원에 묻혔으며, 문학 작품과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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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카 데 카스티야 왕녀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프랑스 왕비 |
출생일 | 1188년 3월 4일 |
출생지 | 팔렌시아, 카스티야 왕국 |
사망일 | 1252년 11월 27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매장지 | 모뷔송 수도원 |
배우자 | 루이 8세 (1200년 결혼, 1226년 사별) |
자녀 | 루이 9세 로베르 1세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 성녀 이사벨 샤를 1세 |
가문 | 카스티야 이브레아 가문 |
아버지 | 알폰소 8세 |
어머니 | 엘레오노르 |
왕비 | |
재위 | 1223년 7월 14일 – 1226년 11월 |
대관식 | 1223년 8월 6일 |
섭정 | |
재위 | 1226년 11월 8일 – 1234년 4월 25일 (아들 루이 9세의 미성년 기간) 1248년 8월 – 1252년 11월 27일 (아들의 제7차 십자군 원정 중) |
섭정 유형 | 섭정 |
잉글랜드 왕비 (주장) | |
재위 | 1216년 6월 2일 – 1217년 9월 20일 |
2. 생애
블랑카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의 딸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판단에 따라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8세와 정략결혼을 하여 프랑스 왕가에 합류했다. 1200년 결혼 이후, 남편 루이 8세가 1226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어린 아들 루이 9세의 섭정이 되어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섭정으로서 블랑카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왕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귀족들의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했으며, 잉글랜드 헨리 3세의 침공 시도 역시 외교적 노력과 군사적 대응을 통해 성공적으로 막아냈다.[1][2] 특히 1229년 파리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남부 프랑스에 대한 왕실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오랜 알비 십자군을 종결시키는 등, 카페 왕조의 권력 기반을 크게 안정시켰다. 그녀의 단호하고 강력한 통치 방식은 때때로 적들에게 Dame Hersent프랑스어(암늑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만들기도 했으나[1],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국의 안정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아들 루이 9세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블랑카는 여전히 아들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1248년 루이 9세가 제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블랑카는 다시 한번 섭정을 맡아 왕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했다. 십자군 원정을 후방에서 지원하며 국정을 돌보던 중 1252년 병을 얻어 사망했으며, 그녀의 유해는 자신이 직접 설립한 모뷔송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블랑카 데 카스티야는 중세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2. 1. 어린 시절
블랑카는 1188년 스페인 팔렌시아에서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8세와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및 존의 여동생인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세운 산타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의 왕 존 사이에 맺어진 르 굴레 조약에 따라, 원래 블랑카의 언니인 우라카가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와 약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자매를 직접 만난 할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과거 프랑스의 왕비이기도 했다)는 블랑카의 성격이 왕비 역할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1200년 봄, 엘레오노르가 직접 블랑카를 데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갔다.
2. 2. 프랑스와의 정략결혼
1200년,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의 왕 존 사이에 르 굴레 조약이 체결되어 평화가 맺어졌다. 이 조약의 결과로 존 왕의 조카이자 카스티야의 공주와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의 정략결혼이 합의되었다.처음 신부 후보는 블랑카의 언니 우라카였다. 그러나 두 공주의 할머니이자 과거 프랑스의 왕비였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직접 카스티야를 방문하여 손녀들을 만난 후, 블랑카의 성품이 미래의 프랑스 왕비 역할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설로는, '우라카'라는 이름이 프랑스어에 없는 생소한 이름이라 궁정의 음유 시인들에게 놀림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블랑카가 선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언니 우라카는 이후 포르투갈의 왕 아폰수 2세와 결혼했다.)
1200년 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블랑카를 데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갔다. 같은 해 5월, 결혼 조약이 최종적으로 체결되었고, 존 왕은 조카의 지참금으로 자신이 프랑스 내에 왕령으로 소유하고 있던 베리 지방의 이스두와 그라세(Graçay) 봉토, 그리고 샤토루 영주 앙드레 드 쇼비니를 프랑스 측에 넘겨주었다.
결혼식은 1200년 5월 23일에 거행되었다. 당시 필리프 2세의 프랑스 영토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성무 금지령(interdict) 아래 있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잉글랜드 왕 존의 영지였던 센 강 우안의 포르-모르(Port-Mort)에서 열렸다. 이때 블랑카의 나이는 12세였고, 신랑 루이는 13세였다. 블랑카는 1205년에 첫 아이를 낳았다.
