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야르무크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르무크 전투는 636년, 동로마 제국과 라시둔 칼리파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시리아 레반트 지역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전투 중 가장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받는다. 배경은 비잔틴-사산 전쟁의 종결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의 부상이며, 동로마 제국은 시리아를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전투는 6일간 진행되었으며,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동전을 통해 승리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동로마 제국은 시리아를 상실하고, 이집트 또한 무슬림 세력에게 정복당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야르무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야르무크 전투 전장 이미지.
요르단 방면에서 바라본 고대 전장
전투명야르무크 전투
일부무슬림의 시리아 정복
동로마-아랍 전쟁
날짜636년 8월 15일 – 20일
장소야르무크강 인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점령 골란 고원의 삼중 경계
좌표coord|32.8141|35.9548|region:IT_type:event|display=inline,title
결과라시둔 칼리파국의 승리
영토 변경레반트 지역이 라시둔 칼리파국에 점령됨
교전 세력
교전국 1동로마 제국
가산 왕국
타누흐족
교전국 2라시둔 칼리파국
지휘관 및 지도자
동로마 제국헤라클리우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음)
테오도로스 트리티리오스
바한
자발라 이븐 알아이함
페르시아인 니케타스
부치나토르 (카나티르)
그레고리
라시둔 칼리파국우마르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
암르 이븐 알-아스
주바이르 이븐 알-아왐
말리크 알-아슈타르
슈라흐빌 이븐 하사나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프얀
알-카카 이븐 암르 알-타미미
암루 빈 마디 야크리브
이야드 이븐 가넘
디라르 빈 알-아즈와르
압드 알-라흐만 이븐 아비 바크르
우바다 이븐 알-사미트
병력 규모
라시둔 칼리파국15,000–40,000 (현대 추정), 24,000–40,000 (아랍 자료)
동로마 제국20,000–40,000 (현대 추정), 100,000–200,000 (아랍 자료), 140,000 (로마 자료)
사상자 규모
라시둔 칼리파국4,000명 사망
동로마 제국40,000명 사망 (현대 추정), 70,000–120,000명 사망 (아랍 자료)

2. 배경

610년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 중, 헤라클리우스가 포카스를 몰아내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7] 사산 제국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고, 611년에는 시리아를 휩쓸고 아나톨리아로 진격하여 카이사레아 마자카(현재 카이세리)를 점령했다. 612년,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냈지만, 613년 시리아에서 페르시아에 맞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가 크게 패했다.[8] 이후 10년 동안 페르시아군은 팔레스타인이집트를 정복했고, 헤라클리우스는 반격을 준비하며 군대를 재건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공세를 시작했다.[9] 코카서스와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와 그 동맹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627년 겨울 메소포타미아에서 공세를 시작하여 니네베 전투에서 크게 이겨 크테시폰을 위협했다. 호스로 2세는 아들 카바드 2세가 일으킨 쿠데타로 폐위되고 살해되었다.[10] 카바드 2세는 강화를 요청하여 비잔틴 제국이 점령한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629년 헤라클리우스는 예루살렘에서 웅장한 의식을 거행하여 진정한 십자가를 회복했다.[11]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무함마드630년까지 이슬람을 설교하며 아라비아 대부분을 단일 정치 권력으로 통합했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아부 바크르 즉위 직후 여러 아랍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632~633년 리다 전쟁에서 반군을 진압하고 메디나를 중심으로 아라비아를 통일했다.[12]

Rashidun Caliphate's invasion of the Levant를 자세히 보여주는 지도
레반트 지역에 대한 라시둔 칼리프국의 침략을 자세히 보여주는 지도


아부 바크르는 반군을 진압한 후 이라크를 시작으로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사산 페르시아를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이라크를 정복했다. 칼리드가 이라크에 거점을 마련하자, 아부 바크르는 634년 2월 시리아 침공을 명령했다.[13] 무슬림의 시리아 침략은 비잔틴의 방어에 맞서 힘보다는 전략을 활용한 신중한 군사 작전이었다.[14]

그러나 무슬림 군대는 비잔틴의 대응에 비해 규모가 작았고, 지휘관들은 증원을 요청했다. 칼리드는 이라크에서 증원군과 함께 시리아로 파견되어 침공을 이끌었다. 7월, 비잔틴군은 아즈나다인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다마스쿠스는 9월에 함락되었고, 파흘 전투에서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주요 수비대가 격파되었다.[15]

634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한 후, 우마르는 시리아 확장을 계속했다.[16] 칼리드는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로 교체되었다. 팔레스타인 남부를 확보한 무슬림군은 무역로를 따라 진격했고, 티베리아스와 바알벡을 큰 어려움 없이 함락했으며, 에메사는 636년 초에 정복되었다. 이후 무슬림군은 레반트 전역으로 정복을 계속했다.[17]

2. 1. 동로마-사산 전쟁 (602년-628년)

610년,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 중, 포카스를 몰아내고 헤라클리우스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7] 한편, 사산 제국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고, 611년에는 시리아를 휩쓸고 아나톨리아로 진격하여 카이사레아 마자카(현재 카이세리, 튀르키예)를 점령했다. 612년,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613년에는 시리아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8] 그 후 10년 동안 페르시아군은 팔레스타인이집트를 정복했다. 한편, 헤라클리우스는 반격을 준비하고 군대를 재건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마침내 공세를 시작했다.[9] 코카서스와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와 그 동맹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627년 겨울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여 니네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써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위협했다. 일련의 재앙으로 신뢰를 잃은 호스로 2세는 아들 카바드 2세가 이끄는 쿠데타로 폐위되고 살해되었다.[10] 카바드 2세는 즉시 강화를 요청하여 비잔틴 제국이 점령한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헤라클리우스는 629년에 예루살렘에서 웅장한 의식을 거행하여 진정한 십자가를 회복했다.[11]

2. 2. 아랍의 성장과 이슬람의 발흥

630년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설교하며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단일 정치 권력 하에 성공적으로 병합했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로 선택되어 그의 정치적 후계자가 되었다. 아부 바크르 즉위 직후 여러 아랍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632~633년 리다 전쟁에서 반군을 진압하고 메디나의 칼리프 중앙 권력 아래 아라비아를 통일했다.[12]

반군 진압 후, 아부 바크르는 정복 전쟁을 시작하여 이라크를 공격했다.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사산 페르시아를 상대로 성공적인 작전을 통해 이라크를 정복했다. 칼리드가 이라크에 거점을 마련하자, 아부 바크르는 634년 2월 시리아 침공을 명령했다.[13] 무슬림의 시리아 침략은 전략을 활용하여 비잔틴의 방어에 대처하는 신중하게 계획된 군사 작전이었다.[14]

