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시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마시아는 흑해와 아나톨리아 사이에 위치한 터키의 도시로, 고대에는 폰투스 왕국의 수도였으며, 험준한 계곡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여 오랫동안 중요한 요새 역할을 했다. 스트라보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 이곳 출신이며, 폰투스 왕들의 무덤 등 다양한 유적지가 남아있다. 1919년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계획을 논의하고, 터키 독립 전쟁을 선포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사과 생산지로 유명하며, 관광 산업이 주요 수입원이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그리스어 이름 Ἀμάσεια는 이곳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아마조네스의 여왕 아마시스에서 유래했다. 이 이름은 역사를 통틀어 거의 변하지 않았다. Ἀμάσεια, ''Amaseia'', ''Amassia'', ''Amasia''는 모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주화에서 발견되며 현대 그리스어에서도 계속 사용된다. 아르메니아어 Ամասիա, 오스만 튀르크어 اماسیه, 그리고 현대 터키어 ''Amasya''는 모두 같은 발음을 나타낸다. 도시의 이름은 이 지역에 거주했다고 여겨지는 아마존족 여왕 아마시스(Αμασίς/Amasis)에서 유래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아마세이아'(Αμάσεια/Amaseia)에서 아마시아(Amassia), 아마시아(Amasia)로 변화했고, 터키인의 침입 이후 '아마스야'(Amasya)가 되었다.
아마시아는 험준한 계곡에 위치하여 방어에 유리하고 산악 요새로서 뛰어났기 때문에 오랜 역사 동안 중요하게 여겨졌다.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아마시아는 흑해와 내륙 아나톨리아 사이에 위치하며, 테르사칸( Tersakantr ), 체케레크( Çekerektr ), 예실으르막 강( Yeşilırmaktr )이 관개하는 지역에 있다. 아마시아는 거의 수직 절벽과 카닉(Canik) 및 폰투스 산맥의 높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좁은 강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산악 지대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발 고도가 높지 않아 기후가 온화하다.
아마시아는 쾨펜 기후 분류에 따르면 열대성 여름 지중해성 기후(Csa)에 속하고, 트레워사 기후 분류에 따르면 더운 여름 해양성 기후(Doa)에 속한다.
아마시아 주는 질 좋고 풍미 있는 사과로 유명하며, 아마시아-토카트 지역이 주요 생산지이다. 이 도시는 산업적으로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강가에 자리 잡고 있어 매력적이며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겨울 저녁 안개가 계곡을 채울 때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광객과 지역 기지의 군인들은 상인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다. 시바스에서 삼순으로 가는 철도가 아마시아를 지나가며, 오스만 시대의 매력적인 기차역이 있다.
아마시아의 경제는 관광 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관광객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2011년 50만 명(외국인 1만 1천 명), 2012년 60만 명(외국인 2만 2천 명), 2013년 75만 명을 기록했으며, 2014년에는 1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외국인 관광객은 주로 독일인과 동아시아인(특히 일본과 한국인)이다. 이러한 관광객 증가에 따라 부티크 호텔을 중심으로 많은 호텔이 문을 열고 있으며, 전통적인 오스만 양식의 목조 주택들이 부티크 호텔, 카페, 바로 복원되어 사용되고 있다.