2. 3. 정치적 영향력
남편 루이 8세가 1226년 11월 이질로 사망하자, 당시 38세였던 블랑카는 어린 아들 루이 9세 (당시 12세)의 섭정이자 후견인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랭스에서 아들의 대관식을 치르고, 주저하는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했다.루이 8세가 남부 귀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어린 국왕의 즉위는 카페 왕가의 통치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블랑카는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부빈 전투 이후 포로였던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를 석방하고,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불로뉴 백작 필리프 1세에게 영지를 양도했다. 그러나 피에르 모클레르를 비롯한 일부 유력 귀족들은 루이 9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관식 직후 파리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습격을 받을 뻔했으나, 블랑카는 파리 시민들에게 호소하여 그들의 보호 아래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블랑카는 샹파뉴의 테오발트 1세와 주교 로마노 보나벤투라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고 반란 귀족들과 잉글랜드의 헨리 3세에 맞섰다. 특히 1229년 1월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겨울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모클레르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녀는 병사들과 함께 추위를 견디며 나무를 모으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단호한 통치 방식으로 인해 적들에게는 '암늑대'라는 의미의 Dame Hersent프랑스어로 불리기도 했다.[1]
1229년, 블랑카는 파리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툴루즈 백작 레몽 7세의 복종을 받아냈다. 이 조약으로 레몽 7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툴루즈 여백작 조안은 블랑카의 아들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와 결혼하게 되었고, 툴루즈 백작령은 알퐁스의 후계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정복했던 영토는 프랑스 왕령으로 귀속되었으며, 이로써 알비 십자군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블랑카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가 결혼을 통해 프랑스 내 영지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외교적으로 막아냈다. 헨리 3세가 브르타뉴의 욜랑드와 결혼하려 하자, 그녀의 아버지 피에르 모클레르를 압박하여 욜랑드를 블랑카의 다른 아들 존과 약혼시켰다. 또한 헨리 3세가 퐁티외 여백작 조안과 약혼했을 때는 교황에게 로비하여 근친상간을 이유로 결혼을 무산시켰다.
1230년, 헨리 3세는 프랑스를 침공했다. 블랑카는 푸아투에 대한 일부 영향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앙굴렘의 이사벨라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뤼지냥의 위그 10세가 잉글랜드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나, 피에르 모클레르는 잉글랜드를 지지하며 브르타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 헨리 3세는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침공을 시작했으나[2], 블랑카는 군대의 기강 문제[2]와 불로뉴 백작 필리프 1세의 이탈 및 샹파뉴 습격[2] 등 내부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헨리 3세는 큰 저항 없이 진군할 수 있었고[2], 노르망디 귀족들도 반란에 가담했다.[2] 그러나 헨리 3세는 노르망디의 반란을 지원하는 대신 푸아투로 남하하는 전략적 실책을 범했고[2], 보르도까지 진격했지만 별다른 군사적 성과 없이 막대한 비용만 소모했다.[2] 블랑카는 외교적 노력으로 라 마르슈 백작 위그 10세와 투아르 자작 레이몽 1세 등의 충성을 유지시켰고[2], 결국 헨리 3세는 별다른 소득 없이 명성과 재정만 잃고 잉글랜드로 퇴각했다.[2] 이 실패는 피에르 모클레르의 반란을 약화시켰고, 1234년에는 그 역시 루이 9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블랑카의 이러한 성공적인 대응은 루이 9세의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 9세는 어머니 블랑카에게 왕국의 안정을 빚졌으며,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그녀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루이 9세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블랑카는 정치와 궁정 문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아들 루이 9세 역시 중요한 사안을 어머니와 상의했다. 감히 모후를 비판하는 이는 없었다. 1233년, 툴루즈 백작 레몽 7세가 파리 조약의 조건에 불만을 보이자 블랑카는 직접 기사 Giles of Flagy프랑스어를 보내 그를 설득했다. 