그러나 무슬림 군대는 비잔틴의 대응에 비해 규모가 작았고, 지휘관들은 증원을 요청했다. 칼리드는 이라크에서 증원군과 함께 시리아로 파견되어 침공을 이끌었다. 7월, 비잔틴군은 아즈나다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마스쿠스는 9월에 함락되었고, 파흘 전투에서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주요 수비대가 격파되었다.[15]

634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한 후, 우마르는 칼리프국의 시리아 확장을 계속했다.[16] 칼리드는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로 교체되었다. 팔레스타인 남부를 확보한 무슬림군은 무역로를 따라 진격했고, 티베리아스와 바알벡은 큰 어려움 없이 함락되었으며, 에메사는 636년 초에 정복되었다. 이후 무슬림군은 레반트 전역으로 정복을 계속했다.[17]

2. 3. 정통 칼리파국의 시리아 침공



아부 바크르는 칼리프로 즉위한 직후, 여러 아랍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메디나를 중심으로 아라비아를 통일했다. (632~633년 리다 전쟁)[12] 반란이 진압되자 아부 바크르는 이라크를 시작으로 정복 전쟁을 개시했다.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의 활약으로 이라크를 정복한 후, 634년 2월 아부 바크르는 시리아 침공을 명령했다.[13]

무슬림의 시리아 침략은 잘 계획된 군사 작전으로, 비잔틴 제국의 방어에 맞서 힘보다는 전략을 활용했다.[14] 그러나 무슬림 군대는 비잔틴 제국에 대응하기에는 규모가 작았고, 지휘관들은 증원을 요청했다. 칼리드는 이라크에서 증원군과 함께 시리아로 파견되어 침공을 이끌었다. 7월, 비잔틴군은 아즈나다인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9월에는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었고, 파흘 전투에서 팔레스타인의 주요 수비대가 격파되었다.[15]

634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우마르는 시리아 확장을 계속하려 했다.[16] 칼리드가 이끌었던 이전 작전들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는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로 교체되었다. 팔레스타인 남부를 확보한 무슬림군은 무역로를 따라 진격했고, 티베리아스와 바알벡을 큰 어려움 없이 함락시켰으며, 636년 초에는 에메사를 정복했다. 이후 무슬림군은 레반트 전역으로 정복을 계속했다.[17]

3. 동로마 제국의 반격 준비

헤라클리우스는 일련의 패배에 놀라 잃어버린 시리아 지역을 되찾기 위해 반격을 준비했다.[18][19] 비잔틴 제국의 반격 준비는 635년 말부터 시작되었고, 636년 5월까지 헤라클리우스는 시리아 북부의 안티오크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21]

map of Muslim and Byzantine troop movement prior to yarmuk
야르무크 전투 전 무슬림과 비잔틴 군대의 움직임. 현대 국가 표시.


집결된 비잔틴 군대는 슬라브족, 프랑크족,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기독교 아랍인 등으로 구성되었다.[22] 이 병력은 5개의 군대로 편성되었으며, 공동 지휘관은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였다. 아르메니아인이자 에메사(현 홈스)의 전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바한[23]이 전체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24] 그의 지휘 아래 순수한 아르메니아 군대를 두었다. 슬라브 왕자인 부치나토르(카나티르)는 슬라브족을 지휘했고, 가산 왕조 아랍의 왕인 자발라 이븐 알-아이함은 기독교 아랍 군대를 지휘했다. 나머지 병력은 모두 유럽인으로, 그레고리와 다이르얀 휘하에 배치되었다.[25][26]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크에서 직접 작전을 감독했다. 비잔틴 출처는 페르시아 장군 샤흐르바라즈의 아들 니케타스를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언급하지만, 그가 어떤 군대를 지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7]

무슬림 군대가 지리적으로 분할되자 헤라클리우스는 그 상황을 이용해 공격을 계획했다. 그는 단일 정면 전투를 벌이는 대신 중앙 위치를 활용하고, 무슬림 군단이 병력을 통합하기 전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각개 격파하려 했다. 무슬림을 퇴각시키거나 무슬림 군대를 따로 파괴함으로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전략을 실현하려 했다.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3세 휘하의 증원군이 카이사레아로 보내졌는데, 아마도 야지드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25] 비잔틴 제국 군대는 636년 6월 중순에 안티오크와 시리아 북부를 떠났다.

비잔틴 제국 군대의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지휘관부대 구성역할 및 이동 경로
자발라경무장 기독교 아랍인하마를 거쳐 알레포에서 에메사로 진군, 에메사에서 무슬림 군대 주력을 붙잡음.
다이르얀유럽인해안과 알레포 도로 사이에서 측면 기동, 서쪽에서 에메사에 접근하여 무슬림의 왼쪽 측면 공격.
그레고리유럽인메소포타미아를 통해 북동쪽에서 에메사에 접근, 무슬림의 오른쪽 측면 공격.
카나티르슬라브족해안 도로를 따라 베이루트 점령, 서쪽에서 약하게 방어된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에메사의 주요 무슬림 군대 차단.
바한아르메니아인예비군, 하마를 거쳐 에메사에 접근.[28]


4. 양측의 전략

할리드 이븐 왈리드는 비잔틴 제국군의 각개격파 전략에 맞서, 분산된 병력을 야르무크 강 인근에 집결시켰다.[29][30] 이 지역은 기병 돌격이 용이하고 우마르의 지원군 도착이 쉬워 비잔틴 군에 대항하기 유리했다.[31] 또한 후퇴 시 라시둔의 거점인 나지드와 가깝다는 이점도 있었다. 할리드는 지즈야 (공물)를 지불한 사람들에게 반환하라는 지시도 내렸다.[32]

그러나 자비야에 집결한 무슬림군은 친 비잔틴계 가산 왕조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또한 카이사레아에 주둔한 강력한 비잔틴 군대가 후방을 공격할 수 있다는 위험도 있었다. 할리드의 조언에 따라 무슬림군은 다라와 데이르 아이유브로 후퇴하여 야르무크 협곡과 하라 용암 평원 사이의 간격을 덮었고,[29] 야르무크 평원 동부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이곳은 강력한 방어 위치였으며, 무슬림군과 비잔틴군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33] 이 과정에서 할리드의 정예 경무장 기병대와 비잔틴 선봉대 간의 소규모 교전을 제외하고는 교전이 없었다.[34]

계곡 건너편에 야르무크 전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약 8마일 떨어진 요르단에 있다.