터키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고전적인 동양 민담은 아마시아에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근처의 페르하트 산은 전설의 주인공인 페르하드(터키어 표기 Ferhat)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공주 시린(터키어 표기 Şirin)에 대한 사랑으로 그녀의 아버지의 허락을 얻기 위해 산을 뚫어 궁전으로 샘물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슬프게도, 그가 작업 중일 때 시린이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받았고, 그는 슬픔에 잠겨 바위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공주도 곧 죽었다.[1] 이 이야기는 나짐 히크메트의 희곡, 탈립 아파이딘의 소설, 그리고 아리프 멜리코프의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아마시아 지역은 품질이 좋고 향이 좋은 작은 사과 생산으로 유명하다. 또한 담배와 양귀비도 재배된다. 그 외에 광업, 직물업, 시멘트 제조업 등이 활발하지만, 아마시아는 부유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관광이 주요 수입원이다.[1] 시바스에서 삼순으로 향하는 철도가 아마시아를 통과하며, 오스만 제국 시대의 기차역이 남아 있다.[1]
2. 지명의 유래
3. 역사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마시아에는 기원전 5500년경 히타이트인이 처음 정착했고, 그 후 프리기아인, 킴메리아인, 리디아인,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했다.[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기원전 4세기 말, 페르시아계 미트리다테스 왕조에 의해 아마시아를 수도로 하는 독립적인 폰투스 왕국이 건설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잠시 동안 아나톨리아에서 로마의 패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기원전 70년 로마 장군 루쿨루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아마세이아가 아르메니아로부터 점령되었고, 곧 비티니아와 폰투스의 새로운 속주 행정 중심지이자 자유 도시가 되었다.[4] 이 무렵 아마세이아는 사상가, 작가, 시인들이 거주하는 번영하는 도시였으며, 그중 한 명인 스트라보는 기원전 60년에서 기원후 19년 사이의 아마세이아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남겼다.[4]
로마 제국이 분열된 후, 이 도시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2013년에는 예배당 바닥에 속한 24제곱미터 크기의 기독교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는데, 사과, 사과나무, 메추라기, 그리고 많은 기하학적 무늬를 묘사하고 있다.[7]
1075년, 70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이 지배했던 아마시아는 오구즈족 계통의 튀르크멘인 다니슈멘드 왕조에 정복당했다.[8] 이후 셀주크 제국의 킬리지 아르슬란 2세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다니슈멘드 왕조의 수도였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일칸국에 지배를 받았다. 셀주크 제국과 일칸국의 지배하에 아마시아는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한 후, 메흐메드 1세는 아마시아로 도피했고, 이곳은 오스만 제국 왕조 간극기 동안 그의 주요 거주지이자 근거지가 되었다.[8][11] 그 결과,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8] 14세기 후반 메흐메드 2세부터 16세기 무라트 3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오스만 왕자들이 젊은 시절 아마시아 주(룸 에얄레트)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술레이만 1세는 종종 이 도시에 머물렀고, 심지어 합스부르크 왕가 대사 오지에르 기젤랭 드 부스벡을 이곳에서 만났다.[8]
1919년 아마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터키 군대 건설을 위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최종 계획 회의를 개최한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아마시아 선언에서 터키 독립 전쟁을 선포하였다.
3. 1. 고대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마시아에는 기원전 5500년경 히타이트인이 처음 정착했고, 그 후 프리기아인, 킴메리아인, 리디아인,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했다.[1]
3. 2.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기원전 4세기 말, 페르시아계 미트리다테스 왕조에 의해 아마시아를 수도로 하는 독립적인 폰투스 왕국이 건설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잠시 동안 아나톨리아에서 로마의 패권에 도전했다. 기원전 183년경 그리스인들이 아마시아에 정착했고, 기원전 333년부터 기원전 26년까지 폰투스 왕국의 수도였다. 오늘날에도 도시 중심부 강둑 위 암벽에 폰투스 왕들의 무덤을 포함한 중요한 유적이 남아 있다.[1]
3. 3. 로마-비잔티움 시대
기원전 70년 로마 장군 루쿨루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아마세이아가 아르메니아로부터 점령되었고, 곧 비티니아와 폰투스의 새로운 속주 행정 중심지이자 자유 도시가 되었다.[4] 이 무렵 아마세이아는 사상가, 작가, 시인들이 거주하는 번영하는 도시였으며, 그중 한 명인 스트라보는 기원전 60년에서 기원후 19년 사이의 아마세이아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남겼다.[4] 기원전 2년 또는 3년경에는 폰투스 갈라티쿠스 지역의 갈라티아 속주에 편입되었다.[4] 112년경에는 황제 트라야누스가 이 도시를 카파도키아 속주에 편입시켰다.[5] 후에 2세기에 들어와 '메트로폴리스'와 '제1도시'라는 칭호를 얻었다.[4]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로마 제국이 분열된 후, 이 도시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아마세이아는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많았다.
