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나 파르테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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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테나 파르테노스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제작한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크리세레판틴 조각상이다. 기원전 447년부터 438년 사이에 파르테논 신전이 재건되었으며, 아테나 파르테노스는 아테네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묘사한 것으로, 금과 상아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약 11.5m에 달했다. 조각상의 제작에는 다양한 장인들이 참여했으며, 제작 비용은 막대했다. 조각상은 아테네의 번영과 승리를 상징하는 도상학적, 정치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으며, 훼손과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는 내슈빌 파르테논에 실물 크기의 복제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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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나 파르테노스 | |
|---|---|
| 조각상 정보 | |
![]() | |
| 이름 | 아테나 파르테노스 (Ἀθηνᾶ Παρθένος) |
| 제작자 | 페이디아스 |
| 종류 | 크리셀레판틴 조각상 |
| 높이 | 약 12 미터 (39 피트) |
| 재료 | 금 상아 |
| 위치 |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 |
| 역사적 배경 | |
| 제작 시기 | 기원전 447년 ~ 438년 |
| 봉헌 | 아테나 여신에게 봉헌 |
| 파괴 시기 | 서기 5세기 말 |
| 파괴 원인 | 화재 |
| 특징 | |
| 도상학적 특징 | 방패 투구 니케 뱀 |
| 방패 묘사 | 아마존 전투 묘사 |
| 추가 정보 | |
| 복제품 존재 여부 | 다수 존재 |
| 참고 문헌 | C. Cullen Davison, Pheidias: The Sculptures and Ancient Sources, Vol. 1, Oxford, 2009, pp.69-70. |
2.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나 파르테노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파우사니아스는 이 조각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모습은 현재 남아 있는 동전, 보석, 무덤 등에 새겨져 있는 모습들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왼쪽에는 날개가 달린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서 있었고,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로 서 있어서 조각상의 하중이 오른쪽으로 실리게 했다. 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오른쪽 팔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였는지, 아니면 방패 '아이기스'의 뱀이 들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는 높이 약 11.5m, 4m~8m 정도의 거대한 받침대 위에 서 있었다. 목조로 기본 틀을 짜고 금동판을 얹었으며, 얼굴과 팔 부분에는 순백색 상아를 깎아 붙였다. 조각상에는 1100kg의 황금이 들어갔으며, 아테네의 가장 귀중한 보물 중 하나였다.
몇몇 학자들은 "아테나는 전투를 끝내고 휴식하는 전사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왼쪽 손에 서 있었고, 오른쪽 손은 방패를 잡고 있었다. 창은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다. 그녀는 가장 단순한 형식의 튜닉을 입고 있었으며, 제우스가 내린 선물인 아이기스를 잡고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2. 1. 건립 배경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은 당시 건설 중이던 선(先) 파르테논을 포함하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했다.[1]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인들은 파괴된 신전을 완공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야만성"을 기억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두기로 맹세했다.[1] 그러나 그 후 수년 동안 아테네는 원래 페르시아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그리스 국가들의 연합인 델로스 동맹을 지배하면서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 30년 안에 이 동맹은 아테네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454년까지 델로스 동맹의 재산은 아테네로 이전되었고, 거기서 자금은 파르테논을 포함한 도시와 파괴된 신전을 재건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에 투입되었다.[2][3]새로운 파르테논은 기원전 447년부터 기원전 438년 사이에 세워졌다. 페리클레스는 조각가 페이디아스를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와 함께 건축 프로그램을 감독하도록 선택했다.[4] 세코스 (주위를 둘러싼 덮인 부분)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었다. 서쪽에 있는 작은 방, 즉 "파르테논" ( "처녀의 방")에는 델로스 동맹의 보물과 기타 헌물들이 보관되었다. 동쪽에는 "헤카톰페도스 네오스ἑκατόμπεδος νεώς|헤카톰페도스 네오스grc" ( "100피트" 성소 (''네오스''는 ''나오스''의 고대 형태)는 아테나 신전을 가리킨다.)에는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방은 길이 29.9m, 즉 약 100푸스였으며 너비는 19m, 천장 높이는 12.5m였다.[6]
새로운 건물은 신전이 아니라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거대한 크리세레판틴 조각상을 보관하기 위한 보물 창고로 사용될 의도였다. 조각상 프로젝트가 건물 프로젝트보다 먼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도시가 여신에게 바친 헌물이었지만 숭배 조각상은 아니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여사제는 없었다.