또한 트루바두르를 통해 프로방스 백작 라몽 베렝게 4세의 딸들의 명성을 듣고, 질 드 플라지를 다시 보내 확인하게 한 후, 장녀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를 루이 9세의 왕비로 결정했다. 이는 툴루즈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이었으며, 1234년 루이 9세는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블랑카는 며느리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아들 루이 9세와 궁정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려는 블랑카의 의도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마르가리타가 파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의 가족과 시종들을 돌려보냈으며, 아들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을 제한하려 했다. 장 드 주앵빌의 기록에 따르면, 블랑카는 마르가리타가 출산할 때 방에 들어와 루이 9세에게 자리를 뜨라고 요구했고, 이로 인해 마르가리타가 충격을 받아 기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앵빌은 또한 블랑카가 루이 9세와 마르가리타가 잠자리를 함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같이 있는 것을 꺼렸다고 기록했다.[3]
2. 4. 루이 8세 사후 섭정 (1차)
1226년 11월 남편 루이 8세가 이질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1] 당시 38세였던 블랑카는 어린 아들들의 섭정이자 후견인이 되었다. 그녀가 낳은 열두 명 혹은 열세 명의 자녀 중 여섯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왕위를 계승한 루이 9세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루이 8세가 남부 귀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어린 왕의 즉위는 카페 왕조의 권력 기반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블랑카는 루이 8세가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랭스에서 루이 9세의 대관식을 치르고, 주저하는 귀족들에게 새로운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요했다. 또한 왕국의 안정을 위해 부빈 전투 이후 포로로 잡혀 있던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를 석방하고, 루이 8세의 이복동생인 필리프 위르풀에게 토지와 성을 양도하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피에르 모클레르를 비롯한 일부 강력한 귀족들은 어린 왕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대관식 직후 파리 남쪽으로 이동하던 블랑카와 루이 9세는 반란 귀족들에게 붙잡힐 뻔했으나, 블랑카가 파리 시민들에게 국왕 보호를 호소하여 위기를 넘겼다. 시민들은 길가에 늘어서서 모자의 안전한 귀환을 도왔다.
블랑카는 샹파뉴의 테오발트 4세(훗날 나바라의 테오발도 1세)와 교황 특사 로마노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조직했다. 갑작스러운 왕실 군대의 등장은 반란 귀족들을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으나, 블랑카는 이후에도 반란 귀족들과 헨리 3세에 맞서 카페 왕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 더 군대를 일으켜야 했다. 특히 1229년 겨울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혹한 속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모클레르를 공격했고, 그가 국왕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병사들과 함께 추위를 견디며 땔감을 모으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강력한 통치 방식 때문에 적들은 그녀를 《로망 드 레나르》에 등장하는 탐욕스러운 늑대에 빗대어 "데임 에르상트(Dame Hersent프랑스어)"라고 부르기도 했다.[1] 또한 샹파뉴 백작 티보 4세가 그녀에게 열정적인 시를 헌정한 일로 인해 '방탕하다'는 중상을 받기도 했다.
1229년, 블랑카는 파리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이 조약으로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는 루이 9세에게 복종했으며, 그의 딸이자 유일한 상속녀인 조안을 블랑카의 아들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툴루즈 백작령은 결국 카페 왕가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또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정복했던 남부 프랑스 영토가 프랑스 왕실에 귀속되었으며, 길었던 알비 십자군도 사실상 종결됐다.
블랑카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헨리 3세가 프랑스 내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견제했다. 헨리 3세가 브르타뉴의 욜랑드(모클레르의 딸)와 결혼하려 하자, 블랑카는 모클레르를 압박하여 욜랑드를 자신의 아들 장(Jean)과 약혼시켰다. 또한 헨리 3세가 퐁티외 여백작 조안과 약혼했을 때는 교황청에 근친상간을 이유로 결혼 반대 로비를 펼쳐 결국 무산시켰다.