아마세이아는 알렉시아스 1권에도 언급되어 있다. 아마세이아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 황제가 투르크계 장군 투타흐로부터 노르만 장군 우르셀을 포로로 받은 도시이다. 책에 따르면, 우르셀은 비잔티움 제국의 동부 속주를 약탈했다. 당시 장군이었던 알렉시오스는 투타흐를 설득하여 우르셀을 사로잡았다. 알렉시오스는 우르셀을 사로잡는 대가로 "...이전에 누구도 얻지 못한 막대한 금액"을 투타흐에게 지불하겠다고 동의했지만, 알렉시오스에게는 현금이 없었고 황제는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마세이아 주민들에게서 돈을 모으려고 했지만, 이는 심각한 불안을 초래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의 연설 후, 그는 우르셀의 눈을 멀게 하는 시늉을 함으로써 주민들이 기금을 기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은 편향된 견해일 가능성이 크다.[6]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기독교 인물로는 전사 성인인 아마세이아의 테오도로스(319년 사망)와 그의 세련된 설교 일부가 남아 있는 지역 주교 아마세이아의 아스테리우스(약 410년 사망)가 있다.
2013년, 불법 발굴이 시도되었던 유적지 근처에서 예배당 바닥에 속한 24제곱미터 크기의 기독교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 이 모자이크는 사과, 사과나무, 메추라기, 그리고 많은 기하학적 무늬를 묘사하고 있다.[7]
아마시아는 3세기 이후로 특히 동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대주교 관구의 중심지가 되었다.[15] 로마 속주인 헬레노폰투스의 수도로서 대주교 관구가 되었으며, 아미수스, 안드라파, 유카이타이, 이보라, 시노프, 잘리케, 젤라(명목 주교좌)의 부속 주교구를 포함했다. 10세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의 대주교 관구 중 11위를 차지했다. 12세기부터 아나톨리아로의 튀르크계 유목민의 이동으로 인해 기독교 세력이 감소했다. 아마시아의 정교회 대주교 관구는 그리스와 터키 간 인구 교환(1923년)까지 활동했으며, 1922년에는 약 4만 명의 기독교인(그중 2만 명은 그리스어 사용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활동한 대주교는 게르마노스 카라반겔리스였다.[15]
더 이상 주교좌가 아닌 아마시아는 오늘날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교회 모두 명목 주교좌로 등재되어 있다.[17]
3. 4. 초기 튀르크 지배
1075년, 70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이 지배했던 아마시아는 오구즈족 계통의 튀르크멘인 다니슈멘드 왕조에 정복당했다.[8] 이후 셀주크 제국의 킬리지 아르슬란 2세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다니슈멘드 왕조의 수도였다. 킬리지 아르슬란 2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고, 아마시아는 니잠 앗딘 아르군 샤에게 넘어갔다. 그의 통치는 짧았는데, 그의 형인 룩누딘 술레이만 샤에게 빼앗겼고, 룩누딘 술레이만 샤는 이후 술탄이 되었다.[8]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일칸국에 지배를 받았으며, 마지막 셀주크 술탄인 메수드 2세의 아들인 타지 앗딘 알틴타시의 짧은 통치를 제외하고는 몽골 총독들이 통치했다.[8]
셀주크 제국과 일칸국의 지배하에 아마시아는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건립된 학교, 모스크, 묘 등의 건축물들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3. 5. 오스만 제국 시대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한 후, 메흐메드 1세는 아마시아로 도피했고, 이곳은 (근처 토카트와 함께) 오스만 제국 왕조 간극기 동안 그의 주요 거주지이자 근거지가 되었다.[8][11]
그 결과,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8] 14세기 후반 메흐메드 2세부터 15세기 바예지드 2세, 16세기 무라트 3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오스만 왕자들이 젊은 시절 아마시아 주(룸 에얄레트)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술레이만 1세는 종종 이 도시에 머물렀고, 심지어 합스부르크 왕가 대사 오지에르 기젤랭 드 부스벡을 이곳에서 만났다.[8] 이미 셀주크 시대부터 문화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던 아마시아는 "아나톨리아의 주요 학문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8]
1530년부터 1545년 사이에 여러 여행자들이 이 도시의 유대인들에 대한 혈서 사건을 기록했다.[12] 지역 기독교인 한 명이 실종된 후, 도시에 살던 여러 유대인들이 의식적인 이유로 그를 죽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고문을 받고 자백했으며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피해자로 여겨졌던 사람이 살아있는 것으로 밝혀지자, 술레이만 1세는 종교 의식과 관련된 모든 혐의는 지역 법원이 아닌 "왕실" 법원에서 심판해야 한다고 명령했다.[12] 1555년 아마시아는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와 아마시아 조약을 체결한 곳이다.
