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텔스바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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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텔스바흐가는 12세기부터 1918년까지 바이에른을 통치한 유럽의 유서 깊은 왕가이다. 이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그리스 왕, 스웨덴 왕 등을 배출했으며, 메라니아 공작, 바이에른 공작, 라인 팔츠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쾰른 대주교 등을 역임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1918년 독일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바이에른 왕국이 멸망하면서 통치를 잃었지만, 현재까지도 가문의 후손들이 존재하며, 님펜부르크 궁전 등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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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스바흐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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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가문명 | 비텔스바흐 가문 |
독일어 표기 | Haus Wittelsbach |
국가 | 바이에른 독일 그리스 칼마르 동맹 |
창건 | 11세기 |
설립자 | 오토 1세 (샤이에른 백작) |
마지막 통치자 |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 |
폐위일 | 1918년 11월 7일 |
현재 수장 | 프란츠 폰 바이에른 |
민족 | 독일계 |
통치 | |
작위 | 바이에른 공작 바이에른 선제후 바이에른 국왕 팔츠 선제후 쾰른 선제후 로마인의 황제 로마인의 왕 덴마크의 왕 스웨덴의 왕 노르웨이의 왕 그리스 국왕 |
분가 | |
바이에른 분가 | (절멸) |
팔츠 분가 | (존속) |
뢰벤슈타인 분가 | (모계, 존속) |
2. 역사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바이에른의 팔츠 궁정백인 비텔스바흐 가의 오토에게 바이에른 공국을 증여하면서 비텔스바흐 왕가가 시작되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하기도 했으며, 그리스 독립 시 런던 회의에서 루트비히 1세의 차남인 오톤을 그리스의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그리스의 국왕도 배출했다.
역사적으로 비텔스바흐 가문의 일원들은 다양한 지역을 통치했다.
통치 지역 | 기간 |
---|---|
메라니아 공작 | 1153년 ~ 1180/82년 |
바이에른 공작, 선제후, 왕 | 1180년 ~ 1918년 |
라인 팔츠 백작 | 1214년 ~ 1803년, 1816년 ~ 1918년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 1323년 ~ 1373년 |
홀란트 백국, 에노 백국, 젤란트 백국 | 1345년 ~ 1433년 |
쾰른 선제후-대주교 | 1583년 ~ 1761년 |
율리히 공국 및 베르크 공국 | 1614년 ~ 1794/1806년 |
스웨덴의 왕 | 1441년 ~ 1448년, 1654년 ~ 1720년 |
브레멘-페르덴 공국 | 1654년 ~ 1719년 |
이 가문은 또한 두 명의 신성 로마 황제(루트비히 4세, 카를 7세), 한 명의 로마 왕(독일의 루페르트), 두 명의 보헤미아 반(反)왕, 한 명의 헝가리 왕, 한 명의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 그리고 한 명의 그리스 왕을 배출했다.
1253년 오토 2세 공작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은 비텔스바흐 소유지를 나누어 가졌다. 하인리히는 하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상 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 궁정 백작이 되었다. 1340년 하인리히의 분가가 단절되자 루트비히 2세 공작의 아들인 황제 루트비히 4세가 공국을 재통합했다.
1329년 파비아 조약에 따라 비텔스바흐 가문은 두 분가로 갈라졌다. 황제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 상팔츠를 포함한 팔츠를 그의 형제 루돌프의 후손에게 양도했다. 루돌프 1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맏이(팔츠) 계통의 조상이 되었고, 1777년 젊은(바이에른) 계통, 즉 루트비히 4세의 후손이 단절된 후 바이에른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전하자, 비텔스바흐의 바이에른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1918년 11월 12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3세는 아니프 선언을 발표하여 군인과 관료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제하고 바이에른에서 비텔스바흐가의 738년 통치를 종식시켰다.[4]
왕국 멸망 후, 국가와 가문의 자산 분할 과정에서 1923년 타협을 통해 ''비텔스바흐 보상 기금''(Wittelsbacher Ausgleichsfonds)이 설립되었다.[1]
현재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은 프란츠 폰 바이에른 (프란시스 오브 바이에른)이다.
