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다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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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다바 왕조는 스스로를 고대 야다바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데바기리의 야다바라고 불리기도 했던 왕조이다. '세우나'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졌으며, 13세기에 데칸 지역에서 번성했다. 야다바 왕조는 마하라슈트라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다가, 통치 말기에는 마라티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9세기경 봉신으로 시작하여, 12세기 후반 찰루키아 왕조의 쇠퇴를 틈타 독립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13세기 심하나 2세 치세에 최대 영토를 확보했으나, 1294년 알라웃딘 할지에게 수도 데바기리가 공격받고, 이후 할지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317년 할지 왕조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야다바 왕조는 마라티어 문학을 발전시켰으며, 곤데슈와르 사원과 같은 건축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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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다바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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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일반 명칭 | 세우나 (야다바) 왕조 |
| 공용 명칭 | 세우나 (야다바) 왕조 |
| 존속 기간 | 1187년 - 1317년 |
| 이전 국가 | 칼라추리스 오브 칼랴니 |
| 이전 국가 | 서찰루키아 제국 |
| 후임 국가 | 할지 왕조(델리 술탄국) |
| 수도 | 데바기리 |
| 공용어 | 칸나다어 |
| 공용어 | 산스크리트어 |
| 공용어 | 마라티어 |
| 종교 | 힌두교 |
| 위치 | 인도 |
| 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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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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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역사 | |
| 건국 시기 | 기원전 860년경 |
| 멸망 시기 | 1317년 |
| 통치자 | |
| 주요 통치자 | 빌라마 5세 |
| 재위 기간 | 1173년 - 1192년 |
| 마지막 통치자 | 하라팔라데바 |
| 재위 기간 | 1313년 - 1317년 |
2. 어원
스스로를 고대 야다바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이 왕조의 통치자들은 때때로 '데바기리의 야다바'라고 불린다.[32] 그러나 실제 이름은 '세우나' 또는 '세부나'였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물론이고, 동시대 주변 왕국들과 제국(호이살라, 카카티야, 서찰루키아)의 비문 역시 '세우나'라고 기록했다. 이 이름은 아마도 그들의 두번째 통치자였던 '세우나찬드라'에게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야다바 왕조의 기원은 불확실하며,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32] 이들은 스스로 푸라나에 기록된 전설적인 영웅 야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마투라에서 드바라카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32] 자이나교 전설에 따르면, 왕조 창시자인 드리드하프라하라의 어머니를 드바라카를 파괴한 큰 화재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드바라카와의 연관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32]
역사적으로 확인된 야다바 왕조의 초기 통치자는 드리다프라하라(재위: 860~880년)이며, 그는 찬드라디타푸라(오늘날 찬도르)를 세웠다고 전해진다.[34]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우나찬드라(재위: 880~900년)의 이름을 따서 야다바 왕조는 세우나밤샤(IAST: Seuṇa-vaṃśa)라고 불렸고, 영토는 '세우나데샤(Seuna-desha)'라고 불렸다.[35][34]
'세부나(Sevuna)' 또는 '세우나(Seuna)'라는 명칭은 1894년 영국의 학자 존 페이스풀 플리트의 저서 『봄베이 주 칸나다 지역의 왕조들』에서 소개되었는데, 그는 이 책에 야다바 왕조의 가장 초기 역사적인 시기부터 1317년 무슬림 정복에 의해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해놓았다.[33]
3. 기원