map detailing the battle field of Yarmouk
야르무크 전장 지도


전투는 현재 요르단과 시리아의 국경에 위치한 골란 고원의 남동쪽, 갈릴리 호수의 동쪽에 있는 요르단의 하우란 평원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라카트 계곡 동쪽 평원에서 벌어졌으며, 이 계곡은 요르단 강의 지류인 야르무크 강과 남쪽에서 합류한다. 계곡은 매우 가파른 둑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에는 자비야 길이 있고 동쪽에는 아즈라 언덕이 있었지만, 실제 전장 밖이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지대는 ''텔 알 주마''였는데, 이곳에 집중된 이슬람 군대는 야르무크 평원을 잘 볼 수 있었다. 636년에 전장의 서쪽에 있는 계곡은 ''아인 다카르'' 근처에 있는 로마 다리(''지스르-우르-루카드'')를 통해 건널 수 있었다.[49][35] 야르무크 평원은 두 군대를 모두 부양할 수 있는 충분한 물 공급과 목초지를 가지고 있었고, 기병 기동에 매우 적합했다.[36][37]

초기 기록 대부분은 무슬림 군대의 규모를 36,000명에서 40,000명 사이, 비잔틴 군대의 규모를 60,000명에서 70,000명 사이로 추정한다. 현대의 추정치는 다양하며, 비잔틴 군대는 최대 40,000명,[38] 또는 15,000명에서 20,000명으로 추정한다.[39] 정통 칼리파조 군대는 15,000명에서 40,000명 사이이며,[40] 대부분 36,000명 정도로 추정한다.[38] 원본 기록은 대부분 아랍 출처이며, 비잔틴 군대와 그 동맹군이 무슬림 아랍군보다 2:1의 수적으로 우세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전투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여, 하루 또는 6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40]

아부 우바이다는 군사 회의 중에 무슬림 군대의 지휘권을 할리드에게 넘겼다.[41] 할리드는 군대를 36개의 보병 연대와 4개의 기병 연대로 재편성했고, 그의 정예 기병대인 이동 경비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군대는 좁고 방어적인 ''타비아'' 대형으로 조직되었다.[42] 군대는 서쪽을 향해 12km 전선으로 정렬되었으며, 좌익은 야르무크 강 남쪽에, 우익은 ''텔 알 줌마'' 고지 북쪽의 자비야 길에 있었다.[43] 부대 간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었다. 군대의 중앙은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좌측 중앙)와 슈라빌 빈 하사나(우측 중앙)가 지휘했다. 좌익은 야지드, 우익은 암르 이븐 알-아스가 지휘했다.[41]

중앙, 좌익 및 우익에는 기병 연대가 배치되어 비잔틴 군에게 밀릴 경우 반격을 위한 예비대로 사용되었다. 중앙 뒤에는 할리드가 직접 지휘하는 이동 경비대가 있었다. 할리드가 바쁘면 다라 이븐 알-아즈와르가 이동 경비대를 지휘했다. 할리드는 기동 예비대를 반복적으로 결정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41] 할리드는 비잔틴 군을 감시하기 위해 여러 정찰병을 보냈다.[44] 7월 말, 바한은 경무장한 기독교-아랍 군대와 함께 자발라를 정찰대로 보냈지만, 그들은 이동 경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소규모 교전 이후 한 달 동안 아무런 교전도 벌어지지 않았다.[45]

무슬림 군대의 무장과 장비는 다음과 같았다. 투구는 사산 제국의 은색 투구와 유사한 금박 투구를 포함했다. 쇄자갑옷은 투구에서 뻗어 나오거나 쇄자 갑옷 두건 형태로 얼굴, 목, 뺨을 보호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두꺼운 가죽 샌들과 로마식 샌들 부츠 또한 초기 무슬림 병사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46] 갑옷으로는 경화된 가죽 비늘 갑옷이나 판갑사슬갑옷이 사용되었다. 보병은 기병보다 더 무거운 갑옷을 착용했다. 크고 나무나 등나무로 만든 방패가 사용되었다. 긴 자루의 창이 사용되었는데, 보병 창은 2.5m 길이였고 기병 창은 최대 5.5m 길이였다. 로마의 글라디우스와 사산의 장검과 같은 짧은 보병 검이 사용되었고, 장검은 일반적으로 기병이 휴대했다. 칼은 어깨걸이 칼집에 걸어 사용했다. 활은 무장하지 않았을 때 약 2m 길이였으며, 유명한 잉글랜드 장궁과 크기가 비슷했다. 전통적인 아라비아 활의 최대 유효 사거리는 약 150m였다. 초기 무슬림 궁수들은 기병 궁수 연대의 기동성은 없었지만, 가볍고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기병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47]

야르무크 평원에 무슬림 군대가 주둔한 지 며칠 후, 가벼운 무장을 한 자발라의 가산 왕조가 선두에 서고, 비잔틴 군대는 와디-우르-루카드 북쪽에 강력하게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며 전진했다.[48] 비잔틴 군대의 우익은 야르무크 강 근처 평원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고, 좌익은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자비야 언덕이 시작되기 직전으로 비교적 노출되어 있었다. 바한은 동쪽을 향해 제국 군대를 배치했는데, 전선은 약 13km 길이였다.[49] 우익은 그레고리가, 좌익은 카나티르가 지휘했다. 중앙은 다이르잔의 군대와 바한의 아르메니아 군대로 구성되었으며, 두 군대 모두 다이르잔의 총 지휘를 받았다. 비잔틴 정규 중기병인 카타프락토이는 네 군대에 동일하게 분산되었고, 각 군대는 보병을 최전선에 배치하고 기병을 후방 예비대로 배치했다. 바한은 자발라의 기독교 아랍인들을 말과 낙타에 태워 산병 부대로 배치하여,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주력 부대를 가렸다.[50]

초기 이슬람 자료에 따르면, 그레고리의 군대는 죽음을 맹세한 보병들을 연결하기 위해 사슬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비잔틴 군대가 그리스-로마식 테스투도 군사 대형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49] 비잔틴 기병은 ''스파티온''(spathion)이라고 불리는 긴 검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또한 ''콘타리온''(kontarion)이라고 불리는 가벼운 나무 과, 안장이나 허리띠에 매달린 40개의 화살이 든 활(''토크사리온''(toxarion))을 소지했을 것이다.[51] ''스쿠타토이''(skoutatoi)라고 불리는 중보병은 짧은 검과 짧은 창을 소지했다. 경무장한 비잔틴 군과 궁병은 작은 방패, 등 뒤 어깨에 걸친 활과 화살통을 휴대했다. 기병 갑옷은 메일 코프가 달린 호버크와 펜던트가 달린 헬멧으로 구성되었다. 보병 또한 호버크, 헬멧, 다리 갑옷을 유사하게 갖추었다. 가벼운 판갑과 비늘 갑옷 또한 사용되었다.[52]

4. 1. 정통 칼리파국의 전략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동로마군의 각개격파 전략에 맞서, 분산된 병력을 야르무크 강 인근에 집결시켰다.[118][119] 야르무크 강과 협곡을 이용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기동성을 활용한 반격 기회를 노렸다. 점령지 주민들에게 지즈야를 반환하여 민심을 얻으려 했다.[120] 이는 점령지의 이탈을 막고, 안정적인 통치를 위한 조치였다.