2. 1. 가문의 기원과 초기 발전
셰이에른 백작 오토 1세가 1072년에 사망하자 그의 셋째 아들 셰이에른 백작 오토 2세가 아이하흐 근처의 비텔스바흐 성을 획득했다.[1] 1119년, 셰이에른 백작들은 셰이에른 성 (940년경 건설)을 떠나 비텔스바흐 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셰이에른 성은 수도사들에게 주어져 셰이에른 수도원이 설립되었다.[1] 셰이에른 백작 가문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루이트폴딩 왕조의 후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메라니아 공작 콘라트 1세는 오토 1세의 증손자로, 1153년 메라니아 공작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콘라트 2세가 작위를 계승했다. 메라니아 공작령은 비텔스바흐 가문이 최초로 소유한 공작령이었다 (1180/82년까지).[1]
셰이에른 백작 에크하르트 1세는 오토 1세의 장남으로, 비텔스바흐 백작 오토 4세(1156년 사망)의 아버지였다. 오토 4세는 최초로 비텔스바흐 백작 칭호를 사용한 인물이다.[1] 그의 아들 바이에른 공작 오토 1세는 사자공 하인리히가 몰락한 후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하사받아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최초의 바이에른 통치자가 되었다.[1] 오토 1세의 아들 바이에른 공작 루이 1세는 1214년 팔츠 선제후국을 획득했다.[1]
2. 2. 중세 시대의 확장과 분열
1356년 금인칙서를 통해 팔츠 백작은 선제후의 지위를 부여받아 팔츠 백국은 선제후령 팔츠가 되었다. 1410년 비텔스바흐 왕 독일의 루퍼트가 사망한 후, 팔츠 영토는 ''노이마르크트'', ''짐머른'', ''츠바이브뤼켄'', ''비르켄펠트'', ''노이부르크'', ''술츠바흐'' 등 여러 방계로 분열되기 시작했다.[1]1559년 팔츠 방계의 선대 방계가 단절되자 선제후령은 ''짐머른''의 프리드리히 3세에게 넘어갔고, 팔츠는 유럽 칼뱅주의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1]
1619년, 개신교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지만, 가톨릭교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에게 패배했다. 그 결과, 1623년 상부 팔츠는 바이에른 방계에 양도되어야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되면서 라인 팔츠 백작을 위해 새로운 선제후령이 추가로 창설되었다.[1]

1685년, ''짐머른'' 가문이 단절되자 가톨릭교도 ''노이부르크''의 필리프 빌헬름이 팔츠를 상속받았다. 요한 빌헬름(1690–1716) 통치 기간 동안 선제후의 거처는 베르크의 뒤셀도르프로 옮겨졌다. 그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는 1718년 팔츠의 수도를 하이델베르크로 다시 옮겼고, 1720년에는 만하임으로 옮겼다.[1]
1742년 ''노이부르크'' 방계가 단절된 후, 팔츠는 ''팔츠-술츠바흐'' 방계의 공작 카를 테오도어가 상속받았다. 1777년 바이에른 방계가 단절된 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을 거쳐 팔츠-술츠바흐 방계는 카를 테오도어 아래에서 바이에른을 계승했다.[1]
1799년 카를 테오도어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과 팔츠의 모든 비텔스바흐 영토는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방계의 일원인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아래에서 재통합되었다.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1806년 1월 1일 왕으로서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지위를 얻었다.[1]
2. 3. 근세 시대의 번영과 종교 개혁
바이에른군은 호엔린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패배에 관여했고,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장군은 다시 뮌헨을 점령했다. 뤼네빌 조약(1801년 2월 9일)에 따라 바이에른은 팔라티네이트, 츠바이브뤼켄 공국, 율리히 공국을 잃었다. 오스트리아 궁정의 야심을 감안하여, 몽젤라스 총리는 바이에른의 이익이 프랑스 공화국과의 동맹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망설임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고, 1805년 8월 24일 프랑스와 별도의 평화 및 동맹 조약이 파리에서 체결되었다.[3]프랑스 제1 제국 나폴레옹 황제와 프란츠 2세 (신성 로마 황제) 황제 사이의 1805년 프레스부르크 평화 조약(현 브라티슬라바)은 아우스터리츠 전투(12월 2일)에서 프랑스가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상대로 승리한 결과로, 막시밀리안이 바이에른을 왕국으로 승격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1806년 1월 1일에 스스로 왕을 선포했다. 바이에른이 1806년 8월 1일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하여 라인 연방에 가입할 때까지 왕은 선제후로 봉사했다. 베르크 공국은 1806년에 나폴레옹에게 양도되었다.[3]

1814~15년 빈 회의는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 확장을 가져왔다. 베르크 공국은 상실되었지만, 이전에는 여러 주교-영주가 통치했던 프랑켄 지역 대부분과, 다양한 제후와 교회 제후에 속했던 슈바벤의 일부가 바이에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두 지역 모두에서 이전에 자유 제국 도시였던 많은 도시들도 왕국에 통합되었다. 이전에 심하게 분열되었던 팔라티네이트 영토는 정돈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동했다. 오스트리아와의 남쪽 경계에 있는 작고 주로 교회 영토도 추가되었다. 이로써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하는 바이에른의 국경이 재정의되었고, 주의 크기는 3분의 1 이상 증가했다.[3]
막시밀리안의 후손 아래에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에 이어 독일에서 세 번째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독일 제국이 1871년에 형성되었을 때,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다음으로 제국의 두 번째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비텔스바흐가는 1918-1919년 독일 혁명까지 바이에른의 왕으로 통치했다. 1918년 11월 12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3세는 오스트리아의 아니프 궁전에서 ''아니프 선언''(독일어: ''Anifer Erklärung'')을 발표하여[3] 군인과 관료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제하고 바이에른에서 비텔스바흐가의 738년 통치를 종식시켰다.[4]
2. 4. 바이에른 왕국과 독일 통일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바이에른의 팔츠 궁정백인 비텔스바흐 가의 오토에게 바이에른 공국을 증여하면서 비텔스바흐 왕가가 시작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하기도 했으며, 그리스 독립 시 런던 회의에서 루트비히 1세의 차남인 오톤을 그리스의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그리스의 국왕도 배출했다. 1918년,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자, 비텔스바흐의 바이에른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오토 2세 공작이 1253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은 비텔스바흐 소유지를 나누어 가졌다. 하인리히는 하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상 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 궁정 백작이 되었다. 1340년 하인리히의 분가가 단절되자 루트비히 2세 공작의 아들인 황제 루트비히 4세가 공국을 재통합했다.