일부 학자들은 야다바 왕조가 칸나다어를 사용하는 민족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32] 초기 영토는 오늘날의 마하라슈트라주 지역에 위치했으며,[32] 마라티어는 14세기에야 비문에 주된 언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32]
4. 역사
세나찬드라의 후계자들인 다디야파, 빌라마 1세, 라주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36][37] 다음 통치자 반두기는 라슈트라쿠타 황실과 결혼하여 가문의 지위를 높였다. 그의 아들 빌라마 2세는 칼랴니 찰루키아 통치자 타일라파 2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36]
이후 베수기 2세와 빌라마 4세의 통치 기간인 10년 동안, 야다바 왕조는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통치자는 세우나찬드라 2세였는데, 그는 야다바 기록에 따르면 가문의 운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세우나찬드라 2세는 1052년에 발견된 데오랄리 비문에 따르면 1050년경에 즉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재위 시기에 찰루키아에서는 내전이 벌어졌다. 세우나찬드라 2세는 비크라마디티야 6세를 지원했고, 그가 승리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마하만달레쉬바라(Maha-mandaleshvara)'라는 칭호를 받았다.[38] 그의 아들 아이람마데바(재위: 1085~1105년)가 그의 뒤를 이었다.[39]
아이람마데바는 그의 형제 심하나 1세(재위: 1105~1120년)에 의해 계승되었다.[40] 안야네리에 있는 1142년 비문은 '세우나찬드라'라는 인물이 통치하였다고 기록했지만, 헤마드리의 기록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음으로 알려진 통치자 말루기(재위: 1145~1160년)는 찰루키아 황제 타일라파 3세의 충실한 봉신이었다. 말루기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장남 아마라-강게야였으며, 이후 그의 아들 아마라-말루기가 뒤따라서 즉위했다. 아마라-말루기와의 관계를 알 수 없는 그 다음 통치자 칼리야-발랄라는 아마도 찬탈자였을 것이다. 그는 1175년 경에 빌라마 5세에 의해 계승되었다.[41]
1175년 빌라마 5세가 즉위할 당시, 야다바 왕조의 명목상 상위 군주였던 칼랴니의 찰루키아인들은 호이살라 왕국과 칼라추리 왕조와 같은 옛 봉신국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44] 이후 찰루키아의 광대한 영토는 야다바 왕조, 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에 의해 카베리강과 나르마다강을 기준으로 각각 분할점령되었다. 1187년경 빌라마 5세는 데바기리를 건설하였고, 이곳은 나중에 야다바 왕조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22][34]
1180년대 후반, 발랄라 2세는 야다바 왕조에 대항하는 군사 원정을 시작했는데, 이는 성공적이어서 소라투르에서 빌라마 5세는 호이살라에게 패배했다.[47] 야다바 왕조는 이전 20년 동안 야다바-호이살라 국경을 형성했던 말라프라바강과 크리슈나강 이북으로 쫒겨났다.[47]
자이투기는 1194년경 카카티야 왕조를 공격하여 그들이 야다바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29]
심하나는 1200년[36] 또는 1210년경[37]에 왕위를 계승했으며, 야다바 왕조에서 가장 훌륭한 통치자로 여겨진다.[37] 그의 치세에 야다바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아마도 북쪽으로는 나르마다강에서 남쪽으로는 퉁가바드라강까지,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에서 동쪽으로는 오늘날 텔랑가나 서부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다.[37]
심하나의 손자 크리슈나(칸나라)는 델리 술탄국의 침공으로 약해진 말와 왕국을 공격했다. 크리슈나는 또한 바겔라 왕조가 지배하던 구자라트 왕국을 침공했지만, 양 측 모두 승리를 주장하는 등 그 결과가 불분명하다.[37]
크리슈나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마하데바는 콘칸 북부 실라하라 왕조의 슈메슈바라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37] 그는 또한 남부의 호이살라 왕국을 침략했으나 이 역시 호이살라 왕 나라심하 2세에 의해 격퇴되었다.[37]
마하데바는 그의 아들 암마나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시 암마나는 1270년까지의 짧은 통치 이후 크리슈나의 아들 라마찬드라에 의해 퇴위되었다.[37] 라마찬드라는 재위 전반기 동안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라마찬드라의 푸루쇼타마푸리 명문에 따르면 그는 야다바 왕조의 북동쪽 영토를 확장했다. 우선 그는 바즈라카라(아마도 오늘날의 바이라카라)와 반다라의 통치자들을 복속시켰으며,[37] 후칼라추리 왕조의 영토로 진군하여 옛 칼라추리 수도 트리푸리(오늘날 자발푸르 근처의 테와르)를 점령했다.
1296년, 델리 술탄국의 알라 웃딘 할지가 데바기리를 기습하여 라마찬드라를 굴복시켰다.[41] 라마찬드라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델리 술탄국의 봉신이 되었다.