할리드는 군대를 다라아(시리아와 요르단 국경)까지 철수시키고 야르무크 협곡과 하라 용암 지대의 틈새를 막는 듯이 포진하여 야르무크 평야 동쪽에 숙영지를 설치했다.[118]

개전 전에 아부 우바이다는 지휘권을 할리드에게 넘겼다.[121] 총사령관이 된 할리드는 군을 36개의 보병 부대와 4개의 기병대로 재편성하고, 직속 정예 기병 부대를 유격대로 삼았다. 서쪽으로 배치된 아랍군의 전선 폭은 12km에 달했으며, 가장 좌익은 야르무크강 남쪽에 배치되었다. 중앙 좌익에는 아부 우바이다, 우익에는 슈라흐빌, 좌익에는 야지드, 우익에는 알 아스가 지휘[121]하고, 각 부대 후방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중앙 최후방에는 할리드 직속의 친위 기병대가 대기했다.

아랍군의 무장은 다음과 같았다.

  • 무슬림 군 병사들은 철모를 쓰고, 목과 얼굴까지 덮는 사슬 갑옷을 입었다.
  • 초기 무슬림 병사들은 로마식 가죽 샌들과 유사한 샌들을 애용했으며,[122] 가죽 갑옷이나 판갑, 사슬 갑옷이 사용되었다.
  • 보병은 기병보다 더 무장했으며, 셔츠형 사슬 갑옷과 대형 갈대 방패, 장창으로 무장했다.
  • 보병의 창은 약 2.5m였고, 기병의 창은 긴 것은 5.5m에 달했다.
  • 칼은 로마의 글라디우스와 같은 단검과 사산식 장검이 사용되었으며, 어깨끈의 장식띠에 매달렸다.
  • 활의 길이는 유명한 잉글랜드장궁과 유사한 2m였고, 사정거리는 약 150m였다.
  • 초기 무슬림의 궁병은 도보였지만, 기병에게 매우 효과적이었다.[123]

4. 2. 동로마 제국의 전략

635년, 사산 왕조의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와 동맹을 맺은 동로마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지휘 아래 레반트와 이라크 방면에서 협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636년 5월에 헤라클리우스가 반격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국내 문제로 인해 발을 맞출 수 없었고, 결국 카디시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페르시아 서부를 잃게 된다.[109]

동로마군은 635년 5월 안티오키아에 대군을 집결시켰다.[110] 동로마 병사, 슬라브인, 프랑크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기독교도로 구성된 이 군대는 5개 군단으로 나뉘었으며,[111] 헤라클리우스의 동생 Theodore Trithyrius|테오도로스 트리투리오스영어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실제로는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바한이 전군을 지휘했고,[113] 슬라브인 왕자 부키나토르는 슬라브 병사를, 가산 왕 자발라 이븐 알 아이함은 기독교도 아랍 병사를 이끌었다. 나머지 유럽 병사는 그리고리우스 등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114][115]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전군을 감독했다. 동로마 측 사료에서는 샤흐르바라즈의 아들 니케타스도 동로마군에 참가했다고 한다.[116]

정통 칼리파 세력의 아랍군은 팔레스타인의 암르 이븐 알 아스, 요르단의 Sharhabeel ibn Hasana|슈라후빌영어, 다마스쿠스의 Yazid ibn Abi Sufyan|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얀영어, 호무스의 아부 우바이다 4개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분산된 아랍군을 각개격파하려 했다. Caesarea|카이사리아영어를 포위 중인 야지드 군을 묶어두기 위해, 포위된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3세에게 증원을 보내고,[114] 동로마군은 636년 6월에 시리아 북부를 출격했다. 동로마군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 가산 왕이 이끄는 경무장의 기독교도 아랍 병사는 알레포에서 호무스로 직진하여 아랍군 주력과 정면으로 맞선다.
  • 그리고리우스가 이끄는 유럽 병사는 메소포타미아를 돌아서 북동쪽에서 호무스로 향해 아랍군의 우측면을 친다.
  • 그 외의 유럽 병사는 지중해 동해안과 알레포 사이에 가도를 남하하여 호무스로 서쪽에서 진격해 아랍군의 좌측면을 친다.
  • 부키나토르가 이끄는 슬라브군은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베이루트를 점령하고, 방어가 허술한 다마스쿠스를 서쪽에서 공격하여 호무스의 아랍군 주력을 고립시킨다.
  • 바한의 아르메니아 군은 유격대로 하마를 경유하여 호무스로 진군한다.[117]


아랍군은 포로를 통해 동로마 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할리드의 진언에 따라 병력을 다라아 (시리아와 요르단 국경)까지 철수시켰다. 야르무크 협곡과 하라 용암 지대의 틈새를 막는 듯이 포진하여 야르무크 평야 동쪽에 숙영지를 설치했다.[118]

양군이 대치한 곳은 골란 고원의 남동쪽, 갈릴리 호의 동쪽 부근 일대였다. 전장의 서쪽에는 야르무크 강의 지류가 흘러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었으며, 남쪽 또한 야르무크 강의 협곡이었다. 아랍군은 야르무크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에 진을 쳤다.

동로마 군은 바한의 지휘 아래 동쪽으로 배치되었고, 평원 남단의 야르무크 강을 따라 배치된 우익에서 이집트까지 통하는 로마 가도가 지나는 평원 북부의 좌익까지 양 날개의 폭은 13km에 달했다.[124] 우익은 그레고리우스, 좌익은 부키나토르가 지휘했고, 중앙은 유럽 병사와 아르메니아 병사가 지켰다. 동로마 제국의 중기병은 양 날개, 중앙 모두 균등하게 분배되었으며, 각 군단 모두 보병이 전면에, 기병이 후방에 배치되었다. 말과 낙타를 탄 가산 왕국의 기독교 아랍 병사들은 동로마 군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전위로 배치되었다.[125]

그러나 대규모 병력 동원으로 인해 동로마 군의 병참에는 극심한 부담이 가해졌고,[126] 현지 주민과의 충돌도 끊이지 않았다. 안티오키아의 궁정에 있던 헤라클리우스는 지휘관들에게 회전에 나서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바한이 이를 따르지 않자 비난을 받았다. 전장의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고, 바한, 트리툴리우스, 부키나토르 등의 사이는 험악했으며,[127] 전장 주변의 지리에 밝은 가산 왕 자발라는 거의 무시되었다. 그리스 병사, 아르메니아 병사, 아랍 병사 사이에도 불신감이 감돌았으며, 칼케돈파 (그리스 정교회)와 비칼케돈파 정교회 (단성론파) 간의 오랜 논쟁도 영향을 미쳤다.