이 가문은 두 명의 신성 로마 황제를 배출했다. 루트비히 4세(1314-1347)와 카를 7세(1742-1745)는 모두 바이에른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팔츠 가문의 일원인 독일의 루페르트 (1400-1410)는 독일 왕을 배출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1329년 파비아 조약에 따라 두 분가로 갈라졌다. 황제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 상팔츠를 포함한 팔츠를 그의 형제인 루돌프의 후손인 루돌프 2세, 루페르트 1세 및 루페르트 2세에게 양도했다. 루돌프 1세는 이렇게 해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맏이(팔츠) 계통의 조상이 되었고, 1777년 젊은(바이에른) 계통, 즉 루트비히 4세의 후손이 단절된 후 바이에른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2. 5. 제1차 세계 대전과 왕조의 몰락
1918년,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왕국은 막을 내렸다. 왕국이 멸망한 후, 국가와 가문의 자산을 분할하는 과정에서 1923년 양측은 타협을 통해 ''비텔스바흐 보상 기금''(Wittelsbacher Ausgleichsfonds)을 설립했다.[1]2. 6. 나치 시대와 현재
프란츠 폰 바이에른 (프란시스 오브 바이에른)이 현재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이다.왕국 멸망 후, 국가와 가문의 자산 분할 과정에서 1923년 타협을 통해 ''비텔스바흐 보상 기금''(Wittelsbacher Ausgleichsfonds)이 설립되었다.[1] 전 황태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에 의해 ''비텔스바흐 예술 및 과학 국가 재단''이 설립되었다.[1] ''비텔스바흐 국가 재단''은 1804년 이전에 비텔스바흐 가문이 수집한 미술 보물을 받았으며, 이후 뮌헨의 고대 및 고전 미술관 소장품의 상당 부분을 소유했지만 관리하지는 않았다.[1] 한편, 비교적 최근의 미술 컬렉션은 보상 기금으로 귀속되었으며, 여기에는 이전의 ''비텔스바흐 가문 재산 기금''의 대부분의 자산이 1923년에 이전되었다.[1] 여기에는 미술 보물과 컬렉션 (특히 루트비히 1세 바이에른의 미술 컬렉션, 현재 대부분 알테 피나코테크, 노이에 피나코테크, 그리고 뮌헨의 글립토테크에 소장), ''비밀 가문 기록 보관소''(현재 바이에른 주립 기록 보관소의 부서) 및 이전 왕실 성 베르크, 호엔슈반가우(바이에른 왕 박물관 포함), 베르히테스가덴, 그리고 그뤼나우 사냥 별장이 포함되었다.[1]
비텔스바흐 가문의 각 수장은 ''비텔스바흐 보상 기금''의 최대 8명의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를 임명한다.[1] 또한 그는 ''비텔스바흐 예술 및 과학 국가 재단''의 3명의 이사 중 1명을 임명하며, 다른 두 명은 바이에른 문화부의 대표와 후자가 임명한 박물관 전문가이다.[1] ''비텔스바흐 국가 재단''에 속한 문화재는 약 13,500점인 반면, 다른 43,000점은 ''비텔스바흐 보상 기금''의 소유이며, 주로 피나코테크와 같은 박물관과 컬렉션에 전시되어 있다.[1]
이전 바이에른 왕가는 ''비텔스바흐 보상 기금''의 수익금에서 연간 약 1400만유로를 지급받으며, 이 기금은 농업 및 임업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주요 수입원은 뮌헨의 도시 부동산이다.[1] 가문의 각 수장은 그 분배 및 사용에 대해 결정한다.[1] 그는 언급된 성에 거주할 권리가 있다.[1] 알브레히트는 1949년부터 1996년 사망할 때까지 베르크 궁전에 거주했으며, 그의 아들인 프란츠는 주로 그에게 제공된 님펜부르크 궁전의 별관을 사용한다.[1] 비텔스바흐 가문의 행정 또한 그곳에 기반을 두고 있다.[1]
비텔스바흐 가문의 개인 자산에는 테게른제 수도원, 프라스도르프 근처의 빌덴바르트, 슈타른베르크 근처의 로이투슈테텐 및 칼텐베르크 성과 12500ha 면적의 농업 토지 및 임업, 부동산 및 산업 지분이 포함된다.[1] 여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중요해진 두 개의 양조장이 포함된다: 테게른제 공작 바이에른 양조장과 쾨니히 루드비히 슐로스브라우어리.[1] 2011년부터 님펜부르크 도자기 공장 또한 가문의 구성원이 소유하고 있다.[1]
가문의 수장은 또한 비텔스바흐 가문 훈장, 무염시태 옹호를 위한 성 게오르기우스 왕실 훈장, 성 후베르투스 훈장, 테레사 훈장의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하다.[1]
프란츠 공작은 아버지의 전통을 이어받아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대규모 연례 리셉션을 열어 만찬을 열었다.[1] 주로는 바뀌는 약 1,500명의 손님들이 정치, 지방 자치 단체, 교회 및 과학, 예술 및 의학계, 친구 및 친척으로부터 초청받았다.[1] 그는 또한 그에게 중요한 특정 주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베르히테스가덴 성에 소규모의 변화하는 손님 그룹을 초대한다.[1] 그의 80세 생일 파티는 2013년 뮌헨 근처의 슐라이스하임 궁전에서 열렸다.[1] 이 파티에는 당시 바이에른 주 총리인 호르스트 제호퍼를 포함한 2,500명의 손님이 참석했다.[1]