조각상에 대한 주요 고대 자료는 파우사니아스의 저술과 대 플리니우스의 저술이다. 파우사니아스는 또한 "파르테노스"라는 성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초기 저술에는 "조각상", "아테나 조각상", "아테나의 금 조각상", "아테나의 상아 조각상" 또는 단순히 "아테나"가 언급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기원전 5세기 말부터 파르테논의 수호 여신은 "아테나 파르테노스"로 알려지게 되었다.[7]
2. 2. 건축 및 배치
1) 프로나오스 (동쪽 면)2) 나오스 ''헤카톰페도스 네오스'' (동쪽 면)
3)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크리세레판틴 조각상
4) 파르테논 (처녀의 방, 보물) (서쪽 면)
5) 오피스토도모스 (서쪽 면)]]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은 당시 건설 중이던 선(先) 파르테논을 포함하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했다.[1]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인들은 파괴된 신전을 완공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야만성"을 기억하기 위해 그대로 두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지배하며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통제했고, 30년 안에 이 동맹은 아테네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454년, 델로스 동맹의 재산은 아테네로 이전되었고, 이 자금은 파르테논을 포함한 도시와 파괴된 신전을 재건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에 투입되었다.[2][3]
새로운 파르테논은 기원전 447년부터 438년 사이에 세워졌다. 페리클레스는 조각가 페이디아스에게 건축가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와 함께 건축 프로그램을 감독하도록 했다.[4] 세코스(주위를 둘러싼 덮인 부분)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었다. 서쪽의 작은 방인 "파르테논"("처녀의 방")에는 델로스 동맹의 보물과 기타 헌물들이 보관되었다.[5] 동쪽의 "헤카톰페도스 네오스ἑκατόμπεδος νεώς|헤카톰페도스 네오스grc"에는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방은 길이 29.90m(약 100푸스)였으며 너비는 19m, 천장 높이는 12.50m였다.[6]
새로운 건물은 신전이 아니라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거대한 크리세레판틴 조각상을 보관하기 위한 보물 창고였다. 조각상 프로젝트가 건물 프로젝트보다 먼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도시가 여신에게 바친 헌물이었지만 숭배 조각상은 아니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여사제는 없었다.
조각상에 대한 주요 고대 자료는 파우사니아스와 대 플리니우스의 저술이다. 파우사니아스는 "파르테노스"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초기 저술에는 "조각상", "아테나 조각상", "아테나의 금 조각상", "아테나의 상아 조각상", "아테나" 등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기원전 5세기 말부터 파르테논의 수호 여신은 "아테나 파르테노스"로 알려졌다.[7]
3. 조각상의 제작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는 건설 중이던 선(先) 파르테논을 포함하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했다.[1]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인들은 파괴된 신전을 완공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야만성"을 기억하기 위해 그대로 두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그 후 수년 동안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지배하면서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게 되었고, 30년 안에 아테네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454년까지 델로스 동맹의 재산은 아테네로 이전되었고,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한 도시와 파괴된 신전을 재건하기 위한 계획에 투입되었다.[2][3]
새로운 파르테논은 기원전 447년부터 438년 사이에 세워졌다. 페리클레스는 조각가 페이디아스를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와 함께 건축 프로그램을 감독하도록 선택했다.[4] 세코스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었는데, 서쪽의 "파르테논"에는 델로스 동맹의 보물과 헌물들이 보관되었다.[5] 동쪽의 "헤카톰페도스 네오스"(ἑκατόμπεδος νεώς|헤카톰페도스 네오스grc)에는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방은 길이 29.9m, 너비 19m, 천장 높이 12.5m였다.[6]
새로운 건물은 신전이 아니라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거대한 크리세레판틴 조각상을 보관하기 위한 보물 창고로 사용될 의도였다. 조각상 프로젝트가 건물 프로젝트보다 먼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도시가 여신에게 바친 헌물이었지만 숭배 조각상은 아니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여사제는 없었다.