이 시대 아마시아의 인구는 오스만 제국의 다른 대부분의 도시와는 매우 달랐는데, 미래의 술탄들이 제국의 모든 나라에 대해 배우기 위한 훈련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제국의 모든 밀레트가 아마시아의 특정 마을에 대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마을, 아르메니아 마을, 보스니아 마을, 타타르 마을, 터키 마을 등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 도시에는 2만 5천~3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는데, 대부분 터키인이었지만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도 일부 있었다.[8] 아마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에게 병합된 이후, 역대 술탄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교육을 위해 아마시아로 보냈기 때문에 아마시아는 교육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미래의 통치자가 되기 위한 준비로, 술탄의 후계자들에게는 아마시아 통치자의 지위와 책임이 주어졌다. 14세기 말 바예지드 1세부터 16세기 무라트 3세에 이르기까지 미래의 술탄이 될 인물들은 어린 시절 아마시아에서 교육을 받고 아마시아를 통치하였다.
3. 6. 제1차 세계 대전과 터키 독립 전쟁
1919년 아마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터키 군대 건설을 위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최종 계획 회의를 개최한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아마시아 선언에서 터키 독립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선언은 터키 독립 전쟁을 시작으로 이끈 최초의 서면 문서로 간주된다. 아나톨리아 전역에 배포된 이 선언은 터키의 독립과 영토 보전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선언하고, 시바스에서 전국 회의(시바스 회의)를 개최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그 이전에 7월에 에르주룸에서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 대표들이 참여하는 예비 회의(에르주룸 회의)를 개최할 것을 촉구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과 터키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아마시아의 기독교 주민(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은 잔혹 행위를 당했다. 공격을 피해 도망친 많은 아르메니아 민간인들은 아마시아 외곽 메르지폰에 있는 미국 선교 학교인 아나톨리아 칼리지에 피난처를 찾았다. 1921년 터키군은 학교를 폐쇄했고, 현지 주민들은 그리스와 터키 간의 인구 교환 이후 테살로니키로 이주했다.[13] 또한 1921년에는 아마시아 재판이 있었는데, 이는 터키 민족 운동이 법적 구실 아래 폰투스 지역의 그리스 대표들을 죽이기 위해 조직한 특별 임시 재판이었다.[14]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직후 아마시아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와의 인구 교환으로 추방되었다. 대신 그리스에서 추방된 튀르키예인들이 왔다.
3. 7. 터키 공화국 시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후, 1919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군대를 설립하여 터키 공화국을 건국할 계획의 최종 회합을 아마시아에서 가졌다. 터키 독립 전쟁을 선포한 곳 또한 아마시아였다.[1]
터키 공화국 건국 직후 아마시아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와의 인구 교환으로 추방되었다.[1] 대신 그리스에서 추방된 터키인들이 왔다.[1]
4. 지리
강을 가로지르는 다섯 개의 다리가 있으며, 마을의 대부분은 강 남쪽 제방에 자리 잡고 강을 따라 펼쳐져 있다.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계곡 벽은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다. 마을은 강의 급격한 굽이를 따라 'V'자 모양을 하고 있다.
