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제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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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제이 바이다는 1926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영화감독이다. 1955년 데뷔하여, 폴란드의 저항과 사회 현실을 그린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대표작으로 《세대》, 《지하 하수도》, 《잿더미와 다이아몬드》, 《약속의 땅》, 《철의 사나이》 등이 있으며,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명예상, 베를린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2016년 마지막 영화 《애프터이미지》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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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바이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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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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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Andrzej Wajda |
출생 이름 | 안제이 비톨트 바이다 |
출생일 | 1926년 3월 6일 |
출생지 | 수바우키, 제2 폴란드 공화국 |
사망일 | 2016년 10월 9일 (90세) |
사망지 | 바르샤바, 폴란드 |
직업 | 영화 감독, 연극 감독 |
활동 기간 | 1951년–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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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모교 | 국립 영화 학교 (우치) |
수상 | |
주요 수상 | 황금종려상 명예 황금곰상 아카데미 명예상 황금사자상 명예상 |
가족 | |
배우자 | 가브리엘라 오렘바 (1949년 결혼, 1959년 이혼) 조피아 주초프스카 (1959년 결혼, 1967년 이혼) 베아타 티슈키에비치 (1967년 결혼, 1969년 이혼) 크리스티나 자흐바토비치 (1974년 결혼) |
대표작 | |
주요 작품 | 세대 (1955년) 지하 수도 (1957년) 재와 다이아몬드 (1958년) 대리석의 사나이 (1977년) 철의 사나이 (1981년) 단톤 (1983년) |
수상 내역 (세부) | |
아카데미상 | |
영국 아카데미상(BAFTA) | |
세자르상 | |
칸 영화제 | |
베네치아 영화제 | |
베를린 영화제 | 은곰상 (예술 공헌상) |
유럽 영화상 |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
기타 수상 |
2. 생애와 경력
1926년 3월 6일, 폴란드 북동부의 수와우키에서 태어났다. 폴란드군 대위였던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에 의해 자행된 카틴 숲 학살 사건으로 희생되었다.[59] 젊은 시절 우키요에 등 일본 미술에 감명을 받아 예술가를 지망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폴란드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크라쿠프 미술 아카데미를 거쳐 우치 영화 학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1953년 졸업했다.
1955년 『세대』로 영화 감독 데뷔 후, 『지하 하수도』(1957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잿더미와 다이아몬드』(1959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 수상)를 연이어 발표하며 이른바 '저항 3부작'을 완성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안제이 문크, 예지 카발레로비치 등과 함께 폴란드 영화파를 이끄는 대표적인 감독으로 부상했다.
이후에도 정치색 짙은 작품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1970년대에는 『약속의 땅』(1975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금상 수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대리석 인간』(1978년 칸 영화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 수상) 등 폴란드 현대사를 성찰하는 문제작들을 내놓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더욱 높였다.