조각상에 대한 주요 고대 자료는 파우사니아스와 대 플리니우스의 저술이다.[7] 파우사니아스는 "파르테노스"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초기 저술에는 "조각상", "아테나 조각상", "아테나의 금 조각상", "아테나의 상아 조각상" 또는 단순히 "아테나"가 언급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기원전 5세기 말부터 파르테논의 수호 여신은 "아테나 파르테노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3. 1. 제작 과정

플루타르코스와 파우사니아스[9]에 따르면,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은 피디아스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장인들이 함께 제작했으며, 피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의 모든 장식 작업을 총괄했다. 조각상이 만들어진 작업장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크로폴리스 동쪽 끝(훗날 옛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 되는 곳)이나, 귀중한 재료(금과 상아)의 비용을 고려하여 주요 부지의 왕래와 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성스러운 바위 기슭의 다른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
조각상은 "여분 부품"으로 만들어져 작업장에서 먼저 조립된 다음 해체되어 파르테논으로 옮겨져 최종 위치에 설치되었을 것이다.[9]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작업 비용을 704 탈렌트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200척의 삼단노선 건조 비용과 맞먹는 금액이다. 이 조각상은 유사시 재정적 비축물로 간주되어, 필요하다면 장식된 금을 녹여 사용할 수 있었다.[10] 여러 고대 작가들에 따르면[11], 사용된 금의 무게는 40~50탈렌트(1ton~1.3ton)에 달한다. 당시 델로스 동맹의 연간 공물이 28탈렌트였고, 이 금의 양은 아테네가 숙련 노동자나 호플리테스, 또는 노잡이 10,000명의 1년치 봉급을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11] 상아의 양과 비용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기원전 440~439년의 비문에는 24743고대 드라크마에 상아를 구매한 기록이 남아있다.[12]
조각상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사이프러스 나무로 된 틀 위에 조립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에테오카르파티안 사람들에게 사이프러스 나무를 제공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 나무는 아폴론에게 바쳐진 숲에서 나온 것으로 종교적 목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 파르테논 바닥에는 중앙 빔이 심어진 구멍(가로 75.5cm x 세로 54cm, 깊이 37cm)이 남아있다. 이 "기둥" 주변에 사이프러스 나무로 된 전체 프레임이 조각상의 모양을 만들었다. 아테네는 해양 목수 등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숙련된 장인을 보유하고 있었다.[13]
이 나무 틀에는 못으로 고정된 금판이 부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판을 녹였는지, 아니면 망치질했는지(스피렐라톤 기법)는 확실하지 않다.[14] 상아 작업은 훨씬 더 어려웠는데, 오피아누스에 따르면 필요한 표면(얼굴, 팔, 발)은 코끼리 상아의 크기를 훨씬 초과했다. 따라서 얇게 켠 상아를 "파피루스 두루마리처럼 펼쳐" 사용했다. 긴 상아 판의 모양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부드럽게 한 다음 성형하는 전문가의 기술이 필요했다.[15] 이렇게 만들어진 상아 판은 피디아스가 숙달한 청동 조각상 제작에 사용된 왁스 판과 유사한 유연성을 가졌다.[15] 금판은 나무 틀에 직접 못으로 고정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상아는 가는 못으로 고정하거나 물고기 접착제로 접착했을 것이다.[16] 상아 판 사이의 이음매는 그림자 속에 가려지거나 보석(팔찌, 목걸이)으로 가려졌다. 상아는 스쿠아틴 가죽(상어의 일종)으로 연마되었고, 뺨, 입술, 손톱에는 붉은 색소를 사용하여 "화장"했다. 금은 그대로 두지 않고 빛을 반사하는 귀하고 반귀한 돌로 상감했을 가능성이 높다.[16]
조각상은 기원전 438년에 완성되어 파르테논에 봉헌되었을 것이다. 사용되지 않은 금과 상아는 그 후 판매되었다.