5. 기후
아마시아는 아나톨리아 중부보다 기온이 높고, 겨울철 날씨가 춥지 않다. 흑해의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최고 기온 기록은 2000년 7월 30일 45°C였고[24], 최저 기온 기록은 2008년 1월 15일 -21°C였다.[24]
6. 관광
아마시아는 주로 관광객을 위한 바와 카페, 기본적인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야간 유흥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다른 중앙 및 동부 아나톨리아 도시들과 달리 보수적이지 않으며, 관광 덕분에 여름철에 사회 생활이 활기차다. 많은 국제 서커스 단체들이 방문하며, 6월 12일은 아마시아의 축제일로, 다양한 문화 및 스포츠 행사가 열린다.
지역 특산 요리로는 요구르트가 들어간 수프인 ''토이가 초르바스''가 있으며, 뜨겁게 또는 차갑게 마실 수 있다. 강둑에서는 양귀비 씨앗이 들어간 페이스트리와 차를 맛볼 수 있다.
2008년부터 민간 항공편을 위한 공항이 운영 중이며, 이전에는 군사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다. 이스탄불을 오가는 1시간 소요의 항공편이 매일 운항된다.
관광객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1년에는 50만 명 중 외국인 관광객이 1만 1천 명이었고, 2012년에는 60만 명 중 2만 2천 명이었다. 2013년에는 총 75만 명이었으며, 2014년에는 1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외국인 관광객은 주로 독일인과 동아시아인, 특히 일본과 한국인이다. 이에 따라 부티크 호텔을 중심으로 많은 호텔들이 문을 열고 있으며, 전통적인 오스만 양식의 목조 주택들이 복원되어 부티크 호텔, 카페, 바로 활용되고 있다.
아마시아 성 유적에는 2000년 된 수로, 1000년 된 다리, 정신병원, 궁전, 비밀 지하 통로가 있다. 바위 절벽에는 바위 무덤들이 있어 도시의 매력을 더하며, 야간 조명이 켜졌을 때 특히 아름답다.
이 도시에는 역사적, 건축적으로 귀중한 건물들이 많다. 페르하트 수로, 13세기 셀주크 시대의 부르말리 사원, 15세기 쉴레이르임 바예지트 사원과 단지, 14세기 일칸 시대의 비마르하네 정신병원(정문 주변에 아름다운 부조가 있다), 독특한 팔각형 모양의 카피 아가 메드레세(신학교), 토룸타이 묘소, 괴크 메드레세 등이 있다. 잘 보존된 전통적인 터키 저택들은 터키 건축의 훌륭한 예시를 보여준다. 19세기 하제란라르 저택은 완벽하게 복원되어 1층에는 미술관, 2층에는 민속 박물관이 있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아마시아 고고학 박물관에는 일칸국 통치자들의 미라를 포함한 흥미로운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을 위 하르셰나 바위에는 테라스식 왕궁 유적과 폰투스 왕들의 무덤이 있다(야간 조명). 상태는 최상이 아니지만, 마을에서 보면 인상적이다. 아마시아 성 경사면에는 석회암 바위에 새겨진 5개의 무덤이 있는데, 건축과 위치 때문에 눈길을 끈다. 주변부는 본래 바위와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새겨져 있으며, 계단으로 다시 본래 바위와 연결된다. 총 18개의 바위 무덤이 있으며, 아마시아 출신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이 무덤들이 폰투스 왕들의 것이라고 기록했다.
아이나르 동굴(바위 무덤)은 시내 중심부에서 약 3km 떨어져 있으며, 지야렛 지역으로 가는 길에 있다. 다른 왕의 바위 무덤 중에서 가장 장식이 잘 되어 있고 완벽하게 보존된 무덤이다. 돔 부분에는 좌우 벽 각각에 12사도의 벽화가 6개씩 있다. 서쪽과 동쪽 벽에는 남녀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있고, 동쪽 벽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사도가 함께 있는 그림이 있다.