1980년대에는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인 '연대' 운동을 적극 지지했으며, 이를 다룬 영화 『철의 사나이』(1981년)로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계엄령 하에서 폴란드 영화인 협회장 직에서 해임되는 등 정치적 탄압을 겪기도 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프랑스 혁명을 다룬 『당통』(1983년)을 연출하여 세자르상 감독상, 영국 아카데미상 외국어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1989년 부분 자유 선거에서는 '연대' 후보로 출마하여 상원 의원에 당선되어 1991년까지 활동했다.[61][62] 1987년에는 교토상 사상·예술 부문을 수상했으며,[60] 상금 4500만엔 등을 기반으로 1994년 크라쿠프에 일본 미술 기술 센터 건립에 기여했다. 일본 가부키 배우 반도 타마사부로를 기용하여 연극 『나스타샤』(1988년)를 연출하고 영화화(1994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계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카틴 숲 학살 사건을 다룬 『카틴』(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연대' 지도자 레흐 바웬사의 삶을 그린 『바웬사, 희망의 인간』(2013년) 등 역사적 의미가 깊은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2010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우호 훈장을 받았다.[64]
2016년 10월 9일, 폐부전으로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65]
2. 1. 초기 생애
1926년 3월 6일, 폴란드 북동부의 수와우키에서 태어났다.[10] 아버지는 폴란드군 대위였던 야쿠프 바이다였고, 어머니는 교사인 아니엘라(결혼 전 성 비아워바스)였다.[11]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에 의해 자행된 카틴 숲 학살 사건으로 사망했다.[59]청년 시절인 1944년, 크라쿠프의 직물 회관에서 열린 일본 미술 전시회에서 기타가와 우타마로와 가쓰시카 호쿠사이 등의 우키요에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예술가의 길을 꿈꾸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에는 폴란드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국내군에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화가가 되기 위해 크라쿠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림을 공부했다.[12] 그러나 이후 영화로 진로를 바꾸어 우치 영화 학교에 입학했고, 1953년에 졸업했다.[12] 이 학교는 로만 폴란스키 등 많은 유명 폴란드 감독을 배출한 곳이다.
2. 2. 초기 경력 (1955-1969)
알렉산데르 포르트 감독 밑에서 연출을 배운 후, 1955년 첫 장편 영화인 『세대』로 영화 감독 데뷔를 하였다. 이 작품은 이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저항 3부작'의 시작을 알렸다. 동시에 마이클 V. 가조의 『비에 젖은 비명』(1959), 『햄릿』(1960), 윌리엄 깁슨의 『두 사람이 시소에서』(1963) 등을 연출하며 연극 무대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세대』의 반전(反戰) 테마를 이어받아,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저항과 전후 공산화된 폴란드 사회의 현실을 그린 두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하수도』(1957)는 1957년 제10회 칸 영화제에서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과 함께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1958년에는 예지 안제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고 즈비그니에프 치불스키가 주연한 『잿더미와 다이아몬드』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반소련 저항 세력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여 1959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했다. 이 세 영화 『세대』, 『하수도』, 『잿더미와 다이아몬드』는 '저항 3부작'으로 불리며, 바이다는 안제이 문크, 예지 카발레로비치 등과 함께 당시 폴란드 영화계를 이끈 '폴란드 영화파'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바이다는 주류 상업 영화도 만들었지만, 알레고리[14]와 상징[15]을 활용한 작품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영화에는 술잔에 불을 붙이는 장면처럼 전쟁으로 스러진 젊은 이상주의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로트나』(1959)는 초현실주의적이고 상징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크시슈토프 코메다의 음악과 로만 폴란스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공동 각본가)가 출연한 프랑스 누벨 바그 스타일의 청춘 영화 『순진한 마법사들』(1960)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나치 점령하 폴란드에서 살아남으려는 유대인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삼손』(1961)을 연출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폴란드 작가 스테판 제롬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작 『잿더미』(1965)를 제작했으며, 해외에서도 여러 작품을 연출했다. 여기에는 프랑수아 트뤼포, 이시하라 신타로 등 여러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스무 살의 사랑』(1962)의 폴란드 편, 유고슬라비아에서 촬영한 『시베리아 레이디 맥베스』(1962), 영국과 유고슬라비아 합작 영화 『낙원의 문』(1968) 등이 포함된다.
1967년, 그의 페르소나였던 배우 즈비그니에프 치불스키가 기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바이다는 깊은 슬픔 속에서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 『모든 것은 판매용』(1968)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영화 속 영화 형식을 빌려 영화 제작자의 삶과 작품, 그리고 동료 배우의 죽음을 다루었다. 1969년에는 야누시 그워바츠키가 각본을 쓰고 스타니스와프 렘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단편 텔레비전 영화 『프셰클라다니에츠』와 풍자적인 코미디 영화 『파리 사냥』을 연출하며 초기 경력을 마무리했다.