라마찬드라의 후계자 심하나 3세는 델리 술탄국에 저항했으나 1313년 말리크 카푸르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43]
1317년, 심하나 3세의 후계자 하라팔라데바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쿠트브 웃딘 무바라크 샤에게 진압되고 처형당하며 왕조가 멸망했다.[30]
4. 1. 봉신국 시대
역사적으로 확인된 야다바 왕조의 초기 통치자는 드리다프라하라(재위: 860~880년)이며, 그는 찬드라디타푸라(오늘날 찬도르)를 세웠다고 전해진다.[34] 그는 프라티하라와 라슈트라쿠타 사이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칸데시 지역 사람들을 보호하여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다.[34]
드리다프라하라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우나찬드라(재위: 880~900년)의 이름을 따서 야다바 왕조는 세우나밤샤(IAST: Seuṇa-vaṃśa)라고 불렸고, 영토는 '세우나데샤(Seuna-desha)'라고 불렸다.[35][34] 그는 라슈트라쿠타를 도와 북쪽의 파라마라 왕조에 대항했으며, 이후 라슈트라쿠타의 봉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세우나푸라(오늘날 신나르)를 건설했다.[34]
세나찬드라의 후계자들인 다디야파, 빌라마 1세, 라주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36][37] 다음 통치자 반두기는 라슈트라쿠타 황실과 결혼하여 가문의 지위를 높였다. 그는 라슈트라쿠타 황제 크리슈나 3세의 조카인 보히바야와 결혼했다. 반두기는 크리슈나 황제의 군사 원정에 동행하여 가문의 영지가 늘어났을 수도 있다.[37]
다음 통치자인 다디야사(재위: 970~985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37] 그의 아들 빌라마 2세는 라슈트라쿠타를 무너뜨리고 데칸을 지배한 칼랴니 찰루키아 통치자 타일라파 2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는 파라마라 왕 문자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6] 빌라마 2세는 베수기 1세(재위: 1005~1025년)에 의해 계승되었고, 베수기 1세는 구자라트 찰루키아 영주의 딸인 나일라데비와 결혼했다. 베수기 1세의 후계자 빌라마 3세는 칼라스 버드룩 보조금 비문으로 존재가 확인된다.[38] 그는 바사이(바세인) 비문에서 확인되듯이 찰루키아 황제 자야심하 2세의 딸인 아발라데바와 결혼했으며, 그의 조부와 마찬가지로 찰루키아 군대가 말와 왕 보자에 맞설 때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36][38]
이후 베수기 2세와 빌라마 4세의 통치 기간인 10년 동안, 야다바 왕조는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통치자는 세우나찬드라 2세였는데, 그는 야다바 기록에 따르면 '비슈누가 바라하의 화신으로서 지구의 운을 회복시킨 것'처럼 가문의 운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세우나찬드라 2세는 1052년에 발견된 데오랄리 비문에 따르면 1050년경에 즉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재위 시기에 찰루키아에서는 소메슈바라 2세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세우나찬드라 2세는 후자를 지원했고, 그가 승리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마하만달레쉬바라(Maha-mandaleshvara)'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칸데쉬를 포함한 여러 봉건국들을 거느리게 되었다.[38] 그의 아들 아이람마데바(재위: 1085~1105년)가 그의 뒤를 이었다.[39]
아이람마데바는 그의 형제 심하나 1세(재위: 1105~1120년)에 의해 계승되었다.[40] 야다바 기록에 따르면, 심하나 1세는 그의 군주였던 비크라마디티야 6세에게 카르푸라 지역의 코끼리를 바침으로써 '카르푸라 브라타(Karpura-vrata)' 의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124년에 제작된 비문에는 그가 팔리얀다(오늘날 파란다)의 4000개 주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39] 안야네리에 있는 1142년 비문은 '세우나찬드라'라는 인물이 통치하였다고 기록했지만, 헤마드리의 기록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역사가 R.G. 반다르카르는 이 '세우나찬드라'가 야다바 가문의 하위 봉신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41]
다음으로 알려진 통치자 말루기(재위: 1145~1160년)는 찰루키아 황제 타일라파 3세의 충실한 봉신이었는데, 그의 명으로 장군 다다와, 다다의 아들 마히드하라는 찰루키아에 대항하는 반항적인 칼라추리 통치자 비할라 2세와 싸웠다. 그는 파르나케타(오늘날 아콜라 지역의 파트케드)를 점령함으로써 가문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야다바 기록은 그가 웃칼라 왕의 코끼리들을 사로잡았다고 주장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39] 말루기는 카카티야 왕조를 급습했으나, 이것은 그에게 아무런 영토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41] 말루기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장남 아마라-강게야였으며, 이후 그의 아들 아마라-말루기가 뒤따라서 즉위했다. 아마라-말루기와의 관계를 알 수 없는 그 다음 통치자 칼리야-발랄라는 아마도 찬탈자였을 것이다. 그는 1175년 경에 빌라마 5세에 의해 계승되었다.[41]
1175년 빌라마 5세가 즉위할 당시, 야다바 왕조의 명목상 상위 군주였던 칼야니의 찰루키아인들은 호이살라 왕국과 칼라추리 왕조와 같은 옛 봉신국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44] 빌라마는 이 틈을 타서 북부 구자라트 왕국과 말와 왕국을 급습했지만, 영토를 확장시키지는 못했다. 차울루키아의 봉신이었던 차하마나 왕조 통치자 켈하나는 그를 강제로 퇴각시켰다.[45] 그 무렵 호이살라 왕국의 발랄라 2세는 수도 칼랴니를 함락시키고, 찰루키아의 마지막 군주였던 소메슈바라 4세를 축출했다.[46]
이후 찰루키아의 광대한 영토는 야다바 왕조, 호이살라 왕조, 카카티야 왕조에 의해 카베리강과 나르마다강을 기준으로 각각 분할점령되었다.