동로마 기병은 ''스파티온''이라고 불리는 장검과, ''콘타리온''이라고 불리는 경량 목재 랜스로 무장했다. 활도 휴대하고 있었으며, 화살통에는 화살을 40개 넣고, 안장이나 벨트에 걸었다.[128] 중장 보병의 무기는 단검과 짧은 이었으며, 경보병과 궁병은 소형 방패를 사용했다.

5. 전장

اليرموكar 전투는 현재 요르단시리아 국경에 위치한 고지대인 골란 고원의 바로 남동쪽, 갈릴리 호수의 동쪽에 있는 요르단의 하우란 평원에서 벌어졌다.[33] 야르무크 강의 깊은 협곡이 서쪽과 남쪽을 둘러싸고 있었고, 북쪽은 완만한 평원이었다.[53] 정통 칼리파군은 야르무크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에 진을 쳤다.

map detailing the respective troop deployment before the battle.
양군의 포진.

6. 양측 군대의 배치

아랍군과 동로마군은 각각 병력을 좌익, 좌익 중앙, 우익 중앙, 우익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했고, 양측의 배치는 서로 정반대였다. 즉, 아랍군의 우익은 동로마군의 좌익과 마주보는 식이었다.[56]

헤라클리우스는 사산 왕조와 협력하여 정통 칼리프 세력에게 공세를 가하려던 중이었기에, 이라크에서 야즈데게르드 3세가 준비를 마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한에게 외교 협상이 끝날 때까지는 전투를 시작하지 말라고 명령했다.[129] 바한은 그레고리우스와 자바라에게 협상을 맡겼고, 개전 직전에는 적장 할리드를 초청하여 마지막까지 협상을 계속했지만 헛수고로 끝났다. 결국 이러한 협상에 1개월을 소비했다.[124]

한편, 이라크의 카디시야에 군대를 전개했던 칼리프 우마르는 사산 왕조의 대군 앞에서 페르시아 궁정과 평화 협상을 시작하여 페르시아 전선에서 시간을 벌었고,[130] 그 사이에 예멘에서 6,000명의 원군을 할리드에게 보냈다.[124] 이 원군에는 무함마드와 직접 행동을 함께 한 1,000명의 동료(사하바)가 포함되었으며, 그 중에는 이슬람 최초의 전투로 알려진 바드르 전투에 참전한 고참병 100명도 있었다. 쿠라이시족의 중요 인물과 Hind bint Utbah|힌드 빈트 우트바영어(무아위야의 어머니)와 같은 여성도 있었다.

우마르는 페르시아 전선에서 사산 왕조군과, 시리아 전선에서 동로마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먼저 동로마군과의 결착을 서둘렀다. 그는 시리아 전선에 정예병을 보냈고, 원군은 일부러 소부대로 나누어 조금씩 전장에 도착하도록 하여 아랍군의 원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위장했다. 이러한 계략은 후에 카디시야 전투에서도 행해졌지만, 이로 인해 아랍군이 너무 강대해지기 전에 결착을 지으려던 동로마군을 결전에 끌어들였다.[131]

6. 1. 정통 칼리파군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군대를 재편성하여 36개 보병 연대와 4개 기병 연대로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정예 기병대를 예비대로 두고 필요할 때 측면 공격에 활용하도록 했다.[121]

할리드는 각 부대의 지휘관을 다음과 같이 임명했다.

부대지휘관
중앙 좌익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
중앙 우익슈라흐빌
우익야지드
좌익암르 이븐 알 아스[121]



각 부대 후방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중앙 최후방에는 할리드 직속의 친위 기병대가 대기했다.

6. 2. 동로마군

비잔티움 제국 기병은 '스파티온'이라고 불리는 긴 검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또한 '콘타리온'이라고 불리는 가벼운 나무 과, 안장이나 허리띠에 매달린 40개의 화살이 든 활('토크사리온')을 소지했을 것이다.[51] '스쿠타토이'라고 불리는 중보병은 짧은 검과 짧은 창을 소지했다. 경무장한 비잔티움 군과 궁병은 작은 방패, 등 뒤 어깨에 걸친 활과 화살통을 휴대했다. 기병 갑옷은 메일 코프가 달린 호버크와 펜던트가 달린 헬멧으로 구성되었는데, 펜던트는 천으로 안감 처리된 목 보호대와 프린지 및 뺨 보호대로 이루어졌다. 보병 또한 호버크, 헬멧, 다리 갑옷을 유사하게 갖추었다. 가벼운 판갑과 비늘 갑옷 또한 사용되었다.[52]

바한은 동로마 군을 동쪽으로 배치했고, 평원 남단의 야르무크 강을 따라 배치된 우익에서 이집트까지 통하는 로마 가도가 지나는 평원 북부의 좌익까지 양 날개의 폭은 13킬로미터에 달했다.[124] 우익은 그레고리우스, 좌익은 부키나토르가 지휘했고, 중앙은 유럽 병사와 아르메니아 병사가 굳건히 지켰다. 동로마 제국의 중기병으로 알려진 카타프락토이는 양 날개와 중앙에 모두 균등하게 분배되었으며, 각 군단은 보병이 전면에, 기병이 후방에 배치되었다. 말과 낙타를 탄 가산 왕국의 기독교 아랍 병사들은 동로마 군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전위로 배치되었다.[125]

7. 전투의 경과

8월 17일, 전투 3일차에 바한은 이전의 실패를 통해 각 무슬림 측면을 공격했지만, 초반 성공 이후 병력이 밀려났다. 특히 지휘관 중 한 명을 잃은 것이 큰 타격이었다.[71]

바한은 무슬림 군대를 특정 지점에서 격파하기 위해 덜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무슬림 좌익의 험준한 지형에 비해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비교적 노출된 우익을 압박하기로 결정했다. 무슬림 우익 중앙과 콰나티르의 슬라브족이 지키는 우익 사이를 분리하여 따로 격파하려 했다.[71]

'''1단계:''' 비잔틴 군은 무슬림 우익과 우익 중앙을 공격하며 전투를 재개했다.[71] 초기 공격을 막아낸 후, 무슬림 우익이 후퇴했고, 뒤이어 우익 중앙도 후퇴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재정비하여 반격을 준비했다.[65]

'''2단계:''' 비잔틴 군이 무슬림 우익에 집중하는 것을 본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기동 부대와 무슬림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공격을 시작했다. 할리드는 비잔틴 좌익 중앙의 우익을, 무슬림 우익 중앙의 기병 예비대는 비잔틴 좌익 중앙의 좌익을 공격했다. 무슬림 우익 기병대는 비잔틴 좌익의 좌익을 공격했다.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다. 할리드의 시기적절한 측면 공격으로 무슬림이 다시 승리했고, 해 질 무렵 비잔틴 군은 전투 시작 지점으로 밀려났다.[65]

3일차, 1단계. 비잔틴 좌익과 중앙이 각각의 무슬림 부대를 밀어내는 모습.