''하르셰네 칼레시''는 스트라본이 언급했고 중세 시대에 대부분 재건된 요새로, 마을 위 바위 위에 폐허로 남아 있다. 네르키스 지역에는 또 다른 성인 ''엔데룬 칼레시''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예실르막 강과 시내 중심부 서쪽의 하르셰네 산이라는 귀중한 바위 위에 있다. 성에는 벨키스, 사라이(궁전), 마이도노스, 메이단(광장) 등 네 개의 주요 문이 있다. 성에는 칠란볼루라는 우물이 있으며, 수혈과 지하 감옥도 있다. 성에서 강쪽으로 70미터 아래까지 내려가는 사다리식 지하 통로는 기원전 3세기 왕의 무덤으로 연결된다.
이 도시에는 페르하트 수로, 13세기 셀주크 시대의 부르말리 사원, 14세기 일칸국 시대의 비마르하네 정신병원(정문 주변에 아름다운 부조가 있다), 15세기 학자 피르 일리아스의 묘소, 15세기 쉴레이르임 바예지트 사원 등 역사적, 건축적으로 귀중한 건물들이 많다. 안타깝게도 아마시아는 지진에 취약하여 많은 기념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잘 보존된 오스만 시대 전통 터키 저택들은 터키 주택 건축의 훌륭한 예시이다. 19세기 ''하제란라르 코나으''는 신중하게 복원되어 작은 미술관과 민속 박물관이 있다. 다른 목조 주택들도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로 개조되고 있다. 하제란라르 저택은 야르 보유(강변 주택) 주택 시리즈 중 가장 아름다운 저택이며, 데프테르다르 하산 탈라트 에펜디가 1872년 여동생 하제란 하님을 위해 지은 오스만 시대의 가장 우아한 민간 건축물 중 하나이다.
아마시아 고고학 박물관에는 고대 여러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아마시아 일칸 통치자들의 미라도 포함되어 있다.
사라이뒤쥐 막사는 2009년에 재건되어 개관했다. 1919년 6월 12일 이 역사적인 건물에서 아마시아 원형 공고가 서명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타튀르크는 여기서 아마시아 원형 공고에 대해 서술했다. 오늘날 사라이뒤쥐 막사는 해방 전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회의, 모임, 연설 등에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컨벤션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야트르''라고 불리는 무슬림 성인들의 무덤은 치유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픈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은 근처 샘의 물을 마시고 공기를 마시기 위해 이곳에 온다.
페르하트 수로는 도시의 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헬레니즘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너비는 약 75m이고 길이는 18km이다.
보라바이 호수(타쇼바 지역의 아마시아 북동쪽 65km)는 멋진 경치와 신선한 공기를 자랑하는 분화구 호수이다. 낚시(특히 송어), 피크닉, 스포츠를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이다.
아마시아에서 당일치기 여행으로 갈 수 있는 다른 곳으로는 예디키르 저수지와 오마르차 국립공원이 있다.
테르지쾨이 온천은 아마시아 주에서 가장 중요한 온천 중 하나이며, 괴즐렉 온천, 하맘외쥐(아르쿳 베이) 온천, 일러수 온천도 아마시아의 다른 온천이다.
아마시아는 1999년 8월 11일에 있었던 20세기 마지막 개기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터키 도시 중 하나였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장관을 보기 위해 이 도시에 왔다. 2006년 3월 29일 오후 2시 6분(현지 시간)에 또 다른 개기일식이 이 도시에서 관측되었다.
7. 경제
아마시아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성채 유적에는 2000년 된 수로, 1000년 된 다리, 정신병원, 궁전, 비밀 지하 통로가 있으며, 바위 절벽에는 바위 무덤들이 있어 특히 야간 조명과 함께 도시의 매력을 더한다.