수많은 바이에른의 명예직과 여러 문화 및 과학 기관 외에도 프란츠는 또한 수년 동안 라인란트팔츠 주에 있는 ''슈파이어 황제 대성당을 위한 유럽 재단''의 회원이었으며, 그의 동생 막스 에마누엘 인 바이에른 공작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1] 이를 통해 비텔스바흐 가문은 여전히 이전 주요 영토 중 하나인 선제후 팔라티네이트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
3. 분가
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팔츠 백작은 선제후 지위를 얻어 선제후령 팔츠가 되었다. 팔츠 방계 군주들은 마인츠, 트리어 등 제국 주교직을 맡았다.[1]
1410년 독일의 루퍼트 사후, 팔츠 영토는 ''노이마르크트'', ''짐머른'', ''츠바이브뤼켄'', ''비르켄펠트'', ''노이부르크'', ''술츠바흐'' 등으로 분열되었다.[1]
팔츠 방계 ''노이부르크'' 분가는 1614년부터 율리히 공국, 베르크를 소유했다. 1609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 공작 사후 율리히 계승 전쟁이 발발, 1614년 크산텐 조약으로 ''노이부르크''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으로 분할되었다. 율리히와 베르크는 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에게 돌아갔다.[1]
''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팔츠'' 가문은 브레멘-페르덴 공국 (1654–1719)을 통치했다.[1]
1799년 카를 테오도어 사후 바이에른과 팔츠의 비텔스바흐 영토는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방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아래 재통합되었다.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막시밀리안 요제프), ''팔츠-비르켄펠트-겔른하우젠''(윌리엄) 두 방계가 남았다.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바이에른 선제후, 윌리엄은 바이에른 ''의'' 공작 지위를 받았다.[1]
3. 1. 바이에른 계열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계열은 1777년 단절될 때까지 바이에른 공국을 다스렸다.
루트비히 4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1323), 티롤 백국(1342), 홀란트 백국, 젤란트 백국, 에노 백국(1345)을 가문을 위해 획득했지만, 1329년 상팔츠를 비텔스바흐의 팔츠 방계에 넘겨주었다. 1347년 그의 여섯 아들이 바이에른 공작, 홀란트 및 에노 백작위를 계승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마인하르트 사후 섀딩 조약으로 티롤을 잃었고, 1369년 합스부르크 가문에 티롤을 넘겨주었다. 1373년, 브란덴부르크의 마지막 비텔스바흐 섭정 오토는 룩셈부르크 가문에 브란덴부르크를 넘겼다. 1404년 알브레히트 사후, 그의 맏아들 빌헬름이 네덜란드에서 그 뒤를 이었다. 그의 아들 요한 3세는 리에주 주교구의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1417년 빌헬름의 죽음으로 요한과 빌헬름의 딸 자클린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 고리와 대구 전쟁은 1433년 백작령을 부르고뉴에 넘겨주는 것으로 끝났다.
1340년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을 재통일했지만, 1349년부터 바이에른은 루트비히 4세의 후손들 사이에 분할되어 바이에른-란츠후트, 바이에른-슈트라우빙, 바이에른-잉골슈타트, 바이에른-뮌헨 방계가 만들어졌다. 란츠후트 왕위 계승 전쟁으로 1505년 바이에른은 '바이에른-뮌헨' 방계 아래 팔츠 방계에 대항하여 재통일되었다.
1549년부터 1567년까지 비텔스바흐는 보헤미아의 클라츠코 백국을 소유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바이에른 공작들은 독일 반종교개혁의 지도자였다.[5] 1583년부터 1761년까지 왕조의 바이에른 방계는 선제후와 쾰른 대주교를 배출했고, 리에주 주교구(1581–1763)를 포함한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주교를 배출했다. 비텔스바흐 공들은 레겐스부르크 주교구, 프라이징, 뮌스터 주교구, 힐데스하임 주교구, 파더보른 주교구, 오스나브뤼크 주교구의 주교, 독일 기사단의 대사령관으로도 봉사했다.
1623년 막시밀리안 1세 치하에서 바이에른 공작들은 선제후 지위를 얻었고,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되었다. 그의 손자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1692–1706), 룩셈부르크 공작(1712–1714)으로도 봉사했다. 그의 아들 카를 7세는 보헤미아 왕위(1741–1743)를 주장했다. 카를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죽음으로 1777년 바이에른 방계는 단절되었다.