3일차, 2단계. 칼리드의 기동 부대가 비잔틴 좌익 중앙의 측면을 공격하는 모습.


8월 18일, 4일차 전투에서'''1단계:''' 바한은 무슬림 우익에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전날의 작전을 유지하기로 했다. 카나티르는 슬라브족 두 군대를 이끌고 무슬림 우익과 우중앙을 공격했고, 자발라가 이끄는 아르메니아인과 기독교 아랍인들이 지원했다. 무슬림 우익과 우중앙은 다시 후퇴했다.[72] 할리드는 다시 기동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광범위한 전선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을 우려하여 아부 우바이다와 야지드에게 좌중앙과 좌익에서 각각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 공격은 비잔틴 전선을 지연시키고 제국 군대의 전반적인 진격을 막았다.[73]

'''2단계:''' 할리드는 기동 부대를 둘로 나누어 비잔틴 좌중앙의 측면을 공격했고, 무슬림 우중앙의 보병은 정면에서 공격했다. 삼면 포위 기동으로 비잔틴 군은 후퇴했다. 무슬림 우익은 보병의 정면 공격과 기병 예비대의 비잔틴 좌익 북쪽 측면 공격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할리드의 삼면 공격으로 비잔틴 좌중앙이 후퇴하면서 남쪽 측면이 노출된 비잔틴 좌익도 후퇴했다.[72]

4일차, 1단계. 비잔틴 좌익 중앙과 날개 부대가 무슬림 부대를 밀어내는 모습.


4일차, 2단계. 할리드의 기동 부대를 이용한 비잔틴 좌익 중앙으로의 측면 공격.


할리드와 그의 기동 부대가 오후 내내 아르메니아 전선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쪽 상황은 악화되었다.[74] 비잔틴 기마 궁병들이 아부 우바이다와 야지드의 부대를 강렬한 사격에 노출시켜 그들이 비잔틴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게 했다. 많은 무슬림 병사들이 비잔틴 화살에 시력을 잃었고, 이날은 "잃어버린 눈의 날"로 알려지게 되었다.[75] 아부 수피안도 이날 눈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75] 무슬림 군대는 익리마 빈 아비 자할이 이끄는 한 연대를 제외하고 후퇴했다. 익리마는 기병 400명과 함께 비잔틴 전선을 공격하여 무슬림의 후퇴를 엄호했고, 다른 군대는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기 위해 반격을 조직했다. 익리마의 모든 병사들은 그날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할리드의 어린 시절 친구인 익리마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저녁 늦게 사망했다.[74]

8월 19일, 전투 5일째, 바한은 4일 동안 공격을 감행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기동 경비대의 측면 반격으로 인해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바한은 새로운 협상을 위해 며칠 동안 휴전을 요청하는 사절을 무슬림 진영에 보냈지만,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했다.[76]

지금까지 무슬림 군대는 대체로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지만, 비잔틴 군이 더 이상 전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공세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병력을 재편성했다. 모든 기병 연대는 기동 경비대를 핵심으로 하는 강력한 기동 부대로 묶였다. 기병대의 총 병력은 약 8,000명의 기병이었다.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비잔틴 군을 포위하여 모든 탈출로를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서쪽의 가파른 협곡이 있는 세 개의 자연 방어선, 즉 서쪽의 ''와디-우르-루카드'', 남쪽의 ''와디 알-야르무크'', 동쪽의 ''와디 알-알라''가 있었고, 북쪽 경로는 무슬림 기병대가 차단할 예정이었다.[77]

서쪽의 200m 깊이의 와디-우르-라카드 협곡을 가로지르는 몇몇 통로가 있었는데,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통로는 아인 알-다카르의 다리였다.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밤에 다르르를 기병 500명과 함께 보내 그 다리를 확보하게 했다. 다르르는 비잔틴 군의 북쪽 측면을 돌아서 다리를 점령했는데, 이 기동은 다음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78]

5일째 병력 배치도. 할리드는 결정적인 측면 공격을 위해 모든 기병대를 집결시켰다.


8월 20일,[79] 6일차 전투에서 할리드는 비잔틴 기병대를 완전히 전장에서 몰아내어 제국 군대의 주력을 이루는 보병대가 기병 지원 없이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간단하지만 과감한 공격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그는 비잔틴 군대의 좌익을 돌파하여 서쪽의 계곡으로 몰아넣는 결연한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세웠다.[78]

'''1단계:''' 할리드는 비잔틴 전선에 대한 전면 공격을 명령하고 그의 기병대를 이끌고 비잔틴 좌익을 돌파했다. 그의 기병대의 일부는 비잔틴 좌익 기병대와 교전했고, 나머지는 비잔틴 좌익 보병대의 후방을 공격했다. 한편, 무슬림 우익은 정면에서 공격했다. 이중 공격을 받자 비잔틴 좌익은 후퇴하여 붕괴되었고, 비잔틴 좌익 중앙으로 물러나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다.[76] 남은 무슬림 기병대는 비잔틴 좌익 기병대가 무슬림 기병대의 나머지 절반에 의해 정면에서 붙잡혀 있는 동안 그들의 후방을 공격하여 전장에서 북쪽으로 몰아냈다. 무슬림 우익 보병대는 비잔틴 좌익 중앙의 좌익을 공격했고, 무슬림 우익 중앙은 정면에서 공격했다.

'''2단계:''' 바한은 무슬림의 거대한 기병 기동을 알아차리고 그의 기병대에게 함께 집결하라고 명령했지만, 너무 늦었다. 바한이 분산된 중기병대를 조직하기도 전에, 할리드는 그의 기병대를 돌려 집중하고 있는 비잔틴 기병대를 공격하여 그들이 아직 대형을 갖추고 있는 동안 정면과 측면에서 공격했다. 혼란스럽고 방향 감각을 잃은 비잔틴 중기병대는 곧 북쪽으로 몰락하고 흩어졌으며, 보병대는 운명에 맡겨졌다.[80]

'''3단계:''' 비잔틴 기병대가 완전히 격파되자 할리드는 무슬림 보병대의 이중 공격을 이미 받고 있던 비잔틴 좌익 중앙으로 방향을 돌렸다. 비잔틴 좌익 중앙은 할리드의 기병대에 의해 후방에서 공격받았고, 결국 붕괴되었다.[80]