3. 2. 재료와 기술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나 파르테노스 조각상은 금과 상아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약 11.5m였고, 4 ~ 8m 정도의 거대한 받침대 위에 서 있었다. 목조로 기본 틀을 짠 다음, 그 위에 금동판을 얹고, 얼굴과 팔 부분에는 순백색 상아를 깎아 붙였다.[9] 조각상에는 1,100kg의 황금이 들어갔으며, 아테네의 가장 귀중한 보물들 중 하나였다.[10]조각상은 "여분 부품"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며, 먼저 작업장에서 조립된 다음 해체되어 파르테논으로 옮겨져 최종 위치에 설치되었을 것이다.[9] 작업 비용은 704 탈렌트로 추정되는데, 이는 200척의 삼단노선 건조 비용에 해당한다. 이 조각상은 필요하다면 금을 녹여 사용할 수 있는 재정적 비축물로 간주되었다.[10] 사용된 금의 무게는 40~50탈렌트(1~1.3톤)로, 당시 델로스 동맹 연간 공물의 28탈렌트를 크게 웃도는 양이었다. 이는 숙련 노동자 10,000명, 호플리테스 10,000명, 또는 노잡이 10,000명의 연봉을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이었다.[11]
상아의 양과 비용은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기원전 440~439년 비문에 24탈렌트 743 드라크마로 코끼리 상아를 구매한 기록이 있다.[12]
조각상은 부패 방지 목재(아마도 사이프러스) 프레임으로 조립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에테오카르파티안 사람들에게 사이프러스 나무 제공에 대한 감사 칙령을 내렸다. 파르테논 토양에는 중앙 빔 구멍(75.5cm x 54cm, 깊이 37cm)이 남아있고, 이 기둥 주변에 사이프러스 나무 프레임이 조각상 모양을 만들었다.[13] 이 보강재에 금판이 못으로 고정되었을 것이다.[14]
상아 작업은 더 어려웠는데, 얼굴, 팔, 발 등에 필요한 상아는 코끼리 상아 크기를 초과했다. 하지만 얇게 겹겹이 쌓은 상아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처럼 펼쳐질" 수 있었다. 피디아스는 청동 조각상 성형에 사용된 왁스 판처럼 유연한 상아 판을 만들었다.[15] 금판은 프레임에 직접 못으로, 상아는 가는 못이나 물고기 접착제로 고정되었을 것이다. 상아 판 사이 이음새는 그림자나 보석(팔찌, 목걸이)으로 가려졌다. 상아는 스쿠아틴 가죽(상어 일종)으로 연마 후, 뺨, 입술, 손톱에 붉은 색소로 "화장"했다. 금은 빛을 반사하는 귀중/반귀중한 돌로 상감했을 가능성이 높다.[16]
조각상은 기원전 438년에 완공되어 파르테논에 봉헌, 설치되었다.
4. 조각상의 모습
파우사니아스[7]와 대 플리니우스[7]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나 파르테노스는 크리세레판틴 조각상으로, 나무로 된 중심 틀에 상아와 금판을 덧붙여 만들었다. Ἀθηνᾶ Παρθένος|아테나 파르테노스grc는 서 있는 자세로, 왼손에는 방패와 창을 들고 오른손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들고 있었다.
아테나는 아이기스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가슴 중앙에는 고르곤의 머리가 상아로 장식되어 있었다. 머리에는 아테네식 투구를 쓰고 있었으며, 투구 중앙에는 스핑크스가, 양옆에는 그리폰이 장식되어 있었다.
조각상의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하여 약 11.5m에 달했으며, 받침대는 8.065by 크기의 평행육면체였다. 받침대 앞면에는 20명의 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도라의 탄생이 묘사되어 있었다.
아테나의 발치에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이는 지하 세계의 힘을 상징하거나 에레크테우스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각상을 장식한 괴물들(스핑크스, 그리폰, 날개 달린 말, 뱀, 고르곤)은 아테나가 길들인 원시적인 힘을 상징한다.
방패의 바깥쪽에는 아마조노마키아가, 안쪽에는 기간토마키아가 묘사되어 있었다. 방패 중앙에는 론다니니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고르곤의 머리가 있었다.