3. 1. 1. 바이에른 공작 (1180-1623)
1180년 오토 1세가 바이에른 공작이 된 후, 1918년까지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오토 2세 사후 바이에른은 오버바이에른과 니더바이에른으로 나뉘었다.[3] 1340년 루트비히 4세가 이 지역을 통합했지만, 그의 사후 바이에른은 다시 3개의 공작령으로 분할되었다.[3] 1506년, 장자상속원칙에 따라 바이에른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3]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오토 1세 | 1180년-1183년 | |
루트비히 1세 | 1183년-1231년 | |
오토 2세 | 1231년-1253년 | |
하인리히 1세 | 1253년-1290년 | 니더바이에른 |
오토 3세 | 1290년-1312년 | 니더바이에른 |
하인리히 14세, 오토 4세, 하인리히 15세 | 1312년-1339년 | 니더바이에른 |
요한 1세 | 1339년-1340년 | 니더바이에른 |
루트비히 2세 | 1253년-1294년 | 오버바이에른 |
루돌프 1세 | 1294년-1317년 | 오버바이에른 |
루트비히 4세 | ?-1347년 | 오버바이에른, 1328년 이후 니더바이에른 통합 |
빌헬름 1세 | 1347년-1388년 | |
알브레히트 1세, 알브레히트 2세 | 1347년-1404년 | |
빌헬름 2세 | 1404년-1417년 | |
요한 3세 | 1404년-1425년 | |
루트비히 5세 | 1347년-1351년 | |
루트비히 6세 | 1351년-1365년 | |
오토 5세 | 1365년-1371년 | |
메인하르트 | ||
슈테판 2세 | 1347년-1375년 | |
슈테판 3세 | 1375년-1413년 | |
루트비히 7세 | 1413년-1443년 | |
루트비히 8세 | 1443년-1445년 | |
프리드리히 | 1375년-1393년 | |
하인리히 16세 | 1393년-1450년 | |
루트비히 9세 | 1450년-1479년 | |
게오르크 | 1479년-1503년 | |
요한 2세 | 1375년-1397년 | |
에른스트 | 1397년-1438년 | |
빌헬름 3세 | 1397년-1435년 | |
아돌프 | 1435년-1441년 | |
알브레히트 3세 | 1438년-1460년 | |
요한 4세 | 1460년-1463년 | |
지크문트 | 1463년-1467년 | |
알브레히트 4세 | 1465년-1508년 | 1506년 바이에른 재통합 |
빌헬름 4세 | 1508년-1550년 | |
알브레히트 5세 | 1550년-1579년 | |
빌헬름 5세 | 1579년-1597년 | |
막시밀리안 1세 | 1597년-1623년 | 1623년부터 선제후 |
3. 1. 2. 바이에른 선제후 (1623-1806)
1597년부터 1651년까지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막시밀리안 1세는 1623년 바이에른 선제후가 되었다. 비텔스바흐 왕가는 1623년부터 1806년까지 바이에른 선제후를 지냈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을 왕국으로 승격시켰고, 1806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막시밀리안 1세 (1597년-1651년)
- 페르디난트 마리아 (1651년-1679년)
-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1679년-1726년)
- 카를 알브레히트 (1726년-1742년)
- 카를 7세 알베르트 (1742년-1745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바이에른은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바이에른 왕국은 상당한 영토 확장을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바이에른의 국경이 재정의되었다.
3. 1. 3. 바이에른 국왕 (1806-1918)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었다.[1]이름 | 재위 기간 |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 1805년-1825년[1] |
루트비히 1세 | 1825년-1848년[1] |
막시밀리안 2세 | 1848년-1864년[1] |
루트비히 2세 | 1864년-1886년[1] |
오토 | 1886년-1913년[1] |
루트비히 3세 | 1913년-1918년[1]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전하자, 비텔스바흐 왕가의 바이에른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1]
3. 2. 팔츠 계열
1356년 금인칙서를 통해 팔츠 백작은 선제후 지위를 부여받아 선제후령 팔츠가 되었다. 팔츠 방계 군주들은 마인츠와 트리어의 선제후 대주교 등 제국 주교직을 맡았다.1410년 독일의 루퍼트 왕 사후, 팔츠 영토는 ''노이마르크트'', ''짐머른'', ''츠바이브뤼켄'', ''비르켄펠트'', ''노이부르크'', ''술츠바흐'' 등으로 분열되었다. 1559년 팔츠 방계 선대 가문이 단절되자, 선제후령은 칼뱅주의자인 ''짐머른''의 프리드리히 3세에게 넘어가 네덜란드 반란과 프랑스 종교 전쟁에서 칼뱅주의 반란을 지원했다.
1614년부터 팔츠 방계 ''노이부르크'' 분가는 율리히 공국과 베르크를 소유했다. 1609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 공작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율리히 계승 전쟁이 발발, 1614년 크산텐 조약으로 ''노이부르크''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으로 분할되었다. 율리히와 베르크는 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에게 넘어갔다.