1230년, 헨리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했다. 블랑카는 푸아투 지역에 대한 왕실의 영향력을 일부 양보하면서까지 잉글랜드 왕대비 앙굴렘의 이사벨라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뤼지냥의 위그 10세가 잉글랜드 측에 가담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피에르 모클레르는 헨리 3세의 편에 서서 브르타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3세는 기사 275명과 상당수의 용병을 이끌고 브르타뉴에 상륙하여[2] 초기에는 순조롭게 작전을 진행하는 듯했다. 반면 블랑카의 군대는 봉건적 의무 복무 기간인 40일이 지나자 많은 병사들이 이탈했고,[2] 필리프 위르풀마저 왕실군을 떠나 샹파뉴를 공격하는 등[2] 위기를 맞았다. 블랑카는 필리프 위르풀을 막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켜야 했고, 그 사이 헨리 3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프랑스 남서부로 진격했다.[2]
하지만 헨리 3세는 노르망디의 반란 귀족들과 합류하는 대신, 켄트 백작 허버트 드 부르의 조언을 따라 푸아투로 방향을 틀었다.[2] 이는 전략적 실수로 평가되는데, 당시 푸아투 지역은 블랑카가 라 마르슈 백작 위그 10세와 투아르 자작 레이몽 1세 등 주요 영주들에게 선물을 보내 회유한 덕분에 프랑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2] 헨리 3세는 미라보를 포위하고 보르도까지 진격했지만,[2] 프랑스 왕실군의 주력이 샹파뉴 지역의 반란 진압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2] 아키텐 지역은 실질적인 위협에 놓이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헨리 3세는 막대한 군자금만 낭비하고[2] 별다른 소득 없이 브르타뉴로 돌아가 남은 돈을 연회에 탕진한 후 잉글랜드로 철수했다.[2] 이 침공은 큰 인명 피해 없이 끝났지만 헨리 3세는 군자금과 명성을 모두 잃는 실패를 겪었다.[2]
헨리 3세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프랑스 내 반란 세력을 약화시켰고, 블랑카와 루이 9세의 통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헨리 3세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피에르 모클레르의 반란도 결국 힘을 잃어, 1234년에는 루이 9세에게 확고한 지지를 보내게 됐다. 이처럼 루이 9세는 어린 시절 왕국의 안정을 어머니 블랑카에게 크게 빚졌으며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2. 5. 루이 9세의 친정과 섭정 (2차)
루이 9세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지만, 어머니 블랑카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루이 9세는 왕국의 통치를 어머니에게 크게 의존했으며,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녀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1] 블랑카는 정치와 궁정 문제 전반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고, 루이 9세는 어머니에게 어떤 것도 숨기지 않았다. 당시 궁정에서는 감히 여왕 모후 블랑카를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다.1234년, 루이 9세는 프로방스 백작 라몽 베렝게 4세의 딸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블랑카는 아름다움과 신앙심으로 유명했던 프로방스 백작의 딸들을 며느릿감으로 점찍었고, 이는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포함된 결정이었다. 그러나 블랑카는 며느리 마르가리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는 아들 루이 9세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블랑카는 마르가리타가 파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의 가족과 시종들을 돌려보냈으며, 가능한 한 아들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려 했다. 장 드 주앵빌은 마르가리타가 출산할 때 블랑카가 방에 들어와 루이 9세에게 "여기서 할 일이 없으니 어서 가라"고 말하며 내보냈고, 이 말에 마르가리타가 충격을 받아 기절했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주앵빌은 또한 블랑카가 루이 9세와 마르가리타가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
1239년, 프랑스 내에서 반유대주의가 심화되자 블랑카는 유대인들에 대한 공정한 심리를 요구했다. 그녀는 국왕의 법정에서 열린 공식적인 토론을 주재했으며, 탈무드 소각을 주장하는 루이 9세와 달리 유대인 측을 대변한 랍비 파리의 예치엘에게 신변 보호를 약속하기도 했다.
1248년, 루이 9세가 제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블랑카는 다시 한번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의 십자군 참전을 강력히 반대했었지만, 섭정으로서 왕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동방에 있는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십자군 원정이 재앙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도 인력과 자금을 보내 아들을 도왔다.
1252년 11월, 블랑카는 멜룅에서 병을 얻어 파리로 옮겨졌으나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자신이 설립한 모뷔송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루이 9세는 다음 해 봄에 어머니의 부고를 전해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이틀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2. 6. 죽음