2. 3. 예술적 전성기 (1970-1989)

1970년대는 바이다에게 예술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 중 하나였으며, 그는 1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시기 주요 작품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 사회를 다룬 ''전투 후의 풍경''(1970), 1930년대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심리 드라마 ''자작나무 숲''(1970), 불가코프의 소설을 각색한 ''빌라도와 다른 사람들''(1971),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의 희곡을 영화화한 ''결혼''(1972), 19세기 말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대작 ''약속의 땅''(1974),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스탈린주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그린 ''대리석 인간''(1977), 조지프 콘래드 원작의 ''그림자 노선''(1976), 사회 비판적 내용을 담은 ''거친 치료''(1978), 존 길구드가 출연한 ''오케스트라 지휘자''(1980), 야로스와프 이바슈키에비치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빌코의 아가씨들''[21] (1979) 등이 있다.
이 시기 바이다는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자작나무 숲''은 1971년 제7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22] ''약속의 땅''은 1975년 제9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금상(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폴란드 내에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던 ''대리석 인간''은 1978년 제31회 칸 영화제에서 몰래 상영되어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했다. ''빌코의 아가씨들'' 역시 1980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또한 폴란드 영화계에서 '도덕적 불안'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활발해진 이 시기에는 『마취 없음』(1978년)과 『더 컨덕터』(1980년)와 같이 사회 비판을 암시적으로 그린 작품을 제작했다.

영화 작업 외에도 연극 연출을 병행했다. 주요 연극 작품으로는 스트린드베리의 ''스트린드베르크 놀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각색한 ''악령''과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백치 기반), 비스피안스키의 ''11월 밤'', 슬라보미르 M로제크의 ''이민자들'', 스타니스와바 프시비셰프스카의 ''당통 사건'' 등이 있다.[23] 1972년에는 바르샤바 공과대학교 교수 얀 자흐바토비치의 딸 크리스티나 자흐바토비치와 결혼했다.
1980년대에 들어 바이다는 폴란드의 자유 노조 '연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대리석 인간''의 속편 격인 ''철의 인간''(1981) 제작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는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으로 시작된 연대 운동을 그렸으며, 실제 연대 지도자 레흐 바웬사가 본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는 사회주의 노동 영웅에서 반체제 인사로 변모한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삶을 모티브로 삼았으며, 발렌티노비치의 해고나 보그단 보루세비치,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의 지하 결혼식 같은 실제 사건들을 반영했다.[24] ''철의 인간''은 1981년 제34회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지만, 바이다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폴란드 정부는 그의 제작사를 폐쇄하도록 강요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그는 폴란드 영화인 협회장 등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바이다는 잠시 해외에서 활동하며 1983년 프랑스 고몽 사의 지원을 받아 ''당통''을 연출했다.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공포 정치를 다루면서, 폴란드 계엄령이라는 당시 상황과 맞물려 혁명이 어떻게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어 "자신의 아이들을 잡아먹기" 시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25] ''당통''은 루이 델뤽 상, 세자르상 감독상, 영국 아카데미상 외국어 작품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한나 쉬굴라가 출연한 ''독일에서의 사랑''도 제작했다.
1986년 타데우시 콘비츠키의 소설을 각색한 ''사랑의 기록''을 제작하며 폴란드 영화계에 복귀했다. 1988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악령''을 영화화했다. 연극 무대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1984)에 대한 해석과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여러 버전의 ''햄릿'', 20세기 초 유대인 연극 ''디부크'' 등을 연출했다. 1987년에는 교토상 사상·예술 부문을 수상했으며,[60] 상금 4500만 엔 등을 기반으로 1994년 크라쿠프에 일본 미술 기술 센터(Manggha Museum of Japanese Art and Technology)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1988년에는 일본의 가부키 배우 반도 타마사부로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원작으로 한 연극 ''나스타샤''를 연출하기도 했다.