1619년, 개신교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 왕이 되었으나, 가톨릭교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에게 패배했다. 1623년 상부 팔츠는 제국 궁재 지위와 함께 바이에른 방계에 양도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되면서 라인 팔츠 백작을 위한 새로운 선제후령과 제국 대재무관 직위가 생겨났다. 프리드리히 아들 라인 공 루퍼트는 망명 중 영국에서 명성을 얻었다.
''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팔츠'' 가문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서 브레멘-페르덴 공국 (1654–1719)을 통치했다.
1685년 ''짐머른'' 가문 단절 후, 가톨릭교도 ''노이부르크''의 필리프 빌헬름이 팔츠를 상속받고 율리히와 베르크 공작이 되었다. 요한 빌헬름 (1690–1716) 통치 기간 동안 선제후 거처는 뒤셀도르프로 옮겨졌다.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는 1718년 수도를 하이델베르크로, 1720년 만하임으로 옮겼다. 1742년 1월 17일, 카를 필리프는 비텔스바흐 왕조 연합 강화를 위해 손녀들을 팔츠-술츠바흐의 카를 테오도어와 클레멘트와 결혼시켰다. 1742년 제국 선거에서 카를 3세 필리프는 바이에른 사촌 카를 알베르트에게 투표했다. 1742년 ''노이부르크'' 방계 단절 후, 팔츠는 ''팔츠-술츠바흐'' 방계 카를 테오도어가 상속받았다.
1777년 바이에른 방계 단절 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을 거쳐 팔츠-술츠바흐 방계 카를 테오도어가 바이에른을 계승했다.
1799년 카를 테오도어 사망으로 바이에른과 팔츠의 모든 비텔스바흐 영토는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방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아래 재통합되었다.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막시밀리안 요제프)와 ''팔츠-비르켄펠트-겔른하우젠''(윌리엄) 두 방계가 남았다.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바이에른 선제후, 윌리엄은 바이에른 ''의'' 공작 지위를 받았다. 1506년 장자 상속 확립으로 바이에른 통치 공작은 한 명만 존재했기에 바이에른의 공작 형태가 선택되었다.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1806년 1월 1일 왕이 되었고, 바이에른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할 때까지(1806년 8월 1일) 선제후로 봉사했다.
3. 2. 1. 라인 궁정백 (1214-1803)
1214년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가 라인 궁중백이 된 후, 1777년까지 약 560년 동안 비텔스바흐 가문이 라인 궁정백을 통치했다.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선제후 중 하나로 정식 지정되었으며, 이후 팔츠 선제후로 불렸다. 1329년 이후 바이에른 공작 가문과 팔츠 선제후 가문으로 분리되었지만,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필리프 테오도르가 바이에른 선제후를 계승하면서 재통합되었고, 동시에 팔츠의 선제후위는 소멸되었다.[3] [4]역대 군주는 '''라인 궁중백'''을 참조하면 된다.
3. 3. 기타 분가
1410년 비텔스바흐 왕 독일의 루퍼트가 사망한 후, 팔츠 영토는 ''노이마르크트'', ''짐머른'', ''츠바이브뤼켄'', ''비르켄펠트'', ''노이부르크'', ''술츠바흐'' 가문 등으로 분열되었다.[1]팔츠 방계의 ''노이부르크'' 분가는 1614년부터 율리히 공국과 베르크를 소유했다.[1] 1609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의 마지막 공작이 직계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율리히 계승 전쟁이 발발했고, 1614년 크산텐 조약으로 종결되어 공국은 ''노이부르크''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사이에서 분할되었다.[1] 율리히와 베르크는 비텔스바흐 팔츠 백작 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에게 넘어갔다.[1]
''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팔츠'' 가문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서 브레멘-페르덴 공국 (1654–1719)을 동시에 통치했다.[1]
1799년 카를 테오도어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과 팔츠의 모든 비텔스바흐 영토는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방계의 일원인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아래에서 재통합되었다.[1] 당시 비텔스바흐 가문에는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수장인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와 팔츠 백작 윌리엄이 수장인 ''팔츠-비르켄펠트-겔른하우젠''의 두 방계가 남아 있었다.[1]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카를 테오도어의 바이에른 선제후 지위를 상속받았고, 윌리엄은 바이에른 ''의'' 공작이라는 지위로 보상받았다.[1]
4. 주요 인물
주요 인물 | ||
---|---|---|
구분 | 이름 | 비고 |
신성 로마 제국 및 유럽 왕가 | 루트비히 4세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314–1347) |
바이에른의 이사보 | 프랑스 왕비 (1370–1435) | |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 보헤미아 왕 (1596–1632) | |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바이에른 선제후 (1662–1726) | |
스웨덴의 칼 12세 | 스웨덴 왕 (1682–1718) | |
카를 7세 | 신성 로마 황제 (1742–1745) | |
오톤 | 그리스 왕 (1815–1867) | |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 바이에른 왕 (1845–1886) | |
기타 주요 인물 | 프리드리히 1세, 팔츠 선제후 | (1451–1476) |