'''4단계:''' 비잔틴 좌익 중앙이 후퇴하면서 비잔틴의 전반적인 후퇴가 시작되었다. 할리드는 그의 기병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북쪽 탈출로를 막았다. 비잔틴은 ''와디-우르-라카드''로 서쪽으로 후퇴했는데, 그곳에는 ''아인 알 다카르''에 깊은 협곡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었다.[74] 다라르는 전날 밤 할리드의 계획의 일환으로 이미 다리를 점령했다. 500명의 기병대가 통로를 막았다. 이제 비잔틴은 사방에서 포위되었다.[76]

일부는 가파른 경사면에서 깊은 협곡으로 떨어졌고, 다른 사람들은 물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아래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도망치다가 살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병사들이 학살을 피해 탈출했다.[81] 무슬림은 전투에서 포로를 잡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추격전에서 몇 명을 사로잡았을 것이다.[82]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는 전장에서 사망했고,[83] 니케타스는 탈출하여 에메사에 도착했다. 자발라 이븐 알-아이함 또한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무슬림과 화해했지만, 곧 다시 비잔틴 궁정으로 망명했다.[84]

6일차, 1단계. 비잔틴 좌익에서 할리드의 측면 기동으로 비잔틴 좌익과 기병 부대가 궤멸되는 모습.


6일차, 2단계. 할리드의 양방향 공격으로 비잔틴 기병대를 공격하고, 무슬림 우익은 비잔틴 좌익 중앙을 측면 공격하는 모습.


6일차, 3단계. 할리드의 기병대가 비잔틴 기병대를 전장에서 몰아내고 비잔틴 좌익 중앙을 후방에서 공격하는 모습.


6일차, 4단계 및 마지막 단계. 비잔틴 군이 와디-우르-루카드로 전반적으로 후퇴하는 모습.

7. 1. 1일차

636년 8월 15일 새벽, 양군은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채 대치했다.[132] 동로마군 기사들이 일기토를 신청했고, 아랍 전사들이 이에 응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낮까지 이어진 일기토에서 아랍군이 우세했기 때문에, 바한은 동로마군 보병의 3분의 1로 공격을 가해 아랍군 전열의 약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병력과 무장에서 우세한 동로마 병사들의 공격은 노련한 아랍 전사들에게 통하지 않았다.[133] 바한은 남은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이날의 전투는 그리 격렬해지지 않은 채 해 질 녘에 양군은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7. 2. 2일차

바한이 이끄는 동로마군은 4일 동안 공격을 계속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기동 경비대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8월 19일 새벽, 바한은 협상을 위해 휴전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할리드는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76]

할리드는 비잔틴 군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공세로 전환하기로 결심하고 병력을 재편성했다. 모든 기병 연대를 묶어 기동 경비대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기병 부대를 만들었다. 이 기병대의 총 병력은 약 8,000명이었다. 할리드는 이들을 다음 날 공격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나머지 날은 별다른 사건 없이 지나갔다. 할리드는 비잔틴 군을 포위하고 탈출로를 차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서쪽에는 와디-우르-루카드, 남쪽에는 와디 알-야르무크, 동쪽에는 와디 알-알라 등 세 개의 자연적인 방어선이 있었고, 북쪽 경로는 무슬림 기병대가 막을 예정이었다.[77]

서쪽의 200m 깊이의 와디-우르-라카드 협곡에는 몇 개의 통로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아인 알-다카르의 다리였다. 할리드는 밤에 다르르에게 기병 500명을 주어 이 다리를 확보하도록 했다. 다르르는 비잔틴 군의 북쪽 측면을 돌아 다리를 점령했고, 이 작전은 다음 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78]

동로마군은 아랍군이 아침 기도를 하는 새벽 전에 기습 공격을 하려 했다. 바한의 계획은 동로마군 중앙이 아랍군 중앙을 공격하여 붙잡아 두는 동안 양쪽 측면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리드는 밤중에 강력한 초계선을 배치해 두었기 때문에 동로마군의 기습을 미리 감지하고 요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랍군은 중앙에서의 공격은 견뎌냈다. 그러나 아랍군 우익에 대한 슬라브 병사들의 공격은 거셌고, 아랍 병사들은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134]

할리드가 기병을 투입하여 우익은 어느 정도 버텼지만, 이번에는 좌익이 동로마군의 테스투도(Testudo, 거북이) 대형에 밀려 아랍 병사들이 숙영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숙영지에서는 힌드가 이끄는 아랍 여성들이 텐트를 해체하고 지주를 휘두르며 도망치는 병사들을 질책했고, 이에 아랍 전사들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아랍군 우익의 패주를 막은 할리드는 근위 기병대를 좌익으로 보내 동로마군 우익의 측면을 공격했다. 또한 근위 기병 일부를 부관 다랄에게 맡겨 동로마군 중앙을 공격하게 했다. 정면과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동로마군 우익은 후퇴했고, 해질 무렵 양군은 아침에 배치되었던 지점으로 돌아왔다. 동로마군 중앙은 큰 피해를 입었고 지휘관까지 전사하여 사기가 저하되었다. 반면 아랍군은 병력을 잃었지만, 할리드의 반격으로 태세를 정비하여 사기가 회복되었다.[135]

7. 3. 3일차

8월 17일, 전투 3일차에 동로마군은 정통 칼리파군 우익을 집중 공격하여 중앙에서 고립시키려 했다.[136] 맹공을 받은 정통 칼리파군 우익은 궤주하는 듯했으나, 숙영지의 여성들에게 질책을 받고 가까스로 버텼다. 할리드 빈 왈리드는 동로마군이 우익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근위 기병과 우익 기병으로 동로마군 좌익을 양쪽에서 협공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할리드가 적절한 시기에 기병을 투입한 덕분에 정통 칼리파군 우익은 붕괴를 면했고, 해 질 녘에는 동로마군을 밀어냈다.[134]

7. 4. 4일차

전날과 마찬가지로 바한은 부키나토르 휘하의 슬라브 병사, 아르메니아 병사, 가산 왕국의 기독교도 아랍 병사들을 시켜 정통 칼리파군 우익을 공격했고, 정통 칼리파군 우익은 다시 후퇴했다.[137] 할리드는 다시 친위 기병대를 이끌고 우익을 지원하는 동시에, 동로마 제국 전군에게 총공격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좌익의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와 야지드에게 각각 전면의 동로마군을 공격하게 했다. 할리드가 친위 기병대를 투입하여 동로마군 좌익의 측면을 공격했고, 아랍군 우익은 다시 동로마군의 맹공을 물리쳤다. 한편, 좌익은 동로마군의 궁기병에 의한 끊임없는 일제 사격으로 큰 손해를 입었다.[138]

7. 5. 5일차



동로마군은 4일 동안 공세를 계속했지만 아랍군을 돌파하지 못했고, 피해도 적지 않았다. 진용을 재정비하려던 바한은 5일째 이른 아침, 할리드에게 며칠간의 휴전을 제안했지만,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느낀 할리드는 이를 거절했다.[139] 지금까지 아랍군은 방어에만 전념해 왔지만, 동로마군이 적극성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할리드는 처음으로 공세를 걸기로 결정하고 군을 재편했다. 기병은 하나로 통합되었고, 할리드의 친위 기병이 그 중핵이 되었다. 이 기병 전력은 강력했으며, 병력은 8000명 정도가 되었다.