역사적, 건축학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들도 많다. 페르하트 수로, 13세기 셀주크 시대의 부르말리 사원, 15세기 쉴레이르임 바예지트 사원과 단지, 14세기 일칸국 시대의 비마르하네 정신병원(정문 주변에 아름다운 부조), 독특한 팔각형 모양의 카피 아가 메드레세(신학교), 토룸타이 묘소, 괴크 메드레세 등이 있다. 잘 보존된 전통적인 터키 저택들은 터키 건축의 훌륭한 예시를 보여준다. 19세기 하제란라르 저택은 완벽하게 복원되어 1층에는 미술관, 2층에는 민속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마시아 고고학 박물관에는 일칸국 통치자들의 미라를 포함한 흥미로운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시아는 "셰흐자데(Şehzade)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으며, 독특한 요리 문화를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지역 음식으로는 케슈케크(keşkek)와 바클라 돌마스(bakla dolması, 고기와 넓적콩으로 속을 채운 돌마)가 있다. 크림 케이크는 궁궐 메뉴에 빠지지 않던 음식이었으며, 체리 빵과 "우누트마 베니(Unutma Beni,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디저트도 지역 특색 음식이다.
오늘날 아마시아 지역은 품질 좋은 사과Elma|엘마tr 생산지로 유명하며, 담배tütün|튀튄tr와 양귀비haşhaş|하슈하슈tr도 재배한다. 광업, 직물업, 시멘트 제조업도 이루어지지만, 관광 산업이 주요 수입원이다. 시바스에서 삼순으로 가는 철도가 아마시아를 지나며, 오스만 제국 시대의 기차역이 남아 있다. 학생들을 위한 바, 카페, 레스토랑도 있으며, 요구르트yoğurt|요우르트tr를 넣은 토이가 초르바스(toyga çorbası) 수프, 양귀비haşhaş|하슈하슈tr 씨 파이 등을 즐길 수 있다.
8. 문화
이 지역의 계곡 지형은 많은 과일 재배에 적합한 온화한 기후를 제공한다. 이 지역의 다른 경제 활동으로는 광업, 섬유 및 시멘트 제조가 있다. 도시 경제의 대부분은 농업과 농산물에서 비롯되며, 채소와 과일 생산 또한 아마시아 경제에 중요한 수입원이다. 마을들은 아마시아 지역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아마시아의 메르지폰 지역에서는 전기 기계 생산과 가정용품(빌트인 가구, 주방 용품, 배기구, 믹서기), 농업 및 목공 기계, 섬유 및 식품 산업이 발전했다.
도시의 농산물은 사과, 체리, 오크라, 양파, 양귀비씨, 렌틸콩, 콩, 복숭아와 같은 제품으로 주로 구성된다. 또한 농업 기반 산업은 지역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설탕, 유제품, 계란, 해바라기유, 사료, 밀가루, 효모는 아마시아의 주요 농업 기반 산업이며, 공산품은 비교적 제한적이다. 가장 주요한 산업은 석회, 벽돌, 대리석, 빌트인 주방 용품, 가구, 갈탄, 금속 및 플라스틱 산업 제품이다. 이러한 제품들은 국내에서 거래되고 수출된다. 대리석 수출은 도시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아마시아는 대리석 수출량에서 전국 2위 도시이다. 게다가 아마시아는 제조업 고용률이 전국 평균보다 낮다.
아마시아 대학교는 2006년에 설립되었으며(이전에는 1975년 5월 19일에 삼순 대학교와 연계되어 있었다).
아마시아는 유럽과 이란을 잇는 국제 도로에 위치한 도시이며 삼순 항구를 국내 내륙 지역과 연결한다. 아마시아-메르지폰 공항은 2008년에 개항했다. 이와 관련하여 문화 관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마시아는 국내 흑해 관광의 출발점이다. 카파도키아 관광 또한 아마시아를 포함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국적으로 대표 도시로 15개 도시를 선정했는데, 아마시아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발전은 관광이 다른 부문으로 확대됨으로써 도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아마시아는 여전히 목표 달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문명의 수도였고, 오스만 제국의 미래 술탄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던 아마시아는 “셰흐자데(Şehzade)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으며, 특징적인 맛, 모양, 품질을 갖춘 고급 요리를 발전시켰다. 지역 음식의 한 예로 케슈케크(keşkek)가 있는데, 이는 항상 이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요리 중 하나였다. 바클라 돌마스(bakla dolması)(고기와 넓적콩(broad bean)으로 속을 채운 돌마(dolma))는 또 다른 특징적인 지역 특산물이다.