프리드리히 3세, 팔츠 선제후 | (1559–1576) | |
카를 1세 루이, 팔츠 선제후 | (1648–1680) | |
라인의 루퍼트 공 | (1619–1682) | |
팔츠의 조피 | (1630–1714), 프리드리히 5세의 딸, 영국 왕위 계승자, 조지 1세의 어머니 |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공녀 | (1652–1722) | |
요한 빌헬름, 팔츠 선제후 | (1690–1718), 그의 아내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 |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1세 | (1825–1848) | |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 (1805–1872),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 (1837–1898) ("시시"), 오스트리아 황후 | |
마리 조피 | (1841–1925), 두 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여왕 |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 (1876–1965), 벨기에의 알베르 1세의 왕비 | |
리히텐슈타인의 조피 세습 공녀 | 1967년생 | |
이자보 드 바비에르 | (1369년 - 1435년) - 프랑스 왕샤를 6세의 왕비 | |
사비나 | (1492년 - 1564년) - 뷔르템베르크 공작울리히의 왕비 | |
루퍼트 오브 더 라인 | (1619년 - 1682년) - 컴벌랜드 공작 | |
조피 폰 데어 팔츠 | (1630년 - 1714년) - 하노버 선제후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왕비 | |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 | (1655년 - 1720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레오폴트 1세의 황후 | |
마리 조피(마리아 소피아) | (1666년 - 1699년) - 포르투갈 왕페드루 2세의 왕비 | |
마리 안나(마리아나) | (1667년 - 1740년) - 스페인 왕카를로스 2세의 왕비 | |
도로테아 조피(도로테아 소피아) | (1670년 - 1748년) - 파르마 공작의 아들 오도아르도 2세의 왕비, 후에 파르마 공작 프란체스코의 왕비 | |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드 바이에른 | (1652년 - 1722년) -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1세의 왕비 | |
마리 안 드 바이에른 | (1660년 - 1690년) - 프랑스 왕세자루이 (그랑 도팽)의 왕비 | |
요제프 페르디난트 | (1692년 - 1699년) - 스페인 왕위 계승자, 아스투리아스 공 | |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 (1700년 - 1761년) - 쾰른 대주교 | |
마리아 요제파 | (1739년 - 1767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요제프 2세의 황후 | |
아우구스테 | (1788년 - 1851년)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외젠 드 보아르네의 왕비 | |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 (1792년 - 1873년) - 뷔르템베르크 왕빌헬름 1세의 왕비,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프란츠 1세의 황후 | |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 (1801년 - 1873년) - 프로이센 왕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왕비 | |
아말리에 아우구스테 | (1801년 - 1877년) - 작센 왕요한의 왕비 | |
조피 | (1805년 - 1872년) -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의 왕비 | |
루이트폴트 | (1821년 - 1912년) - 바이에른 섭정 | |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외게니 | (1837년 - 1898년) - 오스트리아 황제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 |
마리 소피(마리아 소피아) | (1841년 - 1925년) - 양시칠리아 왕 프란체스코 2세의 왕비 | |
엘리자베트 드 바이에른 | (1876년 - 1965년) - 벨기에 국왕알베르 1세의 왕비 |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의 부계 가계는 다음과 같다.
번호 | 이름 | 출생-사망 |
---|---|---|
1 | 페그니츠의 하인리히 1세 백작 | 1000–1043 |
2 | 샤이에른의 오토 1세 백작 | 1020–1072 |
3 | 샤이에른의 에크하르트 1세 백작 | 1044-1088 |
4 | 비텔스바흐의 오토 4세 백작 | 1083–1156 |
5 | 바이에른 공작 오토 1세 | 1117–1183 |
6 | 바이에른 공작 루이 1세 | 1173–1231 |
7 | 바이에른의 오토 2세 비텔스바흐 공작 | 1206–1253 |
8 | 바이에른 공작 루이 2세 | 1229–1294 |
9 | 바이에른의 루돌프 1세 공작 | 1274–1319 |
10 | 라인 궁정 백작 아돌프 | 1300–1327 |
11 | 팔츠 선제후 루페르트 2세 | 1325–1398 |
12 | 독일의 루페르트 | 1352–1410 |
13 | 짐머른-츠바이브뤼켄 팔츠 백작 슈테판 | 1385–1459 |
14 | 츠바이브뤼켄 팔츠 백작 루이 1세 | 1424–1489 |
15 | 츠바이브뤼켄 팔츠 백작 알렉산더 | 1462–1514 |
16 | 츠바이브뤼켄 팔츠 백작 루이 2세 | 1502–1532 |
17 | 츠바이브뤼켄 팔츠 백작 볼프강 | 1526–1569 |
18 | 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팔츠 백작 카를 1세 | 1560–1600 |
19 | 비르켄펠트-비슈바일러 팔츠 백작 크리스티안 1세 | 1598–1654 |
20 | 츠바이브뤼켄 팔츠 백작 크리스티안 2세 | 1637–1717 |
21 | 츠바이브뤼켄 팔츠 백작 크리스티안 3세 | 1674–1735 |
22 | 츠바이브뤼켄의 팔츠 백작 프리드리히 미하엘 | 1724–1767 |
23 |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 1756–1825 |
24 |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 | 1786–1868 |
