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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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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산 해미읍성은 충청남도 서산시에 위치한 조선 시대 읍성이다. 1417년(태종 17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되어 1421년(세종 3년)에 완공되었으며,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1651년(효종 2년)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해미현의 관아가 들어서면서 행정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순신이 군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1914년 일제강점기에 해미군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읍성은 폐지되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대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는 역사 문화 체험 축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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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해미읍성
다른 이름해미읍성
위치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면적194,102.24 m2
좌표북위 36° 42′ 46″ 동경 126° 32′ 55″
일반 정보
종류읍성
축조 시기조선 시대
지정1963년 1월 21일
상세 정보
건설자조선 시대
재료
상태양호
관리서산시
공개 여부공개

2. 지명 유래

해미라는 지명은 1407년(조선 태종 7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치면서 정해현에서 '해'(海) 자를 따고 여미현에서 '미'(美) 자를 가져와 해미(海美)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유래되었다.[4][5] 고려 시대에 충청남도 서산시 지역은 정해현, 여미현, 부성현, 지곡현이라는 4개 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에 정해현은 현재의 서산시 해미면 지역에 해당된다. 왕건이 통일전쟁 중에 한씨 성을 가진 몽웅역의 관리가 운주 전투에서 승리하며 나라에 큰 공을 세우자 그에게 대광(大匡) 벼슬을 주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분할하여 정해현을 설치하여 그의 관향으로 삼게 하였다.[6]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으로, 757년(경덕왕 16) 이름을 여읍(餘邑)으로 변경되었다가 고려 초 다시 여미(餘美)라 바뀌었다. 이 두 지역이 합쳐지면서 해미현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1895년(고종 32) 행정 구역 개편 시 해미현이 해미군으로 변경되었다.[5]

3. 역사

조선 왕조 시대에 건축된 읍성 중 성벽 등의 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한국에 현존하는 성의 유적 대부분이 산성인 가운데, 평지에 만들어진 성이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1]

1417년(태종 17년)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이 시작되어 1421년(세종 3년)에 완성되었다. 원래 이름은 해미내상성이었으며, 충청도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주둔하였다. 1651년(효종 2년), 병마절도사는 청주로 이전하고 해미현의 관청(현아)이 이전해 오면서 해미읍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호서좌영으로서 지방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1914년 군의 통폐합으로 해미군은 서산군에 통합되었고, 성 안은 시가지화되어 사무소, 초등학교, 민가 등이 들어섰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대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옛 동헌, 객사, 내아 등을 복원했다.


  • 연도별 주요 사건

연도사건
1417년(태종 17년)축성 시작
1421년(세종 3년)축성 완료. 이후 230여 년 동안 종2품의 병마절도사가 주둔
1651년(효종 2년)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 해미현 관아가 이전해 와 해미읍성이 됨.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배치되고, 호서좌영으로 명칭 변경
1914년일제강점기, 해미군이 서산군에 통합, 읍성은 폐지
1963년 1월 21일사적 제116호로 지정


3. 1. 축성 및 군사적 역할

1417년(태종 17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421년(세종 3년)에 완성되었다. 원래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으며,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주둔하였다. 세조 때에 군사 제도가 진관체제로 개편되면서도 충청도 지역의 주요 군사 거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순신1578년(선조 12년)에 병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다.[1]

1651년(효종 2년)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해미읍성이 되고,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배치되며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호서 지방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으며, '해미읍성'이라는 명칭은 이때 개명된 것이다.[1]

3. 2. 행정 중심지 역할

1651년(효종 2년),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고, 해미현의 관청(현아)이 이전해 오면서 해미읍성으로 불리게 되었다.[1] 이 성은 호서좌영으로서 지방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1]

근대에 들어서도 행정 관청이 계속 있었지만, 일제강점기1914년 군의 통폐합으로 해미군은 서산군에 통합되었다.[1] 이후 성 안은 시가지화되어 사무소, 초등학교, 민가 등이 들어섰다.[1]

3. 3. 일제강점기와 읍성 폐지

일제강점기 1914년 군현제 폐지와 함께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읍성은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관아 건물을 면사무소로, 객사를 학교로 사용했으며 청허정을 신사(神社)로 만들었다.[7] 성 안은 시가지화되어 사무소, 초등학교, 민가 등이 들어섰다.