1187년경 빌라마 5세는 발랄라 2세가 이끄는 호이살라인들에게 퇴각을 강요했으며, 옛 찰루키아 수도 칼랴니를 장악했고,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했다.[46] 그 후 그는 가공할만한 천연 요새인 데바기리를 건설하였고, 이곳은 나중에 야다바 왕조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22][34]
1180년대 후반, 발랄라 2세는 야다바 왕조에 대항하는 군사 원정을 시작했는데, 이는 성공적이어서 소라투르에서 빌라마 5세는 호이살라에게 패배했다.[47] 야다바 왕조는 이전 20년 동안 야다바-호이살라 국경을 형성했던 말라프라바강과 크리슈나강 이북으로 쫒겨났다.[47]
4. 2. 패권국으로의 부상
भिल्लमmr 5세(재위: 1175~1191년)는 서찰루키아가 호이살라 왕국과 칼라추리 왕조 등 옛 봉신국들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독립했다.[21] 그는 북부 구자라트 왕국과 말와 왕국을 급습했으나 영토 확장은 실패했고, 차하마나 왕조 통치자 켈하나에게 격퇴당했다.[21] 한편, 호이살라 왕국의 발랄라 2세는 수도 칼랴니를 함락시키고 찰루키아의 마지막 군주 소메슈바라 4세를 축출했다.[21]
이후 찰루키아의 영토는 카베리강과 나르마다강을 기준으로 야다바, 호이살라, 카카티야 왕조에 의해 분할되었다. 1187년경 빌라마 5세는 발랄라 2세를 격퇴하고 옛 찰루키아 수도 칼랴니를 장악하여 황제를 칭했다.[21] 그는 데바기리를 건설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34]
1180년대 후반, 발랄라 2세는 야다바 왕조에 대한 군사 원정을 개시하여 소라투르에서 빌라마 5세를 패배시켰다.[21] 야다바 왕조는 말라프라바강과 크리슈나강 이북으로 밀려났다.[21]
4. 3. 제국의 확장
자이투기는 1194년경 카카티야 왕조를 공격하여 그들이 야다바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29]
심하나는 1200년[36] 또는 1210년경[37]에 왕위를 계승했으며, 야다바 왕조에서 가장 훌륭한 통치자로 여겨진다.[37] 그의 치세에 야다바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아마도 북쪽으로는 나르마다강에서 남쪽으로는 퉁가바드라강까지,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에서 동쪽으로는 오늘날 텔랑가나 서부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다.[37] 그는 판디아 왕국과 전쟁 중이던 호이살라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하여 그들의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37] 이 과정에서 과거 호이살라의 종주권을 인정했던 사운다티의 라타 왕조가 그의 봉신이 되어 야다바의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37] 1215년, 심하나는 북쪽의 파라마라 왕조를 성공적으로 침략했다. 헤마드리에 따르면 이 침략으로 파라마라 왕 아르주나바르만이 사망했지만, 이 주장의 진실성은 의심스럽다.[37] 1216년경, 심하나는 주권을 주장하던 콜하푸르의 실라하라 왕 보자 2세를 물리쳤다. 이 승리로 수도 콜하푸르를 포함한 실라하라 왕조 영토 전역이 야다바 왕조에 합병되었다.[37]
1220년, 심하나는 구자라트의 차울루키아, 파라마라, 야다바 사이에서 충성을 바꾸던 라타 지역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37] 야다바 장군 크홀쉬바라는 그곳의 통치자 심하를 죽이고 라타를 점령했으며,[37] 심하나는 심하의 아들 샨카를 새로운 통치자로 임명했다.[37] 얼마 후, 차울루키아 장군 라바나프라사다가 라타를 침공하여 캄바트 항구를 점령했다. 샨카는 심하나의 지원을 받아 차울루키가 장악한 영토를 두 번 공격했지만, 후퇴해야만 했다.[37] 차울루키아-야다바 사이의 갈등은 1232년에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종식되었다.[37] 1240년대에 라바나프라사다의 손자 비살라데바가 차울루키아 왕조로부터 권력을 찬탈하고 바겔라 왕조를 건국했다. 심하나는 다시 군대를 모아 구자라트로 쳐들어갔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야다바 장군 라마(크홀쉬바라의 아들)가 전투에서 사망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37]