25 | 바이에른 섭정왕자 루이트폴트 | 1821–1912 |
26 |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3세 | 1845–1921 |
27 | 바이에른의 루프레히트 왕세자 | 1869–1955 |
28 |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 1905–1996 |
29 |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 | 1933년 출생 |
5.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군주
초상화 | 이름 | 통치 기간 | 비고 |
---|---|---|---|
-- | 루트비히 4세 | 1314년 - 1347년 | 신성 로마 황제. 바이에른 공작, 라인 궁정백. |
-- | 루프레히트 | 1352년 - 1410년 | 독일 왕, 팔츠 선제후. |
-- | 카를 7세 | 1742년 - 1745년 | 신성 로마 황제, 바이에른 선제후. |
-- | 오톤 | 1832년 - 1862년 | 그리스 왕. |
![]() | 크리스토퍼 | 1440년 - 1448년 |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 |
-- | 칼 10세 | 1654년 - 1660년 | 스웨덴의 왕. |
![]() | 칼 11세 | 1660년 - 1697년 | 스웨덴의 왕. |
-- | 칼 12세 | 1697년 - 1718년 | 스웨덴의 왕. |
-- | 울리카 엘레오노라 | 1718년 - 1720년 | 스웨덴의 여왕. |
-- | 오토 3세 | 1305년 - 1308년 | 헝가리 왕 (벨러 5세). |
-- | 프리드리히 5세 | 1619년 - 1620년 | 보헤미아 왕. |
이 가문은 메라니아 공작 (1153–1180/82), 바이에른 공작, 선제후, 왕 (1180–1918), 라인 팔츠 백작 (1214–1803 및 1816–1918),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1323–1373), 홀란트 백국, 에노 백국, 젤란트 백국 (1345–1433), 쾰른 선제후-대주교 (1583–1761), 율리히 공국 및 베르크 공국 (1614–1794/1806), 스웨덴의 왕 (1441–1448 및 1654–1720), 브레멘-페르덴 공국 (1654–1719)의 군주로 통치했다.[3]
1623년 바이에른 공국은 바이에른 선제후국으로 승격되었으며,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1815년 팔츠의 대부분은 바덴 대공국에 합병되었고, 나머지는 라인 구가 되었다.[3]
1329년 파비아 조약에 따라 비텔스바흐 가문은 두 분가로 갈라졌다. 황제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 상팔츠를 포함한 팔츠를 그의 형제 루돌프의 후손에게 양도했다.[3] 루돌프 1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맏이(팔츠) 계통의 조상이 되었고, 1777년 젊은(바이에른) 계통, 즉 루트비히 4세의 후손이 단절된 후 바이에른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3]
바이에른 방계는 1777년 단절될 때까지 바이에른 공국을 유지했다.[3]
팔츠 방계는 1777년 바이에른을 계승하면서 1918년까지 팔츠를 유지했다. 1356년 금인칙서를 통해 팔츠 백작은 선제후 지위를 부여받았고, 선제후령 팔츠가 되었다.[3]
1799년 카를 테오도어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과 팔츠의 모든 비텔스바흐 영토는 팔츠-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방계의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아래에서 재통합되었다.[3]
6. 문화유산
비텔스바흐 왕가는 1180년부터 1918년까지 바이에른을, 1214년부터 1805년까지 팔츠 선제후국을 통치했으며, 두 국가 모두에서 벨프 가문의 통치자를 계승했다. 바이에른 공국은 1623년 바이에른 선제후국으로 승격되었으며,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1815년 팔츠의 대다수는 바덴 대공국에 합병되었고, 나머지는 라인 구가 되었다.
1253년 오토 2세 공작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은 비텔스바흐 소유지를 나누어 가졌다. 하인리히는 하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상 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 궁정 백작이 되었다. 1340년 하인리히의 분가가 단절되자 루트비히 2세 공작의 아들인 황제 루트비히 4세가 공국을 재통합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신성 로마 황제 두 명을 배출했다. 루트비히 4세(1314-1347)와 카를 7세(1742-1745)는 모두 바이에른 가문 출신이었으며, 팔츠 가문 출신인 독일의 루페르트 (1400-1410)는 독일 왕을 배출했다.
1329년 파비아 조약에 따라 비텔스바흐 가문은 두 분가로 갈라졌다. 황제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 상팔츠를 포함한 팔츠를 그의 형제인 루돌프의 후손인 루돌프 2세, 루페르트 1세, 루페르트 2세에게 양도했다. 루돌프 1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맏이(팔츠) 계통의 조상이 되었고, 1777년 젊은(바이에른) 계통, 즉 루트비히 4세의 후손이 단절된 후 바이에른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루트비히 4세의 노력으로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공국, 팔츠 선제후국, 티롤 백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홀란트 백국, 젤란트 백국, 에노 백국을 통제했다. 이는 이전의 황실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잘리어 왕조, 오토 왕조, 카롤링거 왕조처럼 제국을 지배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 비텔스바흐 가문은 합스부르크와 특히 룩셈부르크에게 제국 정치에서 밀려났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공국에서, 룩셈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조밀하고 광대한 소유지를 가지고 있어 동쪽으로 확장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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