할리드는 기병 전력으로 동로마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전장은 삼면이 깎아지른 계곡으로 되어 있었고, 북쪽을 기병으로 막으면 도망갈 곳은 없었다.[140] 더욱이, 높이 200m의 절벽이 깎아지른 야르무크 강의 지류에 걸린 유일한 로마교를 확보하기 위해, 할리드는 부관 다라르에게 500기의 기병을 주어 보냈다. 다라르는 밤중에 동로마군 좌익의 북쪽을 우회하여 다리를 확보했다.

7. 6. 6일차



할리드는 증강된 아랍 기병으로 동로마 기병을 전장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보병을 기병 지원으로부터 격리시켜 포위 섬멸하는 전술을 펼쳤다. 할리드는 전군에 총공격을 명령하고, 자신은 휘하의 기병을 이끌고 동로마군 좌익 바깥쪽을 돌아갔다. 좌익의 기독교도 아랍인 경기병을 공격하여 전장 북쪽으로 몰아내는 동시에, 좌익의 보병을 후방에서 협공하자 동로마군 좌익은 붕괴되어 중앙으로 도주했고 중앙군도 동요했다. 동로마군 좌익을 괴멸시키자 아랍 기병은 남은 동로마 기병에게 공격을 가했다.[141]

바한은 아랍군 기병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자군 기병을 결집하려 했다. 그러자 할리드의 근위 기병이 덮쳐 분쇄했고, 아껴둔 카타프락토이는 동로마 보병을 버리고 전장 북쪽으로 도주했다.[141] 동로마 기병을 처리한 아랍 기병은 동로마군 좌익의 보병을 포위 섬멸했다.[141] 좌익이 괴멸되자 동로마군은 총붕괴되었다. 할리드는 전장 북쪽에 기병을 배치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적병을 계곡에 갇힌 삼각 지대로 몰아넣었다.

몰린 동로마군은 서쪽으로 달아났지만, 깎아지른 계곡의 유일한 다리는 다라르의 기병에게 막혀 있었다. 완전히 퇴로가 막힌 동로마군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강에 뛰어들어 도망치려다 휩쓸려 전군의 절반 가까이가 전사했다. 총사령관 테오도로스 트리투리오는 전사하고, 페르시아 왕자 니케타스는 홈스까지 간신히 도망쳤다. 가산 왕국의 자바라 왕도 전장에서 도망쳐, 나중에 한때 이슬람 세력에 속했지만, 곧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142]

8. 전투의 결과

야르무크 전투는 정통 칼리파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로 동로마 제국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고, 이슬람 세력은 중동 지역에서 급속히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147]

안티오키아에서 패전 소식을 들은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큰 충격을 받고 시리아를 포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145] 그는 패전의 충격으로 공수병에 걸렸다고 전해지며,[146]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때 부교를 놓았다고 한다.

639년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세력에 넘어갔고, 639년부터 642년까지 이집트는 알 아스가 이끄는 아랍군에게 정복당했다.[147]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하리드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119][144] 근위 기병을 이끌고 패잔병을 추격하여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아르메니아 왕자 바하네스를 죽였다.[143]

8. 1. 동로마 제국의 패인

동로마 제국이 야르무크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동로마 제국은 사산 제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진된 상태였다. 또한,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종교 정책으로 인한 종교적 분열도 제국의 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동로마군은 다국적 용병으로 구성되어 군대 내 결속력이 약했다. 반면, 이슬람 군대는 종교적 열정으로 뭉쳐 사기가 높았고, 기동성이 뛰어난 경기병을 적극 활용하여 동로마군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전투 당시 지휘관들의 판단 실수도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 동로마군 총사령관 바하네스는 소극적인 방어 전략을 고수하다가 이슬람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또한, 동로마군은 야르무크 강 근처의 좁은 협곡에 갇혀 이슬람군의 포위 공격에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야르무크 전투에서의 패배는 동로마 제국이 시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9. 평가

야르무크 전투는 세계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로 평가된다.[1]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기동전은 이슬람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동로마군은 지휘관 간의 불화, 민족 간의 갈등, 경직된 전술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1]

10. 각주

references[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

참조

[1] 서적
[2] 서적
[3] 간행물 Britannica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간행물 «Վահան» Armenian Academy of Sciences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37] 서적
[38] 간행물 The Battle of the Yarmūk: A Reconstruction https://www.jstor.or[...] 1985
[39] 서적
[40] 뉴스 On This Day: Arabs defeat the Byzantines at Battle of Yarmuk https://www.jpost.co[...] The Jerusalem Post 2024-06-10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웹사이트 Brief Biography of Malik al-Ashtar https://erfan.ir/eng[...] 2024-12-18
[59] 웹사이트 The Islamic Conquest of Syria https://archive.org/[...] 2016-03-20
[60] 서적
[61] 서적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66] 서적
[67] 서적
[68] 서적
[69] 서적
[70] 서적
[71] 서적
[72] 서적
[73] 서적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80] 서적
[81] 서적
[82] 서적
[83] 서적
[84] 서적
[85] 서적
[86] 서적
[87] 서적
[88] 서적
[89] 서적
[90] 서적
[91] 서적
[92] 서적
[93] 서적
[94] 서적
[95] 서적
[96] 서적
[97] 서적
[98] 서적
[99] 서적
[100] 서적
[101] 서적
[102] 서적
[103] 서적
[104] 서적
[105] 서적
[106] 서적
[107] 서적
[108] 서적
[109] 서적
[110] 서적
[111] 서적
[112] 간행물 "«Վահան»" Armenian Academy of Sciences
[113] 서적
[114] 서적
[115] 서적
[116] 서적
[117] 서적
[118] 서적
[119] 서적
[120] 서적
[121] 서적
[122] 서적
[123] 서적
[124] 서적
[125] 서적
[126] 서적
[127] 서적
[128] 서적
[129] 서적
[130] 서적
[131] 서적
[132] 서적
[133] 서적
[134] 서적
[135] 서적
[136] 서적
[137] 서적
[138] 서적
[139] 서적
[140] 서적
[141] Harvnb
[142] Harvnb
[143] Harvnb
[144] Harvnb
[145] Harvnb
[146] Harvnb
[147] Harvnb
[148] Harvnb
[149] Harvnb
[150] Harvnb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