1248년, 아들 루이 9세가 제7차 십자군에 참전하자 블랑카는 다시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이 십자군 원정을 강력히 반대했었다. 십자군이 실패로 돌아가자, 블랑카는 동방에 있는 아들을 돕기 위해 백성과 재정을 지원하며 프랑스의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1252년 11월, 멜룅에서 병을 얻은 그녀는 파리로 옮겨졌으나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블랑카는 자신이 세운 모뷔송 수도원에 묻혔다. 루이 9세는 다음 해 봄에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틀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3. 자녀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블랑슈 | 1205년 | 1206년경[5] | 어려서 사망 |
아녜스 | 1207년 | 1207년경 | 어려서 사망 |
필리프 | 1209년 9월 9일 | 1218년 7월 이전 | 1215년 7월 동지 아녜스와 약혼 |
알퐁스 | 1213년 1월 26일 | 1213년 1월 26일 | 장의 쌍둥이. 로레즈르보카주에서 출생 및 사망. |
장 | 1213년 1월 26일 | 1213년 1월 26일 | 알퐁스의 쌍둥이. 로레즈르보카주에서 출생 및 사망. |
루이 9세 | 1214년 4월 25일 | 1270년 8월 25일 | 프랑스의 국왕. 푸아시 출생, 튀니스에서 사망. |
로베르 | 1216년 9월 25일 | 1250년 2월 9일 | 아르투아 백작. 이집트 만수라 전투에서 사망. |
필리프 | 1218년 2월 20일 | 1220년[6] | |
장 | 1219년 7월 21일 | 1232년 | 앙주 백작 및 메인 백작. 1227년 3월 브르타뉴의 욜랑드와 약혼. |
알퐁스 | 1220년 11월 11일 | 1271년 8월 21일 | 푸아투 백작 및 오베르뉴 백작, 결혼을 통해 툴루즈 백작. 푸아시 출생, 코르네토에서 사망. |
필리프 다고베르 | 1222년 2월 20일 | 1234년[7] | |
이사벨 | 1224년 3월[8] | 1270년 2월 23일 | |
에티엔 | 1225년 말[9] | 1227년 초[10] | |
샤를 | 1226년 말/1227년 초 | 1285년 1월 7일 | 앙주 백작 및 메인 백작, 결혼을 통해 프로방스 백작 및 포르칼키에 백작, 시칠리아 국왕. |
4. 평가와 유산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본문 생략)
4. 1. 긍정적 평가
남편 루이 8세가 1226년 11월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블랑카는 어린 아들 루이 9세를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당시 루이 9세는 12세에 불과했고, 카페 왕조의 왕권은 남부 귀족들의 불완전한 복종 등으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1]블랑카는 루이 8세 사망 한 달 만에 랭스에서 아들의 대관식을 신속하게 거행하고,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내며 왕위를 공고히 했다. 이러한 빠른 조치는 왕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플랑드르 백작 페르디난트와 같이 부빈 전투 이후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던 인물들을 석방하고, 불로뉴 백작 필리프 1세에게 영지를 양도하는 등[1] 정치적 안정을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피에르 모클레르를 비롯한 일부 강력한 귀족들이 어린 왕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블랑카는 샹파뉴의 테오발트 1세와 교황 특사 로마노 보나벤투라 등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고 직접 이끌며 위협에 맞섰다. 특히 1229년 겨울,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모클레르를 공격하여 복종을 받아내는 등[1]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한 반란 귀족들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했을 때 파리 시민들에게 국왕의 보호를 호소하여 지지를 얻기도 했다.
1229년 파리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알비 십자군을 종식시키고 툴루즈 백작 레몽 7세의 복종을 받아냈다. 이 조약을 통해 툴루즈 백작령이 결국 왕실 영지로 편입될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는 프랑스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가 프랑스 영토를 노리고 결혼 동맹이나 직접적인 침공(1230년)을 시도했을 때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헨리 3세가 브르타뉴의 욜랑드나 퐁티외 여백작 조안과의 결혼을 통해 프랑스 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을 때, 블랑카는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막아냈다. 1230년 헨리 3세의 프랑스 침공 당시, 일부 귀족들의 이탈 등[2] 초기에는 어려움도 있었으나, 블랑카는 앙굴렘의 이사벨라와 뤼지냥의 위그 10세 등 주요 인물들을 프랑스 측에 묶어두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결국 헨리 3세는 별다른 군사적 성과 없이 막대한 비용만 소모하고 퇴각했으며,[2] 이는 블랑카와 루이 9세의 통치 기반을 더욱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234년에는 아들 루이 9세와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의 결혼을 성사시켜 프로방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툴루즈를 견제하는 등 전략적인 면모를 보였다.