크림 케이크는 옛 궁궐 메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또 다른 음식이이었다. 지역 빵에는 체리 빵이 있으며, 딱딱해진 빵 조각은 “우누트마 베니(Unutma Beni)”, 즉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뜻의 디저트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9. 교통
10. 자매 도시
11. 유명 인물
참조
[1]
서적
Amasy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
웹사이트
İl Belediyesi
https://www.e-icisle[...]
2023-01-12
[3]
웹사이트
Address-based population registration system (ADNKS) results dated 31 December 2021
https://www.tuik.gov[...]
TÜİK
2023-01-12
[4]
서적
Geographica
[5]
서적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The Alexiad, translated by Elizabeth A. S. Dawes | Anna Comnena; Dawes, Elizabeth A. S. (trans.)
[7]
뉴스
1,800-year-old mosaic reveals symbol of Black Sea province
https://www.hurriyet[...]
hurriyetdailynews
2020-07-21
[8]
간행물
Amasya
[9]
서적
E.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Volume 1
BRILL
[10]
서적
The Sons of Bayezid: Empire Building and Representation in the Ottoman Civil War of 1402-13
https://books.google[...]
BRILL
[11]
서적
The Sons of Bayezid: Empire Building and Representation in the Ottoman Civil War of 1402-13
https://books.google[...]
BRILL
[12]
웹사이트
AMASIA, AMASIEH - JewishEncyclopedia.com
http://jewishencyclo[...]
2017-12-02
[13]
서적
The Morning Cometh: 45 Years with Anatolia College
[14]
서적
[15]
웹사이트
Diocese of Amaseia (Ottoman Period)
http://asiaminor.ehw[...]
Encyclopedia of the Hellenic World
2017-01-13
[16]
서적
Oriens Christianus
[17]
서적
Annuario Pontificio 2013
Libreria Editrice Vaticana
[18]
웹사이트
Amasea (Titular See)
http://www.catholic-[...]
2011-04-16
[19]
서적
Series episcoporum Ecclesiae Catholicae
http://www.wbc.pozna[...]
Leipzig
[20]
서적
Oriens christianus in quatuor Patriarchatus digestus
https://books.google[...]
Paris
[21]
서적
Hierarchia Catholica Medii Aevi
https://archive.org/[...]
[22]
서적
Ungedruckte und ungenügend veröffentlichte Texte der Notitiae episcopatuum
https://archive.org/[...]
Abhandlungen der philosophisch-historische classe der bayer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23]
서적
Amasea
http://gallica.bnf.f[...]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ecclésiastiques
[24]
웹사이트
Resmi İstatistikler: İllerimize Ait Mevism Normalleri (1991–2020)
https://www.mgm.gov.[...]
Turkish State Meteorological Service
2021-06-26
[25]
웹사이트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Climate Normals for 1991-2020: Amasya
https://www.nodc.noa[...]
National Oceanic and Atmosoheric Administration
2024-06-23
[26]
웹사이트
Amasya - Weather data by months
http://www.meteomanz[...]
[27]
웹사이트
Capitains Nemo
http://cts.perseids.[...]
[28]
웹사이트
Kaza Amasya / Άμάσεια - Amáseia
https://virtual-geno[...]
2023-09-20
[29]
웹사이트
Mahalle
https://www.e-icisle[...]
2023-01-16
[30]
웹사이트
Amasya Belediyesi Kardeş Şehirleri
http://www.amasya.be[...]
Municipality of Amasya
2018-12-28
[31]
간행물
Amasya
https://doi.org/10.1[...]
[32]
웹사이트
İl ve İlçelerimize Ait İstatistiki Veriler- Meteoroloji Genel Müdürlüğü
http://www.dmi.gov.t[...]
2011-04-16
[33]
웹인용
Meteoroloji
http://www.mgm.gov.t[...]
2016-01-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