1989년, 바이다는 제16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다.[26] 같은 해 폴란드에서 열린 부분 자유 선거에서는[61] '연대' 후보로 수와우키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설된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고,[62] 1991년까지 의원직을 수행했다.
2. 4. 1990년 이후

1990년, 안제이 바이다는 페데리코 펠리니와 잉마르 베르히만에 이어 세 번째로 유럽 영화상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1989년 의회 선거에서 '연대' 후보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어[61][62] 1991년까지 활동했으며, 1990년대 초에는 바르샤바의 테아트르 포브셰흐니 예술 감독으로도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제작을 이어갔다. 고아를 돌보는 유대계 폴란드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코르착''[27](1990), ''왕관을 쓴 독수리 반지''(1993), 유대인과 폴란드인 관계를 다룬 ''성주간''(1995) 등이 대표적이다. 1994년에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를 각색한 ''나스타샤''[28]를 발표했는데, 일본 배우 반도 타마사부로가 1인 2역(미시킨 공작, 나스타샤)을 맡았고 파베우 에델만이 촬영 감독을 맡아 이후 바이다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 1996년에는 세 고등학생 소녀의 관계를 통해 어둡고 정신적인 측면을 탐구한 성장 드라마 ''미스 노바디''[29]를 선보였고, 1999년에는 폴란드의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를 바탕으로 한 대작 ''판 타데우시''[30]를 개봉했다.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세계 영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오스카상을 수상했으며,[31] 이 상은 이후 크라쿠프의 야기엘론 대학교에 기증했다.[32] 2002년에는 자신의 1980년대 코미디 연극을 영화화한 ''복수''를 연출했고, 로만 폴란스키가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았다. 2006년 2월에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인 명예 황금 곰상을 받았다.[33] 2007년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희생된 카틴 학살을 다룬 영화 ''카틴''을 개봉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는 학살 자체뿐만 아니라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스러운 기다림과 슬픔을 함께 조명했으며, 2008년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34]

2009년에는 크리스티나 얀다가 주연을 맡은 ''달콤한 열정''(Tatarak|타타라크pol)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야로스와프 이바슈키에비치의 단편 소설을 일부 기반으로 했으며, 같은 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얀다의 남편이자 촬영 감독, 그리고 바이다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에드바르트 크워신스키에게 헌정되었다. 이 작품으로 바이다는 2009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유럽 영화상에서는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 연대 운동의 지도자이자 폴란드 대통령을 역임한 레흐 바웬사의 전기 영화 ''바웬사, 희망의 인간''(Wałęsa. Człowiek z nadziei|바웬사. 치워비예크 스 나지에이pol)을 발표했다. 야누슈 그워바츠키가 각본을 쓰고 로베르트 비에츠키에비치가 바웬사 역을 맡았으며,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2016년에 발표된 ''애프터이미지''(Powidoki|포비도키pol)로, 폴란드의 아방가르드 화가 브와디스와프 스트셰민스키의 삶을 다루었으며 배우 보구스와프 린다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연출 외에도 바이다는 문화 및 교육 분야에 기여했다. 1987년 교토상 수상 상금을 바탕으로 기부금을 모아 1994년 크라쿠프에 일본 미술 기술 센터를 설립했다.[60] 1996년에는 다카마쓰노미야 전하 기념 세계 문화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폴란드 영화 감독 보이체흐 마르체프스키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 학교(Wajda School)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 학교에서는 유럽의 저명한 영화 제작자들이 다양한 강좌를 이끌고 있다.[35] 2010년 12월 6일에는 폴란드를 방문한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으로부터 우호 훈장을 받았다.[64]