4. 1. 상세 묘사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나 파르테노스 조각상은 금과 상아로 만들어졌다. 투구는 스핑크스와 그리핀을 섞은 모습이었고, 신전 내부에 서 있는 자세로 메두사의 머리가 갑옷에 조각되어 있었다. 한 손에는 승리의 여신을, 다른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으며, 발치에는 방패와 뱀이 있었다.[17]아테나 파르테노스의 모습은 동전, 보석, 무덤 등에 새겨진 모습으로 추정된다.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니케가 왼쪽에 서 있었고, 왼쪽 무릎을 살짝 굽혀 무게가 오른쪽으로 실리게 했다. 창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오른팔에 기대고 있었다는 설과 방패 '아이기스'의 뱀이 들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17]
조각상의 높이는 약 11.5m였고, 4m 에서 8m 크기의 받침대 위에 있었다. 목조 틀 위에 금동판을 얹고, 얼굴과 팔에는 상아를 사용했다. 1100kg의 황금이 사용되었으며, 아테네의 귀중한 보물 중 하나였다.[17]
일부 학자들은 아테나가 전투 후 휴식하는 전사의 모습으로,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왼손에 있고 오른손은 방패를 잡고 있으며, 창은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고 한다. 제우스에게 받은 아이기스를 잡고 있었다고도 한다.[17]
조각상은 파르테논 동쪽 본당에 설치되었고, 도리아식 기둥이 지붕을 지탱하며 캐노피 역할을 했다. 앞에는 물을 채운 분지가 있어 습도 유지 및 빛 반사에 사용되었다. 양쪽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17][18]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조각상은 기단 포함 26 큐빗(약 11.50m) 높이였고, 천장까지 1.5m가 남았다. 피디아스는 여신을 실제 크기로 묘사하려 했으며, 신들은 인간보다 훨씬 크다고 여겨졌다.[19]
조각상의 받침대는 높이 1.3m 에서 1.5m의 응회암 평행육면체였다. 앞면에는 20명의 신들이 지켜보는 판도라 탄생 조각이 있었으나, 세부 사항은 알 수 없다. 이 주제는 지혜의 처녀 여신과 조화시키기 어렵지만, 여성성의 두 측면 또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여성 역할 증가를 상징했을 수 있다.[19] 다른 해석으로는 헬리오스와 셀레네가 구성한 달력, 신들과 함께라면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경고, 거만함을 피해야 한다는 경고 등이 있다.[19] 조앤 코넬리는 아테네의 판도라 승화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한다.[20]
아테나는 오른쪽 측면에 반쯤 열린 페플로스를 입고, 왼쪽 다리는 약간 구부린 자세였다. 가슴은 곧고 정면을 향했을 것이다.[21]
아이기스를 가슴에 얹고, 상아 고르곤의 머리를 태양 신경총 부위에 두었다. 얼굴은 상아, 입술은 벌어져 생명의 숨결을 상징했을 수 있다. 보석 눈은 페르시아 색을 띠었을 것이다. 긴 머리카락은 헬멧에서 아이기스로 내려왔다. 헬멧은 아테네식 투구 유형, 그리폰 장식, 스핑크스와 날개 달린 말 문장이 있었다. 샌들 가장자리는 켄타우로마키아로 장식되었고, 허리띠는 뱀 두 마리였다. 보석 장신구도 착용했다.[21]
왼손에는 방패와 창, 발치에는 뱀이 있었다. 오른손에는 2m 높이 니케 조각상을 들고 있었고, 기둥에 기댔을 수 있다. 니케는 금 월계관을 여신에게 씌우려 하고 있었다. 기둥 존재는 논쟁거리이며, 존재했다면 코린트식 양식의 예일 수 있다.[21]
방패(지름 4.8m 에서 5m)는 아마조노마키아로 장식되었고, 론다니니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고르곤 머리가 중앙에 있었다. 테세우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군대와 아마존족이 싸우는 모습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디아스는 자신과 페리클레스를 묘사했다.[22][23][24] 방패 내부는 기간토마키아로 칠해졌다.[25] 세 번의 싸움은 파르테논 조각 장식에서도 발견된다.[26][27]
뱀(δράκων)은 지하 힘 또는 에레크테우스를 나타냈을 수 있다.[28][29] 조각상을 장식한 괴물들은 여신이 길들인 원시적인 힘을 상징한다.[30]
조각상과 건물 장식 주제는 도시 기념 도상학적, 정치적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아테네는 메디아 전쟁 승리, 문명의 승리, 도시 미덕과 경건함을 기념했다. 상업적, 해군적 힘은 금과 상아로 구체화되었다.[30]
4. 2. 상징적 의미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파우사니아스는 이 조각상이 금과 상아로 만들어졌으며, 투구에는 스핑크스와 그리핀이 묘사되었다고 기록했다.[1] 아테나는 서 있는 자세로 메두사의 머리가 조각된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다른 한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다. 발치에는 거대한 방패와 뱀이 있었다.[1]이 조각상은 파르테논 신전 동쪽 본당에 설치되었으며, 도리아식 기둥이 지붕을 지탱했다. 조각상 앞에는 물이 채워진 분지가 있어 습도를 유지하고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했다.[17][18]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조각상의 높이는 기단을 포함하여 약 11.5m였다.[6] 신들은 인간보다 훨씬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아테나 여신을 실제 크기로 묘사하여 위엄, 아름다움, 장엄함을 표현하고자 했다.[6]