1239년에는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의 위협 속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공정한 심리를 요구했으며, 탈무드 공개 토론 당시 유대인 측을 대변한 랍비 파리의 예치엘과 그의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등[3]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공정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성 루이라고 불리는 루이 9세가 안정적으로 왕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블랑카의 헌신적인 노력과 정치적 역량 덕분이었으며, 루이 9세는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4. 2. 부정적 평가
모든 사람이 블랑슈의 행정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적들은 그녀를 Dame Hersent|데임 에르상트프랑스어(로망 드 레나르에 나오는 늑대)라고 부르며 비난했다.[1] 이는 그녀의 강력한 통치 방식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별명이었다.블랑슈는 며느리인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는 블랑슈가 아들 루이 9세에게 행사하던 강한 영향력과 통제욕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결혼식에 참석했던 며느리의 가족과 하인들을 돌려보내는 등, 새로운 왕비가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경계했다.[3] 당시 궁정에서는 블랑슈가 여전히 아름다움으로 주목받았으며, 샹파뉴 백작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시를 썼고, 1230년에는 로마노 보나벤투라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3] 새로운 왕비 마르가리타가 남편인 루이 9세와 궁정의 관심을 받게 되자, 블랑슈는 가능한 한 아들 부부를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역사가 장 드 주앵빌은 마르가리타 왕비가 출산할 때 블랑슈가 방에 들어와 아들에게 "여기서 할 일 없으니 어서 가시오"라고 말하며 내보냈고, 이 때문에 마르가리타가 충격을 받아 기절할 뻔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주앵빌은 블랑슈가 루이 9세와 마르가리타가 함께 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으며,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만남을 방해했다고 전했다.[3] 이러한 기록들은 블랑슈가 아들과 궁정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 했으며, 이로 인해 며느리와 갈등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4. 3. 유산
성 루이는 그의 왕국을 어머니에게 빚졌으며,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1][2] 블랑카는 루이 9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을 때 강력한 섭정으로서 왕국의 안정을 지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피에르 모클레르를 비롯한 주요 귀족들의 반란[1]과 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침공(1230년)[2]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카페 왕조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특히 1229년 파리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알비 조 십자군을 종결시키고 툴루즈 지역에 대한 왕실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1] 이러한 정치적, 군사적 성공은 루이 9세 통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블랑카는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된 다양한 서적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책들 중 일부는 그녀의 아들들을 위한 교육 도구로 사용되었다. ''Le Miroir de l'Ame프랑스어''이라는 책은 블랑카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책은 여왕들에게 일상생활에서 기독교적 덕목을 엄격하게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자녀들의 교육을 직접 감독했으며, 모든 자녀가 라틴어를 공부하도록 했다. 또한 그들 모두에게 기독교 도덕 수업을 고집했다. 이러한 교육의 영향으로 아들 루이와 유일하게 생존한 딸 이자벨은 모두 훗날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샹송 ''Amours ou trop tard me suis pris프랑스어''는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문으로, 종종 블랑카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5. 대중문화
블랑카 데 카스티야는 15세기 프랑수아 빌롱의 시 옛 시절의 여인들의 발라드에 등장하며, 역사와 신화 속의 다른 유명한 여성들과 함께 언급된다. 블랑카가 루이의 신부로 선택되어 프랑스로 여행한 사실은 엘리자베스 채드윅의 ''The Autumn Throne''과 E. L. 코닉스버그의 ''A Proud Taste for Scarlet and Miniver''에 언급되어 있다.
블랑카와 앙굴렘의 이사벨라는 진 플레이디의 소설 ''The Battle of the Queens''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네의 길''에서 코타르 박사와 브리쇼에 의해 폄하되는 방식으로 잠시 언급된다.
블랑카는 셰리 존스의 소설 ''Four Sisters, All Queens''의 핵심 등장인물이며, 이 소설은 그녀의 며느리인 프로방스의 마가렛과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 그리고 그들의 자매인 프로방스의 산차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에 초점을 맞춘다. 블랑카는 피오나 에이버리의 소설 ''The Crown Rose''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며, 이 소설은 그녀의 딸인 성 이사벨라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블랑카는 또한 아담 기드위츠가 쓴 픽션 중학년 소설 ''The Inquisitor's Tale''의 주요 적대자이다.
블랑카의 약혼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셰익스피어 역사극 ''존 왕''에 묘사되어 있다.
블랑카 데 카스티야의 이미지는 2008 시즌부터 프랑스 럭비 유니온 팀 스타드 프랑세의 홈 유니폼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프랑스 요식업자 노엘 코르뷔는 블랑카 데 카스티야가 19세기 말 베랑제 소니에르에 의해 발견된 렌-르-샤토에 보물을 숨겼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후 피에르 플랑타르가 시온 수도회 신화를 발전시키는 데 활용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lanche of Castile, queen of France", ''Epistolae'', Columbia University
https://web.archive.[...]
2011-09-06
[2]
서적
English Rule in Gascony, 1199–1295: With Special References to the Towns
https://books.google[...]
G. Wahr
1912
[3]
서적
The History of Saint Louis
New York Press
1938
[4]
서적
Amours ou trop tard me suis pris : chanson mariale
https://www.worldcat[...]
OCLC
2021-09-10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서적
The Battle of the Queens
Arrow Books
[12]
서적
"Swann's Way: In Search of Lost Time, Vol. 1"
"Penguin Classics; Revised edition"
[13]
서적
Four Sisters, All Queens
Gallery Books
[14]
웹사이트
Shakespeare's Bad King John Makes Good
http://www.shakespea[...]
2019-07-2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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