안제이 바이다는 2016년 10월 9일, 폐부전으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65]
3. 수상 및 서훈
연도 | 상훈명 | 수여 기관/국가 | 비고 |
---|---|---|---|
2013 | 개인 공로상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
2012 | 헝가리 공로 훈장 | 헝가리 | |
2011 | 백색 독수리 훈장 | 폴란드 | 폴란드 최고 훈장 |
2011 | 별 세 개 훈장 | 라트비아 | |
2010 | 우정 훈장 | 러시아 | |
2010 | 다니차 흐르바츠카 훈장 | 크로아티아 | |
2009 | 알프레드 바우어상 | 제5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독일) | 창포 |
2008 | 야로슬라프 현자 훈장 | 우크라이나 | |
2008 |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 에스토니아 | |
2007 |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 |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 카틴 |
2006 | 명예 황금곰상 (평생 공로상) | 제5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독일) | |
2006 | 리투아니아 공로 훈장 | 리투아니아 | |
2005 | 문화 공로 메달 - 글로리아 아르티스 | 폴란드 | |
2001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 프랑스 | |
2001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장 | 독일 | |
2001 | 명예 학위 | 모스크바 국립 안무 학교 (러시아) | |
2000 | 아카데미 명예상 |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 |
2000 | 명예 학위 | 바르샤바 미술 아카데미 (폴란드) | |
2000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 이탈리아 | |
2000 | 평생 공로상 | 폴란드 영화상 | |
1999 | 폴란드 재건 훈장 그랜드 크로스 | 폴란드 | |
1999 | 자유상 | 베를린 자유 영화제 (독일) | 영화 제작과 "자유에 대한 비할 데 없는 헌신" |
1999 | 크리스탈 아이리스 상 (평생 공로상) | 브뤼셀 국제 영화제 (벨기에) | |
1997 | 프라에미움 임페리알레 상 | 일본 예술 진흥 협회 (일본) | |
1997 | 감독상 | 제13회 페스트로이아 국제 영화제 (포르투갈) | 미스 노바디 |
1997 | 특별 언급 | 제4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독일) | 미스 노바디 |
1996 | 은곰상 (뛰어난 예술적 공헌) | 제4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독일) | 성주간 (Wielki tydzień) |
1995 | 욱일장 | 일본 | |
1995 | 명예 학위 | 브뤼셀 자유 대학교 (벨기에) | |
1995 | 비트카치 상 – 비평가상 | 폴란드 ITI 센터 | 폴란드 극장 해외 홍보 공로 |
1995 | 명예 학위 | 뤼미에르 리옹 2 대학교 (프랑스) | |
1994 | 문학 예술 훈장 | 프랑스 | |
1990 | 유럽 영화상 평생 공로상 | 유럽 영화상 | 평생 공로와 뛰어난 업적, 예술적 행보 |
1989 | 명예 학위 | 야기엘론 대학교 (폴란드) | |
1988 | 황금곰상 후보 | 제38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독일) | Les Possédés |
1987 | 교토상 (사상·예술 부문) | 이나모리 재단 (일본) | 과학, 기술 및 아이디어 발전 기여 공로 |
1986 | 루이지 피란델로 상 | 이탈리아 | 연극 분야 활동 및 업적 |
1985 | 헤르더 상 | 오스트리아 | 동유럽 및 남유럽 국가와의 문화 관계 강화 공헌 |
1983 | 세자르상 (감독상) | 프랑스 영화 예술 기술 아카데미 (프랑스) | 당통 |
1982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 | 프랑스 | |
1982 | 오나시스 재단 상 | 오나시스 재단 (그리스) | 인권과 존엄성 공로 |
1982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펠로십 상 | BAFTA (영국) | |
1982 | 세자르상 명예상 | 프랑스 영화 예술 기술 아카데미 (프랑스) | |