조각상의 받침대는 8.065by 크기의 평행육면체였으며, 앞면에는 판도라의 탄생을 묘사한 조각이 있었다.[19] 이는 여성성의 두 측면을 상징하거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여성의 역할이 증가하는 것을 나타냈을 수 있다.[19]
아테나는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왼쪽 다리는 살짝 구부린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뱀이 늘어선 아이기스를 가슴에 얹고, 고르곤의 머리를 두었다. 아테네식 투구에는 스핑크스와 그리폰이 장식되어 있었다.[21]
왼손에는 방패와 창을, 발치에는 뱀이 있었고, 오른손에는 니케 조각상을 들고 있었다.[21] 방패 바깥쪽에는 아마조노마키아가 장식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론다니니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고르곤의 머리가 있었다. 방패 안쪽에는 기간토마키아가 칠해져 있었다.[25] 뱀은 지하 세계의 힘이나 에레크테우스를 나타낼 수 있다.[28][29]
이처럼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과 파르테논 신전 전체를 장식한 주제들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의 도상학적, 정치적 프로그램을 반영했다. 즉, 혼돈, 무질서, 오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 그리고 도시의 미덕과 경건함을 상징했다.[30]
5. 역사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은 당시 건설 중이던 선(先) 파르테논을 포함하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했다.[1]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인들은 파괴된 신전을 완공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야만성"을 기억하기 위해 그대로 두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이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지배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454년 델로스 동맹의 재산을 아테네로 이전하여 파르테논을 포함한 도시 재건 계획에 사용했다.[2][3]
기원전 447년부터 기원전 438년 사이에 새로운 파르테논이 건설되었다. 페리클레스는 페이디아스에게 건축가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와 함께 건축 감독을 맡겼다.[4] 신전 내부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었는데, 서쪽 방에는 델로스 동맹의 보물 등이 보관되었고,[5] 동쪽의 "헤카톰페도스 네오스"에는 아테나 파르테노스 조각상이 있었다. 이 방은 길이 약 100푸스(29.90m), 너비 19m, 천장 높이 12.50m였다.[6]
새로운 건물은 신전이 아닌 ''아테나 파르테노스'' 조각상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 이는 도시가 여신에게 바친 헌물이었지만, 숭배 대상은 아니었으며 전담 여사제도 없었다. 조각상에 대한 주요 기록은 파우사니아스와 대 플리니우스의 저술에 남아있다. 처음에는 "조각상", "아테나 조각상" 등으로 불렸으나, 기원전 5세기 말부터 "아테나 파르테노스"로 알려졌다.[7] 섬세한 상아로 만들어진 조각상은 건조를 막기 위해 기름진 물로 관리되었다.[31]
5. 1. 페이디아스의 실각
기원전 438년(조각상 봉헌 시점) 또는 기원전 432년(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직전)의 자료에 따르면, 페이디아스는 조각상 제작에 사용된 귀금속 일부를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는 금이 여신에게 속한다는 점에서 신성 모독이기도 했다.[32] 체포된 그는 도주했는데, 이는 유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는 올림피아로 도망쳐 그곳에서 제우스의 크리세레판틴 조각상을 만들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역사가들은 페이디아스에 대한 고발이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집정관을 공격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본다.[32]5. 2. 훼손과 복원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인들이 당시 건설 중이던 선(先) 파르테논을 포함하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했다.