몇몇 봉신들은 계속해서 야다바 왕조와 호이살라 왕국 사이에서 충성을 옮겨다녔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독립을 주장했다. 심하나의 장군 비차나는 라타 왕조, 다르와드의 구타 왕조, 한갈의 카담바 왕조, 고아의 카담바 왕조 등 여러 봉신들을 제압했다.[37] 카카티야 왕조의 가나파티 역시 그 중 하나로 몇 년 동안 야다바 왕조의 봉신으로서 섬겼으나, 심하나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가나파티는 야다바 왕조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므로 심하나의 치세 동안 두 왕조 사이에 큰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37]
심하나의 손자 크리슈나(칸나라)는 델리 술탄국의 침공으로 약해진 말와 왕국을 공격했다. 그는 1250년 이전에 말와 왕을 한번 물리쳤지만, 이 승리로 영토를 합병하지는 못했다. 크리슈나는 또한 바겔라 왕조가 지배하던 구자라트 왕국을 침공했지만, 양 측 모두 승리를 주장하는 등 그 결과가 불분명하다.[37] 이후 벌어진 호이살라와의 전쟁 또한 마찬가지로 두 왕조 다 승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정확한 결과를 알지 못한다.[37]
크리슈나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마하데바는 콘칸 북부 실라하라 왕조의 슈메슈바라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37] 이후 그는 카카티야 왕조에서 여왕 루드라마데비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난 틈을 타 카카티야 동부를 침입했지만,[37] 이는 격퇴된 것으로 보인다.[37] 그는 또한 남부의 호이살라 왕국을 침략했으나 이 역시 호이살라 왕 나라심하 2세에 의해 격퇴되었다.[37] 실패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카담바계 봉신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반란은 1268년경 그의 장군 발리게 데바에 의해 진압되었다.[37]
마하데바는 그의 아들 암마나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시 암마나는 1270년까지의 짧은 통치 이후 크리슈나의 아들 라마찬드라에 의해 퇴위되었다.[37] 라마찬드라는 재위 전반기 동안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1270년, 라마찬드라는 파라마라 왕조의 내분으로 약해진 북부의 말와 왕국을 침공하여 파라마라 군대를 손쉽게 격파했다.[37] 그는 북서쪽의 구자라트 왕국 역시 공격했는데, 양 측 모두 승리를 주장하여 결과는 불분명하다.[37] 1275년, 그는 장군 티카마에게 강력한 군대를 주어 남부의 호이살라 왕국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티카마는 침공한 뒤 많은 약탈을 일삼았지만, 결국 1276년에 반격을 받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37] 라마찬드라는 라이추르를 포함한 그의 영토 일부를 카카티야 왕조에게 빼앗기기도 했다.[37]
라마찬드라의 푸루쇼타마푸리 명문에 따르면 그는 야다바 왕조의 북동쪽 영토를 확장했다. 우선 그는 바즈라카라(아마도 오늘날의 바이라카라)와 반다라의 통치자들을 복속시켰으며,[37] 후칼라추리 왕조의 영토로 진군하여 옛 칼라추리 수도 트리푸리(오늘날 자발푸르 근처의 테와르)를 점령했다. 그는 또한 바라나시에 신전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델리 술탄국이 북인도의 가하다발라 왕조를 침공하면서 발생한 혼란을 틈타 야다바군이 바라나시를 2~3년 동안 점령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37] 이후 그는 콘칸과 상가메슈와르에서 일어난 봉신들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37]
4. 4. 멸망
1296년, 델리 술탄국의 알라 웃딘 할지가 데바기리를 기습하여 라마찬드라를 굴복시켰다.[41] 라마찬드라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델리 술탄국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고, 1307년 알라 웃 딘은 말리크 카푸르가 이끄는 대군을 보내 데바기리를 함락시켰다.[32] 라마찬드라는 델리로 압송되었으나,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왕으로 복귀했다.
라마찬드라의 후계자 심하나 3세는 델리 술탄국에 저항했으나 1313년 말리크 카푸르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43]
1317년, 심하나 3세의 후계자 하라팔라데바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쿠트브 웃딘 무바라크 샤에게 진압되고 처형당하며 왕조가 멸망했다.[30] 이후 야다바 왕조의 영토는 할지 왕조에게 완전히 합병되었다.
5. 역대 통치자
또는 1191~1210년경
또는 1210~1246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