3. 4. 문화재 지정과 복원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다.[7] 1970년대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성 안에 있던 건물들을 철거하고 옛 동헌, 객사, 내아 등을 복원하였다. 2000년대부터 정비 공사가 시작되어 성 안의 동헌, 객사, 내아 등을 정비하였고, 2004년부터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2014년 8월 17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방문하여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앞에서 열린 해미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였으며,[8][9]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주례하였다.

3. 5. 해미읍성과 천주교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천주교도라는 모함을 받아 해미읍으로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비호로 10일 만에 유배가 해제되어 돌아갔다.[10] 1801년 순조 때 신유박해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는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병인양요, 1868년 남영군 분묘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조선 후기 충청도 서북 지역(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와 치안을 함께 관장하던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11] 따라서 해당 지역의 천주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다. 당시 처형된 천주교인들은 무려 1,000여 명 이상이었다고 전한다.[7]

조선 왕조 시대에는 3천여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한국 천주교 참조), 순교의 성지 중 하나로 여겨진다.

3. 6. 이순신의 부임

이순신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고 권관,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세 번째 관직으로 1579년(선조 12년)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에서 10개월 간 근무하였다.[12][1] 당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공은 구차하게 낮고 고달픈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고 남을 따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상관인 주장에게 부정한 사실이 있으면 극진히 말하며, 이를 바로 잡았고, 청렴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면서 털끝만큼도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4. 구조

해미읍성은 총길이가 1800m, 성벽 높이는 5m이다.[7] 성벽 밖에는 2m 깊이의 해자를 팠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삼년산성 등이 산에 쌓은 산성이라면, 진주성, 공산성, 사비성은 강을 낀 산에 건설되었는데, 해미읍성은 평지에 타원형으로 지은 것이 특징으로 대략 달걀 모양과 비슷하다.

항목내용
성벽의 전체 길이1800m
성벽의 높이5m
넓이약 59,000평
해자성벽 밖 깊이 2m의 해자


5. 시설


  • 관아문은 해미읍성 호서좌영 관아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 형식의 건물이다. 아래층 3칸에 문을 달아 통행하고 상층은 누각으로 만든 전형적인 관아문 형식이며, 남쪽 정가운데 있어 일명 진남문으로 불린다.[1]
  • 옥사는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되었으며,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 투옥하였다.[1]
  • 객사는 관찰사 등 귀빈이 숙박하던 곳이고, 동헌은 지방 관아로 해미읍을 관할하던 관아이다.[1]
  • 책실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며 현감의 자제가 거처하던 곳이다.[1]
  • 청허정은 읍성 내 정자로 휴게실 용도로 쓰였다.[1]
  • 민속가옥은 옥사 동쪽에 있으며, 조선시대 부농, 서리(말단 관리), 상인의 집을 재현하였다.[1]
  • 회화나무는 일명 호야나무라고 불리며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72호로,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진다.[1]
  • 해미읍성에서는 조선시대 서산을 주제로 한 역사 문화 축제가 열린다. 성내에는 자연 생태 공원, 승마장, 상점, 음식점, 국궁과 씨름을 포함한 여러 시설이 있다.[1]
  • 내아는 수령이 기거하던 곳이다.[1]

6. 운영 시간

하절기에는 05:00부터 21:00까지, 동절기에는 06:00부터 19:00까지 운영한다.

7.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

서산시에서는 매년 10월에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를 개최한다.[1]

참조

[1] 서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비평사 1993
[2] 지식백과 해미읍성 네이버 지식백과 1995
[3] 웹사이트 서산 해미읍성 축제 http://www.haemifest[...]
[4] 지식백과 정미면 네이버 지식백과 2010-02
[5] 웹사이트 해미현 http://seosan.grandc[...] 디지털서산문화대전
[6] 문헌 고려사 권56 지10 홍주 정해현조
[7] 서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비평사 1993
[8] 뉴스 교황방한, 17일 해미성지, 아시아 주교·청년 만난다. http://view.asiae.co[...] 아시아경제 2014-08-16
[9] 뉴스 프란치스코 교황 비 뚫고 해미순교성지 방문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14-08-17
[10] 웹사이트 정약용 (1762~1836) https://maria.cathol[...] Good News 카톨릭사건
[11] 웹사이트 자유로운 신앙을 위한 외침, 해미순교성지 http://www.grandcult[...]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2] 웹사이트 서산 해미읍성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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