[1]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인들은 파괴된 신전을 완공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야만성"을 기억하기 위해 그대로 두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지배하면서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통제했고, 30년 안에 이 동맹은 아테네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454년, 델로스 동맹의 재산은 아테네로 이전되었고, 이 자금은 파르테논을 포함한 도시와 파괴된 신전을 재건하기 위한 계획에 투입되었다.[2][3]페리클레스는 조각가 페이디아스에게 건축 프로그램을 감독하도록 했다. 기원전 300년에서 295년 사이, 라케레스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판을 제거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행위의 진실성은 확인하기 어렵다.[32]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말 불확실한 시기에 화재로 황폐화되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붕이 붕괴되었고, 나오스의 도리아식 기둥은 로마 아고라의 헬레니즘 스토아 기둥으로 대체되었다.[33] 조각상은 손상되었지만 복원되었다. 이 조각상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져 올림피아의 제우스상과 함께 10세기까지 그곳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가설에 따르면, 두 번째 받침대가 존재했기 때문에 《아테나 파르테노스》 조각상은 불확실한 시점에 대체되었을 수도 있다.[34] 380년 테오도시우스 칙령까지 파르테논 신전은 이교도 종교적 역할을 유지했다. 그 후 신전은 다소 긴 기간 동안 방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5세기에서 7세기 사이 어딘가에 교회로 변형되었다. 자료에는 그 당시의 조각상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조각상이 파괴되었는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다.[35]
6. 복제품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 위치한 파르테논에는 아테나 파르테노스를 완벽히 복원한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이 복제품은 본래 신전의 외양을 충실히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82년에 착공하여 8년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90년 5월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38]
내슈빌의 아테나 파르테노스는 석고와 유리 섬유로 만들어졌다. 머리 부분은 강화 알루미늄으로, 하부 부분은 철골로 이루어졌다. 신상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H자 모양의 철골이 어깨와 머리 부분에서부터 발치까지 내려오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조각가는 180개에 달하는 석고판들을 모두 한 명이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하여 무게를 최대한 줄이고자 하였다. 내슈빌의 조각상은 약 12.75m로, 서양 세계에서 가장 큰 내부 조각상이다.
조각상의 소규모 복제품은 최소 69개 이상이 알려져 있다.[36] 초기에 이미 그 영향력은 매우 멀리까지 미쳤다. 쿨오바 (크림 반도)의 무덤에서 발견되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존된 금 메달은 조각상의 머리를 재현하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 작은 복제품이 대량 생산되었으며, 때로는 장식을 단순화하기도 했다. 바르바케이온 아테나는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이다. 때로는 방패 외곽의 장식, 주로 수출용 장식 판의 형태로만 재현되기도 했다.[37]
가장 유명한 고대 복제품으로는 레노르망 아테나와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바르바케이온 아테나, 루브르 박물관의 목걸이가 있는 미네르바, 또는 팔라초 알템프스 (로마 국립 박물관)에 보존된 안티오코스가 서명한 로마 시대의 복제품 등이 있다. 조각가 피에르-샤를 시마르는 뤼네 공작을 위해 1846년과 1855년 사이에 복원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 작품은 댕피에르에 있는 그의 성에 전시되어 있다.
1990년, 미국 조각가 앨런 르콰이어는 내슈빌 파르테논을 위해 실물 크기의 복제품을 제작했다. 이 복제품은 강철과 알루미늄 프레임 위에 석고와 유리 섬유 혼합물을 덮고 8kg의 금박을 입혀 완성되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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