1981 | 황금종려상 | 1981년 칸 영화제 (프랑스) | 강철의 사나이 |
1981 |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 |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 강철의 사나이 |
1981 | 명예 학위 | 워싱턴 대학교 (미국) | |
1980 |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 (FIPRESCI) 상 |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 (스페인) | 오케스트라 지휘자 |
1980 | 바스크 문화 협회 상 |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 (스페인) | 오케스트라 지휘자 |
1979 | 황금사자상 | 제6회 그디니아 영화제 (폴란드) | 빌코의 하녀들 |
1979 | 에큐메니컬 배심원상 | 칸 국제 영화제 (프랑스) | 무마취 |
1979 | 평생 공로상 | 라 로셸 국제 영화제 (프랑스) | |
1979 | 성 키릴 및 메토디우스 훈장 | 불가리아 | 폴란드-불가리아 문화 협력 발전 기여 |
1979 |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 |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 빌코의 하녀들 |
1978 | 황금사자상 | 제5회 그디니아 영화제 (폴란드) | 무마취 |
1978 | 심사위원상 및 감독상 | 제18회 카르타헤나 영화제 (콜롬비아) | 약속의 땅 |
1978 | 루키노 비스콘티 상 | 다비드 디 도나텔로 상 (이탈리아) | |
1976 | 언론인상 | 제3회 브뤼셀 국제 영화제 (벨기에) | 약속의 땅 |
1976 | 황금 스파이크상 | 바야돌리드 영화제 (스페인) | 약속의 땅 |
1975 | 황금상 | 제9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소련) | 약속의 땅 |
1975 |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 |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 약속의 땅 |
1973 | 은조개상 |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 (스페인) | 결혼 연출 공로 |
1964 | 폴란드 재건 훈장 장교 훈장 | 폴란드 | |
1959 | 심사위원상 및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 (FIPRESCI) 상 | 베니스 영화제 (이탈리아) | 재와 다이아몬드 |
1959 | 폴란드 재건 훈장 기사 훈장 | 폴란드 | |
1957 | 특별 심사위원상 | 칸 영화제 (프랑스) | 채널 |
안제이 바이다 묘소
4. 작품 목록
(내용 없음)
4. 1. 영화


- 세대 Pokoleniepol (1955년)
- 지하수도 Kanałpol (1957년)
- 재와 다이아몬드 Popiół i diamentpol (1958년)
- 로트나 Lotnapol (1959년)
- 밤의 종말에 Niewinni czarodziejepol (1960년)
- 삼손 Samsonpol (1961년)
- 시베리아의 맥베스 부인 Powiatowa lady Makbetpol (1962년)
- 재 Popiołypol (1965년)
- Gate to Paradiseeng (1968년)
- 모두 상품 Wszystko na sprzedażpol (1969년)
- 파리 잡이 종이 Polowanie na muchypol (1969년)
- 전투 후의 풍경 Krajobraz po bitwiepol (1970년)
- 자작나무 숲 Brzezinapol (1970년)
- 결혼 Weselepol (1973년)
- 약속의 땅 Ziemia obiecanapol (1975년)
- 대리석 인간 Człowiek z marmurupol (1977년)
- 마취 없음 Bez znieczuleniapol (1978년)
- 빌코의 딸들 Panny z Wilkapol (1979년)
- 더 컨덕터 Dyrygentpol (1980년)
- 철의 사나이 Człowiek z żelazapol (1981년)
- 당통 Dantonfra (1983년)
- 독일의 사랑 Un amour en allemagnefra (1983년)
- 사랑의 기록 Kronika wypadków miłosnychpol (1986년)
- 악령 Les possédesfra (1988년)
- 코르착 Korczakpol (1990년)
- 독수리의 반지 Pierścionek z orłem w koroniepol (1992년)
- 나스타샤 Nastasjapol (1994년)
- 성주간 Wielki Tydzieńpol (1995년)
- Panna Niktpol (1996년)
- 판 타데우시 Pan Tadeuszpol (1999년)
- Zemstapol (2002년)
- 카틴 Katyńpol (2007년)
- 창포 Tatarakpol (2009년)
- 바웬사, 희망의 인간 Wałęsa. Człowiek z nadzieipol (2013년)
- 잔상 Powidokipol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